재가승만고/재가승만고 3

丙, 藩胡說[1]

以上에서 在家僧의由來에 對한 諸說을 檢討紹介하는 便利上奴隸說, 僧侶說等으로 分立시켜, 各其그主要點을 紹介하엿거니와 當時의 社會的情勢로보아서 寺刹과軍隊는想像以上으로 密接한 關係下에 잇엇음으[2]로 이兩者를全然分離하여서 在家僧과의 關係를檢討함에는 너무나 無理가잇다고생각한다. 只今 여긔서 紹介檢討하려고하는 藩胡說을말하드래도 이在家僧의由來에對한 諸說의 大多數가 그種族問題에對하여서는 그見解가女眞族에 一致함에도 不拘하고 구태여 여긔서 藩胡說이라는 項目을設함은 蛇足의感이 不無할줄아나 檢討의順序上 그由來가奴隸關係에 잇지아니하고 또 僧侶關係에도 잇지아니한다고 假定한다면 이項目을設함은 全然無意味하지는아니할것이다. 于先 北路紀略에依하면—

『……或曰在家僧, 惟西北邊境有之, 舊之藩胡所住近處也…但以擁髮而居我境故謂之僧耳, 司敎之地, 宜有以變之也, 明川以南始有僧.』이라하엿으며 記錄을通하여서는 藩胡의奴隸 或은僧侶와의關係를 到底히把握할 餘地가없고 在家僧의 正體는 하마알아볼方途가 없다는感을준다. 따라서 學徒의興味는 더욱더욱眞劍味를 加하는것은 當然한歸結이라고 아니할수없다.

以上에서 在家僧의由來에 關한諸說을紹介檢討의便利上奴隸說, 僧侶說, 藩胡說로大別하여若干紹介한바잇엇거니와 畢竟 그正體를 究明하지못하엿다는것은 肯定하여야할事實이다. 그러나 다음의 記錄에依하여 그由來究明에 잇어서적지아니한 暗示를 얻을 것이다. 北塞紀略(孔州風土記條)에依하면

『山僧多在家, 挾妻食肉, 子孫繼襲爲僧』이라하엿고 北路紀略에依하면,

『僧皆在家, 娶[3]妻生子, 食肉飮酒, 謂之在家僧, 世襲爲僧…』이라하엿다. 따라서吾人은그由來卽그正體究明에잇어서更一步한感이 不無하나 依然五里霧中에서 헤메는感이적지아니하다. 그러나最後의注意할만한 記錄은 水原儒生禹夏永의著, 時務策中에보이는六鎭僧徒議의 記錄일것이다. 이說을以上의諸說과 아울러 考察한다면在家僧의 由來의 輪廓이 자못 鮮明해질것이라고 믿는다.

六鎭僧徒議에依하면,

『北路豆滿江沿邊六鎭 及三甲列邑 與彼界隔一衣帶而, 水狹灘淺, 間多[4]徒揭之處, 彼我人民, 因其採獵, 潛越往來之弊, 種種難禁, 況且逐年開市, 與彼通貨, 彼人之多年來往於市門者, 能爲我國之言, 對面酬酢, 少無差誤, 但其服着與我有異, 故能辨[5]爲彼人, 今所隱憂者, 彼若換着一白衲潛越我界, 混跡於本國僧徒則, 無以辨[6]別, 脫有僧俗中不逞之徒, 引入寺刹闌間販貨, 一過沿江之邑則, 雖遍行國中, 孰知其爲彼人也哉, 何況逐利興商彼我人情之所同一, 有邊禁之疎虞則, 潛機轉入固其勢也』라하여, 在家僧의 由來問題檢討上, 적지아니한 示唆를주는 記錄이라하겟다.

要컨대 現今北邊에群居하는 在家僧은 그種族問題에잇어서는 적어도 女眞遺族이라고보는 것이妥當하다고 믿으며 또 그들이 在家僧이라는 指稱을받으면서 一種特殊部落을 形成하게되기까지의 過程에對하여서는 速斷을不許하나 女眞族中의 逐利興商을 圖謀하는者가 邊境의僧侶와 結託하여 僧侶로 假裝하여入居하엿다는 事實에서 그由來를 찾을수없을가한다. 그러나 이在家僧의 由來問題는今後學者들의 檢討硏覈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到底히 速斷은못할것이다.



  1. 원문에는 藩說胡로 되어 있다.
  2. 원문에는 ‘므’로 되어 있다.
  3. 원문에는 聚로 되어 있다.
  4. 원문에는 有로 되어 있다.
  5. 원문에는 卞으로 되어 있다.
  6. 원문에는 卞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