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한 러브레터
1막
편집등장인물
편집- 강양수(姜良洙)
- 강애경(姜愛卿)(그의 누님)
- 윤명효(尹明孝)(그의 벗)
- 마수연(馬壽然)(그의 벗)
- 한 여인(一 女人)
때(時[시])
편집현대, 어떤 날의 오후
무대광경
편집양수(良洙)의 화실(畵室), 양수는 많아야 이십 2,3세에 넘지 않는 순진하고 도 쾌활한 청년, 애경(愛卿)은 삼십세 쯤된 히스테릭한 노처녀(老孃[노 양]), 막이 열리면 양수는 책상 앞에 앉아 책을 보고 있다. 그러나 마음은 딴 것을 생각하고 있는 듯, 책상 위에는 서책 외에 큰 면경하나 비스듬히 서있고, 그 앞 벽에는 아름다운 판화 몇 장이 걸려 있다. 애경은 그 옆에서 편물(編物)을 하고 있다.
🙝 🙟
- 양수
- (한참동안 책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홱 덮어놓고 설합(舌盒)에서 편지 장을 내여 소리 없이 읽는다.)
- 애경
- (빙그레 웃으며) 얘 양수! 너는 요새 무슨 편지를 그렇게 밤낮 내 보니? 그 종이가 편지지기에 말이지 인찰지(印札紙)나 반지(半紙)나 됐더라면 벌써 다 떨어지고 없어졌겠다.
- 양수
- (그런 소리는 못들은 체하고 열중하여 읽기만 한다.)
- 애경
- (편물을 들고 양수에게 좀 당겨 앉으며) 얘 무슨 편지니? 별말없거든, 나도 좀 봬주렴.
- 양수
- (그냥 아무 소리도 없이 편지만 본다.)
- 애경
- (다시 물러앉으며) 흥, 양수 너도 아직 어린애야. 젖 먹고 업혀 다니는 어린애야.
(잠깐 사이 - 小間[소간])
- 양수
- (편지를 뒤집어 놓고 애경을 향해 앉으며) 뭐예요, 누님! 인제 누님이 날더러 뭐라구 하셨소?
- 애경
- (빙그레 웃으며) 하기는 뭐라구 해. 네가 아직 젖먹는 어린애라구 했지.
- 양수
- 무슨 말이예요? 어째 누님은 가끔 가다 나를 어린애라구 합니까. 내가 이때까지 한번 조용히 물어볼려고 했지만, 늘 여가가 없어서 미처 못 묻고 있었어요. 오늘 말난 김에 그 까닭을 좀 알고 말겠으니깐, 까닭을 좀 아르켜 주세요.
- 애경
- 까닭은 무슨 까닭이니? 그 따위 편지를 밤낮 들여다보고 있으니 말이야.(하고 히스테릭하게 웃는다.)
- 양수
- 그 따위 편지라니? 아니, 누님은 이게 어떤 편진 줄 알구나 그러시유?
- 애경
- (조소하는 듯 웃으며) 흥, 그러면 누가 저 하늘 위에서나 떨어진 편진줄로 알까봐서 그러니? 알고 보면 나도 그 편지를 봤단다. 얘, 내가 지금 그 편지 내용을 다 외우라고 해두 외울테야.(편물을 땅에 놓고) 얘 봐, 아주 이랬겠지. 사랑하는 양수씨여. 저를 사랑해주옵소서. ……9월, 일 사랑하는 H·S·A는 올림 ─ 죽겠지. 이 얘!
- 양수
- (깜짝 놀라며) 아니, 누님이 정말 보셨구려. 언제 보셨어요? 아이구 누님도 점잖찮게. 누님은 아무리 처녀시지만, 연세가 벌써 삼십이 넘은 어른이 젊은 동생한테 온 편지를 몰래 보신단 말유? 그나마 편지가 예사 문안 편지도 아닌터에. 아이구 누님도 나이 많으시니깐 차차 망령이 드시는 구려.
- 애경
- (약간 불쾌를 느끼나 일부러 낯빛을 꾸미며) 얘 봐……얘가 나를 봐도 환갑, 진갑, 은혼, 금혼을 다 지낸 늙은이로만 아는구나. 얘 그래도 나는 아직 처녀란다. 꽃같은 처녀란다.(좀 흥분된 어조로) 그래도 아직 저런 남자 놈들 침(唾[타]) 안 먹어본 깨끗한 버진(virgin)이란다.
- 양수
- (비웃는 어조로) 누님이 남자의 침을 먹어 보셨는지 안 먹어 보셨는지, 그거야 누가 아나요. 누님은 바로 지금까지 독신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큰 자랑으로 아시유. 무상지영광(無上之榮光)으로 아시유. 세계에 가장 깨끗한 성자나 된 듯 하시유. 그렇거든 성모 마리아처럼 예수같은 이나 하나 낳아보세요.
- 애경
- (낯을 붉히며) 얘, 그게 무슨 소리니 철없는 수작도, 그런데 얘, 편지한 그녀가 대관절 누구니? H·S·A란 어쨌단 말야?
- 양수
- 그건 또 알아 뭣하시려우. 공연히 또 누님은 고등계 형사처럼 미주알 고주알 캐시네. 누님은 그러시기 때문에 벌써 사십 밑자리 깔아놓고도 독신생활을 하고 계시유. (하고 웃으며) 아니, 누님 잘못했소이다. 아무리 처녀 누님이기로 너무 불경한 말을 했는가 보이다. 죄야 불경죄(不敬罪)에 상당하지마는 아버지 어머니를 봐서도 이 어린 동생을 용서해 줍소서.
- 애경
- 그러면 누가 모르는 줄 아니. 내가 다 알어 얘. 나도 그 계집애를 봤단다. 얘, 저 지난 가을에 ××회당에서 소인자선 음악연주회(素人慈善音樂演奏會)할 때 너하구 같이 나온 그애 아니니. 그 왜 분을 백여우같이 바르고, 벙긋벙긋 웃으면서 독창인가 합창인가 한 그애 말야.
- 양수
- (속으로 깜짝 놀라면서도 일부러 시침을 떼고) 그러면 어쨌단 말이유. 왜 그 여자 잘 안 생겼어요. 천사같이 안 생겼어요. 아주 비너스 같지요? 또 독창도 그만치만 하면, 누님과는 정반대로 남성 예찬자지요. 아니, 양수 찬미잔 줄도 모르지만.
- 애경
- 아이구, 이 얘, 그만 집어치워라. 되잖는 소리를 너저분하게도 써논 그 편지를 무슨 모래밭에서 진주나 주운 것처럼, 그렇게 죽을지 살지 모르고 날뛴단 말야. 이게 벌써 몇 달 동안이니. 몇 달 동안을 소포클레스니 유리피데스니 하며, 연구하는 것도 치워던지구 밤낮 그것만 종이가 닳도록 들여다보고 있니? 아니, 얘, 정말 그 편지 받은 지가 몇달 됐니. 응?
- 양수
- 지난 구월에 받았지요. 그러니깐 아직 넉달밖에 안됐지요. 그렇지만 누님은 아직 그 편지 내용의 진수(眞髓)를 모르실테요. 진수를!
- 애경
- 흥, 진수! 진수! (한참 있다가) 너두 참 너 혼자는 세상에서 똑똑한 것처럼 날뛰지만 아직 젖먹이 아니냐. 세상맛이 쓴지 단지, 지구가 서(西)로 돌아가는지, 동(東)으로 돌아가는지 아무 철을 모르는 애야.
- 양수
- 흥, 누님은 그러실 줄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그 편지의 진수나 좀 알고 말하세요. 그 편지 진수는 사랑이예요. 사랑!(좀 마지못한 낯빛을 하며) 흥, 사랑이란 말이 누님한테는 헌신짝같은 줄도 모르지만, 내게는 참 모래밭에 진주보다 더 귀여운 말이예요. 누님 앞이기에 이런 말합니다마는, 내가 어려서 어머니 품안에 있을 때는, 얘, 그애 귀엽다는 말을 뉘한테든지 들었어요. 또 지금와서는 옛 그 유망한 청년이로 군 하는 소리도 날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습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말은 그애한테 첨 들었어요. 정말 첨 들었어요. 바로 말하면, 그 여자가 그다지 아름답지도 안했습니다. 또 내가 그다지 사모하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편지 안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쓰인 사랑이란 말에 나는 그 여자를 사모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란 말이 내게는 그렇게도 거룩한 위력을 가진 말이예요. 그렇게 한없는 가치를 가진 말이예요. 누님, 들어보세요. 얼마나 그 말이 아름답고도 신성한가 - 사랑하는 양수씨여, 저를 사랑해주옵소서……사랑하는 H·S·A.
- 애경
-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내가 젓먹는 애라구 않을 수 있나. 세상 맛이 떫은지 단지를 모르는 애라구 안하니, 얘, 양수 딴 것 생각지 말구 내말 좀 들어 봐! 지금 세상은 사랑이란 말이 해변가에 조개껍질보다도 더 천한 말이야. 너 내 없이 지금 계집애는 사랑이란 말은 밥먹고 차 마시기보다 더 잘 한단다. 알기는 너 아니? 지금은 사랑이란 말이 너무도 천해서 썩어 곰팡이 피는 줄 아직도 모르니. 얘, 내가 이런 말하면, 네가 실망할지도 모르지마는 그래도 불쌍한 동생을 깨워주는 것만 고맙단다. 얘, 아무리 네가 사랑이란 말에 아귀(餓鬼)가 됐기로 그 따위 말에 죽을판 살판하는 것은 너무 가엾은 말이야. 자, 얘, 지금이라도 그 편지는 저 쓰레기통 같은데 버리든지 찢어버리든지 하고, 연구하는거나 착심(着心)해서 해. 응.
- 양수
- 아니예요. 다른 여자는 모르지마는 이 여자는 그러지 안해요. 다른 여자 입에서 나온 사랑은 썩어 곰팡이가 피었지만, 이 여자 입에서 나온 것은 싱싱한 봄풀 냄새가 나요. 놔두세요. 그만 누님은 말 마세요.
- 애경
- 아냐. 이 얘. 네가 그것을 모르면 바보 남자가 돼. 얘, 내가 그런 것을 가만 보구 있을 수가 있나. (하고 와락 일어나서) 자 ─ 이 얘. 그 편지다오. 찢어내버릴테니.(하고 뺏으려한다.)
- 양수
- (편지 종이를 들고 왼편으로 돌리며) 놔주세요. 놔주세요. 누님, 왜 이리슈. 누님은 공연이 하던 일이나 안하시구. 누님은 이런 때문에 이 때까지 처녀로 계시유.(극력으로 반항하며) 놔두세요. 찢어도 내가 찢을테니.
- 애경
- (식식거리며 다시 제자리에 앉어) 아, 듣기싫은 (사랑) 소리, 썩은 냄새나는 사랑, 너도 사랑, 나도 사랑, 뛰어도 사랑, 날아도 사랑 얼마 안 있으면 인형도 사랑을 할테야.
- 양수
- 아니, 누님 그리 천해 썩은 사랑 말을 누님은 어째 한 번도 입에 내보지 못하고, 남한테 듣지도 못하우. 아니, 못하는 겐지 안하는 겐지 모르지마는.
- 애경
- (양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흥, 그까짓 더러운 말을 깨끗한 내 입에서 내겠니. 이렇게 깨끗한 귀로 듣겠니. 만일 들었다면 소부 허유(巢父許由)처럼
냇물에 가서 귀를 씻을테야. 나도 몇 해 전 십칠팔세 때는 그 따위 소리를 남만치 해보았단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낯이 붉어지고, 소름이 쫙 끼친다. 벙어리만 안되면 혀를 끊어버리고 싶건마는.
- 양수
- (한참동안 저 혼자 딴 생각을 하고 있더니, 무엇을 결심한 듯이 와락 일어나서) 누님, 설교 그만하세요. 나는 어디 좀 갔다 오겠습니다. 잠깐 무슨 볼일이 있어.
- 애경
- 어디 가려고 하니. 그 편지 가지고 어디로 가니. 응. 옳아. 그 계집애 찾아가는구나. 그렇지?
- 양수
- (성낸 어조로) 그렇습니다. 그러면 어쩌란 말씀이예요. 왜 못가게 할테요.(하고 웃으며 훨씬 부드러운 말로) 정말 누님, 오늘은 그이한테 가봐야 되겠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물론 편지 한 장을 보고 찾아가는 것이 어리석은 일인 줄도 알지마는 또 그리워하는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그다지 무슨 죄악이 되며 양심에 쓰린 일은 없을 줄 압니다. 누님 안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더라도 이 동생이 빼빼 말라서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자 ─ 갔다오겠습니다.(하고 외투를 입는다.)
- 애경
- (한참동안 양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가, 히스테릭하게 와락 일어나서 양수를 잡고) 양수! 너 미치지는 안했니, 공연이 요새 그것을 가지고 밤낮 들여다보고 있더니, 아마 신경이 너머 쇠약해졌는가 보다. 응. 얘, 정신 이상은 안 생겼니? 얘, 정신 좀 차리고 가만히 앉아 있어.
- 양수
- (애경의 손을 뿌리치며) 정신 이상! 나는 누님이 정신 이상이 생긴 듯한데요. 그만 놓으시오. 정신 이상이 생겼다해도 좋습니다. 이 세상 놈은 남의 말 다 듣다가 다 망한답니다.(하고 달아난다.)
- 애경
- (부르러 따라가서 양수를 또 잡고) 얘, 양수야. 정신 좀 차려. 병증세도 1기 2기는 아닌가 보다. 얘 그리 말구 여기 좀 앉어.
- 양수
- (애경의 손을 힘껏 뿌리치며) 놔요. 그런 소리 말구 놔요. 바빠 죽겠어요.
- 애경
- 아냐. 이 얘. 여기 좀 앉어. 내말 좀 들어봐.
- 양수
- 아니예요. 아니예요.
수연과 명효 무대 좌측에서 등장.
- 수연, 명효
- (문을 뚜드리며) 여보게 양수군!
애경과 양수 깜짝 놀라 서로 놓는다.
- 양수
- (문을 열고) 오 ─ 자네들인가. 참, 오래간만이로구먼. 자, 들어오게. 응.
수연과 명효 들어온다.
- 애경
- 아이구. 명효씨, 수연씹니까. 참, 오래간만에두 오시는구려. 그런데 어째 모두 그렇게 안 오십니까. 아마, 어디 앓았었는가 봐요.얼굴들이 저렇게 틀려졌는 것보니까. 아이구, 얼굴들이 왜 저리 파리해졌어요. 광대뼈가 모두들 뚝뚝 불그졌는데.
- 수연, 명효
- (서로 보고 웃으며) 뭣 앓지는 안했어요. (양수를 보고) 아니, 여보게 양수. 자네 어디 갈라고 했나? 볼일 있거든 가게나. 우리는 자네 누님하구 놀다 갈테니.
- 양수
- (좀 주저하다가) 응. 잠깐 무슨 일이 있어 갈려고 했지만, 그리 바쁘지는 않네. 걱정 말고 같이 노세.
- 애경
- (양수를 한번 흘겨본 뒤, 또 명효와 수연을 보고) 아니, 가고 어쩌고, 참 걱정이예요. 저 애…….
- 수연, 명효
- 걱정이라니 무슨 걱정이예요?
- 애경
- 몇 달 전에 되지 못한 편지 한 장을 받고 나서는 하는 것도 다 집어치우고는 밤낮 그것만을 들여다보고 있더니, 오늘은 또……. 얘가 너무 어리석어서 큰일이예요. 지금 사람은 견일지십(見一知十)이야 못하겠지만, 무엇을 대할 때는 좋은 겐가, 궂은 겐가를 척척 판단할 머리가 있어야 될텐데. 이 얘는 나이 이십이 넘었지만, 아주 숫되고 어리석은 바보예요. 그래도 또 누이 말은 서푼어치도 안 여기이지요. 어찌 보면 정신 이상도 있는 듯 하지마는.
- 명효
- 편지라니. 어떤 편지예요. 무슨 러브레터 같은 것은 아닌가요?
- 양수
- (명효 말과 거진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닐세.
- 수연
- (권연을 내 물고) 아니, 편지 말이 났으니 말이지. 사실, 우리가 오늘 온 것도 편지 이야기하러 왔어요.
- 애경
- 이야기라니 무슨 이야기예요? 일부러 그것 하려 예까지 오신 것 보니까, 아마 퍽 재미있는가 봐요.
- 수연
- (담배에 불을 피워 한 번 길게 빨고) 이야기도 별 것 아니예요. 젊은 놈들 이야기 늘 그렇지요. 애경씨, 속으로 비웃지나 마세요. 이야기 할테니.
- 애경
- 아이구, 참 별소리 다하시는구려. 언제는 당신네들 흉봅디까?
- 수연
- 그러구러 벌써 한 너댓달 전입니다. 하루는 뜻밖에 이상 한 편지 한 장이 왔지요.
- 애경
- (좀 다가 앉으며) 어디서 말입니까, 남자한테서 말이예요. 여자한테서 말이예요?
- 명효
- (자기가 이야기하고 싶은 듯이) 그야 물론 여자겠지. 남자가 남자한테 한 편지가 무슨 문제 거리가 되나요.
- 애경
- (무슨 흥미를 느끼는 듯이) 내용은 뭐라구 했습디까?
- 수연
- 내용은 여기서 자세 말할 필요도 없지마는, 좌우지간 어떤 여성한테서 왔단 것만 아시면 그 내용은 짐작해 아시겠지요. 그러니깐 저간(這間) 자세한 것은 애경씨나 양수군의 상상에 맡기고 어떻든 그 일이 좀 이상한 것은 사실입니다.
- 애경
- 이상하다니. 또 요새 유행말처럼, 사랑한다니 사랑해달라니 하는 그런 말이예요?
- 수연
- 응. 그 비슷한 게지요.
- 양수
- (혼자서 면경을 보고, 여드름을 짜고 있다가) 엣, 수연이 자네도 아직 어리군. 무슨 그따위 이야기를 이야기라구 하고 있어?
- 애경
- 얘, 너는 가만있어. 그 따위 이야기라니 듣지도 않고, 어떻게 아니? (수연을 보고) 수연씨 말하세요. 그래, 어쨌단 말이예요?
- 수연
- 그래, 편지 내용이 어떻게 이상하던지. 나는 그 편지 한 장을 보고, 그만 혼을 뺐었어요. 쉽게 말하면, 나는 그 편지 한 그 여자를 담박 사모하게 됐어요. 말이 좀 황당한 듯도 하지마는 거짓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여자인즉 평시에 내가 조금이라도 그리워하거나 사랑한 여자는 결코 아닌 것을 머리에 두시고 이야기 들어주시오.(꺼진 담배에 불을 다시 부친다.)
- 애경
- (조급한 듯이) 그래, 어째요. 얼른 하세요.
- 수연
- (입에 연기를 슬그머니 내며) 그렇지만 나는 그 편지 한 장을 보고, 그 여자를 못 견디게도 혼자 사랑하고 그리워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여자를 그리워한 게 아니라 편지 그것을 그리워했다 해도 말이 되겠지요. 예전에 어떤 작자는 몇 세기 전 털(髮[발])을 보고, 그리워서 미쳤다고 하더니 아마 나도 그 사람을 오십보(五十步)로 소백보(笑百步)할 수는 없지요. 애경씨 웃기는 무엇을 웃습니까? 비웃지 마시고 들어주시오. 어쨌든 나는 그 편지를 포켓 안에 넣어두고, 눈만 뜨면 생각하고, 틈만 있으면 내 보기를 시작했습니다. 몇 번보고, 몇 번 봐도 실증만 안날 뿐 아니라, 차차 그 편지 안에 쓰인 글자가 모두 무슨 여신같이 나를 보고 벙글벙글 웃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 할수록 머리가 차차 무거워지고, 몸이 파리하게 되어갔습니다.
- 애경
- (수연의 말이 끝나기 전에) 아니. 그래, 얼굴이 저렇게 말못하게 됐어요.
- 명효
- (이 때까지 말할 기회를 고대한 것같이) 그럼요.
- 수연
- 가만있게. 자네는 내 이야기 할테니, 그래, 나는 최후의 결심을 하고, 오늘 오전에 그 여자 집을 찾아가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찾아가기는 갔지마는, 그 집 대문 앞에서 보니까 들어갈 용기가 좀처럼 나지 않습디다 그려. 그래, 대문 옆에 선 포플러 나무가지만 쳐다보고 있으니까. 뜻밖에 저 명효군이 역시 빼빼 마른 얼굴로 그 집 대문을 바라보고 오겠지요. 나는 깜짝 놀란 말로 ─ 명효, 자네는 이 집에 무슨 볼 일이 있나하고 물으니, 명효는 ─ 자네는 무슨 일이야? 합니다 그려. 나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가지고 갔던 편지를 보이며, 전후 이야기를 하나도 숨기지 않고, 바로 말했지요. 그러니까 명효가 역시 포켓 안에서 편지 한 장을 내어 보이며 ─ 이것 보게. 나도 자네 편지와 같은 이 편지를 가지고 왔네. 하기에 받아보니 어찌 놀래지 않겠습니까. 그 편지와 내 편지와 수신인 이름 두 자 외에는 한자도 틀림이 없겠죠.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한참동안 멍하고 섰으니까, 명효도 역시 땅만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여보게, 우리가 다 속았나 보이. 별난 계집아이를 다 보겠네 그려. 하며 기막힌다는 듯이 쓴웃음을 띄울 때, 나 역시 하도 가잖아서 픽 웃으며, 자네말이 옳은가 보이하고 같이 손을 잡고 돌아왔습니다. 오면서 가만 생각해 보니까, 이런 기막히고 우스운 이야기를 이야기할 때는 우리의 존경하는 애경씨와 양수군 밖에 없을 듯해요. 그래, 우리는 부리나케 일부러 왔지요.(하고 포켓 안에 다 떨어진 편지 한 장을 내보인다.)
명효도 편지 한 장을 내 놓는다.
- 애경
- (편지 두 장을 받아 순차로 보더니, 빙그레 웃고 양수에게 주며) 양수! 이것 좀 봐.
- 양수
- (편지를 받아보더니 깜짝 놀라며) 응. 여보게, 자네들만 속힌 게 아니라, 나도 속혔네. 이것 보게 자네들 편지와 똑같은 것을 나도 한 장 받았네. 그래, 몇 달 동안을 나 혼자 이것만 생각하고 있다가, 아까는 그이한테 가보려고까지 했네.(하고 외투 포켓 안에서 편지 한 장을 내어 수연과 명효의 앞에 놓는다.)
- 수연
- (명효와 같이 편지를 보고) 응. 이게 어쩐 일이냐. 편지 석 장이 똑같으니. 응. 우리가 모두 속았구나. 모두 속혔어. 무슨 놈의 사랑이 세모에 모두 같은 눈(眼[안])이 생긴 사랑이 있나. 우리는 모두 속았다.
- 양수 명효
- (거진 같은 때에) 우리가 모두 어리석어 그렇지. 뉘를 원망하겠니?
- 애경
- 아니예요. 그 여자가 당신들을 속인 게 아니예요. 그이의 사랑은 별과 같아서 뉘를 보고도 깜빡이는 사랑입니다. 그이의 사랑이란 말은 인쇄한 것같이 누구한테도 똑같이 써보내는 말입니다. H·S·A란 여자가 어떤 여자인 줄은 모르지만, 이런 편지를 당신들께만 준 것이 아니겠지요. 그때같이 연주한 남자, 그 말고도 자기가 말 한마디라도 해본 남자에게는 다 이와 똑같은 편지를 주었는지 모르지요. 또 이러한 여자가 지금 세상에 그이 뿐도 아니겠지요.
- 수연 명효 양수
- (같은 소리로) 참, 그런 줄도 모르지요. 어떻든 우리가 어리석지요. 하하
─〈막을 급히〉
─《신민》(1927.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