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27장
悲劇[비극]의 門[문]
편집지운이가 『愛人[애인]』을 탈고하여 출판사에 넘긴 것은 신년 초순이었다. 출판사에서는 곧 조판에 착수하는 한 편 장정에 대한 의논을 작자에게 해 왔을 때, 미술에도 다분히 취미를 갖고 있는 지운은 손수 장정을 꾸며 보겠다고 했다.
자기의 피와 영혼이 우주적인 고독과 정열 속에서 연소(燃燒)되어 있는 처녀 출판인만큼 창작집『愛人[애인]』에 대한 애착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이『愛人[애인]』의 출판이야말로 문학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지운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새로운 생명체의 부활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온갖 희망을 이 처녀 출판 하나에다 걸고 있는 지운이었다.장정 구상에 그는 꼬박 사흘 동안을 생각하였다. 『愛人[애인]』의 제자는 물론 그 소녀의 필적을 그대로 축소하여 쓰기로 했다. 표지는 춘당지 연못가에 벚나무와 벤치 하나를 배치해 놓은 삼색판으로 동양화의 경지를 나타낸 수채화였다. 내도(內圖)에는 펜화로 해군복의 소녀의 상반신을 그렸다.
고상한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다고 출판사 측에서도 좋아했다.
커다란 사명 하나를 다한 것 같아서 인제는 오로지 천명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라고, 지운은 다시금 창경원을 찾기 시작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헤어진 그 여인이 창경원에 다시 나타나리라고는 물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가만히 집 안에 들어 배겨 있을 수가 지운에게는 도저히 없었다.
신년에 잡혀 들면서부터 눈이 한두 차례 왔다. 서울을 포옹하고 있는 주변의 산봉우리가 하얗게 백설을 이고 있었다. 예년보다 따스한 겨울이라고는 하지만 삭풍이 몸에 거칠었다 『愛人[애인]』의 교정을 보면서 지운은 차거운 손가락을 여러번 꺾었다. 십년을 기다리던 해군복의 소녀와 창경원에서 다시 만났다가 본의 아닌 작별을 하는 데서 작품『愛人[애인]』은 끝나는 것이었다.
『이건 분명 네 이야기 같은데……』
교정을 보고난 원고를 틈틈히 읽고 있던 어머니가 어떤 날 지운에게 물었다. 지운은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을 먹음고 있었다.
『어쩐지 네 행동이 수상하더니만……』
아들의 우울하던 소년 시절을 회상하며 지운의 그 지극한 연모의 정이 눈물겨워 어머니는 견딜 수가 없다.
『어머니, 아무런 이유도 없지요. 설사 어머니가 아신대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가만히 내버려 두시면 돼요.』
어머니가 캐묻는 말에 소년 임 지운은 단지 그 한마디 대답으로서 온갖 비애를 자기 혼자의 가슴 깊이 파묻어 왔었다. 어머니는 지금 그러한 아들을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그이를 네가 만났었다는 말이지?』
『네, 지난 크리스마스 날 만났어요.』
『어쩌면……?』
지운의 그것보다 못지 않게 어머니의 감동은 컸다.
『이대로냐? 바로 이 소설대로 헤어졌느냐?』
『네.』
『어머나! 그 색시야말로…… 그 색시야말로……』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이즈음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훌륭한 여자다! 그렇지만 어쩌면 운명이 그처럼도 기구하다는 말이냐!』
『그렇지만 어머니, 새로운 희망이 제게는 생꼈답니다. 그이가 살아 있다는 것만도……』
『그 여자의 말과 같이 그건 불행한 희망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 불행한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 너 자신을 위해서도 또 그 색시들 위해서도 좋을 거다.』
『어머니, 저는……저는 도저히 희망을 포기할 수가 없읍니다. 그이가 누군지, 이름이라도 알 수 있다면……저는 일생을 두고 이름만이라도 불러보면서 살지요.』
『아아, 이를 어쩌면 좋다는 말이냐!』
아들의 심정이 그지없이 가여워 어머니는 마침내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그날밤 부인은 지운의 그 너무나 서글픈 심정을 임 교수에게 쭉 이야기하고 나서,
『모두가 다 당신의 탓이지요. 아름다운 연애니 진실한 사랑이니 하고, 당신이 지나치게 성실한 교훈을 한 탓이예요. 여자 관계들 좀더 재치있게 처리하도록 교훈을 못 시킨 당신에게 죄가 있어요.』
『음 ——』
임 교수는 깊은 신음 소리들 내며 담배만 퍽퍽 피웠다.
『저처럼 심각하게만 생각하다가는 인제 꼭 건강을 해치고 누울 거예요.』
『하는 수 없는 노릇이지, 어떻거겠소? 교단에서 하는 이야기와 집에서 하는 이야기를 가려서 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니요?』
임교수의 생각은 확고 부동한 그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번 『연애 강좌』
때, 복도들 걸으면서 교무과장과 나눈 한 마디가 불쑥 생각키웠다.
『연애 문제들 처리하는 데 있어서 재치도 없고 또 자존심도 내세우지 않는 학생 —— 대단히 위험하지요. 잘하면 사랑의 순교자가 되지만 잘못하면 일생을 망칠는지도 모르니까요. 그런 학생에게는 내 강의가 다소 지나친 영향을 줄는지도 모르지요. 그런 의미에 있어서 젊은 학생들 앞에 나서서 뭐라고 떠들기가 점점 더 무서워집니다.』
그러한 우려가 자기 아들 지운에게 왔다. 그러나 부인처럼 임 교수는 떠들어 대지는 않았다.
『좀더 두고 봅시다.』
『두고는 보지만두……원채 얘가……』아들의 성미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부인으로서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꼭 무슨 불행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가 않았다.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은 임교수도 마찬가지였다. 성실하면서도 아들에게 예술가적인 꼬응한 일면을 다분히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일면이 임 교수 내외에게는 자꾸만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석란과의 결혼 생활만 원만히 갔던들……』
지운의 마음을 돌이킬 수도 없을 것이라고 부인은 별의 별 생각을 다 해 보는 것이다.
『색시 편에서는 멀지 않아서 결혼을 하는 몸이라는데……그렇게 되면 지운이 만이 가엾어 지지요. 아마도 지운은 일생 결혼할 생각은 안 할 거예요.』
『세월이 흐르면 마음도 흐르는 거요.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는 없소. 좀 더 두고 봅시다.』
『그렇다면 좋지만두……』
『그 애가 석란과 결혼할 생각을 한 것도 결국은 세월과 함께 마음이 흘러간 증거니까요』
『글쎄 그렇다면야 오죽 좋아요.』
『어쨌던 당신이 잘 보살펴 보구려. 지운의 감정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결국은 임교수도 적지않게 걱정을 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乖離)에서 오는 공백 지대(空白地帶)에 임 교수는 지금 서 있는 것이다, 삼대 독자 외아들에게 무슨 불행이 있기를 원하는 어버이는 물론 있을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지운의 연애가 진실로 아름답고 성실한 것이라면 그것 만을 참되게 완성시키는 것도 인생의 커다란 사업이라고 생각하였다.
고행승(苦行僧)의 고난을 지닌 고독과 허무에의 처참한 투쟁 속에서만 인간은 참되게 성장할 수 있는 것이며 인격의 완성을 기할 수 있는 것이라고.
부인과는 정반대의 생각을 임 교수는 하여 보는 것이다.
일선에서 돌아온 허 정욱이가 사흘 후에 거행될 결혼식 때문에 임 교수를 방문한 것은 정월 중순이었다. 주례 청탁을 임 교수는 쾌히 승낙하고 그날은 가족 전부가 참석하겠다는 호의까지 보였다. 오 진국씨의 정중한 편지를 허 정욱은 갖고 왔다.
결혼식은 오후 두 시, 운현궁 예식장에서 거행되었다. 날씨는 푸근했으나 함박눈이 소복 소복 내리고 있었다.정오들 조금 지난 무렵에 허중령의 운전수가 지이프차로 오 진국씨들 모시고 안국동 임학준 교수들 방문하였다. 오 진국씨와 임 학준 교수의 초대면이 거기서 버러졌다.
『벌써부터 찾아 뵈였을 것을 자유롭지 못한 몸이라, 서신으로만 실례하였읍니다. 관용이 계시다면 행이올씨다.』
한복에 회색 두루마기를 오 진국씨는 입고 있었다.
『천만의 말씀을……보잘 것 없는 인간을 이처럼 찾아 주신 것만도 분에 넘치는 영광입니다. 따님의 경사들 진심으로 축복하여 마지 않습니다.』
한학자와 철학자는 정중한 인사들 바꾸며 임 교수의 서재로 되어 있는 건넌방에 마주앉는 몸이 되었다. 철학서적을 비롯한 임 교수의 장서가 우선 오 진국씨의 마음에 들었다.
『이처럼 훌륭하신 학자의 주례라면 배운 것 없이 자란 아이기는 하지만 장래가 길이 빛날 것으로 믿습니다.』
『원 별 말씀을……』
부인이 들고 들어온 차를 권하며,
『제 내자올씨다. 따님이 어찌나 신통한지, 내자는 침이 마르도록 칭찬이 자자하지요.』
부인도 인사를 하고 나서,
『어쩌면 따님이 그처럼도 얌전할까요. 배운 것이 없다고 하시지만 모두가 다 가정교육이 옳바른 탓이겠지요. 한 번 보아서 그처럼 눈에 드는 색시가 쉽지 않는 노릇인데……』
『원 지나친 말씀이지요. 어미 없는 애라, 보고 자란 것이 어디 있읍니까?
차후에라도 부인께서 많은 지도가 계시기만 바랄 뿐이지요.』
『제가 무슨 아는 것이 있읍니까만……그렇치만도 그런 며느리를 한 번 맞아 보고 죽었으면 한이 없겠읍니다.』
『하하하……과분한 말씀이지요. 듣자니 아드님은 무슨 문학을 하는 분이라지요?』
『그렇답니다.』
『집의 아이가 하는 말이 아드님의 글을 감명 깊이 읽은 적이 있다고 하면서 뭔지 모르게 문학하는 분을 대단히 숭배하고 있답니다. 그 애도 영문과 들 나온만큼 그 방면에는 다소의 관심 같은 것을 갖고 있는 모양이지만……
아드님은 어디 나갔는가요?』
『네, 볼일이 있다고 잠깐……인제 곧 돌아 올 겁니다. 허중령과는 지면이 있는 사이라, 돌아오는대로 저와 같이 식장으로 가겠읍니다.』『그럼 임선생은 수고스럽지만 저와 먼저 가 보시지요. 부인께서도 아드님과 함께 꼭 참석해 주셔야겠읍니다.』
『네, 꼭 가겠읍니다. 아이, 신부가 오늘은 얼마나 이뻐질까.』
부인은 정말 면사포들 쓴 영심이가 한 번 보고 싶은 것이다.
오 진국씨와 임교수는 먼저 지이프차로 떠나고 부인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간단한 화장을 했다.
눈은 그냥 내리고 있었다.
결혼식장 입구 상부에 「행복의 문」이라고 씌인 현판이 가로 걸려 있었다. 식장은 태반 허 정욱의 친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가 다 군인이었다.
오 진국씨의 편지에서는 월남해 온 제자가 몇 사람 참석했을 뿐, 반드시 축사를 해야만 하겠다던 유 민호는 청첩을 내지 않은 탓으로 소식을 모르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영심이와 약혼이 해소된 후, 유 민호는 뻔뻔스럽게도 오 진국씨들 한번 찾아와서 경제적인 원조들 그냥 계속하겠다는 말을 했을 때 오 진국씨는, 나를 어떻게 보고 하는 말이냐고 지금까지 받아 온 혜택만도 갚을 길이 묘연하다 하여 그것을 강경히 거절하였던 것이다. 그 후로는 통 발길을 끊은 유민호였다.
화환과 화분이 적당히 식장을 장식하고 있었다. 단상에 오른 임교수 앞에 두 사람의 후행을 동반하고 신랑이 입장을 하였다. 예복이 어울리지 않으리 만큼 허 정욱의 얼굴은 까맣게 타 있었다. 군모들 썼던 탓으로 이마 절반이 희끄무레 타다 남아 있었다. 한일 자로 다문 입이 굳세인 의지력을 군중으로 하여금 느끼게 하였다.
오 진국씨는 맨앞줄에 앉아서 사위의 그 남성다운 늠름한 자태들 유 민호와 비교해 보면서 내심 무척 탐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신부의 입장이 있겠읍니다.』
사회를 하는 젊은 군인 하나가 군대식 어조로 결혼식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를 냈다.
『콰앙——』
유랑한 웨딩 마아치가 식장의 다소 어수선하던 분위기를 엄숙하게 제압하면서 흘러나왔다.
행복의 문은 마침내 열렸다.
꽃바구니를 든 어린 소녀 둘이 고속도 필름처럼 쓰러질 것 같은 느린 동작으로 앞장을 서서 걸어 들어왔다. 그 뒤로 두 사람의 후행에게 면사포 꼬리를 가볍게 잡힌 채 신부 오 영심이가 입장을 하였다.
『허어, 상당한 미인인 걸!』
헤실픈 군인 하나가 옆에 앉은 동료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가벼운 흥분과 함께 일시 어수선해진 장내 여기 저기서 신부의 어여쁨을 칭송하는 부인네들의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소그듬이 눈을 내려 뜬 신부의 속눈썹이 유달리 길다.
임 지운이가 어머니를 모시고 식장으로 들어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지운은 들어서면서 입구에 걸려 있는 「행복의 문」의 현판을 쳐다보았다.
누구나가 다 한번씩은 들어서 볼 수 있는 문이었다. 그러나 누구나가 다 그
「행복의 문」으로 나오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자기의 불행했던 결혼을 돌이켜보며 지운은 어머니와 함께 맨뒷줄에 공손히 걸터앉았다.
신부의 입장이 끝나자 웨딩 마아치는 멎었다. 임교수의 주례의 말이 시작되었다. 군중은 조용히 귀들 기울이고 있었다.
임 교수의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임 교수 부인은 어서 어서 신부가 좀 돌아서 주었으면 했다.
『신부가 어떻게 얌전한지, 어서 네게 좀 보여주면 좋겠다.』
어머니는 (아)들의 귀밑에다 가만히 속삭이었다.
『그러셔요?……』
『석란이와는 정 반대의 타이프야. 고전미(古典美)가 있고 예의 범절이 깍듯하고……』
『그저 어머니와 꼭같은 타이프인 모양이군.』
『애두……』
삼십 년 전의 자기 모습을 회상하며 어머니는 불현듯 얼굴을 붉혔다.
임 교수의 씹는 듯한 한 마디가 성실과 진리의 발판을 확고히 지니고 엄숙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보통 주례들처럼 지나치게 아름다운 말이라든가 허식에 가까운 과장된 언사는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임교수 자신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이야기만을 그는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서 자기의 이야기의 결론을 맺었다.
『……이리하여 결혼은 우리 인간이 누구나가 다 경험할 수 있는 인생의 한 아름다운 절차인 동시에 그것은 또한 전체 인간이 전대(前代)에서 물려받은 인류의사(代類意思[대류의사])를 후손 만대에 계승시키는 사명을 지닌, 인생 최대의 엄숙한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결혼이라는 절차로서 이룩되는 두 분의 가정은 아름다운 애정의 교환소인 동시에 뭇 현실적인계루(繫累)에 대응하여 공동책임체(共同責任體)로서의 성실한 행동이 요청되는 사무처리 장소라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임 교수는 거기서 잠깐 말을 끊고 신랑 신부의 얼굴을 한 번 내려다보고 나서,
『연애는 일대 일(一對一)의 관계에서 출발하고 일대 일의 관계에서 끝나기 때문에 단순한 애정만으로써도 충분히 성립될 수가 있는 것이지만 결혼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처음에는 일 대 일에서 출발하는 결혼이지만 십 년 삼십 년, 오십 년 후에 두 분의 결혼 생활이 끝날 무렵까지에는 실로 수많은 계루 관계가 생기는 것입니다. 애정의 결정인 귀여운 자녀 문제, 또한 오늘날처럼 가족제도가 아직 꼬리들 물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양편 가정의 배후 관계 등……실로 단순한 애정만으로써는 감당해 나가지 못할 현실적이요 실무적인 책임의 소재가 추궁되는 것입니다. 감미롭고 화려한 연애— 감정 대신에 좀더 뿌리가 깊은 굳건한 부부애 — 어떠한 폭풍우가 밀려닥치더라도 끄덕도 하지 않는 저 송죽의 절개를 가지고 인생 칠십 년을 무사히 항해하여 나가기 바라며 이만 그치겠읍니다.』
임 교수는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아버지는 지금 주례를 하신게 아니고 「결혼 강좌」를 개강하고 계신 거예요.』
지운은 웃으며 어머니 귀에 가만히 속삭이었다.
『애두 참……』
어머니도 웃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조금도 지리한 감을 느끼지 않았다. 무엇인가 얻는 바가 있는 것 같았다. 더구나 오 진국씨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마음속으로 수긍하면서 서양학을 전공하는 임 교수의 이야기에서 동양학적인 많은 대목을 발견하고 절실한 동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제부터 신랑 신부의 서약의 말이 있겠읍니다.』
사회자의 한 마디가 또 군대식으로 튀어나왔다.
『신앙과 성실을 가지고 두 분을 백년 해로를 서약할 수 있겠읍니까?』
임교수의 물음이 떨어지자 신랑과 신부는 가벼운 묵례와 함께 후행 한 사람이 꺼내 주는 「서약의 말」을 적은 두루마리를 둘이서 같이 펼쳐 들고 읽기 시작하였다.
여유와 자신을 가진 허 정욱의 목소리에 비해 오 영심의 가는 음성은 어쩐지 자꾸만 떨고 있었다.서약의 말 저희들은 지금 결혼의 예식을 거행합니다.
인생과 생활에 대한 이상을 같이 하는 공동 책임체로서 애정과 이해와 성실을 가지고 해로동혈(偕老同穴)의 굳은 신념을 주례 선생님 앞에서 서약하옵니다.
一九四五[일구사오]년 一[일]월 十六[십육]일
남편 허 정 욱
아내 오 영 심
신랑 신부의 「서약의 말」이 끝나자 군인들 사이에서 한 바탕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물 없는 친구들의 악이 없는 야유도 한두 마디 튀어 나왔다.
그 소란한 분위기를 억압하며 사회자의 목소리가 또 흘러나왔다.
『신랑 신부의 예물 교환이 있겠읍니다.』
임교수의 지시로 신랑과 신부가 몸을 조금 돌이켜 가지고 마주서서 상례를 했다.』
『아이, 고놈의 면사포가 가리워서……』
지운의 모자가 앉아 있는 위치는 신부가 서 있는 쪽이어서 마주 선 신부의 옆 얼굴 태반을 면사포가 가리우고 있었다. 그것이 임 교수 부인에게는 불만인 것이다, 그러나 설사 면사포가 없었다고 하더라고 짙은 화장을 한 신부의 옆얼굴에서 이십 일 전 창경원에서 한 번 본 그 여인의 모습을 쉽사리 찾아보기에는 맨 뒤에 앉은 지운으로서는 거리가 다소 지나치게 멀었다.
결혼반지를 끼워 주고 신랑은 신부와 함께 다시금 주례를 향하여 돌아섰다.
주례가 또 한 차례 간단한 성례(成禮)의 말을 한 후에 식순은 축사로 들어갔다. 신랑의 선배인 모 중장이 지명을 받고 나가고 교훈조로 축사를 했다.
그 다음으로는 모 대령이 나갔고 세째번에 지운의 이름이 지명되었다.
『신랑의 친구요 신진 작가로서 명성이 높은 임지운씨의 축사가 있겠읍니다.』
지운은 머리를 긁으면서 얼른 일어서지를 못했다. 이야기가 서투를 뿐만 아니라, 지운은 축사라는 것을 본래부터 싫어했다. 축사인 이상 다소는 과장을 해서 말을 해야겠는데 그것이 지운의 성미로서는 어딘가 천박하고 들뜬 찬사와 같아서 싫었다.
『얘, 어서 나가려므나!』어머니가 아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어머니, 야단났읍니다.』
박수 소리가 멎지를 않아 지운은 하는 수 없이 일어섰다. 얼굴을 붉히면서 지운은 단상으로 올라갔다.
맨처음에 나간 중장은 주례 옆까지 걸어가서 축사를 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나간 대령은 다소 사양을 하는 빛으로 단 한 편 귀에 올라서자 끄떡 절을 하고 축사를 했다. 그래서 지운도 대령의 본을 따라 단 한 편 귀에 올라 서서 빗비슴한 위치에 서 있는 신랑과 신부에게 우선 가벼운 묵례를 했다.
화환과 탁자에 놓인 생화 사이로 고개를 숙인 신부와 신랑이 퍼뜩 보였으나 면사포가 신부의 얼굴 절반을 이마에서부터 가리워 주고 있었다. 빨간 입술과 지분으로 하얗게 날을 세운 코만이 지운의 시야에 뛰어 들어왔을 따름이었다.
지운은 군중을 향하여, 두 분의 경사스러운 화촉의 전을 진심으로 축하 한다는 말과 일선에서 허중령을 만났던 말, 그러고 허중령이 신부를 얼마나 진실하게 사랑하고 있었던가를 이야기 한 후에 다음과 같은 한마디로서 축사를 마쳤다.
『……오늘 제가 이 빛나는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영광을 가진 것은 물론 두 분의 다행한 화혼을 축복하려는 심정도 절실한 바 있기 때문이지만……
아까 신랑 신부가 합성으로서 낭독한「서약의 말」을 이 귀로 분명히 들은 하나의 증인이 되고 싶은 심정도 또한 절실했기 때문이었읍니다. 「행복의 문」을 들어서기는 쉬웠읍니다. 그러나 금후 오십여 년에 걸치는 우리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 다시금 그「행복의 문」을 통과하여 나오려면 한 사람의 아내로서의 성실과 한 사람의 남편으로서의 그것이 절대적으로 요청되지 않을 수 없읍니다. 두 분이 만일 오늘 낭독한「서약의 말」을 후일에 이르러 배반한다면 저는 이 두 귀로 그것을 분명히 들은 한 사람의 증인으로서 여기 모이신 여러 증인들과 함께 신 앞에 민주고발(民主告發)을 제기하겠읍니다.』
지운의 말이 심각하면서도 다소 유우머스러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유쾌해진 군인들이 손벽을 치며,
『옳소, 우리들도 증인이 될테니 한 목 끼웁시다!』
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비극은 일어나고 있었다. 비틀비틀 쓰러질 것 같은 신부의 몸을 옆에섰던 후행 한 사람이 당황한 표정으로 꽉 부여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