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혁주 선생에게

5월 11일 밤에 쓰신 선생님의 친필은 오늘 반갑게 받았습니다. 묵직한 봉투이 매 처음에는 다소 의아한 생각으로 봉투를 뜯었사오나 의외에도 선생님께서 보내주시는 장문 편지이매 얼마나 기쁘고 반가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번 세번 거듭 읽었나이다.

선생님 매야(每夜) 10시에 주무시는 정한 시간임에도 불구하시고 그 밤이 깊도록 주무시지 않고 저의 졸작을 읽으셨다고요? 황공하옵니다. 이것은 저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지나치는 영광이옵니다. 더구나 피곤하신 몸으로 저의 부족한 작품을 일일이 평까지 하여주셨사오니 이 위에 더 죄송하며 기쁜 일이 있사오리까. 그러나 선생님, 습작에 지나지 않는 저의 작품을 가지시고 이렇게까지 과찬하여 주심에는 다소 불안함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미 보신 바와 같이 그 문장의 미숙함이며 구상의 미흡함이란 얼마나 유치합니까? 저의 얼굴이 붉어짐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선생님의 기대하시는 뜻에 어그러짐이 없는 작품을 쓰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선생님, 이 붓을 드오니 일만 가지 심회가 쓸어 나와서 무엇부터 먼저 써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문단에 관한 일이며 저 사사로이 묻고 싶은 일 등 태산 같사오나 짧은 지면에 어찌 다 여쭈오리까. 그러므로 후일 따로 이 묻기로 하옵고 여기에는 편집자의 의견을 맞추어 제가 선생님 작품에 대하여 느낀 바를 적어보고자 하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저의 지식이 천박하니 만큼 작품을 감상하는 안목조차 어리고 부족하오니 그리 아옵시고 미리 청하옵니다.

제가 선생님의 존함을 대하옵기는 선생님의 처녀작인 「아귀도(餓鬼道)」

가 『가이조우(改造[개조])』에 당선되었을 때이옵니다. 물론 누구라도 문학에 다소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서야 당시에 선생님의 영광스러운 당선에 감탄하지 않은 이가 몇 사람이나 되오리까. 저는 그때 신문에서 『가이 조우』광고를 보고 부랴부랴 『가이조우』를 사다가 「아귀도」부터 뒤져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절반도 채 읽지 못해서 저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하고 돌멩이로 머리를 몇 번 얻어맞은 듯해서 한참이나 멍하니 있다가는 계속해 읽고 읽었습니다. 제가 작품을 많이 읽지도 못하였지오마는 조선인의 것으로는 이만큼 박력 있고 무게 있는 작품을 대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며칠 동안은 심심하면 꺼내 읽고, 읽곤 하였습니다. 지금은 「아귀도」에 대한 기억이 희미합니다마는, 그러나 먹을 것이 없어서 나물을 뜯으러 산으로 갔다가 그 무시무시한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장면 같은 것은 아직도 머리에 남아 있습니다만 , 그러나 문장이며 구상 여하는 캄캄하옵니다.

그만큼 제가 어렸던 까닭이라고 깨닫습니다.

그 후 『쫓기는 사람들』은 책점에서 잠깐 보고 사다 보려고 했더니 그 이튿날인가 서점에 가보니 압수를 당하여 절취(切取)되었습디다. 저는 섭섭히 돌아오면서 서점에서 잠깐 본 기억을 더듬었습니다. 농촌의 처녀 총각이 우물 귀를 빙글빙글 돌면서 놀던 장면이 퍽도 저의 흥미를 돋워 주었으며 그들의 뒷일이 궁금하였습니다. 그 다음부터 선생님의 역작이 달을 계속하여 나오는 것만은 알고 있었습니다마는 제가 이 간도로 나오게 되면서부터는

『가이조우』를 자주 대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궁금히 지나는 동안에 선생님의 『권이라고 하는 사나이』라는 단행본이 나오고 또 에스페란토어로 번역이 되느니, 중국어로 번역이 되느니 하는 소식은 자주 들었습니다. 그리고 『동아일보』 지상으로 나타나는 『무지개』는 이삼십 회 가량은 읽었습니다만 부득이하여 그것마저 읽지 못하게 되어 선생님에 대한 저의 기억이 희미할 때 『분게이(文藝[문예])』에서 「장례식 밤에 일어난 일」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이 한 편이옵니다.

「장례식 밤에 일어난 일」. 이 작품을 대할 때 직감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모델 소설이 아닌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의 추측에 지나지 못하옵고…… 이 작품의 주요 목적은 박창규 씨와 이장길 노인 등 봉건적 인물들의 썩어진 이면을 폭로시킴과 동시에 관료계급의 추악한 뒷구멍을 은연중에 암시하는 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자본주의 말기에 있어서 그리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봉건적 유물에서 취재한 것은 대중적 효과는 비교적 적었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작품 전편이 물 샐 틈 없이 짜여진 데 대하여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작중인물들의 성격을 말해주는 간결한 대화에 있어서나 그들의 일거일동이 옆에서 보는 듯하고 그들의 말을 듣는 듯하옵니다. 예를 들면 박창규 씨가 맥주병을 쥐고 “건배 건배!” 하고 너털웃음을 웃는 것이라든지 이장길 노인의 모상(母喪)을 당하여 불려왔을 때에 그 대담무쌍한 인사로써 박창규 씨의 성격은 잘 나타났다고 봅니다.

특히 비굴한 행동으로 일관한 최우열의 인간됨에 있어서는 선생님께서 애쓰신 자취가 보입니다. 그리고 군데군데 심각한 묘사 등에 있어서는 실로 놀랍습니다.

…… 나는 그의 시체를 안치한 방이라는 것을 알고 움찔 놀랐다 ……

보통 작가 같으면 이러한 곳에서까지 주의하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상사로 인하여 작중인물들로 하여금 며칠 밤 새우게 하였으므로 작자의 감정까지도 둔해질 염려가 있는 까닭에 대개는 작중인물들의 감정을 죽이기 쉽습니다. 하나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세밀한 부분에서도 눈 하나 팔지 않고 작중인물을 생동하게 하신 점에 대하여는 무어라고 찬사를 올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요컨대 선생님께서 작품을 쓰실 때에 여하히 진지한 태도로써 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곳에서,

“…… 바보.”

나는 최우열의 취한 원숭이같은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 것보다는 어디에서 잘 셈인가.”

“잔다고? 하하……”

여기서 또한 생동하는 두 인간을 볼 수 있습니다.

작가가 작품을 쓸 때에 무엇보다도 먼저 필요한 것은 진지한 태도입니다.

그래서 묘사하고 표현하려는 온갖 대상물을 힘껏 관찰하고 힘껏 음미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옵니다.

…… 최우열은 오물을 나에게 뱉었다.

선생님 저는 이 장면을 읽으면서 최우열의 입김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비굴함이 이렇게 오장 속속들이 배였다고 얼핏 느껴지더이다. 이러한 예를 들자면 끝이 없겠기에 그만 하옵니다. 끝으로 이 노인 형제가 시체 다툼하는 싸움을 돌발시킨 것과 아울러 그 원인을 박창규 씨의 입을 빌어 토설하게 한 것은 선생님께서 얼마나 작가적 수완에 능하시다는 것을 말하여 줍니다. 그리고 문장에 있어서는 저의 편견인지 모르오나 『삼곡선(三曲線)』

이나 『무지개』에서 대하던 문장보다 훨씬 미끄럽고 빛나 보입니다. 너무 오래 실례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선생님 언젠가 「나의 포부」란 제하에 글을 쓰신 일이 계시지요? 아마…… 거기에서 좀더 노력하면 발자크를 따르지 못할 배 없으시다고 하신 기억이 아직도 제 머리에 남아 있습니다. 옳습니다! 과연 선생님께서는 미구에 선배들의 뒤를 따르게 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선생님 노력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조선의 고리끼가 되어주시며 그래서 쓸쓸한 우리 문단에 커다란 횃불이 되어주시옵소서.

선생님 지루하시지요 이 . 만주의 이야기나 해올릴까요. 그보다도 선생님께서 만난(萬難)을 물리치시고 만주에 한 번 나와 주세요. 여기에는 산더미 같은 산 재료가 선생님 같으신 어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꼭 나오세요. 그리하여 불후의 명작을 하나 낳아 놓으셔요.

끝으로 선생님의 건강을 빌면서 이만 하옵니다.

5월 26일

라이선스 편집

 

이 저작물은 저자가 사망한 지 50년이 넘었으므로, 저자가 사망한 후 50년(또는 그 이하)이 지나면 저작권이 소멸하는 국가에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주의
1929년에서 1977년 사이에 출판되었다면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인 저작에는 {{PD-1996}}를 사용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