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25장
幸福[행복]의 正體[정체]
편집가을의 표정이 완전히 물러 가버린 섣달이었으나 환도 시민들이 걱정하던 것처럼 추운 겨울은 되지 않았다.
임 지운이 자서전 소설『愛人[애인]』을 집필하기 시작한 것은 섣달에 접어들면서 부터였다. 초야 하룻밤을 새우고 파탄이 나 버린 석란과의 결혼은 지운으로 하여금 재혼의 의욕을 완전히 포기시키는 귀중한 인생 경험이 되었다. 모두가 다 그렇게 해서 하는 결혼이니 자기도 해 본다는, 그 평범 했던 생각이 결국에 있어서는 자기 답지 못 했다는 결론을 가져온 것이다.
그만한 것 쯤 가지고 남의 귀한 딸을 영원히 버려 놓고 말겠다는 말이냐고, 신혼 여행으로부터, 돌아온 즉석에서 마담로우즈는 대발노발하여 그 표독한 성미를 남김 없이 발휘하며 지운을 다까세웠으나 워낙 석란의 편에 과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여성이 결혼을 한다는 건 바보가 되는 것이라는 석란의 논리에 동감을 하고 있는 마담이었기에 그 이상 더 사건을 확대시켜 외부에 발설하기를 자숙하였다.
임교수는 어이가 없어서 허허 하고 웃었고 임교수 부인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그 귀결이 자식 새끼를 낳기전에 빨리 온 것만이 천행이라고 했다.
『愛人[애인]』을 쓰면서 부터 지운은 또 창경원을 자주 찾게 되었다. 고독한 지운으로 다시금 돌아가버린 것이다. 그 고독의 오열을 지운은 밤을 꼬박 꼬박 새워가면서 원고지 위에다 구상화 하는데 전신의 정열을 쏟아 붓고 있었다.
약 오백 장 쯤의 중편으로서 그것이 탈고되는 대로 지금까지에 발표한 단편을 한데 추려 넣어서 발행 하겠노라는, 모 출판사의 확약을 지운은 얻고 있었다. 지운으로서는 처녀 출판인 만큼『愛人[애인]』의 집필에는 자기의 생명을 걸다시피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야말로 문학의 정열만이 지운을 고독의 오열로부터 구출하는 오로지 하나의 길일 수 밖에 없었다.
섣달 하순, 일선에 있는 허 정욱 중령으로부터 편지 한장이 날아왔다. 신년 중순에 오 영심과 결혼식을 거행하기로 되었으니 이번에야말로 임 교수의 주례가 꼭 계셔야만 하겠다는 말과 그 뜻을 미리 춘부장께 전달해 달라는 말끝에 아직 후방 전근의 수속이 덜되어 결혼식 때에는 월여 간에 걸쳐 특별 휴가를 맡아 가지고 오겠다는 것이며, 날짜가 결정되는 대로 결혼식 전에 임교수를 한 번 찾아 뵙겠다는 뜻의 글월이었다.
지운은 곧 펜을 들고 진심으로 두 분의 행복을 빈다는 말과 허형이 그처럼 열성있는 축사를 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결혼이 불행 했다는 뜻을 간단히 적어 보냈다.
교인들의 명절인 크리스마스 이브가 왔다. 교회마다 선남 선녀의 성스러운 찬미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일부 유한층의 놀이 날이기도 했다.
각처에서 댄스 파아티가 열렸고 유흥의 세계는 멋도 모르고 공연히 들 떠 있었다.
이날밤, 집필에 피로한 머리를 가지고 지운은 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그 들뜬 분위기 속에서 고아처럼 지운은 고독했다. 꼬치 안주와 대포 한 잔을 걸치고 그 들뜬 분위기로부터 지운은 곧 빠져 나왔다.
집으로 되돌아 온 지운은 양복 안주머니에서 파란 손수건에 싼 편지를 꺼내 책상 위에 펼쳐 놓고 또 원고를 썼다. 『愛人[애인]』의 두 글자를 들여다 보며 십년 전의 연정을 지운은 소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愛人[애인]』을 집필하면서부터 이 편지는 책갈피에서 양복 주머니로 옮아져 있었다.
이튿날 새벽, 지운은 성가대의 찬송가로 눈을 떴다.
『오늘은 창경원에나 가 볼까?』
자리 속에서 지운은 중얼거렸다.
지운이 창경원을 찾은 것은 그날 오후 두 시였다. 반나절은 원고를 썼다.
거리는 비교적 한산하였다.
바람은 없었으나 날씨가 차다. 뼈대만 남은 수목들이 차거운 하늘에 앙상하게 솟아 있었다.
삭막한 겨울 풍경이 자기의 마음처럼 외롭고 쓸쓸했다. 들떠 있는 것 보다는 경내의 이 삭막한 주위가 마음에 다사롭다.
『책을 낸다!』
그것이 현재의 지운으로서는 유일한 위안이요 행복이었다.
『그이가 죽지 않고, 이 남한 어느 구석에선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그리고 다행히도 그의 눈에 내 책이 띄인다면……』
그것은 정말 기적과도 같은 한 줄기의 희망이었다. 오륙 년 전에도 지운은 수필과 단편으로 창경원 이야기를 한두 번 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는 오늘날 만큼도 지운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었고 게재된 잡지가 신통치 못했던 탓인지 소녀의 소식은 묘연하였다.창경원 문을 들어서서 곧장 명정전 돌다리를 건느면서 지운은 그런 요행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 참 그러지!』
좋은 생각하나가 푸뜩 들었다. 지운은 부리나케 외투 단추를 끌러 놓고 양복 안주머니에서 파란 손수건을 꺼내 펼쳐 보았다.
『이 글자를 그대로 따서 제자(題字)로 하자!』
글자가 다소 크지만 그것을 적당히 축소하면 소설의 제자로서 훌륭할 것 같았다. 어딘가 자체가 다소 어리긴 하지만 그 늠름한 필치는 예술적인 기품이 있어 보여 창작집의 제자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더구나 그것이 자기 자신의 필적이고 보면 좀더 수월히 지운의 책을 발견할 것만 같았다.
『참으로 좋은 생각이다!』
지운은 다시 편지를 싸 넣고 명정전 뒷뜰로 해서 춘당지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중학생 하나가 시골서 올라온 듯 싶은 노인 두 사람을 인도해 가지고 경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무실 하인이 한 사람 비를 들고 창경원 정문을 향하여 어슬렁 어슬렁 걸어가고 있었다.
그렇다. 그 사막한 살풍경 속에 실은 여인의 조그만 그림자 하나를 대자연은 배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옛날의 그 소녀였다는 사실을 지운이가 발견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의 흐름이 왔다.
멀리서 내려다보니, 실로 조그만 뒷그림자였다. 처음에는 그것이 여자인지 남자인지를 지운은 몰랐다. 꺼멓게 보이는 외투를 입고 있었다. 이 추운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그 꺼먼 복장의 인물은 앙상한 벚나무를 등지고 꽁꽁 얼어 붙었을 차거운 벤치 위에 오두머니 앉아 있었다.
그의 머리모양으로 그것이 여자라는 사실을 안 것은 몇 걸음 더 내려가서였다.
이상한 예감 하나가 얼른 지운에게 왔다. 이유없는 예감이었다. 그러나 얼음장처럼 차거울 벤치에 저처럼 오랜 시간을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그리 많을 것 같지가 않았다.
지운은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그것이 옛날의 그녀의 성장한 자태이기를 열심히 하늘에 빌면서 걸어 내려갔다.
여자의 뒷모습이 점점 눈앞에 확대되며 꺼멍으로 본 것은 잘못이었고 여자가 입은 외투는 곤색 후레아였다.
등뒤에 인기척을 느끼고 여인은 불현 듯 뒤를 돌아 보았다. 두 손을 외투 주머니에 쓰러넣은 자세로였다. 여남은 걸음의 거리가 아직 두 사람 사이에 가로 놓여 있었다.
서너 걸음 더 걸어가다가 지운의 두 다리가 갑자기 얼어 붙은 듯이 우뚝 멎었다.
그와 동시에 영심도 호다닥 놀라 몸을 일으키며 외투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이 순간에 있어서의 두 사람의 놀라운 표정을 정밀히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인간의 영역이 아닐런지 모른다.
기적은 인간으로부터 정상적인 판단력을 박탈하는 큰 자연 현상이다. 임 지운과 오 영심도 지금 그러한 기적 앞에서 인간이 지닌 사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둘이가 다 서로의 얼굴 모습에서 십년 전의 소년과 소녀를 순간적으로 발견하지는 물론 못했다. 그러나 관념적으로 생각하던 것처럼 십년간의 변모라는 것이 이미 청년기에 발을 들여 놓았을 무렵의 작별이었던 만큼 그리 심한 것은 아니었다. 환영 속에 그리던 모습이 정상적인 순서를 밟아서 성장한 보편적인 변모가 있을 따름이었다.
분명히 그 때의 소녀였고 그 때의 소년이었다. 놀라움과 환희와 그리고 일종의 의혹의 념이 똑같이 두 사람의 표정을 얼버무려 주고 있었다.
지운은 자꾸만 후둘거리는 두 다리에 힘을 주며 한동안 묵묵히 서 있다가 벙어리처럼 얼어붙은 입술을 가까스로 떼는데 성공하였다.
『저를……저를 알아 보시겠읍니까?』
지운은 또 두어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그 순간, 영심은 입 절반을 한 손으로 가리우고 한 걸음 뒤로 후딱 물러서며 가느다랗게 외쳤다.
『아아!……역시……』
그리고는 얼빠진 사람모양 지운의 모습을 아래 위로 찬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분명히 꿈은 아니언만 초록별의 정체가 그 곳에는 있었다. 다소의 변모가 기이한 느낌을 주고 있었으나 행복의 정체임에는 틀림 없었다.
『저를……저를 알아 보셨군요! 십년 전……그 때의 그 소년이 바로……저였읍니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 해야할런 지, 말이 말을 제대로이루어 주지 않는다. 정녕 꿈인 것만 같아서 지운은 한 손으로 자기 손등을 자꾸만 꼬집어 뜯어 보며,
『오늘이야 오셨군요! 왜 그 동안 한 번도 오시지 않았읍니까? 제게 무슨 …… 무슨 잘못이라도 있었던가요?』
비쭉비쭉, 지운의 입술이 서너 번 경련을 일으키다가 마침내 어린애처럼 이 그러지고 말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 양을 보자, 영심은 두 손으로 휙 덮어 버린 얼굴을 벚나무에 탁 기대며,
『아유 —──』
하고, 비참한 신음 소리를 냈다.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라고, 감정이 너무도 억해서 영심은 그만 장소도 가릴 바 없이 와락 소리를 내서 느껴 울었다.
『울어 주시는 걸 보니, 저를 잊지 않고 계셨군요! 헤어진 그 다음 일요일부터 저는 매일처럼 여기와서 기다렸답니다. 그처럼……그처럼 굳은 약속을 했는데 하고……』
『어마 ──』
영심의 흐느낌은 차차 더 커져 갔고 확확 솟구쳐 나오는 하얀 입김이 차거운 대기 속으로 후딱후딱 사라졌다. 가슴 아픈 통곡이었다.
깜정 비로드 치마에 자색 하이힐. 곤색에 흰 점이 박힌 마후라를 영심은 두르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지 않았지요. 일 년, 이 년, 삼 년, 오 년, 저는 꼭 몸이 편치 않아 세상을 떠나신 줄로만 알았읍니다. 늘상 약병 같은 것을 들고 다녔기 때문에 꼭 그랬을 것이라고……』
세음에 젖은 지운의 부드러운 음성에 영심은 벗나무에 기댔던 얼굴을 불현듯 들고 또 한참 동안 지운의 모습을 이모저모로 찬찬히 바라보다가 마침내 비쭉거리는 입술을 열어 말을 했다.
『저를……저를 무척 원망하셨지요? 약속을 지키지 않은 나쁜 여자라고……』
『愛人[애인]』의 두 글자가 희미한 윤곽을 지니고 움푹 패어진 꺼머특특한 벚나무 밑동에 영심은 한 손을 기대고 남은 한 손으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연방 찍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도 다소 들었지만……원망보다도 앞장을 서는 것은 그리움이었읍니다. 꼭 무슨 사정이 있을거라고 생각하면서도……너무도 지리한 기다림이어서……』영심은 패어진 글자 위를 손바닥으로 자꾸만 어루만져 보면서.
『이 글자는 분명히 손수 쓰셨지요?』
하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제가 새겼읍니다. 어린 마음이라 말로는 도저히 제 생각을 표시할 도리가 없었읍니다.』
『제 생각과 꼭 같으셨어요. 저도, 저도……』
영심은 또 운다. 감정의 파동이 앞장을 서 말을 제대로 이어 나갈 수가 영심은 없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바람이 인다. 까치가 두 마리 살얼음이 진 연못 위로 까불까불 날아갔다. 유원지 그네 위에 까치는 앉았다.
『오늘은 즐거운 크리스마스 날인데……왜 거리로는 놀러 나가시지 않고……』
동경과 우수와 서글픔이 한데 뭉친 영심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지운은 지금 우주적(宇宙的)인 환희 속에서 자기의 실재를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다.
『그저……그저 한 번만 더……이 벚나무 밑에 앉아보고 싶어서 최후로 다시는 영 오지않을 셈으로……』
지운은 한 걸음 더 가까이 앞으로 다가서며,
『최후로……왜 무슨 그런 사정이 계십니까? 어디 먼 곳으로 떠나십니까?
저는 앞으로 제 일생 동안을 두고 이곳을 찾으려는데……』
『일생 동안?』
영심은 놀란 시선을 들었다. 그러다가 발부리 앞으로 후딱 시선을 떨어뜨리며 서글픈 표정을 영심은 지었다.
보름 후로 박두한 허 정욱과의 결혼식을 영심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또 와 주셔야지요. 안 오시면 저는……저는 어떻거라는 말씀입니까? 저희들의 불행이 이상 더 계속 된다는 것은 너무도 비참한 일이 아니겠읍니까?』
『…………』
영심은 소그듬히 고개를 숙인채 대답이 없다.
『지나간 날……아아, 저는 이 연못가를 수없이 걸었었지요. 행여나 어느 숲 새에서 어느 담모퉁이에서 해군복의 그 소녀가 불쑥 나타나지나 않을까 하고……』
『…………』
『추우실 텐데……저리로 좀 걸어 보실까요?』『추운줄 모르겠어요.』
그러나 영심은 이내 초록별의 건강을 생각하며,
『추우시지요.』
『저와 같이 저리로 한 번 걸어 주시요. 그것이 오랜 시일에 걸린 제 아름다운 꿈이었읍니다.』
영심은 콤팩트를 꺼내 눈물 흔적을 감춘 후에, 지운을 따라 언덕길로 올라섰다.
못을 끼고 둘이는 언덕 위 오솔길을 식물원 쪽으로 묵묵히 걷고 있었다.
말이 없어도 말있는 사람들보다 더 둘이는 행복했다.
『이 오솔길도 저는 수없이 걸었읍니다.』
『…………』
영심은 솔깃이 귀만 기울이고 있었다.
『이 연못가야 말로 제 청춘을 아름답게 승화(昇華)시킨 서글픈 행복의 보금자리 였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해군복의 그 소녀는 와 주지 않았읍니다.』
『사정이 있었어요.』
영심은 고개를 숙이고 소그듬히 걸으며,
『처음 사 오 년 동안은 그래서 못 왔었지만 육·이오 동란이 나던 해 부터는 줄곧 여기를 찾아 왔답니다.』
『아, 그러셨어요?』
으시시하니 몸이 떨린다.
『네, 많이 왔었지요.』
『아아, 동란 이후 저는 쭉 부산으로 내려가 있었답니다 그러다가 환도한 것이 지나간 구월이었지요.』
『그런 줄은 모르고 저는……』
실로 기가막히는 노릇이라고 영심은 생각하며,
『약속을 배반한 것은 저지만……월남해서 만나기만 하면 꼭 용서를 받을 것만 같아서.』
『아, 그럼 이북에 가 계셨읍니까?』
『네, 고향이 평양이예요. 』
『아, 그랬었군요! 저는 또 그런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신변에 무슨 불행이 꼭 계신 줄만 알았답니다.』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은 저도 줄곧 해 보았어요. 삼팔선이 터지기만 바라며……남쪽 하늘의 별하나를 골라 가지고 늘 그런 생각을 했지요. 깜박깜박, 그 유난히 초록빛이 도는 별이 숨박꼼질이라도 하는 밤이면 어쩐지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
『고맙습니다.』
눈물이 나도록 지운은 고마웠다.
『약속을 어긴 것은 진정 제가 마음이 나빠서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거기서 영심은 당시의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절박한 사정을 간단히 이야기하고 나서,
『그러다가 육·이오 동란이 일어나는 전년에 월남해서 부산에 일 년 동안 있다가 서울로 올라왔어요. 그리고는 늘 창경원을 찾았어요. 부산에 계신 줄은 꿈에도 모르고요.』
『운명이 저희들에게는 지나치게 악착했읍니다.』
『아마도 그랬나 봐요.』
『저는 또 저대로 오륙 년을 기다리다가 저는 그만 기다림에 지쳐서 해군복의 소녀를 단념하기로 결심 했었읍니다. 노력을 해서 잊을 수만 있었다면 다행한 일이었지요만……』
영심은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우수의 표정으로 지운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저는 어떤 여자와 다소의 교제를 해 보고 지난 가을에 결혼을……』
『아, 잠깐만……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순간, 영심은 불현 듯 시선을 들며 지운의 말을 막았다.
『저……그 이상 자세한 이야기를 제게 말씀해 주시지 말아 주시면 좋겠어요.』
『…………?』
지운은 의아스런 얼굴로 영심을 돌아다보았다.
『서로가 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편이 제일로 좋을 것 같아요. 이대로…… 아무 말 없이 헤어지는게 좋을 거예요.』
『이대로요? 이대로 헤어져요?』
지운은 놀라 외치듯이 물었다.
『네, 이대로……』
『그렇지만?』
『아냐요. 제 이야기도 더 묻지 마시고……저도 더 듣지 않겠어요. 아무것도 모르고……이대로 헤어지는 것이 서로가 다 좋을 거예요.』
그대로 헤어질 수가 있는 노릇이냐고 지운은 기가 막혔다. 얼마만의 해후(邂逅)냐고 그것이 짝 사랑이라면 또한 모를 일이지만 서로를 그지없이 그리워하는 사모의 일념은 꼭같이 지니고 있는 두 사람이 아닌가!
『저는 못하겠읍니다. 저는 이대로 헤어질 수는 도저히 없읍니다! 어디서 사는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이대로 갈라질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지운은 울먹울먹하며 어린애처럼 영심을 바라보았다.
『괴로운 일이지만…… 그러는게 좋을 거예요. 어디서 사는 누군지도 모르고 있는 편이 결국에 있어서는 행복하지요.』
영심은 괴로운 듯이 외면을 하고 멀리 유원지 쪽 언덕 위를 바라보았다.
외면한 영심의 시야에 삭막한 겨울풍경이 차거운 대기 속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십년 동안을 찾아 헤매다가 오늘 처음으로 만난 저희들인데…… 어떻게 이대로 그냥 헤어질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차라리 제게 죽음을 선고해 주시는 편이 옳지……』
『죽는다는 것은 그처럼 힘든 일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하지요.』
외면을 한 영심의 두 눈꼬리에서 말간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름만이라도……이름만이라도 제게 알으켜 주시요?』
『이름을 아셔서 무얼하시려는가요?』
『그저 자꾸만……그저 자꾸만 입으로 불러 보겠읍니다. 쓸쓸할 때, 기쁠 때, 잠을 이루지 못할 때……저는 그 해군복의 소녀의 이름을 부르겠읍니다!』
『안됩니다. 그것은 저희들의 불행을 의미하는 것이예요. 저도 어디서 사는 누구신지 성함이라도 알아 두고 싶지만……제가 그것을 알게 되면 제 마음은 항상 댁 근처로만 달려가게 될 거예요. 그것은 둘이가 다 불행한 일이지요.』
들었던 손수건을 눈으로 조용히 갖다 대며,
『살아 있다! 그 분이 이 서울 어느 한 모퉁이에 살아 있다!…… 그것만을 생각하면서 사는 편이 오히려 행복하지요.』
『그것은 꿈입니다! 인간은 역시 꿈만으로 살 수는 없읍니다.』
『꿈만으로 사는 것이 결국에 있어서 행복하지요.』
『제 꿈은 너무도 지루했읍니다.』
『제 꿈도 그보다 못지 않게 지루했답니다. 이 꿈이 깨어지는 날, 저희들은 불행하게 되지요. 제 마음속에 깃들어 있던 조그만 초록별을 그대로 제 마음속에 고요히 남겨두어 주세요!』
『저는 도저히 그럴 수는 없읍니다. 차라리 죽음의 길을 택하는 편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지요.』
그러면서 지운은 안주머니에 타다 남은 파란 손수건에 싸인 편지를 영심의 눈앞에 펼쳐보였다.
『이것을 보시요! 저는 아직껏 이것을 갖고 있읍니다. 아까도 만나기 직전에 저는 이 손수건과 편지를 꺼내 보았답니다.』
영심은 후딱 눈물을 거두며 펼쳐진 편지를 들여다 보았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고 은행잎과 꽃봉투는 불에 살렀읍니다. 그리고 이 손수건마저 태워버릴 셈으로……』
『아아 ──』
고뇌의 심음 소리를 영심은 내며 조그만 단풍나무 하나를 붙잡고 쓰러지려는 몸을 간신히 기댔다.
『꿈을……꿈을 제게 남겨 두어 주세요! 제 꿈을 제발 깨뜨려 주시지 마세요!』
그리고는 획 유원지 쪽으로 뛰어가며,
『저는……저는 먼저 실례해야겠어요.』
하고 영심은 외쳤다.
『아, 잠깐만……』
허겁지겁 지운은 따라갔다.
『잠깐만……안됩니다! 이대로 가시면 안됩니다.』
수정각 뒷뜰로 해서 유원지 쪽으로 쏜살같이 뛰어가는 영심을 지운은 따라가며 불렀다.
『따라오지 마세요! 이대로 헤어져야만 해요.』
지운은 따라가서 나란히 걸으며,
『헤어질 수가 저는 정말로 없읍니다! 이름도 주소도 모르고 이대로 헤어지면 어떻건다는 말입니까?』
『운명에 맡기지요.』
『지금까지 맡겨 온 운명도 너무 악착한데, 또 다시 운명에 맡길 것이 아니고 우리 손으로 운명을 개척합시다.』
『개척할 수가 제게는 없어요.』
『용기를 내십시다!』
『안돼요. 십년 전, 저희들이 여기서 만난 것도 하나의 운명이었고 오늘 또 이처럼 만난것도 운명이지요. 거기에는 저희들의 의사는 조금도 개입하지 않았으니까요. 조물주가 기어코 저희들을 또 만나게 하여 주고 싶다면 앞날에도 그런 기회는 있을 거예요. 아무말 말고 헤어져 주세요. 저는 이미 제운명을 제 손으로 개척할 힘을 갖지 못했어요. 시기가 너무 늦었어요.』
『결혼을 하셨읍니까?』
『아니요.』
『약혼을 하셨읍니까?』
『네.』
『사랑하고 계십니까?』
『제발 더 이상 물어 주지 말아 주세요.』
유원지 앞을 지나면서,
『여기서 조금만 쉬어서 가시지요.』
『아냐요. 가야겠어요.』
영심은 그냥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 약혼을 그만 두실 수는 없읍니까?』
『그런 힘이 제게는 없읍니다.』
『용기를 냅시다! 저는 결혼을 했던 몸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자유로운 몸입니다.』
영심은 그 말에 문득 시선을 들며,
『헤어졌어요?』
『네, 사흘만에 갈라진 불행한 결혼이었읍니다.』
『사흘만에……』
『용기를 내십시다! 아직도 늦지 않으니 용기를 내어 주시요!』
영심의 무척 빠른 걸음을 지운은 따라가면서 애원을 했다.
『인제 여기서 헤어져요.』
영심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더 따라 나오지 마세요! 저를 정말로 위해 주신다면 여기서 조용히 헤어져 주세요.』
『싫습니다! 저는 죽어도 싫습니다! 차라리 저를 이자리에서 죽으라고 말해 주시요!』
눈물이 와락 지운의 앞을 가리웠다.
『주소와 이름을 알으켜 주고 가시요! 두 분의 결혼을 저는 조금도 방해(妨害)하지 않아요. 제가 할 수 있는 온갖 성의를 가지고 축하(祝賀)해 드리겠읍니다.』
『아냐요. 저를 진정으로 위해 주신다면 그런 것은 아실 필요가 없어요.
제발 저를 이대로 돌려보내 주세요!』
영심은 울면서 그것을 애원하였다.『정말로 안 알으켜 주신다면……제 이름이라도 알아 두고 가세요! 제 이름은 ……』
그러나 영심은 그 순간 두 손으로 자기 귀를 탁 막으며 홱 돌아섰다. 그리고는 정문을 향하여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얼빠진 사람모양, 지운은 한동안 멍하니 서서 조그맣게 사라지는 영심의 뒷모양을 바라보고 있다가
『안된다! 이대로 가 버려서는 안된다!』
영심의 자태가 정문 밖으로 다람쥐처럼 홀랑 빠져나가는 양을 보고서야 펄떡 정신이 들며 지운은 따라갔다.
『안된다! 저이를 놓쳐서는 안된다!』
지운은 외치며 정문을 향하여 무섭게 달려갔다.
오늘 이 자리에서 영심을 놓친다는 것은 지운에 있어서는 죽음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일 수 밖에 없었다.
『인제 이리로 뛰어 나간 여자가 어디로 갔읍니까?』
수위기 영감에게 지운은 외치듯이 물으며 정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리로 뛰어가던데요.』
영감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원남동 쪽을 가리켰다. 지운은 그 쪽을 향하여 한길로 뛰어나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영심의 자태는 보이지 않았다. 드넓은 거리에 택시 한 대가 원남동쪽을 향하여 스름스름 달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택시 안에 영심은 타고 있었다.
『앗 잠깐만 기다려요!』
지운은 따라가면서 택시를 불렀다.
뒷 유리창으로 영심의 모양이 멀리 바라다 보였기 때문이다.
그 영심이 허둥지둥 따라오는 지운을 바라보며 가슴 앞에서 가만히 합장을 했다.
전차가 한 대 우루룽 지나갔을 뿐, 자동차는 한대도 오지 않았다.
지운은 따라가면서 손을 자꾸만 흔들었다. 합장을 했던 영심의 손길도 유리창에서 나불거리며 멀리 조그맣게 사라져갔다.
『아아, 갔다! 영원히 갔다!』
차체조차 보이지 않는다. 실로 꿈과도 같은 허무한 이별이었다.
지운은 멍하니 한길에 서서 차체가 사라진 종로 시가를 바라보았다. 바라보다가 돌연 두팔로 얼굴을 가리우고 창경원 돌담에 몸을 기대며 탁 엎디어 버렸다. 통행인이 힐끔힐끔 지운을 바라보며 지나갔다. 젊은이가 낮부터 무슨 술이냐고, 그런 얼굴을 사람들은 지어보이며 지나 갔다.
한참 동안 지운은 그러고 있다가 다시금 몸을 일으켜 차가 사라진 종로 사가를 향하여 터벅터벅 걸어갔다.
아무런 생각도 없다. 허탈의 세계가 지운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그날밤 지운은 무턱대고 거리를 싸돌아 다니다가 밤늦게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잠은 좀처럼 이루지 못하고 꼬박 앉아서 새벽을 맞이 하였다.
먼동이 훤하게 트이어 올 무렵, 지운의 가슴속에 새로운 희망이 한 줄기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어쨌든 그 소녀는 이 서울에 살고 있다!』
과거의 그것은 생각하면 한낱 창백한 희망이요 꿈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기적과도 같은 가능성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지운의 가슴속에 싹트기 시작한 새로운 희망에는 현실성이 농후하다. 끈기있게 기다리기만 하면 언젠가 한 번은 만날 것이라는 확신을 지운은 갖는 것이다.
지운은 현실성 있는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다시금 원고를 쓰기 시작하였다.
『창작집『愛人[애인]』을 빨리 세상에 내놓자!』
『분명 그이가 이 서울에 살고만 있다면 광고를 보고라도 『愛人[애인』이 출간된 사실을 알 것이며 그것이 또한 자기 자신의 필적이고 보면 제 아무리 옛날의 열녀와 같은 굳은 지조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한 권 쯤은 사 읽을 것이 아닌가!』
지운은 자기의 그 안타깝게 애타던 연모의 념을 그 여인에게 알리고 죽는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여인을 만나러 창경원 근방을 싸돌아 다니는 시간을 가지고 하루라도 속히『愛人[애인]』을 탈고하기 위하여 모든 정열을 바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