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의 번역과 역자 문제
우리 나라 독서계에도 이제 번역의 시기가 내도하였다.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매행(買行)이 그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출판계에서는 이 요청에 응하여 온갖 부문에서 번역물의 간행이 입건(立件)되고 있다. 세계적인 최대 장편의 하나인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도 벌써 수처에서 간행이 경쟁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거니와 일전에는 출판 기관에서도 세계 문학 전집 전30권의 방대한 계획을 세우고 역자의 선정에까지 논의가 진전되었다가 난관인 것이 역자 문제이어서 모처럼 세웠던 이 전집 간행 계획은 아깝게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문장의 능력은 미준(未竣)하나 외국어가 능숙한 외국어 학자에게 맡기느냐 혹은 외국어는 능숙하지 못해도 문장의 능력이 충분한 현역 문인에게 맡기느냐 하는 문제에 들어가 외어(外語)의 능력은 미준하더라도 문장의 능력이 있는 현역 문인에게 일역(日譯)을 대본으로 맡기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는 논리가 승리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만 하나의 부대 조건이 있는 것으로 그것은 일역 대본의 번역을 일단 외어에 능숙한 외어 학자에게 내맡겨서 원서와 대조하여 시정을 하기로 하고 그것을 두 사람의 공역으로 하는 것이 완전을 기하는 가장 타당한 방법이라는 결론에 누구나 이의도 없이 귀착되었다. 그러나 예정한 4·6판 5백 페이지 한 권의 초판 3천 부 1할 인세를 환산하면 정가 5백 환으로 치고 15만 환밖에 되지 않으니 그것을 두 몫으로 분배하면 1인당 7만 5천 환의 인세밖에 되지 않는데, 이 5백 페이지 1권의 책을 만들자면 원고(2백자 용지) 일천칠, 팔백 매 정도가 소요되므로 그것의 탈고까지에는 적어도 2, 3삭의 시일은 요하여야 될 것이어서 석 달 동안에 7만 5천 환 수입으로는 이 번역을 착수할 사람이 없으리라는 데서 이 모처럼의 계획은 고스란히 와해가 되고 만 것이었다. 이 와해를 요약해 말하면 외어의 능력과 문장의 능력이 겸비한 일도 양면용(一刀兩面用)의 소유자가 없다는 것으로 하계가 직면할 수치스러운 일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것이 사실임에는 또한 어찌 하는 도리가 없다.
그러나 당면한 번역에의 요청은 이런 수치를 돌볼 여유가 없다. 냉수 대신에 미지근한 물이라도 마셔야 우선 지갈(止渴)이 될 것이다. 완전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에서 이 목마른 요청을 들어줘야 할 것이 출판계의 임무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근일 나는 또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어떤 출판사에서 출판한 번역 소설을 친지인 모 대학 교수에게 기증을 하였더니 이 책을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한번 뒤적거려 보고 나서 인명의 발음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소설을 어떻게 번역할 능력이 있었을까. 나는 이런 책의 기증은 받지 않네 하고 앉은자리에서 내동댕이를 치더라는 것이다.
자, 그러면 우리 번역계는 이 교수의 이 상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인명이나 지명의 발음이 약간 틀렸다고 그 내용도 따라서 틀렸다고 그 내용도 따라서 보잘것없이 되는 것이 번역이 가지는 당연한 귀결성일까. 인명이나 지명의 발음은 약간 틀렸다고 하더라도 내용을 살리기만 한 것이라면 인명이나 지명의 발음이 정확하고 내용을 살리지 못한 것보다는 오히려 살 점이 있을 것이 아닌가. 생각건대 번역에 있어 인명이나 지명의 발음 같은 것은 한낱 부차적인 지엽 문제가 아닌가 한다. 그야 정확을 기하였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지만 설사 약간의 발음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인명에 있어서 그것이 그 사람인 줄만 있었으면 그만인 것이요 지명에 있어서도 그것이 그곳인 줄만 알았으면 그만일 것이다. 인명이나 지명이란 작품에 있어서 그런 것밖에 더 아무런 무슨 역할도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요는 그 번역의 우열이란 역필(譯筆)의 능력이 그 작품을 살리느냐에 있을 것이다. 아무리 외어에 능통하여 발음이나 작품을 소화하는 능력이 충분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우리말로 구사시킬 문장의 능력이 충분하지 못하면 안 될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이 한 예로는 모씨의 원어역(原語譯)인 예술 작품이 그것을 잘 증명하고 있다. 이 작품은 세계적인 명작으로 한참 성가를 높이고 있는 특수한 작품이었다. 나는 이 한역(韓譯)을 보기 전에 먼저 일역을 본 일이 있다. 이 일역으로 통하여 본 이 작가 독특한 시미(詩味) 창일(漲溢) 문장에 나는 우선 감탄한 일이 있었다. 이 문장은 행을 바꿀 때마다 처음 서두에서 아래다 할 이야기의 내용을 요약해서 간단히 한마디로 특 던져 놓고 그리고 나서 그것을 자세히 되풀이해 내려가면서 토막토막을 지어 가는 문장으로 각 장구(章句)의 고립을 감소하기 위하여 과거를 반복하면서 효과적인 접속사를 이용해 넣는 누구의 문장에서도 볼 수 없었던 그 작가 독특한 문장이었다.
그러나 이 역자의 한역에 나타난 이 작품에서는 그 작품이 가지는 독특한 문장이 풍기는 시미는 그 어느 한 구절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저 보통 누구나가 쓰는 문장인 그런 문장도 매우 서툴러서 다만 그 줄거리의 뜻을 전하기에도 미급한 문장이었다. 그리하여 이 번역이 아무리 인명, 지명에는 발음이 정확히 되었다손 치더라도 이 작품을 살리었다고는 볼 수가 없다.
어떤 작품의 번역이 그 작품이 풍기는 향취를 옮기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그 작품의 경개요 작품은 아닌 것이다.
보통 논문이나 그런 유(類)라면 원작이 전하여온 그 뜻만을 전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번역으로서의 사명이 다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나 작품 유에 있어서는 그 뜻만을 전하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그 사명이 다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품에 있어서는 그 작품이 풍기는 향취와 그 작가 독특한 표현의 묘미를 살려야 한다. 작가마다 문장을 다루는 그 표현에 있어 그 독특한 표현 방법(그 작가만이 가지고 있는)이 있다. 〔이것을 벽(癖)이라고 해도 좋다.〕이 벽이야말로 그 생명의 한 부분이다. 이 벽이 무시될 때에는 그 작가의 생명도 무시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가령 말하자면 지드의 문체는 지드의 문체로 까뮈의 문체는 까뮈의 문체로 그대로 살려야 한다. 까뮈의 문체가 지드 문체로 되어서도 안 되고 지드의 문체가 까뮈의 문체로 되어서도 안 된다. 어디까지든지 지드는 지드대로 까뮈는 까뮈대로 각각 그 작가가 가진 문체를 살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 작품은 그 작가의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원어에 능통하는 원어의 실력만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것이요 우리말에 능통한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줄 아는 표현 능력을 가진 실력에서라야 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당면한 번역의 요청에 있어서는 그 가능치 아니한 원어역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에서 작품의 경개가 되지 아니하고 작품이 되는 번역이라면 중역(重譯)이나 이중역이나를 막론하고 환영하여야 할 것이요 원어역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작품이 되지 아니하고 작품의 경개가 되는 역이라면 그것은 환영할 수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