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만필/옛날의 적수

「헨리에테 손탁」 양이 비엔나에서 처녀 무대를 밟게 된 때에는 그의 선배들도 많았고, 경쟁자도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도 「아마리 스타닝겔」[1] 양의 인기야말로 중(衆)을 압(壓)하는 위에, 그 여자의 예술에는 일종의 독특성이 있어서 도저히 남의 추종을 허락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야말로 당연히 손탁 양에게는 무이(無二)의 두려운 적수가 되었을 것은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스타닝겔을 누를 수가 있을까?’— 하는 경쟁심이 손탁의 심중(心中)에 맹렬히 불붙어서 은연히 그 여자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한편 밤낮의 분별이 없이 눈에서 불이 나도록 맹연습을 해오던 것입니다. 어쨌든 그 여자의 노력과 정열과 또 그의 타고난 천품은 그의 예술에 나날이 새로운 광채를 더했던 것입니다.

헨리에테! 그 이름이 점점 음악 팬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됨과 동시에 마침내 영광이 비치는 날이 그 여자에게 찾아오고야 만 것입니다. 그 여자는 훌륭히 독립한 가수로서 비엔나의 좁은 무대로부터 구라파의 본무대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 여자의 득의(得意)와 만족은 족히 미루어 알 것이아닙니까?

그러나 그렇게도 그 여자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강한 자극을 주던 스타닝겔의 이름도 길고긴 동안의 구라파 편력(遍歷)중에는 손탁의 뇌리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수 년이 지난 후 베를린에 정주하게 된 때, 그 여자의 예술은 더욱더욱 원숙한 경지에 들어가서 세상의 인기는 바야흐로 하늘을 찌르는 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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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청명한 날 아침 헨리에테가 마차를 몰아서 베를린의 교외로 산책을 할 제, 맑고도 깨끗한 아침 공기가 심신을 함께 유쾌와 열락(悅樂) 속으로 끌어들일 때에, 그 여자는 문득 전날의 비엔나 시대를 회상하며 몹시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때입니다. 동구 밖 한 모퉁이에서 지금 바로 생각하고 있던 그 그리운 〈비엔나의 노래〉가 바람결에 들려왔습니다. 아무리 급한 볼일이 있기로서니 그냥 모른 체하고 지나칠 수 없는 그리운 옛 노래, 힘껏 맘껏 아침의 청신한 공기를 마시려고 나온 그 여자, 더구나 옛날의 애달픈 추억을 꿈꾸고 있던 그 여자에게 있어서 이 얼마나 반가운 경희(驚喜)였겠습니까. 그는 마차를 머무르게 하고서 정신 없이 그 노래에 취해 있었던 것입니다.

아아, 몹시도 아름다운 음성! 몹시도 그리운 그 노래! 부지중에 그 여자는 마차에서 내려서 그 음성의 주인공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 주인공은 어여쁘기는 했지만 의복은 몹시도 남루한 작은 소년이었음에는 새삼스럽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 예쁘기도 하지……. 너 누구한테 그 노래를 배웠니?”

“〈비엔나의 노래〉말씀이에요? 우리 어머니께 배웠어요.”

“어머니께? 퍽 재주 있구나. 네 아버지는?”

소년은 갑자기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 모양을 자세히 보니 이 애는 걸인인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 여자는 눈치 없이도 어린애의 슬픔을 자아내게 해준 것을 뉘우치는 동시에, 까닭 모를 연민의 정이 끓어올랐습니다. 헨리에테는 그대로 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절한 말로 달래가며 그 소년의 내력을 캐물었던 것입니다.

듣기에도 구슬픈 이야기는 소년의 입으로부터 힘없이 새어나왔습니다. 소년의 어머니는 본시 유명한 가수였으나, 수 년 전에 안질에 걸려서 백약의 효험도 없이 지금은 장님이 되었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여자의 천래의 미성(美聲)도 점점 쇠퇴해지기 시작하여, 그는 정든 무대생활에 석별의 눈물을 뿌린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병신이 된 가수―, 그는 날을 거듭하여 영락(零落)의 깊은 못 속으로 빠져 들어갈 뿐으로, 가재는 탕진한지 이미 오랬고 옛날의 영화는 찾아볼 곳 바이없어 지금에는 이 가련한 소년의 노래를 팔지 않고는 그날그날의 호구조차 방도가 막연하게 된 것이랍니다. 세상사의 무상함을 부질없이 원망하여, 비운의 못 속으로 빠져 들어간 모자는 매일매야 눈물과 한숨으로 쓰라린 생활을 지속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동정만이 아니요 연민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때 그와 같은 길을 걷게 될지 모르는 이 몸! 이러한 무서운 생각을 한 헨리에테는 몸서리를 쳤습니다. 그는 울렁거리는 마음을 억지로 진정하고서는 그 소년의 어머니의 이름을 물어보았습니다.

“어머니요? 어머니의 이름은 아마리 스타닝겔이에요.”

“오! 아마리 스타닝겔!”

운명은 소설보다 기박(奇薄)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상회(相會)―. 스타닝겔의 운명이야말로 소설 이상으로 기박했고 또한 비참했던 것입니다.

이 가련한 소년의 어머니가 전날 자기가 무서워하던 적수임을 생각할 때, 그 여자는 더한층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적수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자기 자신의 심중에 만들어둔 적수였을 뿐이요, 말하자면 자신의 예술을 채찍질하기 위하여 만든 자작(自作)의 채찍이었을 뿐입니다. 스타닝겔에게 무슨 잘못이 있으며 무슨 까닭에 그를 더 원망하거나 미워할 것이 있겠습니까. 말하자면 스타닝겔이야말로 오늘날의 헨리에테를 만들어준 대은인(大恩人)이라 함이 옳을 것입니다.

이같이 생각할 때 손탁 양은 후회와 연민의 정을 금할 수 없어서, 그 이튿날 일찍 안과의(眼科醫)를 데리고 스타닝겔의 숙소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모처럼 보여주려던 호의도 아무 효과가 없어서, 스타닝겔의 눈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다시 뜰 수는 없다는 두려운 선고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부터 스타닝겔과 손탁의 교의(交誼)와 우정은 실로 눈물겨운 일이 많았으니, 손탁 양은 불행한 스타닝겔을 위하여 의연(義捐)음악회도 열어주었고, 또 소년의 양육을 위하여 자기의 돈주머니도 풀어서, 옛날의 둘도 없던 두려운 적수는 오늘날에 누구보다도 서로 잘 이해하고 동정하는 사이가 되어 아름다운 우정을 끝까지 계속했습니다.


  • 헨리에테 손탁(Henriette Sontag)은 1806년 1월 3일에 코블렌츠(Koblenz)에서 출생하여, 1854년 6월 17일에 멕시코에서 호열자(콜레라)로 객사한 당대 일류의 프리마 돈나.
  1. Amelia Steini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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