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아버지를 잃은 나는 다섯 살에 의붓아버지(義父)를 섬기게 되었으며, 의붓아버지에게는 소생 아들딸이 있었으니, 그들이 어찌나 세차고 사납 던지, 거의 날마다 어린 나를 때리고 꼬집고 머리를 태를 뜯어서 도저히 나는 집에 붙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만 빨래나 혹은 어디 볼 일로 집에 안 계시면 언제나 쫓겨나서 울 뒷산에 올라 망연히 어머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곤 하였다. 삼십을 넘은 나의 눈엔 아직도 어머니가 돌아오실 그 길이 아련히 남아 있다.

여덟 살 때 아버지가 보다 놓아둔《춘향전》에서 국문을 깨쳐 가지고 구 소설을 읽기 시작하였는데《삼국지》《옥루몽》등 우리 시골로 내려온 것치고는 거의 다 독파하였다. 그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도토리 소설장이란 별명을 지어가지고 다투어 데려다 소설을 읽히고는 과자를 사다주곤 하였다. 이 바람에 나는 날마다 이 집으로 저 집으로 뽑히어 다니게 되었다.

소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공부에 전심하고 특히 작문 짓는 데 우수하였으니 언제나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고 동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는 심심하면 나는 붓장난을 하여 동무들에게 읽어주곤 하였다.

기숙사 생활에서 다소 나의 기분이 명랑하여졌으나 ─ 그러나 여전히 풀이 죽어 한편 옆에 섰기를 잘하였다. 먼저 무엇이든지 주장해본 적이 없고, 동무들의 의견을 꺾어본 적이 없이, 아주 유약한 채 동무들의 뒤만 따랐다.

동무들에게 학비가 오면 좋아서 참새처럼 뛰고 저들의 친한 동무들을 모아 놓고 무엇을 사다 먹으며 기뻐하는데, 형부에게서 오는 학비를 받아쥔 나는 기쁘면서도 어깨가 무거워지고, 반가우면서 어인 일인가 눈물이나서 그날 밤을 자지 못하고 달빛만이 흰 비단처럼 깔린 교정에서 왔다갔다 하였다.

지금은 한 가정의 주부가 되어 살림을 도맡아 하지만 아직도 약한 그 성격을 스스로 미우리만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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