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문보다는 뒷문이 한결 마음에 든다.

-끝이 없이 마안하니 내다만 보이는 바다, 그렇게 창망한 바다위에 떠도는 어선, 돛대 끝에 풍긴 바람이 속력을 주었다 당기었다…… 결코 마음에 드는 풍경이 아니다. 어딘지 거기에는 세속적인 정취가 더할 수 없이 담뿍 담기운 듯한 것이 싫다. 무엇이 숨었는지 뒤에는 꿰뚫어볼 수도 없이 빽빽히 둘러선 송림, 오직 그것밖에 바라보이지 않는 뒷문 쪽의 풍경이 턱없이 좋다.

성눌은 마침내 뒷문 곁에 책상을 놓았다.

놓고 나서 마지막 정리인 책상 위까지 정리를 하여 놓은 다음, 뒷산을 대해 마주앉으니 병풍을 두른 듯이 앞을 탁 막아 주는 데 마음이 푹 가라앉는다. 가라앉으니 앞은 막혔건만 앞이 터진 바다보다 눈앞은 더 환하니 내다보이는 것 같다. 역시 끝없는 바다와도 같은 현상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세속적인 생선을 실은 배가 아니고, 그렇지 않은 그 무엇이 필시 실려 있는 듯한 그러한 배가 오락가락한다.

환상일시 틀림없으나, 이런 것을 사색케 하는 그러한 자리가 성눌에게는 좋았다.

시원하다. 산으로 내려오는 바람도 시원하거니와, 마음도 시원하다. 비록 산경의 초라한 모옥이라 하여도 서울의 여사보다는 기분일지 모르나 마음이 붙는다. 앞문 쪽을 현실이라면 뒷문 쪽은 확실히 초현실적이다. 마음에 부딪치는 세속적인 모든 것을 떠나, 이런 마음의 바다 속에서 산들 어떠리.

신앙도 희망도 생활의 목적도 모두 다 잃고 가장 이상적이어야 할 청춘의 정열까지 마저 식은 생활의 패배자라고 비웃어도 좋다.

성눌은 마음을 풀어 놓고 새 생활이 비롯하는 첫 끼를 이 산 속에서 먹었다.

새 생활이라고는 하지만 성눌은 무슨 이렇다할 원대한 포부를 품고 선조의 산막을 찾은 것도 아니요, 수양이나 정양 같은 것을 염두에 둔 것도 물론 아니다. 다만 벗이 미쁘지 않으니 마음 둘 곳이 없다. 마음 둘 곳이 없으니 고독하다. 고독이 떠나지 않을진댄 차라리 미쁘지 않은 벗을 보지 않음으로 고독함이 한결 덜려질 것도 같은 데서 어디 한번 하여 보자는 데 지나지 않는다.

누가 성눌만한 생활의 과거를 안 가졌으랴만 성눌은 그것을 결코 평범시하고 싶지 않았다.

-유족하지 못한 가산을 털어 바치고 공부를 하였다. 사회의 가장 참된 일원으로 일을 하기에 목숨을 바치자던 정열의 이상은 사회생화의 첫 관문에서 부서졌다. 난치의 병이 그의 몸을 아주 단단히 붙든 것이다. 더할 줄만 아는 각혈은 절망에 가까운 공포를 주었다. 사회의 참된 일원이 되기 전에 죽는다! 아까운 일이다. 살아야 되겠다! 아무리 해서도 살아야 되겠다! 약으로 병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십여 년 동안의 닦은 공부는 전 가산을 새빨갛게 긁어먹고 오직 남은 것이라고는 빈손 안에 앞길의 운명을 판단하고 있을 손금밖에 쥐인 것이 없다.

거기, 도와주려는 사람도 없고, 집으로 내려와 누웠으면 병에는 좀 더 나을 것 같으나, 역시 손금밖에 쥐인 것이 없는 어버이에게 가난의 설움을 더 끼치기 싫다. 도리어 집에서는 알까 두렵게 곧장 병든 몸을 알키려는 법도 없이 운명에 목숨을 맡겨 그저 한산한 여사에 누웠다.

가끔 친구들이 찾아온다. 과자도 가지고 오고, 철 따라선 과실로 들고 온다. 먹기를 권하고 병을 근심한다.

그러나 근심하는 것만으로는 그들도 탈이 낫지 않을 줄을 모를 리 없다.

갈 때마다 하는 말이 공기 좋은 산간으로 전지 요양을 가란다. 그것이 약물 치료보다 낫다고 간곡히 권한다.

과자나 과실을 권하는 것은 인사요, 전지 요양을 권하는 것은 생명이란 거룩한 거기에 정성을 표시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전지 요양에조차 여유가 없는 줄을 모르는 벗들이 아닌 그들이 이런 말을 할 때는 이것도 역시 과자나 과일이나의 권과 같은 인사말에 지나지 않는다. 전지 요양을 백번 권한댔자 탈이 나을 수는 없는 것이다.

“왜 전지 요양을 가래두 안 가?”

자꾸만 이렇게 권할 때는 딱도 하다.

벗과 벗이 서로 대하는 의무는 이런 말로 다해지는 것일까.

모르는 사람은 모르니 서로 지나치고, 아는 사람은 아니 서로 모자 벗고 인사하고, 벗은 벗이니 악수하고, 가령 점심때면 점심이나 나누고, 그리고 술잔이라도 들게 되면, 한 일 원 정도에서 오 원 십 원도 비용은 나게 된다. 이것이 친한 벗 사이에서 가장 벗다운 성의를 표하는 인사다. 벗 아닌 사람보다 더한 것이 그것이다. 다만 그것이 벗의 필요성인 듯싶다. 점심 한 그릇 술 한 잔 그것으로 벗으로서의 사명이 다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원치 않을 때는 벗의 필요성은 없는 셈이 된다.

성눌은 그런 것을 원치 않고도 벗의 필요성이 있을 그 무슨 두터운 성의와 정열이 있어야 할 것을 믿고 싶고, 그 정열이 서로의 마음을 얽어 놓으리라야 사람의 벗 됨에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 같다.

병 앓아 누으니 성눌은 전에 못 느끼던 벗이 이렇게도 미쁘지 못하다. 외로운 여사에는 벗밖에 의지할 데가 없고, 또 따뜻한 정이 벗에게로만 향한다. 그러나 벗은 벗대로의 인사가 있을 뿐, 성눌의 생각과 같은 그런 두터운 성의는 그들의 염두엔 없는가 싶다. 건강을 잃은 성눌의 베갯머리는 언제나 외롭고 쓸쓸한데 세월은 그대로 가고 병세는 차도를 모른다.

이러한 때 어떻게 알았는지 아버지가 성눌은 찾아 올라왔다. 집을 팔고 밥을 빌어 먹어도 고쳐야 아니하느냐고 병을 속이고 누웠음을 꾸짖고 시골로 데려 내려갔다. 성눌은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성의에 눈물이 났다.

아버지! 아버지가 아들에게 대하는 그러한 성의로 사람들은 서로 대할 수 없는 것인가. 아버지는 자기를 죽음 속에서 꺼내 가지고 가는 듯싶었다. 처음에 돼지를 팔아 약을 사오고 또 소를 팔고, 그래도 차도가 없어서 집을 저당하여 금융조합에서 빚을 내다 뜸을 뜬다 침을 놓는다 할 수 있는 자력과 할 수 있는 정성을 다 들여 치료하는 동안 이 삼 년, 무엇에 효과를 얻었는지 그렇게도 난질이란 관사를 달고 다니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성눌은 생활의 무대에 다시 나섰다. 서울로 올라온다. 벗들은 반갑게 악수하고 투병(鬪病)축하회를 연다. 그것도 성대히 요릿집에다 기생을 셋씩이나 불러 성눌을 위하여 축배를 드린다. 누구나가 성눌을 위하여 지성으로 술을 권하고, 기분을 상치 않으려 될 수 있는 데까지 즐겁게 놀기를 위주한다. 기생도 제일 이쁜 것은 제각기 상양하고 성눌에게 맡긴다. 마치 성눌을 위한 세상 같다.

그러나 성눌은 이런 자기의 세상에서 응당히 기분이 즐거울 것이나 즐겁지 않았다. 만일 자기가 구사의 일생에서 생을 건지지 못하였더라면 물론 이런 축하회는 없었을 게고, 조전(弔電)이나 조문이, 그리고 추도회를 여는 정성이 있었으리라, 병이 나으면 반가우니 축하회, 죽으면 슬프니 추도회, 왜 축하회와 추도회를 여는 그런 정성으로 병들어 누웠을 때 목숨을 건져 주기 위한 구조회는 못 열었던가? 살아 반가우니 축하회를 여는 정성이라면 죽음에 슬픔도 그만한 성의에 못지않았으리라고 보인다. 요행 살아났으니 말이지 죽고 말았더라면 그들의 이러한 성의는 보람없는 슬픈 일이 되고 말았을 것이 아닌가.

사람을 위한다는 것은 다 제 자신을 위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과일 꾸러미도 축하회도 그것이 다 실질에 있어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한 그들 자신이 낯밖에 더 나지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술 먹기를 그렇게도 권하는 십여 인의 벗들은 그럼 자기를 위하는 정성보다 다 제 자신을 위하는 정성이 더 클 것인가 하니 세상이 금시 어두워지는 것 같다. 성눌은 아버지의 사랑이 그리웠다. 아버지는 왜 자기 때문에 당신의 재산을 희생하여 세간을 팔아 공부를 시키고 알뜰히 죽음에서 자기를 또 구해 내시고는 지금 밥에 구차를 받고 계시나?

“아버지!”

입 밖에 나오지는 않았으나 확실히 불러는 졌다.

“왜!”

아버지의 대답도 분명히 귀에 들렸다.

“저는 이번에 꼭 죽을 걸 아버지의 정성에 살아났습니다.”

“얘, 부끄럽다.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네 소원껏 다해 준 일이 있니?

내가 돈을 좀더 모았더라면 너는 네 마음을 팔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걸…….”

“아버지 무슨 말씀입니까? 저 때문에 세간을 파시고 늙으신 몸이 농사를 짓느라 다리를 부르걷으시고…….”

“얘 별말 마라, 누구 때문에 사는 줄 아니 내가.”

눈가죽이 뜨거워 온다고 느끼는 순간,

“자, 어서 잔을 따세요.”

간드러지게 청하는 소리가 고막을 울린다. 바라보니 아버지는 간데없고, 기생의 동글하게 쥐인 손깍지 위에서 남실거리는 술잔이 턱 앞에 와 기다린다.

환상! 환상에 왔던 아버지! 누구 때문에 사느냐는 그 한 마디, 그 한 마디가 어떻게도 성눌의 마음을 찔렀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성 눌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

성눌은 그 후 곧 어느 회사에 취직을 하였으나 “누구 때문에”하는 그 한 마디를 잊을 수가 없었다.

누구 때문에? 자기는 누구 때문에 사는 것인가? 아버지는 자기 때문에 모든 사랑과 정성을 다하심으로 삶을 일삼으신다. 그러면 자기는 누구를 위하여 사랑과 정성을 바치므로 삶을 다해야 될까? 자기에게도 아버지가 자기를 위하듯 그러한 사랑과 정성은 아버지 못지않게 마음속에서 간직되어 있다고 알고 또 그것을 믿고 싶다. 그리고 무엇에든지 지성으로 사랑을 베풀고 싶고 또 마음을 다하고 싶음이 못 견디게 가슴속에서 용솟음치고 있음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그 사랑과 정성을 베풀 길이 없이 그저 그날그날을 밥을 위하여 비위에도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 문화사업이란 미명 아래서 사람을 속이고 돈을 빼앗고 하는 회사의 정책에 따라가야 한다. 지난날 사회의 일원으로라던 정열의 이상이 병마의 간섭에 식어감이 안타까워 아무케서도 살아야겠다던 그 욕망을 생각하니 하고 있는 일이 손맥이 탁 풀렸다. 하지만 그렇게 아니하고는 생활의 방편이 도모되지 않는다. 먹어야 사는 것이 사람이니 역시 범속한 한낱 사회의 일원임에 틀림없고 또 그러한 존재의 사람의 벗임에 언제나 충실하게 된다. 그러니 그 어떤 공허감에 생활의 정력은 자꾸만 식어간다. 도무지 마음 가는 데가 없고 손이 붙는 데가 없다. 그러나 식어 가는 정력 속에 도리어 자기의 존재가 있는 듯싶게 그것(退社)은 아깝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울과 고독은 여전히 깃을 들이고 속속들이 파고든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그 무슨 진리를 담은 껍데기 같게도 그 속에는 찾아질 진리가 있는 듯 싶었다. 우울과 고독은 알을 낳을 때의 그 모체의 괴로움인 듯이도 생각이 된다. 그리하여 그것을 족히 이겨 벗기기만 괴로움인 듯이도 생각이 된다. 그리하여 그것을 족히 이겨 벗기기만 하면 그 속에서는 노른자위와 흰자위를 제대로 가진 진리의 알이 쏟아져나올 것 같다. 그러나 그 우울과 고독은 못 견디게 사람을 괴롭힌다. 성눌은 불에나 뛰어든 것같이 몸 가질 바를 몰랐다. 이리도 뛰어 보고 저리도 뛰어 보고 싶다. 그래서 시험해 본 것이 이렇게 농촌으로 내려오게 된 것이요, 또 비교적 한적한 곳을 찾는다는 것이 이 산막이었다.

산막은 언제나 조용하다. 건넌방에는 산지기 늙은이 내외가 자식 오뉘를 데리고 있다고는 해도 있는지 마는지다. 늙은이는 신소리 한번 크게 마당을 거닐 기력이 이미 진했고, 아들은 식구를 벌어 먹이기에 종일을 산 속에서 부대를 패다가는 밤이면 곤한 잠에 주검과 같이 곯아지고, 과년한 처녀의 거동은 늙은이의 거동보다도 조심성이 있다. 아침 저녁 밥상을 드려다 놓을 때까지도 치맛자락 한 번 허투루 날리지 않는다.

이렇게 고요한 속에서도 성눌은 여전히 고독하다. 언제나 떠나지 못하는 그 공상이요, 사색에다 주위가 더할 수 없이 고요하니 여느 때 보다 공상과 사색은 더 늘어 갈 뿐이다. 그러나, 찾긴 것은 없다. 그래도 찾기지 않은 무엇인지도 모르게 그리운 것은 더욱 알뜰해진다. 손을 내어밀면 잡힐 듯이 그 진리는 눈앞에 있는 것 같으나 내어밀고보면 역시 아득한 공허다. 우울하다. 찾다 못 찾으면 그것은 언제나 선철에게서밖에 찾을 곳이 없을 것 같아 생각이 진하면 던졌던 책을 또 집어든다. 하이데거, 야스파스, 파스칼, 니체, 그러나, 또 속아 넘는다. 언제나같이 거기에서도 또, 이렇다 개완한 위안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속이 탄다. 시원한 바람이 그립다. 산으로 올라간다. 이것이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이다.

오늘도 라·뿌류이엘의 『인간의 탐구』를 안은 채 산으로 올라온다.

가을의 산 속은 귀뚜라미 소리에 누른다. 밤새도록 귀뚜라미가 울고 나면 이튿날의 산 속은 알아보게 누른 빛에 짙는다. 오늘도 어제보다는 확실히 색채에 가난하다.

산기슭에 매어달린 풀밭에는 혼자 우뚝 솟아서 기세를 뽐내는 듯하던 방초도 인제는 나도 늙었쉐 하는 듯이 새하얀 머리를 힘없이 풀어 놓고 호드기처럼 말려드는 잎사귀는 소생할 힘조차 없는 듯이 늘어졌다. 아니, 산중의 거족에 틀림없는 아름드리 나무들도 벌써 잎새에 누런 물이 들었다.

인간 사회는 세파에 누르듯이 산 속은 서릿바람에 누른다. 지금 서리를 실은 한 줄기 바람이 떡갈나무 가지를 스치다 숱 많은 잎사귀 속을 헤어나지 못해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이리 갈리고 저리 갈리면서도 애써 제자리에 부지하려고 매어달려 팔락시는 잎사귀들 - 그것은 꼭 세상 사람의 운명과도 같지 않을까, 자기도 분명히 저 나무 잎새가 이리 갈리고 저리 갈리며 시달리듯 속세의 세파에 쫓긴 존재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마침내 한 잎의 잎사귀가 더 대항할 힘이 없이 그만 제 자리를 떨어져 바람조차 공중에 뜬다.

성눌은 눈은 그 잎사귀를 따라 간다. 잎사귀는 바람에 풍겨 높았다 낮았다 한 마리의 새같이 서쪽 하늘을 그냥그냥 날아간다. 성눌은 쓸데도 없는 것을 잃지 않으려고 가슴을 넘는 풀밭 속을 허방지방 헤치며 맞은쪽 언덕까지조차 넘다가 뜻 아니한 인기척 소리에 문득 발길을 멈추었다.

“엄메야! 여긴 멀구레 그대루 있구나! 막.”

머루와 다래 넝궁이 엉킨 경사진 언덕 아래 언제 올라왔는지 산지기 늙은이 모녀가 머루를 따며 지껄이고 있었다.

처녀는 일찍이도 머루나 다래 사냥을 다니는 일은 있었으나, 아무리 집 뒤라고는 해도 늙은이가 이 험한 산길에 얌전이를 대동하고 떠났음을 본 일은 없다. 그리고, 머루 따러 온 모녀가 다 새 옷을 갈아 입고 떠난 것은 수상하다. 얌전이는 전에 볼 수 없던 자지 길소매를 단 흰 옥양목 저고리에 구김살도 가지 아니한 싯누런 삼베 치마를 입었다. 웬일일꼬. 성눌은 한 그루의 소나무에 등을 지고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아무 말이 없고, 늙은이는 휘돌아진 모롱고지 좁은 길을 이따금 기웃기웃 넘석어려 보는 품이 필시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성싶다.

조금 만에 한 삼십 되어 보이는 농군 하나이 역시 바구니를 들고 무엇을 찾는 듯이 일변 좌우쪽을 살펴보며 모롱고지 길을 걸어 내려오는데 보니 그 어머닌 성싶은 역시, 백발이 헛나는 늙은이 하나이 또, 뒤에 달렸다.

이것을 본 산지기 늙은이는 별안간 얌전이에게 눈을 주며 바람에 약간 거슬린 머리칼을 쓸어내리고, 저고리 앞섶까지 단정히 여며 준다.

산턱까지 및은 농군은 뚝 떨어져 언덕 위로 올라가고, 늙은이만이 그냥 풀밭 길을 지팡이로 헤치며 산지기 늙은이 앞까지 오더니 지팡이에 힘을 주며 우뚝 걸음을 세우고 허리를 뒤로 편다.

“후 - 여긴 멀구두 많기도 많수다레! 후 - 노친넨 어드메서 왔소?”

그리고, 얌전이를 한 번 힐긋 쳐다본다.

“우린 요 아래서 왔수다. 노친넨 어디메서 왔소?”

“난 데 넘에 샘꼴 사는 늙은이우다. 그래 이 애긴 딸이요? 아이구 머리 두 끔즉이두 도왔수다레!”

늙은이는 엉덩이까지 츠렁츠렁 따 늘인 얌전이의 칠같이 새까만 머리를 탐스러운 듯이 쓸어 본다.

“예에 딸이우다.”

“조고리두 딱 맞게두 해 입었다! 입성은 네레 다 했갔구나?”

“고로무뇨. 갸레 일을 잘 헌담무다. 베두 잘 짜구, 김두 잘 매구, 머 못허는 일이 있기 그루우?”

얌전이는 대답할 겨를도 없이 어머니는 딸의 칭찬이다.

“예에 베두 잘 짜구요? 메체 났기 어느새 베를 다 배왔소? 쯔쯔 웬!”

“에라들베 났담무다.”

“에라들베 난간허구 키두 크기두 허우다! 귀두 복상스럽게 생기구 …….”

귓바퀴도 한 번 만져 본다.

하는 양이 꼭 얌전이의 선을 보려 온 짓 같다. 사나이도 머루 딸 생각은 않고 얌전이를 볼 것만이 할 일이라는 듯이 언덕 위에 마음놓고 앉아서 주의 깊은 시선을 얌전이에게로만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성눌은 얌전이의 선! 하고 깨닫는 순간, 새파란 칼날이 가슴을 스치는 것처럼 오싹하고 전신이 위축됨을 느낀다. 이상한 감정이었다. 얌전이의 선을 보는데 자기의 마음에 동요가 생길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동요가 있음을 제 자신 인식한다.

그러면 일찍이 자기가 얌전이를 사랑하고 있었나 성눌은 생각해 본다. 그러나, 결코 그러한 생각조차 가져 본 일이 기억에 없다. 다만 속정에 물들지 않은 소박하고, 순진한 마음씨가 좋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으로 또한 얌전이의 간선에 마음이 흔들릴 이치는 없는 것이다. 무슨 때문일꼬? 그렇게 순진한 처녀가 아무것도 모르는 우둔한 농부의 손안에서 구애될 것임이 얌전이를 생각하는 동정심에서 생기는 마음일까. 성눌은 제 마음이면서도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늙은이는 너도 가까이 와서 얌전이를 자세히 보라는 듯이 두어 간쯤 떨어진 최둑섭으로 걸어가며 다래는 여기가 많다고 아들을 불러 내린다. 그리고는 무어라고 수군거리며 아들도, 늙은이도 한 번씩 얌전이 편을 바라보곤 한다.

이런 눈치를 살필 때마다 얌전이는 모르는 듯 그저 수굿하고 머룬지 다랜지를 따기는 따나 어딘지 그 몸가짐은 더욱 조심을 요하는 듯하고, 또, 초조해하는 빛이 드러나 보인다.

틀림없는 간선이다. 성눌은 진정되지 않는 가슴에 물결을 뛰놓이며 애써 그들의 공론을 엿들으려고 일거동 일거정에 고요히 주의를 모아 청각에 여유를 주었으나 그들이 돌아갈 때까지 이렇다 한 마디도 비밀한 내용 이야기는 엿들을 수가 없었다.

산막으로 내려온 성눌은 전에 없이 얌전이가 그리움을 느낀다. 그의 용모에서 보다는 마음에 끌리는 것 같다. 눈, 코, 입, 그 어느 것에 흠잡을 것이 없다고는 해도 결코 미인은 아니다. 어디서든지 찾을 수 있는 그저 평범한 한 여성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얌전이가 이제 그렇게도 그립다. 그리고, 얌전이를 그 사나이가 아무렇게나 할 수 있을 것이겠거니 하면 못 견디게 그 사나이가 밉기까지 하다.

아니 내 마음이 왜 이럴까 생각에 잠겨 보는 동안 얼른하는 그림자에 주위를 살피니 어느새 밥상이 들어온다. 얌전이는 저녁상을 조심스레 들고 문턱을 넘어서 사뿐사뿐 걸어와 성눌의 앞에 놓는다.

그러나, 놓는가 하니 어느새 얌전이는 벌써 돌아서 문 밖으로 사라지고 만다.

하나, 성눌의 눈앞에는 여전히 얌전이가 있다. 환상임을 깨닫고 밥그릇을 연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새하얀 이밥 속에도 얌전이는 있다. 고사리 나물 위에도 있다. 조기 토막 위에도 있다. 눈이 가는 곳마다 얌전이는 있다. 성눌은 정신을 깨닫는다. 마지막 넘어가는 해 그림자가 불그레하게 밥상 위에 물을 들인다.

그러나, 그것도 그 순간뿐이다. 얌전이는 그대로 있다. 물에다 밥을 말아 뜨니 밥 숟갈 위에까지도 얌전이는 뛰어 올라온다.

“상 가져가거라.”

실로 성눌은 얌전이가 그렇게도 그리워 이렇게 밥술을 놓자 조급하게도 소리를 질러 보기는 처음이다.

곧 달려온 얌전이는 떠 넣었던 밥을 채 씹어 삼키지도 못한 것같이 그래서 그것을 비밀이 처리하려는 것처럼 입을 꼭 다물었다.

“너 낮에 멀구 얼마나 따 왔니?”

돌연한 질문에 얌전이는 밥상을 들다 말고 멈칫 선다.

“너 낮에 멀구 따려 산에 올라 왔두나?”

별안간 얌전이는 홍당무같이 빨개지는 얼굴을 숙인다. 그럼 낮에 성눌은 자기의 선을 보이는 꼴도 보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처녀의 마음에 심히 수줍은 성싶다.

그러니, 또, 성눌은 얌전이의 그 난처해하는 태도에 자기의 마음까지 똑같이 난처하다. 공연히 물었나보다. 그의 난처해함이 스스로 변해될 그러한 말은 없을까 생각에 바쁜 동안,

“이에 - .”

대답을 남긴 얌전이는 어느새 벌써 상을 집어든다. 그런 다음엔 한 걸음 한 걸음 멀어지는 얌전이 - 그렇게 멀어져서 얌전이는 부엌으로 사라지니, 또, 뒤이어 허공에 나타나는 얌전이도 역시 수줍어 고개 숙인 얌전이다.

사나이의 버릇인 일시적인 탐욕이 이렇게도 얌전이를 자꾸만 눈앞에 끓어다 놓는가 성눌은 생각해 본다. 그러나 결코 그러한 종류의 탐욕이 아닌 것을 곧 양심은 증명한다. - 지금까지 알뜰히도 마음이 괴롭게 찾아오던 것은 얌전이를 찾는 데 있었던 것 같고, 또 얌전이를 찾았다 하니 미였든 마음에 무엇이 꽉 들어차는 듯하다.

성눌은 불을 켜고 언제나 같이 책을 펴놓는다. 그러나, 책 위에도 얌전이는 따라온다. 그리고 책보다도 얌전이를 보는 것이 마음에 개완하다. 만 가지의 공상도 얌전이와 같이 아름다워 본 적이 없었고, 책 속에서도 얌전이 같이 아름다운 구절을 일찍이 찾아 본 적이 없다. 얌전이를 영원히 자기의 것을 만들므로 아름다움에 주린 공허한 마음을 얌전이로 채우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못 견디게 마음을 짓다른다. 며칠을 두고 누를내 누를 수 없는 마음이었다.

마침내 성눌은 얌전이와의 통혼에 사람을 내세운다.

이튿날 성눌은 전에 없이 명랑한 기분을 안고 산으로 올라온다. 얌전이와의 통혼 교섭 전말을 이 산 속에서 들려주기로 그 벗은 약속하였던 것이다.

산토끼처럼 제 길을 잊지 않고 제 발부리에 닦여진 풀밭 길을 성눌은 언제나 같이 밟아서 언덕 위 바위 위에 자리를 잡는다.

큰 바위의 주위는 여전히 어지럽다. 지리가미 조각, 담배 꽁다리, 성냥개비, 말라붙은 가래침, 근 한 달 격이나 버릴 줄만 알고 쓸어 보지 않은 생활의 찌게미다. 누가 보든지 그것은 뚜렷하게도 사람이 살아난 자체로 아니 볼 수 없으리라. 그러나, 예서 살아난 자체는 오직 그것을 뿌려 이 산 속을 어지럽힌 것밖에 없다.

그러나, 성눌은 이 산 속에서 무심히 낙엽만을 지우고 있는 자신이 아니었던 것을 믿고 싶다. 얌전이를 찾은 것이다. 많은 여성 가운데서 흔들려 보지 못하는 마음이 얌전이로 위해서 흔들린 것이 아닌가. 분명히 자기는 한 잎의 낙엽을 쫓아 언덕을 넘다 머루를 따는 얌전이를 보고 마음에 동요가 생겼다. 그것은 결코 자위도 아니요, 공상도 아닌 뻐젓한 현실인 것을 다시금 인식하며 통혼의 보고가 올라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초조한 것도 아니었다. 언제나 생각해도 자신의 위신에 미루워 산지기 늙은이 내외는 일언에 쾌히 승낙을 하리라 믿는 까닭이다.

오히려 공상은 이런 데 있었다. - 얌전이로 더블어 어디서 어떻게 생활을 할꼬? 서울은 싫다. 얌전이를 더럽히지 않을 이 산 속에서 차라리 농사를 하리라. 그래서, 또한 속세에 눈을 감는 것만으로라도 커다란 짐을 벗는 듯이 한결 몸은 가벼워질 듯하고 마음은 개완할 듯하다. 생활의 진리를 담은 껍데기 갈게도 우울하던 마음은 여기에 완전히 벗겨지고 가슴속에 꽉 찬 정열은 샘물처럼 터져 흘러서 우울과 고독을 깨끗이 씻어낼 것 같다. 아름다운 공상 속에 여념이 없는 동안, 보고를 안은 벗이 언덕 아래 나타난다.

“아니, 이거 나 님재 볼 낯이 없게 됐네.”

언덕을 추어 오르기가 바쁘게 입을 연다.

“낯이 없다니!”

“아, 소한데 물린 셈이야.”

“머시?”

“아, 그런 목고대 뒤상 같으니 죽여도 님재와는 혼인을 안 한다누만.”

성눌은 짐짓 놀래고, 또, 약간 수치를 느끼며.

“안 하겠대?”

“님재 같은 고급 인종은 당초에 얌전이 짝이 될 수 없대. 기름과 물은 아무리 뒤섞어도 합하는 법이 없다나! 님재는 기름이요, 얌전이는 물이래.

님잰, 왜 저 - 보통학교에 와 있던 네훈도같이 구두 신구, 또 초매 깡뚱하구, 머리 지지구, 기름 바르구 헌, 머, 그런 네자야 짝이 똑 맞는대나! 그래서 성눌이는 주의가 그렇지 않어서 그른 네자는 춤밭구 얌전이같이 김 잘 매구, 베 잘 짜는 네자를 구한다니께 그건 글쎄 시젠 그래두 열흘두 못 가 맘이 변한다구! 그르니, 머, 더 할 말이 있으야디. 어, 참!”

소리없는 한숨이 성눌의 입에서 새여 나온다.

“내 이렇게꺼지 이야기해 봤지. 아니, 영감이 산막에 있으멘서 성눌이 청을 안 드르문 어걸 모양이냐구, 허니께니 그건 막, 사람을 엎누르랴는 것이라구 하면서 나가래문 나가두 얌전이는 못 내놓갔다는 거야. 그래서 또, 마즈막엔 이렇게두 말해 보지 않았나. 아니 그래, 영감이 그 처지에 얌전이를 농사 집에밖에 더 살릴 데가 없을 건데 그래, 즌날 마른날 없이 코피가 닉두룩 따이나 파며 고생을 식히느니보다 와 성눌이를 줘서 월급 타서 팔 땅디리구 뜨뜻한 아루에 펜안히 앉아서 놀구 먹을 팔자를 마대느냐구. 허니께 니 놀구 먹는 것보다 일해서 먹는 게 더 귀허다니! 그르멘서 사람이 손발 뒀단 멀 허는 거냐구 그르겠디. 그리구, 또, 허는 말이 성눌이야 김을 한 고랑 맬 줄 아나, 모를 한 대 꽂을 줄 아나, 우리 얌전이는 백이 백 말 해두 그저 김 잘 매구, 모 잘 꽂는 장정 일꾼으루 얻어 주갔대는 거야, 그르니 머, 헐 말이 있나. 그른데, 할민지는 또, 그 뒤상 옆에 딱 경매를 붙에 들고 앉어서 머이 이러쿵저러쿵 골치가 아파서…… 여부시! 님재만 하구야 아니 참, 그, 뒤상 말마따나 구두 신구 거드럭거린 걸 어디, 얌전이 궁둥이 따를 건 머이와? 지친헌 게 에미난데. 난, 님재레 말해 달내기 해는 봤쉐만 그만두지 그만둬 기까지 걸 멀…….”

그만두라지 않아 승낙을 않는데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필요 없는 인물로 간주하는 데는 무어라 더 말할 용기조차 없는 것이다.

성눌은 얌전이에게 있어 자기는 손톱만한 필요도 없었던 것을 순간 생각하고 이 세상에서의 자기의 필요성을 생각해 본다. 자기는 그럼 무엇에 필요한 존재이였던고? 아무 데도 없었다. 미래의 일은 추측할 배 못 되지만 현재에는 없다. 과거에도 없었다. 모 한 대, 밭 한 이랑을 임의로 처리할 줄 아는 능력을 이미 배양하였던들 이렇게도 불필요한 존재로 얌전이에게서 절대의 거절은 받지 않았으리라. 성눌은 오히려 자책의 부끄러움에 머리가 숙어졌다. 이 한 달 동안의 산간의 생활을 미루어 보더라도 산지기 일가의 눈에서뿐이 아니라, 자기 자신 무능한 한 개 생활의 패배자에 틀림없었다.

얌전이는 늙은 어버이를 위하여 있는 정성과 노력을 다해 하루갈이에 가까운 터앝에 옥수수를 혼자 걷어들였던 것을 빤히 안다. 그러나, 자기는 그동안 무엇을 하였던고? 밤이나 낮이나 계속해서 하는 독서, 그리고 공상! 그러나, 책 속에서도 공상 속에서도 얻어진 것은 없다. 역시 보람없는 그날의 생을 보내고 있었을 뿐이다.

“그까진 거 도무지 그놈으 늙은이를 산막에서 내여쫓으시. 멧쥔의 말을 안 듣는 메직이가 통 천하에 어디 있단 말이와. 원 내가 다 분해 죽겠네 참!”

벗은 생각하고 자못 흥분한다.

그러나, 성눌은 대답할 용기조차 없었다. 피여 물었던 담배를 한숨과 같이 또, 저도 모르는 사이 바위 위에 힘없이 썩썩 비벼 다시 못 올 그 순간의 생애를 표시하는 한 토막의 자취를 무심히 바위 위에 기록할 뿐.

성눌은 힘없는 발길을 또 산막으로 돌린다.

돌릴 때까지는 그래도 조용한 짬을 타서 저녁에 다시 한 번 자기가 직접 졸라 보리라 은근히 마음에 먹었으나 먹었던 마음을 건네 볼 겨를도 없이 건네 볼 용기를 잃고 말았다. 들어오는 저녁 밥상이 전에 없이 얌전이의 손에서 늙은이의 손으로 바뀌어 들려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도시 자기라는 인물은 인제 다시는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니 얌전이를 예전대로 함부로 들여보낼 수가 없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다.

성눌은 밥을 먹기보다 짐을 싸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그 뒤에 그리운 얌전이 -.

하지만, 또, 자리끼도 늙은이의 손에 들어오기를 잊지 않는 것을, 그리고 얌전이는 그림자도 눈앞에 얼른하지 않는 것을…….

성눌은 밤을 두고 생각하여 보았으나 결국은 다시 더 말을 걸어 본대야 그것은 도리어 낯만 더 무지는 쑥스러운 짓이 될 것임을 깨닫고 이튿날 아침에도 의연히 늙은이의 손에 들려오는 밥상을 낯 간지럽게 받아 물리고 그렇게도 잊기지 못하는 얌전이를 생각에 누르며 산막을 떠나 집으로 내려왔다.

집에는 뜻하지 않았던 한 장의 편지가 성눌을 기다리고 있었다.

- 우리들에게는 이제야 운이 왔다. 경상도 어떤 재벌을 붙들어 무진회사 비슷한 성질의 회사를 우리 그룹에서 하나 꾸며 놓았는데 우리 그룹에서는 군이 제일 미덥고 똑똑한 인물이라고 만장일치로 군을 재무계 주임으로 이미 추천을 하여 놓았으니 지체 말고 빨리 올라오라는 예의 그 벗 5, 6인의 엽서 편지다 성눌은 이 편지를 읽는 순간, 저도 모르게 낯이 뜨거워 옴을 어찌하는 수 없었다. 자기의 마음이 끌리는 얌전이에게는 절대로 필요치 않은 존재가 믿거워하지 못하는 벗들에게서는 이렇게도 신용을 받는 것이다. 미더운데 버림을 받고, 미덥지 못한데 신임을 받는 것은 결국 그런 유에서나 신용할 수 있는 그러한 존재에 틀림없을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성눌은 순간 그것을 마음 아프게 깨달은 까닭이다.

즉석에서 성눌은 회답을 썼다.

이 순박한 농촌의 자연처럼 자기의 마음을 살찌우는 데는 없다. 차마 농촌을 떠나기가 싫다. 내일부터는 나도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이고 낫을 들고 들로 벼 가을을 나가련다. 군들과 나는 인제 너무도 차이가 있는 동떨어진 사람이 되련다. 나 같은 사람은 서울 장안에 그뜩 들어찬 게 그것일 것일 테니 나는 아주 잊어 주는 것이 좋을 듯싶다. 그리고 그것을 나는 두 번 세 번 당부하고 바랄 뿐이다.

손성눌 그리고 이튿날 성눌은 실제로 낫을 들고 나섰다.

늙으신 아버지가 자기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시 생전 쥐여 보지 못하던 낫을 들고 여름내 피땀을 흘려서 지어 놓은 벼 가을을 또한 손수 하시고, 그것의 마당질 품으로 남의 품벼를 베다가 그만 서투른 낫에 다리를 상하여 꼼짝 못하고 누워 계시니 마당질만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인데 인제 품을 못 지리면 아버지 혼자로서 하여야 될 앞날의 마당질 처리를 내다볼 때 성눌은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베 부이기가 바로 그렇게 헐한 줄 아네? 이제 너마자 또 어디 다치려구…….”

아버지는 섬깨 떨듯 말리는 것을 성눌은 뿌리치고 품벼를 베러 나섰다.

천여 석의 씨를 뿌리나는 이 넓은 들에는 논배미마다 모두들 다리와 팔뚝을 걷어올리고 무슨 진리를 거두기나 하는 듯이 오직 거기에만 정신을 쓰고 낫 들을 놀린다.

성눌이도 발을 뽑고 논배미로 들어섰다. 아직 햇볕을 보지 못한 아침물은 어지간히 차다. 발바닥에 집히는 물이 산득산득 소름을 끼쳐주는 정도인가 하니 차츰 발가락에는 얼음이 꽂히는 듯 아리다.

그러나, 이 논에 같이 들어선 7, 8인의 가을 일꾼들은 그런 것쯤은 느끼지도 못하는 듯이 흥에 실린 낫만이 그저 분주하다. 못 견디게 물은 차나 성눌은 그것을 참기 어려워 뛰어나올 자리는 못 된다. 강잉히 이빨에 힘을 주어 그들과 같이 의연히 한 켠짝으로 열을 지여 가며 낫을 놀릴 밖에…….

그러나, 일꾼들은 따를 길이 없다. 겨우 다섯 단을 묶어 놓고 보니 그들은 벌써 십여 단씩이나 뒤에 남겨 놓고 서너 발 푼수나 앞서 나가 있다. 성 눌은 좀더 속력을 내여 일단의 정력을 다 들여 본다. 그러나, 그러한 속력으로는 아무리 힘을 들인다 해도 손 익인 그들의 일에는 딸려지는 것이 아니다. 맞은짝 논둑까지 다 베어나가 허리를 펼 때 보니 성눌은 겨우 논배미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동안이었다. 낮 밤을 지나고 났을 때는 끊어져 내는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그런 것을 그대로 우기자니 전신은 땀에 뜨고, 근력은 잃는다. 그러니, 일의 능률은 처음보다도 차츰 떨어져만 간다. 그래도 성눌은 시늉이라도 하게 남아 있는 힘이 제 자신 기적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햇것 남이 있기를 바라나, 어서 해가 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는 속일 수 없이 코로 단김이 몰아 나옴을 인식하는 때였다.

해가 지기까지 베는 시늉을 하고 또, 베여 놓은 볏단을 등짐으로 메어내 여 배까지 치고 났을 때는 실로 촌보에 자유가 능치 못하게 전신의 동맥은 굳어진 듯했다.

눈으로 보고 상상하는 짐작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및지 못할 일임을 성눌은 이제 깨달았다. 그리고 얌전이에게서 거절을 받은 이유의 일단도 여기에 선이 밝아지는 듯하였다.

“성눌이 오늘 혼났디?”

“자네들은 허리가 아프지 않은가?”

“하하하 우리들은 한 사람 목에 백여 단씩 돌아갔는데 님잰, 머, 겨우, 쉰 단 푼수나 부였을까 헌데 머, 허리가 아파?”

“아무랬건 성눌 용쉐. 첨으루 그래두 쉬지 않구 진종일 손 노락질이래두 헌게 용티 멀 그래!”

한 대씩 붙여물고 논둑으로 나와 한담 끝에 그들은 내일의 품꾼들을 제각기 따지고 일어선다.

오늘 일꾼 중에서 품에 빠진 사람은 다만 성눌이 혼자뿐이었다. 그와는 누구나가 하나같이 내일의 품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성눌은 자기의 품을 들이라기가 미안해서 그러나 보다 하고 자청 품을 청해 보았다.

“자네네 벼나 하루 더 비여 볼까?”

“웬걸 님잰 하루 쉐서 비시. 그렇게 갑자기 일을 되게 하단 탈 생김메!

괴니 -.”

동정에 말인 듯싶다. 단 몇 십 리 길만 걸어도 며칠 동안은 다리가 아파 자유로 몸을 놀리기도 거북하던 것을 미루어 보면 참으로 오늘의 여울은 상당히 몸에 깊이 배여 있을 듯하다.

성눌은 다시 아무 말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도 오력은 상당히 말잰 것이 기운이 없었다.

그러나, 성눌은 품자리만 있으면 또 나서기로 내일의 품을 찾아 주기를 기다린다. 아버지를 위해서도 그렇다고 그대로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거니와 제 자신 솟구쳐 들먹이는 생활에 대한 정열을 익일 길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나절이 기울어도 품을 요구하는 사람은 없었다. 성눌은 기다리다 못해 자신이 품을 구하기까지 해 본다. 하는데도 아버지의 다리가 좀 나았나 그것을 묻고 아버지의 품을 은근히 요구하는 사람은 있으면서도 성눌에게는 품을 거론도 아니했다.

“어머니! 누구 품 안 쓰겠답디까?”

마을 나갔다 들어오는 어머니에게 성눌은 묻는다.

“멀? 네 품 말이가? 아니, 네 품을 이제야 누구레 쓰간!”

“웨요?”

“웨라니! 어즈께 박서방넨 너까타나 베 쉰 단 밋뎃따구 아니 그 소리가 동네에 통이했는데 멀 그르네.”

“……,”

“그 사람들이니 와 안 그를내던. 같은 값이문 남의 반목두 참네 못 하는 널 품으로 쓰갔네? 나보탄두 안 쓸데…… 너 없을 적에 사랐간. 그르다 탈나리라, 너야 거저 늘 책이나 보게 생겠디 -.”

성눌은 이 소리를 듣자 별안간 낯이 확확 달았다. 그것은 여기에서도 자기는 의연히 필요치 않은 인물인 것을 말하는 것인 것이다. 마음이 붙지 않는 곳에서는 반겨 청하고, 마음이 붙는 데서는 거역을 당한다. 성눌의 눈앞은 금시에 어두워졌다. 이 넓은 세상에 자기의 마음은 의연히 담을 데가 없는 것이다.

성눌은 갑자기 숨이 막히는 듯 가슴이 답답함을 느낀다. 그러나, 숨이 끊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히 숨을 쉬고 있는 것으로 공기를 호흡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마음의 호흡이 괴로운 것을 보면 분명히 세상의 공기는 탁해진 것 같다. 이 탁한 공기 속에서 숨을 쉴 수가 없다. 어디를 가야 내 마음은 가을하늘같이 명랑하여질꼬? 한번 시원히 대공을 훨훨 날아 속진에 무젖은 때를 깨끗이 씻었으면 마음이 가득할 것 같다. 아아! 공상 속에만 아름다움은 있는 것인가. 그럴진댄 차라리 공상 속에 살고 싶다. 영원히 살고 싶다. 현실을 공상과 같이 그렇게 아름답게 아름답게 빚어 놓는 수는 없나?

아름답게 아름답게 보담 더 아름답게 생활의 꿈을 공상 속에 빚어 보기에 여념이 없는 며칠 동안 서울 벗들로부터 상경 재촉의 전보를 성눌은 또 받는다.

- 전보를 받고도 올라오지 않으면 쫓아라도 내려가서 목을 매여 끌어 올리겠다는 문구다.

성눌은 두 번 볼 필요도 없이 일견에 찢어 버린다. 그리고 회답할 생각조차 엄두에 두는 길 없이 그들과의 교섭은 잊으려고 했다. 그들은 생각할 때마다 성눌은 마음이 더욱 답답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전보가 일축된 대신, 그 내용과 같이 거짓없이 사람은 기어코 내려오고야 만다. 김군이 왔다.

김군은 영업적인 그 회사의 내용 이야기를 함 바탕 펴 놓아 성눌의 비위를 낚는다.

“나를 위하는 벗들의 충성은 진심으로 감사하나, 내가 서울이 싫어 졌다는 것은 편지로도 이미 말한 것인데 군들은 왜, 이렇게 자꾸만 나를 서울로 끌어 올리자는 거야?”

“여러 말 말구 내일 아침 일찍이 떠날 차비나 해, 내, 아야 역에서 자네 차표까지 미리 두 장을 다 사가지고 왔네 이것 보게나.”

단마디에 성눌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듯이 짐꾼은 호주머니 속에서 두 장의 경성행 차표를 들어내 보인다. 기어코 데려 올려가고야 말 텐데 뭘 하는 시위가 아닐 수 없다.

순간, 성눌은 그 자기의 자유의지를 임의로 무시하려는 태도에 자못 불쾌함을 느꼈다.

“차표까지 미리 사가지고 그건 무슨 시윈가?”

“시위! 시위라기보다는 벗의 군을 위하는 그 성의는 생각지 못하나?”

“그래 벗을 위한 성의는 벗의 자유의지도 무시할 수 있는 건가?”

대답은 이렇게 하여 놓았으나 불쾌한 반면에 그실 반가운 우정을 아니 느낄 수도 없기는 없다. 자기를 오직 믿지 않았으면야 일부러 사람까지 내려 보냈으리라고 아니, 차표까지 사가지고 왔으리라고 하면 그것도 좀한 우정에서 가 아니고는 못할 일 같았다. 그들의 주위에도 실직으로 밥을 땅땅 굶고 있는 친구가 수두룩한 것을 모르는 바 아닌데 하필 자기를 끌어 올리자는 것은 오직 자기에게 대한 그들의 정의의 발로밖에 없으리라 생각하니 성 눌은 주위의 탁하던 공기가 얼마쯤 완화되는 듯한 정세를 느꼈다. 그리운 서울이 아니었으나 벗들의 그 벗을 위하는 충성에 성눌은 반항할 용기를 문득 잃는다. 어디를 가도 자기의 마음은 담을 데가 없다. 그럴진댄 터럭만한 도움도 되어지지 못하는 존재가 피땀을 흘리어 벌어 놓은 늙은 아버지의 등을 파먹고 있느니보다는 다시 서울로라도 가서 내 손으로 벌 수 있는 일을 하여 먹는 편이 차라리 나으리라 성눌은 생각을 굳히고 두 말 없이 이튿날 아침 차에 김군과 같이 몸을 실었다.

몇 달 동안에도 서울의 변화는 컸다. 있던 집이 없어지고 없던 집이 눈에 낯설다. 눈에 익던 남대문 통의 ××루라는 중국 요릿집이던 꽤 크다란 벽돌집이 벗들의 손에서 수가 난다는 회사로 알른알른하게 수리가 되어 있다.

눈에 뵈지 않는 변화인들 얼마나 있어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고 했을꼬. 변화무쌍한 세태를 생각해 보며 성눌은 거리를 걷는다.

올라오는손 그 저녁 벗들은 또 명색 성눌의 환영회를 열어 진고개 어느 요정으로 가는 길이다.

밤 늦도록 소리하고 마신다. 오래간만에 성눌은 얼근히 취해 본다. 괴로움을 잊는 즐거운 밤이었다.

한시 가까이 좋은 기분에 벗들로 어깨를 같이하고 귀로에 나섰다. 깊은 밤의 장안 거리는 어지간히 고요하다. 행인이 딱 끊진 바는 아니나, 이 성 눌의 환영회 일행의 세상인 듯이 그들의 구두 소리만이 장안에 찬다.

좀 신중하지 못한 벗 한 사람은 같은 정도의 주기이면서도 술을 빙자하여 거리의 부랑자가 된다. 기분일 탓일까 목이 찢어져라 유행가를 소리 높이 불러도 보고, 타지도 않을 택시를 손을 들어 스톱도 시키고, 지나가는 여인의 손목을 붙들어도 보며…….

하지만, 거리 사람들이 그의 주기에 다 같은 호의로 그를 대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한 번은 지나가는 행인의 어깨를 길을 어이다 잘못 되는 채 힘껏 들이받았다. 그러나, 받고 보니 잘못이다. 싸움은 일어났다. 옳거니 그르거니 밀치며 제치며 시비를 따지는 판.

성눌은 중재를 위하여 나선다. 붙은 싸움을 떼고 새에 들었다. 그러나, 들고 보니 친구는 날쌔게도 빠져나 구두 소리 높이 밤거리의 적막을 깨치며 도망친다.

그 친구를 놓친 적은 분함을 참지 못하는 듯 성눌에게로 돌려 붙는다.

“이 자식! 그래 네가 쌈을 도맡을 작정이냐? 덤별 템 덤베라 에따!”

볼 새도 없이 턱 하고 들어오는 주먹은 번개같이 성눌의 턱을 받는다. 그것뿐이면 좋았다. 단 한 개에 성눌은 쾅 하고 뒤로 자빠지며 돌같이 단단한 아스팔트 위에 머리를 받쫓는다. 또한 그것뿐이면 좋았다. 두부에서는 검붉은 피가 게재하게 흘러서 순식간 머리는 핏속에 파묻힌다. 성눌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혼도한 채 의식을 잃은 성싶다.

잘못은 어느 편에 있었다든지간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근더저 그대로 꼼짝 못하고 피만 쏟아내는 벗, 이 벗을 위하여 일행은 응당히 복수의 의무를 느껴야 옳을 것이나, 일견 적진의 행색은 거리의 부량패에 틀림없다. 쓰봉을 땅에다 찰찰 끌며 셔츠 바람에 캡을 비스듬히 쓴 사람이 둘, 노타이에 머리를 반반히 재워서 바른 골을 딱 갈라붙이고 모자도 없이 와이셔츠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올린 사람이 하나, 싸움에는 아무런 기술도 갖지 못한 벗들은 그들에게 손을 쓰기커녕은 도리어 그들의 손이 자기에게로 올까 두렵게 말로라도 한마디 대항해 볼 용기조차 잃고 다만 자기의 신변을 지키기에만 급급해 있는 동안,

“이놈들아! 다음엘랑 술은 먹드라두 점잖게 먹고 거리를 걸어라!”

약점을 본 그들은 사람을 핏속에 묻어 놓고도 오히려 뻐젓이 서서 훈계를 하고 골목으로 술눙술눙 사라진다.

그제서야 일행 중의 한 사람이던 조군은 제 자신 모욕을 느꼈는지 실로 벗의 치명상이 분했든지 또는 성눌에 대한 자기의 체면을 유지하자는 데선 지 저고리를 벗고, 넥타이를 그르며 고함을 친다.

“이놈덜아! 네놈들이 가면 어디를 갈 테냐? 덤빌 테면 덤벼 보자!”

그러나, 사람을 죽여 놓고 그들이 설사 이 소리를 들었댔자 돌아올 이치 만무하다. 반응이 없는데 조군의 소리는 더 높아진다.

“이놈덜아! 내 단주먹에 가루를 만들리라. 어디를 숨어 이놈들 나오느라!”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하여 길바닥이 깨여져라 발을 쾅쾅 구른다.

남은 벗 세 사람은 여기에도 격동할 용기가 없는 듯이 어리둥절해서 조군의 태도만 묵묵히 바라보다 움죽하고 팔을 놀리는 성눌의 거동이 눈에 띄자 아직 생명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성눌이! 성눌이! 정신 차려 응? 성눌이!”

부르며 김군이 성눌의 팔목을 잡아다린다. 성눌은 일어서 보려고 전신에 힘을 준다. 그러나, 의외로 몸을 거누지 못하야 삐뚝하고 도로 쓰러진다.

피를 너무 많이 쏟은 탓인가 얼굴은 백지같이 하얗다.

조군은 혼자서 덤비나마나 세 사람의 벗은 얼겁결에 성눌을 뒤쳐 엎고 병원을 찾아 내달았다.

새하얀 붕대로 머리를 겹겹이 둘러 감고 ××병원 이등실 한쪽 침대에 고요히 몸을 던진 성눌은 또다시 한 번 무심히 눈을 떴다. 천장에 매여 달린 오십 촉 휘황한 전등이 번개같이 눈에 꽂히며 시력을 압도한다.

주위에는 여전히 벗들이 졸리는 눈에 잠을 싣고 그린 듯이 앉았다. 그 모양은 자기에게 대해 심히 미안해하는 거동같이 성눌에게는 짐작된다. 그것이 그에게는 한껏 불쌍하게도 보였다. 이미 받은 상처니 앉아서 밤을 새며 졸아야 자기에게는 하등 필요가 없는 것을 인사상 자기의 옆을 떠나지 못하고 조는 것이다. 자기의 옆을 떠나지 못하고 조는 것이다. 자기의 신변에 위험이 미칠 염려가 있을 때는 인사에 그렇게 무디다가도 신변의 위험을 느끼지 않을 때는 이렇게도 마음 놓고 거룩히 인사를 지키는 벗들이다. 이 벗들이 자기의 벗이요, 자기는 또 그들의 벗이 된다. 그리고 자기는 그들에게 절대의 신임을 받는다. 절대의 신임을 받으므로 서울까지 올라오게 되어 받은 상처가 지금 두부에 크다. 아니, 마음에 크다.

그들의 눈에 비친 자기는 인간적으로서의 신임할 만한 그런 신임을 위한 신임을 받았던 것이 아니요, 신임할 수 있으니 자기네들에게는 이로운 것이라는 상업정책의 한낱 도구로서 신임을 받았던 존재밖에 되는 것이 없다.

성눌은 한숨과 같이 다시 눈을 감았다.

“꼭 의사의 지시대로 치료를 받아야 하네.”

벗의 손에 흔들림을 받고 다시 힘없이 눈을 떴을 때는 어느새 불은 전등에 없고, 동편 유리창을 통해야 명랑한 아침 햇살이 줄기차게 들여 쏘고 있다. 그제서야 벗들은 돌아갈 차비를 한다.

“진단 선언은 삼주간이래두 보름 동안이면 퇴원이 될게지. 어젯밤 일은 그게 말끔한 신수야. 밥 먹고 우리 또 올께.”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김군의 손에는 미깡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성눌은 못 볼 것을 또 보게 되는 듯이 마음이 산뜻함을 느끼고 힘없이 눈을 내려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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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에서 1977년 사이에 출판되었다면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인 저작에는 {{PD-1996}}를 사용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