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학교 이야기

옛날 學校[학교] 이야기

내가 소학교에 입학하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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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 아조 가까운 옛날, 웃지 마십시오. 지금으로부터 이십년 전만 하여도 지금 생각하면 아조 태고적 같은 옛날이어서, 그때에 학교에 다니면서 보고 들은 일, 내 몸으로 당하고 겪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끔 웃는 때가 많습니다.

어느새 어릴 쩍 이야기를 하는 것은 늙은이투 같지만 하도 자미 있는 일이 많기에 옆에서 권고하는 대로 몇 가지 이야기를 씁니다.

나는 서울 야주개(夜珠峴) 큰 길가에서 자란 고로 가끔 말굽에 채여서 집안에 소동을 이르키던 일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일곱 살 되던 해 봄에 천자문(千字文)을 읽어 ‘하늘천 따지’ 하던 것이 ‘온호, 이끼야’까지 졸업하고 다시 첫머리로 돌아가 ‘천지현황이요 우주홍황이라’ 하고 소리쳐 읽으면, 사랑에 오는 손님들이 이전 오리짜리 동전 한 푼씩 주던 때였습니다.

따뜻한 봄날이었는데, 하루는 서당에 다니던 나보다 두 살 위(九歲)인 아저씨가 서당을 그만두고 오늘부터는 학교에 간다고 자랑을 하기에 학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나도 학교에 넣어 달라’고 졸라 보았더니 ‘너는 이담에 가라’고 조부님이 말리시는 고로 넌즈시 밖에 나가 숨어 있다가 아저씨의 뒤를 따라 학교라는 곳에 가 보았습니다.

물론 그때는 머리를 깎으면 죽는 줄 아는 때였으니까 아저씨도 머리를 땋고 댕기꼬리를 드리고 나도 딴머리에 댕기꼬리를 달았고, 집안 어른도 모두 상투가 있었습니다. 새문안 거지바위(지금의 京城中學校 正門 건너편) 언덕에 큰 우물이 있고 그 우물 뒤에 큰 대문이 있고 그 대문에 보성소학교(普成小學校)라는 커다란 문패가 있었습니다.

그리로 들어가니깐 그 안 큰 마당에 갓 쓴 사람, 초립 쓴 사람, 머리 땋은 어린 총각들이 몇백 명인지 모르게 모여서 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디서인지 땡땡땡땡 하고 종 따리는 소리가 나니깐 으아 하고 편쌈판같이 소리들을 지르면서 그 많은 사람들이 이 방 저 방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가고 나 하나만 넓은 마당에 혼자 남았습니다.

무얼 하나 하고 그 들창 가깝게 서서 발돋움을 하고 들여다보니 하아연 나무로 맨든 책상과 걸상에 한 상에 두 사람씩 갓과 초립을 쓴 채로 앉아서 소학(小學)이라는 한문책들을 펴놓고 앉았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라는 얼굴 뻘겋고 수염 세 갈래로 난 어른이 갓을 쓰고 서서 길다란 담뱃대를 입에 물고 빨다가 그 담배대로 칠판을 딱딱 따려 가면서 글을 가르키드니 나를 내다보고, “요눔” 하고 웃기에 나는 얼른 도망했습니다.

사무실도 없습니다. 하학할 때가 되면 갓 쓴 선생님이 몸시계(懷中時計)를 호주머니에서 꺼내 보고 자기 손으로 종을 땡땡 치고 상투박이 학생들을 마당으로 내보내 놓고 선생님은 제각각 자기 반에서 그냥 그 칠판 밑에 갓을 쓴 채 드러누었습니다.

그리다가 어떤 이는 그냥 칠판 밑에서 잠이 들면 옆에 방 선생님이 놀러 왔다가 슬그머니 칠판에 있는 분필 가루를 집어서 자는 선생님 입에다 발러 주고 가기도 합니다.

그리다가 다시 상학 시간이 되면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오는 통에 잠이 깨여 벌떡 일어서서 담배를 피어 물고 아까 배우던 것을 이어 가르키곤 하였습니다.

나 혼자 뷘 마당에서 돌멩이를 가지고 놀고 있는데 점심때가 가까워 오니깐 별안간에 왼 학교가 떠들석 하면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이 방 저 방에서 우르르 몰려나오고 선생님도 부즈런히 갓을 바로 쓰면서 나왔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오신대, 교장 선생님이 오신대” 하고 야단들을 하면서 대문까지 마중(환영)을 나갔습니다. 그때의 교장은 김중환 씨라고, 그때 일곱 살 때 보기에도 점잖고 얼굴이 환하고 잘 생긴 이였습니다. 그이가 좌우 옆에 사람들을 삼사인 다리고 들어오더니 마당 동산 층계 우에 올라서서, 그 많은 학생들의 절을 받고 아무 연설도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 대신 데리고 온 사람을 시켜서 그 많은 학생들에게 일일히 양지(백로지) 두 장과 왜붓(연필) 한 자루씩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때의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먹 주고 붓 주고 벼루 주고 종이까지도 주는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가외로 교장님이 가끔가다 학교에 한 번씩 다녀갈 때 특별히 주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아들딸도 낳았을 수염난 학생들까지도 그것을 타 가지고 다시 글 배우러 자기 반으로 모다 들어갔습니다.

교장님은 이 방 저 방 차례차례 돌아다니면서 글 배우는 것을 시찰하고 나오더니, 마당 동산으로 올라가서 몇 번 왔다 갔다 하다가 (사무실이 없으니깐) 동산 우에 그냥 쭈그리고 앉았습니다. 한참 후에 동산에서 내려와서 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는 나를 보고

“이눔! 너 웬 눔이냐?” 하였습니다. 깜짝 놀라 돌멩이를 놓고 쳐다보니깐

“그눔 똑똑하게 생겼다. 너 몇 살이냐?”

합니다. “일곱 살이야요” 하니깐 성이며, 이름, 집이 어디며 아버지도 계시냐 하며 별것을 다 묻더니 내 뺨을 만지면서

“그눔 귀엽다! 너 학교에 안 다니련?”

잠잫고 있으니깐 또

“학교에 안 단이련…… 그래야 좋은 사람 되지”

하면서 내 뺨을 자꾸 주무르기에

“단길 테야요”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교장님도 기뻐하면서

“그래 학교에 다녀라. 그런데 학교에 다니려면 머리를 깎아야지. 자아 나를 보아라. 나처럼 머리를 깎아야지. 머리를 깎을 테냐? 응”

나는 ‘머리를 깎아야 공부가 되나요?’ 하거나 ‘이 학교에는 아무도 머리 깎은 이가 없는데요’ 하지도 못하고 그냥 철모르고 “네” 하였습니다.

교장은 무슨 큰 수가 난 듯이 나를 번쩍 안아다가 인력거 우에 안고 타고서 새문밖 자기 집으로 가서 시케를 한 그릇 준 후에 하인을 시켜 내 머리를 댕기 달린 채 가위로 썩뚝썩뚝 잘르고 다시 기계로 빨갛게 깎고 그리고 “그놈 잘 생겼으니 대장 모자를 씨워 주라”고 하니깐 하인이 어디선지 울긋불긋한 테를 여러 개 둘른 비단 모자를 씨워 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요새도 모자점에서 파는 젖먹이 아이가 쓰는 비단 색동 모자였습니다.

그리고 교장이 조그만 단장(短杖)을 주면서 “대장이니깐 이것을 짚으면서 내일부터 학교에 오너라” 하는 고로 그 조그만 단장을 짚고 버힌 머리를 팟단 들듯 대롱대롱 들고서 집으로 혼자 돌아오니깐 내 머리 깎은 것을 보고 큰일 났다고 난리가 난 것 같이 집안이 벌컥 뒤집혀서 나는 조부님께 종아리를 맞고 증조모님 조모님께서는 밤이 새도록 내 머리를 부뜰고 통곡을 하였습니다.

〈《어린이》 4권 6호, 1926년 6월호〉

상투에 학교 이름 붙이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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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만 깎으면 꼭 죽는 줄로 아는 때였는데, 일곱 살 먹은 어린애가 넌즈시 나가서 머리를 홀라당 깎아서 댕기에 달린 머리를 팟단같이 대롱대롱 들고 집에를 들어가 놓았으니 집안 어른의 눈에는 귀여운 손자가 목아지를 댕강 잘라서 손에 들고 들어오는 것같이 보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 그만 나는 조부님께 피가 나도록 종아리를 맞고 증조모님과 조모님은 밤새도록 버혀논 머리를 부뜰고 통곡을 하시면서

“어떤 몹쓸 놈이 남의 집 어린애의 머리를 깎아 놓았단 말이냐?”

고 고함을 치시고

“그래 그런 몹쓸 놈을 가만 둔단 말이냐”

고 하시면서 당장에 하인들을 시켜 원수나 갚는 듯이 분풀이를 하러 보내실 형세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조부님이 듣지 않으시어 싸움하러 쫓아가지는 않고 말았습니다.

천자문 끼고 유치반에 이튿날이 되어 삼촌이 학교에 갈 때에 나도 따라가야겠는데 도저히 가게 할 것 같지 않아서 나는 아침밥도 안 먹고 그 좋아 보이는 대장 모자도 못 쓰고 몰래몰래 밧같에 나아가 길가에 숨어 있다가 맨머리로 삼촌의 뒤를 따라 학교로 갔습니다.

학교에는 거의 삼백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모두 상투쟁이거나 머리 땋은 학생들이었는 고로 빨갛게 중대가리처럼 깎고 간 나를 보고 퍽도 이상스레 여겨 ‘머리 깎은 애, 머리 깎은 애’ 하고들 부르고 어떤 사람들은 나를 보기만 하면 쫓아와서 정성스럽게 내 반질반질한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그때의 그 학교에는 반이 모다 여덟 반이였습니다. 맨 처음 천자를 배우는 반이 유치반이고 그 우에 계몽편(啓蒙篇)을 배우는 곳이 반 년급(半年級) 즉 이년급의 반토막쯤 되는 정도라는 말입니다. 이 반 년급을 마치고야 비로소 초등과(初等科) 일년급이 되어 동몽선습(東蒙先習)을 배우고 초등과 이년급 삼년급을 마치면 또 고등과(高等科) 일년급 이년급 삼년급까지 마쳐야 졸업장을 타 가지고 보성 전문학교로 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때 높은 반이 좋은지 낮은 반이 좋은지 그것도 알지 못하고 손목을 잡고 갖다 앉히는 대로 앉았는데 물론 그 반은 맨 밑에 밑에 반토막 년급도 못되는 유치반― 천자 배우는 반이었습니다.

그 반에 있는 선생님도 갓 쓰고 담배대를 가지고 있는 이인데 나를 보고 “어 그놈 귀여운 놈이니 맨 앞에다 앉혀야지” 하고, 그중 제일 어린애니깐 맨 앞자리 선생님 앞에 앉혀 주었으나 나는 그 선생님의 코가 유난히 빨간 것과 글 가르키다 말고 코딱지를 후비는 것 때문에 늘 우수워 못 견디겠던 것을 지금도 잊지 않습니다.

책상 우에 엎어놓고 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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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교라야 정도만 소학교지 학생들은 거의 모다가 아들딸을 한사람이나 두어사람씩 낳은 상투 달린 어른들이었는 고로 선생님보다도 수염이 많이 난 사람도 있고 담배(권연)는 저마다 비단 조끼에 넣고 있어서 하학종만 치면 칠판 밑에서는 선생님의 긴 담배대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운동장 담 밑에서는 학생 서방님들이 피우는 권연 연기가 밥 짓는 연기처럼 무럭무럭 피어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보다도 제일 우수운 일이 있었습니다.

이름만 학교이지 배우는 것은 한문 서당에서 배우는 것과 똑같고 선생님이라는 이도 글방 선생님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똑같은 양반인 고로 매사에 하는 것이 글방 선생님의 짓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어느 반에서든지 아침 첫 시간에는 의례히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차례차례로 어저께 배운 것을 모주리 외어 보라고 하여서 잘 외이나 못 외이나 ‘강’을 받았습니다.

그때 만일 너무 외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불러내어 맨 앞에 책상에 엎어놓고 허리띠를 끌르고 바지를 헷치어 볼기짝을 내여놓고 버드나무 굵은 가지로 볼기를 때리는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반에서든지 나이 어린 사람은 총기가 좋아서 잘 외이지만 늘 못 외고 볼기를 맞는 사람은 상투 짜고 수염 터가 꺼멓게 잡힌 아들딸 낳은 어른 학생인 고로 바지를 헤치고 맞기를 죽기보다 싫어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선생님은 따려도 자기 손으로 따리지 않고

“이놈아 어린애도 다 잘 외이는데 너는 아들딸 낳고 애비 노릇 하는 놈이 이까짓 것을 못 왼단 말이냐. 그 시커먼 볼기짝을 어린애 손에 맞아 보아라. 그래야 부끄러운 줄 알게…”

하고는 굳이 유치반에 가서 어린 사람을 불러다가 그 볼기를 따리게 하였습니다. 그래 나는 공부하다 말고 고등과 이년급, 삼년급으로 끌려가서 수염 난 어른의 시커먼 볼기를 내 손으로 때린 일이 퍽 여러 번이었습니다.

갓 위의 학교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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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보성 전문학교는 서대문 밖 경구다리 옆 개와집(지금의 고양 군청 옆― 죽첨 보통학교의 서쪽 교사가 그 집)이었습니다.

소학교 팔년을 졸업하고야 그리로 넘어가는 고로 전문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참말 늙은이라 하여도 좋을 만치 젊은 사람 같지 아니한 샌님 학생들이었는데 소학교에서는 별로 그렇지 아니하였으나 전문학교에 다니는 샌님 학생들은 권연갑을 손가락만하게 가늘고 길쯤하게 오려서 거기에다 ‘사립 보성 전문학교’라고 한문 글자 여덟 자를 먹으로 길다랗게 써서 갓 앞에다 떡 문패 붙이듯 붙이고 길다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책보를 들고 여덟 팔자 걸음으로 걷고 다녔습니다.

그때는 학교가 처음 생긴 고로 학교에 다니는 것이 큰 세력이였습니다.

일반 사회에서 학교에 다니는 학생을 벼슬하는 사람이나 못지않게 대접하였고 학생이 조금쯤 잘못하는 일이 있어도 순사가 감히 말을 하지 못하던 터이었습니다. 그런 판이니 학교 중에도 보성 전문학교라는 제일 높은 학교에 다니는 것이 큰 자랑이고 또 큰 세력이니깐 그렇게 갓 우에다 길다란 문패를 써 붙이고 거만스럽게 팔자 걸음으로 다닐 만도 하였던 것입니다.

〈《어린이》 4권 7호,1926년 7월호〉

벌거숭이 삼백 명 백주 대로에 일어난 대변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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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괴 변괴하여도 그보다 더한 변괴는 없을 것이고, 우수워 우수워하여도 그보다 더 우순 일은 없을 만치― 굉장히 우수운 변괴스러운 대소동이 그때의 학교에서 일어났습니다.

내가 아홉 살 때인가 싶습니다. 간신히 유치반과 반년급을 마치고 초등과 일년급이 되었을까 말까...... 여전히 상투 달린 학생들을 앉혀 놓고 갓쓴 선생님이 담배대로 칠판과 상투 대가리를 탁탁 두리면서 동몽선습이나 효경을 가르키던 때였습니다.

나는 그때 나 혼자 깎은 머리에 테 많은 색동 모자를 대장 모자랍시고 쓰고 타오르는 듯한 분홍 두루마기를 입고 다닐 때였는데 그때 나와 한 반에 키도 나만하고 머리는 안 깎아서 댕기를 땋아 늘였지만 나와 똑같은 분홍 두루마기를 입고 오는 김효남이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갓 쓰고 코 빨간 선생님이 “어 고놈들 쌍둥이같이 귀엽고나” 하고 효남이를 일부러 내 책상에 가치 앉았던 아이를 다른 데로 보내고 내 옆에 앉히었습니다. 그리고는 특별히 나와 그 애를 귀해하면서 글을 가르키다가도 심심만 하면 우리 뺨을 어루만졌습니다.

전에도 이야기하였지만 그때는 학교라고 사무실도 없고 선생들은 갓을 쓴 채로 칠판 밑에서 낮잠을 자고 학교 임자는 교장님인데 그 어른은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번쯤 학교에 구경 오드키 휘휘 돌아는 것밖에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수운 일은 학교 안에서 상투 달린 점잖은 학생을 볼기까지 때리면서 호랑이 노릇하는 갓쟁이 선생님들이 교장님 오신다는 소리만 들으면 그만 깜짝깜짝 놀라며 담배대를 팽게치고 뛰어나가서 상전이나 만난 것처럼 허리를 굽실굽실하면서 말소리도 크게 못 내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교장님이 오신다 하면 학생들은 한이 없이 기뻐하였습니다. 그것은 교장이 오기만 하면 으레 양지(백로지)와 연필을 가지고 와서 그 많은 학생들에게 일일히 양지 두 장 연필 한 자루씩 나누어 주는 까닭이었습니다.

하루는 날이 흐린 날이었는데, 그날 교장님이 오신다 하는 고로 선생님도 망건들을 바로 고쳐 쓰고 학생들은 반을 정결히 치우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교장님이 그 얼굴 환한 교장님이 옥색 비단 두루마기를 입고 양지와 연필을 하인들에게 들려 가지고 왔습니다.

더러워진 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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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학교는 퍽 어수룩하고 미련하였던 것이지요. 하아연 나무때기 책상에 아무 칠도 하지 않고 그냥 하연 채로 두었던 고로 먹이 단 한 점만 묻어도 눈에 잘 띠었습니다.

그런 데다가 벼루든지 먹이든지 붓이든지 종이든지 달라는 대로 얼마든지 학교에서 대여 주는 고로 쓰고 싶은 대로 쓰는 판이였습니다.

붓이나 종이나를 자꾸 더 달라는 것은 고사하고 벼루를 가지고 네 것이 좋으니 내 것이 좋으니 하고 싸우다가는 서로서로 마음에 부족하여 공연히 벼루를 돌에 던져 깨뜨리고 다시 달라고 다시 달나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깐 종이든지 먹이든지 아낄 줄을 모르고 쓰니깐 그 하아연 책상에는 먹이 더 잘 묻어서 나중에는 까만 칠이나 한 것같이 새까마졌습니다.

자아 그것을 교장님이 보셨습니다.

얼굴은 점잖고 인자한 것 같아도 성질이 몹시 엄격한 양반이라 당장에 거기 있는 선생님과 학생들을 번갈라 보면서 호령호령하였습니다.

“이놈들아 살림하는 여자가 세간 아끼듯이 공부하는 놈들이 글 제구를 아낄 줄 알아야지……. 책상 하나도 깨끗이 간직하지 못하는 놈들이 공부는 아무리 잘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교장님이 불같이 노하니깐 갓쓴 선생님의 왼 얼굴이 코같이 빨개져 가지고 벌벌 떨기만 하고 대답도 못하였습니다.

“당장 닦아 놓아라. 그것도 공부다”

호령이 하도 무서우니깐 선생님들이

“녜에 인제 곧 닦이겠습니다”

하고 굽실굽실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제가 아니라 지금 당장 내 눈으로 보는 데서 닦어!”

추상 같은 호령을 어기지 못하여 온 학교 여덟 반 거의 삼백 명이나 되는 학생에게 동원령(動員令)이 내렸습니다.

“각각 자기 책상과 걸상을 학교 문 앞 우물 옆에 가지고 나가서 물과 모래로 문질러서 하얗게 닦아 놓으라고!”

학교 문 앞은 바로 새문(西大門) 큰길이었고 학교 문 앞에 있는 우물은 그 근처 동리 사람들이 모다 퍼다가 먹을 뿐 아니라 (수통이 없는 때니까) 왼만한 빨래와 김치거리를 거기서 씻어 가노라고 부인네들이 퍽 많이 모여드는 곳이였습니다.

그러나 교장이 명령이니 하는 수 없이 두 사람씩 자기 책상과 걸상을 메고 나가서 삼백 명이 일시에 닦아 놓아야 하게 되였으니 새문턱 그 번화한 큰길이 학생들로 꽉 매키게 될 지경이었습니다.

비가 와요, 비가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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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마침 잔뜩 흐렸던 하늘에서 비가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비가 오니깐 학생들은 옳다꾸나 하고 움즉이기 시작하던 책상을 다시 나려놓고 벗었던 두루마기를 다시 입었습니다.

“오늘은 비가 오니깐 내일 시키지요”

선생님들이 교장께 청을 하였더니

“비가 온다고 못할 일이 무언가. 학생들이 비가 그렇게 무서운가? 이다음에 군인이 되어 전쟁에 나가서도 비가 온다고 가만히 있겠나‥‥‥. 비가 와도 닦어!”

그러나 학생들은 거의 다 수염 터가 잡힌 어른들이라 마음대로 호사한 비단옷이 아까워서 한 사람도 마당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이 옷을 버리겠다고 못하겠답니다. 내일은 저의가 꼭 시키겠습니다”

하고 선생님들이 애걸복걸하였습니다. 그러나 교장은 점점 더 불쾌하여 화를 몹시 내었습니다.

그때는 모두 군인(軍人)의 기질을 숭상하는 때였는 고로 학교에서도 교장은 학생을 군인같이 훈련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니 학생들이 비단옷이 아까워서 못 하겠다는 말이 얼마나 불쾌하였겠습니까. 불같이 노한 교장의 입에서 전장(戰場)에 나선 장군의 호령같이 무서운 호령이 내렸습니다.

“모다 벌거벗어라! 벗고 닦어라!”

자아 큰일 났습니다. 모다 나 같은 여덟 살이나 아홉 살짜리 어린애 같으면 도리어 자미있어 하지만 스물두 살 스물 대여섯씩 되어 아들딸 낳은 학생이 더 많은 판이니 벌거벗으려 할 리가 있습니까.

더구나 벌거벗고 큰 행길 가로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얼른 벗고 나서랏!” 하고 호령은 자꾸 내리고 선생님들은 벌벌 떨면서 어서 벗으라고 자꾸 재촉을 하고……. 하는 수 없이 학생들은 투덜투덜하면서 벗기를 시작하였는데 그중 머리 굵은 학생 두 사람이 담을 뛰어넘어서 도망해 버렸습니다.

그러니깐 다른 큰 학생들도 벗었던 옷을 다시 주서 입으면서 달아나려 하는 고로 그때에 나 같은 어린애들은 철도 모르고 교장한테 가서 “모두 담을 넘어서 달아나요” 하고 일렀습니다.

교장은 점점 더 노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때 보성 소학교 앞집 큰 길가에는 한국 헌병대가 있었는데 교장이 담 넘어로 넘어다 보면서 헌병대 대장에게 말을 하니깐 금시에 헌병들이 나와서 학교 대문과 담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래 구름다리 위로 기어 올라가 달아나다가 헌병에게 부뜰려 온 사람이 서너 사람 있었습니다.

달아나지도 못하고 꼼짝할 수 없이 벌거벗고 나섰습니다. 수건 하나도 가리지 못하고 벌거벗은 학생 삼백명이 책상과 걸상을 메고 큰 행길가로 나아가 놓았으니 어찌 되었겠습니까.

지금의 서대문 안 경성중학교 정문 앞 큰길(그 때는 큰길이라도 몹시 좁았습니다)은 그 보기 흉한 벌거숭이 학생들로 그득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한동안 그리로 지나다니던 사람들은 다른 길로 피하여 돌아다니고 부인들은 멋모르고 오다가 소리를 지르며 도망해 달아났습니다.

비는 이슬비가 가늘게 오지마는 선뜻선뜻하고 추워서 입술들이 파랬습니다. 여러분 웃지 마십시오. 하도 추우니깐 오줌이 제절로 나와서 새끼에 모래를 묻혀가지고 책상을 문지르고 섰는 벌거숭이 삼백 명은 오줌까지 그냥 선 채로 일을 하면서 질질 누어 버렸습니다.

하도 더운 때니까 여러분이 웃으면서 읽으라고 이번에는 이렇게 우수운 일을 이야기를 하였습니다마는 지금으로부터 십팔년 전에는 그런 짓을 하여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을 만큼 그만큼 세상도 어두었지만 학교의 세력이 많고 학생의 위엄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 하면 웬만한 벼슬이나 한 것만 하였으니깐 학생이 조금쯤 잘못한 것은 순사도 말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학교장의 한 번 부탁에 헌병대에서도 그렇게 당장에 학교 부탁을 잘 들어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한 가지 일로 보아도 그때의 교장이 그렇게 구식 양반이었건만은 얼마나 학생들을 군대처럼 강하고 규률 있게 훈련시키려고 하였었는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홍수(洪水)가 져서 홍중원 냇물(川水)이 강물같이 쏟아져 흐르는데도 군대는 물 속이라도 전진하는 법이라고 하낫 둘 하낫 둘 호령하면서 여러백 명 학생을 그대로 물속으로 전진시킨 일도 있었으니까요.

〈《어린이》 4권 8호, 1926년 8·9월호〉

강제로 머리 깎이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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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건만 양력 정월 열 며칠날이라고 기억합니다. 별안간에 학교 마당에 삼백명 학생을 모아 세우더니 주먹만한 상투에 갓쓴 학생이 사분의 삼이나 되고, 나머지는 머리를 땋아 늘인 아이들이었습니다.

“무슨 일로 모아 세웠노?” 하고 섰노라니깐

“과세도 하였고, 교주(校主)님을 뵈온 지도 오래되었고 하여 오늘은 교주님 댁으로 세배를 데리고 가는 것이니 가거던 교주님 앞에 실례되는 일이 없도록 호령을 마추어 절을 잘 해야 된다”

고 학감님이라는 술 잘 먹는 이가 연설을 기다랗게 하더니

“유치반으로부터 앞으로오 갓!” 소리를 질러 그 삼백여 명 갓쓴 학생들을 인솔해 가지고 하낫 둘 하낫 둘 호령해 가면서 큰길 한복판으로 행진해 나아갔습니다.

갓들을 쓰고 큰길에서 하낫 둘 하낫 둘 발을 마춰 가는 꼬락서니야 지금 보면 허리가 아프게 우습겠지만 그래도 그때는 그것이 세력 당당한 행진이라 길 가는 사람들은 입을 헤 버리고 구경하느라고 야단들이었습니다.

“교주님에게 세배 가니깐 과자 한 봉지씩은 주겠지……”

“그럼 그거야 물론이지……. 교주님인데”

우리들은 하낫 둘 하낫 둘 발은 안 마추고 먹을 궁리만 하면서 따라갔습니다.

그때의 교주(李宗浩氏)댁은 지금 서울 매일신보사 뒷동리에 그때의 평양 병정들이 있는 (영문 같은) 집이었습니다.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서 그 평양 병정들이 죽 늘어서 있는 큰 대문으로 들어가 보니깐 보성 소학교뿐 아니라 갓에 문패 써 붙인 전문학교 학생들도 미리 와서 섰었습니다.

교주님이 대청에 나오셨다고 (우리는 얼굴도 못 보았습니다) 일제히 경례를 한 후에 큰 대문이 열리더니 무언지 지게에 산덤이 같이 우뚝한 짐을 힌보를 덮어서 몇 짐이나 되는지 자꾸 날라 들여오므로 우리는 “올치 과자다 과자다” 하고 기뻐했습니다.

“과자를 주거든 나는 안 먹고 가지고 갈 테야. 집에 가서 먹게……”

이렇게 속살거리면서 암만 기다려도 과자는 주지 않고 큰 대문 중 대문을 덜컥덜컥 걸어 잠그더니 학감과 평양 병정 두 사람씩이 문을 지키고 섰습니다. 그제야 무슨 일인가? 무슨 일로 우리를 가두고 대문을 잠그나 하고 우리들은 눈이 둥그래서 난리난 것처럼 두리번거리는데 그때 별안간 대청 가까운 편에서부터 ‘아이그머니’ ‘아이그머니’ 하고 부르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일어나면서 그 많은 사람들이 와르르 하고 문간 쪽으로 쏠려 나왔습니다.

그러나 대문은 꼭 걸어 잠겼고 저마다 저마다 눈이 뒤집히듯 되어 허덕허덕하며 ‘에구’ ‘에구’ 하고 달아날 구멍을 찾습니다. 우리는 그때 너무도 어릴 때라 큰 난리가 난 줄 알고 어머니를 부르면서 발버둥을 치며 울었습니다.

“아이그머니 아이그머니 사람 살리오. 사람 살려 주” 하는 부르짖음은 점점 더 커지면서 그 큰 집안이 물끓듯 하였습니다. 대체 웨 그 요란이 났는고 하니, 대문을 닫아 건 후에 평양 병정 여러 사람이 손에 손에 가위를 들고 나와서 대청 앞에서부터 모조리 붓잡아 가면서 상투를 덥썩 잘라 놓거나 귀밑머리를 덥썩 덥썩 잘르는 고로 머리 깎으면 목아지가 떨어져 나가는 줄 아는 학생들이라 그렇게 당장 죽는 것처럼 살아나려고 야단을 하였던 것입니다.

까닭을 알고 보니 나는 벌써부터 머리를 깎고 있었던 터이라 겁날 것도 없고 울 까닭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학생들은 수염이 길다란 전문 학생들도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가지고 어쩌면 살까 어쩌면 살까 하고 피란하는 사람같이 허둥거렸습니다.

억지로 머리를 안 깎으려고 극성스럽게 발광을 했던지 기어코 한 놈이 변소 똥 누는 구녁으로 기어서 행길로 뛰어 도망한 놈이 있었고 당장에 눈이 뒤집혀 안채로 뛰여 들어가서 뒷곁 담을 뛰어넘어 남의 집 안채로 하야 도망하다가 잡힌 사람도 있었습니다.

뒷간으로 도망한 놈이 금방 소문을 퍼쳐 놓아서 이 집 저 집 학부형 대개 어머니 아주머니들이 짚신도 채 못 신고 장옷 속에서 머리가 풀어져 산발이 된 것도 모르고 곤두박질로 뛰어와서 대문을 두드리면서 통곡 통곡하였습니다.

“남의 아들을 웨 그 꼴을 맨든단 말이요. 차라리 나를 죽여 주시요!” 하고 넉두리를 하면서 목을 놓아 우는 이도 있었습니다. 골목이 빽빽하게 모여온 부인네들이 소리 소리 지르면서 울어 놓으니 참말로 지옥 속같이 야단이 났습니다.

안에서는 그와 같이 머리를 반쯤 잘린 학생들이 어머니를 부르며 울고 불고 부르짖고 귀가 아파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용서 없이 들은 체 만 체하고 안에서는 몸부림하는 놈을 부뜰어서 여러 십 명 병정이 밤까지 다아 깎아 놓았습니다.

아까 과자인 줄 알았던 것은 과자가 아니고 새까만 학생 모자였습니다. 가주 깎아서 선뜻선뜻한 머리에 아무거나 맞는 대로 하나씩 골라 쓰고 엉엉 울면서 길거리로 나설 때는 자정 가까운 밤중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큰길은 어머니 아버지들이 아들의 중대가리를 만지면서 통곡하는 이로 가득하였습니다.

〈《어린이》 4권 9호, 1926년 10월호, 방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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