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지개 뜨는 언덕/23장

23. 양심과 진실의 만남

은철이는 경찰에게 끌려 경찰서로 가면서 영란의 그 얄밉고도 거만한 태도와 말씨가 눈앞에 어른거리고 귀에 쟁쟁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한층 더 은철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동생 은주와 판에 박은 듯 똑같이 생긴 영란의 얼굴이었다.

어제 저녁 종로 4가의 택시 안에서 자기의 얼굴과 똑같이 생긴 여학생을 보았다던 은주의 말이 결코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은철이는 확실히 깨달았다.

‘이 세상에 똑같이 생긴 얼굴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은철이는 자기가 무슨 허황한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똑같은 얼굴인데, 은주와 그 소녀는 어쩌면 그렇게 성품이 다를까?’

이윽고 은철이는 성북경찰서 취조실에서 준엄한 문초를 받게 되었다. 경찰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봉팔이 자식이 경찰에 일러바친 것이 분명했다.

“바른 대로 말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너는 감옥에 가게 돼!”

경찰은 무섭게 호령을 했다.

“바른 대로 죄다 말했습니다.”

은철이는 조금도 숨김없이 경찰에게 실토를 했다.

“거짓말 마! 네가 그 신사의 가방에서 돈 2만 원을 꺼낼 때부터 그것을 훔칠 생각이었지?”

“아닙니다. 돈을 꺼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만, 결코 훔치려고 한 게 아니고 한 달 후에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틀림없이 갚아 드리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는데 봉팔이가 자꾸만 자기와 절반씩 나눠 갖자고...... 그래서 그럴 수는 없다고, 훔친 것이 아니고 잠깐 빌린 것이라고...... 그래서 싸움을 했어요.”

그러나 경찰은 좀처럼 은철이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어쨌든 너는 남의 돈을 훔친 도둑이야!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뉘우치고 그 돈을 도로 내놓으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너는 감옥살이를 할 수밖에 없다. 알겠나? 알겠으면 어서 돈을 내놔라.”

은철이는 아무런 대답도 못했다. 돈은 이미 은주의 입학 수속금으로 다 써 버린 후였기 때문이다.

“아니, 정말 돈을 못 내놓겠느냐?”

경찰은 은철을 아주 악질 소년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돈은...... 돈은 다 썼습니다.”

은철이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다 썼어? 어디에 썼느냐?”

은철이는 또 대답을 못했다.

“왜 대답을 못해? 이 나쁜 놈! 네가 고분고분 대답을 안 하는 걸 보니 아직도 제 잘못을 모르는 놈이야. 너 같은 놈이야말로 악질이다!”

경찰은 무척 화가 났다.

“제 잘못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무서운 도둑놈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에 대한 형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탁은 제가 그 돈을 무엇에 썼는지, 그것만은 제발 묻지 마십시오. 저는 절대로 대답을 하지 않겠습니다.”

절대로 대답하지 않겠다는 굳은 신념의 빛이 은철의 얼굴에 굳게 떠올랐다.

“음, 좋아. 너는 너대로 고집을 부려라. 나는 나대로 할 테니까.”

경찰이 벌떡 걸상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취조실 문이 조용히 열리면서 이창훈 씨가 민구와 함께 다른 경찰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아, 선생님!”

은철이는 그렇게 부르짖으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가 다시 털썩 주저앉으며 머리를 푹 숙이고 말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가 바로 그 돈가방을 잃어버렸던 이창훈입니다.”

이창훈 씨는 점잖게 자기소개를 한 후에 말을 시작했다.

“모든 것은 제 실수입니다. 제가 그 가방을 그만 깜빡 잊어버리고 온 것이 탈이었습니다. 공무에 바쁘신 몸일 텐데, 이런 사소한 일로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시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창훈 씨는 취조하던 경찰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나서 말했다.

“실은 그 2만원이라는 돈은, 저 소년이 가방에서 훔친 것이 아니고 제가 소년에게 준 것입니다.”

“옛? 주셨다고요?”

경찰은 놀랐다.

“그렇습니다.”

“이 소년은 분명히 가방에서 꺼냈다고 하는데요.”

“아닙니다. 제가 준 것입니다. 마음씨가 나쁜 소년 같으면 가방을 갖고 도망을 친다든가 가방에서 몰래 돈을 훔친다든가 했겠지만, 이 소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소년은 다른 나쁜 소년의 극심한 유혹을 물리치면서까지 그 가방을 보관했다가 제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착한 마음씨에 보답하기 위해 제가 2만 원을 준 것이니,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 선생님!”

은철이는 깊숙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면서 격정에 넘친 목소리로 외쳤다.

“아닙니다! 제가 분명히 2만 원을 가방에서 꺼냈습니다. 저 선생님은 거짓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주인의 허락 없이 남의 가방에서 돈을 훔쳐낸 것은 절도범입니다. 저를 처벌해 주십시오.”

그러자 이창훈 씨는 꽥 소리를 친 후에 부드러운 말로 은철을 타일렀다.

“너는 왜 거짓말을 해서 일부러 자기 몸을 해치려고 하는 거나? 가방 주인인 내가 그 돈을 네게 준 것이라면 그만 아니냐? 너는 그저 잠자코 있으면 되는 거야.”

“아, 선생님! 선생님은 어째서 저를......”

은철이는 그만 정에 휩쓸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자꾸만 울었다. 고맙고 부끄러워서 은철이는 정말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뛰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이창훈 씨는 경찰을 저편 창가로 데리고 가서 한참 동안 수군수군 무슨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경찰이 머리를 끄덕거리면서 은철이 앞으로 다가왔다.

“잘 알았으니 이 선생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라. 이처럼 좋은 선생님을 만난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돼.”

그리하여 은철이는 민구와 함께 이창훈 씨를 모시고 경찰서를 나섰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자동차를 타고 대학 병원으로 달려가면서 은철이는 또 한 번 울었다.

“훌륭하신 선생님을 만나서 저는, 저는 정말로......”

“아니다. 너야말로 드물게 보는 정직한 소년이다. 그건 그렇고, 하여튼 빨리 병원으로 가서 은주를 만나 봐야지.”

“병원이라고요?”

“음, 하마터면 은주가 큰일을 저지를 뻔했다.”

“은주가요?”

그 때 민구가 옆에서 말해 주었다.

“은주가 차에 치였어.”

“네에?”

민구는 자세한 이야기를 은철에게 해주었다.

“아아, 은주가...... 은주가 죽으려고...... 죽으려고?”

은철의 얼굴빛이 그 순간 해말쑥하게 핏기를 잃어버렸다.

“그런데 말이야, 이 선생님이 사실은 은주의 아버지가 되신대!”

은철이는 민구가 이렇게 말해도,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뭐라고?”

“아까 병원에서 이 선생님의 사모님한테서 들었는데, 이 선생님이 바로 은주의 아버지시라고......”

“은주의 아버지?”

겹쳐드는 놀라움에 은철이는 어안이 벙벙해서 옆에 앉은 이창훈 씨를 쳐다보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후에 하기로 하고...... 빨리 가서 은주를 만나 봐야지.”

그러면서 이창훈 씨는 은철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그 순간, 갑자기 은철의 머리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바로 사랑하는 동생 은주와 똑같이 생긴, 아까 이창훈 씨 집에서 보았던 그 건방진 소녀의 얼굴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 어떤 불길한 예감이 은철이의 머릿속에 검은 구름처럼 뭉게뭉게 떠다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