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지개 뜨는 언덕/27장


27. 판잣집의 안과 밖

영란은 어머니의 뒤를 따라 판잣집 쪽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올라가면서 얼굴을 찌푸리고 코를 막았다.

정원에 화초가 만발하고 2층 서재에 피아노가 놓여 있는 자기 집과 비교해 볼 때, 은주네 판잣집은 너무나 초라했다. 조그만 판잣집에 다 떨어져 나간 널빤지로 담을 두른 한쪽 귀퉁이에 사람이 드나드는 조그만 쪽문이 한 개 달려 있었다.

영란은 동생을 보러 간다기에 호기심에 끌려 따라 나서긴 했으나, ‘괜히 왔다.’는 불쾌한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이런 더러운 장소에 들어서는 것이 자꾸만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란은 홱 돌아서며 말했다.

“난 안 들어갈 테야. 난 여기 서서 어머니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테야.”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동생을 보고 가야지.”

“싫어요. 어머니나 만나보고 나와요.”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영란을 대문 밖에 세워 두고 혼자서 뜰 안으로 들어갔다. 부엌 한 칸, 방 한 칸, 마루 한 칸에 온통 널빤지로만 된 궤짝 같은 집이었다.

은철이는 어머니에게 드릴 약을 지으러 병원에 갔고, 은주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어머나!”

은주는 뜰 안으로 들어서는 훌륭한 옷차림의 영란 어머니를 바라보자 가슴이 두근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 내 손을 잡고 자꾸만 울던 그 부인, 나의 친어머니! 나를 낳아 주신 분!’

그런 생각이 은주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오오, 은주야!”

부인은 부엌문 밖에서 은주의 손목을 덥석 부여잡으며 물었다.

“상처는...... 상처는 좀 괜찮으냐?”

“네.”

“은주는 머리를 숙이고 조용히 대답했다.

“어머니 병환은 좀 어떠시니?”

“조금도 낫지를 않아요. 암만해도 어머니는 돌아가실 것만......”

그러다가 은주는 행주치마로 얼굴을 가리며 어두컴컴한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부인도 은주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은주의 어머니는 이제 통 일어나지도 못했다. 가난 때문에 오랫동안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한데다, 이제는 뼈와 가죽만 남은 몸이 되어 조금만 음식을 먹어도 금세 토해버리곤 했다.

부인은 은철 어머니에게 정중히 인사를 한 후, 들고 온 과일 꾸러미를 내려놓으면서 걱정스럽게 말했다.

“어서 병환이 나으셔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은주를 이처럼 훌륭하게 키우시느라고 그만 병환까지 얻으셔서......”

그러나 은철 어머니는 그저 눈물만 글썽글썽한 채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도 없다가 꺼질 것 같은 한숨을 내쉬며 겨우 말했다.

“후우...... 모두가 다 제 팔자니 어쩔 수 없지요. 아마 은주의 앞길이 트였나 봅니다. 부디 은주를 잘 교육시켜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세요.”

두 어머니는 다 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지나간 15년 동안의 긴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다. 그러다가 영란의 어머니는 가지고 온 물건들을 꺼내놓았다.

“이건 은주의 교복과 구두...... 내일 학교에 입혀 보내 주세요. 그리고 이건, 은주의 학용품......”

영란의 어머니는 보자기에 싸 가지고 왔던 교복과 구두와 학용품을 내놓았다.

“고맙습니다. 은주야, 어머니께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드려야지.”

그러나 은주는 어머니의 머리맡에 조용히 꿇어앉아 어머니의 여윈 손목을 꼭 붙잡고 홀짝홀짝 울고 있을 뿐이었다.

“은주야.”

“네?”

“여태까지 너는 나를 어머니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분이 네 친어머니, 너를 낳아주신 진짜 어머니시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네가 나를 따르던 것처럼 이 분을 따르고 모셔야 하느니라.”

그러는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어머니! 이젠,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제 어머니는, 제 어머니는 언제나 어머니 한 분이세요. 저를 그처럼 귀여워해 주시고, 저를 위해서 모든 고생을 아끼지 않으신 어머니 한 분뿐이에요. 저는 두 사람의 어머니를 갖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는 저를 위해 드시고 싶은 것도 안 드시고, 입을 것도 제대로 안 해 입으신 소중한 어머니예요.”

어머니의 여윈 손바닥에 돌연 얼굴을 파묻고 은주는 흑흑 흐느껴 울었다.

“은주야,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오래 살 것 같지가 않구나. 머지않아 나는 저 세상 사람이 될 것이니 새 어머니를, 아니 친어머니를 잘 모시고 오래오래 행복해라.”

“어머니!”

“그래, 그래.”

“어머니!”

“그래, 그래, 울지 마라!”

은주가 울자, 생모도 양모도 다 같이 눈물의 바다에 빠진 듯, 흐느껴 울었다. 은주가 친부모를 만나게 된 일이 과연 은주의 일생을 위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행복한 일인지 불행한 일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 때, 이창훈 씨 부인은 눈물을 거두며 조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은주를 지금 당장 데려가려는 것이 아니니 그리 아시고, 은주를 지금과 마찬가지로 귀여워해 주세요. 태산 같은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두 부인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병원에 약을 지으러 갔던 은철이는 꼬불꼬불한 언덕길을 헐레벌떡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집 앞에 이르러 은철이는 갑자기 발바닥이 땅에 얼어붙은 듯이 우뚝 멈춰 섰다.

“어?”

은철이는 저도 모르게 가느다란 외침을 내뱉었다.

자기 집 대문 밖에서 지금 껌을 씹고 서 있는 여학생, 은주와 똑같이 생긴 저 여학생은 혜화동 이창훈 씨의 양옥 현관 밖에서 자기의 인격을 발로 진흙 밟듯 짓뭉개던 그 애가 아닌가!

약봉지를 든 은철의 손이 가느다랗게 떨리기 시작했다. 은철이는 약봉지가 뭉개지도록 꼭 움켜쥐었다.

“......”

은철이는 벙어리처럼 말없이 입술을 꽉 깨물고 영란의 얼굴을 무섭게 쏘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