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만필/동서양 음악의 비교
인류란 본시 모태(母胎)로부터 이미 음악적 소질을 타고 나온 만큼 인류가 있기 시작한 때부터 거기 상응한 유치한 음악이 있었으리란 것은 누구나 다 같이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음악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와 함께 구원(久遠)하다 할진대 원시 시대 인류가 가졌던 음악은 오늘날 우리가 가진 그것처럼 양(洋)의 동서에 따라서 현격한 차이가 없었을 것이 명백하며 사실에 있어서 역사가 증명하는 바에 의하면 음악의 기원은 하나이라는 것이다. 처음 인도에서 발상하여 한줄기는 중국, 조선을 거쳐서 일본으로 건너가고 다른 한 줄기는 이집트, 희랍의 문명의 세례를 받은 후 서남구(西南歐)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같이 동서로 갈리인 음악은 수 3천년 지나는 동안에 인류 사회의 진보와 함께 한껏 발달되었을 것은 물론이겠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동양에서 발상하여 서양으로 이출(移出)했던 음악을 다시 동양으로 역수입해다가 우리가 공부하고 연구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 같지마는 그러나 음악이란 사회 문화의 배경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만큼 서구의 문명을 수입하기에 무가(無暇)한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음악에 있어서도 또한 문명의 일(一)요소로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이상 서양 음악을 수입해 온다는 것도 결코 불가해(不可解)의 일도 아니요, 무의미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동양에서는 동양에서의 독특한 문명이 있고 도덕이나 윤리가 있지마는 오늘날 우리 생활에는 오히려 서구의 그것 중에서 어느 우수한 점이나 생활에 적합한 점을 더 많이 찾을 수 있음으로써 서구의 문명을 수입해 오는 것이라면 그와 꼭 같은 이유 하에서 동양에는 동양인 특유의 음악이 있고 미술이 있지만도 또한 서양의 그것을 수입해 올 필요를 느끼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생각해 볼 일은 우리가 서양악을 수입한다는 이유로써 동양악은 음악으로서의 가치, 다시 말하면 예술적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술의 향기가 높은 고대 문화의 유물이 골동품으로서나 예술적 가치로서는 최고 최상으로 평가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오늘날 우리네의 실생활에는 적응되지 않음과 마찬가지로 동양의 음악이 예술적으로는 최고의 지위에 있다 하더라도 오늘날 우리의 실생활에나 감정에 적응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한 골동품에 가까웁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대체 오늘날의 동서양 음악간에는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으며 양자간에는 얼마나한 장처(長處)와 단점이 있는가? 이것이 지금 내가 여기서 논구(論究)해 보려는 것이다.
대범 음악에는 반드시 세 가지의 요소가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요소를 구비하지 않았다고 음악을 형성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세 가지의 요소란 Rhythm(절주(節奏), 운율(韻律), 혹은 율동(律動))과 Melody(선율(旋律), 속칭 곡조(曲調))와 Harmony(화성(和聲))이다. 그리하여 물론 이 세 요소가 융합하여 3위1체가 된 것이라야 완전한 것이라 하겠지마는 때로는 선율과 율동만의 음악도 있고 또 원시적 형태로는 율동만의 음악도 있는 것이다. 금일 서양의 음악이란 이 세 가지 요소가 구비치 않고는 성립되지 않지마는 그러나 상고 시대의 미개한 인종간에는 율동만의 음악도 있었던 것이다. 율동만의 음악이란 선율이나 화성을 주(奏)하는 악기가 없이 단지 타격 악기만의 합주를 말함이니 이것은 마치 조선의 '매구'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동서를 통하여 이 종류의 음악은 극히 원시적이오, 지방적인 까닭에 여기에 논급하지 않거니와 가장 진보된 예술적 음악에 있어서 동서 음악을 비교한다면 그 형식에 있어서 서양악은 입체적임에 반하여 동양악은 평면적이다. 이것은 오직 음악에만 국한된 차이점이 아니라 문학에서나 미술에서나 건축에 있어서도 공통되는 최대 차이점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동양악은 어떤 일정한 율동에 의하여 각종 잡다한 악기가 선율을 평면적으로 제주하지마는 서양악은 율동이나 선율 이외에 화성이란 음의 일군이 입체적으로 연속 유출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자연히 동양악은 단조에 흐르기 쉬움에 반하여 서양악은 변화성이 풍부하고 하나는 정적이요 보수적임에 반하여 하나는 동적이요 진취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비교적이요 절대적은 아님을 말해 둔다) 그뿐만 아니라 음악의 토대를 이루는 그 율동에 있어서도 동양의 음악(특히 조선 음악)은 대부분이 극히 지완(遲緩)하여 해이하고 퇴영적 기분에 싸여 있지마는 서양의 음악은 특수한 예외를 제하고는 거개 경쾌 장중하다. 뿐만 아니라 동양악은 그 감정 표현에 있어서 몹시도 우회적이며, 표면적임에 반하여 서양악은 단도직입적이요, 삼각미가 있다. 다시 말하면 동양악에는 애수는 있을망정 비통한 맛이 적고 장한은 있을망정 정중한 맛은 서양악에 불급하는 감이 있다. 또 작곡상 기교로 말하더라도 자연이나 인생의 묘사에 있어서 선율만으로는 부족지난을 면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동양악은 듣고 난 후에 별로이 깊은 인상을 얻을 수 없음이 이 또한 평면적이오 표면적인 음악의 흐름에 그치는 까닭일 것이다.
그 다음 음악의 내용에 있어서는 더욱이나 동양악의 빈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으니 고래로 동양악이란 민간에 유행되는 동민요(童民謠)나 속요, 무용 등을 제하고는 모두 이것이 선인, 도사의 천수(天授)의 비법으로나 된 것으로 알아서 거기에다 종종의 인과와 숙명론 같은 억설(憶說)을 부(附)하기도 하고 때로는 대동소이한 물건에다 허구의 훌륭한 표제만을 걸어 놓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동양악은 그 표제에 나타난 것만 볼 때에는 몹시도 내용적인 것 같지마는 기실 하등의 구체적 내용을 갖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는 더구나 막연하여 서양악에서 보는 바 소위 악곡의 형식이란 찾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동양악에 있어서는 그 작곡된 시대를 추구해 보지 않고는 이것에서 고전이니 낭만이니 근대니 하는 판별을 할 수가 도저히 불가능하다. 물론 금일에 남아 있는 아악류(雅樂類)는 그 작곡된 연대로 보아서나 외형에 나타난 형식으로 보아서 거개 고전에 속함이 당연할 것이려니와 인지(人智)가 발달하고 풍습 사상 감정 생활 등이 모두 변천해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음악상에 있어서는 하등변천이나 발달된 형적을 찾을 수 없으며 또 새로이 작곡되는 것도 없으니 이 사실만 가지고 생각하더라도 금일의 동양악은 동양 특유의 사상이나 정조나 내지 문화사적 가치를 가진 자로 우리가 세계에 소개하고 자랑할 수는 있다더라도 이것이 곧 우리의 실제 생활에 정응 부화(附化)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우리가 가져야 할 음악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잠깐 말하련다. 재래의 그대로의 가정이나, 혹은 학교에 들여온다는 것이 이상(理想)으로 좋을는지 알 수 없어도 실제 가능한 일이 아니요 그렇다고 서양 음악이 그대로를 이식해 놓아도 역시 전부가 우리네의 감정에 적응될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서악(西樂)과 동악(東樂)을 물론하고 피차의 장점을 취하여 우리네의 사상과 감정을 토대로 하고 그 위에 새로운 음악을 창설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널리 말하면 신 동양음악(新東洋音樂)이 될 것이요, 민족적으로 본다면 신 조선음악이 생겨야 될 것이다.
수년 전부터 1, 2 악가(樂家)의 손에서 고래의 조선 민요를 서양 악화(樂化)하는 운동이 일어났으나 아직까지 소기(所期)의 결과를 보지 못하였음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 아닐까 한다.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서양악은 입체적이요, 동양악은 평면적이다. 다시 말하면 서양악은 마치 서양의 고층 건축과 같고 동양악은 평면적인 단층 건축과 같음으로써이다. 비록 시대가 변천되었다고 한들 단층 건축물을 헐어서 고층 건축물로 개조함이 얼마만큼이나 가능할 것인가. 물론 음악의 소재(素材)되는 음계에는 공통점이 있는 것과 같이 건축의 소재로는 동일물이라 하더라도 이미 다듬어 놓고 지어 놓은 후에 이것을 근본적으로 개축하지 못함과 일반으로 몇천 및 몇백 년이 전래하던 자가(自家)의 음악에다 일종이양(一種異樣)의 (차라리 이단적인) 화성이란 재료를 가한다고 결코 평면적 건물이 입체화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眞)소위 욕후면관(浴猴面冠)의 감이 없지 않을지니 이론보다 실제가 잘 증명하는 것은 서양악 식으로 편곡한 재래의 조선악을 다소 양악의 소양을 가진 이가 들을 때는 동양적 색채가 농후하다고 할는지 모르지마는 서양악이란 들어보지도 못하면 조선의 율객(律客)이나 가객(歌客)에게 이것을 돌려 볼 때에 그네들은 여기서 추호만치도 조선의 정조는 찾을 수 없다고 말함을 들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조선악의 서양식 편곡이란 사이비의 혼혈아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동양악을 비교하던 끝에 편곡 문제에까지 언급함은 저으기 탈선된 감이 불무(不無)하나 조만간 우리는 신시대, 신문화인으로서의 새로운 음악을 가져야 될 것이여 이것을 가지려면 어떠한 방도를 취할까가 무엇보다도 선결 문제인 까닭에 이 문제에 대한 두어 마디 우견(愚見)을 말할 것이다. 18세기 말까지도 선진 제국에게 야만시되던 러시아가 19세기 초에 이르러 소위 국민악파의 손에서 신 러시아 음악 창설 운동에 노력한 결과 1세기를 불출하여 세계의 악권(樂權)을 장중(掌中)에 쥐다시피 된 것을 보거나 바하 이전의 독일 민족이 불, 이(佛, 伊)등에게 역시 야만시되다가 17세기 초에 이르러 바하, 헨델, 모짜르트, 하이든 같은 불세출의 대 악가의 중출(衆出)과 그들의 위업으로 말미암아, 또한 세계적으로 음악국이 되고 음악적 국민이 된 것을 보더라도 우리들 중에는 하루바삐 조선의 바하와 조선의 베토벤이 나서 가장 잘 우리의 심정을 묘출(描出)하고 가장 잘 우리의 감정에 부화(符化)되는 신조선 음악을 창설하지 않고는 우리는 언제까지나 우리가 가져야 될 '참 음악'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