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다는 것이 죄악 같다

글이라고 쓰기를 시작하기는 이럭저럭 한 6, 7년이 되었으나 글다운 글을 써 본 일이 한 번도 없고 남 앞에 그 글을 내어놓을 때마다 양심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첫째, 마음에 느끼는 바나 충동을 받은 바를 그릴 때마다 써본 일이 없고 다만 남의 청에 못 이겨 책임을 면하기 위하여 쓴 일이 많으니 글로써 글을 썼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작년 일 년 동안에는 몸이 매인 데가 있어서 그 일을 하느라고 글 쓸 여가는 물론이요, 어떤 때는 밥 먹을 틈이 없었던 일까지 있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잡지나 어느 신문에서는 가끔가끔 「소설을 써 주오」 「무슨 감상을 써 주오」 하고 청구를 하면 한두 번은 거절을 하여 보기까지 하나 그래도 세째 번에는 마음이 약한 탓인지 차마 거절은 못하고 대답을 하여 놓기는 놓으나 사실 하루 일을 하고 또 친구들과 어울리면 늦도록 돌아다니다가 밤중에야 집에 들어가니 몸이 피곤하여 붓을 잡으려 하나 붙잡을 힘이 없어 그대로 자리에 누운 채 잠이 들어 버린다. 참으로 우리의 생활을 아는 이들은 어느 점까지 동정할 것이다.

원고 수집기한은 닥쳐온다. 사실 몇 사람 안 되는 글 쓰는 이 가운데서 나 한 사람의 창작이면 창작, 감상문이면 감상문을 바라고 믿는 잡지는 경영자들의 조급한 생각을 모르면 모르거니와 알고 나서는 그대로 있지 못할 일이라 하는 수 없이 아침에 눈을 뜨면서 붓을 잡는다.

나는 이것을 일종의 모험이라고 부르고 싶다. 약간의 힌트를 얻어 두었던 것으로 덮어놓고 붓을 잡으니 마치 지리학자나 탐험가들이 약간의 추상을 가지고 길을 떠나는 것 같다. 자기가 지금 시작한 첫 구절, 그 뒤에는 어떠한 글이 계속될는지 써 보지 않고는 알지 못하니 거기에 얼마나 불충실함과 무성의함과 철저치 못함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급기야 써서 그것을 잡지사나 신문사에 보내면 그것을 활자로 박아 내놓는다. 그 내놓은 것을 다시 읽을 때에 부끄러움이란 다시 말할 여지없다.

그래서 그것을 한 번 내놓고는 다시 읽어 보는 때가 극히 적다. 이와 같이 나의 창작생활이 계속된다 하면 나는 그 창작이라 하는 것을 내버려서라도 양심의 부끄러움이 없게 하고 싶다.

더구나 안으로 가정, 밖으로는 사회로 그리 마음대로 되는 운명에 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리 든든하고 풍부한 천품을 타지 못한 나로서 무엇을 깨닫고, 느끼고, 사색하는 것이 아직 부족한 때, 붓을 잡는다는 것이 잘못이라고까지 생각을 한다. 더구나 아직 수양시대에 있어야 할 나에게 무슨 요구를 하는 이가 있다 하면 그런 무리가 없을 것이요, 또는 나 자신이 창작가나 또는 문인으로 자처를 한다 하면 그런 건방진 소리가 없을 것이다.

어떻든 무엇을 쓴다는 것이 죄악 같을 뿐이다.

라이선스

편집
 

이 저작물은 저자가 사망한 지 70년이 넘었으므로, 저자가 사망한 후 70년(또는 그 이하)이 지나면 저작권이 소멸하는 국가에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주의
1923년에서 1977년 사이에 출판되었다면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인 저작물에는 {{PD-1996}}를 사용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