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지개 뜨는 언덕/05장
5. 검은 마음 흰 마음
저녁 무렵이라 큰길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으나, 골목 안은 인기척이 드물었다.
“그 가방 열어 봐!”
봉팔이는 골목 안으로 은철이를 끌고 들어가기가 바쁘게 그렇게 윽박질렀다.
“남의 가방을 함부로 열면 안 돼.”
은철이는 반대했다.
“열어만 보는 건데 어때?”
“열어 볼 필요가 없는데, 뭐하려고 연단 말이야?”
“열어 보고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아야지. 그래야 주인이 오더라도 그대로 간직했다가 돌려줄 수가 있잖아? 괜히 남의 가방을 가지고 있다가, 그 안에 들어 있지도 않은 돈이 있었다고 하면 어떡할 거야?”
봉팔이의 말을 들어 보니 그럴 둣했지만, 은철이는 아무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여기서 가방을 열어 볼 시간에 빨리 이대로 갖다 주는 게 좋지 않아? 공연히 남의 물건에 손을 댔다가 무슨 실수를 하면 어쩌냐 말이이?”
“잔말 말고 빨리 열어 봐!”
봉팔이가 꽥 소리를 지르면서 은철이의 손에서 가방을 빼앗아 재빨리 열었다.
“세상에! 돈, 돈, 돈이다!”
순간 봉팔이의 입에서 놀라움과 동시에 부러움에 찬 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방 속에는 시퍼런 1만 원짜리로만 묶여진 지폐 뭉치가 수두룩했다.
“아아, 돈이다!”
은철이의 입에서도 똑같이 놀라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처럼 많은 돈을 눈앞에서 보는 순간, 은철이는 갑자기 가슴이 떨렸다.
“빨리 이리 줘, 빨리 갖다 주자!”
은철이는 봉팔이의 손에서 가방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봉팔이는 쉽게 가방을 내주려 하지 않았다.
봉팔이는 가방을 다시 잠그고 또 한 번 사방을 둘러보고 나서, 은철이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은철아, 이것만 있으면 우리는 구두를 닦지 않아도 돼. 남처럼 양복도 해 입고, 구두도 사신고, 연극 구경도 갈 수 있고, 영화 구경도 갈 수 있지 않아?”
그러나 은철이는 그 말이 너무나 섬뜩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봉팔이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너와 내가 절반씩 나눠 가지면 되잖아?”
“안 돼! 그런 짓을 하면 안 돼!”
은철이는 두려워서 벌벌 떨며 그렇게 외쳤다.
“쉬잇!”
봉팔이는 손으로 은철이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너무 큰 소리 내지 마!”
그러더니 무서운 눈초리로 은철이를 한번 노려보고 나서 다시 달래기 시작했다.
“이 돈만 있으면 너는 내일부터 동생을 중학교에 보낼 수가 있지 않니? 그처럼 붙기 어려운 중학교에 훌륭히 합격한 은주가 가엾지 않아? 은주가 신문을 아무리 많이 팔아도 그리고 네가 아무리 구두를 열심히 닦는다고 해도 3만 원이라는 큰돈을 어떻게 장만할 수 있겠어?”
그 순간 은철이의 머리에는 사랑하는 누이동생 은주의 가여운 모습이 번개같이 스치고 지나갔다.
지난 2월 초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한 은주였다.
은주는 집이 가난하여 중학교에는 가지 않겠다고 굳이 사양했지만, 은철이가 목을 끌다시피 하여 입학시험을 보게 했다.
“은주야, 염려 마.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너 하나 중학교에 못 보낼 내가 아니다! 이 오빠의 몸이 부서져서 가루가 되는 한이 있어도 너를 꼭 중학교에 보내고야 말 테다!”
입학시험이 내일로 임박한 그 전날 밤, 반딧불이가 곱게 날아다니는 돈암동 산언덕 위에서 두 오누이가 눈물을 흘리면서 주고받던 이야기가 다시금 은철이의 기억에 새로워진다.
“자아, 우물쭈물할 때가 아니야. 내가 이 가방을 갖고 슬쩍 도망칠 테니 너는 모르는 척하고 그 자리에 가 있어!”
“주인이...... 주인이 오면 어쩌려고?”
은철이는 약간의 유혹을 느끼면서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
“모른다고 하면 되지......”
“그래도, 그런 거짓말을 어떻게 하니?”
“야, 이 바보야! 모른다고 버티면 된대도 그래! 모른다는데 가방 주인이 어떡할 수 있어?”
“그래도...... 그래도...... 그런 거짓말을 어떻게......”
은철이의 마음이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돈 3만 원만 있으면 은철이는 오빠로서 책임을 다할 수가 있다. 그처럼 철석같이 장담했던 약속을 끝내 저버리지 않으면 안 될 자기의 무능함을 은주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은철이는 지난 여름만 해도 방직공장에 다녔으나, 그 공장이 망하게 되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하는 수 없이 구두닦이로 나섰다.
그 동안 은철이는 야학에 다니던 것도 그만두고 오로지 은주의 입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제대로 먹지도 않고, 입을 것도 제대로 입지 않고 푼푼이 1만 원쯤 모았다. 은철이는 나머지 2만 원을 장만하기 위해 어머니와 의논한 결과, 돈암동 언덕 위에 까치둥지처럼 널빤지로 지어진 자기 집을 팔고, 바로 그 밑에 방공굴을 사서 살 생각으로 며칠 전부터 집을 내놓았다.
은철이는 3만 원에 집을 팔고 1만 원에 방공굴을 사면 2만 원이 남을 테니까, 그 동안 모아 두었던 1만 원을 합하여 은주의 입학금을 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일조차 쉽사리 되지 않아서 빨리 집이 팔리기만 기다리고 있는 사이, 은주의 입학식 날이 내일로 다가온 것이다.
은철이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은철이의 마음이 약해진 탓이다. 눈앞에 있는 돈에 대해 검은 마음이 생긴 증거였다.
“자아, 어서 내 말대로만 해! 단성사 앞에서 기다릴 테니, 신사가 왔다가 돌아가거든 그리로 와! 그러면 이 돈 절반을 네게 줄게!”
그러나 은철이는 대답을 못하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만 했다. 불길처럼 일어나는 돈에 대한 욕망과 그 욕망을 억누르려는 정의의 채찍, 그 두 마음 사이에서 은철이는 어쩔 줄을 모르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옳은 일이 아니었다.
“안 된다! 안 돼!”
은철이는 이렇게 외치면서 봉팔이의 손으로부터 손가방을 빼앗으려고 달려들었다.
“이리 내놔! 어서 그 가방을 이리 내놔!”
“이 바보 같은 자식이!”
그 순간 봉팔이는 고함을 치면서 은철이의 턱을 갈겼다. 은철이는 비틀비틀 쓰러지려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봉팔이에게 달려들었다.
“그 가방을 내놔! 그건...... 나쁜 짓이야!”
이리하여 두 소년은 가방을 사이에 두고 무서운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은철이의 힘으로는 자기보다 두 살이나 위인 봉팔이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마침내 은철이는 봉팔이에게 깔려 땅에 나동그라졌다. 깨알곰보 봉팔이는 은철이의 배 위에 말을 타듯이 올라탔다. 그러고는 깨져 나간 벽돌장을 움켜쥐고 은철이를 향해 내리치려다가 문득 손을 멈추며 나지막이 말했다.
“네가 계속 달려들면 이 벽돌장으로 네 머리를 부서뜨리고 말 테야, 알겠니? 알았으면 잠자코 네 자리로 돌아가!”
그러면서 봉팔이는 은철이를 잡아 일으켜 힘껏 등을 떠밀었다. 그 순간, 은철이는 봉팔이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가방을 재빨리 빼앗아 쏜살같이 전차 정류장으로 달렸다.
“저 자식...... 저 바보 같은 자식이......”
붉으락푸르락하며 뒤를 따라오던 깨알곰보는, 사람의 눈이 수없이 많은 큰길이라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