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

贈諡圓空國師勝妙之塔碑銘

高麗國原州賢溪山居頓寺故 王師慧月光天遍照至覺智滿圓黙寂然普化大禪師贈諡圓空 國師勝妙之塔碑銘 幷序

中樞直學士宣議郎尙書吏部郎中知 制誥兼史舘修撰官賜紫金魚袋臣崔冲奉 宣撰

朝請郎禮賓丞賜緋臣金巨雄奉 宣書幷篆額

恭聞佛道玄徵了一心而卽是禪源澹寂與諸法以超然得之者權實都忘觀之者色空俱泯而緣群生見執萬種差殊非階漸無以發其蒙非無以到彼岸縱靈羊挂角難可追尋猶師子嚬申必須方便故乃無謂有謂不聞而聞迦葉臆對於西乾達摩臚傳於東震付衣分座或示信於衆觀曲尺剪刀或强名於諸諭師師密授符契允諧祖祖相承綴旒弗絶洎夫去聖逾遠光靈漸衰前覺者瞻之在前後隨者瞠若乎後鑿丘求井都迷阿耨之宗摘埴索途盡味純陁之理自非空門拂士季世畸人將何存意遺言能得其妙應機適變不恒厥居紐大音之解徽張脩綱之頹紀其誰尸者唯我有之師諱智宗字神則俗姓李氏全州人也父行順抱義戴仁履謙居寡愷悌君子常求福以不回痀僂丈人自凝神而有道母金氏鴻妻竝譽萊婦齊名和鳴美著於鳳蕃衍慶標於椒詠甞夢金 刹一竿上揆雲端有 眉僧擧手指之曰此大威德你可護持因卽有娠欲臨彌月手勤香火口絶葷腥修胎敎以惟精契産經而載誕師呈姿岐嶷禀性英奇爰從襁褓之中便是風塵之外松生徑寸先知構廈之材江出濫觴預識涵空之量年甫八歲强抛跨竹擬駕眞乘忽罷弄璋鬼探法寶會弘梵三藏來寓舍那寺遂踵門而詑乞主善爲師便合投針容令落髮方依隅座未換籥灰及梵尋泛大洋却歸中印旣弗同舟而濟固當送往事居轉奉廣化寺景哲和尙更展攝齋常勤受業則能師逸功倍人十已千靑出於藍其色逾過石投于水厥深易臻衆謂耈成誰云幼學開寶三年禀具於靈通寺之官壇瑠璃戒行三業已淸菡蓞慧心六塵難染甞過社省之有靑衣誤醉肉櫃中所貯米而炊仰自顚蹶疾悖而曰我是山神護此上人汝豈容易弗潔其味乎聽者驚恐爭加禮重其靈驗多此類也廣順三年造曦陽山超禪師時有侍者僧灑掃法堂少許地不受水超問曰有箇處水不著你作靡生僧無對師代曰更不要灑一任掃地超公乍聆善應深識道存謂若鬷篾一言阮瞻三語因成偈頌用播褒稱美價繇是頓高賓筵以之或服屬顯德初  光宗大王立皇極崇法門徵雪嶺之禪俾伸角妙選丹霞之佛明示懸科師雄入議圍首探理窟衒疊雙之絶藝彰累百之高名于時用夏變夷正契車書之混陟遐自邇竸追汗漫之蹤凡是同年盡遊西國而獨知足之足念玆在玆靡過虎溪却爲牛後未幾魂交故證眞大師曰弗登山何以小魯弗觀海何以狹河事旣如斯汝宜往矣師覺曰昔者常啼東諸由聽於神人善財南求盖親於知識今則時非可失理與冥符雖云道阻且長爭敢人涉卬否六年夏徑臻  轂下仰告征期  光宗聞入洛之言曰兪懇請詠于郿之什親置餞筵旣叙睽離爰遵跋涉擊扶揺於九萬鵬翼橫天經浩渺於三千馬銜息浪得達吳越國先謁永明寺壽禪師壽問曰爲法來耶爲事來耶師云爲法來曰法無有二而遍沙界何勞過來海到這裏師曰旣遍沙界何妨過來壽公豁開靑眼優待黄頭便解髻珠卽傳心印故得入親近地修對治門時時止飽於醍醐更無他味日日唯聞於薝蔔不雜餘香默識玄同神情朝徹峻豐二年漸次抵國淸寺膜拜淨光大師光亦開連榻靡閒升堂思欲伯喈書附於王生重耳經傳於尹令尋以大定慧論天台敎授師師是彝是訓如切如磋那同八月之春似待九年之妙雖曾宿覺尙籍時勤開寶元年歲杪僧統知內道場功德事賛寧天台縣宰任埴等聞師精研慧刃足可屠龍敏發玄機宜堪中鵠高山仰止異口同音請於傳敎院講大定慧論幷法華經師率意而從當仁不讓以爲行商告倦闔示化城蕩子祛疑須開寶藏矢在絃而旋發刀引鏡以且成徐陟猊臺乍麾塵柄對三根而賈勇論六慧以抗稜足使如堵而觀折牀而聽荊渚九旬之講厥風晟然南徐百日之談其塗觳矣旣而睡見本國有寶塔 天自繫繩挽之塔隨力俯仰又申感故證眞大師曰汝能得意胡莫詠歸耶乃謂動在隨緣濟無臭載若悟式微之戒遄迴不係之程三年攘袂而興泛盃而渡己叶易東之志人稱居右之材  光宗示以羅什如秦摩騰入漢益  厚優賢之意彌  敦奬善之仁初署大師延請居於金光禪院末年加重大師施磨衲袈裟自後衆所具瞻滋多兼濟雖玄玄之趣桃李無言而悱悱之流稲麻成列名高㠥譽邁崆峒歷代寶之他皆倣此故至  景宗踐祚除三重大師賜水精念珠  成宗朝遷住積石寺號爲慧月淳化中以特飛芝詔迎入蘂宮請啓高談異聞妙義寧効少林之觀壁且同宣室之話釐載窹  宸襟優承  寵貺仍受磨衲蔭脊  穆宗繼承先志亦締勝緣顧鶴儀而暫不曠時垂  鴻霈以略無虛歲累加光天遍炤至覺智滿圓默禪師贈繡方袍兼以佛恩寺護國外帝釋院等爲住持之所焉墍  今上應一千年昌運奄撫神圖轉十二行法輪恢弘像敎召義龍而雲躍呼律虎以風騰崇授大禪師請住廣明寺進法稱曰寂然開泰二年秋有  詔曰朕聞上從軒皇下逮周發皆資師保用福邦家斯所以崇德象賢亦不敢倚一慢二者也今覩大禪師識趨券內心出環中甘露於敬田融葆光於實際揔持至理開悟衆迷朕何不師之乎群臣罔有異辭僉云可矣乃遣亞相庾方密使張延祐執憲李昉等續奉  九重之命往扣玄關累伸三返之儀蘄開絳帳師以月讓雖固  天心不移安能道隱無名止合趣時貴近遂因循而應之然後  上親詣拜爲王師仍獻金銀線織成罽錦法衣器具茗馞等數繁不載故能禮優勝具   情極尸尊方推請益之誠勉盡質疑之問日改月化聞斯行諸師謦欬一音言提萬行洪鍾而待扣響應有緣臺藻鏡以忘罷炤通無礙 定水而資  帝澤廓眞空而導  皇風其利博哉爲弘濟也則彼靈裕顯升於國統誠  焉慧宗稱首於頭陁是區區者擬于此際不可同波越三年又加號曰普化皆所謂有大德者必得其名矣後以欻遘風痾綿留氣序十全參請尙傳遺類之言  萬乘疚懷頻致藥瘍之施有親串謂師云夫唯病病從曰聖賢爲是栖栖何親都邑况垂暮齒宜軫歸心師聞之听然而笑曰庸詎知安道先生與命期而始去淨名居士因衆疾以且憂苟未當途那忙裏足汝謂予自利耶盖欲利他之故也天禧二年首夏道之將廢時然後行振金錫以告辭拂衲衣而長鶩沙洲獨鳥迨迨而飛入烟波碧落孤雲杳而旋尋洞壑止于原州賢溪山居頓寺方閑宴座未及浹辰奈因生也有黬遽欲復於無物是月十七日病而彌亮頋以眞冷謂衆曰昔如來以大法眼付諸弟子如是展轉及至于今今將此法付囑於汝汝當護持無令斷絶吾滅後亦不得以喪訃奏  聞有難規矩言訖示化壽八十九臘七十二是晨也日惨熅焞雲愁黯黮 髯之隊亂 乎山椒聱取之群悲嗚呼巖穴並顯颯然之變咸興逝矣之傷門徒慶充等擗踊三號分崩五內莫問涅槃之樂空誣聚崛之香觀白鶴之林彫安依芳蔭卜靑烏之地勝卽樹閟宮以其月二十二日旋葬于寺之巽隅禮也  上比及踰時方聞遣占  念泥洹之何早  懷震悼以偏深特降藎臣代行禮吊兼擧易名之典用光傳法之門贈  國師諡曰圓空遂立勝妙之塔因命竪儒碑揚徽然臣也詞慙刻鶩學謝溲鷄性類族庖本乏發硎之利工非大匠素憂傷手之譏旣奉  頒宣無由遜讓披文相質爭符賦客之言變谷爲陵庶續高僧之傳甘同西笑用効南刋謹爲銘曰

悟性爲佛 忘情曰禪 澹乎境界 離彼言詮 測不可測 玄之又玄 執繩易惑 摸象多偏
迦葉矢謨 達摩肯搆 默而識之 於是乎就 祖祖奉揚 師師傳授 去聖彌遙 承基漸謬
誰興復者 自有其人 天鍾正氣 岳降惟神 孤標拔俗 偉度超倫 纔從丱歲 即慕弘眞
杇宅罷遊 緇流染學 戒律嚴持 辯才卓犖 道在日新 心由宿覺 隷業精勤 存誠貞確
遐踰淮海 直詣越邦 騰名講肆 寓目經窓 攻堅不輟 覩奧無雙 三乘載牽 四衆皆降
箭重迴舟 珠靈返浦 猶奚入秦 似孔居魯 宏敞法門 獨爲慈父 化洽彌天 仁霑率土
曇花再艶 慧鑑重輝 五朝前席 萬乘摳衣 功周救溺 理極知微 汎若而退 侗然以歸
疊嶂臥雲 幽溪溂石 猿鶴相隨 塵埃轉隔 志籍閑安 時當變易 命也非常 觀之自適
無滅而滅 不終而終 釋網如霣 宗林復空 龜碑乃斷 鴈塔斯崇 累更浩刼 長播高風

太平紀曆歲在旃蒙赤奮若秋七月二十七日樹 臣僧貞元契相惠明惠保得來等刻字

증시원공국사승묘지탑비명(贈諡圓空國師勝妙之塔碑銘)

고려국(高麗國) 원주(原州) 현계산(賢溪山) 거돈사(居頓寺) 고(故) 왕사(王師) 혜월광천편조지각(慧月光天遍照至覺) 지만원묵(智滿圓黙) 적연보화(寂然普化) 대선사(大禪師) 증시(贈諡) 진공국사(圓空國師) 승묘탑비명(勝妙之塔碑銘)과 서문(序文).

중추직학사(中樞直學士) 선양랑(宣議郞) 상서이부낭중(尙書吏部郎中) 지제고(知制誥) 겸(兼) 사관수찬관(史舘修撰官)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최충(崔冲)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짓고, 조청랑(朝請郞) 예빈승(禮賓丞) 비어대(緋魚袋)를 받은 신(臣) 김거웅(金巨雄)은 왕명(王命)에 의해 비문(碑文)과 전액(篆額)을 쓰다.

공손히 듣건대 불도(佛道)는 깊고 깊으나 일심(一心)을 깨달으면 바로 그것이 불도(佛道)요, 선(禪)의 근원은 담적하나 제법(諸法)과 더불어 초연하다. 그 경지를 터득한 자는 권(權)과 실(實)을 모두 잊고, 그 세계를 관찰하는 이는 색(色)과 공(空)을 함께 없앤다. 그러나 중생들이 망견(妄見)에 붙잡혀 천만가지의 차별심을 일으키므로 계위(階位)를 가져 점수(漸修)하지 않고는 그 몽매함을 벗어나지 못하면, 방편(方便)[해석문 1]을 빌리지 않고는 피안(彼岸)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영양(靈羊)을 쫓을 때 뿔을 나뭇가지에 걸고 있으면 그것을 찾아내기 어렵듯이, 사자(獅子)가 기지개를 켤 때 반드시 방편을 요(要)하는 것과 같다. 무(無)라고 한 이치와 유(有)라고 하는 진리를 듣지 않고서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가섭(迦葉)은 마음으로 서건(西乾)을 대하였고, 달마는 선맥(禪脈)을 동진(東震)에 전하였다. 부처는 다자탑(多子塔) 앞에서 법의(法衣)를 분부하시고 자리를 나눔에 혹자는 관중(觀衆)들에게 믿음을 보였으며 곡척(曲尺)[해석문 2]과 가위 등을 보임으로써 혹자는 모든 사람을 지도하기 위해 굳이 명상(名相)을 들어 보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대대로 스승과 스승이 비밀리 전수하여 사자(師資) 간에 그 뜻이 부합하였고, 역대(歷代) 조사가 서로 계승하여 법인(法印)을 이어 받아 그 법통이 단절되지 아니하였다. 부처께서 열반하신 때가 더욱 멀어지고 광영(光靈)이 점점 쇠잔해져 먼저 깨달은 선배는 후배들이 바라는 여망에 부응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뒤를 따라 오는 후배들은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흔히 언덕을 파서 물을 구하되, 아누달지(阿耨達池)인 근원을 전혀 알지 못하고 늪과 수렁으로 빠져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였다. 스스로 공문(空門)의 바른 수행자와 말세(末世)의 특출한 사람이 아니면, 장차 어떻게 뜻을 부처의 유언(遺言)을 마음에 품고 그 묘리(妙理)를 터득할 수 있겠는가. 중생들의 근기에 응하여 적절히 변화하는 방편은 한결같지 아니하다. 해이해진 대음(大音)의 음조(音調)를 잘 조절하며, 퇴폐한 큰 교망(敎網)을 제대로 정돈할 수 있는 자가 그 누구이겠는가! 오직 우리 국사만이 능히 할 수 있다고 하겠다.

국사의 휘(諱)는 지종(智宗)이고, 자(字)는 신칙(神則)이며, 속성(俗姓)은 이씨(李氏)로 전주(全州) 출신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행순(行順)이니, 항상 의리를 품고 어진 마음을 가지며 겸손하고 욕심이 없었으니 마치 개제(愷悌)한 군자(君子)가 항상 복을 구하되 자신에게 돌리지 아니하며, 마음이 영화(榮華)에 유혹되지 않는 구루장인(痀僂丈人)이 스스로 정신을 응집(凝集)하여 도덕이 높았으니 그 사람과 같았다. 어머니는 김씨(金氏)로 그 칭송 받음이 양홍(梁鴻)의 처(妻)와 같고, 그 명망은 노래자(老萊子)의 부인과 같았다.

부부간의 금실은 그 아름다움이 봉점(鳳占)에 나타났고, 자손의 번연(蕃衍)함은 그 경사스러움이 초영(椒詠)[해석문 3]을 표하였다. 일찍이 어느 날 밤 사찰[金刹]의 한 당간지주[竿柱] 위 아득히 높은 하늘 구름 속에 백설(白雪)과 같은 흰 눈썹을 가진 승려가 손을 들어 가리키며, “이는 대위덕명왕(大威德明王)이니 너는 이를 몸에 잘 모시라”고 하는 꿈을 꾸고서 그로 말미암아 곧 임신하였다. 그 후 해산할 때까지 불전에 부지런히 기도하였을 뿐 아니라 오신채(五辛菜)와 고기는 일체 먹지 않으면서 태교(胎敎)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 산기(産期)가 되어 탄생하였으니 그 자태(姿態)는 기의(岐嶷)함을 드러냈고 성품 또한 영특함을 타고났다. 강보(襁褓) 중에 있을 때부터 이미 그 뜻은 풍진(風塵) 밖에 있었으니, 마치 직경한 치의 소나무만 보아도 이미 그가 큰 집을 짓는데 필요한 재목이 될지 안 될지를 알 수 있으며, 남상(濫觴)[해석문 4]의 물줄기를 두고 마침내 허공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양이 될지를 알 수 있는 것과 같았다. 나이 여덟 살 때 타고 놀던 죽마(竹馬)를 훌쩍 던져버리고 진승(眞乘)을 탐구하려는 마음만이 있었으니, 홀연히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세상에서 살 생각을 단념하고 불교를 탐구할 생각을 굳혔다. 그 때 마침 인도의 홍범삼장(弘梵三藏)이 사나사(舍那寺)에 와서 있었으므로 그를 찾아가 스승이 되어 달라고 간청하였고, 마침내 허락을 받아 삭발하였다. 그 때부터 시봉(侍奉)하면서 바야흐로 경(經)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얼마를 지나 홍범(弘梵)이 바다를 건너 중인도(中印度)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따라가지 못하고 처소를 옮겨 황화사(廣化寺) 경철화상(景哲和尙)을 모시면서 부지런히 수업하였다. 그 배우는 바가 남들보다 뛰어나 공부의 진취가 배나 되어 다른 사람이 열을 알면 이미 천을 알았다. 마치 푸른색이 쪽 풀에서 나왔으나 그 빛이 쪽보다 더 푸르며, 돌을 물에 던지면 쉽게 그 깊은 밑바닥에 이르는 것과 같았다. 많은 사람이 국사를 보고 나이 들어 성숙한 사람이라 하였으니 누가 그를 어린 학승[幼學]이라 하겠는가.

개보(開寶) 3년(광종 21, 970) 영통사 관단(官壇)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후 유리와 같이 청정하게 계행을 가져 삼업이 이미 청정하였고, 연꽃 같은 지혜스러운 마음은 육진(六塵)에 더럽히지 않았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신사(神社)에 들러 인사를 하였다. 이 때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점심을 준비하면서 육궤(肉樻)에 있었던 쌀로 밥을 지어 올렸는데, 갑자기 동자가 스스로 거꾸로 쓰러지면서 광란(狂亂)을 일으켰다. 이 때 동자의 귀에 들리기를, “나는 산신(山神)으로써 이 큰 승려를 보호하고 있었는데 너는 어찌하여 경솔한 마음으로 불결한 음식을 올렸는가”라 꾸짖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면서 서로 다투어 더욱 공경하였으니, 그의 영험이 대개 이러한 것들이 많았다.

광순(廣順) 3년(광종 4, 953) 희양산(曦陽山) 초선사(超禪師)를 찾아갔는데, 이 때 시자(侍者) 승려가 있었다. 이 승려는 법당을 청소하던 중 어떤 곳에는 물을 뿌리지 않았다. 초선사가 시자에게 묻기를, “물이 뿌려지지 않은 곳이 있으니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가?”하니 시자승(侍者僧)은 대답하지 못하였다. 이 때 국사가 대신 대답하기를, “다시 더 뿌릴 필요가 없으니 시자가 소지하는 대로 일임(一任)하십시오”라 하였다. 초공(超公)은 국사의 답을 듣고 도(道)가 깊은 줄 알고 말하기를, “…멸(蔑)의 일언(一言)과 완첨(阮瞻)의 삼어(三語)와 같다”하면서 게송(偈頌)을 지어 그의 뛰어남을 칭송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더욱 존경을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모두 감탄해 마지않았다.

현덕(顯德) 원년(광종 5, 954)에 광종대왕(光宗大王)이 왕위에 올라 크게 불교를 숭앙하였으며, 설령(雪嶺)의 선(禪)을 밝힘으로 하여금 신통 묘용(神通妙用)을 펴되 단하(丹霞)의 진불(眞佛)을 찾아내기 위하여 승과(僧科)를 명시하였다. 국사는 당당하게 의논의 광장에 들어가 중론(衆論)을 꺾고 앞장서 진리의 세계를 탐색하였으며, 또한 여러 가지의 뛰어난 예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높은 도덕으로 그 이름이 더욱 빛났다.

때마침 광종은 중국[中夏]의 문명제도(文明制度)를 도입하여 크게 개혁하되 정신과 생활문화를 하나로 통일시켰고, 가까운 데로부터 점점 먼 곳에 이르기까지 서로 앞을 다투어 한만(汗漫)의 자취를 따르게 하였다. 대개 이 당시에는 많은 승려들이 중국[西國]에 유학하였으나 국사만은 우리나라에서 자족하는 법을 알았다. 이러한 생각으로 호계(虎溪) 밖을 나가지 않고 우후(牛後)가 되는 것처럼 나타나지 않고 숨어 정진하였다.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이미 열반하신 증진대사(證眞大師)가 꿈에 나타나 이르기를, “동산(東山)에 올라서지 않고서 어찌 노(魯)나라가 작다고 느낄 수 있으며, 바다의 넓음을 보지 않고 어찌 황하(黃河)의 협소함을 알겠는가”라 하면서 “실로 이미 이와 같으니, 너는 하루 속히 중국으로 구법(求法)의 길을 떠나라”고 격려하였다.

국사는 꿈을 깨고 나서 말하기를, “옛날 상제보살(常啼菩薩)이 동방(東方) 묘향성(妙香城)에서 신육(身肉)을 베어 제석천(帝釋天)에 공양하면서 청(請)한 것은 신인(神人)에게 법문을 듣기 위한 것이고,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남방(南方)으로 가서 법을 구한 것도 오로지 선지식(善知識)을 친견하기 위함이었다. 그와 같이 지금 또한 그러한 때이므로 시기를 놓치지 말라 하였으니, 이치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부합하였다. 비록 중국으로의 구법의 길이 멀고 험하더라도 어찌 감히 남들이 말린다고 하여 그만둘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광종 6년(955) 여름에 곧바로 곡하(轂下)에 이르러 왕에게 구법을 위해 출국할 시기를 고告하려 하였다. 광종이 개성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공손한 마음으로 맞이하여 미지즙(郿之什)이란 곳에 전별연(錢別筵)을 베풀고 송별(送別)의 시(詩)를 읊으면서 서로 헤어짐을 아쉬워하였다. 이에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면서, 날개로 바닷물을 치고 구만 리를 나는 대붕새의 날개가 하늘을 가로지르고 아득한 삼천리의 광야(廣野)를 달리는 준말 앞에 어떠한 장애도 없듯 씩씩하게 구법의 길에 올랐다. 어느덧 오월국(吳越國)에 도착하여 먼저 영명사(永明寺) 연수선사(延壽禪師)를 친견하니, 연수선사가 묻기를, “법法을 구하러 왔는가, 일을 보러 왔는가?”하고 물었다. 국사께서 대답하기를, “법을 구하러 왔습니다”하니 연수선사가 말하기를, “법은 본래 둘이 없어서 모래 수와 같이 많은 세계에 두루 많거늘 어찌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 여기까지 왔는가?” 국사가 대답하기를, “이미 모래 수와 같이 많은 세계에 가득하다면 여기까지 찾아온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 하였다.

이 때 연수선사는 반가워하는 마음으로 눈을 크게 뜨고 마치 황두(黃頭)를 만난 것과 같이 우대하였다. 연수는 계주(髻珠)를 풀어 심인(心印)과 함께 전해 주었다. 이로 인해 머물기를 허락받은 후 부지런히 수도에 전념하니 제호(醍醐)만을 먹고 다른 맛난 음식은 먹지 않았고, 날마다 오직 담복향(薝蔔香)만 맡을 뿐 다른 잡된 향내는 맡지 아니하였으며, 묵묵히 현동(玄同)한 이치를 알아 그 깊은 진리를 일조(一朝)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하였다.

준풍(峻豊) 2년(광종 12, 961)에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가다가 국청사(國淸寺)에 이르러 지성으로 정광대사(淨光大師)를 친견하였는데, 정광대사 역시 연탑(連榻)에 내려와 반가이 맞이하였다. 정광은 자주 법회를 주도하므로 매우 바쁜 실정이었다. 그리하여 국사가 불교를 전하고자하는 생각을 오월국왕에게 글로 써 올리고 허락을 기다렸다. 왕은 그 뜻을 윤령(尹令)에게 명하여 대정혜론(大定慧論)으로써 천태종지(天台宗旨)를 가르치는 교수사(敎授師)로 추대하였다. 국사는 윤리(倫理)의 표본이고 교훈(敎訓) 바로 그 자체였다. 끊는 듯 가는 듯함이거니 어찌 8월의 봄날처럼 순간적이겠는가. 마치 9년의 묘(妙)와 같이 한결 같다는 말이다. 국사는 이전에 이미 깊이 깨달은 바가 있으나 계속 부지런히 닦았다.

개보(開寶) 원년(광종 19, 968) 연말에 승통(僧統)이며 내도장(內道場)의 공덕사(功德事)를 맡은 찬녕(贊寧)과 천태현재(天台縣宰)인 임식(任埴) 등은 국사가 용맹 정진한 지혜가 깊고 예리하여 족히 용(龍)을 도살할 만하며 민첩하게 현기(玄機)를 발명하여 이미 중곡(中鵠)의 이치를 감당할 수 있음을 알아 모두가 이구동음(異口同音)으로 높은 산처럼 숭앙하여 의적(義寂)이 그의 사가(私家)를 희사하여 절을 만든 전교원(傳敎院)으로 초청하여 대정혜론(大定慧論과) 『법화경(法華經)』을 강설해 줄 것을 청하였다. 국사는 흥쾌히 그 청을 받아들여 좋은 일에 대하여 사양하지 아니하였다. 이는 행상인(行商人)들이 권태를 느끼면 화성(化城)을 보여주어 용기를 내게 하고, 방랑하는 탕자(蕩子)가 의심을 일으키면 모름지기 보장(寶藏)을 개시(開示)하여 곧바로 성취하게 하였으며, 칼이 거울에 비치면 또 하나의 칼이 나타나는 것과 같았다.

상보(象步)로 천천히 법상[猊臺]에 올라 잠깐만이라도 불자(拂子)를 휘두르면서 설법하면 삼근(三根)에 대하여 용기를 불어 넣어주고, 육혜(六慧)를 논함에는 위력을 떨쳐 족히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둥근 담장처럼 모여 들어 우러러보며, 청중이 많아 상탑(牀榻)마저 부러졌다. 형저(荊渚)에서 90일간[九旬] 강의함에 큰 바람을 떨쳤고 남서(南徐)에서의 백일법문(百日法門)은 그 가르침이 매우 심오하여 곡진(曲盡)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꿈을 꾸었는데, 본국(本國)에 보탑(寶塔)이 공중에 높이 솟아있어 밧줄에 매달려 당기는 대로 부앙(俯仰)하였다. 또 증진대사(證眞大師)가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너는 능히 소기(所期)의 목적을 성취하였거늘 어찌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움직임에 있어서는 인연을 따라 순리대로 살아가고 부도덕하게 생활하여 냄새나는 오명(惡名)을 남기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하라. 만약 식미(式微)의 경계를 깨달았으면 곧 불계(不係)의 길을 돌이키도록 하라” 하였다.

준풍(峻豊) 3년(광종 13, 962)에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귀국길에 올라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으니 이미 동쪽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뜻을 바꾸었다. 사람들은 원공국사(圓空國師)를 보고 높은 자리에 있을 재목이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광종은 마치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진(秦)나라로 가고, 마등법사(摩騰法師)가 한(漢)나라에 들어오는 것과 같이 여겨 현인(賢人)을 우대하는 뜻을 더욱 두텁게 하고, 선인(善人)을 권장하는 인(仁)을 보다 돈독히 하였다. 처음으로 대사(大師)의 법계(法階)를 서사(署賜)하고 청하여 금광선원(金光禪院)에 주석하게 하였다. 말년에는 중대사(重大師)의 법계를 첨가하고 마납가사(磨衲袈裟)를 헌증하였다. 그로부터 대중들의 첨앙(瞻仰)한 바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점점 많은 중생을 구제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현현(玄玄)한 종취(宗趣)에 있어서는 도리무언(桃李無言)이나 하자성혜(下自成蹊)와 같이 법문 듣고 공부하기 위해 굳은 신심(信心)을 가진 무리들이 도마(稻麻)처럼 열(列)을 이루었고, 고매한 그 이름은 험준한 산보다 높았으며 영예로움은 공동(崆峒)의 아름다움보다 더하여 역대(歷代)로 보배처럼 귀중하게 여겨 다른 사람들이 모두 국사를 본받았다. 그러므로 경종(景宗)이 천조(踐祚)함에 이르러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증사(贈賜)하고 수정염주(水精念珠)를 하사하였다. 성종조(成宗朝) 때 적석사(積石寺)에 천주(遷住)하게 하고 법칭(法稱)을 혜월(慧月)이라 하였다. 순화 연중(990~994)에 성종이 교지를 내려 예궁(蘂宮)으로 영접하고 법문을 청하여 심묘(深妙)한 법의 뜻을 듣고자 하였으니, 어찌 숭산(嵩山) 소림굴(少林窟)에서 관벽(觀壁)하는 참선을 본받았으랴! 이는 선실(宣室)에서 왕과 함께 대화함과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비로소 임금의 마음을 깨닫게 하였으니 왕으로부터 융숭한 총황(寵貺)와 마납음척(磨衲蔭脊)를 받았다.

목종(穆宗)이 선왕(先王)의 뜻을 받들어 불교에 귀의하고, 국사와 사자(師資)의 승연(勝緣)을 맺고 학의(鶴儀)를 보살펴서 잠시도 흠모(欽慕)하지 않는 때가 없으며, 해마다 국사에게 홍패(鴻霈)한 정성을 드리우지 않는 해가 없었다. 또한 ‘광천편조지각지만원묵선사(光天遍炤至覺智滿圓黙禪師)’라는 법칭(法稱)을 첨가하고 수놓은 가사를 하사하는 한편 불은사(佛恩寺)의 주지를 겸하게 하였다. 그리고 호국사(護國寺)·외제원(外帝院) 등에서도 주지의 소임을 행했다. 금상(今上)이신 현종(顯宗)이 신라 천년사직(千年社稷)의 창성했던 운(運)에 응하여 신도(神圖)를 이어받아 나라를 다스리며, 십이행법륜(十二行法輪)을 전하여 크게 불교를 넓혔다. 따라서 의용(義龍)을 소집하여 구름처럼 뛰게 하고 율호(律虎)를 불러 바람과 같이 날도록 불교중흥을 위해 맹활약을 하도록 격려하고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를 제수하고는 청하여 광명사(廣明寺)에 주석하게 하고 법칭(法稱)을 적연(寂然)이라 진납(進納)하였다.

개태(開泰) 2년(현종 4, 1013) 가을 조칙(詔勅)을 내려 이르기를, “짐(朕)이 들으니 위로 헌황(軒皇)으로부터 아래로 주발(周發)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보(師保)의 도움을 받아 그 법력(法力)으로 나라를 복되게 하였으니, 이는 덕이 높은 중현(衆賢)을 존숭하는 것이며, 또한 감히 그 하나는 의지하고 그 두 가지는 경만(輕慢)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대선사(大禪師)를 보니 지식은 무리에서 뛰어났고, 마음은 환중(環中)인 허공 밖에 초출(超出)하여 감로수(甘露水)를 경전(敬田)에 뿌리며 보광(葆光)을 실제(實際)에 융합하고 지극히 오묘한 진리를 총괄하여 중생들의 미혹(迷惑)을 깨우쳐 주시는 분이니, 짐이 어찌 스승으로 모시지 않겠는가”라 하니, 군신(群臣)들 중에 아무도 이의(異議)를 달지 않고, 모두 가(可)하다면서 왕의 뜻을 따랐다. 그리하여 아상(亞相)인 유방(庾方)과 밀사(密使)인 장연우(張延祐), 집헌(執憲)인 이방(李昉) 등이 계속 왕[九重]의 명을 받들어 국사가 계신 곳에 찾아갔고 세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강장(絳帳)을 열어주시길 간청하였다. 국사는 한 달이 지나도록 그 사양함이 견고하였으나, 천자(天子)의 마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찌 도(道)를 숨기고 이름이 없이하려 하였으나, 다만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겠는가’라는 마음으로 드디어 응락(應諾)하였다. 이런 연후에 현종이 직접 찾아가서 절하고 왕사(王師)로 추대하고는 금은(金銀) 실로 짜서 만든 계금법의(罽錦法衣)·기구(器具)·차(茶)와 향 등을 봉헌(奉獻)하였으나, 가지 수가 많아 모두 기재(記載)하지 않는다. 이렇게 융숭한 예를 갖추어 지극한 정의(情誼)로 존숭(尊崇)하였으니 바야흐로 청익(請益)의 정성을 다하였으며 국사는 물어옴에 해박하게 대답하였다. 날마다 고치고 달마다 변화하므로 이러한 일들이 모든 승려들에게 들렸다. 기침하는 일음(一音) 중에 만행(萬行)을 제섭(提攝)하였으니, 마치 종틀에 걸려 있는 큰 범종(梵鍾)이 치기를 기다려 울린 메아리가 인연이 있는 곳에는 모두 응하며, 밝은 거울이 경대 위에 놓여 있어 모든 것을 비추어 주되 쉬는 것을 잊어서 비추고 통철함이 걸림이 없는 것과 같았다. 선정(禪定)의 물을 떠서 임금의 혜택(惠澤)을 돕고 진공(眞空)을 확철(廓徹)이 깨달아 황제의 덕풍(德風)을 인도하니, 그 이익됨의 황박(廣博)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함은 영유(靈裕)가 국통(國統)에 오른 것을 원공국사에 비하면 참으로 사소한 것이며, 혜종(慧宗)을 두타행(頭陁行)의 으뜸이라 일컬은 것도 구구(區區)하다 할 것이므로 국사와 비교하면 같다고 할 수 없다.

개태(開泰) 2년(현종 4, 1013)에서 3년을 지난 후, 보화(普化)라는 법호(法號)를 더했으니 모두가 이른바 대덕(大德)을 가진 자라야 그런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다. 얼마가 지난 후 홀연히 풍병(風病)에 걸려 몸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많은 제자들이 온전한 가르침을 청하니 병을 앓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고인이 남길 유훈(遺訓)의 말씀을 전해주었다. 만승천자(萬乘天子)인 임금께서도 오랫동안 국사의 병에 대해 걱정하여 자주 약을 보냈다. 어떤 친척[親串]이 국사에게 말하기를, “대저 병을 앓게 되면 비록 성현(聖賢)일지라도 불안하고 서서(栖栖)한데, 국사는 노년(老年)에 병까지 겸하였으니 어찌 도읍(都邑)을 가까이할 수 있겠는가. 연로(年老)하고 병까지 겹쳤으니 마땅히 부처께 귀의하는 것에만 극진히 하십시오”라고 청하였다. 국사는 이 말을 듣고 빙그레 웃으면서 말씀하시기를, “어찌 안도선생(安道先生)이 죽을 때[命期]가 되고서야 비로소 떠나갔음을 알 것이며, 정명거사(淨名居士가) 중생들 때문에 병을 앓고 또 그들을 근심한 것이니, 진실로 바쁜 길을 당하지 않고서 어찌 멈춘 발걸음을 바삐 서두르겠는가! 너는 내가 도읍에 있는 것을 자리(自利)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오직 이타(利他) 때문이라”라고 하였다. 천희(天禧) 2년(현종 9, 1018) 초여름, 수도(修道)와 홍도(弘道)하는 것이 거의 끝날 때가 된 후, 거돈사(居頓寺)로 떠나려고 석장(錫杖)을 짚고 궁중으로 가서 왕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장삼을 떨치면서 먼 거리인 사주(沙洲)로 빠르게 걸어가니, 모래 위에 한 마리의 백로(白鷺)가 높이 날아 구름 덮인 하늘로 들어가고, 고운(孤雲)이 아득하여 허공을 돌아 동학(洞壑)을 찾는 것과 같았다. 원주(原州) 현계산(賢溪山) 거돈사에 멈추어 “바야흐로 한가하게 연좌(宴坐)하다가 협진(浹辰) 십이일(十二日)을 말한다. 협(浹)은 주잡(周匝)의 뜻이고, 진(辰)은 자(子)로부터 해(亥)에 이르는 십이진(十二辰)이니, 진한(秦漢) 이전에는 날짜를 헤아림에 간지(干支)를 사용하였다.

도 못되어 사람이 태어날 때는 기운이 한 곳에 모였지만 이제 나는 곧 무물(無物)로 되돌아 가려한다”고 하였다. 이 달(음력 4월) 17일에 병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조용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대중들에게 이르시기를, “옛날 여래께서는 대법안(大法眼)으로써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 이와 같이 전전(展轉)히 사자상승(師資相承)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내 이제 이 법을 가져 너희들에게 부촉(付囑)하니 너희들은 잘 호지(護持)하여 혜명(慧命)으로 하여금 단절됨이 없도록 하라. 또한 상부(喪訃)를 임금께 주달(奏達)하여 국가의 의전규정(儀典規定)을 어렵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끝나자마자 열반에 드셨으니, 세수는 89세요, 법랍은 72년이었다.

이 날 아침 태양은 처참하게 안개에 덮여 있었고, 구름은 수심에 잠겨 암담하였으며, 맹수의 무리들은 산초(山椒)에서 울부짖고, 새들은 바위구멍에서 슬피 울고 있었을 뿐 아니라 모든 자연들이 삽연(颯然)히 변화를 나타냈다. 이 모두가 국사의 서법(逝去)에 대한 슬픔을 보인 것이다. 문도(門徒) 경충(慶充) 등은 벽용(擗踊)하면서 호곡하여 오장(五臟)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열반의 낙(樂)을 묻지 말라. 속결 없이 취굴(聚崛)의 향기를 속였으며 백학(白鶴)처럼 시든 숲을 보였도다.

조용한 숲 속에 풍수지리(風水地理)에 의해 승지(勝地)를 잡아서 비궁(閟宮)을 세웠으니, 곧 그 달 22일 거돈사 동남(東南) 간방(間方)에 장사를 지냈다. 장사가 끝나고 예의로 임금께 진문(奏聞)하니, 왕이 국사의 유언[遺占]이었다는 말을 듣고 애도하면서 “국사의 열반이 어찌 그리 빠르신가”하고 오랫동안 진도(震悼)[해석문 5]함을 잊지 못하였다. 특히 신신(藎臣)[해석문 6]에 명(命)을 내려 장례의 조문(弔問)을 대행(代行)하도록 하고, 이명(易名)[해석문 7]의 의전(儀典)을 거행하되 광명을 전법(傳法)의 문(門)에 비추어 국사의 시호를 원공(圓空)이라 하여 드디어 승묘지탑(勝妙之塔)을 세우도록 하고 미천한 신[豎儒]에게 명하여 국사의 아름답고 위대한 업적[徽烈]을 선양(宣揚)하게 하였다. 그러나 신(臣)은 문사(文詞)가 각로(刻騖)에 부끄러우며 학문은 요계(溲鷄)에게 사양해야 하며, 성품은 족포(族庖)와 같아서 근본 자질은 발형(發硎)의 예리함이 궁핍하고, 공부는 대장(大匠)이 아니어서 본바탕이 상수지기(傷手之譏)를 근심하였으나, 이미 왕의 조칙[頒宣]을 받들었으니 겸손하고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글을 펴고 보니 서로 질박(質樸)하여 다투어 부(賦)와 객(客)의 말이 부합하였다. 골짜기를 변하여 능(陵)을 만들었으니, 국사의 자취가 길이 이어지기를 바라며, 그 아름다움이 서소(西笑)와 같아 남간(南刊)을 본받고자 삼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심성(心性)을 깨달으면 부처님이고
분별망상(分別妄想)을 잊는 것은 선(禪)이다.
무미(無味) 담담한 본분(本分)의 그 경계(境界)는
언어문자(言語文字)와 분별상(分別想)을 떠났다.
헤아릴 듯하나 헤아릴 수 없네.
현묘(玄妙)하고 또 현묘한 그 진리가
노끈을 보고 뱀으로 착각하듯
눈먼 소경이 만진 코끼리 일정하지 않네.
가섭(迦葉)은 정확하게 터를 잡았고
달마(達磨)는 터를 닦아 집을 지었네.
묵묵히 전해지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여기에서 비로소 성취하였네.
역대조사(歷代祖師) 모두가 선양(宣揚)하였고
사사(師師)가 전해받은 열반묘심(涅槃妙心)을
부처가 가신 때가 멀고 멀어서
받은 법에 오류가 점성(漸盛)하였네.
무너진 강령(綱領) 회복할 자 누구인가.
여기 원력(願力)으로 태어난 이 있으니
하늘의 일월정기(日月精氣)를 이어 받았고,
지기(地祗)의 모든 영명(靈明)한 몸에 지녀
고고(孤高)한 그 성품 세속(世俗)을 뛰어났고
위대한 그 도량(度量) 만류(萬類)에 초출(超出)했네.
쌍상투를 여미는 총각 때부터
불교를 흠모해 출가(出家)를 결심하였네.
오폐(杇廢)한 속가(俗家)엔 살기를 단념하고
삭발염의(削髮染衣)로 교학(敎學)을 연마하고
계율(戒律)을 생명처럼 굳게 지켰네.
변재(辯才)는 무애하여 부루(富樓)와 같고
도덕은 점고(漸高)하여 날마다 새롭도다.
마음은 이미 깨달은 바 있다지만
도업(道業)을 닦고 닦아 중단함이 없고
견고한 그 신념 갈수록 확고하네.
멀고 먼 바다 건너 회해(淮海)를 지나
곧 바로 오월국을 찾아 갔도다.
연수(延壽) 회상(會上)에 이름을 걸고
경창(經窓) 옆에 마주 앉아 법을 물었네.
첨예한 질문에도 막히지 않고
심오한 그 경지 비길 곳 전혀 없네.
삼승(三乘)의 교리를 두루 통달하였고
모든 불자(佛子) 스승으로 섬기었도다.
구법의 길을 돌려 귀국하시니
영주(靈珠)가 합포(合浦)로 돌아옴과 같도다.
구마라습이 진(秦)에 옴과 같으며,
공자(孔子)가 되돌아옴과 다름 없도다.
불법(佛法)을 온 나라에 크게 드날려
홀로 자비하신 아버지가 되시어
그 덕화(德化) 하늘까지 가득하시고
어지심은 온 나라에 충만하도다.
우담바라(優曇鉢花) 그 서상(瑞祥) 재현하였고
지혜의 밝은 거울 거듭 비추네.
오조(五朝)의 임금 국사 앞에 경청하였고
이 같이 여러 임금 존경하였네.
공덕(功德)은 도탄구제(塗炭救濟)에 두루하였고
심미(深微)한 진리를 확철히 깨달았도다.
말년에는 범범(汎汎)하게 물러 나셔서
척연(倜然)하게 거돈사로 돌아오시다.
첩첩 산중 구름 속에 누워 있으며
졸졸 흐른 시냇물에 양치질하도다.
원숭이와 학(鶴)들이 따라 다니고
호중건곤 세진(世塵)과는 동떨어졌네.
마음은 언제나 한적(閒寂)에 두었으며
세월은 무상(無常)하여 모두가 변하네.
생명도 허부(虛浮)하여 풍전등화(風前燈火)이지만
유유히 관찰하여 자적(自適)하도다.
멸(滅)할 것이 아니건만 멸하여지고
종말이 없건마는 종말이 있네.
교종(敎宗)은 쇠잔하여 멸망에 가깝고
선종(禪宗)의 숲은 말라 공산(空山)이 되고
구비(龜碑)도 파손되어 없어질지라도
이 승묘탑(勝妙塔)만은 영원히 남아 있어
수 없이 성(成)·주(住)·괴(壞)·공(空) 반복할지언정
국사의 높은 바람 널리 펴지소서.

태평(太平) 5년(현종 16, 1025) 을축년 추(秋) 7월 27일 세우고, 신승(臣僧)인 정원(貞元), 계상(契相), 혜명(惠明), 혜보(惠保), 득래(得來) 등이 글자를 새기다.

해석주
  1. 전제(筌罤) 또는 전제(筌蹄)라고도 한다. 전(筌)은 고기를 잡는 도구인 통발이고, 제(罤)는 토끼를 잡는 그물이다.
  2. 목수가 직각을 요구할 때 사용하는 ㄱ자형의 자인데, 신승(神僧)들이 가지는 상징적인 물건이다.
  3. 초료(椒聊)와 같은 뜻으로 산초(山椒)를 가리킨다.
  4. 무리 큰 강물일지라도 그 원류(源流)는 겨우 작은 잔을 띄울 수 있는 정도의 소류(小流)라는 뜻이다. 전하여 모든 사물의 시초를 뜻한다.
  5. 임금의 애도(哀悼)함을 지칭한다.
  6. 충후(忠厚)한 신하로 충신(忠臣)을 말한다. 신(藎)은 나아갈 신자(字)이니, 여기서는 이 비문을 지은 최충(崔冲) 자신을 지칭한다.
  7. 대종사(大宗師)가 입적하면 왕이 그에게 생전에 부르던 호를 사용하지 않고, 시호(諡號)를 추증(追贈)하여 바꾸어 드리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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