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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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는데 스스로 선조가 주몽[1]이라 말한다.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의 딸로 부여왕의 첩으로 들어갔다. 어느날 햇빛이 쫓아와 피했으나 계속 쫓아오더니 임신하였고 보통의 다섯배나 되는 큰 알 하나를 낳았다. 부여왕이 이를 개에게 주었으나 개가 먹지 않았고 돼지에게 주었으나 돼지가 먹지 않았고 길에 놓아도 소와 말이 피해가고 들판에 버리자 뭇새들이 품어주며 깨트리려 하여도 깨지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어미가 은밀한 곳에 알을 놓고 돌보니 사내아이 하나가 알을 깨고 나왔다. 아이는 자라나 "주몽"이라 불렸는데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부여 사람들은 주몽이 사람에게서 나지 않았으니 장차 다른 뜻을 품을 것이라며 죽이라 청하였지만 왕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키우도록 명하였다.

주몽은 매일 말들을 시험하여 좋고 나쁜 것을 나눈 뒤 뛰어난 말은 적게 먹여 야위게 만들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웠다. 부여왕이 살찐 말은 자신이 타고 야윈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훗날 사냥에 나섰는데 주몽은 활을 잘 쏘므로 화살을 적게 받았지만 그 적은 화살로도 많은 짐승을 잡았다. 그러자 부여의 신하들은 다시 주몽을 죽이고자 하였다. 주몽의 어머니가 이를 미리 알고 주몽에게 이르기를 "나라가 너를 해치려 하니 너는 재능과 지략을 써서 멀리 도망가거라"고 하였다. 주몽은 오인, 오원 두 사람과 함께 부여를 빠져나와 동남쪽으로 도망쳤다. 가는 도중에 큰 물을 만나 건널 방법이 없는데 부여 사람들의 추격이 급하게 되자 주몽은 물에 대고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하백의 손자다. 오늘 도주하는데 병사의 추격이 닥쳐오니 어찌 건너야 하겠는가?"하고 외쳤다.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드니 주몽이 이를 타고 건넜다. 주몽이 다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는 흩어져버렸고 추격하는 병사들은 건널 수 없었다. 주몽은 이렇게 보술수를 건넌 뒤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베옷을 입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납의를 다른 한 사람은 물풀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이들은 주몽과 함께 홀승골성에 들어가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라 하였으며 그것을 성씨로 삼았다.

애초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처가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는데 주몽이 떠난 후 아들이 태어나 여해[2]라고 불렀다. 아들은 자라서 주몽이 나라의 왕이 된 것을 알고는 어머니와 함께 도망쳐 주몽에게 가 여달이라 불리며 나라 일을 맡았다. 주몽이 죽자 여달이 대를 이었고, 여달이 죽자 그 자식 율이 대를 이었다. 율이 죽고 막래가 대를 이었는 데 이 때 부여를 정벌하였고 부여는 크게 패하여 복속되었다. 막래의 자손들이 대대로 이어져 궁[3]에게 이르렀다. 궁은 날 때부터 나라의 악한 사람과 좋고 나쁜 곳, 나라에 닥쳐올 위험을 볼 수 있었다. 궁의 증손자 위궁[4] 역시 자신의 증조부 궁과 같이 날 때부터 보는 눈이 있었는데 그래서 위궁이라 불렸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닮은 것을 "위"라고 한다. 위궁 또한 힘 쎄고 활쏘기 말타기가 뛰어났다. 위나라 정시 연간[5]에 서안평으로 쳐들어와 관구검이 이를 격파하였다. 그의 현손 을불리[6]와 이자쇠[7]가 열제 시기에 모용씨와 서로 공격하였다. 건국 4년에 모용 원진이 군사를 이끌고 남쪽 땅에 쳐들어가 목저에서 싸우고 쇠의 군사를 크게 격파한뒤 승승장구하여 환도를 함락시키니 쇠는 홀로 말을 타고 도망쳤다. 원진은 쇠의 부왕 묘를 파해쳐 시신을 가져갔고 모친과 처를 욕보였으며 진귀한 보물과 남녀 5만여 명을 끌고가면서 궁궐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헐어버렸다. 이후 쇠는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려 하였으나 도적에게 막혀 당도하지 못했다. 쇠는 훗날 백제에서 죽임을 당했다.

세조[8] 때에 쇠의 증손 연[9]이 사자를 보내 표를 올리고 공물을 바치며 나라의 이름을 청하였다. 세조가 그 정성에 기뻐하며 황족으로서 그 나라의 이름을 쓰도록 하고 산기시랑 이오를 보내 연을 배알토록 하여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의 관직을 내렸다. 이오가 평양성에 머물면서 그 지방의 일들을 물어 기록하였는데, 고구려는 요동 남쪽 일천리로 동쪽은 책성에 닿고 남쪽은 소해에 닿으며 북쪽은 옛부여에 닿는데 민가는 이전보다 세 배 늘었다고 하였다. 위나라 때에는 그 땅이 동서로 이천리 남북으로 일천여리에 이르렀다. 백성은 모두 저마다 땅의 산과 계곡에서 살고 옷은 천이나 가죽으로 지어 입는다. 땅은 거칠고 밭은 매마르며 누에 농사 역시 스스로 쓰기에도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음식을 아낀다. 풍속이 음란하여 노래와 춤을 즐기고 밤이되면 남녀가 무리를 지어 노는데 귀천의 절도가 없으나 깨끗하고 정결함을 스스로 즐긴다. 왕은 궁실에서 다스리기를 좋아한다. 관직은 알사, 태사, 대형, 소형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머리에 절풍을 쓰는데 그 모양은 고깔처럼 생겼고 옆으로 새의 깃털을 꽂아 귀천을 나눈다. 서있을 때에는 손을 모아 잡지 않고 꿇어 앉아 배례를 할 때에는 한 쪽 다리를 끌어 세우며 걸음걸이는 뛰듯이 빠르다. 대개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나라 안의 큰 모임이다. 귀족들이 모두 비단옷을 입고 금과 은으로 꾸민 장신구를 걸치고 모인다. 웅크려 앉는 것을 좋아하고 도마와 같이 생긴 작은 상을 써서 음식을 먹는다. 밖으로 나설 때는 삼척마를 탄다. 원래 주몽이 탔던 말이라고 하는데 과하마 종류이다. 사신이 돌아올 때 황금 이백근과 은 사백근을 받아왔다.

풍문통[10]이 무리를 이끌고 넘어가자 세조는 산기상시를 연에게 보내 문통을 돌려보내라고 명령하였지만 연은 문통과 함께 왕을 받드는 것이 마땅하다는 글을 올리고 끝내 돌려보내지 않았다. 세조는 분노하여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낙평왕 비 등이 훗날을 기약하자는 의견을 내자 단념였다. 문통은 훗날 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훗날 문명태후가 현조[11]의 육궁이 채워지지 않았으니 연에게 그의 딸을 보내라고 명령하였다. 연은 자신의 딸이 이미 혼인하였으니 동생을 보내겠다고 표를 올렸고 조정은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안락왕 진과 상서 이부 등이 국경에서 폐물을 보냈다. 연의 좌우 신하들이 미혹하기를 조정이 옛날에 풍씨와 혼인하였으나 결국 그 나라를 멸망시켰으니 멀지 않은 이 일을 거울삼아 방편을 마련하고 혼담을 사양하라고 하였다. 연은 글을 올려 딸이 죽었다고 속였다. 조정은 간교한 속임수라 의심하고 가산기상시 정준을 보내 책임을 물어 만약 딸이 정말 죽었다면 조카라도 좋으니 골라서 보내라고 하였다. 연이 말하길 "천자께서 이전의 허물을 용서하신다면 삼가 명령을 받드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즈음 현조가 붕어하여 혼담이 그쳤다.

고조[12] 때에 이르러 연은 조공을 이전의 두배로 바쳤기에 그에 대한 보답도 맞추어 늘렸다. 그 때 광주가 바다에서 연이 소도성[13]에게 보낸 사신 여노 등을 잡아 궁궐로 보내왔다. 고조는 "도성은 자신의 군주를 죽인자로 강좌에서 그 호칭을 훔쳤다. 짐이 멸망한 옛 나라를 다시 세우고 끊어진 유씨의 대를 이으려하는데 경이 국경을 넘어 외교를 하여 왕위를 찬탈한 적과 멀리서 통하니 이것을 어찌 번신의 도리나 의리라 하겠는가! 이제 한 번의 잘못이 경의 옛 정성을 가릴 수는 없기에 이를 감안하여 허물을 용서하니 명백한 법을 받들고 경의 즙녕이 계속되도록[14] 살펴 듣고 행동을 조심하라"며 연에게 책임을 물었다.

태화 15년[15] 연이 죽으니 그 나이가 백여세였다. 고조는 조문할 사신으로 복야 이안을 보내 차기대장군 태전 요동군개공국 고구려왕의 시호를 내렸다. 또한 대홍로를 연의 손자 운[16]에게 사절로 보내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봉하고 관복과 기를 단 수레 등의 복식을 보내며 운에게 세자를 입조하도록 명하여 교구지례[17]를 하도록 하였다. 운이 병이 있어 갈 수 없다고 글을 올리자 종숙인 승우수를 사절로 보내어 이를 엄하게 문책하였다. 이로서 해마다 공물을 바쳤다. 정시 연간에 세종[18]이 동당으로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을 불렀다. 실불이 나아가 이르기를 "고려는 천극[19]을 우러러 섬겨 오랫동안 지극한 정성을 보였습니다. 고구려는 땅에 수풀이 우거져 왕께 공물을 바치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옥은 섭라에서 납니다. 지금 부여는 물길의 땅이 되었고, 섭라는 백제에 속하여 있어 고구려의 국왕인 신 운은 오직 끊어진 것을 잇는 의리로 그 유민들을 국경 안으로 옮겼습니다. 이 두 가지 물건을 왕부에 올리지 못하는 것은 실로 두 도적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세종은 "고려는 오랫동안 상장군으로 바다 밖의 일들을 독자적으로 처리하여 교활한 아홉 동이족을 정벌하였다. 술동이가 좀 비었다고 어찌 허물이라 하겠는가? 이전에 공물을 올리지 않은 허물은 그 책임이 연솔[20]에게 있다. 경은 내가 배푸는 이러한 뜻을 경의 주군에게 알려 위엄을 보이며 다스리는 일에 매진하고 동예의 즙녕을 부수어 찢고 또한 두 읍을 옛 터에 복구하여 땅에서 나는 것을 잃는 일이 없게 하여 늘 조공토록 하라"고 일렀다.

신귀[21] 연간에 운이 죽자 영태후[22]가 동당에가 애도하였고 사신을 보내 차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증수하였다. 또한 그 세자 안[23]을 배알하여 동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의 관직을 내렸다. 정광[24] 초에 광주의 관리가 바다에서 또 소연[25]의 사신이 안녕동장군의 의관과 검패를 갖고 가는 것을 붙잡아 사신 강법성 등을 경사로 압송해 왔다. 안이 죽자 아들 연[26]이 왕위를 이었다. 출제[27] 초에 연에게 사지절 산기상시 차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의 관직을 내리고 관복과 수레, 깃발을 주었다. 천평[28] 연간에는 정시중 표기대장군의 관직을 더하였고 나머지는 이전과 같도록 하였다. 연이 죽자 아들 성[29]이 왕위를 이었다. 무정 말에 이르기까지 그침 없이 조공을 보내왔다.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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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국은 스스로 부여에서 나왔다고 한다. 북쪽으로 천여리에 고구려가 있고 소해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백성은 땅에 정착하여 사는데 땅은 다소 축축하고 사람들은 산에 거처를 마련하여 산다. 오곡을 재배하고 의복이나 음식은 고구려와 같다.

연흥 2년[30] 백제의 왕 여경[31]이 사신을 보내오기 시작하며 표를 올려 말하기를 "신이 세운 나라는 동쪽 끝에 있고 승냥이와 이리가 길을 막아 비록 대대로 황제가 내리는 은덕을 입고자 하여도 번국이 될 방법이 없고 황제의 궁궐을 우러러 보지만 그저 그리운 정만 망극합니다. 찬바람이 불어도 응답이 적으니 업드려 바랍니다. 황제폐하께서는 주위 나라들이 평화로이 협력하게 하고 천하를 한가로이 쉬게 하기에 우러르는 마음을 다할 길 없어 삼가 제가 임명한 관군장군 부마도위불사후 장사 여례와 용양장군 대방태수 사마 장무 등을 배에 태우고 파도를 넘게 하여 현진으로 보냅니다. 자연의 운에 목숨을 맡기더라도 만분의 일의 정성이나마 보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데 하늘의 신과 땅의 기가 감응하고 황제의 은덕으로 천정[32]에 다다르게 되어 신의 뜻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된다면 그날 저녁에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더라도 아무런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신의 나라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며 선조의 때에는 서로 도탑게 지냈습니다. 할아버지 대에 고구려의 쇠가 이웃간의 호의를 가벼이 버리고 친히 무리를 이끌고 신의 국경을 침범해 왔습니다. 신의 할아버지 수[33]가 벼락같이 달려나가 맞받아 공격하니 서로에게 활과 돌이 오갔고 쇠의 목을 배었습니다. 이 때부터 감히 남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풍씨의 운수가 다하여 깜부기처럼 남은 무리들마저 바삐 도망가니 추악한 무리들이 점점 거세어져 이윽고 능묘가 업신여김을 당하게 되었고, 얽힌 원한과 화가 삼십여 해에 이르게 되니 나라의 재물은 흩어지고 힘은 고갈되어 점차 쇠약하게 되었습니다. 천자께서 불쌍히 여겨 굽어 살피시는 것이 머나먼 외방도 빠뜨리지 않는다면 장수 한 명을 빨리 보내어 신의 나라를 구하러 와 주십시오. 마땅히 제 딸을 후궁으로 보내 빗자루를 들게 하고 또한 제 아들을 보내 목장과 마굿간을 돌보게 할 것입니다. 한 자의 땅을 가진 필부도 자신이 가진 것을 버리지 않는 법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말하기를 "지금 고구려의 연은 죄를 지어 나라를 어육으로 만들고 대신과 귀족들을 사정없이 죽이니 죄는 차고 악행은 쌓여 백성들마저 흩어져 떠나고 있습니다. 이는 멸망시킬 기회이니 손을 빌려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또한 풍씨족의 무리와 말들은 새와 가축이 그러하듯 옛 주인을 그리워하고 낙랑의 모든 군들이 수구지심의 마음으로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천자의 위엄으로 한 차례만 거둥하셔도 전쟁조차 치르지 않고 정복하실 것입니다. 신은 그저 불민하나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마땅히 모두를 이끌고 바람을 타고 맞대응할 것입니다. 또한 고려는 의롭지 않은 나라여서 천자의 뜻을 거스르고 속인 일이 한 두번이 아니어서 밖으로는 외효[34]가 일으켰던 번국의 일을 꿈꾸고, 안으로는 흉악한 마음을 품고 돼지가 날뛰듯 행동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남조의 유씨[35]와 밀통하는가 하면 때로는 북쪽의 연연[36]과 밀약을 나누어 마치 서로 이와 입술처럼 굴면서 왕의 영토를 두고 모략을 일삼고 있습니다. 옛날 당요[37]가 성덕을 다할 때에도 단수를 벌하였으며 맹상군을 인자하다 말하나 그도 더러운 것을 꾸짖음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흐르는 시냇물도 막고자 하면 빨라야 하는데, 지금 고구려를 취하지 않는다면 장차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년 이후 신의 나라 서쪽 경계인 소석산북국의 바다 가운데에서 시신 십여구가 발견되었는데 함께 건진 옷이며 그릇 말안장과 굴레를 살피니 고려의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듣기로는 임금님께서 보내 신의 나라로 오던 사람이었습니다. 큰 뱀이 길을 막고 바다에 잠기게 했다는데 그 사정을 알지 못하겠으나 참으로 분통이 터지는 일입니다. 옛날 송나라가 신주[38]를 죽이자 초 장왕은 맨발로 걸었으며, 새매가 풀어준 비둘기를 잡자 신릉군[39]은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적을 누르고 명성을 떨치는 것은 더 없이 크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변방에 있는 자잘 자잘한 나라들도 오히려 만대에 이르는 신의를 흠모하는데 하물며 폐하는 천지의 기와 합하여 기세가 산과 바다를 기울이는데 어찌 더벅머리 아이가 천자가 가려는 길을 걸터 앉아 막게 두십니까. 지금 발견한 안장 하나를 올리니 이를 보시고 사실을 살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현조는 그 나라가 멀리 벽지에 있는데도 위험을 무릅쓰고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기에 예를 갖추어 접대하고 후하게 답례하였고, 백제의 사신이 돌아가는 길에 소안을 사자로 함께 보냈다. "표를 보아 들으니 근심할 것 없이 매우 좋다. 경은 동쪽 귀퉁이에 있어 다섯 가지 관복을 입지 않아도 되는 외방에 놓여있는데도 산과 바다가 멀다 하지 않고 위나라 궁궐에 와서 성의를 다하였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그 뜻에 기쁘기 그지없다. 짐은 만세의 과업을 이어받아 사해를 다스리는 군주로서 모든 무리들을 거느려 제어한다. 지금 집안의 모든 일이 맑게 이루어지고 팔방에서 올리는 표가 의롭기에, 이고 지며 장사를 다니는 자가 그 수를 셀 수 없고 풍속은 온화하며 병사와 군마도 강성하니 직접 와서 보고 들은 그대로다. 경과 고려가 불목하는 것은 서로 번갈아가며 능역을 범했기 때문이니 구차하게 순리며 의리를 따지기 보다 어진 마음으로 지킨다면 어찌 도적이나 원수가 있겠는가. 예전에 보냈던 사자는 나라 밖의 거친 바다를 떠돌다가 그리 된 것으로 여러 해가 지난 일이어서 제대로 당도하지 못한 사정을 알기 어렵다. 경이 보낸 안장을 옛 탈것들과 비교하여 보았으나 중국의 것이 아니다. 견주어 볼 비슷한 일이 없으나 분명 어쩔 수 없는 화로 인한 일일 것이다. 공격하여 얻은 땅을 권세로 다스리는 것에 대해서는 따로 이르도록 하겠다"고 답하였다.

또한 답하기를 "알기로 고구려가 강함을 앞세워 경의 땅을 침입한 일은 앞선 왕의 옛 원한 때문이요 백성을 길러야 하는 큰 덕을 버린 것으로 여러 차례 전쟁을 일으키고 병사가 싸우하니 어지러운 일로 변방을 황폐하게 하였다. 사신들은 신포서[40]의 충성을 지녔고 나라는 초나라와 월나라가 처했던 위급함에 놓였으니 이제 마땅히 의로움을 펼쳐 조금이라도 도와 기회가 닿으면 번개처럼 공격할 것이다. 다만 고려는 선대부터 번국을 자청하여 왔고 오래 전에 관직을 지녀 그들에게 비록 스스로 지은 옛 허물이 있다고 하여도 아직 나라의 명을 어기는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경의 사신이 왕래를 시작하면서 또한 치죄와 정벌을 구하기에 토벌할 일을 의논하였으나 마땅한 명분이 부족하다. 따라서 작년 예 등을 평양에 보낼 때 그 이유와 정황을 시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빈번하게 주청하는 말이 이치에 닿고 보낸 사람이 그 청을 막을 수 없으며 법을 적용하여 보아도 그 책임을 물을 수 없었기에 따라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예 등에게 돌아오라고 지시하였다. 만일 지금 고구려가 지시를 어긴다면 그 잘못이 이슬 맺히듯 드러날 것이요 훗날 오히려 스스로 방어를 강화하여 진을 쌓는다면 죄를 피해 달아날 곳이 없을 것이니 그 후에 토벌하는 것이 의롭다고 할 것이다. 아홉 동이족의 국가는 대대로 바다 밖에 살기에 도리가 널리 퍼지면 번국이 되고 은혜가 거두어 지면 국경을 지키기만 하였다. 따라서 옛 책에 기미[41]라고 적혀 있기는 하나 절기에 맞추어 화살대를 만들 공물을 보내올 뿐이다. 경은 군사의 강하고 약한 모양을 비교하고 옛 나라들의 발자취를 열거하였지만 풍속이 다르고 사정이 달라 은혜를 배풀고자 하나 해줄 수 있는 것은 속마음과 달리 어글어질 뿐이어서 크게 대략적인 것만 말하여도 그 속에 여전히 있는 것을 살펴주기 바란다. 이제 중국이 하나로 평정되고 집안에 근심이 없으니 매일 동쪽 끝으로도 위엄을 보여야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깃발을 나부끼며 그 지역에 나아가 외딴 곳의 황폐함를 건져 올리고 먼 곳의 옷자락에도 황제의 바람이 닿게하려 한다. 아직까지는 고려에 분명한 명분이 있으니 정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만일 고려가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경이 말한 책모가 짐의 뜻과 합쳐지니 정벌을 위해 행군을 명하여도 어느 장수 하나 멀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함께 움직일 것을 상정하고 일이 있기를 기다리면 때에 맞춰 사신을 보낼 것이니 빨리 적의 동정을 살피고 군사를 일으키는 날 경이 무리를 이끌고 앞장서면 대첩을 이룬 후에 또한 으뜸가는 공적으로 상을 받을 것이니 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그대가 보냈다고 하는 금포며 해산물은 비록 전부가 도착하지는 않았으나 그것만으로도 경의 마음은 환하게 알겠다. 이제 따로 목록에 있는 여러 물건을 보낸다"고 하였다. 또한 연에게 안 등의 사자를 호위하여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안 등이 고구려에 도착하자 연은 옛날에 여경과 원수가 된 일을 말하며 동쪽으로 지나지 못하게 하였다. 안 등은 이에 모두 돌아왔고 큰 책임을 묻는 글을 내려보냈다. 연흥 5년 안 등을 동쪽 바다를 통해 보내 여경에게 옥새를 찍은 글을 내리고 그 정성과 절개를 기리도록 하였다. 안 등은 바닷가로 가 바람을 타고 거친 바다를 건넜으나 결국 닿지 못하고 돌아왔다.

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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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으며 옛 숙신국이다. 읍락마다 각자 수장이 있고 모두를 다스리는 지도자는 없다. 사람들은 억세고 사나워 동이족 가운데 가장 강하다. 쓰는 언어가 홀로 다르다. 늘 두막루국 등과 다투며 다른 모든 나라들도 걱정거리로 여긴다. 낙양에서 오천리 떨어져 있다. 화룡에서 북쪽 이백여리에 선옥산이 있고 이 산에서 북쪽으로 13일 거리에 기려산이 있으며 또 북쪽으로 7일을 가면 여락괴수에 닿는데 물의 넓이는 한 리 정도 이다. 여기서 또 15일을 북쪽으로 가면 태노수이고 다시 동쪽으로 18일을 가면 이 나라에 닿는다. 나라에 큰 물이 있어서 넓이가 3 리 정도 되는데 속말수라고 한다. 땅 밑이 축축하여 성을 쌓고 굴을 파서 산다. 집은 무덤처럼 생겼는데 입구를 땅 위로 내고 사다리를 타고 나든다. 이 나라는 소가 없고 수레와 말만 있다. 밭은 짝을 맞추어 사람이 갈고 수레도 사람이 들고 끈다. 곡식으로는 보리와 기장을 기르고 채소로는 규(葵)가 있다. 물은 기운이 짜고 굳다. 나무 위로 소금이 맺히고 소금물로 된 연못도 있다. 돼지는 많이 기르고 양은 기르지 않는다. 쌀을 씹어 술을 빚으며 취할 때까지 마신다. 부인들은 천으로 만든 치마를 입는데 남자들은 개나 돼지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는다. 결혼 첫날 저녁에 남자는 여자의 집으로 가 여자의 젓을 만지고 물러나 서로 정혼하고 잉태하면 부부가 된다. 물에 잠겨 손과 얼굴을 씻는 풍속이 있다. 머리에 호랑이나 표범의 꼬리를 꽂는다. 활을 쏘아 사냥하는 것이 뛰어나고 활의 길이는 석 자, 살의 길이는 한 자 두 치이고 돌로 만든 촉이 달려 있다. 봄 여름에 부모가 죽으면 세워서 묻고 그 위에 집을 지어 비나 물기가 들지 않게 한다. 가을 겨울이면 그 시체로 담비를 잡는다. 담비가 육신을 먹으려 할 때를 노리는데 많이 잡는다. 보통 칠팔월에 독약을 화살촉에 바르고 들짐승이며 날짐승을 잡는데 맞으면 반드시 죽는다. 독약을 만들 때 나오는 증기도 능히 사람들 죽일 수 있다. 나라의 남쪽에 도태산이 있는데 위나라 말로 "크고 희다"는 뜻으로 호랑이, 표범, 곰, 이리와 같은 짐승들이 사람을 해치기 때문에 사람들이 산에서는 오줌을 누지도 않고 산을 지날 때에는 모두 그릇을 두드리며 간다.

지난 연흥 연간에 을력지를 사신으로 보내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태화 초에는 또 말 오백 마리를 바쳤다. 을력지가 말하길 "처음에 나라를 떠날 때에는 난하 서쪽에서 배를 타고 위쪽으로 올라가 태려하에 닿았고 배를 가라앉히고 남쪽으로 육로를 따라 내려오다 낙고수를 건너 거란의 서쪽 경계를 따라 화룡에 도착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그 나라가 먼저 고구려의 열 고을을 깨트렸고 백제와 몰래 도모하기를 함께 물길을 따라 고구려를 공격하여 얻으려고 하는데 그 가부를 청한다고 하였다. 조서를 내려 지시하기를 세 나라는 모두 번국이니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순리이고 서로의 국경을 침범하지 말라고 하였다. 을력지는 이에 돌아가며 종래의 길을 되짚어 가라앉힌 배를 다시 띄우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연흥 9년 다시 사신 후니지를 보내 입조하고 조공하였고 다음 해 다시 조공하였다.

그 옆으로 대막로국, 복종국, 막다회국, 고루국, 소화국, 구불복국, 필려이국, 발대하국, 욱우릉국, 고복진국, 노루국, 우진후국이 있는데 이 무렵의 앞뒤로 사신을 보내 입조하고 조공을 바쳤다.

태화 12년, 물길이 다시 경사로 사신을 보내 화살대를 방물로 바쳤다. 17년 다시 사신 인바시 등 5백여 명이 입조하고 공물을 바쳤다. 경명 4년에도 기력귀 등이 사신으로 와 조공하였다. 이때부터 정광 연간까지 조공과 사신이 끊이지 않았다. 이후 중국이 소란에 빠지자 간혹 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흥화 2년 유월 석구운이 사신으로 와 방물을 조공하였고 무정 연간까지 끊이지 않았다.

실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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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위국은 물길의 북쪽 천리에 있어 낙양으로부터 6천리이다. 가는 길은 화룡에서 북쪽으로 천여리를 간 뒤 거란국으로 들어가 또 북쪽으로 열흘을 가면 철수가 나오고 거기서 다시 북쪽으로 사흘을 가면 개수가 나오며 다시 북쪽으로 사흘을 가면 독료산이 있는데 산이 높고 커서 둘레가 삼백여리이다. 거기서 다시 북쪽으로 사흘을 가면 궐리라고 불리는 큰 물이 있고 또 사흘을 북쪽으로 가면 인수에 닿으며 다시 닷새를 북쪽으로 가면 그 나라에 도착한다. 큰 물이 북쪽으로 흘러가는데 폭이 4여 리이고 내수라고 불린다. 국토는 축축하다. 언어는 고막해 거란 두막루국과 같다. 곡식으로는 조 보리나 기장만을 기르고 주로 돼지와 물고기를 먹으며 소와 말을 기르는데 양은 기르지 않는다. 여름에는 성에서 살고 겨울엔 물과 풀을 쫓아다닌다. 여기도 담비 가죽이 많다. 성인 남자는 머리를 땋아 동아줄처럼 늘인다. 뿔로 만든 활을 쓰는데 살이 유난히 길다. 여성은 머리를 묶고 쪽을 지어 올린다. 이 나라에는 남의 물건을 훔치는 일이 적고 도적질을 하면 세 배로 갚아야 한다. 사람을 죽인 자는 말 삼백필로 변상해야 한다. 남녀 모두 흰사슴 가죽으로 바지며 저고리를 지어 입는다. 누룩으로 빚은 술이 있다. 붉은 구슬을 좋아하는 풍속이 있어 부인들이 차고 다닌는데 목걸이에 꿰어있는 구슬이 많을 수록 귀하다고 여긴다. 혼례를 올리지 않은 딸은 이런 목걸이를 하지 않는다. 부모가 죽으면 남녀 자식들이 삼년 동안 곡을하고 시신은 숲 속 나무 위에 올려둔다. 무정 2년 4월 장언두벌 등을 첫 사신으로 보내와 방물을 조공하였고 무정 말에 이르기까지 공물과 사신이 번갈아 찾아왔다.

두막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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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막루국은 물길국에서 북쪽으로 천리 떨어져 있어 낙양에서 6천리이고 옛 북부여이다. 실위의 동쪽에 있는데 그 보다 동쪽은 바다이며 나라의 크기는 2천리이다. 사람들은 땅에 매여 살고 궁실과 창고를 갖추었다. 산과 구릉이 많고 못이 넓은데 동이의 영역 가운데 가장 평평하고 높다. 땅에는 오곡이 자라지만 오과는 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키가 크고 성질이 굳고 용감한데 조심스럽고 중후하며 훔치거나 뺏지 않는다. 이 나라의 군장은 모두 여섯 가축의 이름을 딴 관직에 있고 읍락마다 다스리는 장수가 있다. 조두 그릇을 이용하여 먹고 마신다. 베옷을 입는데 고구려의 것보다 폭이 크다. 나라의 대인은 금과 은으로 수 놓은 옷을 입는다. 형벌이 엄하여 살인한 자는 죽이고 그 가족들을 노비로 삼는다. 음행을 저지르거나 우악스럽게 질투하는 부인은 죽인 다음 시체를 그 나라의 남쪽 산에 버려 썪게 한다. 여자의 집에서 이를 거두려 하면 말과 소를 바쳐야한다. 혹자는 본래 예맥의 땅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지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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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두우국은 실위의 서쪽 천여리에 있다. 소와 양이 많고 명마가 나온다.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고 오곡은 나지 않으며 오직 고기와 젖만 먹는다. 연흥 2년 8월 사신을 보내와 입조하고 조공하였고 태화 6년에 이르기까지 조공과 사신이 끊이지 않았다. (태화)14년 자주 국경을 침입하여 고조가 정서대장군 양평왕으로 하여금 물리쳐 쫓도록 하였다. 그 이후 때때로 경사로 와 입조하였고 무정 말년에 이르기까지 조공과 사신이 끊기지 않았다.

고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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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막해국의 선조는 원래 동쪽 우문씨[42]의 다른 갈래였다. 애초에 모용 원진이 물리치니 유민들이 송막의 사이로 흩어졌다. 백성은 깨끗하지 못하고 활로 사냥하기를 잘하며 노략질과 도둑질을 즐긴다. 등국 3년 태조[43]가 친히 토벌에 나서 약낙수 남쪽에서 크게 격퇴한 뒤 네 부락에서 말과 소, 양, 돼지 십여 만 마리를 얻었다. 황제가 이르길 "이 오랑캐 무리들은 하나같이 도의를 모르니 서로 간에도 뺏고 훔치며 급기야 왕의 땅을 침범하였기에 정벌하였다. 쥐나 개처럼 좀도둑질을 일삼으니 어찌 근심이 가시겠는가. 이제 중국의 고을에 큰 난이 일어나 내가 이를 미리 평정하니 이후 이 일로 위엄을 보여 다시 복종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로써 남쪽으로 수레와 멍에를 돌려 운중에 돌아오니 연조에게 복속되었다. 십수년 사이에 고막해의 모든 무리들 역시 번성하였다. 요해의 어귀부터 굳게 지키는 화룡까지 모든 동이족이 두려워 떨며 저마다 앞다투듯 방물을 바쳤다. 고종과 현조 치세에 고막해는 해마다 명마와 무늬가 있는 가죽을 바쳤다. 고조 초에 사신을 보내와 입조하고 조공하였다. 태화 4년 갑자기 국경을 넘어 지두우국을 노략질하였기에 조서를 보내 그 책임을 엄하게 물었다. 22년 안주로 들어와 노략질하므로 영연유 3주의 병사 수천인을 보내 물리쳐 쫓았다. 훗날 관부에 복귀하여 해마다 국경을 넘어 백성들과 교역하기를 원하옇다. 세종이 지시하여 이르기를 "고막해는 지난 태화 21년 이전에는 안영 2주와 함께 변방에서 어울려 살면서 교역을 위해 왕래하면서 아무런 의심할 것이 없었다. 22년 반역을 한 이래로 멀리 쫓겨나게 되었다. 이제 관부에서 올린 변방의 표에 있기로는 매번 국경을 넘어 들어와 백성들과 교역을 하길 청한다고 한다. 만일 이를 억압하고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이 돌아설 것이고 들어준다면 근심이 없을 것이나 혹시라도 있을 만일의 일은 경계하도록 하라. 앞서 맡긴 교역에 의지하려고만 하는 것을 용납하지 말고 일처리에는 분명한 제한을 두며 교역 시장은 낮 동안에만 열고 주에서 감독관을 상주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해마다 입조하여 조공을 바쳤고 무정 말까지 끊이지 않았다.

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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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국은 고막해의 동쪽에 있으며 그들과 같은 부족의 다른 갈래로 송막의 사이에 흩어져 산다. 등국[44] 연간에 나라의 군대가 크게 물리쳐 멀리 내쫓고 그들의 땅은 고막해와 나누었다. 그 후 10년이 지나 조금씩 차츰 불어나 화룡의 북쪽 수백리에 부락을 이루고 자주 노략질을 일삼았다. 진군 이래 입조를 원하여 해마다 명마를 조공으로 가져왔다. 현조 때에 막불[45] 흘하진을 보내와 공물을 바치고 여러 나라 반열의 끝자리를 얻었다. 돌아가 중국의 아름다움을 서로 말하여 모두 마음에서 이를 사모하게 되어 이로부터 동북의 오랑케 사이에서 복종할 생각을 하지 않은 곳이 없다. 실만단부, 하대하부, 복불욱부, 우릉부, 일련부, 필결부, 여부, 토육우부 등이 각자 그들의 명마와 무늬있는 가죽을 천부[46]에 바치며 해마다 이렇게 하기를 청해왔다. 모두 화룡과 밀운 사이에서 교역 시장을 열도록 하였고 공물이 끊이지 않았다. 태화 3년 고구려가 연연과 모의하여 지두우를 나누어 갖고자 하였다. 거란은 이 침략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막불 가물우가 부락의 수레 3천 승에 만여 명의 무리와 갖가지 가축을 이끌고 국경 안에 들어와 살기를 청하고 백랑수 동쪽에 머물었다. 이 때부터 해마다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고 훗날 기아에 시달린다 알려오기에 고조가 불쌍히 여겨 그들이 입관하여 식량을 사갈 수 있도록 하였다. 세종에서 숙종[47] 때에 이르러 언제나 사신을 보내와 방물을 바쳤다. 희평[48] 연간에 거란으로 보낸 사신 조진 등 30여 명이 돌아오자 영태후가 그들의 시집 장가드는 풍속을 물었다. 거란은 푸른 모직으로 만든 것을 가장 좋은 옷으로 여겨 푸른 모직 두 필을 예물로서 보내 정성스런 마음을 보이는데 나머지는 옛날 방식에 따른다고 한다. 제[49]가 제위를 선양받을 때까지 조공이 그치지 않았다.

오락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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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후국은 지두우의 북쪽 땅에 있고 대도에서 사천오백여 리 떨어져 있다. 땅은 축축하고 안개가 잦으며 춥다. 백성은 겨울엔 땅을 파서 방을 만들고 여름엔 초원과 언덕을 따라 가축을 기른다. 돼지가 많고 곡식으로 보리를 기른다. 대군장은 없고 부락마다 막불이 다스린다. 그들의 풍속은 머리를 밧줄처럼 땋아 내리고 가죽옷을 입으며 구슬을 장신구로 차고다닌다. 용맹을 숭상하고 간교한 일이나 도적질을 하지 않기에 거둔 것을 들판에 쌓아두어도 훔쳐가는 이가 없다. 활로 사냥하기를 즐긴다. 공후를 연주하는데 나무 구유에 가죽을 입히고 아홉개의 현을 걸어 만든다. 이 나라의 서북쪽에 완수가 있는데 동북으로 흘러 난수와 합쳐진다. 이곳의 물들은 모두 난수로 흘러 들어가 동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른다. 또한 서북으로 20여 일을 가면 우사니대수가 있는데 이르기를 북해라고 한다. 세조 진군 4년 조정에 와 자신들의 나라 서북쪽에 국가 선대 황제의 옛 무덤이 있는데 석실은 남북 90보, 동서 40보, 높이 70 척이며 석실에는 신령이 깃들어 백성들이 소원을 빈다고 하였다. 세조가 중서시랑 이창을 보내 제사를 올리도록 하고 석실의 벽에 축문을 세긴뒤 돌아오게 하였다.

사관 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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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이 이르기를 동이와 북적은 중국의 기미국들이다. 고려는 해마다 공물을 바치며 직분을 지켜 동쪽 번국의 관모를 쓰고 즐거운 일이나 슬픈일에 예를 갖춰 스스로 천조로 오니 역시 가장 뛰어나다. 기타 이곳 저곳도 정성스런 공물을 싣고 소와 말을 내지로 향하게 하니 동풍이 법도를 들인다고 하겠다.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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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者,出於夫餘,自言先祖朱蒙。朱蒙母河伯女,為夫餘王閉於室中,為日所照,引身避之,日影又逐。既而有孕,生一卵,大如五升。夫餘王棄之與犬,犬不食;棄之與豕,豕又不食;棄之於路,牛馬避之;後棄之野,眾鳥以毛茹之。夫餘王割剖之,不能破,遂還其母。其母以物裹之,置於暖處,有一男破殼而出。及其長也,字之曰朱蒙,其俗言「朱蒙」者,善射也。夫餘人以朱蒙非人所生,將有異志,請除之,王不聽,命之養馬。朱蒙每私試,知有善惡,駿者減食令瘦,駑者善養令肥。夫餘王以肥者自乘,以瘦者給朱蒙。後狩于田,以朱蒙善射,限之一矢。朱蒙雖矢少,殪獸甚多。夫餘之臣又謀殺之。朱蒙母陰知,告朱蒙曰:「國將害汝,以汝才略,宜遠適四方。」朱蒙乃與烏引、烏違等二人,棄夫餘,東南走。中道遇一大水,欲濟無梁,夫餘人追之甚急。朱蒙告水曰:「我是日子,河伯外孫,今日逃走,追兵垂及,如何得濟?」於是魚鼈並浮,為之成橋,朱蒙得渡,魚鼈乃解,追騎不得渡。朱蒙遂至普述水,遇見三人,其一人著麻衣,一人著納衣,一人著水藻衣,與朱蒙至紇升骨城,遂居焉,號曰高句麗,因以為氏焉。

初,朱蒙在夫餘時,妻懷孕,朱蒙逃後生一子,字始閭諧。及長,知朱蒙為國主,即與母亡而歸之,名之曰閭達,委之國事。朱蒙死,閭達代立。閭達死,子如栗代立。如栗死,子莫來代立,乃征夫餘,夫餘大敗,遂統屬焉。莫來子孫相傳,至裔孫宮,生而開目能視,國人惡之。及長凶虐,國以殘破。宮曾孫位宮亦生而視,人以其似曾祖宮,故名為位宮,高句麗呼相似為「位」。位宮亦有勇力,便弓馬。魏正始中,入寇遼西安平,[50]為幽州刺史毋丘儉所破。其玄孫乙弗利,利子釗,烈帝時與慕容氏相攻擊。建國四年,慕容元真率眾伐之,入自南陝,戰於木底,大破釗軍,乘勝長驅,遂入丸都,釗單馬奔竄。元真掘釗父墓,載其屍,并掠其母妻、珍寶、男女五萬餘口,焚其宮室,毀丸都城而還。自後釗遣使來朝,阻隔寇讎,不能自達。釗後為百濟所殺。

世祖時,釗曾孫璉始遣使者安東奉表貢方物,并請國諱。世祖嘉其誠款,詔下帝系名諱於其國,遣員外散騎侍郎李敖拜璉為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郎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敖至其所居平壤城,訪其方事,云:遼東南一千餘里,東至柵城,南至小海,北至舊夫餘,民戶參倍於前。魏時,其地東西二千里,南北一千餘里。民皆土著,隨山谷而居,衣布帛及皮。土田薄塉,蠶農不足以自供,故其人節飲食。其俗淫,好歌舞,夜則男女羣聚而戲,無貴賤之節,然潔淨自喜。其王好治宮室。其官名有謁奢、太奢、大兄、小兄之號。頭著折風,其形如弁,旁插鳥羽,貴賤有差。立則反拱,跪拜曳一脚,行步如走。常以十月祭天,國中大會。其公會,衣服皆錦繡,金銀以為飾。好蹲踞。食用俎几。出三尺馬,云本朱蒙所乘,馬種即果下也。後貢使相尋,歲致黃金二百斤,白銀四百斤。

時馮文通率眾奔之,世祖遣散騎常侍封撥詔璉令送文通,璉上書稱當與文通俱奉王化,竟不送。世祖怒,欲往討之,樂平王丕等議待後舉,世祖乃止,而文通亦尋為璉所殺。

後文明太后以顯祖六宮未備,敕璉令薦其女。璉奉表,云女已出嫁,求以弟女應旨,朝廷許焉,乃遣安樂王真、尚書李敷等至境送幣。璉惑其左右之說,云朝廷昔與馮氏婚姻,未幾而滅其國,殷鑒不遠,宜以方便辭之。璉遂上書妄稱女死。朝廷疑其矯詐,又遣假散騎常侍程駿切責之,若女審死者,聽更選宗淑。璉云:「若天子恕其前愆,謹當奉詔。」會顯祖崩,乃止。

至高祖時,璉貢獻倍前,其報賜亦稍加焉。時光州於海中得璉所遣詣蕭道成使餘奴等送闕,高祖詔責璉曰:「道成親殺其君,竊號江左,朕方欲興滅國於舊邦,繼絕世於劉氏,而卿越境外交,遠通篡賊,豈是藩臣守節之義!今不以一過掩卿舊款,即送還藩,其感恕思愆,祗承明憲,輯寧所部,動靜以聞。」

太和十五年,璉死,年百餘歲。高祖舉哀於東郊,遣謁者僕射李安上策贈車騎大將軍、太傅、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諡曰康。又遣大鴻臚拜璉孫雲使持節、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郎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賜衣冠服物車旗之飾,又詔雲遣世子入朝,令及郊丘之禮。雲上書辭疾,惟遣其從叔升于隨使詣闕,嚴責之。自此歲常貢獻。正始中,世宗於東堂引見其使芮悉弗,[51]悉弗進曰:「高麗係誠天極,累葉純誠,地產土毛,無愆王貢。但黃金出自夫餘,珂則涉羅所產。今夫餘為勿吉所逐,涉羅為百濟所并,國王臣雲惟繼絕之義,悉遷于境內。二品所以不登王府,實兩賊是為。」世宗曰:「高麗世荷上將,專制海外,九夷黠虜,實得征之。瓶罄罍耻,誰之咎也?昔方貢之愆,責在連率。卿宜宣朕旨於卿主,務盡威懷之略,揃披害羣,輯寧東裔,使二邑還復舊墟,土毛無失常貢也。」

神龜中,雲死,靈太后為舉哀於東堂,遣使策贈車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又拜其世子安為安東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正光初,光州又於海中執得蕭衍所授安寧東將軍衣冠劍佩,及使人江法盛等,送於京師。安死,子延立。出帝初,詔加延使持節、散騎常侍、車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賜衣冠服物車旗之飾。天平中,詔加延侍中、驃騎大將軍,餘悉如故。延死,子成立。訖於武定末,其貢使無歲不至。

百濟國,其先出自夫餘。其國北去高句麗千餘里,處小海之南。其民土著,地多下濕,率皆山居。有五穀,其衣服飲食與高句麗同。

延興二年,其王餘慶始遣使上表曰:「臣建國東極,豺狼隔路,雖世承靈化,莫由奉藩,瞻望雲闕,馳情罔極。涼風微應,伏惟皇帝陛下協和天休,不勝係仰之情,謹遣私署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餘禮,龍驤將軍、帶方太守、司馬張茂等投舫波阻,搜徑玄津,託命自然之運,遣進萬一之誠。冀神祇垂感,皇靈洪覆,克達天庭,宣暢臣志,雖旦聞夕沒,永無餘恨。」又云:「臣與高句麗源出夫餘,先世之時,篤崇舊款。其祖釗輕廢隣好,親率士眾,陵踐臣境。臣祖須整旅電邁,應機馳擊,矢石暫交,梟斬釗首。自爾已來,莫敢南顧。自馮氏數終,餘燼奔竄,醜類漸盛,遂見陵逼,構怨連禍,三十餘載,財殫力竭,轉自孱踧。若天慈曲矜,遠及無外,速遣一將,來救臣國,當奉送鄙女,執掃後宮,并遣子弟,牧圉外廐。尺壤匹夫不敢自有。」又云:「今璉有罪,國自魚肉,大臣強族,戮殺無已,罪盈惡積,民庶崩離。是滅亡之期,假手之秋也。且馮族士馬,有鳥畜之戀;樂浪諸郡,懷首丘之心。天威一舉,有征無戰。臣雖不敏,志效畢力,當率所統,承風響應。且高麗不義,逆詐非一,外慕隗囂藩卑之辭,內懷兇禍豕突之行。或南通劉氏,或北約蠕蠕,共相脣齒,謀陵王略。昔唐堯至聖,致罰丹水;孟常稱仁,不捨塗詈。涓流之水,宜早壅塞,今若不取,將貽後悔。去庚辰年後,臣西界小石山北國海中見屍十餘,并得衣器鞍勒,視之非高麗之物,後聞乃是王人來降臣國。長蛇隔路,以沉于海,雖未委當,深懷憤恚。昔宋戮申舟,楚莊徒跣;鷂撮放鳩,信陵不食。克敵建名,美隆無已。夫以區區偏鄙,猶慕萬代之信,況陛下合氣天地,勢傾山海,豈令小竪,跨塞天逵。今上所得鞍一,以為實驗。」

顯祖以其僻遠,冒險朝獻,禮遇優厚,遣使者邵安與其使俱還。詔曰:「得表聞之,無恙甚善。卿在東隅,處五服之外,不遠山海,歸誠魏闕,欣嘉至意,用戢于懷。朕承萬世之業,君臨四海,統御羣生。今宇內清一,八表歸義,襁負而至者不可稱數,風俗之和,士馬之盛,皆餘禮等親所聞見。卿與高麗不穆,屢致陵犯,苟能順義,守之以仁,亦何憂於寇讎也。前所遣使,浮海以撫荒外之國,從來積年,往而不返,存亡達否,未能審悉。卿所送鞍,比校舊乘,非中國之物。不可以疑似之事,以生必然之過。經略權要,已具別旨。」又詔曰:「知高麗阻強,侵軼卿土,修先君之舊怨,棄息民之大德,兵交累載,難結荒邊。使兼申胥之誠,國有楚越之急,乃應展義扶微,乘機電舉。但以高麗稱藩先朝,供職日久,於彼雖有自昔之釁,於國未有犯令之愆。卿使命始通,便求致伐,尋討事會,理亦未周。故往年遣禮等至平壤,欲驗其由狀。然高麗奏請頻煩,辭理俱詣,行人不能抑其請,司法無以成其責,故聽其所啟,詔禮等還。若今復違旨,則過咎益露,後雖自陳,無所逃罪,然後興師討之,於義為得。九夷之國,世居海外,道暢則奉藩,惠戢則保境,故羈縻著於前典,楛貢曠於歲時。卿備陳強弱之形,具列往代之迹,俗殊事異,擬貺乖衷,洪規大略,其致猶在。今中夏平一,宇內無虞,每欲陵威東極,懸旌域表,拯荒黎於偏方,舒皇風於遠服。良由高麗即敍,未及卜征。今若不從詔旨,則卿之來謀,載協朕意,元戎啟行,將不云遠。便可豫率同興,具以待事,時遣報使,速究彼情。師舉之日,卿為鄉導之首,大捷之後,又受元功之賞,不亦善乎。所獻錦布海物雖不悉達,明卿至心。今賜雜物如別。」又詔璉護送安等。

安等至高句麗,璉稱昔與餘慶有讎,不令東過,安等於是皆還。乃下詔切責之。五年,使安等從東萊浮海,賜餘慶璽書,褒其誠節。安等至海濱,遇風飄蕩,竟不達而還。

勿吉國,在高句麗北,舊肅慎國也。邑落各自有長,不相總一。其人勁悍,於東夷最強。言語獨異。常輕豆莫婁等國,諸國亦患之。去洛五千里。自和龍北二百餘里有善玉山,山北行十三日至祁黎山,又北行七日至如洛瓌水,水廣里餘,又北行十五日至太魯水,又東北行十八日到其國。國有大水,闊三里餘,名速末水。其地下濕,築城穴居,屋形似塚,開口於上,以梯出入。其國無牛,有車馬,佃則偶耕,車則步推。有粟及麥穄,菜則有葵。水氣醎凝,鹽生樹上,亦有鹽池。多猪無羊。嚼米醞酒,飲能至醉。婦人則布裙,男子猪犬皮裘。初婚之夕,男就女家執女乳而罷,便以為定,仍為夫婦。俗以人溺洗手面。頭插虎豹尾。善射獵,弓長三尺,箭長尺二寸,以石為鏃。其父母春夏死,立埋之,冢上作屋,不令雨濕;若秋冬,以其屍捕貂,貂食其肉,多得之。常七八月造毒藥傅箭鏃,射禽獸,中者便死,煮藥毒氣亦能殺人。國南有徒太山,魏言「大白」,有虎豹羆狼害人,人不得山上溲汙,行逕山者,皆以物盛。

去延興中,遣使乙力支朝獻。太和初,又貢馬五百匹。乙力支稱:初發其國,乘船泝難河西上,至太𣳅河,沉船於水,南出陸行,渡洛孤水,從契丹西界達和龍。自云其國先破高句麗十落,密共百濟謀從水道并力取高句麗,遣乙力支奉使大國,請其可否。詔敕三國同是藩附,宜共和順,勿相侵擾。乙力支乃還。從其來道,取得本船,汎達其國。九年,復遣使侯尼支朝獻。明年復入貢。

其傍有大莫盧國、覆鍾國、莫多回國、庫婁國、素和國、具弗伏國、[52]匹黎尒國、拔大何國、[53]郁羽陵國、庫伏真國、魯婁國、羽真侯國,前後各遣使朝獻。

太和十二年,勿吉復遣使貢楛矢方物於京師。十七年,又遣使人婆非等五百餘人朝獻。景明四年,復遣使俟力歸等朝貢。自此迄于正光,貢使相尋。爾後,中國紛擾,頗或不至。興和二年六月,遣使石久云等貢方物,至於武定不絕。

失韋國,在勿吉北千里,去洛六千里。路出和龍北千餘里,入契丹國,又北行十日至啜水,又北行三日有蓋水,又北行三日有犢了山,其山高大,周回三百餘里,又北行三日有大水名屈利,又北行三日至刃水,又北行五日到其國。有大水從北而來,廣四里餘,名㮈水。國土下濕。語與庫莫奚、契丹、豆莫婁國同。頗有粟麥及穄,唯食猪魚,養牛馬,俗又無羊。夏則城居,冬逐水草。亦多貂皮。丈夫索髮。用角弓,其箭尤長。女婦束髮,作叉手髻。其國少竊盜,盜一徵三,殺人者責馬三百匹。男女悉衣白鹿皮襦袴。有麴釀酒。俗愛赤珠,為婦人飾,穿挂於頸,以多為貴,女不得此,乃至不嫁。父母死,男女眾哭三年,屍則置於林樹之上。武定二年四月,始遣使張焉豆伐等獻其方物,迄武定末,貢使相尋。

豆莫婁國,在勿吉國北千里,去洛六千里,舊北扶餘也。在失韋之東,東至於海,方二千里。其人土著,有宮室倉庫。多山陵廣澤,於東夷之域最為平敞。地宜五穀,不生五果。其人長大,性強勇,謹厚,不寇抄。其君長皆以六畜名官,邑落有豪帥。飲食亦用俎豆。有麻布衣,制類高麗而幅大,其國大人,以金銀飾之。用刑嚴急,殺人者死,沒其家人為奴婢。俗淫,尤惡妬婦,妬者殺之,尸其國南山上至腐。女家欲得,輸牛馬乃與之。或言本穢貊之地也。

地豆于國,[54]在失韋西千餘里。多牛羊,出名馬,皮為衣服,無五穀,惟食肉酪。延興二年八月,遣使朝貢,至于太和六年,貢使不絕。十四年,頻來犯塞,高祖詔征西大將軍、陽平王頤擊走之。自後時朝京師,迄武定末,貢使不絕。

庫莫奚國之先,東部宇文之別種也。初為慕容元真所破,遺落者竄匿松漠之間。其民不潔淨,而善射獵,好為寇鈔。登國三年,太祖親自出討,至弱洛水南,大破之,獲其四部落,馬牛羊豕十餘萬。帝曰:「此羣狄諸種不識德義,互相侵盜,有犯王略,故往征之。且鼠竊狗盜,何足為患。今中州大亂,吾先平之,然後張其威懷,則無所不服矣。」既而車駕南還雲中,懷服燕趙。十數年間,諸種與庫莫奚亦皆滋盛。及開遼海,置戍和龍,諸夷震懼,各獻方物。高宗、顯祖世,庫莫奚歲致名馬文皮。高祖初,遣使朝貢。太和四年,輒入塞內,辭以畏地豆于鈔掠,詔書切責之。二十二年,入寇安州,營燕幽三州兵數千人擊走之。後復款附,每求入塞,與民交易。世宗詔曰:「庫莫奚去太和二十一年以前,與安營二州邊民參居,交易往來,並無疑貳。至二十二年叛逆以來,遂爾遠竄。今雖款附,猶在塞表,每請入塞與民交易。若抑而不許,乖其歸向之心;聽而不虞,或有萬一之警。不容依先任其交易,事宜限節,交市之日,州遣上佐監之。」自是已後,歲常朝獻,至於武定末不絕。

契丹國,在庫莫奚東,異種同類,俱竄於松漠之間。登國中,國軍大破之,遂逃迸,與庫莫奚分背。經數十年,稍滋蔓,有部落,於和龍之北數百里,多為寇盜。真君以來,求朝獻,歲貢名馬。顯祖時,使莫弗紇何辰奉獻,得班饗於諸國之末。歸而相謂,言國家之美,心皆忻慕,於是東北羣狄聞之,莫不思服。悉萬丹部、何大何部、伏弗郁部、羽陵部、[55]日連部、匹絜部、黎部、[56]吐六于部等,[57]各以其名馬文皮入獻天府,遂求為常。皆得交市於和龍、密雲之間,貢獻不絕。太和三年,高句麗竊與蠕蠕謀,欲取地豆于以分之。契丹懼其侵軼,其莫弗賀勿于率其部落車三千乘、眾萬餘口,驅徙雜畜,求入內附,止於白狼水東。自此歲常朝貢。後告饑,高祖矜之,聽其入關市糴。及世宗、肅宗時,恒遣使貢方物。熙平中,契丹使人祖真等三十人還,靈太后以其俗嫁娶之際,以青氊為上服,人給青氊兩匹,賞其誠款之心,餘依舊式。朝貢至齊受禪常不絕。

烏洛侯國,在地豆于之北,去代都四千五百餘里。其土下濕,多霧氣而寒,民冬則穿地為室,夏則隨原阜畜牧。多豕,有穀麥。無大君長,部落莫弗皆世為之。其俗繩髮,皮服,以珠為飾。民尚勇,不為姦竊,故慢藏野積而無寇盜。好獵射。樂有箜篌,木槽革面而施九弦。其國西北有完水,東北流合于難水,其地小水皆注於難,東入于海。又西北二十日行有于巳尼大水,所謂北海也。世祖真君四年來朝,稱其國西北有國家先帝舊墟,石室南北九十步,東西四十步,高七十尺,室有神靈,民多祈請。世祖遣中書侍郎李敞告祭焉,刊祝文於室之壁而還。

史臣曰:夷狄之於中國,羈縻而已。高麗歲修貢職,東藩之冠,榮哀之禮,致自天朝,亦為優矣。其他碌碌,咸知款貢,豈牛馬內向,東風入律者也。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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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동명성왕
  2. 유리명왕
  3. 태조대왕
  4. 동천왕
  5. 정시는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 조방의 연호이다. 동천왕은 정시 3년(242년) 위나라를 공격하였다.
  6. 미천왕
  7. 고국원왕
  8. 북위 태무제
  9. 장수왕
  10. 풍홍
  11. 북위 헌문제
  12. 북위 효문제
  13. 남제 고제, 중국 남북조 시기 유송을 멸망시키고 남제를 세웠다.
  14. 즙녕은 종묘에서 제례를 올릴 때 연주하는 음악. 종묘사직을 보전하라는 경고이다.
  15. 태화 15년은 서기 491년에 해당
  16. 문자명왕
  17. 번신이 직접 왕도에 와 머리를 조아리는 의례
  18. 판본에 따라 세조라고 표기한 것도 있다. 북위 태무제 탁발도를 가리킨다
  19. 작은곰자리에 속하는 별, 여기서는 북위의 황실을 가리킨다.
  20. 고구려를 북위의 번국으로 보고 태수의 지위로서 일컬은 것
  21. 신귀는 북위 효명제의 두번째 연호이다.
  22. 영태후는 효명제의 생모이다.
  23. 안장왕
  24. 정광은 북위 효명제의 세번째 연호이다.
  25. 양 무제
  26. 안원왕
  27. 북위 효무제
  28. 천평동위 효정제의 연호이다.
  29. 양원왕
  30. 연흥은 북위 효문제의 첫번째 연호이다. 연흥 2년은 472년이다.
  31. 개로왕
  32. 天庭 별이름 가운데 하나이나 여기서는 황제가 머무는 궁궐을 가리킨다.
  33. 구이신왕
  34. 왕망과 한무제 사이에서 눈치를 보다 한무제 때 반란을 일으켰다.
  35. 중국 남북조 시대의 송나라를 뜻한다
  36. 유연
  37. 요임금
  38. 초 장왕이 제나라로 보낸 사신. 송나라를 지나다 죽임을 당하였다.
  39. 신릉군
  40. 신포서 - 오자서가 초나라를 멸하려 하자 진나라로 가서 이레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으며 간청하여 원군을 얻었다.
  41. 羈縻 - 굴레로 얽어매듯이 내정을 간섭당하는 것
  42. 우문선비
  43. 북위 도무제
  44. 등국은 북위 도무제의 첫번째 연호이다.
  45. 거란에서 족장을 부르던 명칭
  46. 황제의 창고를 가리키는 말
  47. 북위 효명제
  48. 희평은 효명제의 첫번째 연호이다.
  49. 북제 -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었다가 북제에게 흡수되었다.
  50. 魏正始中入寇遼西安平 三國魏志卷三0東夷傳、隋書卷八一高麗傳「遼西安平」作「西安平」。按後漢書郡國志二安平國屬冀州,志五,西安平屬幽州遼東郡。遼西郡沒有安平或西安平縣。這裏「遼」字衍,或「遼」下脫「東」字。
  51. 正始中世宗於東堂引見其使芮悉弗 諸本「宗」作「祖」,北史卷九四高麗傳作「宣武」。按上稱「正始」年號,自當作「世宗」,北史例稱帝號。今改正。
  52. 具弗伏國 按卷六顯祖紀皇興元年二月、二年四月兩見此部,都作「具伏弗」。下契丹傳有「伏弗郁部」,上脫「具」字,又「郁」「部」二字倒誤,但也可證這裏「弗伏」當作「伏弗」。
  53. 拔大何國 按下契丹傳有「何大何部」,卷六顯祖紀皇興二年四月作「阿大何」。這裏「拔」字當是「何」或「阿」之訛。
  54. 地豆于國 北史卷九四「于」作「干」。按本書他處也多作「地豆于」,間亦作「干」,北史則多作「干」,間作「于」,今仍之。
  55. 伏弗郁部羽陵部 按上勿吉傳見「具弗伏國」、「郁羽陵國」,卷六顯祖紀皇興元年二月、二年四月並見「具伏弗、郁羽陵」,這裏「伏弗」上當脫「具」字,「郁」「部」誤倒,當作「具伏弗部、郁羽陵部」。
  56. 匹絜部黎部 按上勿吉傳及卷六顯祖紀皇興元年、二年並見「匹黎尒部」,通典卷二00契丹條作「匹黎部」。疑這裏「匹絜」下衍「部」字,本作「匹絜黎部」,誤分二部。
  57. 吐六于部 北史卷九四契丹傳「于」作「干」,卷六顯祖紀皇興二年四月作「叱六手」,通典卷二00作「比六干」。疑「吐」「比」皆「叱」字之訛。「手」顯訛,「于」「干」不知孰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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