暴力[폭력]의 愛情[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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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돌아온 석란은 지운의 간단한 글월을 읽고 다소의 놀람을 금치 못했다. 자기의 행동이 이러한 결과를 맺을 만큼 중대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봉건적인 감정의 소유자로군요.』

박 준모가 옆에서 지운의 행동에 일일이 민주주의적인 주석을 달아주고 있었다.

『아내가 남편의 그러한 감정에 일일이 지배를 받기 시작하다가는 일생을 두고 노예적 존재를 면하기 어렵겠지요.』

『그러기에 말예요. 내가 뭐 어쨌다는 건가요? 폭력을 쓴 건 자기가 아냐요?』

『그렇지요. 부인의 키스를 받기 싫다면 받기 싫다고 말로 하는 것이 민주적인 문화인이 취할 바가 아니겠읍니까? 서양서는 그러한 폭력은 곧 이혼의 조건이 된답니다.』

『그러지 않아도 저희들의 결혼에는 그러한 조건이 붙어있었죠. 이걸 보면 알지 않아요?』

그러면서 지운의 글월 맨 마지막 대목을 석란은 지적하였다.

『결혼 조건 제 일 조를 위반한 사나이 —— 음, 석란씨는 참으로 현대적 총명을 가진 분입니다.』

박 준모의 그 한마디의 칭찬이 석란에게는 대단히 듣기 좋았다.

『머리는 좀 어떻습니까?』

『인제 괜찮아요.』

퍼어머 속으로 머어큐롬을 조금 바르고만 정도의 석란의 상처였다.

『참으로 한국 남편들은 난폭하기 짝이 없지요. 배웠다고들 하면서도 설익은 개살구 모양으로 빛깔만 좋았지, 참된 민주주의 정신은 못 배웠으니까요.

나는 아직껏 연약한 체질의 소유자인 여성에게 대해서 단 한번도 폭력을 사용한 적은 없지요.』

『그래야만 해요. 원체 균형이 잡히지 못한 남녀의 체질인데 논리를 무시하고 폭력으로 대행을 한다면 세계의 전체 여성은 모두가 다 매맞아 죽을 거 아냐요?』

『암 그렇고 말고요!』

주고 받는 이야기가 착착 맞아 들어갔다.

그러나 석란에게도 다소의 허무감은 없지 않았다. 결혼의 존엄성을 지운처럼 느끼지는 못했으나 어쨌든 결혼을 한답시고 수백 명의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 식을 지낸 것이 엊그제가 아니냐.

그러나 결국에 있어서는 그러한 형식 문제 때문에 자기의 자유를 상실하고 싶지는 않았다.

『메이화즈! (되는대로 될 수 밖에) ——』

석란은 홱 돌아서서 거울을 향해 얼굴을 고치기 시작했다.

『석란씨 대신에 초콜렛이 이번에는 폭력을 받았나 봅니다.』방바닥에 굴러다니는 알맹이 하나를 툭 차면서 박 준모는 폭력의 부당성을 또 한 번 강조했다.

『결혼 조건이 위반 되었으니까 석란씨의 결혼은 자연적으로 해소가 되고 만 셈이군요.』

그러나 석란은 대답을 하지 않고 입술만 고쳤다. 결혼이 해소되었다고 해서 별반 가슴 아픈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수속이 무척 번거로웠기에 석란은 다소 허무했을 뿐이다.

『멋도 모르고 했었지, 인제 다시는 결혼 안 해요.』

『왜요?』

『결혼한다는 건 바보가 된다는 거니까요.』

『허어?』

『그러구 수속이 지나치게 번거로워서 싫어요. 그만큼 이혼이 힘들잖아요?』

『아주 현대적인 사고방법입니다! 번거롭지 않게 결혼할 수도 있고 힘들지 않게 이혼할 수 있는 결혼이 있지요.』

『어떤 거예요?』

『이 박 준모와 결혼을 하면 되지요. 가장 고도의 민주주적인 결혼 형태!

오늘 결혼했다가 내일이라도 이혼 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아내에게 보장해 드릴 테니까요.』

회식이 끝나고 춤이 시작된 것은 거의 여덟 시가 가까웠을 무렵이었다.

정임의 어머니와 칠 팔명의 남녀들은 지운이가, 보이지 않아 적지않게 불만이었으나 갑자기 볼일이 생겨서 부산 시내에 들어갔다고 박 준모가 적당히 구슬러 놓았다.

그러자 정임은 지운의 불참의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 준모와 함께 부르스를 추면서,

『정말 임선생님, 어디 가셨어요?』

하고 물었다.

『이혼을 하고 먼저 떠나 갔어.』

『이혼을요?』

정임은 무슨 책임감 같은 것을 불현 듯 느끼며 시선을 들었다.

『폭력을 사용하면 자연적으로 결혼이 해소 되도록 되어 있었다니까…… 흥미거리야!』

정임의 허리에다 힘을 주며 박 준모는 빙그레 웃었다.

『준모씨가 나빠요.』『왜?』

『남의 부인에겐 제발 좀 손을 대지 마세요. 신혼 부분데……가엾지 않아요?』

『가엾다고……어느 편 말이야?』

『둘이가 다 가엾지, 뭐예요?』

『정임은 참 마음이 고와!』

박 준모는 그러면서 정임의 볼에다 자기 입술을 슬쩍 스쳐 보며,

『질투보다 먼저 동정을 할줄 아는 정임을 나는 정말 끝없이 사랑하고 있지.』

『나를 그 처럼 사랑한다면 딴 여자에겐 제발 손을 대지 마세요. 나도 사람인데, 왜 질투가 없겠어요?』

『재미 있지 않아? 부부 싸움을 붙여 놓고 옆에서 빙글빙글 구경하는 맛이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하나의 도락의 경지를 의미하는 거야.』

『어쨌든 나빠요.』

『도락이니만큼 나빠도 하는 수 없지. 세상 사람들은 나쁜 줄 뻔히 알면서도 마작도락, 아편도락, 술도락, 여자도락……』

『그렇지만 부부 싸움을 붙이는 도락은 제일 나쁘지 뭐예요.』

『모를 말이야. 그거야말로 스릴이 있고 질투가 있고 서스펜스(不安[불안])가 있고 말하자면 일종의 헌팅(狩獵[수렵])의 경지와 똑같은 거야. 취미를 붙이면 아편처럼 뗄 수가 없어.』

『너무 그러면 준모씨가 싫어질 것만 같아요.』

『정임의 생리 조직으로선 싫어지기 전에 먼저 더 좋아질 거야. 누구의 핏줄기를 받고 나온 정임이라고…… 』

『자꾸만 이용하지 마세요. 서글퍼요.』

그러한 정임을 박준모는 진정으로 귀엽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만일 석란씨와 똑같은 행동을 한다면 어떡할 테야요?』

『하는 수 없지. 개인의 자유에 관한 문제니까……』

『어디까지가 자유죠? 바위 밑에서 포옹을 하고 키스를 해도 괜찮겠어요?』

『아, 정임은……정임은 그걸 봤어?』

민주적 자유주의의 수호신 같은 박 준모도 적지않게 당황의 빛을 보이고 있었다.

『내가 딴 남자와 그래도 괜찮겠어요?』

『음……』『대답을 해 보세요.』

『목을 눌러서 죽여 버리고 말지!』

그러면서도 박 준모는 죽이는 흉내를 내며 정임을 힘껏 한번 껴안았다가 놓았다.

『민주주의는 어디로 갔어요?』

『도망을 쳤나 보지! 그러나 정임, 오늘날 무슨 주의, 무슨 주의 하는 명색 좋은 모든 주의는 상대편을 공격하고 함락시키기 위해서만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 두어요. 민주주의를 무기로 내 대신 상대편을 약화시키고 자기는 그 틈사리를 타서 힘을 기르는 거야. 참된 의미에서 민주주의가 되기에는 인간의 생리조직(生理組織)이 다소 욕심이 많아!』

『어머나!』

『그러나 이건 내가 사랑하는 정임에게만 일러 두는 비밑의 이야기니까 함부로 떠들다가는 봉건적이라는 비난을 받아요.』

『…………』

레코오드가 바뀌며 탱고가 되었다. 박 준모는 석란을 또 붙잡고 돌아갔다.

석란과는 벌써 세 번째의 춤이다.

『석란의 스텝은 아주 이상적입니다.』

『그래요?』

『가벼우면서도 무겁고 무거우면서도 가볍지요.』

『홀랑 따라 갈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고 따라 갈 것 같지 않다가도 사쁜 사쁜 따라가지요.』

『아, 하하……정말 명인에 가까운 경지입니다. 발레를 하셨군요?』

『여학생 시대에 조금 하다 말았어요.』

『어쩐지 다르다고 생각했지요.』

『정임씨도 잘 추던데……』

『어디가! 시골뜨기 춤 가지고야 어림도 없지요. 석란씨야말로 춤의 기분을 아는군요.』

『기분나요!』

『하늘로 올라 갈 것만 같소.』

시치미를 딱 떼고 하는 말이어서 조금도 헤실퍼 보이지가 않았다.

『준모씨는 신사라면서 노인네나 여자에게 왜 좌석을 양보하지 않아요?』

『뭐요?』

『전차나 버스에서 말이예요.』

그때 박 준모는 하하 웃으면서,『생각이 나셨군요? 나는 좀더 끌어갈려고 했는데……』

『뭣 때문에요?』

『그래야만 석란씨의 호기심을 그냥 끌어 나갈 수가 있으니까요. 유감인걸!』

『좋지 못한 취미예요.』

『그것도 다 석란씨를 사랑하고 있는 때문이지요.』

사랑한다는 말을 박 준모는 비로소 썼다. 써도 무방할 시기가 당도한 것이다.

『사랑? 사랑이 뭔데요?』

사실 석란은 지운과의 과거에 있어서도 사랑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도 없었고 써 본적도 없었다.

『이거 왜 그러십니가?』

『모르니까, 알으켜 달라는 거 아냐요?』

『그것도 모르는 사람이 포옹을 하고 입술을 주고 그래요?』

『그런 것들이 사랑이예요?』

『그럼 뭐가 사랑입니까?』

『그건 일종의 에티켓(禮儀[예의])이지, 뭐예요?』

『오오, 에티켓! 참으로 좋은 에티켓이지만……그러나 다소 서운합니다.』

『나는 그것을 내게 대한 석란씨의 애정의 표시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천만 뜻밖이예요! 관념의 차이로군요.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부르짖지만 아주 낡아 빠진 봉건적 감정이예요.』

『오오, 하늘이여!』

어지간한 박 준모도 마침내 손을 흔들었다.

『석란씨의 하아트(心臟[심장])에는 나사못 하나가 빠져 나간게 아닙니까?』

『그럴는지도 모르지요. 심장이 다소 약해서 가끔 가다가 현기증을 일으키니까요.』

그러면서 석란은 킥킥 웃었다.

『석란씨, 결혼을 합시다. 수속이 번거롭지 않은 결혼을……』

『싫어요. 봉건적인 감정의 소유자는 이혼 문제를 공연히 시끄럽게만 만들 거예요. 논리를 무시한 감정의 속박처럼 무지스런 건 없으니까요. 애정이다 사랑이다 인정이다 해 가면서 이편의 자유를 징글맞은 구렁이처럼 척척 감아 놓는 것처럼 질색은 없어요.』

『석란씨는 지금까지 연애를 해 본 경험이 있읍니까?』『글쎄 연애가 뭔지, 모른다니까 그러셔? 형식만은 연애 비슷도 했지만요.

가만히 생각해 봄 연애 감정이란 상대편을 위해서 발동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이기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냐요? 제가 좋기 때문에 취하는 행동이 지 상대편을 위해서 하는 행동은 아니죠.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는 말을 들어 봤댔자 조금도 기쁘지가 않지요. 저 좋아서 하는 푸념이니까요. 장사아치가 손님 앞에서 절을 꾸벅꾸벅 하는 격이지요.』

『아이고, 나는 그만 질렸읍니다!』

그러는데 문이 열리며 모자를 쓰고 보스턴백을 한 손에 든 지운이가 나타났다.

『아, 임선생님!』

청년 하나와 춤을 추던 정임이가 손을 놓고 지운의 앞으로 달려갔다.

다른 사람들도 춤을 추면서 모두들 그 쪽을 힐끔힐끔 보았다. 그러나 박 준모도 보고 석란도 보았다. 그러나 박 준모는 석란을 놓아주지 않았고 석란도 박 준모의 품에서 떨어져 나오지 않았다.

자기를 버리고 혼자 떠나간다던 지운이가 다시 되돌아 왔다는 사실이 속으로는 결코 나쁘지 않으면서도 석란의 성격으로서 싱거운 사나이라고 우선 얕잡아 보아야만 했다. 그러한 싸늘한 표정이 석란의 눈초리에는 담뿍 서리어 있었다.

『약간 싱겁군요.』

그러한 것을 석란의 표정에서 발견하자 박 준모는 재빨리 석란의 감정에다 침을 놓는 것이다.

지운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성큼 성큼 걸어가서 박 준모의 어깨 위에 올려 놓은 석란의 팔뚝을 휙 잡아 당겼다. 석란의 스텝이 어지러워 지다가 비틀비틀 지운의 품속으로 쓰러져왔다.

『뭐예요?』

석란이가 빽 소리를 쳤다.

『폭력이다!』

격렬한 감정의 아우성이었으나 지운의 어조는 지극히 조용하였다.

『점잖지 못하게 왜 폭력을 쓰는 거예요?』

갈구러진 눈초리와 함께 석란의 붙잡힌 팔목이 요동을 했다.

『폭력이 때로는 인간의 성실한 애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층으로 올라가자!』

『싫어요! 난 안 올라갈 테야요!』

그때까지도 박 준모는 석란의 한쪽 손길을 붙잡고 있었다.『박군, 그 손을 놔라!』

그러나 박 준모는 그냥 석란의 손길을 붙잡은 채,

『임선생님, 그건 너무 지나친 실례가 아닙니까?』

박 준모의 그 여유를 가진 느릿느릿한 대답이 지운의 신경을 긁어 주었다.

『도리어 내가 실례를 했나?』

『그렇지 않고 뭡니까? 서양 문명국에서는 남의 춤을 방해하는 것 같은 이런 실례는 보고 죽으려도 없는 일이지요.』

『여기는 서양 문명국이 아니다! 잔말 말고 그 손을 놔라!』

지운의 감정이 마침내 폭발하며 보스턴백을 내던진 손으로 박 준모의 가슴패기를 무서운 기세로 탁 떠밀어 냈다.

박 준모는 한 두 걸음 뒤로 비틀거리다가 우뚝 멈추며 중얼거렸다.

『이 양반이 그러다 보니까, 아프리카 야만국에서 여행을 온 사람이 아닌가……』

『이놈아! 내 아내를 내가 데려가는데 무슨 잔수작이냐?』

지운은 그렇게 고함을 치며 석란의 팔목을 탁 놓고 달려가자 박 준모의 멱살을 잡고 주먹으로 면상을 무섭게 내갈겼다.

『아, 이 양반……이 양반 봐라?』

손으로 얼굴을 부비며 박 준모의 반항의 말은 그의 비틀거리는 발걸음처럼 더듬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만일 유부녀인 석란의 경우가 아니었던들 박 준모의 반항은 그것으로서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지간히 뻔뻔스런 이 민주주의 대변자도 지운이 가 외친「내 아내」라는 이 한 마디에는 그 이상의 항거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 무슨 존엄성과 압력 같은 것을 분명히 느끼는 것이었다.

그것은 실로 민주주의의 논리를 무시하고 있는 압력이었다.

『자아, 빨리 올라가자!』

지운은 다시금 석란의 팔목을 잡고 외쳤다.

『싫어요! 안 올라가요!』

『잔말 말아! 너는 내 소유물이다.』

지운은 석란을 끌고 다짜고짜 복도로 나섰다.

『놔요, 놔!』

석란은 끌리어 올라가면서 발버둥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춤추던 젊은이들이 층계 아래까지 수군거리며 따라 나섰고 이 방 저 방에서 손님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놔요, 놔! 누구를 소나 말인 줄 알아요?』손길에 여유만 있으면 지운의 가슴패기를 치고 얼굴을 할퀴었다.

『소나 말이 되고 싶지 않거든 순순히 따라 와.』

『나는 당신의 소유물이 아냐!』

『이혼 할 때까지는 내 소유물이다!』

『아내를 무슨 물건인 줄로 알아요? 아내에겐 자유가 없어도 좋아요?』

『아내의 참다운 자유를 알으켜 주마!』

『싫어, 싫어! 놔요 놔!』

소나 말처럼 끌리어 올라가는 자기의 창피스런 꼬락서니를 사람들에게 보였다는 사실이 석란에게 한층 더 약을 올리고 있었다. 석란은 층계를 올라서는 순간, 지운의 손목을 고양이처럼 물어 뜯었다.

지운의 손목에게 피가 흘렀다. 그러나 지운은 마침내 석란을 자기 방으로 끌어넣는데 성공하였다.

『어머니 ——』

석란은 침대에 쓰러지면서 엉엉 울기 시작하였다. 석란은 자꾸만 어머니를 찾았다.

지운은 문에다 자물쇠를 잠거 버리고 손목을 들여다 보았다. 살 한점이 뜯기워 나가다가 한쪽이 달랑달랑 매달려 있었다. 왼편 손목이었다.

살점을 도로 덮어 붙이고 손수건으로 손목을 동여맸다. 그리고는 소파에 번뜻 누워서 두 눈을 가만히 감고 심호흡을 하였다.

석란은 그냥 무섭게 흐느껴 울고 있었다. 어린애처럼 어머니만 자꾸 찾았다.

『아이고, 엄마……엉엉, 엉엉……』

처량한 울음이라고 지운은 측은해졌다. 폭력의 뒤에 오는 비애의 감정이었다.

『우리 엄마 한테 일르면 죽을 줄 알아! 우리 엄마의 성미를 저도 알면서……엉엉, 엉엉……』

그말이 웃으워서 지운은 감정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 킥하고 솟구쳐 나왔다.

가장 첨단적인 민주주의 논리의 실천자도 결국에 가서는 어머니를 찾았다.

그것은 결코 석란의 연륜이 얕은 탓만도 아니라고 지운은 생각한다.

『어머니의 품이야말로 인류의 거짓없는 보금자리가 아닐 것인가?』

인간은 죽을 임시에 누구나가 어머니의 품 안을 그리워 한다고 했다. 인간이 지닌 온갖 이상과 모든 주의가 궁극에 있어서 어머니의 다사로운 품안을 그리워하는 심경 속에서 지양(止揚)되고 용해(鎔解)되어 버리는 것이 아닐까?

『어머니의 품이야말로 뭇 논리와 온갖 당위성(當爲性)을 초월한 인류의 참된 사모경(思慕境)일런지 모른다』

주고 받는 애정이기에 상극(相剋)은 있는 것이다.

『줄 줄을 알고 받을 줄을 모르는 어머니의 애정을 가지고 나는 지금 이 석란을 대할 수는 없을까?』

지운은 얼른 눈을 뜨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폭력의 비애가 다시금 지운에게 왔다.

지운은 일어서서 서서히 침대 옆으로 걸어갔다.

이부자리에 얼굴을 파묻고 석란은 그냥 엉엉 울고 있었다.

부처님처럼 표정없는 얼굴을 하고 지운은 묵묵히 석란을 내려다 보고 서 있었다.

『석란, 울음을 그치고 얼굴을 들어 봐요.』

오랫동안 그러고 섰다가 지운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몰라, 몰라, 몰라!』

총알처럼 석란은 외쳤다.

『석란은 지금 뭐가 그리도 슬퍼서 우는고?』

어머니의 애정을 가지고 대해 보려고 지운은 노력을 하는 것이다.

『폭력주의자! 팟쇼!』

외치면서 석란은 발딱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 증오에 찬 눈초리었다.

『히틀러의 제자 같애!』

『야만인!』

『아프리카에서 여행 온 사람 같애?』

어머니의 애정을 노력해 보려던 지운의 자세는 순간에 허무러지고 감정의 대립이 앞장을 섰다. 남녀의 애정이란 결국에 있어서 기브 앤 테이크(주고 받는)의 세계를 면치 못하는 성질의 것인가?

『가려던 사람이 왜 싱겁게 몰아와서 이 몸골이예요? 제 몰골 싱거운 줄도 몰라요?』

『잘 안다.』

『잘 알면서 왜 되돌아오는 거예요?』

『아내의 자유를 속박하려고 돌아왔다!』

『누가 속박을 받는대요?』

『받고 싶어서 받는 것은 아니다. 너는 지금 내 속박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처럼 추고 싶은 춤을 추지 못하고 이 한 방에 감금되다 시피 돼 있는 것이다.』

순간, 석란은 불현 듯 시선을 돌려 문쪽을 돌아다 보았다.

『쇠를 잠거 놓았군요?』

『그렇다.』

석란은 후딱 불안을 느끼며,

『나를 때리려는 거예요?』

『때리고 싶어졌다!』

표정이 통 없는 얼굴이기 때문에 석란은 지운의 말만을 상대로 할 수 밖에 없다.

『…………』

석란은 공포를 느끼며 한 걸음 뒤로 물러 앉았다.

『왜 때리려는 거예요?』

지운은 공포에 찬 석란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면서,

『나도 이유를 잘 모른다. 아까 호텔을 떠날 때도 그런 생각은 통 없었다.

되돌아와서 너를 이리도 끌고 올라와서도 그런 생각은 없었다. 저 소파에서 이 침대로 걸어오면서도 그런 생각은 없었다.

『그랬음 됐지, 왜 갑자기 때리려는 거예요?』

『나도 그걸 잘 모른다. 그저 한 번 실컨 갈겨주고만 싶어졌다. 어째서 이처럼 난폭한 심정이 되어가는지, 나도 알 수 없다.』

석란은 무서워 한 걸음 더 뒤로 물러 앉았다.

그러나 석란의 등뒤는 이미 벽이다.

『힘없는 여자라고 깔보고 때리는 거예요?』

벽위의 자세를 취하면서 석란은 외쳤다.

『그런 것은 분명 아니다!』

『제 소유물인 아내니까, 마음대로 때려도 좋다는 거예요?』

『그것도 아닌 성 싶다. 같은 아내지만 아까는 그런 생각이 없었다.』

그러는데 석란이가,

『악 ——』

하고 부르짖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웠다.

지운의 손길이 가리워지기 직전의 석란의 뺨을 무섭게 내갈겼던 것이다.

『왜 때려요? 어째서 사람을 마구치는 거예요?』

공포와 분노가 얼버무려진 비참한 얼굴을 하고 석란의 항거의 외침은 또 총알처럼 튀어 나왔다.

『인제 됐어! 됐으니까, 무서워 말아도 좋아!』말은 침착했으나 지운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왜 실컨 때리지 못해요? 왜 때려 죽이지 못해요?』

상대편의 폭력이 간단히 끝났다는 것을 깨닫자 석란은 한층 더 기세를 올려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이상 더 때리고 싶은 생각이 내게는 없다!』

비장한 신음과 함께 지운은 가만히 돌이돌이를 하였다.

『어서 더 갈겨요! 갈겨 죽여요!』

석란은 발딱 침대에서 내려오자 지운과 딱 마주섰다.

『미안하다! 너를 죽일만한 정열과 의욕이 내게는 불행이도 없었던 모양이다!』

지운은 그러면서 석란의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 보다가 얼른 외면을 하며 돌아섰다.

『나는 내 아내의 인권과 자유를 무시하고 뺨 한대를 갈겼다. 그런 정도의 애정을 나는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리고는 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며,

『자기 아내가 딴 남자와 포옹을 하고 입술을 바꾸고 하는 사실을 발견한 세상의 남편들이 어떠한 행동을 취하는지를 나는 모른다. 다만 나는 오늘 임 지운이가 지니고 있는 성실과 애정과 윤리의 한계를 걸었을 따름이다.』

석란의 얼굴 빛이 홱 변했다.

그러나 석란의 얼굴을 등지고 문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지운으로서는 그것을 돌아다보고 싶은 의욕이 통 없다. 그래서 곧장 도어로 걸어가자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가지고 문을 열었다.

『부인, 내려가시지요. 레코오드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아직도 춤은 계속되는 모양입니다.』

비로소 석란을 돌아보며 지운은 말했다. 그리고는 열쇠를 석란의 발부리 앞으로 던져주었다.

석란은 오두머니 서서 반 쯤 열려진 문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매서운 표정이었다.

지운은 테이블 앞으로 걸어가서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석란의 트렁크 속에서 머어큐롬과 붕대와 탈지면을 꺼내 놓고 손수건을 풀어 헤친 후에 손목에다 머어큐롬을 바르기 시작했다.

석란은 이윽고 걸어갔다. 문쪽을 향하여 또박또박 걸어갔다. 반 쯤 열려진 문이었다. 핸들을 잡고 석란은 가만히 문을 닫았다.

석란은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자기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왼편 볼이 턱위에서 약간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석란은 다시 지운의 옆으로 걸어가서 펼쳐진 트렁크에서 옥도정기를 꺼내 병마개를 빼들고 자기의 왼편 볼과 함께 비쭉 지운의 눈앞에다 내밀었다. 잠시 동안 지운은 묵묵히 석란을 쳐다보다가 이윽고 머어큐롬을 바르던 손을 멈추고 요오드 병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탈지면에다 요오드를 적시어 가지고 턱 위에다 둥그렇게 발라주었다.

석란이가 이번에는 빨간 머어큐롬 솜을 들고 지운의 손목에다 골고루 바른 후에 붕대로 찬찬히 감아 주었다.

대화를 상실한 팬터마임(無言劇[무언극])의 진기로운 한 장면이었다.

『석란, 이리 와서 좀 앉아요.』

이윽고 지운은 소탁자 앞으로 걸어가면서 차거운 어조로 말했다.

석란은 조용히 지운의 뒤로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