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파리/개벽 8호

이 집 서방(書房)님이라고는 대감 둘재 첩의 아들이다. 새해에 16살이 되는데 따님이 둘이고 코가 남보다 유난히 커 보인다.

파리 『서방님, 과세(過歲)나 안녕히 하셧습니까. 에그 신년 새해에 화투가 왼일입니까. 기나긴 세월에 어느 때 못해서 정월 초하루날 아츰부터 그런 걸 만지고 계십니까...』

서방님 『왜 화투를 가지고 잇스니까 놀음을 하는 줄 아니? 이걸로 올해 운수를 보는 게란다.』

파리 『딱도 합니다. 조상 차례도 이저 버리고 안저서 운수는 무슨 운수야요. 吉해야 백작, 아니 백장되고 불길하면 대감 침실에 화산이 터지고 그밧게 더 알께 무에 잇서요』

서방님 『조상 차례야 아버지가 안 지내시는 걸 내가 어떠케 지내니?』

파리 『으흥. 이저 버리지는 안엇는데 어른이 이저 버렷스니까 딸아서 안 지냇다-!?』

서방님 『아츰 먹으라고 깨이기에 일어나 보니까 벌서 대청에서 큰어머니가 「조상도 모르고 이 집엔 첩이 제일이냐 마냐」하고 야단인걸, 어떠케 이저 버리랴야, 이저 버릴수가 잇디?』

돈 아껴 두고
子息 부랑자
맨들지 말고... ...
... ... ... ...
첩사서
家亂 니르키지
말고...
...
事業다운 일에
떳떳하게 썻스면
自己도
사람답고
社會도
多幸하련마는
... ...(목)

세상이 公平도 하고나.
일 잘하는 사람은
말르고 구차해 지고
놀며서 잣바젓는 놈은
살만 포동포동쩌!
왼종일 땀과 힘을 다하여도
생기는 돈은 모다 저 놈이 삼켜
아아 세상이
公平하고나!(셩)

파리 『그런 못난 소리 그만 두고 새해부터는 제발 좀 학교에를 단이던지 독선생이라도 안치고 좀 배워요. 나히 16살에 그 글씨 꼴하고 글씨는 하여(何如)하던지 편지나 하나 할 줄 알아야지 그래도 귀족 행세는 하느라고 기생의 입은 할 줄 알아서... 그까짓 기생에게 하는 편지를 남을 술을 사먹이며서 써 달라는 꼴은 참 가관이지요...』

서방님 『그까짓 편지야-서사(書寫)가 잇겟다... 편지 쓰자고 공부를 하란 말이냐?』

파리 『서사만 밋고... 왜, 돈하고 작(爵)만 잇스면 세상 일이 저절로 다-될 듯 십지요』

서방님 『지금 세상에 돈 가지고 안 되는 일이 어대 잇디? 사람이 세상에 제일 귀하다고 하지만 사람보다도 돈이 지금은 제일이란다. 우리 집에서 그 학생마 마다려 온 것 보지? 처음엔 어쪄니, 어쪄니 하더니 돈이 가기 시작하더니 기어코 오지 안핫나』

파리 『무던하오. 돈주고 첩을 사와서... 그러치만 몸동이나 사왓지 마음도 사왓서요? 마음업시 억지로 돈의 세력에 끌려 온 것, 그게 목상(木像)이나 다를게 무언가요. 것으로는 아모 말업시 잇서도 속으로는 원수가티 미워하는 것을 그래도 첩이라-고 조타고 집 작만, 세간 작만 해주고 돈이나 푹푹 디어 밀어 주지, 그 첩 그 돈 가지고 사이에서 호강하는 사람은 따로 잇서요. 돈과 마음, 마음과 육신, 그래 어떤 게 나하요, 마음은 다른 데 잇던지 말던지 육신만 잡아 매어 노코 내 것이라면 수인가요, 돈 만흔 자의 맘보가 그러면 돈을 만히 들여 어여쁜 인형을 맨들어 노코 첩이라고 귀(貴)애하지요. 그러면 얼골이나 몸이나 마음에 꼭맛는 미인을 맨들 수도 잇고 자기를 원수가티 미워하지도 안흘 터이고...』

서방님 『인형이 그래 사람 가튼가』

파리 『그러케 마음 업는 것을 돈의 세력으로 끌어다 노으면 인형만도 못하단 말이야요. 그러케 돈만 아는 사람은 정말 사람다운 사람 노릇을 못해 본단 말이야요, 공연히 집구석에 박혀 잇서서 그런 꼴만 보고 배우지 말고 좀 공부를 해요. 무얼 아는 게 만하서 사람 노릇을 해 보아야지요. 밤낫, 빗장이질이나 하야 빈민의 피나 긁고 첩이나 길러 싸움만 부틸 터이요?』

서방님 『공부는 해 무얼하니. 이대로 잇서도 이제 아버지만 돌아 가시면 내가 자작(子爵)인데...』

파리 『허허-자작이 병이로군! 그 작이 그러케 좃소? 그 더러운 것이. 기생방에 나가면 혹 떠 바칠가 지금 아모 자작이라고 어디가 내세워 보아요. 어떤 대접을 밧나 당신네 작이 무슨 그러케 영예스러운 작이요 모다 송도리째 OOO먹은 공, 그 조흔 사업 천추만대에 영구 기념할 대훈가(大勳家), 그 명패가 그러케 부럽소? 또는 그것이 진정한 갑잇는 위(位)라고 합시다. 사회를 위하야 민중을 위하야 유공한 사업을 이룬 그런 영예로 하야 지은 위라고 합시다. 그러키로 그 영위(榮位)가 그 당자에게 잇서서 귀하고 중한 것이지... 이건 아비의 영위를 잘낫던 못낫던 자식이 뒤를 잇는다. 자식은 그만한 공로가 잇던 업던 아비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 썩은 시대에 뒤진, 그런 조직이 어대 잇소. 여긔 한 학교, 아니 학교는 그만 두고라도 한글방이 잇다고 합시다. 그 선생이 유명한 학자인 고로 원근서 모여 온 제자가 만핫소. 그런데 그 선생이 죽은 뒤에 그 자제가 유식하거나 말거나 선생의 위를 잇겟소? 그래도 그 서당이 길게 가겟소? 안될 말이지?! 그와 다를 게 무엇이요. 현재 그런 못난 어리식은 불합리한 조직으로도 잘도 사람들은 살아가오. 그것이 저-하등사회, 저급간(低級間)에 잇는 일도 아니고 돌이어 최고계급, 한 민중의 중심조직이 그러하며서도 실탄 말업시 불평도 업시 살아가니 딱하지요. 그런 불합리한 짓을 태연히 하며서 그래도 당신네가 최령(最靈)하지요? 유명한 선생이엇다고 그 자식이 반듯이 아비만콤 유명하란 법이 어대 잇나. 또는 그 선생의 가족 외에는 더 유식한 자가 업스란 법이 어대 잇나. 한 서당에서 못난 자식이 아비의 자리라고 선생의 위에 안는다 하면 반듯이 그 제자들이 다른 선생을 구해 갈 것이요. 그게 하필 서당 뿐이겟소? 한 학교로도 그러코 사회로도 그러코 또는 한 나라로도 그럴 것이 왼다. 깬 사람이면 반듯이 그럴 것입닌다. 이러케 밀우어 가면 애비가 번 재산이라고 반듯이 그 자식의 것이 된다 하는 지금의 재산 상속제도도 불합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잇지요』

서방님 『듯기 실타. 족으만 놈이 별 건방진 소리를 다 하는구나』

파리 『그래도 욕심은 만하서... 왜 노(老)대감을 독약이라도 먹이지. 그리고 하루라도 속히 귀족 행세를 해보지 일신의 영화를 위해서는 형제도 죽이고 상감도 약 먹이는 게 귀족의 의렛짓이지? 당신도 귀족이 되려면 지금부터 약묘리(藥妙理)를 잘 배워두어야지 그래야 이담에 남처럼 후작까지나 해볼 희망이 잇지 안하요? 약 잘 쓸 줄 알고 적은 땅이나 큰 땅이나 남에게 팔아 먹기 잘하고 첩 둘 줄 알고 수반(數盤)질 잘 하고 그러면 귀족될 미천은 넉넉하니까. 귀족이 되다 못되면 어릿 광대가 되더래도...』

서방님 『요, 밸어먹을 놈의 파리야, 고게 무슨 소리냐』

파리 『왜 내가 허튼 소리 하는 줄 아오? 대감은 지금도 모르고 잇서도 서사가 다-안다고 요전에 이악이 합디다. 당신 어머니가 다리고 잇는 침모(針母)가 그러더라구』

서방님 『무얼 말야...』

파리 『노대감 외에 당신 원(原)아버지가 따로 잇다고... ...』

서방님 『예끼 요 발칙한 놈 가트니』 하며 주먹으로 친다.

파리 『아차차, 어더 맛지도 아니하고 나는 갑니다. 미안하지만 아조 알으켜 주는 것이니 당신의 원아버진가 그가 지금도 광무대(廣舞臺) 마루를 면치 못하고 잇는 줄이나 알아요.』

거젓말도 아닌데 화가 몹시 나는지 손에 들엇던 회중금시계로 냅다 갈기더니 헛되이 시계만 깨털어 젓다. 이번엔 에에 독신주의의 김여사에게로 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