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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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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음력 7월 16일. 대한민국 황해도 해주의 수양산 아래에서 한 남자아이가 태어나니, 성은 안(安)이요, 이름은 중근(重根), 별명은 응칠(應七)이라고 했다. 성질이 가볍고 급한 편이므로 이름을 중근이라고 하고, 배와 가슴에 검은 점이 일곱 개가 있어 별명이 응칠이라고 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성함은 안인수(安仁壽)였다. 그분은 성품이 어질고 덕이 많은 분이었으며, 살림이 넉넉해 자선가로서도 도내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일찍이 진해현감을 지냈으며 6남3녀를 뒀다. 여섯 아들은 장남 태진, 차남 태현, 3남 태훈(泰勳·나의 아버지), 4남 태건, 5남 태민, 6남 태순이었다.

여섯 형제는 모두 글을 썩 잘하고 살림도 넉넉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셋째인 나의 아버지는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 여덟아홉 살에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했고, 열세너 살 때 과거 공부와 사륙병려체(四六騈麗體·대구를 써서 문장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문체)를 익혔다.

아버지께서 통감을 읽을 때 선생이 책을 펴고 글자 하나를 가리키며 물어보았다.

“이 글자에서부터 열 장 뒤에 있는 글자가 무슨 글자인지 알겠느냐?”

아버지께서는 마음속으로 생각하시다가 대답했다.

“알 수 있습니다. 필시 천(天)자일 것입니다.”

들춰보았더니 과연 그 말대로 천(天)자였다.

“이 책을 거슬러 올라가도 알 수 있겠느냐?”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다시 “예! 알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렇게 시험해 묻기를 십여 차례 했으나 바로 하거나 거꾸로 하거나 마찬가지로 전혀 착오가 없었다. 이를 보고 듣는 사람들 모두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선동(仙童)이라 일컬었다. 그로부터 소문이 널리 퍼져 알려졌다.

아버지는 중년에 과거에 올라 진사가 되고, 조씨(趙氏)에게 장가들어 배필을 삼아 3남1녀를 낳으니 맏이는 중근(重根), 둘째는 정근(定根), 셋째는 공근(恭根)이었다.

아버지가 1884년 갑신년에 한성에 가서 머물 때였다. 당시 박영효 씨는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고 어지러운 것을 깊이 걱정해 정부를 혁신하고 국민들을 개명시키고자 했다. 그 일환으로 그는 준수한 청년 70명을 선정해 외국으로 보내 유학시키려 했는데, 아버지도 거기에 뽑혔다.

그런데 슬프게도 정부의 간신배들이 사리에 맞지 않게 박씨가 반역하려고 한다고 모함해 병정을 보내 그를 잡으려 했다. 그러자 박씨는 일본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그의 동지와 학생들은 살육도 당하고, 혹은 붙잡혀 멀리 귀양을 가기도 했다.

나의 아버지는 몸을 피해 달아나 고향집으로 돌아와 숨어 살면서 할아버지와 서로 의논했다.

“나라가 날로 잘못돼 가니, 부귀공명은 바랄 것이 못 됩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아버지는 “일찌감치 산에 들어가 살면서 구름 아래 밭이나 갈고, 달밤에 고기나 낚으며 세상을 마치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이윽고 아버지는 집안 살림을 모두 팔고 재산을 정리했다. 그리고 마차를 준비해 무려 70~80명이나 되는 대가족을 이끌고 신천군 청계동의 산중으로 이주했다.

그곳은 지형은 험준하나 논밭이 제대로 갖추어 있고, 산수경치가 아름다워 그야말로 별유천지(別有天地)라 할 만했다. 그때 내 나이는 예닐곱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한문학교에 들어가 8~9년 동안 겨우 보통학문을 익혔다.

내가 열네 살 되던 무렵 조부께서 돌아가셨다. 나는 사랑으로 감싸주시며 길러 주시던 할아버지의 정을 잊을 수 없었고, 너무 슬픈 나머지 병을 얻어 심하게 앓다가 반년이 지난 후에 겨우 회복됐다.

나는 어려서부터 특히 사냥을 즐겨했다. 언제나 사냥꾼을 따라다니며 산과 들에서 사냥하며 다녔다. 차츰 장성해서는 총을 메고 산에 올라 새와 짐승들을 사냥하느라 학문에는 그다지 힘쓰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와 선생들이 나를 엄하게 꾸짖기도 했으나 끝내 복종하지 않았다.

어느 날 친한 친구 학생들이 나를 타이르며 권고했다. “너의 부친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는데, 너는 어째서 무식하고 하찮은 인간이 되려고 하느냐?”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너희들 말도 옳다. 그러나 내 말도 좀 들어봐라. 옛날 초패왕 항우(楚覇王 項羽)가 말하기를 ‘글은 이름이나 적을 줄 알면 그만이다.’라고 했다. 그랬는데도 만고영웅 초패왕의 명예가 오히려 천추에 길이 남아 전한다. 나도 학문을 가지고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 초패왕도 장부고 나도 장부다. 너희들은 다시 내게 학업을 권하지 말라.”

어느 해 3월 화창한 봄날이었다.학생들과 함께 산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다가 깎아지른 듯 험한 바위가 겹겹이 쌓인 절벽 위에 이르렀다. 꽃이 너무도 탐스러워 그것을 꺾으려고 몸을 숙이는 순간 발을 헛디뎌 미끄러졌다. 수십 척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몸은 굴렀으나 정신을 가다듬어 마침 나무 한 그루가 있는 것이 보이기에 손을 내밀어 그것을 움켜쥐었다. 겨우 몸을 바로잡아 용기를 내어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았다. 만일 서너 자만 더 아래로 떨어졌더라면 수백 척 벼랑 아래로 떨어져 뼈는 부스러지고 몸은 가루가 돼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을 뻔했다.

여러 친구는 산 위에 서서 얼굴이 흙빛이 돼 벼랑 위에 서 있다가 내가 무사한 것을 보고는 밧줄을 내려서 나를 끌어올려 주었다. 나는 몸에 상처가 한 군데도 없었고, 다만 등에 땀만 흠뻑 젖었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기뻐하며, 하늘이 목숨을 살려준 것에 감사하면서 산을 내려와 집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내가 위험한 처지에서 죽음을 모면한 첫 번째 경우였다.

동학당 토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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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내 나이 16세에 아내 김아려에게 장가들었다. 현재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그 무렵 한국 각 지방에서는 이른바 동학당이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들은 외국인을 배척한다는 핑계로 군현을 가로질러 다니면서 관리들을 죽이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했다. 이것이 이후 우리나라를 위태롭게 한 바탕이 됐으며, 일본·청국·러시아가 우리나라에서 전쟁하게 된 원인이 됐다.

관군은 그들을 진압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청국 군인들이 들어오고 또 일본 군인들도 건너와 일본과 청국 두 나라가 서로 충돌해 마침내 큰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당시 나의 아버지는 동학당의 폭행을 견디기 어려워 동지들을 모으고, 격문을 뿌려 의병을 일으켰다. 나아가 포수들을 불러 모으고, 처자들까지 대열에 편입시켰다. 이렇게 모인 정예 병력은 70여 명이 됐으며, 이들은 청계산 속에 진을 치고 동학당에 항거했다.

그때 동학당의 괴수 원용일이란 자가 2만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기세도 당당하게 쳐들어 왔다. 동학당의 깃발과 창칼이 햇빛을 가리고 북소리·호각소리·고함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우리 측 의병은 그 수가 70여 명밖에 되지 않아 동학당과 비교하면 그 세력의 강하고 약함이 마치 계란을 갖고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았다. 따라서 의병들 중에는 마음속으로 겁을 먹고 어찌할 줄 몰라 하는 자가 많았다.

때는 1894년 12월 한겨울이었다. 갑자기 동풍이 불고 큰 비가 쏟아져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게 됐다. 적병인 동학군은 갑옷이 모두 젖어 찬 기운이 몸에 스며들자 별 도리 없이 10리쯤 떨어진 마을로 후퇴해 밤을 지내려고 했다.

그날 밤 아버지께서는 여러 장수를 모아 놓고 의논한 끝에 다음과 같은 결단을 내렸다.

“만일 내일까지 이 자리에 앉은 채로 적병의 포위 공격을 받게 되면, 우리 소수의 군사로는 많은 적병에 대항해 싸우지 못할 것이 뻔하다. 그러니 오늘밤 기습작전으로 적을 선제공격하는 길밖에 없다.”

닭이 울자 새벽밥을 지어 먹은 후, 아버지는 정병 40명을 뽑아 출발시키고 남은 병정들은 본진을 수비하게 했다. 그때 나는 동지 6명과 함께 자원했다. 나는 선봉 겸 정탐 독립대가 돼 맨 앞에서 수색하면서 적병의 대장이 있는 곳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숲속에 엎드려 숨어서 적진의 형세와 동정을 살펴보니, 깃발이 바람에 휘날려 펄럭이고 불빛이 하늘로 치솟아 대낮과 같았다. 사람과 말들은 소란해 도무지 기강과 규율이 없었다.

나는 동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만일 지금 적진을 습격하기만 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오.”

그러나 모두들 회의적이었다.

“얼마 안 되는 소수의 군사로 어찌 적의 수만 대군을 대적할 수 있겠소?”

나는 다시 대답했다.

“그렇지 않소. 병법에 이르기를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긴다’고 했소. 내가 적의 형세를 보니 오합지졸이 모인 질서 없는 무리일 뿐이오. 우리 일곱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기만 하면 반란을 일으킨 저 같은 무리들은 비록 백만 대군이라 해도 겁날 것 없소이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았으니 불시에 쳐들어 가면 파죽지세가 될 것이오. 그러니 그대들은 망설이지 말고 내 작전에 따르시오.”

모두들 내 의견에 동조해 우리는 완전한 계획을 세웠다. 나의 우레와 같은 호령 한마디에 일곱 사람이 일제히 적의 대장이 있는 곳을 향해 사격을 개시했다. 포성은 벼락처럼 천지를 뒤흔들고, 탄환은 우박처럼 쏟아졌다.

적병들은 전혀 예측도 못하고 대비도 못했기에 미처 손을 쓸 수 없었다. 적들은 몸에 갑옷도 입지 못하고 손에 총을 들지도 못한 채 서로 밀치고 밟으며, 산과 들로 흩어져 달아나므로 우리는 파죽지세로 그들을 추격했다.

이윽고 동이 텄다. 적병은 그때서야 우리의 군사력이 약하고 수효가 적은 것을 알아차리고 사면에서 포위한 채 공격했다. 이제는 거꾸로 우리의 전세가 지극히 위급해져서 좌충우돌해 보았으나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포성이 크게 울리며 한 부대 군사들이 공격해 오자, 적병은 다시 크게 놀라 달아났다. 마침내 적의 포위망이 풀렸고, 우리는 용케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바로 본진의 후원병들이 몰려와서 적과 접전을 벌인 것이었다.

우리 선봉대와 본진이 합세해 추격하자, 적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멀리 도망갔다. 전리품을 거두어 보니 총기와 탄약이 수십 바리요, 말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으며, 군량미가 1000여 포대나 됐다.

적병의 사상자는 수십 명이었으나 우리의 의병들은 한 사람의 부상자도 없었다.

우리는 하늘의 은혜에 감사하고 만세를 세 번 부르며 본래의 마을로 개선해 황해도의 관찰부에 급히 승전 보고했다. 당시 일본 하급 장교인 스즈키란 자가 군대를 이끌고 지나가다 우리가 동학당에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신을 보내어 축하의 뜻을 표한 적이 있었다.

이후 적병들은 소문을 듣고 멀리 달아나 다시는 더 싸움이 없었고, 차츰 잠잠해져서 나라 안이 다시 태평해졌다.

나는 그 싸움 뒤에 무서운 병에 걸려 몇 달을 고통스럽게 보낸 끝에 겨우 죽음을 면하고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15년 동안 조그만 질병도 한 번 앓지 않았다.

아! 토끼 사냥이 끝나면 공을 세운 사냥개마저도 잡아먹으려 들고, 내를 건너갈 적에 요긴하게 쓴 지팡이도 건너가서는 모래바닥에 내동댕이친다더니 그게 사실이었다. 이듬해인 1895년 여름에 손님 두 사람이 찾아와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작년에 귀하가 전리품으로 얻은 1000여 포대의 군량미는 원래 동학당들의 물건이 아니었소. 본래 그 절반은 지금의 탁지부 대신 어윤중 씨가 사두었던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전직 선혜청 당상 민영준 씨가 농장에서 추수한 곡식이니 지체하지 말고 원래의 수량대로 돌려 드리도록 하시오.”

아버지는 웃으며 대답했다.

“어씨, 민씨, 두 분의 쌀은 내가 알 바 아니오. 그것은 우리가 동학당의 진중에 있던 것을 빼앗아 온 것이니, 당신들은 다시는 그런 무리한 말을 하지 마시오.”

그러자 두 사람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냥 돌아갔다.

그 일이 그렇게 끝난 줄 알았는데, 하루는 경성에서 급한 편지 한 장이 왔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지금 탁지부 대신 어윤중과 민영준 두 사람이 곡식 포대를 잃어버렸다면서 그것을 찾을 욕심으로 황제 폐하께 죄 없는 당신을 고자질했소. 즉 ‘안 모라는 사람이 막중한 국고금과 무역을 해서 사들인 쌀 1000여 포대를 허가 없이 도둑질해 먹었기에 사람을 시켜 조사해 보니, 그 쌀로 수천 명의 병사를 길러서 음모를 꾸미려 하고 있습니다. 만일 군대를 보내어 진압하지 않으면 국가에 큰 환난이 있을 것입니다’라는 모함입니다. 곧 군대를 파견하려 하고 있으니 빨리 경성으로 올라와 앞뒤 방책을 꾀하도록 하시오.”〔전 판결사 김종한의 편지〕

아버지는 그 편지를 읽고 곧 길을 떠나 서울로 올라가 알아 보니 과연 현실이 그 말과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법관에게 사실을 호소하고, 재판도 서너 차례 했으나 끝내 판결을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 김종한 씨가 정부에 이렇게 건의했다.

“안 모 씨는 본래 도적의 무리가 아닐뿐더러 의병을 일으켜 도적들을 무찌른 국가의 큰 공신이니 마땅히 그 공훈을 표창해야 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비슷하지도 당치도 않은 말로써 그 사람을 이렇게 모함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 같은 건의를 어윤중은 끝내 들어주지 않다가 뜻밖에 민란을 만나 난민들의 돌에 맞아 참혹하게 죽으니, 그의 모략도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독사가 물러나자 맹수가 나온다는 격으로 이번에는 민영준이 새로 일을 꾸미어 해치려 들었다.

민씨는 세력가이었기 때문에 사태는 더욱 위급해졌다. 아버지는 계획을 더 이상 세우지 못하고, 기력도 다해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아버지는 프랑스 사람의 천주교 성당으로 몸을 피해 들어갔다. 그곳에 자취를 감추고 몇 달 동안 숨어 있으며, 프랑스 사람의 보호를 받고 있는 동안 민씨의 일도 끝이 나서 아버지는 무사하게 됐다.

아버지는 성당에 오래 머물며 강론도 많이 듣고, 성서도 많이 읽어 진리를 깨닫고 교인이 됐다. 그 후부터 아버지는 복음을 전파하고자 교회 안에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이보록 씨와 함께 많은 천주교 관련 서적들을 싣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때 나는 십칠팔 세쯤의 젊은 나이였으며 힘이 세고 기골이 빼어남에 있어 남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았다.

나는 평생 타고난 특성으로 즐겨하던 일이 네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친구들과 의리를 맺는 것이오.

둘째는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오.

셋째는 총으로 사냥하는 것이오.

넷째는 날쌘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의협심 있고 사나이다운 사람이 어디서 산다는 말만 들으면, 멀고 가까운 것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총을 지니고 말을 달려 찾아갔다. 그래서 과연 그가 동지가 될 만한 인물이면 분통 터지는 일을 정의로운 기운을 발산하며 토론하고, 유쾌하게 실컷 술을 마시고, 취한 후에 노래하고 춤도 추고 혹은 기방에서 놀기도 했다.

기방에서는 기생에게 다음과 같이 야단을 치기도 했다.

“너희는 뛰어난 자태와 얼굴을 가졌으니 호걸 남자와 짝을 지어 같이 늙는다면 그 얼마나 좋은 일이겠느냐?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하고 돈 소리만 들으면 침 흘리며 실성한 사람처럼 염치불구하고 오늘은 장씨, 내일은 이씨에게 붙어 금수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냐.”

계집들이 내 말을 수긍하지 않고 나를 몹시 미워하거나 공손하지 않은 태도를 보이면, 나는 욕을 퍼붓기도 하고 매질도 했다. 이 때문에 친구들은 나에게 전구(電口ㆍ번개입)라는 별도의 호칭을 붙여 주었다.

하루는 동지 육칠 명과 산에 가서 노루사냥을 하는데 공교롭게도 탄환이 구식 6연발총의 구멍에 걸려서 빼낼 수도 없고 들이밀 수도 없게 됐다. 그래서 나는 쇠꼬챙이로 총구멍을 뚫으려고 아무런 생각 없이 마구 쑤셔댔다. 그랬더니 갑자기 “쾅!” 하고 터지는 소리에 혼비백산해 머리가 붙어 있는지 없는지, 목숨이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도 깨닫지 못하게 됐다.

이윽고 정신을 차려 자세히 살펴보니, 탄환이 폭발해 쇠꼬챙이와 탄환이 함께 오른손을 뚫고 공중으로 날아간 것이었다. 나는 곧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0년 동안, 비록 꿈속에서도 그때 놀랐던 일을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 뒤에 또 한 번은 남이 잘못 쏜 엽총의 산탄 두 개가 내 등 뒤를 뚫었으나 별로 중상은 아니었고, 곧 총알을 빼내 무사했다.

천주교 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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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아버지는 널리 복음을 전파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두루 권하여 천주교에 입교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갔다. 우리 모든 가족도 천주교를 믿게 됐고, 나도 역시 입교해 프랑스인 선교사 홍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세례명을 토마스(Thomas)라고 했다.

성경을 강습받고, 교리 토론 등을 하며 여러 달이 지나자, 나는 믿음의 덕목이 차츰 굳어지고 독실하게 하느님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됐다. 천주 예수 그리스도를 숭배하며 지내는 동안 날이 가고 달이 가서 몇 해가 흘렀다.

당시 나는 교회의 사무를 확장하고자 홍 신부와 함께 여러 고을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전도했다. 이때 내가 군중들에게 한 연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형제들이여! 내게 할 말이 있으니 내 말을 꼭 한 번 들어보시오. 만일 어떤 사람이 혼자서만 맛있는 음식을 먹고 그것을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거나, 또 남다른 재주를 간직하고서도 남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과연 동포로서의 인정과 의리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내게 유별난 음식이 있고, 기이한 재주가 있는데, 그 음식은 한 번 먹기만 하면 오래 살고 죽지 않는 것이요, 또 이 재주를 한 번 가지기만 하면 하늘로 날아 올라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르쳐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 동포는 귀를 기울이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의 만물 가운데 사람이 가장 귀하다고 하는 까닭은 사람만이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혼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생혼(生魂)이니 그것은 초목의 혼으로서 생장할 수 있는 혼이요, 둘째는 각혼(覺魂)이니 그것은 짐승의 혼으로서 외부의 사물이나 반응을 의식하는 이른바 지각할 수 있는 혼이요, 셋째는 영혼(靈魂)이니 그것은 사람의 혼입니다. 이것은 생장하고 지각하고, 그리고 시비를 분별하고, 도리를 토론하고, 만물을 맡아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일 영혼이 없다고 하면, 육체만으로는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짐승은 옷이 없어도 추위를 견디고, 직업이 없어도 먹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늘을 날 수도 있고, 달릴 수도 있어서 재주와 용맹이 사람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고 많은 동물이 모두가 사람의 지배를 받는 것은 그것들의 혼에 영(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귀중함은 이것을 미뤄서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영혼이란 이른바 천명이란 것으로 지극히 높으신 천주님께서 사람이 어머니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부어 넣어주는 영원무궁하고 영원불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주는 누구입니까? 한 집안 가운데는 그 집 주인이 있고, 한 나라에는 임금이 있듯이, 이 천지 위에는 천주님이 계십니다. 천주님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삼위일체(성부·성자·성신으로 그 뜻이 깊고 커서 솔직히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음)의 지위와 품격을 가지신 분입니다.

천주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알며, 죄악에 물들지 않고 오로지 착하기만 하며, 지극히 공정하고, 더없이 의로운 분으로 천지만물과 해와 달과 별을 만들어 운행하게 하고, 착하고 악한 것을 상주고 벌주시는, 둘도 없는 오직 하나뿐인 큰 주재자이십니다.

만일 어떤 집안에 아버지가 되는 사람이 집을 짓고 가업을 일궈 그 자식에게 물려줘 아들이 재산을 지니고 잘 살게 됐다고 합시다. 그런데 아들은 제가 잘나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어버이를 섬길 줄 모른 채 불효막심하다면 그 죄가 무겁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어떤 나라의 군주가 올바른 정치를 해 백성들의 생업을 보호하고 모든 국민이 태평을 누릴 수 있게 됐다고 합시다. 그런데 백성이 군주의 명령에 복종할 줄 모르고, 전혀 충성하고 애국하는 성향이 없다면 그 죄 또한 매우 심각하다고 할 것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의 큰 아버지요, 큰 군주이신 천주님께서는 하늘을 만들어 우리를 덮어 주시고, 땅을 만들어 우리를 떠받쳐 주시며, 해와 달과 별을 만들어 우리를 비춰 주시고, 만물을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쓰게 하시니, 실로 그 크신 은혜가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사람들이 이를 잊어버리고 제가 잘난 줄 알고 충성과 효도를 다하지 않고, 은혜에 보답하는 기본 의리를 망각한다면 그 죄는 비길 데 없이 큰 것입니다. 이 어찌 두렵고, 삼가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공자님도 일찍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데도 없다”라고 말입니다.

천주님은 지극히 공정해 착한 일에 대해 반드시 보답해주고, 악한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벌을 내립니다. 공적과 죄과의 심판은 몸이 죽는 날 행해지는 것입니다. 착한 이는 영혼이 천당에 올라가 영원무궁한 즐거움을 받을 것이요, 악한 자는 영혼이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히 끝없는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군주도 상을 주고 벌을 주는 권세를 가졌거늘 하물며 천지를 다스리는 거룩한 큰 군주이신 천주님께서 어찌 그러한 권세가 없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왜 천주님은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착한 것은 상을 주고 악한 것은 벌을 주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주는 상과 벌은 유한한 것이지만 선악은 무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죽여서 시비를 가릴 때, 죄가 없으면 그만이고, 죄가 있다면 그 한 사람만 다스리는 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수천만 명을 죽인 죄를 지었다면, 어찌 그 한 몸뚱이만 가지고 그 죄를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만일 어떤 사람이 수천만 명을 살린 공로가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잠깐 스쳐 지나가는 이 세상의 부귀영화로서 그 상을 다 주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사람의 마음이란 때에 따라 변하는 것이어서 지금은 착하다가도 다음에는 악한 일을 하기도 하고, 혹은 오늘은 악하다가도 내일은 착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때마다 선악에 상벌을 주기로 한다면 이 세상에서 인류가 보전되기 어려울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이 세상의 벌은 다만 악인의 몸을 다스릴 뿐이고, 그의 마음을 다스리지는 못하지만 천주님의 상벌은 그렇지 않습니다.

천주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알며, 죄악에 물들지 않고 오로지 착하기만 하며, 지극히 공정하고, 더없이 의로운 분이기 때문에 사람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너그러이 기다려 주십니다. 그러다가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날, 선악의 경중을 심판해 죽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영혼으로 하여금 영원무궁한 상벌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상은 천당의 영원한 행복이요, 벌은 지옥의 영원한 고통으로서, 천당에 오르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한 번 정해지면 다시 변동이 없는 것입니다.

아! 사람의 목숨이란 길어야 100년을 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질고 어리석고 귀하고 천하고를 가릴 것 없이 누구나 알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알몸으로 저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이른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일이라는 것이 이같이 헛된 것인 줄 알면서 사람들은 왜 허욕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며, 악한 일을 하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나중에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일 천주님의 상벌도 없고, 또한 영혼도 역시 몸이 죽을 때에 같이 없어진다면 잠깐 머물다 가는 이 세상에서 잠깐 부귀영화를 누려볼 만도 합니다. 그러나 영혼이란 결코 죽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천주님이 지극히 높은 권한을 갖고 있다는 것도 불을 보는 것처럼 명확한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부귀영화는 한낱 덧없는 것일 뿐입니다)

옛날 중국의 요(堯) 임금은 “저 흰 구름을 타고 하느님이 사는 곳에 이르기만 한다면, 달리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우(禹) 임금은 “삶이란 붙어 있는 것이요, 죽음이란 돌아가는 것이다” 또한 “혼은 올라가는 것이요, 넋은 내려가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말들은 모두 다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뚜렷한 증거가 되는 것들입니다.

만일 사람이 천주님의 천당과 지옥을 보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치 유복자가 아버지를 못 보았다고 해서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안 믿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 장님이 하늘을 보지 못했다고 해서 하늘에 해가 있다는 사실을 안 믿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또 화려한 주택을 보면서 그 집을 지을 때 못 보았다고 해서 그 집을 지은 목수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어찌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저 하늘과 땅과 해와 달과 별들과 같은 넓고 큰 것, 날고 달리는 동물들, 온갖 식물들, 기기묘묘한 만물이 어찌 만든 그 누군가가 없이 저절로 생성할 수 있었겠습니까? 만일 그들이 저절로 생성된 것이라면 해와 달과 별들이 어떻게 어김없이 운행되며, 봄·여름·가을·겨울이 어떻게 차이가 나지 않고 질서 있게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비록 집 한 칸, 그릇 한 개도 그것을 만든 사람이 없다면 생겨날 수가 없는데, 하물며 물과 땅 위의 그 많은 기계가 만일 그들을 주관하는 이가 없다면 어찌 저절로 운전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믿고 안 믿는 것은 보고 못 본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바로 이치에 맞느냐 안 맞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이러한 몇 가지 증거를 들어볼 때 지극히 높은 천주님의 은혜와 위엄을 확실히 믿어 의심치 아니하고 몸을 바쳐 신봉하며, 만일에 대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류의 당연한 본분인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900여 년 전에 지극히 어진 천주님이 이 세상을 불쌍히 여겨, 만인의 죄악을 속죄하여 구원하고자 천주님의 둘째 자리인 성자(聖子)를 동정녀 마리아의 배 속에 잉태시켰습니다. 그가 바로 유대국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성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머무르는 33년 동안, 사방을 두루 다니며 사람들을 보고 그 허물을 뉘우치게 하고 신령한 행적을 많이 행했습니다. 장님은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귀머거리는 듣고, 앉은뱅이가 걷고, 문둥이는 낫고, 죽은 사람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러니 멀고 가깝건 이 소문을 들은 자는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중에서 12인을 골라서 제자로 삼고, 12인 중에서 또 특히 한 사람을 뽑으니 그의 이름은 베드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를 교황으로 삼아 장차 자신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고자 권한을 맡기고 규칙을 정해 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지금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에 있는 교황은 베드로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자리로서 세계 각국 천주교인들이 모두 다 그를 우러러 받들고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 예루살렘 성 중에서 옛 유대교를 믿던 사람들이 예수가 착한 일을 하는 것을 미워하고 그의 권능을 시기해 아무 죄도 없는 그를 잡아다가 무수히 악독한 형벌을 가하고, 1000만 가지 고난을 가한 다음 십자가에 못을 박아 공중에 매달았습니다. 그때 예수는 하늘을 향해 “모든 사람의 죄악을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큰 소리기로 한 번 기도한 뒤 마침내 숨이 끊어졌습니다.

그때 천지가 진동하고 햇빛이 어두워지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었고, 제자들은 그의 시체를 거둬 장사 지냈습니다. 예수는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나 무덤에서 나와 제자들과 40일 동안 같이 지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죄를 사(赦)하는 권한을 전하고 무리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늘을 향해 예배하고 돌아와 세계를 두루 다니며 천주교를 전파하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의 2000년이 되는 동안 신도들의 수가 몇억 명인지 알 수조차 없고, 천주교의 진리를 증명하고 천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사람들의 수가 몇백만 명인지 모릅니다.

지금 세계 문명국의 지식이 뛰어난 인물들과 신사들 가운데 천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에는 위선의 종교도 대단히 많은데, 예수께서도 이를 미리 제자들에게 예언해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뒷날 반드시 위선자가 나타나 내 이름으로 민중들을 감화시킨다 말할 것이니, 너희들은 그런 잘못에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라.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다만 천주교회의 문 하나밖에 없느니라.”

바라건대 우리 대한의 모든 동포·형제·자매들은 크게 깨닫고 용기를 내어 지난날의 허물을 깊이 참회함으로써 천주님의 올바른 아들과 딸이 되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현세를 도덕시대로 만들어 다 같이 태평을 누리다가, 죽은 뒤에 천당에 올라가서 상을 받아 무궁하고 영원한 행복을 함께 누리기를 1000만 번 엎드려 바라는 바입니다.

내가 이와 같이 설명했는데, 듣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믿는 이도 있었고, 믿지 않는 이도 있었다.

의협청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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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우리나라의 교회는 차츰 확장돼 교인이 수만 명에 가까웠으며, 선교사 여덟 분이 황해도에 와서 머물고 있었다. 나는 당시 홍 신부에게서 프랑스어를 몇 달 동안 배웠다. 그러던 중 홍 신부에게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안했다.

“지금 한국 교인들이 학문에 어리석고 어두워 교리를 전도하는 데에 어려움이 적지 않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국가의 장래를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만합니다. 부디 서울의 민 주교에게 말씀드려 서양의 수사회(修士會)에서 박학한 몇 분을 모셔 와 우리나라에 대학교를 설립한 뒤, 나라 안의 재주가 뛰어난 자제들을 교육시킨다면 몇십 년이 지나지 않아 반드시 큰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계획을 세운 다음에 홍 신부와 함께 곧 서울로 올라가 민 주교를 만나서 내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민 주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한국인이 만일 학문을 배우게 되면, 천주교를 믿는 데 소홀해질 것이니 다시는 그와 같은 의견을 제시하지 마시오.”

나는 두세 번 권고해 보았지만 그는 끝내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고, 하는 수 없이 나는 고향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이러한 일을 당하고 보니 스스로 분개함을 참을 수 없어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천주교의 진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의 마음을 믿지는 않겠다.”

그렇게 결심하고 난 후 나는 프랑스어를 배우던 것을 그만두었다. 그때 어떤 친구가 프랑스어를 배우는 것을 중단한 이유를 물어보기에, 다음과 같이 대답해 주었다.

“일본말을 배우는 자는 일본의 종놈이 되고, 영어를 배우는 자는 영국의 종놈이 된다. 내가 만일 계속해서 프랑스어를 배우다가는 프랑스의 종놈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만둔 것이다. 만일 우리 한국이 세계에 위력을 떨친다면, 세계 사람들이 우리 한국말을 두루 사용할 것이니 자네는 조금도 걱정하지 말게나.”

그러자 그 친구는 할 말이 없어 물러가고 말았다.

그 당시 이른바 금광 감독으로 있던 주씨라는 사람이 천주교를 비방해 피해가 적지 않았다. 내가 대표로 선정돼 주씨가 있는 곳으로 파견됐다. 그곳에 가서 그에게 사리를 따져가며 질문하고 있는데, 금광의 광부 400~500명이 각기 몽둥이와 돌을 갖고 옳고 그른 것을 불문하고 나를 두들겨 패려고 달려들었다.

이것이 바로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경우였다. 위기에 처한 나는 달리 방법이 없어 오른손으로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도를 뽑아들고, 왼손으로는 주씨의 오른손을 잡고서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네가 비록 100만 명 무리를 가졌다 해도, 네 목숨은 내 손에 달렸으니 알아서 해라.”

그러자 주씨가 크게 겁을 먹으며 좌우에 있던 광부들을 꾸짖어 내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나는 주씨의 오른손을 잡은 채로 그를 출입문 밖으로 끌고 나와 10여 리를 함께 간 뒤에 그를 놓아주었고 나도 무사히 돌아왔다.

그 후에 나는 만인계(萬人契) 사장에 선출됐다. 당첨자를 뽑는 날, 행사장 앞뒤 좌우에는 멀고 가까운 곳에서 온 수만 명이 참석해 인산인해를 이뤘다. 당첨자를 뽑는 기계가 있는 곳은 가운데 있었고, 이곳에는 여러 임원이 함께 있었다. 그곳 주변의 네 군데 문은 경찰들이 지키며 보호해 주었다.

그때 표를 뽑는 기계가 고장이 나서 한꺼번에 대여섯 개의 표가 쏟아져 나왔다(표는 한 번에 한 개씩 나오는 것이 규칙임). 이것을 본 수만 명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사기라고 고함을 지르며 돌멩이와 몽둥이를 비 오듯 날렸다.

행사장을 경비하던 경찰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일반 임원들 중에는 다친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고, 저마다 살기 위해서 도망갔다. 그러다 보니 임원들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군중들은 사장을 쳐 죽이라고 크게 고함을 지르며 일제히 몽둥이를 휘두르고, 돌을 던지므로 사태가 위급하게 됐고 내 목숨은 경각에 달렸었다.

그 순간 나는 문득 생각해 보았다. 만일 지금 사장이란 자가 도망간다면, 회사의 사무는 다시 돌이킬 여지도 없을 것이고, 더구나 뒷날 명예를 다시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능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형세가 너무도 다급한 나머지 나는 급히 주머니 속에서 12연발의 신식 총 한 자루를 꺼내어 오른손에 들고, 계단 위로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군중을 항해 크게 외쳤다.

“왜들 이러십니까? 왜들 이러십니까? 잠깐 내 말을 들으시오. 무엇 때문에 나를 죽이려 합니까? 여러분이 사리의 옳고 그름이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소란을 피우고 난동을 부리니 세상에 어찌 이 같은 야만적인 행동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지만 나는 죄가 없소이다. 내가 어찌 까닭 없이 목숨을 버린단 말이오? 나는 결코 죄 없이 죽지는 않을 것이오. 만일 나와 목숨을 겨룰 자가 있으면, 당당히 앞으로 나서시오!”

이렇게 사람들이 납득하도록 분명하게 말하자 군중들은 모두 겁을 집어먹고 물러나 흩어지고, 더 떠드는 자가 없어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행사장을 에워싼 수만 명의 군중 사이를 뚫고 저 뒤에서부터 나는 새처럼 질주해 오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는 내 앞에 다가서더니 나를 가리키며 호통을 치며 꾸짖었다.

“사장이라는 자가 이렇게 수만 명을 초청해 놓고는 어째서 사람을 죽이려는 것이오?”

문득 그 사람을 보니 신체가 건장하고, 기골이 빼어나며, 목소리도 우렁찬 것이 과연 당대의 영웅이라고 할 만했다. 나는 단 아래로 내려가 그의 손목을 쥐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형님! 형님! 노여워 말고 내 말을 들어보시오. 지금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은 내 본의가 아닙니다. 일의 진행이 잘못됐던 것인데 난동을 부리는 무리들이 공연히 소란을 일으켰던 것이오. 다행히 형님이 위태로운 내 목숨을 구해주었습니다. 옛글에 이르기를 죄 없는 한 사람을 죽이면 그 재앙이 천세에까지 미치고, 죄 없는 사람 하나를 살려주면 그 보이지 않는 덕의 영광이 만대에 미친다고 했소이다. 성인이라야 능히 성인을 알아보고, 영웅이라야 능히 영웅과 사귈 수 있다고도 했소이다. 그러니 형님과 내가 이제부터 100년의 교분을 맺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는 “좋소이다”라고 대답하고는 군중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 있는 사장은 아무 죄가 없소. 만일 사장을 해치려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자를 한 주먹으로 때려죽일 것이오.”

말을 마친 그는 두 손으로 군중을 헤치고 나갔다. 그가 지나가는 길에 있던 군중들은 마치 물결과 같이 갈라져 흩어졌다.

나는 비로소 마음을 놓고, 다시 단 위로 올라가 큰 소리로 군중들을 불러 모아 안정시킨 뒤에 그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했다.

“오늘 일이 이렇게 된 것은 큰 잘못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공교롭게도 기계가 고장 나서 생긴 일입니다. 바라건대 여러분들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군중들도 모두 나의 말에 동의했다.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면 오늘 당첨행사를 무사히 마쳐야 남의 웃음거리를 피할 것입니다. 그러니 속히 다시 진행해 끝을 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군중들이 모두 손뼉을 치며 응낙하였으므로 마침내 행사를 계속해 모든 일을 무사히 끝마치고 헤어졌다.

그 다음에 그 은인과 이름을 주고받았다. 그의 성은 허(許)씨요, 이름은 봉(鳳)이었고, 함경북도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큰 은혜에 감사한 다음 형제의 의를 맺고 술자리를 마련했는데, 그는 독한 술을 100여 잔을 마시고도 전혀 취한 기색이 없었다.

또한 그의 팔 힘도 시험해 보았는데 놀라웠다. 그가 개암나무 열매와 잣 수십 개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두 손을 마주 비비니 열매와 잣이 마치 맷돌로 간 듯이 으깨어져서 가루가 됐다. 그 자리에서 이것을 본 사람들은 놀라고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는 또 다른 기묘한 재주도 선보였다. 두 팔을 등 뒤로 돌려 기둥을 안은 다음 밧줄로 두 손을 꽁꽁 묶여 양 어깨 사이에 기둥이 서 있게 하고 몸과 기둥이 하나가 된 상태가 됐다. 따라서 손을 묶은 밧줄을 풀지 않고는 몸이 빠져나올 수 없었다.

이렇게 해놓은 상태에서 주위의 여러 사람이 1분 동안 뒤돌아 있다가 돌아보니, 두 손을 세게 묶은 밧줄은 조금도 변함 없이 그대로 있는데, 기둥은 두 어깨 사이에서 빠져나와 있었고, 그는 묶이기 전처럼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손의 밧줄을 풀지 않은 채 기둥에 걸리지 않고 몸을 빼낸 것이었다.

보는 이들이 모두가 탄복하며 말했다.

“주량은 이태백보다 낫고, 힘은 항우에 모자라지 않고, 마술을 부리는 재주는 좌좌에 비길 만하다.”

그와 며칠 동안 함께 즐기다가 서로 헤어졌는데, 그 후 지금껏 몇 년 동안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듣지 못했다.

그 무렵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옹진군에 사는 어떤 사람이 돈 5000냥을 경성에 사는 전 참판 김중환에게 빼앗긴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이경주라는 인물에 관한 사건이다.

이경주는 본적이 평안도 영유군이고 직업은 의사였다. 당시 그는 황해도 해주에 와서 살면서 유수길(본래는 천민이었으나 재력가였음)의 딸과 결혼해 몇 년을 함께 사는 사이에 딸 하나를 낳았다. 그러자 돈 많은 유수길은 이경주에게 집, 논밭, 재산과 노비들을 많이 나눠 주었다.

그때 해주 지역 군부대의 하급 장교인 한원교라는 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이경주가 상경한 틈을 타 그의 아내를 꾀어내어 간통하고, 유수길을 위협해 이경주에게 준 집과 세간을 모두 빼앗은 다음 그 집에 버젓이 살고 있었다.

이경주가 그 소문을 듣고 경성으로부터 해주의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한원교는 병사들을 시켜서 오히려 이경주를 구타해 내쫓으니, 그는 머리가 깨지고 유혈이 낭자해 눈 뜨고는 차마 못 볼 지경이 됐다.

그러나 이경주는 그곳이 타향이고 외로운 처지라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길이 없어 겨우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다. 이후 그는 상경해 육군 법원에 한원교를 고소해 7~8차례 재판을 했다. 재판 결과 한원교가 면직되기는 했지만, 이경주는 아내와 가산을 되찾지는 못했다. 이유는 한원교가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재판 후 한원교는 이경주의 부인과 함께 해주의 집과 재산을 처분해 경성으로 이사해 버렸다.

그런데 5000냥을 빼앗긴 옹진 군민이나 이경주가 모두 내가 다니던 천주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었다. 이 때문에 내가 이 두 가지 사건을 해결할 대표로 뽑혀 두 사람과 함께 상경해 일에 관여하게 됐다.

먼저 김중환을 찾아갔다. 그의 집에는 귀한 손님들이 방에 가득히 앉아 있었다. 나는 주인과 서로 인사를 나누고, 통성명을 한 뒤 자리를 잡고 앉았다.

김중환이 먼저 물었다.

“무슨 일로 찾아 왔는가?”

내가 대답했다.

“저는 본래 시골에 사는 어리석은 백성이라 세상 규칙이나 법률을 잘 모르므로 문의하러 찾아 왔습니다.”

그가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을 물으러 왔는가?”

다시 내가 대답했다.

“만일 경성에 있는 어떤 고관이 시골 백성의 재산 몇천 냥을 강제로 빼앗아 돌려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법률로 다스릴 수가 있겠습니까?”

김중환은 잠자코 한참 있다가 말했다.

“그것이 나와 관계된 일인가?”

“그렇습니다. 어른께서는 무슨 연고로 옹진 군민의 재산 5000냥을 억지로 뺏고는 갚아 주지 않는 것입니까?”

“내가 지금은 돈이 없어 갚을 수 없으니, 나중에 갚을 계획일세.”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 같은 고대광실에 많은 물건을 풍부히 갖춰 놓고 사시면서 5000냥이 없다고 한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이렇게 서로 묻고 답하면서 시비를 가리고 있었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한 관원이 큰 소리로 나를 꾸짖으며 이렇게 말했다.

“김 참판께서는 연세가 높은 고위 관리이고, 그대는 나이 젊은 시골 백성인데, 어디서 감히 그 같은 예의 없는 말을 하는가?”

나는 웃으며 그에게 물어 보았다.

“댁은 누구시오?”

“내 이름은 정명섭일세.”(현재 그는 한성부 재판소 검찰관으로 재직 중이다.)

나는 다시 말했다.

“댁은 옛 글을 읽지 못했소? 예로부터 지금까지 어진 임금과 훌륭한 재상은 백성을 하늘처럼 알았고, 어리석은 임금과 탐관오리들은 백성을 밥처럼 알았소. 그랬기 때문에 백성이 부유하면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약하면 나라가 약해지는 것이라오. 이처럼 어지러운 시대에 댁들은 국가를 보필하는 신하로서 임금의 거룩한 뜻을 받들지 않고, 이같이 백성을 학대하니 어찌 국가의 앞날이 통탄치 아니하겠소? 하물며 지금 이 방은 재판소가 아니오. 댁이 만일 5000냥을 갖고 그것으로 빚을 갚고자 한다면, 나와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내 말을 들은 정명섭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고, 다시 김중환이 나섰다.

“두 사람이 서로 다툴 것 없네. 내가 며칠 뒤에 5000냥을 갚아줄 테니 그대는 그리 알고 너그러이 용서하게나.”

이렇게 말하며 김중환이 너덧 번이나 애걸하므로 어쩔 수 없이 갚을 날짜를 정하고 물러 나왔다.

한편 그 사이에 이경주가 한원교의 주소를 알아내어 문제 해결을 위해 서로 상의했다.

“한원교는 세력가이므로 법관이 불러도 무슨 핑계를 대고 도망가기 때문에 잡아다가 재판을 받게 할 수 없을 것이오. 그러니 우리가 먼저 가서 한원교와 여자를 함께 잡아 법정으로 끌고 가서 재판을 받도록 합시다.”

그리고 이경주가 앞장서서 동지 몇 사람과 한원교가 사는 집으로 가서 뒤져보았으나, 두 사람은 미리 눈치를 채고 피해 버렸기 때문에 잡지 못하고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 한원교가 도리어 이경주를 한성부에 고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유인즉, 이경주가 자기 집 안마당까지 들어와 늙은 어머니를 구타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한성부에서는 이경주를 잡아다가 현장 조사를 하는 자리에서 증인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내 이름을 대어 나도 역시 붙들려 가게 됐다.

한성부에 도착해 보니 검찰관이 바로 정명섭이었다. 정명섭은 나를 보자 얼굴에 성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속으로 웃으면서 오늘은 틀림없이 그로부터 며칠 전에 김중환의 집에서 다툰 일로 보복을 받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죄 없는 나를 감히 누가 해칠 것이냐 하고 생각하며 앉아있는데, 검찰관이 내게 물었다.

“그대가 이경주와 한원교, 두 사람의 일을 증언할 수 있겠는가?”

나는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가 다시 물었다.

“왜 한원교의 어머니를 때렸는가?”

“그런 일은 없었소. 그런 일은 애초부터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소.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는 말이 있지 않소? 어찌 남의 늙은 어머니를 때릴 수 있다는 말이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남의 집 안마당까지 침입해 들어갔는가?”

“나는 남의 집 안마당에 들어간 일이 없소. 다만 이경주의 집 안마당에는 들어간 일은 있소이다.”

“어째서 그것을 이경주의 집 안마당이라고 하는가?”

“그 집은 이경주의 돈으로 산 집이요, 방 안에 있는 살림살이도 모두 이경주가 예전에 쓰던 것들이요. 노비들도 역시 이경주가 부리던 노비요, 그 아내도 바로 이경주가 사랑하던 아내라오. 그러니 그 집이 이경주의 집이 아니고 누구 집이라는 말이오?”

검찰관은 묵묵히 말이 없었다.

그때 문득 보니 한원교가 내 앞에 서 있기에 급히 그를 불러 말했다.

“한원교! 내 말을 들어보아라. 무릇 군인이란 국가의 막중한 임무를 맡는 사람이다. 국가에 대한 충성과 정의의 마음을 배양해 외적을 토벌하고, 조국 강토를 지키며,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당당한 군인의 직분이다. 그런데 너는 하물며 장교가 돼 선량한 백성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고, 재산을 토색질하며 자기 세력만 믿고 도무지 꺼리는 것이 없구나. 만일 경성에 너 같은 도둑놈만 산다면, 경성놈들만 자식 낳고, 손자 낳고, 집을 보전하고, 생업을 가질 것 아니냐? 그렇다면 저 시골의 약한 백성은 아내와 재산을 모두 경성놈들한테 빼앗겨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냐? 세상에 어찌 백성 없는 나라가 있단 말이냐? 너 같은 경성놈은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그런데 미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찰관이 책상을 치면서 큰 소리로 나를 꾸짖으며 말했다.

“이놈! (이 자는 이렇게 내게 욕했음) 경성놈들, 경성놈들 하는데, 경성이 어떤 분이 사는 곳(이 자는 황제 등 고관들이 사는 곳이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먼저 화부터 냈음)인지나 알고 그런 말을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댁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를 내시오? 내가 말한 것은 한원교를 두고, 너 같은 도둑놈이 경성에 많이 있다면, 오직 경성놈들만 생명을 보전할 것이요, 시골 백성은 모두 죽을 것이라고 한 말이오. 그러니 만일 한원교 같은 놈이라면 당연히 그 욕을 받아야 하겠지만, 그와 같지 않은 사람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소? 댁이 내 말을 잘못 듣고 오해한 것이라오.”

그러자 정명섭이 다시 말했다.

“지금 자네가 하는 말은 잘못한 말을 정당화하려고 그럴듯한 말로 꾸며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대꾸했다.

“그렇지 않소이다. 물론 그럴듯한 말로 잘못한 말을 꾸며댈 수도 있지만 물을 가리켜 불이라 한들 누가 그것을 믿겠소?”

내 말을 들은 검찰관은 더는 대꾸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하인을 시켜 이경주를 감옥에 가두게 한 뒤에, 나를 보고 같이 가두겠다고 소리쳤다. 나는 너무도 화가 나서 외쳤다.

“어째서 나를 가둔다는 말이오? 오늘 내가 여기 온 것은 다만 증인으로 불려온 것이지 피고로 붙들려온 것이 아니라오. 더구나 1000만 가지 조항의 법률이 있다 해도 죄 없는 사람을 잡아 가두라는 법은 없을 것이오. 또 비록 감옥이 수백 수천 칸이 된다고 해도 죄 없는 사람을 가둬 두는 감옥은 없을 것이오. 오늘과 같은 문명시대에 댁이 어찌 감히 사사로이 야만스러운 법률을 적용하려 하시오?”

이렇게 말을 마치고, 나는 당당하게 앞을 향해서 문밖으로 나와 여관으로 돌아왔다. 검찰관도 더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다.

대한제국의 혼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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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에서 이러한 일을 하며 지내고 있을 때 고향집에서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편지가 왔다. 급히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 곧장 행장을 차려 고향으로 떠났다. 마침 계절이 한겨울이라 몹시 추웠고, 온 세상이 흰 눈에 덮이고 하늘에서는 찬바람이 불어 닥쳤다.

독립문 밖을 지나면서 돌이켜 보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친구가 죄도 없이 감옥에 갇혀 풀려나지 못하고, 이 추운 겨울을 차가운 감옥 안에서 고생하며 지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느 때나 돼야 저렇게 악한 정부를 단숨에 부숴버리고 개혁해 정부 내의 문란한 신하 놈들과 도적질하는 놈들을 쓸어버린단 말인가? 언제 우리는 당당한 문명 독립국이 돼 국민의 자유가 확실하게 보장되는 사회를 이룰 수 있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피눈물이 솟아올라 차마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죽장망혜로 혼자 천 리 길을 걸어 고향으로 걸어가는 도중에 마침 말을 타고 역시 고향으로 향하던 이웃 친구 이성룡을 만났다.

이성룡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잘 만났네. 서로 길동무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면 참 좋겠네.”

“한 사람은 말을 타고 가고, 한 사람은 걸어가는데 어떻게 동행이 되겠나?”

“그렇지 않네. 이 말은 경성에서부터 값을 치르고 세를 낸 말일세. 그런데 날씨가 추워서 말을 오래 탈 수가 없네. 자네와 몇 시간마다 번갈아 타고 걸으면 길도 빠르고 지루하지도 않을 걸세. 그러니 사양 말고 어서 타게나.”

서로 길동무가 되어 가다 보니 며칠 뒤에는 연안읍에 이르렀다. 그 지방에서는 그해 날이 가물고 비가 오지 않아 흉년이 들었다. 그때 나는 말을 타고 이성룡은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마침 말을 끌고 가면서 우리와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마부가 전신주를 가리키며 욕하면서 말했다.

“지금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에 전보를 설치해 공중에 있는 전기를 몽땅 거둬다가 전보통 속에 가둬 두었소. 그러니 우리나라의 공중에는 전기가 없게 되니 비가 만들어지지 않아 이렇게 가뭄이 드는 것이라오.”

나는 웃으며 타이르듯 말했다.

“어찌 그럴 리가 있겠소. 당신은 경성에서 오래 살았다면서 어찌 그렇게 무식하오.”

그러자, 그는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말채찍으로 내 머리를 두세 번이나 마구 때리며 욕을 퍼붓는 것이었다.

“네가 어떤 놈이기에 나를 보고 무식한 놈이라고 하는 거야.”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마부가 왜 그러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더구나 그곳은 사람이 지나지 않는 곳이었고, 또 그놈의 행동이 하도 흉악했기 때문에 나는 말 위에 앉아서 내려오지도 않고 또 대꾸도 않은 채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웃기만 했다.

이성룡이 마부를 붙잡고 만류해 다행히 큰 화를 모면하기는 했으나, 내 의관은 이미 온통 엉망진창이 됐다.

이윽고 연안 도심에 이르자, 그곳 친구들이 내 꼴을 보고 놀라 묻기에, 까닭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랬더니 모두 분노해 마부를 법관에게 데려가 징벌하자고 했다. 그러나 내가 친구들을 말리며 말했다.

“이 자는 정신 나간 미친 놈이니, 손댈 것 없이 돌려보내자.”

그러자 친구들도 동의해 마부를 그냥 돌려보내 주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집에 이르러 보니, 아버지 병환은 차츰 차도가 있어 몇 달 뒤에는 완전히 회복됐다.

이후 이경주는 재판관의 억지 법률 적용으로 3년 징역형을 받았다가 1년 뒤에 사면을 받고 풀려 나왔다. 그러자 한원교는 송 모, 박 모라는 두 사람을 거금을 주고 매수해 이경주를 사람이 없는 곳으로 유인한 다음 한원교가 직접 칼을 빼 이경주를 찔러 죽인 후에 달아났다. 참혹하게도 이경주는 이렇게 영세의 원혼이 되고 말았다. 슬프다! 재물과 계집 때문에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니, 마땅히 후세 사람이 경계할 일이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사법부는 범인을 잡으라고 명령을 내려 송과 박 두 사람과 그 계집을 붙잡아 법률로서 처형했다. 그러나 한원교는 끝내 잡지 못했으니 통분할 일이었다.

그 당시 각 지방 관리들은 함부로 학정을 일삼아 백성의 피와 기름을 빨았으니, 관리와 백성은 서로 원수처럼 보고 도둑처럼 대했다. 그러나 천주교인들은 포악한 명령에 항거해 관리들의 토색질을 받지 않았다. 그 때문에 관리들이 교인을 미워하기를 외국의 적과 다름 없이 했다. 그런데 관리들은 항상 자기들이 옳고 우리가 잘못됐다고 하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좋은 일에는 마귀가 많고, 고기 한 마리가 바다를 흐린다더니 바로 그 짝이었다.

그 무렵, 난동을 부리며 떼를 지어 다니는 무리가 천주교인인 것처럼 떠벌리고 다니는 일이 있었다. 그러자 정부 관리들은 고관들에게 이를 보고하고 때는 이때다 하고 천주교인들을 모함하기 시작했다.

이때 황해도에는 교인들의 행패로 인해 행정과 사법을 할 수 없다고 하여, 정부에서 이응익을 조사관으로 파견했다. 그는 해주에 와서 순경과 병사들을 각 고을로 보내 천주교회의 우두머리 되는 이들을 옳고 그르고를 묻지 않고 모조리 잡아버리니 교회 안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그는 나의 아버지도 잡으려고 순경과 병사들을 두세 차례 보냈으나 완강하게 버텨 잡아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몸을 다른 곳으로 피했지만, 관리들의 악행에 비통함과 분노를 못 이긴 채 탄식하며 밤낮을 술로 지내셨다. 그러다가 마음속의 화가 중병이 돼 앓으셨다. 아버지는 몇 달 뒤에 고향집으로 돌아왔으나, 치료해도 효험이 없었다.

한편 교회의 일은 프랑스 선교사가 보호해 준 덕분에 차츰 평온을 되찾게 됐다.

나는 다음 해에 무슨 볼일이 있어 황해도 문화군이라는 곳에서 지내다가 아버지께서 안악읍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내 친구 이창순의 집에 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곧장 친구 집으로 갔더니, 아버지는 이미 고향집으로 돌아가시고 난 후였다.

나는 이창순과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창순이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 자네 아버님이 이곳에서 큰 욕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셨네.”

나는 깜짝 놀라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친구의 대답은 이러했다.

“자네 아버님이 신병을 치료하러 우리 집에 오셨다가 우리 아버지와 함께 안악읍에 있는 청나라 의사 서씨를 찾아갔다네. 진찰을 받고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가 청나라 의사가 무슨 까닭이었는지 자네 아버지의 가슴과 배를 발로 차서 상처를 입혔다네. 그래서 하인들이 의사를 붙들고 때리려 하자, 자네 아버님이 하인들을 말리며 말씀하시기를 ‘오늘 우리가 여기 온 것은 병을 치료하러 온 것이니, 만일 의사를 때리면 옳고 그름과는 상관없이 남의 웃음거리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명예를 생각해 참는 것이 좋겠다’고 해 모두 분함을 참고 돌아왔다네.”

이에 내가 말했다.

“내 아버지께서는 대인의 행동을 지켜서 그렇게 하셨지만, 나는 자식 된 도리로 어찌 참고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당연히 그곳에 가서 잘잘못을 자세히 알아본 다음에 법에 호소해 그같이 행패를 부리는 버릇을 고치도록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랬더니 이창순도 좋다고 해 우리 두 사람은 곧 서씨를 찾아가 그 사실 여부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야만스러운 청국인은 벌떡 일어나더니 칼을 빼 들고 내 머리를 향해 내려치려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급히 일어나, 왼손으로는 내려치려는 그놈의 손을 막고, 오른손으로는 허리춤에 있는 권총을 꺼내 그놈의 가슴을 향해 쏘는 시늉을 하자 그놈은 겁을 집어먹고 주춤거렸다.

이때 이창순은 상황이 위급한 것을 보고 자기 권총을 뽑아 들고 공중을 향해 두 방을 쏘았다. 서씨는 내가 총을 쏜 줄 알고 매우 놀랐고, 나 역시 어찌 된 일인지 몰라 크게 당황했다. 이창순은 급히 달려와 서씨의 칼을 빼앗아 돌에 쳐 두 동강으로 분질렀다. 우리 두 사람은 부러진 칼을 반 동강씩 집어서 서씨의 발아래로 내던지자, 그는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곧 법관에게 가서 전후 사정을 들어 호소했다. 그러나 법관은 외국인의 일이라 재판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서씨가 있는 집으로 왔으나, 고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만류하기에 서씨를 내버려둔 채 나와 이창순은 각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일이 있은 지 5~6일이 지나 밤중에 어떤 놈들인지 7~8인이 이창순의 집에 뛰어들어 그의 부친을 마구 때리고 잡아간 사건이 벌어졌다. 이창순은 바깥방에서 자다가 화적 놈들이 쳐들어 온 줄 알고 권총을 뽑아 들고 뒤쫓아 가자, 그놈들이 이창순을 향해 총을 쏘았다. 이창순도 역시 총을 쏘며 죽기 살기로 돌격하자 놈들은 이창순의 부친을 버리고 도망갔다.

이튿날 알려진 바로는, 서씨가 진남포에 있는 청나라 영사에게 호소해 청국 순사 2명과 한국 순경 2명을 우리 집으로 보내 나를 잡아오라고 지시했는데, 그들이 우리 집으로 가지 않고, 잘못해서 이창순의 집으로 침입했던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을 편지로 받아본 나는 곧 길을 떠나 진남포로 가서 사정을 알아보았다. 그랬더니 청나라 영사는 그 일을 경성에 있는 청나라 공사에게 보고했고, 공사는 한국의 외무부에 사건을 조회할 것이라 했다. 그래서 나는 즉시 경성으로 가서 그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외무부에 청원했다. 그랬더니 다행히 재판이 진남포 재판소에 회부돼 서씨와 함께 공판을 받게 됐다.

그런데 이 재판에서 서씨의 전후 만행이 나타나자 서씨는 그르고 내가 옳다는 것으로 판결이 끝나게 됐다. 뒤에 나는 어떤 청국 사람 소개로 서씨와 만나 서로 사과하고 평화를 유지하게 됐다.

그동안에 나는 홍 신부와 크게 다툰 일이 있었다. 홍 신부는 언제나 교인들을 압제하는 폐단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여러 교인과 상의했다.

“거룩한 교회 안에서 어찌 이 같은 도리가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들이 당연히 경성에 가서 민 주교에게 홍 신부의 잘못을 청원하고, 만일 민 주교가 안 들어주면 당연히 로마 교황에게 가서 건의해서라도 기어이 이러한 폐습은 막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모두들 내 말을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그때 홍 신부가 이 말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며 나를 무수히 치고 때렸다. 나는 분하기는 했으나, 치욕스러움을 참았다.

그랬더니 나중에 홍 신부가 나를 타이르며 말했다.

“내가 잠시 네게 화를 낸 것은 육체적인 감정으로 한 일이다. 내가 회개할 테니 서로 용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나도 역시 좋다고 하며 감사를 표했고, 우리는 지난날의 우정을 되찾아 서로 사이좋게 지내게 됐다.

을사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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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초 일본은 인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킨 다음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후 두 나라가 대포소리를 크게 울리며 싸우고 있었으므로 동양은 큰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됐다. 해가 가고 달이 바뀌어 1905년 을사년이 됐다.

홍 신부는 한탄하면서 내게 말했다. “한국이 장차 위태롭게 되었구나.” “왜 그러합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가 이기면 러시아가 한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게 될 것이요, 일본이 이기면 일본이 한국을 관할하려 들 것이니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

이때 나는 날마다 신문과 잡지와 각국의 역사를 열심히 읽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지나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일들을 예측할 수 있었다.

러일전쟁이 강화조약의 체결로 끝난 후,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으로 건너왔다. 그는 한국 정부를 위협해 이른바 을사5조약을 강제로 맺으니, 3천리 강산과 2000만 인심이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이 불안하게 됐다.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아버지는 울분을 참지 못해 병이 더욱 위중하게 됐다. 나는 아버지와 은밀히 상의했다.

“일본과 러시아가 개전했을 때, 일본의 선전포고문 가운데에는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굳건히 하겠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일본이 그러한 신의를 내팽개치고 야심적인 책략만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일본의 대정치가라는 이토의 정략입니다. 우선 강제로 조약을 맺고, 다음으로 뜻있는 사람들의 모임을 없앤 뒤 강토를 삼키고 오늘의 우리나라를 망치게 하려는 것이 바로 새로운 조약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속히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큰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속수무책으로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의거를 일으켜 이토의 정책에 반대한들 우리와 일본의 힘에 큰 차이가 있으니, 부질없이 죽음만 당할 뿐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요즈음 들리는 말에 따르면, 청나라 산동과 상해 등지에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하니 우리 집안도 모두 그곳으로 옮겨가 자리를 잡고 살다가 앞뒤의 방책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가 먼저 그곳에 가서 살펴본 다음 돌아올 것이니, 아버님께서는 그동안 은밀히 짐을 꾸린 뒤 식구들을 데리고 진남포로 가서 기다리세요. 해외에 가서 사는 일은 제가 돌아오는 날 다시 의논해 결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부자간의 계획은 정해졌다.

나는 곧 길을 떠나 산동 등 여러 곳을 두루 다녀본 뒤 상해에 이르러 민영익을 찾아갔다. 그런데 문지기 하인이 민 대감은 한국인을 만나지 않는다며 문을 닫고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날은 그냥 돌아왔다. 다음날 두세 번 더 찾았으나 역시 전일과 같이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나는 민영익이 듣건 말건 문앞에서 그를 크게 꾸짖어 말했다.

“그대는 한국인인데 한국인을 만나지 않는다면, 어느 나라 사람을 만나려는 것인가? 더욱이 그대는 한국에서 여러 대를 국록을 먹던 신하가 아니던가? 그런데 이같이 나라가 어려울 때 전혀 동포를 사랑하는 마음 없이 베개를 높이 하고 편안히 누워서 조국의 흥망을 잊어버리고 있으니 세상에 어찌 이 같은 도리가 있을 수 있는가? 오늘날 나라가 위급해진 것은 그 죄가 전적으로 그대들과 같은 고관들에게 있는 것이고, 민족에게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얼굴이 부끄러워서 만나지 않는 것인가?”

한참 동안 욕을 퍼붓고 돌아와 다시는 그 자를 더 찾지 않았다.

그 뒤에 서상근이라는 사람을 찾아가 이야기했다. “지금 한국 형세의 위태롭기가 오늘내일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무슨 좋은 계책이 없겠소?”

그러자 서상근이 대답했다.

“한국에 관한 일을 내게 말하지 마시오. 나는 일개 장사치로 수십만 원이 넘는 돈을 정부의 고관에게 빼앗기고, 이렇게 몸을 피해 여기 와 있는 것이오. 더구나 국가의 정치가 우리 같은 백성들에게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소. 그대의 말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만일 백성이 없다면 나라가 어디 있겠소? 더구나 국가란 몇몇 고관들의 것이 아니라 당당한 2000만 민족의 것입니다. 국민이 국민의 의무를 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민권과 자유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은 민족의 세계인데, 어째서 홀로 한국 민족만이 남의 밥이 돼 앉아서 멸망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러자 서상근이 대답했다. “댁의 말이 옳기는 하나, 나는 다만 장사꾼으로서 입에 풀칠만 하면 그만이니 다시는 정치 얘길랑 하지 마오.” 두세 번 설득해 보았으나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야말로 소귀에 경 읽기와 마찬가지였다.

이때 나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크게 탄식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의 생각들이 모두 이러하니, 나라의 앞날을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겠구나.”

여관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에 분통이 터지는 마음을 참을 길이 없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상해의 천주교회에 갔다. 한참 동안 기도한 다음 나오는데, 마침 신부 한 분이 내 앞을 지나가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어쩐 일이냐고 내 손을 잡았다.

그분은 바로 곽 신부였다. 곽 신부는 프랑스 사람으로 여러 해 동안 황해도 지방에서 전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와 절친한 사이였다. 그는 홍콩에서 상해를 거쳐 한국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정말 꿈만 같은 만남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같이 여관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가 무슨 일로 여기 왜 왔느냐?” 곽 신부가 재차 물었다. “신부님께서는 지금 한국의 비참한 상황을 듣지 못했습니까?” “나도 이미 오래 전에 들었지.” “현재의 상황이 그러하니 어쩔 도리가 없이 가족들을 외국으로 옮겨 살도록 하려고 합니다. 외국에 살면서 이곳 동포들과 연락해 주변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우리나라의 억울한 사정을 설명해 공감을 얻으려 합니다. 그러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단번에 의거를 일으키면 목적을 이룰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랬더니 곽 신부는 아무 말 없이 한참 있다가 대답했다. “나는 종교인이고 전도사라 정치에 전혀 상관이 없다마는 지금 네 말을 들으니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구나. 그래서 네게 한 가지 방법을 일러 줄 테니 이치에 맞거든 그대로 시행하고, 그렇지 못하거든 네 뜻대로 하도록 해라.”

“그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네가 하는 말도 일리는 있다만, 그것은 다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이다. 가족을 외국으로 옮긴다는 것은 잘못된 계획이다. 만약 너희 나라 2000만 민족이 모두 너같이 행동한다면 나라 안은 텅 빌 것이고, 그것은 바로 곧 원수가 바라는 바일 것이다. 우리 프랑스가 독일과 싸울 때 두 지역을 비워 준 것을 너도 알 것이다. 지금껏 40년 동안 그 땅을 되찾을 기회가 두어 번이나 있었지만 그곳에 있던 뜻있는 사람들이 모두 외국으로 피해 갔기 때문에 그 목적을 달성치 못했다. 그러니 그것을 본보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또한 해외에 있는 동포들로 말하자면, 그들은 국내 동포에 비해 나라 사상의 마음이 곱절은 더하니 서로 모의하지 않아도 같이 일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주변의 여러 나라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들은 네가 하는 말을 들으면 모두가 가엾고 안 됐다고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한국을 위해 군사를 동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각국은 이미 한국의 참상을 알고 있으나, 각기 제 나라 일에 바빠 전혀 남의 나라를 돌봐 줄 겨를이 없단다. 그러나 만일 훗날 때가 돼 운이 좋으면 혹시라도 일본의 불법행위를 성토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정이 이러하니, 오늘 네가 한 설명은 별로 효과가 없을 것 같다. 옛말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너는 속히 본국으로 돌아가 우선 네가 해야 할 다음과 같은 일을 행하도록 해라. 첫째는 교육의 발달이요. 둘째는 사회의 확장이요. 셋째는 민심의 단합이요. 넷째는 실력의 양성이다. 이 네 가지를 확실히 성취시키기만 하면 2000만의 마음의 힘이 반석과 같이 든든해져 비록 1000만 문의 대포를 갖고도 능히 공격해 깨뜨릴 수가 없을 것이다. 사나이 한 사람의 마음도 빼앗기 어렵거늘, 어떻게 2000만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하면 강토를 빼앗겼다는 것도 형식적인 것일 뿐이요, 조약을 강제로 맺었다는 것도 종이 위에 적힌 빈 문서일 뿐이므로 침략자의 획책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는 날에는 거침없이 사업을 이룰 수 있고, 목적도 반드시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말한 이 방책은 세계 모든 나라에 두루 통하는 원칙이므로 네게 권유하는 것이다. 잘 헤아려 보도록 해라.”

그 말을 다 들은 후에 나는 대답했다.

“신부님 말씀이 옳습니다.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곧 행장을 꾸려 1905년 12월 상해로부터 기선을 타고 진남포로 돌아왔다. 도착하자마자 집안소식을 알아보았다. 그동안에 가족들은 이미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로 왔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병세가 더욱 악화돼 세상을 뜨셨기 때문에 가족들은 아버지의 영구를 모시고 청계동으로 다시 돌아가 장례를 치렀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통곡하며 몇 번이나 까무러쳤다.

다음날 길을 떠나 청계동에 이르러 상청(喪廳)을 차려 놓고 며칠간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해 상례를 마치고 나서 가족들과 함께 그해 겨울을 청계동에서 지냈다.

그때 나는 술을 끊기로 맹세했고, 그 기한을 대한이 독립하는 날까지로 정했다.  

학교 설립, 인재 양성 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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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해(1906년) 봄 3월, 나는 가족들을 이끌고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로 이사해 살게 됐다. 그곳에 양옥 한 채를 짓고 살림을 안정시킨 뒤 나는 집의 재산을 정리해 두 곳에 학교를 세웠다. 하나는 삼흥학교요, 또 하나는 돈의학교라 했는데 나는 학교 일을 맡아 똑똑하고 재능이 뛰어난 청년들을 교육했다.

그 다음해(1907년) 봄, 어떤 분이 나를 찾아 왔다. 그분의 기상을 살펴보니 위풍이 당당해 도인과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통성명을 해 보니 그분은 김 진사였는데,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본래 자네의 부친과 친한 사람이어서 특별히 찾아온 것일세.”

내가 여쭤보았다.

“선생님께서 멀리서 이렇게 찾아주셨으니, 좋은 의견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분이 말했다.

“그대와 같이 기개가 높은 젊은이가 지금 이렇게 나라의 정세가 위태롭게 된 때에 어찌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려고 하는가?”

내가 여쭤보았다.

“무슨 좋은 계책이라도 있습니까?”

그분 말씀이 “지금 백두산 뒤쪽의 서북 간도와 러시아 영토인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 한국인 100여만 명이 살고 있다네. 그곳은 물산이 풍부해 군대를 한 번 일으켜 볼 만한 곳이야. 자네는 재능이 있으니 그곳에 가면 뒷날 필히 큰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일세.”

나는 말씀드렸다.

“마땅히 가르쳐 주신 것을 정성껏 따르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서로 작별인사를 한 다음, 그분은 돌아갔다.

그 무렵 나는 돈을 벌어볼 계획으로 평양에 가서 석탄광 채굴사업을 시작했었다. 그러나 일본인의 방해로 아까운 돈을 수천 원만 손해 보았다.

또한 그때 한국에서는 일반 한국인들이 일본으로부터 빌린 1300만 원 상당의 차관을 갚으려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이때 평양에서의 국채보상회 발기인 대회에 참석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일본 경찰 1명이 조사를 나와서 내게 물었다.

“회원은 몇 명이며, 재물은 얼마나 모았소?”

내가 대답했다. “회원은 2000만 명이요. 재물은 1300만 원을 모은 다음에 국채를 모두 상환하려 하오.” 그러자 그 일본인이 욕지거리를 하며 말했다.

“한국인같이 하등인간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내가 말했다.

“빚을 진 사람은 빚을 갚으면 되고, 돈을 준 사람은 돈을 받으면 그만인데, 무슨 이유로 그렇게 질투하고 욕질을 하는 것이냐?”

그러자 그 일본인은 화를 내면서 나를 때리며 달려들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이같이 이유 없이 욕을 당한다면, 대한의 2000만 민족이 장차 큰 압제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찌 나라의 수치를 감수하고만 있을 수 있겠느냐?”

이어 나도 분노가 폭발해 서로 무수히 치고받았다, 마침 곁에 있던 사람들이 애써 뜯어말려서 싸움을 끝내고 헤어져 돌아왔다.

1907년 바로 이 해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에 와서 강제로 7조약을 체결하고 광무황제를 폐했으며, 대한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때 한국에서는 2000만 국민이 일제히 분발해 곳곳에서 의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바야흐로 삼천리 강산에 포성이 크게 진동했다.

그때 나는 긴급히 행장을 꾸려 가족들과 이별하고 북간도로 향했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그곳에도 일본군이 방금 와서 주둔하고 있어 도무지 발붙일 곳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서너 달 동안 그곳의 여러 지역을 시찰했다.

그러다가 다시 북간도를 떠나 러시아 영토로 들어가 엔치야라는 곳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그 항구 도시에는 한국인이 4000~5000명이나 살고 있었다. 그곳에는 한인학교가 몇 개 있었고, 청년회도 있었다. 당시 나는 청년회에 가담해 임시 감찰에 뽑혔다.

그곳에는 이범윤이라는 분이 살고 있었다. 그는 러일전쟁 전에는 북간도 관리사에 임명돼 청나라 군대와 많은 전투를 치렀으며,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러시아군과 힘을 합해 서로 도왔다. 그러다가 러시아 장병들이 일본군에 패전해 귀환할 때 그들과 함께 러시아 영토로 들어와서 그곳에서 살고 있는 분이었다.

나는 그분을 찾아뵙고 말했다.

“각하께서는 러일전쟁 때 러시아를 도와 일본을 공격했는데, 그것은 하늘의 뜻을 어긴 일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때 일본은 동양의 대의명분을 내걸었습니다. 즉, 동양평화와 대한의 독립을 굳건히 할 의지를 갖고 이를 세계에 선언한 뒤 러시아를 공격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뜻에 순응한 것이었기에 일본은 다행히도 크게 승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지금 각하께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본을 공격한다면, 그것 또한 하늘의 뜻에 순응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현재 이토는 그 승리에 자만해 터무니없이 자기만 잘났다고 우쭐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교만하고 극악해져 임금을 속이고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며, 이웃 나라와의 의리를 끊고 세계의 신의를 저버리고 있습니다. 이는 하늘을 반역하는 것이라 오래 갈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각하께서는 때를 놓치지 마시고 속히 큰 일을 일으키셨으면 합니다.”

그랬더니 이범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인즉 옳다마는 자금이나 무기를 마련할 길이 전혀 없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지 않은가?”

내가 말했다.

“조국의 흥망이 아침이냐 저녁이냐 하는 위급한 지경인데, 팔짱을 끼고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자금과 무기가 어디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다는 말입니까? 하늘에 순응하고, 사람의 뜻을 따르기만 한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이제 각하께서 의거를 일으키기로 결심만 하신다면 제가 비록 재주는 없지만 만분의 일의 힘이라도 되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범윤은 머뭇거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곳에는 훌륭한 인물 두 분이 또 있었다. 하나는 엄인섭이요, 또 한 사람은 김기룡이었다. 두 사람은 담략과 의협심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 나는 두 사람과 의형제를 맺었다. 엄인섭이 큰형이 되고 내가 그 다음, 김기룡이 셋째가 됐다. 우리 세 사람은 의리가 깊고 정이 두터웠다. 우리는 모여서 올바른 일을 할 것을 계획하고, 여러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많은 한국인을 만나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비유를 하나 들겠습니다. 어느 집안에서 한 사람이 부모와 동생들과 작별하고 떠나 다른 곳에서 10여 년을 살았다고 합시다. 그동안 그는 재산이 넉넉해지고, 처와 자식들이 많아졌습니다. 벗들과 서로 친하게 지내며 걱정 없이 편안히 살게도 됐습니다. 그러자 그는 고향집 부모형제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고향집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이 와서 급히 말합니다. ‘최근에 집에 큰 화가 생겼어요. 다른 곳에서 강도가 들어와서 부모를 내쫓고 집을 빼앗았으며, 형제들을 죽이고 재산을 약탈했습니다.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어요? 속히 돌아가서 위급한 것을 구해 주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그 사람 대답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시다.

“이제 내가 여기서 살며 걱정 없이 편안한데 고향집 부모형제가 나와 무슨 상관이냐?”

그렇다면 그를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아니면 짐승이라 하겠습니까?

곁에서 보는 사람들도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저 사람은 고향의 부모형제도 모르는 사람이니 친구들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는 친구들의 배척을 받아 그들과의 의리도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 가족도 멀어지고, 친구도 끊어진 사람이 이 세상을 무슨 낯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동포들이여! 동포들이여! 내 말을 자세히 들어보시오.

한국을 침략해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다음, 정권을 손아귀에 넣고 저지른 만행을 보십시오. 황제를 폐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하고 철도·광산·산림·하천·늪을 모조리 빼앗았습니다. 관청으로 쓰던 집과 민간의 큰 집들은 병참이라는 핑계로 모조리 빼앗아 일본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름진 전답과 심지어는 옛 분묘들에도 군용지라는 푯말을 꽂고 무덤을 파헤쳤습니다. 그들의 재앙이 우리의 백골에까지 이르렀으니, 국민 된 사람으로 또한 자손 된 사람으로 어느 누가 분함을 참고 욕됨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2000만 민족이 일제히 분발해 삼천리 강산에 의병들이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애통하게도 저 강도 같은 일본은 도리어 우리를 폭도라고 부르며, 군사를 풀어 토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일본의 참혹한 살육이 자행돼 두 해 동안에 해를 입은 한국인이 수십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남의 강토를 빼앗고 사람들을 죽이는 자가 폭도입니까? 제 나라를 지키고 외적을 막는 사람이 폭도입니까? 이야말로 적반하장이 아닙니까? 한국에 대한 정략이 이같이 포악해진 근본을 논하자면, 그것은 이른바 일본의 대정치가라는 늙은 도둑 이토 히로부미의 폭행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이토는 마치 한민족 2000만이 일본의 보호를 받고자 원하고 있는 것처럼 꾸며대면서 지금 우리가 태평무사하며 평화롭게 날마다 발전하는 것처럼 날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위로는 천황을 속이고, 밖으로는 열강들의 눈과 귀를 가려서 자기 멋대로 농간을 부리며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이 어찌 통분할 일이 아닙니까?

우리 한민족이 만일 이 도둑놈의 목을 베지 않는다면 한국은 필히 없어지고야 말 것이며, 동양도 앞으로 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조국을 잊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선조의 백골을 잊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친척과 일가들을 잊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만일 여러분들이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이같이 위급해져 존망이 위태롭게 됐을 때 분발하고 크게 깨달아야만 합니다.

뿌리 없는 나무가 어찌 살 것이며, 나라 없는 백성이 어디에서 편히 살 것입니까? 만일 여러분이 외국에서 산다고 해 조국에 무관심하고 전혀 돌보지 않는 것을 러시아 사람들이 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들은 필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조국도 모르고, 동족도 사랑하지 않으니, 어찌 외국을 도울 리 있으며 다른 종족을 사랑할 리가 있겠는가? 이같이 무익한 인종은 쓸모가 없다.”

이러한 여론이 널리 퍼지면 여러분들은 머지않아 러시아 국경 밖으로 쫓겨나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한민족은 이런 위급한 때를 당해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저는 이리저리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한 번 의거를 일으켜서 적을 공격하는 도리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유인즉, 지금 한국 안의 13도 강산에는 의병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만일 의병이 패하는 날에는 애통하게도 저 간사한 도둑놈들이 시비를 가리지 않고 폭도란 이름을 붙여서 사람마다 죽일 것이요, 집집마다 불을 지를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한민족이란 사람들이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얼굴을 들고 나설 수 있겠습니까?

사정이 이러하니 오늘,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국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총을 메고 칼을 차고 일제히 의거를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기고 지고, 잘 싸우고 못 싸우고를 돌아보지 말고 통쾌하게 한바탕의 전투를 벌여 천하 후세에 부끄러운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이같이 힘든 전투를 할 경우, 세계 열강의 여론도 없지 않을 것이므로 독립할 희망도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일본은 불과 5년 이내에 반드시 러시아·청국·미국 등 3국과 더불어 전쟁을 시작하게 될 것이니, 그때는 한국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때 만일 한국인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면, 설사 일본이 진다 해도 한국은 다시 다른 도둑의 손아귀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의병을 일으켜 계속해서 끊이지 않고 싸워 좋은 기회를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 스스로 강한 힘으로 국권을 회복해야만 건전한 독립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이른바 ‘스스로 할 수 없는 자는 망할 것이요, 스스로 할 수 있는 자는 흥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자,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습니까? 분발해 힘을 내는 것이 옳습니까? 개개인이 모두가 결심하고 각성하며 깊이 생각해 용기 있게 전진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이렇게 설명을 하며 각 지방을 두루 돌았는데, 설명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혹은 자원해서 출전하고, 혹은 무기를 내놓았고, 혹은 자금을 내놓기도 해 그것으로 의거의 기초를 마련하기에 충분했다.

의병 활동

편집

그때 김두성과 이범윤 등도 모두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들은 이미 총독과 대장으로 피임됐고, 나는 참모중장의 직책으로 피선됐다.

나와 의병들은 무기 등을 비밀리에 수송해 두만강 근처에 모은 다음, 그곳에서 큰 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당시 나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발언했다.

“지금 우리의 병력은 200~300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므로 적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병법에 이르기를 ‘아무리 바쁜 중이라도 반드시 만전의 대책을 세운 다음에야 큰 일을 꾀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단 한 번의 의거로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첫 번에 이루지 못하면 두 번, 세 번, 열 번을 해야 하며 백 번 꺾여도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 대에 목적을 못 이루면 아들, 손자 대에 가서라도 반드시 대한국의 독립을 회복한 다음에야 그만둬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앞날을 대비하고, 뒷날을 준비하면서 꾸준히 앞으로 나가고 뒤로 물러나고, 급히 나가기도 하고 천천히도 나갑시다. 우리 한민족이 이렇게 모든 것을 구비하는 한편, 여러 가지 실업에도 힘쓰며 실력을 양성하면 반드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합니까?”

그러나 내 말을 들은 이들의 다수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왜냐하면 그곳의 분위기는 첫째, 권력이 있거나 돈 있는 사람 둘째, 주먹 센 사람 셋째, 관직이 높은 사람 넷째, 나이 많은 사람을 높이 여기는데 나는 이 네 가지 조건 가운데 하나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불쾌해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이미 내친걸음이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가 여러 장교와 함께 부대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전투에 나선 때는 1908년 6월이었다. 우리는 낮에는 엎드려 숨어 있다가 밤길을 걸어 함경북도에 이르렀다. 그동안 우리는 일본 군대와 몇 차례 충돌해 서로 간에 사상자가 생겼으며, 포로를 잡기도 했다.

나는 포로로 잡은 일본 군인과 장사꾼들을 불러다 물어보았다.

“그대들은 모두 일본국 신민들이다. 그런데 왜 천황의 거룩한 뜻을 받들지 않는가? 러일전쟁을 시작할 때 선언서에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독립을 굳건히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오늘날 이렇게 침략하고 약탈하려고 아우성이니 어찌 이것을 평화와 독립이라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은 역적이나 강도가 하는 짓이 아니냐?”

일본 포로들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우리들이 이곳에 온 것은 본심이 아니요, 부득이한 사정으로 온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만리타향 전쟁터에서 끔찍하게도 주인 없는 원혼들이 돼 버리면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에 아니라, 오로지 이토 히로부미의 잘못 때문입니다. 이토는 천황의 거룩한 뜻을 받들지 않고, 제 마음대로 권세를 주물러서 일본과 한국 두 나라 사이에 귀중한 생명을 무수히 죽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어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이들은 말을 끝내고 계속 통곡했다.

내가 말했다.

“내가 그대들의 하는 말을 들으니 과연 충성스럽고 의로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대들을 살려 보내 줄 테니 돌아가거든 그런 난신적자를 쓸어 버려라. 만일 또 그 같은 간악하고 음흉한 무리들이 이유 없이 전쟁을 일으켜 동족을 괴롭히고 이웃 나라를 침해하는 여론을 조성하거든 그 자를 쫓아가 제거해 버려라. 그렇게 하면 그런 자가 10명이 되기 전에 동양평화가 이뤄질 것이다. 너희들은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그들이 기뻐 날뛰며 그렇게 하겠다고 하기에 곧 풀어주었다.

그 후 장교들이 불평하며 내게 말했다.

“어째서 포로로 잡은 적들을 놓아 주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현재 만국 공법에 포로가 된 적병을 죽이라는 법은 없다. 어느 곳에 가뒀다가 뒷날 배상을 받고 돌려보내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말하는 것이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의로운 말이라 놓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여럿이 말했다.

“적들은 우리 의병 포로들을 잡으면 모조리 참혹하게 죽이고 있습니다. 또 우리들도 적을 죽일 목적으로 이곳에 와서 풍찬노숙하고 있소이다. 그런데 그렇게 애써 생포한 놈들을 몽땅 놓아 보낸다면 우리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나는 대답해주었다.

“그렇지 않다. 절대 그렇지 않다. 적들이 그같이 폭행을 자행하는 것은 하느님과 사람을 다 함께 분노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마저 저들과 같이 야만적인 행동을 해야 하는가? 또한 그대들은 일본의 4000만 인구를 모두 죽인 다음에 국권을 회복할 계획인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길 수 있다.”

이렇게 간곡하게 타일렀다.

그러나 논의가 들끓으며 여러 사람이 복종하지 않았다. 장교들 중에는 부대를 이끌고 멀리 가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 후 어느 날, 일본 병사들이 우리를 습격했다. 충돌한 지 4~5시간이 지나는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 사이 날은 저물고 폭우가 쏟아져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워졌다. 장병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얼마나 죽고 살았는지조차 헤아리기 어려웠다. 사태가 어쩔 도리가 없어 나는 수십 명과 함께 숲속에서 밤을 지냈다.

이튿날 60~70명이 서로 만나 그동안의 상황을 보니, 부대가 각기 흩어져 버린 것을 알 수 있었다. 병사들은 이틀이나 먹지 못해 모두 춥고 굶주린 기색이었고, 제각기 살려는 생각뿐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병사들은 복종하려 하지 않았고, 기율도 지키지 않게 돼 오합지졸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흩어진 무리들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마침 적 복병들의 또 한 번의 공격을 받아 남은 사람들마저 흩어져 다시는 모으기가 어려워졌다.

풍찬노숙과 기아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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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산 위에 홀로 앉아 나를 비웃으며 내 자신에게 말했다.

“어리석도다. 나 자신이여! 저런 무리들을 데리고 무슨 일을 꾀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랴.”

나는 다시 분발해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 사방을 수색해보았다. 다행히 세 명을 만나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를 서로 의논했다. 그런데 세 사람의 의견이 모두 달랐다. 하나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살아야 한다 하고, 하나는 자살하고 싶다 하고, 또 하나는 차라리 일본군의 포로가 되겠다고 했다.

나는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문득 시 한 수를 동지들에게 읊어 주었다.

사나이 뜻을 품고 나라 밖에 나왔다가 큰일을 못 이루니 몸 두기 어려워라. 바라건대 동포들아, 죽기를 맹서하고 세상에 의리 없는 귀신은 되지 말자.

나는 시를 다 읊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대들은 모두 뜻대로 하라. 나는 산 아래로 내려가서 일본군과 한바탕 장쾌하게 싸우겠다. 대한국 2000만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된 의무를 다한 다음에 여한이 없이 죽을 것이다.”

그리고 총을 갖고 적진을 바라보며 가노라니, 그중의 한 사람이 뒤따라와 붙들고 통곡하면서 말했다.

“장군님의 의견은 큰 잘못입니다. 장군은 다만 한 개인의 의무만 생각하고, 수많은 생명과 훗날의 큰일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까? 지금의 상황으로는 비록 죽는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만금과 같이 소중한 몸을 어찌 초개같이 버리려고 하십니까? 지금 당장 강동(러시아 영토 내 지명)으로 다시 건너가셔야 합니다. 그 후 좋은 기회를 기다려서 다시 큰일을 도모하는 것이 사리에 맞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찌 깊이 헤아리지 않는 것입니까?”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생각을 바꿨다. 이렇게 하여 네 사람이 동행해 길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도중에 다시 3~4명을 더 만나 함께 길을 걸었다.

그런데 그날 밤 장맛비가 그치지 않고 퍼부어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게 돼 또다시 길을 잃고 서로 흩어져 나와 두 사람만이 동행했다. 그러나 세 사람 모두 그곳의 산천과 도로 등 지리를 전혀 알지 못했다.

이같이 헤맨 지 4~5일이 지나는 동안 한 끼도 못 먹고, 신발조차 신지 못해 춥고 배고픈 그 고생은 견디기 힘들었다. 우리는 풀뿌리를 캐어 먹고, 담요를 찢어 발을 싸맸다. 그렇게 서로 위로하고 보호하면서 가노라니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두 사람에게 당부했다.

“내가 먼저 가서 밥도 얻고 길도 알아 올 것이오. 두 사람은 숲 속에 숨어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오.”

혼자서 인가를 찾아 내려갔더니, 그 집은 일본군의 파출소였다. 마침 일본 병사들이 횃불을 밝혀 들고 문밖으로 나왔다. 나는 그것을 보고 피해 산 속으로 돌아와 두 사람과 의논한 후 다시 달아났다.

그때 나는 기력이 다하고 정신이 어지러워 땅에 쓰러졌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나는 하늘에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죽이려면 빨리 죽게 해주시고, 살리려면 빨리 살게 해주소서.” 기도를 마치고 나서 냇물을 찾아 배가 부르도록 물을 마셨다. 그리고 나무 아래 누워 밤을 지냈다.

이튿날 동지 두 사람은 너무도 괴로운 나머지 탄식을 그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타일렀다.

“너무 걱정들 마시오.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린 것인데 근심해서 무엇하리오? 사람은 극심한 곤란을 겪은 다음에야 반드시 남다른 업적을 이룰 수 있는 것이고, 죽음의 땅에 빠진 다음에야 살아나는 것이라오. 이렇게 낙심한다고 무슨 이득이 있겠소? 하늘의 뜻에 맡기고 기다려봅시다.”

그리고 그날 세 사람은 대낮에도 인가를 찾아 헤맸다. 다행히도 산간벽촌에서 인가 한 채를 찾아냈다. 주인을 불러 밥을 구걸했더니 주인이 조밥 한 사발을 주면서 말했다.

“머뭇거리지 말고 어서 떠나시오. 빨리 가시오. 어제 아랫마을에 일본군이 왔었소. 그들은 죄 없는 양민을 다섯 사람이나 묶어 놓고 의병들에게 밥을 주었다는 구실을 붙여 그 자리에서 쏘아 죽이고 갔다오. 여기도 때때로 와서 뒤지니 나를 원망치 말고 어서들 가시오.”

우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밥을 받아 산으로 올라왔다. 세 사람이 조밥을 똑같이 나눠 먹었다.

우리는 다시 산을 넘고 내를 건너 방향도 모르고 걸었다. 언제나 낮에는 엎드려 있다가 밤길을 걸었다. 장맛비가 그치지 않아 힘이 들었다. 며칠 뒤 어느 날 밤이었다. 어느 집 문을 두드리며 주인을 불렀더니 주인이 나와 내게 말했다.

“너는 틀림없이 러시아에 입적한 자일 것이니, 차라리 일본 군대에 묶어 보내야겠다.” 그리고는 몽둥이로 때리며 같은 패거리를 불러 나를 묶으려 했다. 나는 형세가 위급해 몸을 피해 도망쳤다. 그러다 보니 좁은 길목을 지나게 됐는데, 그곳은 일본 병사가 파수를 보고 있었다. 캄캄한 가운데 지척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맞부딪치자, 일본 병사가 나를 향해 총을 서너 발 쏘았으나 다행히 맞지 않았다.

나는 급히 동료 두 사람과 함께 산 속으로 피해 들어가 다시는 큰길로 나가지 못하고, 산길로만 다녔다. 이후 4~5일 동안 다시 전과 같이 밥을 얻어먹지 못하니, 춥고 배고프기가 전보다 더 심했다. 그래서 두 사람에게 이렇게 권했다.

“두 형은 내 말을 믿고 들으시오. 세상 사람들이 만일 천지간의 큰 임금이요, 큰 아버지인 천주님을 믿고 섬기지 않는다면 금수만도 못한 것이오. 더구나 지금 우리는 죽을 처지를 면하기가 어렵게 되었소. 그러니 빨리 천주 예수의 진리를 믿어 영혼을 구제받아 영생을 얻는 것이 어떻겠소?”

그리고 나는 천주가 만물을 창조하신 도리와, 지극히 공평하고 지극히 의롭고 선악을 상벌하는 도리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내려와서 속죄하는 도리를 하나하나 설명했다. 두 사람은 내 말을 들은 뒤 천주를 믿겠다고 했다. 나는 곧 교회의 규칙대로 대리하여 세례를 주었다.

의례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인가를 찾았다. 다행히 깊은 산 외진 곳에 초가집 한 채를 찾아 문을 두드려 주인을 불렀다. 잠시 후 노인 한 분이 나와 우리를 방 안으로 맞아들였다. 인사를 마치고 밥을 달라고 요청했다. 우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분은 곧 어린아이를 시켜서 음식을 가득 차린 상을 주었다.

염치 불구하고 한판 배부르게 먹은 뒤 정신을 차리고 돌이켜 생각해 보니 무려 12일 동안 겨우 두 끼 밥을 먹고 목숨을 부지해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우리는 집주인 노인에게 크게 감사드리고, 그동안 겪은 고생을 자세히 설명해 드렸더니 노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렇게 나라가 위급한 때를 만나 그 같은 곤란을 겪는 것은 국민의 의무라고 할 것이오. 흥겨움이 다하면 슬픔이 오고, 고생이 끝나면 즐거움이 온다는 말이 있지 않소.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런데 지금 일본 병사들이 곳곳마다 뒤지고 있으니 길을 가기가 참으로 어려울 것이오. 그러니 꼭 내가 이르는 대로 따르시오.”

노인은 어디로 해서 어디로 가면 지름길로 갈 수 있어 쉬울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두만강이 멀지 않으니 속히 건너 돌아가서 뒷날 좋은 기회를 이용해 큰일을 도모하라고 충고해 주었다.

나는 노인의 성명을 물었으나 노인은 “깊이 물을 것 없소” 하고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노인에게 깊이 감사하고 작별한 뒤, 그의 지시대로 따라서 며칠 뒤에 세 사람 모두 무사히 두만강을 건넜다. 그제야 겨우 마음을 놓고 어떤 마을의 어느 집에 이르러 며칠 동안 편안히 쉴 수 있었다. 그곳에서 비로소 옷을 벗어 살펴보니 거의 다 썩어 몸을 가리기 어려운 지경이었고, 이가 득실거려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전투에 나선 이후로부터 날짜를 헤아려보니 벌써 한 달 반이 지났다. 그동안 집 안에서 자 본 적이 없고 언제나 야외에서 밤을 지냈으며, 장맛비가 쉬지 않고 퍼부었으니 그 갖가지 고초는 글로 다 적을 수가 없다.

이토 거사 계획

편집

나는 러시아 영토인 엔치야에 도착했다. 친구들을 만났으나 그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피골이 상접해 전혀 옛 모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하늘이 돕지 않았다면 도저히 살아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십여 일 묵으며 치료를 받은 후 블라디보스토크에 갔다. 그곳에서는 동포들이 환영회를 마련하고 나를 불렀으나 나는 극구 사양하면서 말했다.

“패전한 장수가 무슨 면목으로 여러분들의 환영을 받을 수가 있겠소.”

그러나 여러 사람이 이렇게 말하면서 나를 환영해 주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전쟁터에서 항상 있는 일인데 무엇이 부끄럽소? 더구나 그같이 위험한 곳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왔으니 어찌 환영해야 할 일이 아니겠소?”

얼마 후 다시 그곳을 떠나 하바로프스크 쪽으로 향했다. 기선을 타고 흑룡강 상류 수천여 리를 둘러보았다. 한인 저명인사의 집을 방문한 다음, 다시 연해주의 수찬(현재 파르티잔스크)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혹은 교육에 힘쓰기도 하고, 혹은 단체를 조직하기도 하면서 여러 곳을 두루 다녔다.

어느 날 산골짜기 아무도 없는 곳을 지나갈 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6~7명의 흉악한 놈이 뛰쳐나와 나를 묶으며 소리쳤다.

“의병대장을 잡았다.”

그때 나와 동행하던 몇 사람은 도망가고 말았다.

그들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어째서 정부에서 엄금하는 의병 모집을 감히 하는 것이냐.”

나는 대답했다.

“현재 소위 우리의 대한 정부가 겉으로는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이토라는 자의 개인 정부다. 그러므로 한민족이 정부의 명령에 복종한다는 것은 실상은 이토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놈들은 나를 두말할 것 없이 때려 죽여야 한다고 말하고, 수건으로 내 목덜미를 묶어 눈 바닥 위에 쓰러뜨리고 무수히 두들겨 팼다.

나는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네놈들이 만일 여기서 나를 죽이면 너희는 무사할 것 같으냐? 조금 전에 나와 동행한 두 사람이 도망해 갔으니, 바로 우리 동지들에게 알렸을 것이다. 그들이 나중에라도 네놈들을 반드시 찾아내 모조리 다 죽일 것이니 알아서들 해라.”

내 말을 듣고 나서 그들은 서로 귓속말로 속삭였다. 아마 나를 죽여서는 안 되겠다 논의 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들은 나를 이끌고 산 속 어떤 초가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어떤 놈은 나를 때리고, 어떤 놈은 말렸다. 나는 좋은 말로 풀어줄 것을 여러 번 권했다. 그러나 그들은 대답은 안 하고 저희들끼리 얘기했다.

“김씨, 이 일은 처음부터 당신이 꾸민 일이니 당신 마음대로 해. 우리는 다시 상관하지 않겠어.”

마침내 김씨라는 자가 나를 끌고 산 아래로 내려왔다.

나는 한편으로 타이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저항도 해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어찌할 수가 없었던지 아무 말 없이 나를 놓아주고 가 버렸다.

그들은 모두 일진회의 남은 도당들로서 본국에서 이곳으로 피난 와서 사는 자들이었는데, 마침 내가 지나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같은 짓을 한 것이었다.

나는 풀려나 죽음을 면하고, 친구 집을 찾아가 다친 곳을 치료하며 그해 겨울을 그곳에서 지냈다.

이듬해(1909년) 정월, 나는 엔치야 지방으로 돌아와 동지 12인과 같이 상의하면서 말했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으니 남의 비웃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오. 이뿐만 아니라 특별한 단체를 만들지 않고는 아무런 일도 도모하지 못해 목적을 이루기 어려울 것이오. 그러니 오늘 우리 모두 손가락을 끊어 동맹의 표시를 한 다음에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단체를 만들어 기어코 목적을 달성토록 하는 것이 어떻소.”

그러자 모두가 따르겠다고 했다. 열두 사람은 각각 왼손 약지를 끊어 그 피로 태극기 위에 대한독립이라는 네 글자를 크게 썼다. 쓰기를 마치고 대한독립만세를 일제히 세 번 부른 다음 하늘과 땅에 맹서하고 흩어졌다.

그 후 나는 각처를 왕래하며 교육에 힘쓰고, 민의를 모으고, 신문을 읽는 것을 일로 삼았다.

그 무렵 갑자기 정대호의 편지를 받았다. 나는 곧바로 가서 그를 만나 고향소식을 자세히 들었다. 그리고 그에게 우리 가족들을 데려 오는 일을 부탁하고 돌아왔다.

또한 봄 여름 무렵에 동지 몇 사람과 함께 한국으로 가서 여러 가지 동정을 살피고자 했으나, 비용을 마련할 길이 없어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부질없이 세월만 보냈다.

그 사이 어느덧 초가을이 됐으니 그때가 1909년 9월이었다. 그때 나는 엔치야 방면에 머무르고 있었다. 하루는 아무 까닭도 없이 마음과 정신이 울적해지고 초조해져 견딜 수 없었다. 이런 감정을 스스로 진정하기 어려워 친구 몇 사람에게 말했다.

“나는 지금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고 하오.” “왜 그러는 것이오? 왜 갑자기 아무런 기약도 없이 졸지에 가려는 것이오?”

“나도 그 까닭을 모르겠소. 공연히 마음에 번민이 일어나서 도저히 이곳에 더 머물러 있을 생각이 없소. 그래서 떠나려는 것이오.”

그들이 다시 물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는 것이오?”

그래서 나는 무심코 그냥 대답했다.

“다시 돌아오지 않겠소.”

그들은 무척 괴이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 역시 무의식중에 그런 대답을 했던 것이다. 친구들과 서로 작별하고 길을 떠나 보로실로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기선에 올라탔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러 들으니 이토 히로부미가 얼마 안 있어 이곳에 올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서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어 신문을 여러 개 사 보았다. 과연 그가 며칠 후 하얼빈에 도착하기로 돼 있다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었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남몰래 기뻤다.

“몇 년 동안 소원하던 목적을 이제야 이루게 되었구나!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에 온다는 말은 아직 확실하지 않은 말이요, 하얼빈에 가야만 일을 틀림없이 성공할 것 같았다. 당장 일어나 하얼빈으로 떠나고 싶었지만 자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이리저리 궁리해 보았다.

그래서 마침 이곳에 와서 사는 한국 황해도 의병장 이석산을 찾아갔다. 이석산은 그때 마침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행장을 꾸려 길을 떠나려고 문을 나서는 참이었다. 나는 급히 그를 불러 밀실로 들어가 돈 100원만 꿔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사태가 여기에까지 이르자 하는 수 없이 그를 위협해 100원을 강제로 빼앗았다. 자금을 갖고 돌아오니 일의 반은 이뤄진 것 같았다.

의거

편집

1909년 음력 9월 13일(양력 10월 26일)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새 옷을 모두 벗어 놓고 수수한 양복 한 벌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권총을 지니고 바로 하얼빈 역으로 나갔다. 그때가 오전 7시쯤이었다. 정거장에 이르러 보니, 러시아 장관과 군인들이 많이 나와 이토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9시쯤 되어 드디어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도착했다. 이토가 열차에서 내렸다. 군대가 경례하고, 군악대 연주소리가 하늘을 울리며 귀를 때렸다. 나는 곧바로 군대가 늘어서 있는 뒤에까지 이르러 앞을 보았다. 러시아 일반 관리들의 호위를 받으며 맨 앞에 누린 얼굴에 흰 수염을 가진 늙은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저것이 필히 늙은 도둑 이토일 것이다”라고 생각한 나는 곧 단총을 뽑아들고 그의 오른쪽 가슴을 향해 신속히 네 발을 쏘았다. 다시 뒤쪽을 향해 일본인 단체 가운데서 가장 의젓해 보이며 앞서 가는 자를 향해 다시 세 발을 잇달아 쏘았다.

이때가 바로 1909년 음력 9월 13일 상오 9시 반쯤이었다. 나는 곧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대한 만세를 세 번 부른 다음, 정거장 헌병 파견대로 끌려갔다. 러시아 검찰관이 한국인 통역과 같이 와서 이름과 어느 나라 어디에 살며, 어디에서 와서 왜 이토를 해쳤는가를 물었다. 나는 대강 설명해 주었는데 통역하는 한국인의 한국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때 사진을 찍는 자가 와서 사진을 서너 차례 찍었다.

저녁 8~9시쯤 러시아 헌병 장교가 나를 마차에 태우고 어느 방향인지 모를 곳으로 갔다. 내가 도착한 곳은 일본 영사관이었다. 그는 나를 넘겨주고 가버렸다. 그 뒤에 그곳 관리가 두 차례 심문했고, 4~5일 뒤에 미조부치 검찰관이 와서 다시 심문했다.

미조부치 검찰관이 이토 히로부미를 가해한 일에 대해 내게 물으므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1. 한국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요.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요.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6. 철도·광산·산림·하천 등을 마음대로 빼앗은 죄요.
  7. 제일은행권 지폐를 발행, 마음대로 사용한 죄요.
  8.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9. 교육을 방해하고 신문 읽는 권리를 금지시킨 죄요.
  10.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분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14. 동양 평화를 파괴한 죄요.
  15. 일본 현 천황의 아버지 효명천황을 살해한 죄라고 했다.

미조부치 검찰관이 다 듣고 난 뒤에 놀라면서 말했다. “지금 진술하는 말을 들으니, 당신은 참으로 동양의 의사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신은 의사이니까 절대로 사형받지는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대답했다. “내가 죽고 사는 것은 논의할 필요가 없소. 단지 내 뜻을 빨리 일본 천황에게 알리시오. 그래서 속히 이토 히로부미의 옳지 못한 정략을 고쳐 동양의 위급한 대세를 바로잡는 것이 내가 간절히 바라는 바이오.”

말을 마치자 나는 다시 지하실 감옥에 갇혔다. 다시 4~5일이 지나서 나는 여순 감옥으로 가게 됐다. 이날 우덕순·조도선·유동하·정대호·김성옥과 또 얼굴을 알지 못하는 사람 2~3인이 결박된 채 정거장에서 나와 함께 기차를 타고 출발했다.

여순에 이르러 감옥에 갇히니 때는 음력 9월 21일(양력 11월 3일)께였다.

그 뒤에 미조부치 검찰관이 한국어 통역관 소노키 씨와 함께 감옥으로 와서 10여 차례 심문했다. 그동안 주고받은 이야기들은 검찰관의 기록 속에 상세하게 실려 있기 때문에 구태여 여기에 다시 일일이 쓰지 않겠다.

이때 한국 본토에서 근무하고 있는 일본 경찰간부 사카이 씨가 왔다. 그는 나이가 많았고, 한국어를 아주 잘하는 사람이어서 나는 날마다 그를 만나 이야기를 했다.

어느 날 나는 사카이 노인에게 물었다.

“며칠 전에 영국과 러시아 변호사가 여기 왔었는데, 그것이 법원 관리가 공평하고 진실한 마음에서 허가해 준 것입니까?”

그는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나는 다시 물었다.

“과연 그것이 사실이라면 동양에서는 특기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나에게 해로울 뿐 이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날 우리는 웃으며 헤어졌다.

1910년 음력 11월(양력 12월 말)께였다. 친동생 정근과 공근 두 사람이 한국 진남포로부터 이곳에 면회를 와서 반갑게 만났다. 작별한 지 3년 만에 처음 보는 것이라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날 이후로 나는 동생들과 4~5일 만에, 혹은 10여 일 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인 변호사를 요청하기도 하고, 천주교 신부에게 성사를 받도록 해 달라는 부탁도 했다.

그 뒤 어느 날 미조부치 검찰관이 또 와서 심문하는데, 그 말과 행동이 전과는 전혀 달랐다. 혹은 폭력을 쓰고, 혹은 말도 안 되는 소리도 하고, 혹은 모욕적인 태도를 보였다. 나는 혼자 생각했다.

‘검찰관의 생각이 이렇게 돌변한 것은 아마 제 본심이 아니고 다른 곳에서 큰 바람이 불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이성에 따라 바르고 참된 길로 가기는 힘들고, 감정에 치우쳐 부도덕한 길로 흐르기 쉽다더니 그것이 헛말이 아니로구나.’

이때부터 나는 내 앞날이 크게 잘못돼 공판도 틀림없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그릇된 판결이 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이후 말할 권리가 금지돼 내가 목적했던 의견을 진술할 도리가 없었다. 검찰관은 모든 사실을 숨기고 속이는 기색이 분명했다.

이때 나는 분함을 참을 수 없어 두통이 심했으나 며칠 뒤에 나았다. 그 후 한 달가량은 무사하게 지나는가 했는데 또다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하루는 검찰관이 내게 말했다.

“공판일이 이미 6~7일 뒤로 정해졌소. 그런데 영국 변호사나 러시아 변호사는 허가되지 않고, 이곳에 있는 관선 변호사가 선임됐소.”

나는 혼자 생각했다.

‘전에는 내게 유리하거나 중간 정도의 판결이 날 것으로 희망했는데 그것은 지나친 기대였구나. 이제는 불리한 판결이 나겠구나.’

그 뒤 공판 첫날이 돼 법원 공판석에 앉았다. 정대호·김성옥 등 다섯 사람은 이미 무사히 풀려 돌아갔고, 우덕순·조도순·유동하 세 사람은 나와 함께 피고로 출석하게 됐다. 방청인도 수백 명이었다. 한국인 변호사 안병찬 씨와 전에 허가를 받았던 영국인 변호사가 참석했으나, 변호권을 얻지 못해 다만 방청할 따름이었다.

재판관이 출석하자 검찰관이 심문한 문서에 의해 대강의 경위를 물었다. 그런데 도중에 내가 자세한 의견을 진술하려 하면, 재판관은 그저 회피하기에 급급하며 내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아 내 의견을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이미 그 까닭을 알기 때문에 기회를 봐 몇 가지 목적을 설명하려 했다. 그랬더니 재판관은 크게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즉시 방청을 금지시키고 다른 방으로 물러갔다.

그러더니 조금 뒤에 재판관이 다시 출석해 내게 다시는 그 같은 말을 하지 말라고 했다.

오늘 내가 이렇게 당하는 것이 꿈인가, 현실인가? 나는 당당한 대한국의 국민인데 어째서 오늘 일본 감옥에 갇혀 있는가? 더구나 내가 일본 법률에 따라 재판을 받아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언제 일본에 귀화라도 했다는 말인가?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이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벙어리가 연설하고, 귀머거리가 방청하는 것 아닌가? 내가 진정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꿈이라면 어서 깨어나라, 어서 빨리 깨어나라!’

이러한 지경이 되니 설명이고 무엇이고 다 필요가 없었다. 아무런 말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재판관 마음대로 하라. 나는 다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다.”

다음날 검찰관이 피고의 죄상을 설명한 후 내게 사형을 구형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런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으면 많은 한국인이 그 행동을 본뜰 것이므로 일본인들이 이를 두려워하고 겁이 나서 마음 놓고 지낼 수 없습니다.”

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혼자 생각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세계 각국에 협객과 의사가 끊이지 않았는데 그들이 모두 나를 본떠 그랬단 말인가? 속담에 열 사람의 재판관과 친해지기보다는 단 한 가지라도 죄가 없기를 바란다고 하지 않았는가? 정말 옳은 말이다. 만일 일본인이 죄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한국인을 두려워하고 겁낸다는 말인가? 그 많은 일본인 가운데 왜 이토 한 사람만이 피해를 입어야 했다는 말인가? 오늘 또다시 한국인을 겁내는 일본인이 있다면 그는 바로 이토와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내가 사사로운 원한으로 이토에게 해를 가했다고 하는데, 나는 본래 이토를 알지 못했는데 무슨 개인적인 원한이 있다는 말인가? 내가 만일 이토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어 그랬다면, 검찰관은 내게 무슨 사사로운 원한이 있어 이런다는 말인가? 만일 검찰관의 말대로라면 세상에는 공법과 공적인 일은 없고, 모두 사적인 정과 사적인 혐오만이 존재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미조부치 검찰관이 나를 개인적인 혐오 때문에 사형을 구형한다면, 또 다른 검찰관이 미조부치의 죄를 심사한 뒤에 같은 형벌을 구형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것 아닌가? 그렇게 된다면 세상 일이 언제나 끝날 것인가? 또 이토가 일본 천지에서 가장 높고 큰 인물이어서 일본 4000여만 인구가 모두 존경하기 때문에 내 죄가 크다고 생각하고 중대한 형벌을 구형한다면 왜 하필 사형을 구형하는가? 일본인이 재주가 없어 사형보다 더한, 극히 중대한 형벌을 미리 마련해 두지 못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형을 경감해 준다고 생각해서 한 것이 그런 것인가?’

나는 천 번 만 번 생각해 봐도 이유와 그 복잡한 내막을 알 수 없고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 다음날 미즈노와 가마타 두 변호사가 다음과 같은 변론을 했다.

“피고의 범죄는 분명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그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므로 그 죄가 중대하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한국 인민에 대해서는 일본 사법관에 관할권이 없습니다.”

나는 다시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기했다.

“이토의 죄상은 천지신명과 사람들이 모두 다 아는 일인데 오해는 무슨 오해란 말인가? 더구나 나는 개인으로 사람을 죽인 범죄인이 아니다. 나는 한국과 일본이 전쟁을 하는 도중에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하얼빈에 와서 공격을 가한 후에 포로가 돼 지금 이곳에 오게 된 것이다. 여순 지방재판소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니, 만국공법과 국제공법으로 나를 판결해야 한다.”

이때 시간이 다 돼 재판관은 모레 다시 개정해 선고를 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혼자 생각했다. ‘모레면 일본국 4700만 인구의 인격을 저울질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인격이 무거운지, 가벼운지, 높은지, 낮은지 지켜보리라.’

이윽고 선고공판이 열리는 날 법정에 섰다.

마나베 재판관이 선고를 했다.

“안중근은 사형, 우덕순은 3년 징역, 조도선·유동하는 각각 1년 반 징역에 처한다.”

검찰관의 구형과 같은 형량이었다. 그리고 재판장은 공소 일자를 5일 이내에 다시 정하겠다고 말하고 더 이상 말도 없이 부랴부랴 공판을 끝내고 가버렸다. 이때가 1910년 경술년 음력 정월 초 3일이었다.

나는 감옥으로 돌아와 혼자 다시 생각했다.

‘내가 예상했던 것에서 벗어나지 않았구나. 옛날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충성스럽고 의로운 지사들이 죽음으로써 윗사람의 잘못을 간언하고 정략을 세운 것들은 훗날 역사에 옳은 것으로 기록되지 않았는가? 내가 동양의 대세를 걱정해 정성을 다하고, 몸을 바쳐 방책을 세우다가 끝내 허사로 돌아가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닌가? 그러나 일본국 4000만 민족이 ‘안중근의 날’을 크게 외칠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다.

동양의 평화가 이렇게 깨어지니 100년 비바람이 어느 때에 그칠 것인가? 지금의 일본 당국자에게 조금이라도 양식이 있다면 이 같은 정략은 결코 쓰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만일 염치가 있고, 공정한 마음이 있다면 어찌 이 같은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한국에 와 있던 일본 공사 미우라는 1895년에 병정을 이끌고 대궐에 침입해 한국의 명성황후 민씨를 시해했으나, 일본 정부는 미우라를 아무런 처벌도 하지 않고 석방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그러한 짓을 시킨 자가 분명히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 나의 일을 보면, 설사 개인 간의 살인죄라고 하더라도 미우라의 죄와 나의 죄가 어느 쪽이 무겁고 어느 쪽이 가벼운가? 참으로 머리가 깨어지고 쓸개가 찢어질 일이다. 내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인가?’

천 번 만 번 생각하다가 문득 크게 깨달아 손뼉을 치며 크게 웃으며 혼자 말했다.

“나는 정말 큰 죄인이다. 내 죄는 다른 죄가 아니라, 어질고 약한 한국 국민으로 태어난 죄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마침내 의혹이 풀리고 마음의 안정도 찾을 수 있었다. 그 뒤에 형무소장 구리하라 씨의 특별소개로 고등법원장 히라이시 씨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그에게 사형판결에 대해 불복하는 이유를 대강 설명한 후, 동양 대세의 흐름과 평화정책에 관한 내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에 감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그대를 깊이 동정하지만 정부 기관이 하는 일을 어찌 할 수 있겠소? 다만 그대가 진술하는 의견을 정부에 보고하겠소.”

나는 그 말을 듣고 고마움을 표하며 요청했다. “만일 허가할 수 있다면, 사형집행 날짜를 한 달 남짓 늦추어 주시오. ‘동양평화론’이라는 책을 한 권 집필하고 싶소.”

그랬더니 고등법원장이 대답했다.

“어찌 한 달뿐이겠소. 설사 몇 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하겠으니 걱정 마시오.”

나는 그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돌아와서 공소권을 포기했다.

설사 항소를 한다고 해도 아무런 이익도 없을 것은 불보듯 분명한 일일 것이고, 또한 고등법원장의 말이 과연 진담이라면 굳이 더 생각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한편 그때 법원과 감옥의 관리들, 내가 쓴 글을 기념으로 간직하겠다며 비단과 종이 수백 장을 사 넣어주고는 글씨를 써 줄 것을 부탁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나는 필법이 능하지도 못하면서, 또 남의 웃음거리가 될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매일 몇 시간씩 글씨를 썼다.

그때 천주교회 선교사 홍 신부가 나의 영원한 삶과 행복을 기원하는 성사를 해주기 위해 한국으로부터 이곳까지 왔다. 홍 신부를 만나니 꿈과 같고, 그 기쁨을 감당할 길이 없었다.

나를 다시 만나자 홍 신부는 내게 천주 교리로 훈계한 뒤에 다음날은 고해성사를 받아주었다. 또 그 다음날 아침에 다시 감옥으로 와서 성제대례미사를 거행했다. 이때 나는 영성체 성사를 성스럽게 받음으로써 천주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게 됐다. 그 감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때는 감옥에 있던 일반 관리들이 모두 함께 참례했다.

그 다음날 오후 2시쯤 홍 신부는 다시 내게 와서 말했다. “오늘 한국으로 돌아가기에 작별하러 왔다.”홍 신부와 나는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마침내 홍 신부는 헤어지기 위해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인자하신 천주님께서는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거둬 주실 것이니 안심하여라.”

그리고 손을 들어 나를 향해 강복을 해주고 떠나니, 그때가 1910년 경술년 음력 2월 초하루 오후 4시쯤이었다. 이상이 안중근의 32년 동안 역사의 줄거리다. 1910년 경술년 음력 2월 5일(양력 3월 15일) 여순 옥중에서 대한국인 안중근이 글을 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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