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만필/유럽의 2태고

롯시니가 이탈리아의 하늘로부터 혜성과 같이 유럽 악단에 찬연한 빛을 나타내던 때처럼 호악가(好樂家)들의 호기심을 끌고 흥미를 일으킨 일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도이칠란트 가극의 기초를 만들었다고 하는 슈츠도 처음에는 이탈리아 유학을 하였을이만큼 그 당시의 이탈리아의 가극은 전성을 극(極)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를 풍미하던 이탈리아 가극이 언제나 연가(戀歌)나 복수의 노래 등의 아무 긴장감 없는 것으로써 끝을 막게 되어, 한갓 무대의 아름다움과 가수의 기술을 드러내기에만 힘써온 결과 조금도 진보는 되지 못하고, 오로지 그때의 소위 나폴리 가극이 제 나라 안에서만이라도 미미한 세력을 가지고 오는 데 지나지 못했읍니다.

그러나 도이칠란트에는 이미 가극의 아버지 모짜르트가 출현하고, 프랑스에서도 특종의 희가극(喜歌劇)이 유행되어, 바야흐로 가극의 패권은 유럽, 특히 도이칠란트에게 빼앗기게 된 때였읍니다.

이같이 침체해 가는 이탈리아의 가극계에 갑자기 롯시니와 같은 천재적 혁명아가 나타나게 되자, 만인의 경탄을 그 한몸에 집중시킨 것도 실로 당연 이상의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롯시니의 예술은 샴펜주(酒)와 같다고 한 그 때의 서평이 적평인지 아닌지는 별문제로 하고라도, 여하간 이 시대에 이 인물이 나타난 것만으로도 전 유럽인의 심혈을 뛰게 하기에 족했던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롯시니의 관능적인 미에 빠져서 도처에서 환영과 찬사를 아낄 줄 몰랐지마는, 그러나 그 반면에는 물론 롯시니의 반대당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읍니다.

장중(莊重)을 숭상하고 고전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그의 예술을 진흙 속에 집어 넣어 버리려고 애썼읍니다. 칭찬하는 자, 중상하는 자, 그들의 소요는 롯시니를 둘러싸고서 실로 상상 이상으로 굉장히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탈리아가 극을 반대하고 자가(自家)의 의식을 강조하던 글루크의 일파와, 고전적 미에 풍부한 풋치니의 일파가 서로 대립하여 파리를 중심으로 하여 맹렬히 싸우고 있던 때와 같았읍니다. 어쨌든 롯시니가 유럽 악계에 비상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은 음악사가 증명하는 사실입니다.

사교계의 이야깃거리도 롯시니에 있었고, 심지어 카페당(黨)의 횡설수설까지도 롯시니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게도 왁자지껄하던 판에 어떤 카페에서는 두 청년 남자가 몹시 흥분된 모양으로 술상을 가운데 놓고서 서로 마주 앉게 되었읍니다. 물론 이 두 남자는 친우도 아니요 동반자도 아니었읍니다. 우연히 한 술상에 마주 앉았던 것입니다.

“흐흥, 당신도 롯시니를 미워하시오? 그것 참 통쾌한 말씀이요.”

이같이 말하며 술잔을 드는 남자는 프랑스 사람이었읍니다. 알지 못하는 두 남자는 롯시니를 화제로 가깝게 담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미워하다 뿐이겠소? 나는 생각만 해도 구역이 나오. 그 따위 인물을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하고 떠드는 친구들의 마음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단 말이요. 자 생각해 보시오. 우리 모짜르트에 비한다면 롯시니 쯤이야 성명이나 있단 말이요?”

말할 것도 없이 이 청년은 도이칠란트 사람이었읍니다.

“모짜르트? 그렇지요. 모짜르트는 위대하지요. 위대하다 뿐이겠소? 그렇지만 여보 롯시니가 아무리 유명하단들 그래 우리 나폴레옹 황제의 발 새에 낀 때만큼이나 값이 있단 말이요?”

조금 전까지도 이 청년의 말에 공명하던 도이칠란트 청년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면서 머리를 흔들었읍니다. 상대의 청년이 프랑스 사람인 것을 깨닫게 된 까닭이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읍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반박하는 태도로 나갔읍니다.

“아니, 값이야 상당히 있지.”

“그래 우리 나폴레옹 황제의 앞에서도?”

프랑스 청년은 한층 더 흥분했읍니다.

“있고말고, 있다 뿐이겠소. 다른 것은 다 몰라도 꼭 한 가지 공통점이야 있지.”

프랑스 청년은 정말 대로하여 자리를 걷어차고 일어서려 할 때 도이칠란트인은 껄껄 웃으며 농하듯 이 한 마디 더 건네었읍니다.

“그다지 격분할 것이야 있소? 공통점이란 별것이 아니라, 롯시니거나 나폴레옹이거나 유럽 천지를 뒤흔들 때에 큰 북을 치기 좋아하는 점으로야 꼭 같지 않소?”


  • 롯시니(Gioachino Rossini)는 이탈리아의 대가극 작가로 1792년 2월 29일에 페사로에 낫다가, 1768년 11월 13일에 파리 근방 툴레에서 죽었습니다. 그는 허다한 가극을 지은 중에도 「윌리엄 텔」과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가장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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