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지개 뜨는 언덕/09장
9. 양심의 소리
“영란아, 넌 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동생을 꾀어서 택시를 타고 다니는 거냐, 응?”
신사가 꾸중을 하자, 영란이는 얼굴이 샐쭉해지면서 영민이의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쥐어박았다.
“넌 택시 타자고 안 그랬니?”
영란은 동생을 나무랐다.
“누나가 자꾸만 타자니까 탄 거지. 아버지한테 꾸중 듣는다고 하니까, 잠자코 있음 된다고 그런 건 누나잖아.”
영민은 입을 한 번 삐죽거리면서 대답했다.
“벌써부터 그런 버릇 들이면 못쓴다. 영란인 아무래도 건방져서 못 쓰겠어.”
“아이참, 아버지도. 단돈 100원이 그렇게도 아까우세요?”
“돈이 아까운 게 아니야. 초등학생이 벌써부터 택시를 타고 다니다니, 그러다가 어른이 되면 비행기를 타야 할 게 아니냐?”
“저는 초등학생이 아니에요. 내일부터는 중학생인데 뭘 그러세요?”
그러다가 영란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난 듯이 외쳤다.
“아참, 아버지! 오늘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글쎄, 아까 자동차 안에서 말이에요. 아버지, 빨리 들어오세요!”
“이상한 일이라고? 그래, 어디 들어 보자. 나도 오늘 밤 너희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주마.”
영민이는 좋아서 손을 내저으며 아버지 옆으로 다가갔다.
“아이 좋아! 아버지, 옛날이야기예요?”
“아니다. 오늘 거리에서 생긴 일이야. 아주 재미있고 훌륭한 소년의 이야기다.”
그러면서 신사는 어둑어둑한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2층에 나타났던 두 남매의 조그만 얼굴들도 사라졌다.
‘이창훈, 이창훈!’
은철이가 마음속으로 신사의 이름을 되새기는 바로 그 때, 신문을 배달하는 학생이 그 집 앞에 멈추어 서서 대문에 있는 우편함 안에다 신문을 끼워 넣고 가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우편함이 작아서 신문지 뒷부분이 채 들어가지 못하고 삐죽 밖으로 나왔다.
그것을 보는 순간, 은철이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주머니에서 조그만 수첩과 연필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서 수첩에다 다음과 같이 썼다.
선생님, 오늘 밤 선생님께서는 가방을 열어 보시고 1만 원짜리 두 뭉치가 없어진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그 모습을 생각하면, 저는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고 부끄러워 얼굴에 불이 붙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 그 두 뭉치의 돈은 제가 가졌습니다. 제가 몰래 훔쳤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그 놀라시는 얼굴이 제 눈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저를 꾸짖어 주십시오. 저는 도둑놈입니다. 저를 때려 주십시오. 저를 감옥으로 보내 주십시오. 그런 줄도 모르시고 선생님께선 저를 착한 소년이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하늘은 악한 자를 벌하신다고 했습니다. 저 같은 나쁜 놈을 아직껏 벌주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러나 선생님, 저에게 말 못할 사정이 있사오니 한 달만 기다려 주십시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한 달 후에 선생님의 돈 2만 원을 꼭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 때는 선생님의 처분대로 경찰서든 감옥이든 어디든지 끌려가겠습니다. 그러니 선생님, 그 때까지만 참아 주십시오. 그런 나쁜 놈인 줄도 모르고 선생님이 감사하다고 하시면서 저에게 주신 1만 원을 어떻게 제가 뻔뻔스럽게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그 1만 원을 선생님께 다시 돌려 드리니, 받으십시오.
서은철 올림
조그만 수첩에다 연필로 또박또박 글을 쓴 후에 은철이는 그것을 찢어 냈다. 그러고는 우편함에 삐죽 꼬리를 내민 신문을 끄집어내고 1만 원과 함께 편지를 신문지에 쌌다. 은철이는 그것을 다시 우편함에다 밀어 넣었다.
어느새 해는 저물어 혜화동 일대에는 짙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 캄캄한 어둠의 장막을 온몸으로 헤치면서 주머니에 2만 원이 들어 있는 윗도리를 꽉 잡고 은철이는 빠른 걸음으로 달음박질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