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지개 뜨는 언덕/12장
12. 똑같이 생긴 사람은 싫어요
그 즈음 혜화동 영란이의 집에서는 동생 영민이와 어머니, 아버지, 이렇게 네 식구가 화려한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다.
아버지는 오늘 돈 가방을 잃어버렸다가 찾은 이야기를 쭉 하고 나서 말했다.
“참 훌륭한 소년 아니냐! 영민이도 커서 그런 소년이 돼야 한다.”
그러자 영란이가 냉큼 나서서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아니, 아버지도! 영민이가 커서 구두나 닦으러 다니면 좋으시겠어요?”
“그런 뜻이 아니야. 너는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면 자꾸 나쁜 것만 골라내는 버릇이 있어. 구두 닦는 사람이 되라는 게 아니라, 비록 구두를 닦는 사람이 되더라도 그런 훌륭한 행동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알겠지?”
“알겠어요.”
영란이 대신 영민이가 바로 대답했다.
“옳지! 영란이보다 영민이가 더 똑똑하구나.”
그 말에 영란이는 한층 더 샐쭉해졌다.
그 때 가정부가, 저녁 신문에 싸인 돈을 한 뭉치 들고 뛰어 들어왔다.
“아유, 이것 좀 보세요! 신문지 속에 웬 돈 뭉치가 들어 있어요!”
“뭐, 돈?”
모두들 놀라 가정부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디......”
아버지는 가정부의 손에서 신문지에 싼 돈 뭉치를 받아 쥐었다.
“아, 글쎄 우편함을 열어 보니 저녁 신문 속에 이 돈이 들어 있지 않겠어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어머니도 놀라고, 영란이와 영민이도 놀랐다.
“분명히 만 원짜리 뭉치다!”
아버지는 신문을 펼치다가, 수첩을 찢은 몇 장의 종잇조각에 연필로 쓴 글씨가 가득 쓰여 있는 걸 발견했다.
“아, 이게 뭐지? 가만있자, 이건 무슨 편지 같은데......”
아버지는 소리 내어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아, 그랬구나!”
편지를 다 읽고 난 아버지는 말할 수 없는 감동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서재에 가서 내 가방을 가져와요.”
그 말에 어머니는 몸을 일으켜 서재로 가 곧 가방을 가지고 왔다.
아버지는 가방을 열어 보았다. 과연 돈 뭉치 두 개가 없었다.
아버지는 깊은 신음 소리를 내면서 영란이와 영민이의 얼굴을 덤덤히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음, 분명히 무슨 말 못할 딱한 사정이 있구나! 음, 정직한 소년이다!”
“그런데 정말 2만 원을 가져올까요?”
영란이가 아버지에게 물었을 때, 아버지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 꼭 가져올 거다! 그러나 문제는 돈을 도로 가져오느냐 안 가져 오느냐에 있는 게 아니야. 가져오지 않더라도 아버지는 그 애를 조금도 나무라지 않을 거니까. 누구든 이 세상을 살아 나가려면 정말 어쩔 수 없는 딱한 사정에 부딪힐 때가 있는 법이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그 애도 어떤 딱한 사정이 있을 거야.”
아버지는 2만 원이라는 돈을 잃어버린 것보다도, 그 소년의 딱한 사정과 행동을 알고는 더욱 감동을 받아 칭찬하는 것이었다.
“웬만한 아이 같으면 아버지께서 주신 만 원까지도 모르는 척하고 받았을 게 아니냐? 그것을 도로 갖다 주는 걸 보니, 참......”
어머니가 그런 말을 했을 때, 영란은 그 때까지 깜박 잊어버렸던 중대한 이야기를 했다.
“아, 그런데 아버지, 나 오늘 나와 똑같이 생긴 아이를 보았어요!”
“뭐라고?”
아버지는 얼른 머리를 들었다. 그 때 어머니가 영란의 말을 받으며 말했다.
“글쎄 여보, 영란이가 오늘 자기랑 똑같이 생긴 아이를 봤대요!”
“아버지, 정말이에요. 나도 봤어요!”
영민이도 신기한 듯이 외쳤다.
“아니, 그게 정말이냐?”
아버지는 깜짝 놀라면서 어머니를 향해 의미 깊은 눈초리를 던졌다.
“정말이에요. 아버지.”
영란은 택시를 탔을 때 만난, 그 허름하게 차려입고 신문 파는 아이의 이야기를 신기하다는 듯이 꺼내놓았다. 그러자 아버지는 어머니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며, “음―” 하고 또 한 번 깊고도 긴 신음을 내면서 물었다.
“분명히 종로 4가에서 신문을 팔더냐?”
“그럼요! 그런데 아이 더러워, 꼭 거지같아 보였어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또 한 번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때 영민이가 영란을 돌아보며 말했다.
“옷이 더러우니까 더러워 보이지, 그 누나도 누나처럼 새 옷을 입어 봐!”
“아무리 새 옷을 입는다 해도, 제까짓 게......”
영란은 어쩐지 자기와 똑같이 생긴 아이가, 그것도 더러운 몰골로 이 세상에 또 하나 있다는 사실이 무척 싫었다.
“어머니, 나 쌍둥이 아니죠?”
영란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으나 어머니도 아버지도 대답이 없다. 다만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에는 그 어떤 믿을 수 없는 기적을 눈앞에 보는 사람처럼, 일종의 헤아릴 수 없는 놀라움과 기쁨이 구름과 같이 뭉게뭉게 떠돌고 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