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21장
初夜[초야]
편집어린애처럼 야옹을 하며 발가우리한 혀끝을 익살맞게 쪼옥 내 보이고 바람처럼 획 사라진 석란의 도발적인 귀여운 모습을 유모레스크를 켜는 동안 청년은 쭈욱 생각하고 있었다.
바이얼린의 서정적인 감미로운 멜로디가 욕탕에 들어 앉은 신혼부인의 감정을 화려하게 수놓아 줄 것을 청년은 계산하고 있었다.
그래서 센티멘털한 곡을 일부러 피하고 석란의 개방적인 명랑한 기질에 어울릴 경쾌한 유모레스크를 청년은 택했다.
청년은 석란이가 욕탕에서 나올 무렵 쯤 해서 바이얼린을 던지고 침대 위에 걸려있는 거울 앞으로 갔다. 머리에다 매끈하게 빗질을 하고 정임이의 화장품을 꺼내서 로션을 얼굴에 문질렀다. 그리고는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석란이가 이층으로 훌쩍 올라가 버리기 전에 복도에서라도 한 번 더 만나 보고 싶었다.
청년은 토일릿으로 걸어가면서 탈의장 안을 힐끔 들여다보았다. 파자마를 다 입고 난 석란의 뒷모습이 거울 앞에서 머리 손질을 하고 서 있었다.
토일릿 대리석 댓돌 위에서 들창 밖으로 푸른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는데 등뒤 탈의장에서 무엇이 쓰러지는 것 같은 소리가 쿵하고 들려 왔다.
청년은 이윽고 토일릿을 나서서 자기방으로 걸어가면서 탈의장 안을 후딱 들여다보다가,
『아?』
하고 외쳤다.
석란이가 체경 앞에 쓰러져 있었다.
결혼식 때문에 며칠밤을 고단히 지냈고 어젯밤은 기차에서 뜬 눈으로 새운 석란의 강인하지 못한 체질이 마침내 말썽을 일으킨 것이었다.
청년은 뛰어 들어가서 석란을 안아 일으켰다.
얼굴이 종이장처럼 새하얗게 핏기를 잃고 있었다.
『부인, 정신을 차리시요.』
어깨를 흔들어 보았으나 석란은 대답이 없다.
『뇌빈혈이다!.』
청년은 휙 석란을 안고 일어섰다. 복도로 나와 자기방으로 들어가서 침대 위에 눕혔다. 그리고는 장모인 마담을 부르려고 일단 문을 열었다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다시 쾅 닫아 버리고 말았다.
청년은 다시 침대 앞으로 걸어와서 석란의 창백한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창백하기는 했으나 탕에서 갓나온 석란의 피부가 반들반들 윤이 돌고 있었다.
부인이라기에는 너무도 젊은 신선한 얼굴 모습이었다.
청년은 문득 손을 뻗쳐 석란의 다소 물기가 있는 흑칠의 머리털을 덤썩 어루만져 보았다. 그 순간 지남철에 끌리는 쇠붙이모양 청년의 얼굴이 휙 석란의 말 잃은 입술을 덮어 버렸다.
석란의 한 쪽 손이 조금 움직이었다. 청년은 얼른 입술을 떼고 허리를 폈다. 그리고는 도어를 열고 주방을 향하여 소리를 쳤다.
『어머니, 빨리 좀 들어오세요! 위스키 한 잔만 따라가지고……삼 호실 손님이 뇌빈혈로……』
그러는데 석란이가,
『후우 ──』
하고 긴 한숨을 내뿜으면서 후딱 눈을 떴다.
『아 정신을 차렸읍니까?』
청년은 걸상을 끌어다 침대 옆에 걸터 앉으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석란의 얼굴에 차차 생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몽롱한 눈동자로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문득, 시선을 돌리며,
『여기가 어디예요?』
했다.
『정신을 차리셔서 다행입니다. 탈의장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읍니다.』
『어머나?』
그때야 석란은 자기가 탈의장 거울 앞에서 눈앞이 갑자기 피익 돌던 기억이 새롭히었다.
마담이 위스키 한 잔을 따라가지고 허둥지둥 뛰어들어 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마담도 설명을 듣고 깜짝 놀라며 위스키를 권했다. 석란은 권하는 대로 양미를 찌푸리며 절반 쯤 마시고 나는데 젊은 보이의 뒤를 따라 지운이 가 뛰쳐 들어 왔다.
『뇌빈혈로 쓰러졌다고? 어디 다친 데나 없소?』
지운의 허겁진 모양을 바라보며,
『인제 괜찮아요.』
석란은 방긋이 웃어 보이며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
『아이, 남의 귀한 딸을 맡았다가 큰일날 뻔 했네요. 피곤했던 몸 밤에 잠을 못잔 탓이야.』마담의 설명으로 지운도 사정을 알았다. 그래서 청년을 향하여 먼저 인사를 하였다.
『수고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임 지운입니다.』
『박 준모(朴俊模)라고 부릅니다. 다행이 제가 지나가다가…….』
그러면서 박 준모 청년도 정중한 인사를 하였다.
『우리 사위예요. 아직 학생이지만 이제 졸업을 하고는 미국 유학을 갑니다.』
마담은 사위를 자랑하였다.
『그리고 임선생은 소설을 쓰시는 분이야.』
『어머니의 소개가 없어도 벌써 다 알고 있읍니다.』
『정임이가 그랬었겠지. 정임이가 돌아오면 무척 기뻐할 텐데……』
『정임씨는 소위 문학소녀랍니다. 시나 소설을 쓰는 사람만 보면 그것이 애꾸눈이나 절름발이라도 금시 좋아지는 그런 종류의 위인이지요. 임 선생 많은 지도가 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박 준모는 겁신하고 머리를 숙여 보였다.
참으로 실례 막심한 말이라고 지운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자기의 약혼자와 소설가 임지운을 한꺼번에 통틀어서 경멸하는 언사임에 틀림 없었다.
『대학은 무슨 과 지요?』
지운은 불쾌감을 꾹 참으면서 물었다.
『정치과입니다. 처음엔 음악과를 할까도 생각해 봤지만요. 우리 한국에서 음악을 전공하다가는 창자에 거미줄이 쓸 것만 같아서 그만두었읍니다.』
마디 마디가 불쾌한 수작뿐이었다. 이 학생에게도 남과 같은 신경이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남이야 불쾌하건 어쨌든 간에 자기의 말만 씨부리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저는 장래의 외교관으로 나설까 합니다. 그 방면에는 다분히 소질을 가지고 있다고 내 친구들도 모두 인정해 주지요.』
참으로 유치하고도 껍진한 청년이라고 이런 종류의 타잎를 하나 자기 주위에서 발견한 것을 지운은 한 사람의 작가 정신을 가지고 내심 기뻐하였다.
인간적으로는 침을 뱉어주고 싶은 존재였으나 성격이나 인생관을 탐구하는 좋은 재료가 된 것만 같아서 맞장구를 쳐 주었다.
『친구들이 그것을 인정해 주었으니까, 그 방면에는 틀림 없이 성공할 것입니다. 많이 노력하시요.』
그러는데 박 준모 청년은 힐끔 석란을 바라보면서,
『참 부인께서도 정치외교를 전공하신다지요?』했다.
『그건 다 어떻게 아세요?』
『다 알고 있답니다.』
박 준모는 그저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참으로 수수께끼의 사나이였다.
조반을 먹고 한 잠 늘어지게 자고난 석란은 아침보다 기분이 대단히 명랑해졌다. 수일동안의 피로가 확 풀리어 나간 것 같은 상쾌한 오후였다.
석란이가 자는 동안 지운은 방을 적당히 정리해 놓았다. 옷은 모조리 양복장에 넣고 책 몇권만 테이블 위에다 정돈해 놓았다. 손수 방안에 비질도 했다. 그리고는 베란다로 나가서 금강원 계곡을 바라보면서 담배를 피웠다.
그 동안 바이얼린 소리가 한 두 차례 가늘게 들려왔다.
석란이가 눈을 뜬 것은 오후 세 시 경이었다. 둘이는 소파에 걸터앉아서 차를 마시고 포옹을 했다.
다섯 시 조금 전에 박 준모가 올라왔다. 오늘밤 정임이가 마침 부산시내에서 댄스 파아티가 열리어 못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래 임선생 내외분이 오셨다고 했더니 두 분을 꼭 모시고 오라는 겁니다. 가 보시지요.』
지운이가 거절을 했더니,
『그럼, 임선생님은 원고나 쓰시고 부인, 저와 같이 가 보십시다. 아주 재미있는 파아티랍니다. 더구나 임선생 부인이라면 대환영을 할 테니까. 체격이나 몸매를보면 부인의 춤은 시골뜨기들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이 분명하지요. 자아 어서 가십시다.』
지운이가 또 거절을 했다.
『아니, 임선생더러 하는 말이 아니고 부인에게 하는 말입니다.』
추근추근하기가 짝이 없다. 이 청년도 된장에 깍두기를 먹고 자랐느냐고 지운은 불끈 화가 치밀어,
『부부일체야. 내 말이나 부인의 말이나 마찬가지니까. 박군이나 어서 가 보시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각자의 의사가 존중돼야만 하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민주주의고 무슨주의고 간에 우리는 안간다는 밖에 ——─』
『우리가 아니올시다 나는 지금 복수(複數)를 물은 것이 아니고 단수(單數)를 물은 것입니다.』
『어쨌든 귀찮으니까, 혼자 가 봐요.』
지운은 남편으로서의 권위가 깎기는 것 같아서 꽥 하고 소리를 쳤다.『그렇지만 임선생님 같은 문화인이 그처럼 독재주의를 써서야 되겠읍니까? 민주주의 사회의 목탁(木鐸)이 되셔야 할 분인데……』
그러는데 석란이가 웃으워 죽겠다는 듯이 깔깔깔깔 허리를 꼬며 외쳤다.
『아이, 재미있어! 여보, 이론으로는 당신이 졌어요, 졌어!』
그 말에 박 준모는 승리자처럼 빙그레 웃으며,
『보세요, 부인은 역시 민주주의적인 교양을 받으신 분이지요. 존경합니다!』
박 준모 청년은 머리를 한번 숙여 보였다.
남편으로서의 체면과 예술가적인 자존심이 홱하고 머리를 들었으나 그러나 지운은 논리의 궁핍을 느끼고 표정만 푸르럭거렸다.
『그렇지만 나 오늘 춤추고 싶지 않아서 그만두겠어요. 혼자 가 보세요.』
『아, 정히 그러시다면 하는 수 없읍니다. 부인네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 현대인의 교양이니까요. 그럼 두 분의 신혼 초야를 마음으로 축복하면서 물러가겠읍니다.』
그러면서 박 준모 청년은 천천히 밖으로 사라졌다. 그 지극히 여유를 가진 청년의 뒷모습이 지운의 눈에는 한 덩어리의 분뇨(糞尿)처럼 더럽게 비치었다.
그 날밤 지운은 쭈욱 기분을 상하고 있었다. 그처럼 껍진한 청년에게 정신을 잃은 석란의 몸뚱아리가 탈의장에서부터 침대위까지 운반되어 갔다는 사실이 그지없이 불쾌했다.
더구나 신혼 초야인 줄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기어코 석란을 파아티로 끌어내려는 그 몰상식과 무신경이 지운이와 같은 가냘픈 신경의 소유자에게는 불쾌하다기 보다도 일종의 위협감을 느끼게 하였다.
게다가 석란은 또 석란대로 한 사람의 아내라는 관념은 전혀 무시하고 지나치게 공평한 판단을 내리면서 깔깔대고 웃고 있었다. 확실히 이론으로서는 지운이가 졌다. 그러나 석란이가 조금만 더 남편의 기분을 존중하고 가정에 대하여 성의를 가졌다면 그러한 형식 논리에 흥미를 느끼고 깔깔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번 돌이켜 생각하면 그것이 석란의 성격이라고 지운은 자기의 연륜을 계산하며 나이 어린 신부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아이, 재미도 없어!』
위스키 티이를 마시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운은 제 손으로 위스키를 따라 석잔이나 꿀꺽꿀꺽 마시며 석란의 얼굴을 덤덤히 바라보다가,『석란!』
『네?』
『나는 민주주의 라는 것이 갑자기 싫어졌어.』
『무슨 말인데…….』
『민주주의가 부부의 의사를 각기 존중하는 건 좋지만……그것 때문에 가정의 성실한 분위기가 파괴 당한다면 그런 민주주의는 내게는 불필요해.』
『아, 아까 그 학생의 이야기?』
석란은 비로소 지운의 침울해진 원인을 발견하고 킥킥하고 한 번 웃고 나서,
『인제 보니, 어린애 같은 데가 있어요. 아이, 정말 귀엽네요!』
했다.
지운은 웃었다. 연령의 위치가 순식간에 바뀌어지며 석란은 어른이되고 지운은 어린애가 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이론적으로는 그 학생의 말이 옳지 않아요?』
지운은 다시금 서글퍼졌다.
『이론적으로 옳을런지 모르지만 그것을 석란의 입으로 강조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요.』
『왜요? 옳은 건 옳고 그른건 그를 수 밖에……』
위스키 잔을 내려 놓고 지운은 휙 몸을 일으켰다.
『나는 지금 이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요. 부부 생활에 필요한 것은 이론적이기 보다도 애정과 이해일 것이요. 권위와 의무를 내 세우기 전에 상대편의 입장을 다사롭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요.』
지운은 존칭을 썼다.
감정의 거리가 생긴 증거였다.
석란은 대답을 않고 지운의 얼굴을 비둘기처럼 말똥말똥 쳐다만 보다가,
『이해는 이해고 이론은 이론이야만 하잖아요? 그 학생의 말이 옳긴 옳지만 제가 선생님을 이해했기 때문에 거절한 것이 아냐요?』
석란이도 그처럼 서먹서먹 하다던 선생님을 마침내 썼다.
『내 입장을 이해하지 않았더라면 따라 나섰을런지 몰랐다는 말이고?』
『선생님은 댄스에는 흥미가 없으니까 그러시지만……』
그러면서 석란은 갑자기 풀기를 잃고 고개를 수그리었다. 눈물이 핑 돌며 석란의 감정은 차차 서글퍼지는 것이다, 오랫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석란은 이윽고 눈물 한 방울이 눈꼬리에 달랑달랑 매어달린 쓸쓸한 얼굴을 들며,『선생님.』
하고 조용히 불렀다.
『선생님. 제가 모르는 것이 있음 화내지 말고 가르쳐 주셔요.』
그 조용한 한마디가 뭉클하고 지운의 감정을 순수하게 쳤다.
작가 임 지운이 인간에게 바라고 있는 것은 이론의 투쟁이 아니고 감정의 조화였다. 그리고 지금 실로 뜻밖에도 석란의 입으로부터 감정의 조화를 조용히 제시해 왔다는 사실은 석란의 성장을 의미하는 하나의 단계 같아서 지운은 무한히 기뻤다.
일단은 멀어졌던 감정이었다. 그 감정이 다시금 가까워지며 그것이 또 다시 비약을 하여 하나의 절실한 애정으로 변모를 하는 순간, 지운은 석란의 등뒤로 휙 돌아가서 석란의 두 어깨를 힘껏 품으며,
『석란, 내가 화 낸것 용서해요.』
그 말에 석란은 얼굴을 돌려 지운을 쓸쓸히 쳐다보며,
『제가 아마도 잘못됐나 봐요. 선생님보다 나이가 어리니까 잘못되는 점이 많을 거예요. 그때는 화를 내지 말고 조용히 타일러 주세요.』
그러면서 석란은 두 팔을 벌리고 지운의 품속으로 기어들어왔다.
『석란! 석란은 참 좋은 말을 했어! 서로 이해하고 서로 용서하면서 우리 길이 행복하게 살아요!』
『아, 선생님!』
『석란!』
석란은 지운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코메인 소리로,
『오늘은 신혼 초야죠! 그런 걸 제가 춤추러 가고 싶어해서 죄송해요.』
그러면서도 석란은 자기의 이론이 그른 것이라고는 끝내 생각하지 않았다.
타협일 뿐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내일밤이라도 여기서 파아티를 열면 되니까?』
『선생님은 댄스를 좋아하지 않는데……』
『석란이가 좋다면 나도 인제 좋아지겠지. 그렇지만 나는 서툴러서……』
『조금만 더 배움 될 텐데……』
『댄스가 그처럼 좋을까?』
『응, 멋지잖아?』
이윽고 둘이는 훌쩍 일어서서 탱고의 스텝을 밟기 시작하였다. 석란은 콧노래를 부르며 갑자기 명랑해졌다.
『푸롬나아드를 좀더 곱게……허리의 선이 옆으로 살짝 흐르는 것처럼……』 그러나 석란처럼 지운의 스텝은 곱지를 못했다.
『정지 스텝이 너무 빨라요. 언제든지 슬로우……옳지 퀵퀵 슬로우……퀵 퀵 슬로우……그렇게 걸어다니지를 말고……탱고는 정지 스텝이 고와야만 멋져요.』
스텝을 밟는 동안 지운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석란 처럼 흥이 나지 않아 율동의 흥미보다 사색의 흥미를 더 소중히 하였다.
『두 개의 육체가 자아내는 율동의 하아모니가 댄스의 기본 정신이라면 오늘의 사교 댄스는 어째서 동성간에는 행하여지지 않고 이성간에만 성행하는가?』
율동의 조화에서 오는 쾌락보다도 먼저 쾌락 하나가 확실히 있다. 지운은 석란의 육체에서 신비로움을 먼저 느꼈다. 그 신비로운 접촉감을 의식함이 없이 율동의 조화만을 향락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지닌 관능의 마비가 요청돼야만 하는 것이다.
지운은 스텝을 멈추고 석란을 이끌어 침대 위에 안아 올렸다.
이튿날은 일요일이었다. 먼저 일어난 지운이가 목욕을 하고 올라와 보니 석란은 그냥 잠이 들어 있었다. 지운은 거울 앞으로 가서 머리에 빗질을 하고 섰는데 자는줄 알았던 석란이가 눈을 가스럼이 뜨고 지운의 뒷모습을 말끄러미 바라다 보며 익살맞게 킥하고 웃었다.
어제까지도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자기의 감정이 전설인 양 희미해지며 존경의 념과는 정반대로 소꿉 장난을 하며 자라난 소학교 동무처럼 갑자기 다 정해졌다. 정말로 소꿉 장난같은 하룻밤이었다.
생면부지인 남과 어떻게 약속 하나로 일생동안을 같이 사느냐고, 어제까지도 석란이가 품었던 결혼생활의 신비성이 차츰차츰 해소되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석란의 기억이 부끄럼을 가져왔다. 그래서 다시금 소리없이 혼자서 킥킥 웃었다.
『저처럼 점잖은 양반이……』
인간 생활의 표리를 엿본 것 같아서 시야가 갑자기 넓어지고 사고 방법이 무섭게 비약을 한다.
석란이 또래의 세계에서는 사랑이라든가 애정이라든가 한낱 관념적인 감미로움의 경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료들의 눈에는 연애 박사와도 같이 비쳤던 석란의 세계도 결국에 있어서는 한낱 안개 속의 인생이요, 지식이었다.
그러던 것이 마침내 안개의 베일이 벗겨지면서 애정의 궁극적인 정체를 발견하고 석란은 새삼스럽게 놀랐다. 다소의 예비지식은 물론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한 육체의 학대가 애정의 실체(實體)라고는 통히 느껴지지 않았다.
책 한 권을 읽음으로서 사아드나 마조호의 방법을 지식으로서 흡수를 하고 강한 것처럼 떠들어 보기는 했었으나 석란의 스물 셋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머나먼 경지였다.
어쨌든 어제까지도 서먹서먹하던 감정이 제거되고 그대신 부끄러운 감정이 자꾸만 왔다.
그것이 이날 아침 석란의 인생이 가져본 절실한 실감이었다.
석란은 갑자기 장난을 하고 싶어졌다. 손을 뻗쳐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상자에서 크리임 초콜렛을 몇알 집어들고 그 한 알을 힘껏 던졌다. 돌아서서 빗질을 하고 섰는 지운의 뒤통수를 툭치고 초콜렛은 발꿈치 뒤로 데구루루 떨어졌다.
지운은 홱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러나 석란은 눈을 감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지운은 빙긋 웃었다. 웃으면서 발밑에 떨어진 크리임 초콜렛을 주워 들고 가만히 던졌다. 석란의 다소 뾰족해 보이는 코끝을 툭 쳤다. 그래도 석란은 잠이 깨지 않는다.
지운은 침대 앞으로 성큼 성큼 걸어와서 석란의 이마에다 입술을 한 번 누르고 나서,
『인제 일어나요. 일어나서 목욕을 하고 조반을 먹고 우리 금강원에 가요.』
그랬더니 석란은 그냥 눈을 감은 채,
『당신은 나쁜 사람이야!』
했다.
『왜 나빠?』
『몰라이!』
지운은 귀여운 듯이 석란의 코를 두 손가락으로 한번 꼭 집었다 놓,
『빨리 일어나요.』
『잡든 사람이 어떻게 일어나요?』
『눈을 떠요.』
『당신 보기 싫어서 나 영영 눈 안 뜰 테야. 나뻐, 나뻐!』
『이래도 안 뜰테야?』
『아이, 간지려!』
헤쳐졌던 파자마 깃을 두 손으로 움켜 쥐고 석란은 캬득캬득 몸을 꼬며 발딱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