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지개 뜨는 언덕/14장

14. 하루 사이에 달라진 소녀

이 학교 음악 교사 오상명 선생은 나이는 젊지만 대단히 점잖은 분이었다. 해방 직전 동경 우에노 음악 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교편을 잡았으며, 작곡에 있어서도 약간은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선생이었다.

오상명 선생은 직원실을 나와 신학기로 활기를 띤 넓은 교정을 한 번 빙 둘러보면서 여기저기 옹기종기 몰려 있는 신입생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어제 그 신문 팔던 아이가 학교에 왔을까?”

오 선생은 그렇게 혼잣말을 하면서, 교정으로 내려와 병아리 떼 같은 신입생들의 사이사이를 걸어 다니며 얼굴을 살폈다. 어제 종로 4가에서 만났던 그 가여운 소녀의 얼굴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어제 저녁 무렵까지도 마련하지 못한 돈을 하룻밤 사이에 마련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무슨 커다란 기적을 바라는 사람처럼, 신문을 팔려고 졸졸 따라다니던 그 기특한 아이가 불쑥 자기 눈앞에 나타날 것만 같아서 오 선생은 이리저리 소녀를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그 때 실로 믿을 수 없는 기적과도 같은 놀라운 사실이 오 선생의 눈앞에 전개되었다.

“오오!”

오 선생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반가운 마음에 조그맣게 탄성을 내뱉었다.

어제 저녁까지도 더덕더덕 꿰맨 운동화와 땀과 때로 찌든 남루한 옷을 입었던 바로 그 신문 팔던 소녀가, 새하얀 비단으로 만든 블라우스에다 줄이 선 감색 교복 치마를 입고 예쁜 자주색 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신고 있지 않은가!

“오오!”

오 선생은 다시 한 번 기쁨의 말을 던지면서 소녀에게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너, 학교에 왔구나!”

거의 부르짖다시피 말하며, 오 선생은 소녀의 손을 반갑게 잡고 흔들었다.

그러자 농구대에 기대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껌을 씹고 있던 소녀가 화들짝 놀라서 씹던 껌을 탁 모래밭에 뱉어 버렸다. 그러고는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오 선생을 덤덤히 쳐다보았다.

“그래, 어떻게 갑자기 돈을 마련했느냐, 응?”

오 선생은 또 한 번 소녀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소녀는 어리둥절해서 자기 손을 자꾸만 잡아 흔드는 그 이상한 사람의 얼굴을 벙어리처럼 쳐다만 보다가 잡힌 손목을 홱 뿌리치며 말했다.

“아이, 이 손 놓으세요! 손은 왜 붙잡고 그러세요?”

“응?”

이번에는 오 선생 편에서 어리벙벙해졌다.

“아니, 너 나를 몰라보느냐?”

“몰라요.”

“몰라?”

“글쎄, 몰라요.”

“허허!”

오 선생은 기가 막혔다. 바로 어제 저녁에 만났던 이 소녀가 대체 무슨 이유로 갑자기 시치미를 딱 떼는 것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어제까지 자기가 큰길에서 신문을 팔던 것이 부끄러워서 이처럼 시치미를 떼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오 선생은 생각했다.

그래서 오 선생은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결심했다. 자꾸 캐물어서 이 소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제 채 물어보지 못한 이름을 알아볼 생각으로 다시 물었다.

“그래, 네 이름이 뭐지?”

“이영란이에요.”

“이영란...... 집은 어디지?”

“혜화동이에요.”

“혜화동......”

그러는데 현관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자아, 저리로 가서 서라. 담임 선생님들이 너희들 반을 짜려고 하신다.”

영란에게 그렇게 말한 다음 오 선생도 현관 앞으로 가서 여러 선생님들과 한데 섞였다.

출석부를 든 세 사람의 담임 선생님이 나와서 신입생들을 세 반으로 나누었다. 은주와 영순이는 1반이 되고, 영란이는 3반이 되었다.

이윽고 1반, 2반, 3반의 순서로 신입생들은 넓은 강당으로 들어갔다.

강당에는 벌써 상급생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입학식은 곧 시작되었다. 교장 선생님의 훈시와 상급생의 환영사가 있고, 신입생의 답사가 있은 후에 “콰앙―” 하는 피아노 소리와 함께 이 학교 교가가 울려 나오자, 이윽고 학생들의 제창이 웅장하게 흘러 나왔다.

희망의 노래, 동경의 노래!

그렇다. 이 희망의 노래를 불러 보려고 과거 1년 동안을 노력해 온 신입생들이 아닌가!

신입생의 반은 벌써 교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은주는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이 감격에 넘치는 순간에도 컴컴한 방 안에서 신음하고 있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와는 반대로, 영란은 한없이 기쁘고 유쾌하기만 했다. 노래를 잘 하고 피아노를 잘 치는 영란, 뿐만 아니라 장래에 훌륭한 음악가로서 음악계에 화려하게 나서려는 야심만만한 영란은 오늘의 이 순간이 제일 기쁘고 유쾌했다. 그래서 지금 강당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고 있는 사람이 대체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여 머리를 갸웃하고 피아노 앞을 둘러보다가 영란은 깜짝 놀랐다.

‘아, 아까 그 사람이 아닌가!’

그것은 틀림없이 아까 운동장에 나와서 자기의 손목을 쥐어 잡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아, 그 사람이 바로 이 학교 음악 선생님이었구나!’

이제부터 잘 보여 많은 지도와 사랑을 받지 않으면 안 될 음악 선생에게 멋모르고 무례하게 대한 것이 영란은 한없이 뉘우쳐졌다.

‘이 다음에 만나면 잘해야겠다!’

영란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굳게 결심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