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29장
出版記念會[출판기념회]
편집서울 거리에 혹한이 왔다. 삼한 사온의 습성을 무시하고 정월 하순이 되면서부터 모진 삭풍과 함께 추위는 점점 매서워졌다. 꽁꽁 얼어붙은 눈길이 녹을 사이가 좀처럼 없었다.
지운의 창작집「愛人[애인]」이 출간된 것은 정월 하순의 일이었다.
그 동안 지운은 쭉 자리에 누워서 아버지에게 보내온 결혼 사진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중병환자처럼 살이 쭉 빠져 버린 얼굴에 두 눈동자만 유난히빛나고 있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여 신경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수면제라도 먹고 잠을 자야만 하지 않겠느냐고 어머니는 손수 수면제를 사 갖고 왔으나 지운은 어머니의 심정이 측은해서 먹는 척만 했을 뿐, 한 봉도 그것을 복용하지는 않았다.
건강에 대한 우려 같은 것은 이미 털끝 만큼도 없다. 인간의 육체가 정신적인 고통으로 말미암아 얼마 만큼의 손상을 힘 입을 수 있는지 지운은 지금 자기 자신의 육체를 그러한 실험대 위에 올려놓고 그것을 측량하는 한 사람의 과학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세수도 하지않고 수염도 깍지 않았다. 거울을 가끔 들고 광대뼈가 차츰 더 두드러져가고 있는 자기의 창백한 모습을 들여다 볼 적마다 지운은 일종의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다. 자기의 육체를 학대하는 이외에 지운에게는 취할 길이 이미 두절되고 말았다.
『나는 인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는 때때로 이러한 질문을 신에게 하였다. 지운은 교인이 아니었으나 인간의 노력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부닥쳤을 때, 그는 곧잘 신을 찾았다.
그러나 신은 그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 신의 대답인지도 모른다고 지운은 나날이 수척해 가는 자기의 육체만을 말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꼭 한 번만……』
지운의 유일한 소원은 꼭 한번만 오 영심을 만나서 한두 시간 동안을 아무런 말도 바꾸지 않고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어 보고 싶은 것이다. 새가 날면 새를 같이 바라보고 하늘에 별이 있으면 별을 같이 쳐다보면 되는 것이다. 그 이상의 욕망을 지운은 갖지 않고 있었다.
세속적인 온갖 욕망을 포기할 수 있는 맑은 심경 속에서 지운의 영혼은 지금 성스러울 만큼 곱게 승화(昇華)되고 있었다. 아름다운 신비를 오 영심에 남겨 놓음으로서만 자기의 사랑은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지운은 그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 밤 지운은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했다. 임 교수는 잠자코 있었다.
어머니도 잠자코 있었다.
『저는 언제나 그 누구에게도 제 갈바를 묻지 않겠읍니다. 저 자신이 신이요, 조물주라고 믿고 저는 꼭 한 번만 오 영심을 만나겠읍니다.』
『글쎄 남의 사람을 만나서는 뭘 하니……?』
『아무것도 할 것은 없읍니다. 그저 한 번 만나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욱 더 불행해 질 것이고, 괴로움만 커질 것이 아니냐?』
『불행이고 괴로움이고……그런 세속적인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불행을 우려하고 괴로움을 피한다는 그태도조차저는 불순하다고 생각하지요. 저는 지금 성스러울 만큼 맑은 심경을 지닌 한 생명체의 영혼을 문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성의 귀중함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예요.』
『그렇지만 남의 눈이 있지 않냐? 영심을 사랑한 것은 네가 먼저지만, 어쨌든 지금은 남의 사람인데……』
『그 사람의 눈을 만든 것은 누구입니까? 도덕률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그 인간의 행동이 사악(邪惡)을 의미할 때 뿐이지요. 어머니, 제 행동이 과연 하나의 사악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사람의 눈을 만든 것은 바로 우리의 선조인 인간이었읍니다. 저는 참된 인간성의 옹호를 위하여 과거의 조잡하고 관념적인 사람의 눈에 항거해야만 하겠읍니다. 오 영심은 자기 남편을 사랑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오 영심은 낡은 윤리의 제물이 되어 있을 따름이니까요.』
임 교수는 일종의 전율을 전신에 느끼며 끝끝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애정과 이해와 성실을 가지고 백년 해로의 서약을 신랑 신부에게 시킨 임 교수였다. 그리고 그 서약이 배반 당할 때 신 앞에 민주고발을 제기하겠다던 임 지운이었다.
바로 그 임 교수의 아들인 임 지운이가 참된 인간성의 옹호를 위하여 잘못하면 오 영심의 가정을 파괴 할는 지도 모르는 행동을 감히 취하려드는 것이다. 임교수는 일종의 전율을 느꼈다. 참되고 아름다운 사랑의 순교자가 되려는 아들의 행동에서 전율을 느낀다는 것은 확실히 자기 모순을 의미하고 있어다.
세상의 부모들은 자기 자녀에게 곧잘 교훈을 한다. 참되라, 성실하라, 좋은 일을 해라, 아름다와야 한다. 그러나 그 참되고 성실하고 좋고 아름다움이 실천되기 위해서는 온갖 현실적인 불행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결국에 있어서 한낱 공 염불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임 교수가 느낀 전율 속에 피의 아우성이 있었다. 임 교수에게 있어서도 피는 물보다 진했던 것이다. 피가 물보다 진한 이상 인류의 이상은 영원히 한낱 이상테로서의 존재 가치 밖에는 없다. 과거의 수천 년에 걸친 지성(知性)의 역사는 피의 비극으로 부터 인류를 구제하려고 노력을 했다. 그러나 피는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물보다 진했다. 이리하여 이루어진 인류의 역사는 동시에 피의 역사를 의미했었고 에고(個我[개아])의 역사로서 구성되었다.
해방 이후의 민족적 혼란과 육·이오 동란으로 말미암아 민족상쟁의 참극은 우리 민족으로부터 비아(非我)의 정신을 송두리째 뽑아 놓았다. 부모들은 이미 진선미에의 교훈보다도 먼저 재치있는 처세술을 자녀에게 교훈하였다. 오늘의 임 교수의 전율 속에서 임 교수는 자신의 타락을 확실히 발견하 였다. 과거 이 석란을 통하여 인생의 청춘을 순간적이나마 상상했던 자기 자신에서도 역시 임 교수는 에고의 비극을 자각하였다.
임 교수는 차차 자신을 잃기 시작했다. 마담로우즈의 생활태도를 일시적이나마 마음 한편 구석으로 허용했던 자기 자신에서도 또한 철학의 타락을 자 인하였다.
『나는 도저히 학생들 앞에 나서서 떠들 자격이 없어졌다!』
교육이 지식의 산매를 의미하고 있지 않는 이상 임 교수는 불원간 학교를 사직할 결심을 하고 있었다.
「愛人[애인]」의 출판기념회가 사흘 후로 결정된 어느 날, 책 한 권을 보자기에 싸가지고 지운은 명륜동 영심의 집을 찾아갔다.
오 진국씨의 자유롭지 못한 몸이 영심을 필요로 했을 뿐만 아니라, 곧 일선으로 나갈 허 중령이었기 때문에 당분간 한 집에서 지나기로 되어 있었다.
허 중령은 외출하고 없었다. 영심이가 아버지와 함께 지운을 맞이했다. 지운의 이 돌연한 출현에 영심은 적지 않게 놀란 모양이었으나 당황한 빛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눈에 띠일 만큼 파리한 얼굴을 영심은 하고 있었다.
자기보다 못지 않은 고민이 영심에게도 있은 것이 분명했다.
『어디 편치 않은가? 얼굴이 몹시 수척했는데……』
인사를 하고 마주 앉았을 때 오 진국씨가 그런 말을 했다.
『별반 편찮은데는 없읍니다.』
『그렇다면 좋지만…… 춘부장도 안녕하시고……』
『네.』
지운은 자기가 지금 무슨 커다란 죄악을 범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자꾸만 마음이 떨렸다. 오 진국씨 옆에 조용히 꿇어앉아 있는 영심을 바라보기가 어쩐지 무섭다.
이러한 의구심은 집을 나설 때부터 품고 있었다. 단지 한 번 만나만 보는것이 무슨 죄악이냐고, 참된 인간성을 옹호하기 위하여 조잡한 윤리에 항거하겠다던 저번날 밤의 지운의 논리는 결국에 있어서 지운의 살은 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삼십 대가 지닌 습성이 그대로 지운의 행동을 죄악시하고 있는데는 지운 자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제 처녀창작집입니다. 변변치 못한 책이지만 허형에게 드릴려고 왔읍니다.』
지운은 보자기를 끌러「愛人[애인]」을 내 놓았다.
연못가에 벚나무와 벤치를 배치해 놓은 표지 그림만 보고도 영심은 그것이 자기네들에 관한 이야기임을 직감했다. 더구나 제자로 되어 있는 「愛人[애인]」의 두 글자가 자기 자신의 글씨임을 보았을 때 영심은 어두운 표정과 함께 불현듯 시선을 들어 지운의 수척한 모습을쳐다 보았다.
두 눈동자만이 유난히 빛나고 있는 지운의 얼굴이 그 무엇을 열심히 애원하고 있었다. 순간 저번 피로연 석상에서 순간 느낀 운명의 극치가 다시금 영심의 의식에 왔다. 그것은「죽음」이었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한 조각 떠 있는 지면에 허 정욱과 오 영심의 이름이 나란히 씌어져 있었다.
『훌륭한 책을 내셨오.』
그러면서 오 진국씨가 또 한 장을 들쳤다. 내도가 나왔다. 해군복의 소녀의 상반신이 펜으로 그려져 있었다.
또 한장을 들쳤다. 차례가 나왔다.「愛人[애인]」외에 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었다.
영심은 아버지 옆에서 그것을 말끄러미 들여다 보고 있었다.
또 한 장을 들쳤다. 본문이 시작되기 바로 전면에 다음과 같은 글이 푸로 로그(序詞[서사])로 적혀 있었다.
- 사랑(戀情[연정])은 永遠[영원]한 幻影[환영]속에서만 아름답게 살아 있다.
- 永遠[영원]한 神秘[신비]는 永遠[영원]한 사랑을 約束[약속]한다.
『음 ──』
오 진국씨는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무슨 뜻으로 말한지는 잘 모르지만 현대 남녀들이 바꾸는 애정의 풍습에 항거하는 말이 아니요?』
지운은 그저 미소만 지었다.
『남녀의 애정에서 이처럼 맑은 심경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힘든 일일 텐데…… 우러러 보오.』오 진국씨는 진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동의 말과 함께 거기 끼워져 있는 흰 봉투를 집었다. 출판기념회의 초청장이 봉투에는 들어 있었다.
『나는 가지 못하지만 애들은 꼭 참석을 할거요, 축하하여 마지 않소.』
할머니가 깎아 온 사과 한쪽을 들고 나서 지운은 이윽고 몸을 일으켰다.
『정욱은 이 며칠 동안 국방부에 볼 일이 좀 있어서 나가는 모양인데……
돌아오면 영심이가 잘 전언을 할 거요.』
『안녕히 계십시요.』
『춘부장의 바둑 수가 상당하신 모양인데, 술이나 한 병 받아 농고 한번 모셔봐야겠소. 돌아가거든 이 말도 좀 전해 주시요.』
『알아 모셨읍니다.』
영심이가 현관밖까지 따라나왔다.
『안녕히…….』
말끝을 맺지 못하는 인사를 영심은 했다.
『영심씨, 잠깐만……』
현관밖이자 정학원 마당이다. 눈이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내일 오정에 창경원에서 기다리겠읍니다. 한 번만……최후로 한 번만 저를 만나 주세요.』
영심은 빤히 지운의 얼굴을 바라보며 괴로운 듯이 대답을 했다.
『아무 말 마시고 그냥 돌아가세요.』
『그냥 돌아갈 수가 제게는 없읍니다. 영심씨가 와 주시지 않으면 오실 때까지 저는 매일이라도 기다리겠읍니다.』
『저는…… 저는 이미 자유로운 몸이 아닙니다.』
『잘 알고 있읍니다. 그러니까 저는 지금 영심씨를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한두시간 그저 영심씨 옆에 있어 보고 싶을 따름이지요. 연못에 얼음이 얼었읍니다. 학생이 스케팅을 하지요.』
『허중령은 지운씨를 인간적으로 존경하고 있지요.』
『그것도 알고 있읍니다. 그렇지만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대가로서 이 마음을 무시할 수는 없읍니다. 저는 기다리겠읍니다. 한 달이고 일 년이고 저는 연못가에서 있겠읍니다!』
지운은 휙 돌아서서 드넓고 삭막한 경학원 마당을 쏜살같이 사라져갔다.
『아아 ──』
영심은 순간 눈을 감고 현관 문기둥에 몸을 기댔다.
영심이가「愛人[애인]」을 마지막까지 읽고 난 것은 거의 저녁 무렵이 가까웠을 때였다. 석양 햇발이 이층 영심의 방을 다양하게 밝혀 주고 있었다.
구공탄 난로 위에서 주전자가 끓고 있었다.
오랫동안 방바닥에 엎디어서 영심은 울고 있었다. 십년 간에 걸친 지운의 연정이 한 구 절 한 구 절 영심의 마음을 갉아 내고 있었다.
석란과의 결혼을 기록한 구절 가운데 다음과 같은 한 마디가 있었다.
『……나의 영혼의 방랑은 한 사람의 여성을 희생시켰다. 이 결혼의 불행은 그 여인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의 병든 영혼에 있었다.
……그 여인은 자기의 육체를 바치어 애욕의 지식을 나에게 제공했다. 나는 그 여인을 발판으로 하여 작가적인 수양을 쌓은 계산이 된다. 에고이스트!…… 애정의 반주를 상실한 애욕의 솔로(獨奏[독주])에서 나는 사막을 보았다. 열광(熱狂)의 고독과 서글픈 감정만이 도사리고 있는 삭막한 사막 지대!……가 도 가도 오아시스는 보이지 않았다……』
이 참회의 대목에서 영심은 문득 자기의 결혼 생활을 회상했다. 가도 가도 오아시스는 영심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과학의 논리가 무시되는 곳에 애정의 참다운 자태는 깃들여 있는지 모른다. 그 신비로움에는 동기도 이유도 없다. 원인도 결과도 없다. 오직 있는 것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환영뿐이다. 이 환영을 죽음의 순간까지 깨틀지 않고 붙들어 나가는 노력만이 사랑의 영원성을 약속할 것이다.』
이것은 석란과의 결혼이 파탄된 이후에 있어서의 지운의 심경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심경은 영심의 편에서 더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지운은 또 한 편 좀더 현실적인 사랑의 고백도 하고 있었다.
『천체(天體)의 추락과 우주의 붕괴를 남겨 놓고 그 여인은 사라졌다.』
창경원에서 오 영심을 놓쳐 버린 직후의 소감이었다. 그저 서로가 이 서울 어느 구석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을 행복하게 생각하면서 살겠다는 오 영심의 아름다운 꿈에 대한 항거의 외침이었다.
『내일 그이는 창경원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한 달이고 일 년이고……』
그이를 만나보고 싶은 일념은 지운 이상으로 영심에게도 절실했다. 만나서 할 이야기라고는 하나도 없다. 지운이가 그러한 것처럼 영심도 그저 그의 옆에 있어 보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오 진국씨의 딸이요, 성실한 남편 허중령의 아내로서는 도저히 지운을 만나러 갈 수 있는 오 영심은 못되었다. 영심의 생리는 이미 그러한 습성에 젖을 대로 젖어 있었다. 만나서 말 한 마디 바꾸지 않고 그대로 헤어져 돌아온 대도 그것도 확실히 남편의 성실한 애정을 배반하는 밀회(密會)를 의미하는 것이다.저녁에 허 중령이 돌아왔다. 증정 받은 책을 남편에게 내 보이며 영심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저녁상을 보아가지고 들어왔다.
『허어, 임형의 책이…… 출판기념회는 꼭 갑시다.』
소탈한 허 중령은 진심으로「愛人[애인]」의 출간을 기뻐했다. 남편이 기뻐하면 기뻐할수록 영심은 마음으로 자꾸만 죄를 짓고 있었다.
그날밤, 허중령은「愛人[애인]」을 읽고 나서 자기 대로의 감상을 간단히 말했다.
『어려워서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도 다소 있지만 내가 당신을 생각하던 심정과 같은 데가 있어서 눈물이 나오. 당신이 유 민호와 결혼을 하고 내가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됐다면……』
『그렇게 됐다면 어떻게 하셨겠어요?』
영심은 조용히 물었다.
『자아, 어떻게 했을까?……』
허 중령은 잠깐 생각을 하며,
『나는 군인이어서 문사들처럼 감정이 섬세하지 못하니까, 이렇고 저렇고 여러 말이 있을 것 같지가 않소. 단념하면 깨끗이 단념하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한 것처럼 그놈의 결혼을 파괴시킬 수밖에……』
영심은 가만히 웃었다.
『그렇지만 임형은 유하면서도 대단히 뾰족한 데가 있어서 간단히 단념하지 못할 거요. 이것이 사실이면 비극인 걸!』
지나가는 말처럼 허 중령은 말했다.
이튿날 지운은 창경원으로 갔다. 그러나 영심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날도 갔다. 다음날도 영심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이 바로 「愛人[애인]」의 출판기념회가 있는 날이었다.
기념회는 오후 다섯 시부터 소공동 모 다방에서 열기로 되어 있었다. 이날도 지운은 오경 때부터 창경원을 찾았다. 눈이 쌓인 벤치가 지운의 마음 처럼 외롭다. 스케팅에 흥겨운 남녀 학생의 발랄 한 모습이전설처럼 지운의 감정에는 창백하다. 앞날의 운명이 미지수(未知數)인 그들의 어림을 꿈결처럼 지운은 선망했다.
『오 영심과 임 지운은 오늘날, 무엇 때문에 이처럼 연옥(煉獄)의 고민 속을 헤매이지 않아서는 아니되는 것일까?……』
이유는 극히 단순했다. 그 단순한 것이 인간을 이처럼 학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지운은 놀라고 있는 것이다.
『우주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있기 때문에 우주가존재하는 것이다. 나 자신이 우주의창조자요 조물주인 것이다.』
그러한 임 지운의 존재 가치가 사상(思想)의 여인 오 영심을 마음대로 만날 수조차 없다는 사실이 자꾸만 가소로워지는 것이다.
운명의 극치를 생각하고 유명(幽明)의 한계선에서 삶보다 죽음을 더 골똘히 기원했던 지나간 두 주일 동안의 악몽으로부터 다시금 벗어나 보려고 발버둥을 쳤다.
이날도 영심은 종시 나타나지 않았다. 지운은 영심을 점점 원망하기 시작하였다.
그날 저녁, 출판 기념회는 성황을 이루웠다. 선배 친지들의 축사와 찬사가 많았으나 지운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문학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찬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지운은 현실에서의 패배를 한층 더 깊이 맛보고 있었다.
절망의 심연(深淵)속에서 지운의 영혼은 울고 있었다.
인편을 통하여 석란에게서 축사가 왔다.
『……「愛人[애인]」의 출간을 축하합니다. 끝끝내 나를 용서해 주지 않는 심정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요. 그것을 단지 남성의 횡포라고 생각한데 내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요. 작품 속에서 나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은 지운씨가 차차 고마워져요. 지운씨가 나를 희생시킴으로서 작가적인 성장을 보았다면 나는 또 그것으로서 인생의 성장을 지금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요. 지운씨가 에고이스트인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에고이스트예요. 오늘의 인간에서 에고를 빼 버리면 남은 것은 백치의 공백(空白)! 그 해군복의 소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무척 알고도 싶지만 설사 애정의 반주를 지닌 애욕일지라도 결국에 가서는 열광의 고독과 서글픔이 도사리고 있는 사막을 발견할 것이라고, 이 한마디는 마담로우즈의 애욕의 철학을 잠시 빌려 온 말이지만 작가적 수양을 위하여 마담 로우즈가 특별히 적어 보내라기에 적는 것이고 내 지식은 물론 아니지요. 애정 애정하고 애정의 가치를 실제 이상으로 몽상하고 있는데 작가 임 지운의 비극이 있는 것이라고 마담 로우즈는 무척 동정하고 있지만 생각컨대 마담의 이러한 지식은 그 방면의 사범인 유 민호 변호사에게서 교양을 받은 철학이 아닐까 합니다.
지운씨가 민주주의에 식상(食傷)을 받은 것과 동등한 정도에서 나는 「愛人(애인)」을 읽고 그만 애정이라는 말에 체해버리고 말았지요. 입만 벌리면 미주주의요 하고 떠들어 대는 것이 우리 민족의 비극이라면 그와 마찬가지 정도에서 입만 벌리면 애정이니 사랑이니 하고 떠들어 대는 오늘의 우리 민족에게도 그만한 정도의 비극은 있을 거예요.애정에 체하여 귀중한 몸 손상치 마시기를 진심으로 원하며 여권 운동자의 대변인인 이석란은 올림 ──』
삼 부의 성의와 칠 부의 야욕을 내포한 글이었다. 지운은 자기의 순정이 모욕을 받은 것 같아서 불쾌하였다.
채 정주가 꽃다발을 안고 회장 안으로 조용히 들어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기다리는 오 영심은 오지 않고 뜻하지 않는 채 정주가 나타났다.
맨뒷자리에 정주는 외투를 벗고 가만히 앉았다. 안았던 꽃다발을 외투 위에 올려놓고 시선을 들어 멀리 지운을 바라보았다.
생각만 하여도 불유쾌한 존재였던 임 지운이었다. 그 임 지운을 위하여 정주는 온 것이다. 그 뾰족했던 자존심을 무마할이 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겼는지 모른다.
『……다소 생각하는 바가 있어 결혼을 안할 셈으로 있었지요.』
최후의 작별에서 지운은 그런 말을 했었다. 그 이유를 정주는 「愛人[애인]」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다. 정주의 차거움이 질투를 느끼기 전에 먼저 지운의 심정에 이해가 갔다. 불쾌하던 감정이 점점 희미해지면서 어쨌든 석란이보다도 자기와의 결혼을 좀더 깊이 생각했던 사나이에게 꽃다발 하나를 드리고 싶었다.
『이 꽃다발을 드려야겠는데요.』
문 옆에서 손님 접대를 하는 젊은이에게 정주는 가만히 물어 보았다.
『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축사가 끝나는 대로……』
아까 한 차례 꽃다발 증정이 있었다.
『누구시지요?』
『채 정주라고 불러요.』
젊은이는 사회자 옆으로 걸어가서 귓속말을 전했다. 박수 소리가 나며 어떤 중견측 소설가의 축사가 끝났다.
『축사를 잠깐 중지하고 꽃다발 증정이 있겠읍니다. 증정하시는 분은 채 정주양입니다.』
박수 소리와 함께 정주는 꽃다발을 안고 조용히 걸어나갔다. 지운이가 일어섰다. 일어서서 다가오는 정주의 차거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여성에게는 어른다운 데가 있는 것이라고, 감동이 상실된 표정 밑에 흐림 없는 냉철한 애정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한 인간성의 온기(溫氣)가 절망의 심연에서 방황하고 있는 지운의 오뇌를 모성애처럼 감싸주는 것 같았다.
이 석란의 들뜬 오만 같은 것은 추호도 없다. 채 정주에게 오만이 있다면그것은 빙하(氷河)의 침묵과도 같은 오만이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인간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선생님의 꾸준한 정진이 계시기 바랍니다.』
절을 하고 꽃다발을 증정하면서 조용한 어조로 정주는 말했다.
『감사합니다. 정주씨가 와 주신 것은 뜻밖입니다.』
동백꽃에 사철나무를 섞은 꽃다발이었다.
박수 소리를 들으면서 정주는 되돌아 나왔다. 지운 선생은 역시 자기에게 대해서 미안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그 간단한 대화에서 정주는 그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운 선생의 인간적인 온기일 뿐, 십년에 걸친 그의 병든 영혼을 생각할 때, 유 민호와의 약혼을 정주는 마음속으로 잘 했다고 믿기워졌다.
젊은 시인 하나가 또 일어서서 축하 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정주는 갑자기 석란이가 보고 싶어쳐서 외투를 집어들고 일어서려는데 문이 열리며 동부인을 한 군인 하나가 나타났다.
『아, 저이는……?』
문 옆에 앉았던 정주는 동백꽃에다 진홍색 월계꽃 두 송이와 아스파라가스를 섞은 꽃다발을 안고 들어서는 부인의 모습이 눈에 익다.
임교수의「연애 강좌」에서 진실하고 아름다운 연애를 질문한 자주치마의 학생이었다. 우수에 찬 얼굴에 긴 살눈썹이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접대하는 젊은이가 인도하는 대로 허 정욱 내외는 중간쯤 되는 비인 좌석으로 가서 착석하였다.
지운의 얼굴이 갑자기 생기를 띄어 왔다. 지운은 조금 몸을 일으켜 허 정욱 내외에게 목례를 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군대식 경례와 함께 허 정욱의 쾌활한 목소리가 굴러나왔다.
지운은 멀리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집을 나오는 최후의 순간까지 영심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자기의 힘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운명의 명령과도 같았다.
사흘 동안을 꼬박 창경원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지운을 생각하면 영심은 그저 죽고만 싶었다. 그 길 이외에 자기에게는 손가락 하나 자기 의사로서 움직일 힘이 없었기에 이상더 운명에 항거 하기를 포기했다.
피치 못할 용무가 있었다고 하며 허 정욱이가 손수 동백꽃에다 아스파라가 스와 사철나무를 섞은 꽃다발을 사 갖고 돌아 온 것은 여섯시가 넘어서였다. 부랴부랴 저녁을 먹고 어서어서 옷을 갈아입으라고 재촉을 해왔을 때, 영심은 머리가 아파서 자기는 그만두겠다고 했다.
사내가 어떻게 꽃다발을 안고 나가서 증정하느냐고, 몰아치듯이 영심을 끌어내다가 무슨 물건처럼 지이프차에 허 중령은 실었다. 운명에의 항거를 영심은 포기하고 남편의 옆에서 꽃다발을 안은 채 가만히 눈을 감아 버렸다.
지이프차는 무섭게 달렸다. 총알처럼 흐르는 창밖의 밤거리가 영심의 조그만 항거를 비웃고 있었다. 폭풍 속을 떠나가려는 일엽 편주(一葉片舟)와도 같이 무력한 자기 자신을 문득 느끼며 운명에의 굴복 속에서 자기를 가까스로 오 영심은 붙들고 있었다.
종로 네거리 꽃집 앞에서 차를 멈추고 새빨간 월계 두 송이를 더 사서 꽃다발에 섞었다 동백꽃만은 뭣하다 하여 이것은 순전히 영심의 의견으로서 취해진 행동이었다.
달 속의 계수를 찍어 초가 삼간 지어 놓고 벗님을 모셔다가 천년 만년 살고 싶어 하는 임지운에게 월계꽃을 영심은 갑자기 증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 영심이가 자기의 마음을 현실화 시킨 최초의 행동이었다.
영심은 죄에의 의식을 분명히 느꼈다. 남편의 시선이 비로소 영심은 무서워졌다.
비평가 한 사람이 일어섰다. 그는 우선 이 작품에서 주인공들의 영혼의 신음 소리를 거스럼없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전제 한 후에,
『이 영혼의 신음과 오열은 새로운 모에랄의 진통(陣痛)을 의미했읍니다.
참된 것(眞[진])과 좋은 것(善[선])의 상극(相剋)에서 새로운 질서는 움트는 것입니다. 진리는 새로운 질서의 모체(母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가 임 지운과 행동인 임 지운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현실은 예상 이외로 완강하고 높습니다. 주인공이 과연 그 성벽을 잘 넘을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그 성벽 위에서 떨어쳐 버릴 것이냐?……이것은 금후 임 지운에게 있어서의 인생의 과제인 동시에 그의 문학적 생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포인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비평가는 앉았다.
영심은 일종의 전율을 느꼈다. 좋은 것보다도 참된 것이 탐구되는 이 모임의 분위기가 영심의 연약한 마음속에 그 무슨 용기 같은 것을 넣어주는 것 같았다. 영심의 방황하던 감정이 차차 침착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세속적인 온갖 현상이 암흑의 장막 속으로 사라져 버린 밤중, 홀로 책상 머리에 일어나 앉아서 독서를 하던 때와 꼭같은 맑은 심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문학에는 전연 문외한이지만……』허 정욱이가 자청을 해서 일어섰다. 실은 지운이도 허 중령의 감상을 듣고 싶었으나 그러한 자기의 심정이 어딘가 잔인한 것 같아서 단념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 같은 문외한의 감상도 필요할 줄로 믿습니다.』
거기서 허 정욱은 문외한다운 장식 없는 솔직한 감상을 이것 저것 이야기한 후에,
『나는 이 작품을 읽고 다소 비현실적인 느낌을 가졌읍니다. 최후의 장면만 하더라도 창경원에서 십년만에 다시 만난 여주인공이 과연 그렇게 해서 헤어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름도 주소도 묻지 말고 이대로 헤어지자. 그리고 그러는 것이 오히려 행복할 것이라는 여주인 공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오늘날처럼 험악하고 야박한 세상에, 모두가 다 양공주의 동족만 같이 보이는 오늘의 여성 가운데 그러한 사람이 있을 것 같지가 정녕 않아 보인다는 말입니다……』
허 정욱은 위스키티이를 한 모금 꿀꺽 들이키고 나서 다시 계속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에 있어서의 우리네의 환경으로서는 이 소설의 주인공인 소년들처럼 연애를 확실히 하나의 죄악감을 가지고 생각했읍니다.
나도 그랬으니까요. 그러나 그후 십년의 성장이 있었을 뿐 아니라, 십년에 걸친 연정을 품고 온 여주인공이, 연애를 죄악시 한다는 것은 고사하고 연애를 무슨 자랑거리처럼 생각하는 오늘의 이 천박하고 부패한 세상에서 그렇게도 얌전히 헤어질 수가 있을까요? 있다면 그 여성이야말로 지상의 천사일 것이고 그 여성의 남편이 될 사람이야말로 온 세상을 차지한 이상의 행운아가 될 것입니다.』
허 중령의 그 소박한 감상담에 사람들은 악의없는 미소를 지었다.
영심은 현기증을 느꼈다. 온 세상을 차지한 이상의 행복감을 이 남편은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월계 두 송이를 더 사서 섞은 자기의 행동이 뉘우쳐지며 그 무슨 용기 같은 것을 얻고 맑게 가라앉았던 심정에 다시금 파도는 일기 시작하였다.
『인제 어떤 비평가 한 분은 참된 것과 좋은 것의 상극에서 새로운 도덕이 싹튼다고 하였지만 과연 어떤 것이 참되고 어떤 것이 참되지 않는가에 대해서는 각기그 기준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주인공들의 연애를 완성시키는 것을 참되다고 보고서 하는 말 같았읍니다만 진실은 하나가 아니고 두 개도 될 수 있고 열 개 스무 개도 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 작품의 여주인공과 같은 인물이 실제로 있다고 보는 경우에 있어서 그렇게 몰인정하게 헤어져 버린 여주인공에게도 참된 것은 있다고 봅니다. 아니 그 것이야말로 진실로 참된 것입니다. 그 여인의 몰인정을 다만 낡은 도덕의 희생이라고 보는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만은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도덕 이전의 문제인 개인의 자유의사에서 출발한 약속의 문제입니다. 만일 진실을 위하여 개인의 약속이 번번히 무시당해도 무방한다면 그 진실은 이미 인간 생활에 불필요한 것이 될 뿐 아니라, 백해 무익의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참된 것과 좋은 것이 서로 합치되는 때 진실의 가치는 발휘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문학 작품이 때때로 인간생활에 구열(龜裂)을 만들고 인류의 친화성(親呼性)을 약화시키는 폐단이 있다고 보는 내 생각을 진실의 탐구자로서 자처하는 여러분은 비웃을 는지 모르겠읍니다만 나는 그 대신 인간의 친화성을 파괴하는 이단자(異端者)로서 여러분을 규정짓지 않을 수 없읍니다.』
일개 문외한인 군인의 말이라서 처음에는 유쾌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문인들이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여기까지 도달하고 보면 문제는 결코 단순한 그것이 아니었다.
『예술가는 자기의 감정을 소중히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참된 것은 자기 감정에 의 영합(迎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에의 복종에도 있읍니다.
이 작품의 여주인공은 감정의 진실을 포기하고 이성의 진실을 택했을 따름입니다. 감정의 진실이 새로운 도덕, 새로운 질서를 만든다는 것은 허망에 가까운 자아 도취의 공상입니다. 그것은 도덕이나 질서를 만들기 전에 인류의 사희성과 친화성을 파괴함으로써 제각기 국경(國境)을 가진 삼십 억 개의 세계의 난립(亂立)을 볼 것입니다. 남주인공은 그렇게 해서 헤어져 간여주인공과 그 이상 접근하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 두는데서만 자기 자신과 함께 상대편 여인을 참되게 살릴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개인과 더불어 인류 전체를 구제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어 마지않습니다.』
비평가의 결론과는 정반대의 결론을 허중령은 지었다.
허 중령 이야기의 요지는 결국에 있어서 예술이라든가 문학이라든가는 인간 생활에 필요한 정도에서만 존재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예술을 위한 예술, 문학을 위한 문학이란 인간 생활과 유리된 자아 도취의 생산물일 뿐더러, 그것이 또한 인류의 친화를 방해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에고대(對) 에고의 대립 상태를 조정하는 것과 같은 폐단을 갖게 한다면 그러한 예술, 그러한 문학은 인간 생활에 있어서 불필요할 뿐 아니라, 도리어 해독을 가져온다는 것이었다.
먼저 축사를 한 그 비평가가 허 중령의 말에 반박을 하려고 다시금 일어서는 것을 사회자가 조용히 막으며,
『이 자리는 토론회가 아닙니다. 제각기 자기의 감상을 이야기하는 자리입니다. 시간도 없고 하니 허 중령 내외분의 꽃다발 증정을 마지막으로 폐회를 하겠읍니다.』
비평가는 다시금 착석을 했다.
『그러나 사회자로서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읍니다. 비평가 S씨의 이야기와 허 중령의 이야기에서 나는 하나의 문학 작품을 대하는 독자의 눈을 분명히 보았읍니다. 문단인의 눈을 S씨가 대표했고 일반인의 눈을 허 중령이 대표했읍니다. 문학인의 손으로서 제작된 하나의 작품은 좋건싫건 이 두 종류의 눈동자 앞에 내던져 지는 숙명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작자의 마음대로 어느 한편도 눈을 가리워 버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따라서 독자는 자기대로의 비평을 할 권리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문학 작품이 지닌 사회성을 우리는 발견할 수가 있다고 봅니다. 나는 오늘밤, 일반인의 눈을 대표하는 허 중령의 이야기 가운데서 문학 작품이 인간 생활에 구열을 가져온다는 말을 듣고 나 자신 미쳐 자각하지 못했던 중요한 문제가 제기되었다고 생각했읍니다. 그리고 그 중요성은 문학인에게 있어서는 진실의 탐구로서 옹호를 받고 있는 대신에 일반인에게 있어서는 개아(個我)의 확대적 노출로 말미암은 인간대 인간의 조화와 융합과 친화와 단결과…… 기타 사회 생활에 불가결한 온갖 협조 정신의 붕괴를 의미했읍니다.
그것은 인간의 윤리와 사회적 질서의 파괴적 존재로서 일반인에게는 이단시(異端視)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작품「愛人[애인]」에 대한 S씨와 허 중령의 정반대의 비판 기준이 바로 그것을 여실히 말하고 있는 것으로서 대단히 흥미 있는 중요문제라고 생각했읍니다. 행동인 임 지운과 작가 임 지운 ── 이 두 개의 임 지운이 과연 어떤 종류의 협조와 타협을 볼 것인가?……
이 문제는 문학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앞날의 임 지운에게 있어서 지극히 흥미로운 명제(命題)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하며…… 다음은 허 중령 내외분의 꽃다발 증정이 있은 후, 오늘의 주인공인 임 지운씨의 간단한 답사로써 폐회하기로 하겠읍니다.』
박수 소리와 함께 영심은 조용히 일어섰다. 분홍색 양단 저고리에 곤색 비로드 긴 치마를 영심은 입고 있었다. 새빨간 월계꽃 두 송이가 영심의 분홍 저고리와 담농(淡濃)의 회화적인 조화를 잘 이루고 있었다.
『나도 그런 꽃다발을 한 번 받아 보고 싶은데.』
『자네도 빨리 책을 내게나.』
『책을 내도 줄 사람이 없어서……』취기가 돈 사람들의 헤실픈 말이 영심의 등뒤에서 들려왔다.
지운은 일어서서 영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개를 소그듬이 숙인 채영심은 걸어왔다. 지운의 식탁 앞에서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가만히 들고 영심은 지운을 바라보았다.
태연할 수 있는 것은 얼굴들 뿐이고 네 개의 눈동자와 두 개의 심장은 꽃다발에 섞여 있는 아스파라가스와도 같이 오들 오들 떨고 있었다.
영심은 공손히 절을 했다. 대단히 공손한 절이었다. 지운도 똑같이 맞절을 하며 영심이가 드리는 꽃다발에 손이 가 닿는 순간, 꽃다발이 휘청하고 흔들리며 동백꽃 한 송이가 식탁위에 떨어져 내렸다. 영심의 자세가 중심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그처럼 마음을 단단히 먹고 걸어온 영심의 두 다리였다.
일단 들었던 고개를 다시금 가만히 숙이며 꽃다발을 지운의 앞에 내밀었을 때, 다리의 힘이 갑자기 쑥 빠져 나가면서 휘청하고 영심의 몸은 중심을 상실했다.
그러나 동백꽃 한 송이만을 떨어뜨리는 것으로서 다시금 자세를 바로 잡은 자기 자신을 영심은 무척 다행으로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굵고 낮은, 젖어있는 음성을 지운은 조용히 냈다.
영심은 절을 하고 가까스로 자기 좌석으로 돌아가는데 성공하였다. 손벽 소리가 영심의 귀에는 꿈결처럼 멀다. 감각을 통 잃어 버린 것 같은 오관이었다.
『안색이 나쁜데?……』
핼쑥해진 영심의 얼굴을 바라보며 허 중령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냐요. 현기증이 조금……』
그러는데 지운이가 일어서서 간단한 답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귀중한 시간을 할애하여 이처럼 먼 길에 참석해 주고 많은 찬사를 준 데 대하여 감사의 뜻을 표한다는 말을 한 후에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서 답사를 마치었다.
『아까 허 중령의 질문도 있는 것 같고 해서 잠깐 대답하겠읍니다만 「愛人[애인]」은 순전히 작가의 생활기록입니다. 이것을 집필할 때, 나는 하나의 문학작품을 제작한다는 의식은 추호도 갖지 못했읍니다. 다만 작자의 생활 체험을 분명히 묘사해 보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그것과 아울러 또 하나 다른 동기가 있었읍니다. 지금은 이 책이 하나의 작품으로서 세상에 나왔지만 실은 이 책의 독자로서 나는 단 한 사람만을 염두에 두고 집필했읍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여 창경원에서 헤어진 이 책의 여 주인공이었읍니다. 「愛人[애인]」의 독자는 그 여인 단 한사람이면 나에게는 만족했읍니다. 그러니까 내 작품속에 다소 현실성이 희박한 대목이 있다고 치더라도 그것은 이미 하나의 생활 기록으로서 현실화 하고 있는 것입니다. 허 중령은 창경원에서 그렇게 몰인정한 이별을 한 여주인공이 오늘의 이 천박한 세상에는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지만……있읍니다!』
영심은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다. 한 번도 얼굴을 들지 않았다.
『그 아무런 것도 진실한 사랑 위에 위치할 만한 존재 가치는 갖고 있지 못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지성이 인류의 앞날을 구할는지 모르나 진실의 발판을 상실한 인류의 행복은 이미 행복이 아니고 비극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의 소리가 있읍니다. 하나는 입의 소리요 하나는 마음의 소리입니다. 마음의 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이고 입의 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정치요 교육이요 도덕이요 친화요 협조요 타협입니다. 입의 소리가 외관상 제아무리 인간 생활에 평온과 친화와 행복을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소리 앞에는 한낱 허위의 평온이요 탈을 쓴 친화요 허수아비의 행복 밖에는 아니될 것입니다. 여주인과 결혼을 한 남편이 제아무리 성실히 아내를 사랑한다손 치더라도 자기 아내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면 그 허수아비의 평온과 행복 속에 태연히 앉아 있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작품의 남주인공은 진실을 위하여 자기의 구원의 애인인 여주인공을 그 허수아비의 평온으로부터 구출해 내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하하……임형, 그런 배덕자(背德者)와 같은 말은 그만하시요. 아, 하 하하……』
허 정욱은 쾌활하게 웃었다. 그러나 지운은 이미 웃음을 웃지 못하고 있었다.
『도덕을 위하여 배진자(背眞者)가 되는 것보다는 진실을 위하여 배덕자가 되기를 주인공은 원하고 있읍니다!』
『아, 하하하……정면 충돌(衝突)인 걸! 하하하……』
허 정욱은 웃어댔고 임 지운은 앉았다. 출판기념회는 끝났다.
채 정주는 기념회 광경을 석란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전찻길을 건너 명동으로 들어갔고 허 정욱 내외의 지이프차까지 전송하면서 지운은 언제까지나 창경원에서 기다리겠노라고, 허중령이 변소에 간틈을 타서 영심에게 말했다.
그러나 영심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