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 중앙당을 떠나며
선거 때문인가요? 봄이 온 기억이 없는데 날씨는 벌써 여름입니다. 일교차가 무지 큰 요즘, 네티즌 여러분 건강하십니까. 열린우리당 17대 국회의원 당선자 유시민입니다.
제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어디냐구요? 컴퓨터 키보드 앞이죠. 지난해 11월 창당대회 무렵부터 4월 15일 총선 투표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저는 무척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하며 반 년 세월을 견뎠답니다. 큰 정당의 중앙당에서 하는 ‘궁정정치’는 제 체질에 맞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이런 저런 인맥을 통해 이루어지는 비공개적 정보유통과 치열한 자리다툼, 밖으로 내건 좋은 명분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 주고받기, 한편으로 스스로 모사(謀事)하면서 끊임없이 타인의 모사(謀事)를 의심하는 소위 중앙정치, 저로서는 참 적응하기 어려운 분야입니다.
설악산 워크숍이 끝난 후 어떤 초선 당선자가 물었습니다. 워크숍 막바지에 토론을 더 하자고 소리지른 걸 두고 한 질문입니다. 당신은 지도부 아니냐며, 지도부가 왜 그렇게 하느냐, 그는 그렇게 물었습니다. 전 대답했죠. 나는 지도부가 아니랍니다. 저는 그 날 워크숍의 ‘돌출발언’을 통해 저에게 더 잘 어울리는 곳으로 돌아가려는 결심에 못을 박았습니다. 저는 중앙당의 당직을 더는 맡지 않겠다는 뜻을 당 지도부에 전달했습니다. 새로운 당직은 물론이요, 기존의 당직도 사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보도를 보면 송영길 의원이 전자정당위원장을 맡을 모양입니다. 저보다는 더 잘 하리라 믿고 떠납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해맑게 웃으며 행복해 하는 선배 다선 의원들을 보면서 저도 잠시 동안 흐뭇했습니다. 소수야당 또는 소수여당으로서 맛보아야 했던 비애가 얼마나 컸기에 저리도 좋아할까, 저도 조금은 겪어보았기에 공감합니다. 그런데 과반수 의석을 획득한 열린우리당의 총선 승리, 그 날 이후 저는 왠지 마음이 무겁고 우울합니다. 커다란 성취의 뒤끝을 밟고 오기도 하는 일시적 허탈감 때문일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곰곰 생각해 보니 미래에 대한 불안과 어떤 종류의 좌절감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정치인이 내면의 불안을 공개적으로 고백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전에도 종종 그랬던 적이 있는 만큼, 말 꺼낸 김에 하는 데까지는 해 보겠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해 명확하고 자신 있게 대답하기 어렵다는 데서 나옵니다. “열린우리당은 정말 당원이 주인인 정당인가?” “만약 아직은 아니라면, 그렇다면 예견할 수 있는 미래에 확실히 그런 정당이 될 수 있는가?”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대통령 퇴임 이후의 대한민국도 책임질 수 있는 정당인가?” 텔레비전 토론에 나가서는 큰 소리를 쳤지만, 조용한 골방에서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해 보면 자신 있는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우울한 것은, ‘권력을 국민에게, 당권을 당원에게’ 돌려주는 정치개혁 정당혁명의 꿈을 열린우리당을 통해 이룰 수 있다고, 분명하게 확신이 묻어나게 외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열린우리당 중앙당을 떠나 컴퓨터 키보드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반 년 동안, 중앙당 지도부의 내노라 하는 분들을 모시고 협력하고 봉사하고 토론하면 가장 빨리 그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그 믿음을 일단 접습니다. 앞으로는 당원과 지지자들과 함께 아직 이루지 못한 정당혁명의 꿈을 밀고 나가겠습니다. 지난 시기 제 꿈에 상처를 입혔던 많은 분들을 잊으려고 노력해 보겠습니다. 이 꿈에 대한 저의 ‘병적인 집착’ 때문에 상처 입으신 분들도 저를 잊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겠습니다. 열린우리당의 국회의원으로서, 저는 어떤 국회의원도 소외당하지 않는 교섭단체를 만들겠습니다. 원하는 국회의원이라면 누구나 발언할 수 있고, 소수 의견도 당당한 시민권을 인정받는 풍토를 만들겠습니다. 당원과 지지자들의 뜻을 원내 대표단에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애쓰겠습니다. 우리당이 원내에서 되도록 진보적 개혁적 노선을 견지하게끔 노력하겠습니다.
열린우리당의 중앙위원으로서 최고의결기관인 중앙위원회가 당의 중심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중앙위원회가 당지도부 선출권과 공직후보 선출권 등 중요한 권한을 당원에게 돌려주는 정당혁명의 주체가 되도록 힘있게 세우겠습니다. 중앙위원회의 권한을 침해하거나 제약하려는 모든 형태의 도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맞서 싸우겠습니다.
저는 열린우리당의 경기도당 위원장입니다. 법정지구당이 해체된 상황에서 당원조직을 어떻게 재편하며 도당 대의원과 상무위원들을 어떻게 선출할 것인지, 당원들의 일상적 정치활동을 도당이 어떻게 지원할지 연구하는 중입니다. 곧 새로운 방침을 마련할 것입니다. 임시전당대회를 열면 시도당 위원장을 포함한 중앙위원 선거도 새로 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도당위원장을 그만두는 그 날까지, 당헌당규가 부여한 도당위원장의 모든 권한을 행사하여, 열린우리당 경기도당을 기간당원 중심의 상향식 정당조직으로 자리잡게 하겠습니다.
저는 또한 네티즌의 한 사람입니다. 이제 자주 글을 쓰겠습니다. 채팅 기회도 만들겠습니다. 온라인 활동을 통해 열린우리당 지도부와 당원, 지지자 사이의 거리를 좁혀 보겠습니다. 열린우리당 국회의원과 주요 당직자들이 하루에 몇 번이라도 당원게시판이나 지지자들이 많이 오는 정치사이트를 접속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겠습니다. 저부터 더 적극 대화하고 소통하겠습니다.
네티즌 여러분 고맙습니다. 저 개인에게 보내주신 그 엄청난 후원도 고맙고, 어려웠던 총선 막판에 보태주셨던 그 많은 표도 너무나 고맙습니다. 여러분은 대통령을 살렸고 정당개혁의 꿈을 살렸고, 그렇게 해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살리셨습니다. 꼭 보답하겠습니다. 당원이 주인 되는 정당, 정당혁명의 꿈을 열린우리당을 통해 실현하겠습니다. 잠깐 그림이 흐려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열린우리당을 떠나지는 마십시오. 스스로 이루지 않으면 누구도 주인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정당에서도 할 수 있겠지만, 기왕이면 국정을 책임지는 열린우리당에서 저와 함께 그 꿈을 이루어 갑시다.
네티즌 여러분 건강하십시오.
2004년 5월 1일
열린우리당 중앙위원 유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