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황제가 쓴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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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은 군자(君子)란 앞사람들의 말과 지난 행적을 많이 알아서 덕을 쌓아가는 사람이니, 그러한 까닭에 굳세고 튼튼하고 두텁고 속으로 꽉 차 있어서 빛나는 빛이 날로 새롭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서경(書經)》에서도 역시 이르기를 임금이란 사람들 속에서 많은 것을 듣기를 요구하고, 때에 맞추어 일을 단단히 처리하여야 한다고 했다. 《시경(詩經)》, 《서경》, 《춘추(春秋)》도 모두 잘하고 잘못한 흔적을 밝혀서 왕도가 바르게 존재하게 하고, 후세에 거울이 되고 교훈히 될 것을 남겨주는 것이다.

한의 사마천(司馬遷)이 석실과 금궤에 있는 책들을 뽑아내고, 좌씨(左氏)의 《국어(國語)》에 근거하고, 또한 《세본(世本)》, 《전국책(戰國策)》, 《초한춘추(楚漢春秋)》를 추론하고, 경전에서 채택하고 천하의 잃어버린 옛 사건들에 관한 소식을 망라하고, 행적과 서건도 연구하며 위로부터 아래까지 수천 년 간을 치달렸으니, 맨 위에는 헌원(軒轅)을 기록하고 획린(獲麟)에 이르러서 그쳤는데, 기(紀), 표(表), 세가(世家), 그리고 서(書)와 전(傳)을 만들었으니, 뒷날에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체례를 바꿀 수 없었다. 오직 그 책에서 시비를 가린 것은 성인의 뜻에 어긋남이 없었고, 포폄(褒貶)한 것도 지극히 합당하게 한 상태에서 나왔으니 훌륭한 역사가의 재주이다.

만약에 나의 부친이신 영종(英宗) 황제께서 옛것을 살피신 것을 보면, 머릿속으로는 항상 전적을 생각하셨고, 만 가지 일을 처리하시는 가운데서도 아직 손에서 일찍이 책을 놓으신 적이 없었다. 일찍이 용도각(龍圖閣) 직학사(直學士) 사마광(司馬光)에게 명령을 내리시어 역대 군왕과 신하들이 지내온 사적을 차례로 논평하라고 하시고, 비각(秘閣)에 있는 도서를 열람할 수 있게 하셨으며, 관리들에게도 필찰(筆札)을 내려주시며 주위열왕(周威烈王)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대(五代)에 이르러서 그치게 하셨다.

사마광의 뜻은 이러하였다. 주의 쇠퇴함이 겹겹이 쌓여 주 왕실이 미약해져서, 예악이나 정벌같은 일들이 제후에게서 나오게 되었으며, 평왕(平王)이 동쪽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서 제(齊), 초(楚), 진(秦), 진(晉)이 비로소 강대해졌으며, 환공(桓公)과 문공(文公)이 바꾸어 패권을 쥐고서 오히려 주 왕실을 높인다는 말을 내세워 천하의 여러 나라들을 복종하게 하였는데, 위열왕이 스스로 배신(陪臣)인 한(韓), 위(魏), 조(趙)에게 명령을 내려서 제후가 되게 하였으니, 주가 비록 아직 멸망하지는 아니하였다고 하나 왕의 제도는 거의 다 없어졌다. 이것은 또한 옛사람들이 사건을 서술하고 글을 지을 때 그 실마리를 만들고 뜻을 세우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밝은 군왕과 훌륭한 신하들은 정치하는 도리를 절실하게 연마한 것이니, 토의하고 의논한 자세하고 치밀한 말들과 덕을 베풀고 형벌을 주는 좋은 제도, 하늘과 사람이 서로 더불어 하는 관계, 아름답거나 혹은 허물이 되는 증거의 근원, 권위와 복이 되며 번성하고 쇠락하게 되는 근본, 규모를 이롭게 하거나 해롭게 하여 나타나는 효과, 훌륭한 장수의 방책과 지략, 법조문을 잘 따르는 관리가 만든 조목조목의 가르침, 사악한과 올바름으로 결단을 내린 것, 잘 다스리고 소홀한 것의 요점 파악, 문장에서 근원이 있고 기품이 두터운 체제, 잠언(箴言)이나 간언(諫言)의 깊고 절실한 의미 등까지 매우 잘 갖추어놓았다.

무릇 열여섯 왕조를 294권에 묶어 완성하여 창문 앞에 늘어놓아서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을 다해놓았으며 폭넓게 기록하면서도 그 요점을 파악해두었고, 간단하게 기록하면서도 사건에서는 두루 알 수 있게 하였고, 전장제도(典章制度)도 다 모아놓았으니 이미 저작되었던 모든 책의 중심이다.

순경(荀卿)이 말했다. '성인이 지내온 흔적을 보려고 한다면 찬연하게 빛나는 사람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인데, 후대의 왕인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만약에 한(漢)의 문제(文帝)와 선제(宣帝), 당(唐)의 태종(太宗)이라는 사람은 공자가 말한 바 '내가 깎아내릴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 나머지 세상을 잘 다스려 태평성대를 이룬 군왕들의 사적 속에서 그들이 근심하며 아끼는 마음을 가졌고, 충성스럽고 이로운 가르침을 가졌음을 알게 하고, 어떤사람은 다른 사람을 잘 알아보아서 일을 적당하게 잘 맡기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부지런하고 두려워하였고, 또한 각기 성현의 한 부분을 체득했는데, 맹가(孟軻)가 말한 바 '나는 무성(武成)에게 두세 가지 계책만 취할 뿐'이다.

거칠고 타락하여 뒤집혀 위험해진 사례에 이르러서는 '앞에가는 수레가 실수한 것'을 볼 수 있고, 혼란을 일으킨 도적이나 간사한 사건은 그 속에서 서리가 밟히면 점차 단단해질 것을 알게 됨이 있다. 《시경》에 이르기를, '은상(殷商)이 거울로 삼을 것이 먼 곳에 있지 아니하다. 바로 하(夏) 군왕의 시대에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 책의 이름을 내려주노니 '자치통감(資治通鑑)'이라고 하여 짐의 뜻을 드러낼 뿐이다.

치평(治平) 4년 10월에 처음으로 경연(經筵)을 열고 성지(聖旨)를 받들어 《자치통감》을 읽었다. 그달 9일에 신(臣) 사마광이 처음으로 나아가 읽었는데, 면전에서 황제가 쓰신 서문을 하사하셨고, 이 책이 완성되는 날을 기다려 써서 넣도록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