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지개 뜨는 언덕/31장

31. 음악실에서

꼬리를 내저으면서 기운차게 뻗어 올라온 칡넝쿨이 2층 음악실 창문가를 파랗게 수놓고 있었다.

4월 중순, 하늘은 드높고 바람은 상쾌했다. 그 하늘처럼 높은 이상과 그 바람처럼 푸른 희망을 한아름씩 품고 학생들은 지금 음악실에서 오 선생이 지도하는 노래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독일의 유명한 작곡가 슈베르트의 가곡 〈보리수〉였다. 이 노래는 이번 음악 콩쿠르의 지정곡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오 선생은 특별히 이 곡을 골라서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은주도 〈보리수〉라는 노래를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정식으로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오빠 은철이가 어디서 주워듣고 온 것을 곧잘 따라 부르곤 했었다. 그것을 오늘 은주는 정식으로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 때 오 선생이 은주의 이름을 불렀다.

“서은주!”

“네.”

은주는 갑자기 자기 이름이 불린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은주는 이 〈보리수〉 노래를 오늘 처음 배우는가?”

“네, 배우긴 처음이지만......”

은주는 얼굴을 붉히며 말끝을 잇지 못했다.

“아, 전부터 알고 있었나?”

“네, 오빠가 부르는 걸 옆에서 듣고......”

“아, 그럼 됐어. 어디 한번 불러 봐.”

그러면서 오 선생은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오 선생의 얼굴에는 그 어떤 희망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은주의 얼굴은 더한층 새빨개졌다. 은주는 부끄러워서 그만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선생님이 왜 나한테만 특별히 노래를 부르라는 걸까?’

그 이유를 은주는 통 알 수가 없었다.

‘자아, 서은주. 머리를 들고,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며......’

오 선생은 무슨 큰 기적이나 바라는 사람처럼 기대에 찬 얼굴로 말했다.

은주는 가만히 머리를 들었다. 머리를 들고 자세를 바로잡으며 똑바로 정면을 향했다. 주위에서 아이들이 수군수군하는 소리가 들렸다.

“쌍둥이래, 쌍둥이!”

그 소리에 은주는 불현듯 영란이가 생각났다. 영란의 차디찬 눈초리가 자꾸만 마음을 후벼 왔다.

“자아, 맨 처음구절부터......”

그러면서 오 선생의 손이 “콰앙―” 하고 건반을 눌렀다. 뒤를 이어 은주의 고운 목소리가 맑은 샘물처럼 흘러나왔다.

성문 앞 우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

단꿈을 보았네

그 순간, 오 선생의 눈동자가 번쩍 하고 빛났다.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기적을 눈앞에 보는 것처럼 오 선생의 얼굴은 차츰차츰 흥분의 빛을 띠며 긴장해 갔다.

가지에 희망의 말

새기어 놓고서

기쁘나 슬플 때에나

찾아온 나무 밑

찾아온 나무 밑

“한 번 더! 처음부터 한 번 더!”

오 선생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실 안은 조용했다.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오 선생뿐만 아니라, 학생들도 은주의 그 맑고 아름답고 은근한 노래 소리에 그만 취해 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학생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조용, 조용!”

오 선생은 잡음을 막으며 다시금 건반을 눌렀다.

“성문 앞 우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

은주는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활짝 열어젖힌 들창 밖에는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꼬리를 저으면서 뻗어 올라간 칡넝쿨에 산들바람이 불고 있었다. 하늘도 맑고 바람도 맑고 노래 소리조차 맑은 순간이었다.

“기쁘나 슬플 때에나 찾아온 나무 밑, 찾아온 나무 밑.”

은주의 노래가 끝났다.

“앉아. 서은주, 앉아도 좋아.”

오 선생은 피아노 앞에서 기운차게 일어서면서 은주에게 앉으라고 했다. 은주는 상기된 얼굴을 숙이면서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가슴이 두근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은주는 신 선생을 잘 아는가? 신채영 선생을......”

오 선생은 흥분한 얼굴빛으로 물었다.

“잘 모르지만...... 언젠가 학교에 한 번 오셔서......”

“학교에? 언제?”

“학예회 때요.”

“그 때도 은주는 노래를 불렀었나?”

“네.”

“무슨 노래를 불렀지?”

“〈봉선화〉를 불렀습니다.”

“음, 〈봉선화〉라...... 그때 신 선생이 칭찬을 했었지?”

은주는 대답을 못하고 머리를 푹 숙였다.

“내가 다 알아. 은주는 음악에 천재적인 소질을 가진 학생이라고 칭찬을 했었지?”

은주는 숙였던 머리를 들었다. 오 선생님이 어떻게 그것을 아는지, 이상한 일이라고 은주는 생각했다.

“은주는 〈봉선화〉를 잘 부르는가?”

오 선생은 이번에는 곡을 선정할 셈으로 그렇게 물었으나, 은주는 대답 없이 그저 얼굴만 붉혔다.

“대답을 해야지, 생각이 있어 묻는 것이니까. 바른 대로 대답을 해 봐요. 은주는 〈봉선화〉가 제일 좋은가?”

잠깐 동안 은주는 머뭇머뭇하다가 대답을 했다.

“네...... 〈봉선화〉도 좋지만......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곡은......”

“그래, 은주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 뭐지?”

“저...... 〈성불사의 밤〉......

은주는 자꾸만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제 입으로 제가 제일 잘 한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아, 이은상 선생 작사, 홍난파 선생 작곡인 〈성불사의 밤〉! 그 곡을 은주는 제일 좋아한다는 말이지?”

은주는 그저 부끄러워 머리만 숙였다.

“어디 한번 해 보거라.”

오 선생은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피아노 앞으로 가 앉았다.

아이들이 다시 수군수군 거렸다. 오 선생은 서은주를 이번 콩쿠르에 내보내려는 것이라고, 아이들은 눈치 빠르게 생각했다.

‘자, 시―작!”

오 선생이 또 “콰앙―” 하고 건반을 눌렀다.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 소리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지금 들은 서은주의 노래를 여러 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해요?”

오 선생은 피아노 앞에서 일어나면서 학생들에게 물었다. 어지간히 흥분한 목소리였다.

“잘해요!”

“참 잘해요!”

“이번 콩쿠르에 꼭 내보내 주세요!”

학생들은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저마다 소리를 쳤다. 그 중에는 영순이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학생들도 그렇게 생각해요?”

오 선생은 아주 만족한 얼굴이었다.

“네.”

“네.”

“꼭 내보내주시죠?”

오 선생은 대답 없이 지극히 만족한 얼굴로, 머리만 한 번 끄덕 숙여 보였다.

“와―”

학생들은 모두들 손뼉을 치면서 기뻐했다.

“아, 서은주. 이젠 앉아도 좋아.”

그 때까지도 은주는 앉으라는 말이 없어서 그대로 꼬박 서 있었다. 귀밑까지 얼굴은 빨개졌고, 팔다리가 자꾸만 떨렸다. 은주는 가만히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