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소학일본역사보충교재교수참고서/권2/9. 대원군의 집정

교수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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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과에서는 전(前) 과에 이어 이 태왕(李太王)이 나이가 어려서 즉위한 사정을 설명하고, 재위 44년 중 처음 10년간에 걸친 대원군(大院君) 집정(執政)과 관련된 중요한 사항들을 알려 주어야 한다.

강의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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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태왕의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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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哲宗) 【제25대】 이 세상을 떠났는데 후손이 없었다. 때문에 종실(宗室)은 흥선군(興宣君) 【휘(諱)는 하응(昰應)】 의 둘째 아들 【휘는 희(熙)】 을 선택하여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이때가 메이지(明治) 천황이 즉위하기 4년 전으로, 고종의 나이는 고작 12세였다. 고종의 즉위와 동시에 생부(生父) 【흥선군】 는 대원군(大院君)에, 생모(生母) 【민씨(閔氏)】 는 부대부인(府大夫人)에 봉해졌다. 전례에 따라 처음에는 조대비(趙大妃) 【익종(翼宗)의 비】 가 잠시 수렴청정을 하였지만 정치의 실권은 오로지 대원군의 수중에 있었다.

대원군의 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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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었으며, 또한 종래의 폐해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굳건하게 개혁을 실행하였다. 대원군이 정치에 참여하여 크게 출척(黜陟)을 단행하였는데, 우선 전대(前代)부터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외척인 김씨 일족을 파면하고, 조금도 당파에 구애되지 않고 새로 인재를 등용하였다. 또 당시의 서원(書院)은 유림(儒林)들이 함부로 정치를 비방하는 장소에 불과하였으므로, 명을 내려 그 대부분을 철폐하게 하는 등 종래의 잘못된 풍습들을 과감하게 타파하는 데 힘썼다. 이에 더해 풍속을 개량하여 사치와 문약(文弱)의 폐해를 바로잡고, 제도를 개혁하여 행정의 쇄신을 꾀하였으며, 동시에 군비(軍備)를 가다듬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국정에서 가장 긴요한 일들이었다. 그러나 궁궐을 장엄하고 화려하게 하여 위엄을 보이려고 당시 폐허가 되어 있던 경복궁(景福宮)의 재건을 시도하였으며, 여기에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자 특별히 인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관작(官爵)을 수여하고 금전을 바치게 하였다. 또한 명을 내려 큰 돌과 좋은 목재를 수집하게 하였으므로 백성들의 고통은 심각하였지만 조금도 그것을 개의치 않았기 때문에 크게 인심을 잃었다. 또 대원군은 청나라 이외의 여러 외국에 대해서는 굳게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을 취하여, 이들과 평화적 교류를 하는 것을 피하였으므로 스스로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져 국운(國運)의 진보를 저해한 바가 적지 않았다. 이에 대해 다시 아래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천주교의 금지와 쇄국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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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천주교가 국가에 이롭지 않다고 여겨 그것을 박멸하려고 하였으며, 당시 몰래 조선에 들어와 포교하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 9명을 체포하여 처형하였으며, 동시에 많은 신도들을 사형에 처하였다. 그리하여 경성(京城)과 지방에서 살해된 사람은 만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게이오(慶應) 2년, 이 태왕 3년】 이때 프랑스 선교사 한 사람이 간신히 중국으로 도망쳐 자기 나라 함대 사령관에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하였다.

프랑스 함대가 공격해 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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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와서 포격을 가하고 마침내 군대를 상륙시켜 강화 읍성을 점령하였다. 그렇지만 대원군은 8도에 격문을 전하여 군대를 징집하고 프랑스군을 방어하였으므로, 프랑스 군대는 결국 이로울 게 없자 강화를 점령한 지 고작 26일 만에 【음력 9월 8일부터 음력 10월 4일까지】 성에 불을 지르고 중국으로 갔다. 이리하여 대원군은 서양 여러 나라들이라 할지라도 결코 무서워할 게 없다고 하여 더욱 양이(攘夷)의 결심을 굳혔으며 한층 방비를 엄격하게 하였다.

미국 함대가 공격해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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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함대가 공격한 일이 있고 5년 후에 미국의 함대도 역시 강화도에 왔다. 이보다 먼저, 미국의 상선(商船)은 일찍이 대동강에 왔는데, 그 선원이 지방의 주민들과 충돌하여 배가 불타고 선원들도 역시 살해된 적이 있었다. 【게이오 2년, 이 태왕 3년】 미국 함대가 왔을 때는 바로 미국은 일본과 통상조약(通商條約)을 체결한 후로서, 위의 사건에 관해 조선 정부와 교섭하고, 또한 무역을 시작하는 조약을 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강화도 포대(砲臺)의 수비병들은 그들을 보고 포격을 가하였으므로, 미국 함대에서는 육전대(陸戰隊)를 상륙시켜 격렬한 전투를 치른 후에 연안의 포대 일부를 점령하였다. 이때 조선의 군대는 잘 싸웠지만 중군(中軍)의 장수인 어재연(魚在淵)이 전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함대 사령관은 도저히 조약에 대한 상담을 시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곧바로 중국으로 돌아갔다. 【메이지 4년, 이 태왕 8년】

일본의 권고에 불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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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이 태왕이 즉위하기 5년 전 【안세이(安政) 5년】 에, 구미(歐美) 여러 나라들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태왕 4년에 해당하는 해 【게이오 3년】 에 메이지(明治) 천황이 즉위하시고, 같은 해에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직책을 물러나 천하의 정치[大政] 를 반환하였다. 이 때문에 이듬해 【메이지 원년】 정월에 각국 공사(公使)들에게 천황이 친정(親政)하는 일을 알리고, 이어서 조칙을 발표하여 널리 세계에서 지식을 구하는 것을 국시(國是)로 정하셨으며, 【같은 해 3월】 외국과의 교류를 더욱 친밀히 하려고 하셨다. 특히 주변 국가인 조선과의 교류는 도쿠가와(德川) 바쿠후(幕府) 말경부터 끊겼으므로, 이를 회복시키려고 종래 조선과의 관계가 깊은 쓰시마(對馬) 도주(島主) 【소 시게마사(宗重正)】 에게 명하여 이 일을 맡게 하였다. 【같은 해 3월】 특히 사절을 조선에 파견하여 대정유신(大政維新)의 취지를 알리고, 또한 옛날과 같이 수호(修好)를 권하셨다. 【같은 해 10월】 그렇지만 이때 대원군은 바로 프랑스 함대를 격퇴한 후여서 의기양양하게 쇄국양이의 결심을 굳힌 때였으므로 완고하게 이 권고에 응하지 않았으며, 소 시게마사의 사신이 가지고 간 서신에 대해서는 그 서식(書式)이 도쿠가와 바쿠후 시대의 것과 다르다는 이유로 여러 해가 지나도록 아무런 확답을 하지 않았다.

대원군의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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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대원군은 안으로는 왕비인 민씨(閔氏)와 갈등이 생겼으며, 밖으로는 그의 정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형세였는데, 때마침 최익현(崔益鉉)과 그 밖의 사람들이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대원군의 정치를 비난하였다. 최익현은 결국 제주도에 유배되었지만 이들의 상소는 대원군의 위세에 큰 상처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이때 이 태왕은 나이가 이미 22세에 달하였으므로, 왕비를 비롯한 그의 일족들 가운데 국왕이 친정하게 하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리하여 대원군은 은퇴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병이 났다 하여 북문(北門) 밖에 있는 산장(山莊)에 칩거하였다. 【메이지 6년, 이 태왕 10년】 대원군은 처음으로 국정에 관여하고 나서부터 이때까지 10년 만이었다.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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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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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은 휘(諱)가 하응(昰應)이고, 자(字)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라고 한다. 이조(李朝) 제16대 왕인 인조(仁祖)의 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의 후예이다. 먼저 그의 계보도를 간략히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대원군은 순조 20년 【일본 분세이(文政) 3년】 12월에 경성 안국동(安國洞)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영의정에 추증된 민치구(閔致久)의 딸이다. 3남 3녀가 있었는데, 적장자(嫡長子)를 재면(載冕)이라 하였으며, 둘째가 이 태왕(李太王)이 되었다. 또 서장자(庶長子)를 재선(載先)이라고 불렀다.

이 태왕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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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哲宗) 14년 【분큐(文久) 3년】 에 왕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익종(翼宗)의 왕비 조씨(趙氏) 【순조의 세자 대(旲)는 한때 국정을 대리하였지만 즉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때문에 익종이라고 추존되었으며, 후에 다시 문조(文祖)로 추존되었다.】 는 왕실의 존장(尊長)이었던 까닭에 흥선군(興宣君)의 둘째 아들을 봉작(封爵)하여 익성군(翼成君)이라 부르고, 정원용(鄭元容)을 원상(院相)으로 삼았으며, 【원상이란, 왕이 죽은 다음 임시로 정무를 담당하는 직책이다.】 영의정 김좌근(金左根) 등을 보내 익성군을 흥선군의 사제(私第)에서 맞이하고, 익종의 법통을 계승하여 제26대 왕위에 즉위하게 하였다. 이 왕이 바로 이 태왕(李太王)으로, 이때 나이가 12세였다. 이리하여 대왕대비(大王大妃) 조씨(趙氏) 【대왕대비는 익종의 왕비 조씨의 존칭이다.】 가 수렴청정을 하여 3년 2월까지 계속 정무를 총괄하였다.

흥선 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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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태왕의 즉위와 함께 흥선군은 왕의 생부인 까닭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으로 봉해지고, 그의 부인은 왕의 생모로서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에 봉해졌다. 이때 대원군은 44세, 부인은 46세였다. 흥선대원군이 들어서면서부터 대원군이란 대통(大統)을 승계한 국왕의 실부(實父)를 이르는 작호(爵號)가 되었으며, 부대부인(府大夫人)이란 왕의 생모를 이르는 작호가 되었다. 후에 이 태왕이 황제(皇帝)라고 칭하게 되자 대원군을 대원왕(大院王)에 추봉(追封)하였다. 【메이지 40년 8월】 국왕의 즉위할 때 생존한 대원군이 있었던 경우는 아직 전례가 없었다.

대왕대비는 교지를 내려 백관(百官)과 관리들로 하여금 사무를 대원군에게 먼저 아뢰도록 하였으므로, 국가의 실권은 대원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때문에 이 태왕 10년 【메이지 6년】 에 대원군이 은퇴할 때까지를 임시로 대원군의 집정 시대라고 한다. 대원군은 그가 집정하던 기간에 매우 슬기롭고 용감하게 결단하여 내정(內政)을 크게 진흥시키기 위하여 자기의 세력을 확장하려고 하였다. 먼저 전 시대의 외척인 김씨 일족 중 요직에 있는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고, 자기의 수족들로 그들을 대신하게 하였다. 또 새로 인재를 등용하면서 추호도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의 사색(四色)에 관련짓지 않았으며, 종래에 직책에 오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던 서북인(西北人), 개성인(開城人)에게도 역시 높은 직책을 허락하였다. 그러므로 종래 당쟁의 소굴이자 선비들의 횡포의 중심으로 간주되던 서원(書院), 향사(鄕祠)의 철폐를 단행하였으며, 제도를 개선하고 재정(財政)을 넉넉하게 하였으며, 지나치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을 경계하고 풍속을 바로잡았다. 또한 경복궁(景福宮)의 건설을 시도하여 서민들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추호도 그것을 개의치 않고 왕가(王家)의 위엄을 내보였다. 저 『대전회통(大典會通)』 등의 법전(法典)들도 역시 이 기간에 편찬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정치는 좋은 면이 적지 않았지만 인민이 고통을 받는 점도 역시 많았다.

이 태왕 3년에 서교도(西敎徒)의 소탕을 감행하였으며, 그 때문에 프랑스 함선이 침략해 오자 그들을 강화에서 물리쳤고, 또 8년에 미국 군함이 다가오자 이들도 역시 강화에서 물리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대원군은 유럽 여러 나라들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쇄국양이(鎖國攘夷)의 방침을 고수하고, 일본이 조선과의 우호를 회복하려고 하였지만 그것도 응하지 않았다. 종래 사대주의에 따라 복종하여 섬기던 중국 외에는 어떤 외국과도 교류하는 것을 피하였으므로, 세계의 진취적인 움직임에 심각하게 뒤처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대원군의 집권이 점차 길어지자 실정(失政)도 역시 점점 드러나 인심을 잃었으므로, 최익현(崔益鉉) 등은 상소를 올려 그를 탄핵하기에 이르렀다. 【10년】 이리하여 대원군은 결심하여 이 태왕 10년에 54세의 나이로 벼슬에서 물러나 북문(北門) 밖의 산장(山莊)에 칩거하면서 때때로 산과 들을 거닐었다. 이에 앞서, 대원군은 그의 부인의 일족인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삼기로 하고, 3년 3월에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그러나 왕비 민씨는 궁궐에 들어온 후 오래지 않아 대원군과 사이가 나빠졌는데, 민씨 일족인 민승호(閔升鎬) 【민치록의 양자】 와 민태호(閔台鎬) 등은 연달아 등용되어 중추적인 정무에 관여하였으며, 특히 대원군이 은퇴한 후에는 국정을 좌우하여, 대원군의 방침을 완전히 바꾸고 대원군과 같은 편이었던 사람들을 몰아냈다. 이에 더하여 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인 이재선(李載先)은 대역(大逆)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았으므로, 【이 태왕 18년, 메이지 14년】 【제10과 비고 5 「이재선(李載先) 사건」 참조】 대원군 일파와 민씨 일파의 거리는 더욱 멀어져, 그들의 충돌은 조만간 피하기 어려운 형세였다. 때마침 임오년(壬午年) 【이 태왕 19년, 메이지 15년】 에 훈국(訓局)의 병사들이 난을 일으키자 대원군은 다시 나와서 잠시 그 국면에 대처하였다. 이때 청나라 정부는 신속히 장병들을 조선에 파견하여 소란을 진압하였으며, 또한 계략을 써서 대원군을 천진(天津)으로 연행해 갔으며, 그때부터 보정부(保定府) 【직예성(直隷省)의 성(城) 소재지】 에 보냈으므로, 대원군은 이후 완전히 정계를 떠나 하는 일 없이 4년의 세월을 이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갑신년(甲申年)의 변란(變亂) 【이 태왕 21년, 메이지 17년】 후에 한국 조정의 태도가 청나라에서 떠나 러시아로 기우는 형세를 보이자, 청나라의 재상 이홍장(李鴻章)은 대원군을 귀국시켜 청나라와 한국의 밀접한 관계를 꾀하였으므로, 대원군은 이 태왕 22년 【메이지 18년】 8월에 비로소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며 이후 대부분 운현궁(雲峴宮)에서 한가하게 살았다.

31년 갑오년(甲午年) 【메이지 27년】 에 일본과 청나라 양국은 전쟁의 실마리가 생기자, 형세는 급격히 변화하여 대원군은 세 번째로 나와서 정국에 대처하였으며, 일본에 기대어 폐정(弊政)을 개혁하려고 하여, 이른바 갑오혁신(甲午革新)의 실마리를 열었지만 몇 개월 만에 은퇴하였다. 그 후 머지않아 법무협판(法務協辦) 김학우(金鶴羽) 암살 사건이 일어나, 대원군의 부하들 대다수가 이에 관련되어 사형 또는 유배에 처해졌으며, 대원군의 사랑하는 손자 【이재면(李載冕)의 장자(長子)】 이준용(李埈鎔)은 그 주모자로서 교동도(喬桐島)에 유배되었다. 【이 태왕 32년 4월】 일청전쟁(日淸戰爭) 후에는 민씨 일파가 다시 조정에서 일어나 모처럼 새롭게 뜯어고칠 기회로 나아가던 국정은 또다시 역전되었으며, 친일파는 점차 세력을 잃고 친러파가 홀로 강해졌다. 대원군은 이러한 형세를 간과할 수 없어 을미년(乙未年) 【이 태왕 32년, 메이지 28년】 8월에 갑자기 병사들을 이끌고 입궐하여, 국태공(國太公)의 이름으로 유지(諭旨)를 발표하고, 모든 친러파를 몰아내고 친일파로 정부를 조직하였다. 이 소란의 과정에서 왕후(王后) 민씨 【갑오년 12월 이후에는 왕후라고 불렀다.】 는 불행히 세상을 떠났다. 이후 대원군은 뜻을 완전히 정계(政界)에서 끊었는데, 2년이 지나 광무(光武) 원년 【메이지 30년】 12월에 부대부인이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2월에 대원군도 세상을 떠났다. 대원군은 향년 79세, 부대부인은 80세였다. 처음에는 둘 다 경성 교외의 공덕리(孔德里)에 매장되었다가, 융희(隆熙) 2년 【메이지 40년】 1월에 경기도 파주군 운천면(雲泉面) 대덕동(大德洞) 【지금의 임진면(臨津面) 운천리(雲泉里】 로 이장되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일성록(日省錄)』·『흥선대원왕묘지명(興宣大院王墓誌銘)』·『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이왕가계보(李王家系譜)』】

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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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최익현(崔益鉉)은 충청남도 정산군(定山郡) 사람으로, 호를 면암(勉庵)이며, 유생들 사이에서 성망(聲望)이 있는 유학자였다. 벼슬이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에 이르렀는데, 이 태왕 4년에 상소를 올려 시국을 논하였으므로 부승지(副承旨)에 제수되며, 이어서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진급하였다. 10년에 다시 글을 올려 대원군의 실정을 탄핵하여,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며, 12년에 풀려날 수 있었다. 13년 【메이지 9년, 병자년】 에 비로소 일한수교조약(日韓修好條約)이 체결되자 그것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흑산도로 유배되었으며 16년에 사면되었다. 광무(光武) 9년 【메이지 38년】 에 일한신협약(日韓新協約) 【이른바 보호조약(保護條約】 의 체결에 크게 반대론을 제창하였으며, 경성에 유약소(儒約所)를 설치하고, 통문(通文)을 13도에 보내 활발하게 유생들을 선동하였다. 이어서 고향으로 돌아가 광무 10년 【메이지 39년】 5월에 무리들을 모아 전라북도 태인군(泰仁郡)에서 난을 일으켜 정읍(井邑), 순창(淳昌), 곡성(谷城) 등 여러 군들을 휩쓸었다. 이때 파견된 관병(官兵)들은 그들을 순창에서 격파하였다. 최익현은 부하 11명과 함께 체포되어 경성으로 압송되었고, 쓰시마(對馬)도에 감금되었는데 이어서 병을 얻어 광무 11년 【메이지 40년】 1월 1일에 귀양지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고향 마을로 돌아와 장례가 치러졌다.

대원군 집정 기간 중 주요 사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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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大院君) 집정 기간의 주요 사항들을 편의를 위해 아래에 연월(年月) 순으로 열거하여 기록한다.

이 태왕(李太王) 원년 갑자년(甲子年) 【일본 겐지(元治) 원년】 정월 종래에 당쟁으로 진로가 막혔던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의 승진을 허락하고, 북인 강시영(姜時永)을 홍문관(弘文館) 제학(提學)으로 삼았다.

  2월 인재를 구하여 처사(處士)들을 소집하였다.

  4월 철종(哲宗) 시대부터 세도(世道)로 권세를 잡은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을 파면하였다.

  5월 『철종실록(哲宗實錄)』을 편찬하였다.

2년 을축년(乙丑年) 3월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여 의정부(議政府)에 병합하였다.

  4월 경복궁 중수(重修)를 시작하였다.

  5월 원사(院祠)로서 가장 세력이 강하였던 청주의 만동묘(萬東廟)를 철폐하였다.

  9월 『대전회통(大典會通)』을 완성하였다. 이때부터 도서의 간행이 활발하여 『양전편고(兩銓便攷)』와 『육전조례(六典條例)』도 편찬하였다.

  11월 러시아 군함 1척이 원산(元山)에 와서 통상(通商)을 요구하였다.

3년 병인년(丙寅年) 【게이오(慶應) 2년】 정월 천주교도의 섬멸을 꾀하여 서양인 선교사 및 조선인 교도(敎徒)들 다수를 살육하였다.

  3월 경복궁 영건소(營建所)에 불이 났다.

  같은 달 민치록(閔致祿)의 딸이 왕비에 책봉되었다.

  7월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에 들어가 참화(慘禍)를 일으켰다.

  9월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로 공격해 왔다.

  같은 달 이항로(李恒老)가 상소를 올려, 토목(土木)을 중단하고 가렴(苛斂)을 금지할 필요를 논하였다.

  10월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포기하고 돌아갔다.

  같은 달 처음으로 서북인(西北人)과 개성인(開城人)에게 높은 벼슬을 허락하였다.

  같은 달 이경하(李景夏)를 진무사(鎭撫使)로 삼아 강화유수(江華留守)를 겸직하게 하였다. 강화유수에 무신(武臣)을 임명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다. 이는 강화도를 군사적으로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11월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하였다. 이는 경복궁 건설 비용이 부족함에 따른 것이다.

  12월 러시아인이 두만강변에서 함께 어우러져 교역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4년 정묘년(丁卯年) 【게이오 3년】 정월 처음으로 고려 왕씨의 후예들을 등용하여 왕정양(王庭楊)을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임명하였다.

  2월 경복궁 영건소(營建所)에 불이 나 목재가 모두 불탔다.

  6월 청나라의 소총(小銃)을 일반적으로 사용하였다.

  11월 경복궁 중건을 완성하였다.

5년 무진년(戊辰年) 【메이지 원년】 4월 독일인 오페르트가 덕산(德山) 【충청남도 영산군(靈山郡)】 에 잠입하여,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구(球)의 묘를 파헤치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7월 국왕은 창덕궁(昌德宮)에서 경복궁으로 옮겨갔다.

  같은 달 삼군부(三軍府)를 부활하여 변정(邊政)을 통괄하게 하였다.

  10월 최익현(崔益鉉)은 상소를 올려 시정(時政)을 논하였다.

  같은 달 일본 정부는 소(宗)씨에게 명을 내려, 조선에 국서(國書)를 보내 유신(維新)의 일을 알리고, 옛날의 우호를 체결하는 데 힘쓰도록 하였다. 조선 정부는 일본 국서의 서사(書寫)와 인장(印章)이 옛날 방식과 다르다는 이유로 회답을 거부하였다.

  11월 당백전(當百錢)을 폐지하고 청나라 돈을 사용하였다.

6년 을사년(乙巳年) 정월 대군(大君), 왕자군(王子君), 적왕손(嫡王孫), 왕손(王孫) 이외의 왕족들에게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임용되는 것을 허용하였다.

  11월 옛날에 폐지한 4군(郡)의 땅에 자성(慈城), 후창(厚昌) 【평안북도】 의 두 군을 다시 설치하였다.

8년 신미년(辛未年) 【메이지 4년】 3월 명을 내려 첩향(疊享) 서원(書院) 및 향현사(鄕賢祠)를 철폐하였다.

  같은 달 호포법(戶布法)을 시행하여 양반에게 그것을 부과하였다.

  4월 미국 군함이 강화도로 공격해 왔다. 진무중군(鎭撫中軍) 어재연(魚在淵)은 광성(廣城)에서 방어하다 전사하였다. 이어서 미군도 퇴각하였다.

  같은 달 척화비(斥和碑)를 국내의 큰 도시의 번화가나 큰 읍들에 세웠다.

9년 임신년(壬申年) 【메이지 5년】 8월 일본 외무대승(外務大丞)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수호(修好)를 위해 부산에 왔다.

10년 계유년(癸酉年) 【메이지 6년】 5월 조선 정부는 예전에 일본에서 보낸 국서에 답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동래(東萊)와 부산(釜山)의 두 사(使)는 일본인 단속에 관한 전령서(傳令書)를 발령하고 언사가 매우 무례하였다. 이리하여 본국에서 정한론(征韓論)이 들끓었다.

  11월 최익현은 다시 상소를 올려 대원군의 실정을 통렬하게 논하여 제주에 유배되었다.

  같은 달 대원군이 은퇴하였다.

인재의 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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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哲宗) 때는 왕비의 아버지 김문근(金汶根)이 외척으로서 모든 중요 정무를 결재하였으며, 그 일족은 대부분 높고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마침내 김문근은 영의정이 되었지만 철종이 세상을 떠나고 이 태왕(李太王)이 즉위하자, 대원군은 모든 김씨 일족을 물리치고 조대비(趙大妃)의 일족인 조두순(趙斗淳)을 영의정으로 삼았으며, 그 외에 자기의 복심(腹心)들을 중요한 지위에 앉혀 정치를 좌우하였다. 당시는 사색(四色) 가운데 특히 노론(老論)이 매우 강성하였던 때로 남인(南人)이나 북인(北人) 사람들은 거의 등용되는 자가 없었다. 대원군은 인재를 등용하는 데에 추호도 당파에 구애되지 않았고, 처사(處士)들을 불러 그들의 의견을 들었으며, 또한 한 가지 기예나 한 가지 능력이 있는 사람은 비록 미천한 신분이라 할지라도 각자 그의 신분에 맞게 부렸다. 서북인(西北人) 및 개성인(開城人)은 종래에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지만, 이 태왕 3년에 이를 허락하기로 하였다. 또한 고려 왕씨(王氏)의 후예는 헌종(憲宗) 무렵부터 경관(京官)에 선발되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이 태왕 4년에 왕정양(王庭楊)이라는 사람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비로소 그를 채용하였다. 종래 조선에서는 왕족은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또한 관직에 임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대원군은 정치를 장악하게 되자 이 태왕 6년에 이 제도를 철폐하고, 왕족의 일부 사람들에게 과거에 응시하고 관직에 임용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제도 개혁과 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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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와 삼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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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明宗) 때 비변사(備邊司)가 설치된 이래, 중앙 정부의 최고 기관이었던 의정부의 실권은 모두 그쪽으로 돌아가고, 의정부는 단지 이름만 있게 된 지 3백여 년이 되었다. 【제4과 비고 1 「중앙관제(中央官制)」 참조】 그 사이에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다시 복원할 것을 논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효과가 없었다. 이 태왕이 즉위하고 대원군이 정치를 살피게 되자, 이 태왕 2년에 수렴청정을 하던 조대비(趙大妃)가 명하여 비변사를 폐지하였으므로, 의정부는 비로소 그 옛 지위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어서 이 태왕 5년에 삼군부를 다시 설치하고, 상국(相國)과 병조판서(兵曹判書) 등으로 하여금 그 직책을 겸하도록 하고, 변정(邊情)의 업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제도 개정의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호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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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포법은 고려 말부터 시행되었으며, 군수(軍需)에 충당하기 위해 각 호(戶)로부터 포(布)를 징수하는 제도이다. 이 법은 조선 시대가 되어 태종(太宗) 10년에 폐지되었다. 【제2과 비고 1 「태종과 세종의 치세 중 중요한 사항」 참조】 그 후 언제부터인가 군포(軍布) 징수법이 시행되었다. 이 법은 군적(軍籍)에 있는 장정 가운데 복역하지 않는 사람에게 일정한 마포(麻布) 【신포(身布)라고 부른다.】 를 상납받는 것이다. 그런데 군역은 처음에 위로는 종친(宗親)과 사족(士族)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그것에 복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선조(宣祖) 무렵부터 사족 이상은 군역에 복무하지 않았으며 또한 신포(身布)를 납부하지도 않아, 그 결손액을 일반 양민들에게 징수하게 되어 백성들은 큰 고통을 당하였다. 때문에 그것을 ‘양역(良役)의 폐단’이라고 불렀으며, 그 치유책은 수백 년 동안의 문제였다. 이 태왕 8년에 이르자 대원군은 명하여 엄격히 호구(戶口)를 조사하고, 양반 즉 사족에게는 군역을 부과하지 않는 대신 호(戶)마다 반드시 노예의 숫자에 따라 호포를 내도록 하였으며, 서민은 종래대로 신포를 내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서민들은 한편으로는 그 과중함을 면하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누구라도 그것을 부담하지 않는 자가 없게 되었다.

『대전회통』 및 그 외의 법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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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영의정 조두순(趙斗淳) 등에게 명하여,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정조(正祖) 이후의 교령(敎令)과 정식(定式)을 보충하여 편집하도록 하였다. 【이 태왕 2년】 그와 동시에 『양전편고(兩銓便攷)』, 『육전조례(六典條例)』도 편성하고 서로 보완하여 완비하도록 하였으며, 또한 『춘관통고(春官通考)』 천여 권을 교정하여 이조(李朝)의 고사를 편집하였다. 【제4과 비고 8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그 후의 법전(法典)」 참조】

경복궁의 중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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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景福宮)은 조선 태조(太祖) 3년에 창건된 것인데 그 후 약 2백 년이 지나 임진란(壬辰亂) 때 난민(亂民)들이 불을 질러 훼손되었다. 그로부터 270여 년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재건을 시도하였지만 이루지 못하다가, 이 태왕 2년 【일본 게이오(慶應) 원년】 4월에 이르러 다시 교서(敎書)로 경복궁의 중건(重建)을 발표하고 대원군이 그것을 주관하였다. 중건을 위하여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하고, 조두순(趙斗淳)과 김병학(金炳學)을 도제조(都提調)에, 이경하(李景夏)와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 【대원군의 형】 등을 제조(提調)에 임명하여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공사가 시작될 무렵 박경회(朴慶會)라는 사람이 경성(京城)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는 석경루(石瓊樓) 터에서 옥배(玉杯)를 얻었다고 하면서 그것을 바쳤다. 이 배(杯)의 명문(銘文)에 “壽進寶酌”이라는 글과 대원군의 성운(盛運)을 축하하는 의미의 문장이 있었다. 이 때문에 여러 신하들은 축하의 말을 올렸으며, 대원군은 그것을 이용하여 건설의 기세를 높였다. 건설의 재원은 주로 원납전(願納錢) 【원납전의 본뜻은 스스로 원해 돈을 상납하는 돈을 의미하지만, 이때는 관작(官爵)을 주겠다고 공언하여 돈을 기부하게 하고 그것을 원납전이라고 불렀다.】 에 의지하였으며, 그 징수한 금액은 기공(起工) 【2년 4월】 부터 준공(竣工) 【5년 7월】 까지 모두 약 740만 냥의 거액에 달하였다. 재원의 징수는 단지 원납전에 그치지 않고, 결두전(結頭錢) 【결두전은 전답(田畓)의 세곡(稅穀)에 부가하여 징수하는 금액을 말한다.】 을 고율로 인상하기도 하였고, 혹은 도성 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문세(門稅)를 부과하거나 검전(檢田)을 실시하여 가혹한 세금을 부과하기도 하였고, 혹은 문무(文武) 관리들의 봉록(俸祿)의 일부를 떼어내어 헌납하게 하는 등 주구(誅求)가 극심하였다. 대원군은 이들 재원으로도 여전히 경비가 부족하다는 보고를 받자 화폐제도를 고침으로써 그것을 미봉하려고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하였고, 【3년】 이어서 또한 그것을 폐지하고 청나라 화폐를 대신 사용하기도 하였다. 【5년】 당시 곡식이 여물지 않았으므로 위와 같은 수단을 선택하여, 경제계(經濟界)는 갑자기 혼란스러워 동요하였다. 이 때문에 민간에서는 큰 반항의 기세가 격렬해졌다. 또 대원군은 궁전 건립에 필요한 큰 돌이나 큰 나무들을 전국에서 징발하였는데 민간에서 제사 지내는 것도 고려하지 않았고 분묘에 심어 놓은 나무조차도 벌채하여, 조금도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백성들을 내몰아 활발히 공사에 종사하도록 하였지만, 백성들은 그것을 매우 꺼려하여 쌓아 놓은 목재를 불태우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경복궁은 이 태왕 4년 11월에 완공되었으며, 이듬해 【메이지 원년】 7월에 국왕은 창덕궁(昌德宮)에서 경복궁으로 옮겨가 살았다.

서원의 철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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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書院)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큰 폐해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서술한 바와 같다. 【제4과 비고 7 「서원(書院)」 참조】 서원에서 유생들은 항상 정치를 비방하고, 서민에 대한 횡포가 극심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 통의 서간(書簡)을 작성하고 거기에 묵인(墨印)을 찍어 군(郡), 현(縣)에 보내서 서원제수전(書院祭需錢)을 모았으므로, 양반들은 물론 일반 서민들도 주머니를 털어 그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응하지 않는 사람은 서원에 끌고 가 혹형(酷刑)을 가하였다고 한다. 당시 서원과 사당 가운데 가장 세력이 있었던 것은 송시열(宋時烈)을 제사 지내는 화양서원(華陽書院)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및 만동묘(萬東廟) 【송시열 사후에 유명(遺命)에 따라 문인들이 설립한 것으로,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 두 황제를 제사 지내는 사당.】 로서, 화양서원이 발행한 서간을 화양묵패(華陽墨牌)라고 하여 유명하였다. 이와 같이 백성들은 이미 탐관오리들에게 고통을 받고 있던 데다, 서원 유생들의 혹독한 대우까지 받음으로써, 거의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폐해를 잘 알고 있던 대원군은 단호히 그것을 뿌리 뽑으려고 먼저 조대비의 교지로써 만동묘를 철폐하고, 【이 태왕 2년 5월】 이어서 8년 3월에 8도의 첩향서원(疊享書院) 【한 사람의 유학자에 대해 두 개 이상의 서원을 짓고 제사지내는 것】 과 향현사(鄕賢祠) 【서원에 버금가는 것】 를 철폐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도학(道學)과 충절(忠節)이 특별히 뛰어난 사람에 대해서만 한 곳의 서원이나 향현사를 두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그 외에는 모두 헐어버리도록 하고 일찍이 이들에게 하사하던 전결(田結)을 몰수하였다. 또한 사원과 향현사의 새로운 설치를 엄격히 금지하고, 꼭 제사를 지내야 할 사람이 있으면 이미 설립되어 있는 적당한 사원이나 향현사에 배향(配享)하도록 하였다. 만약 그에 대해 명을 받들지 않는 군이나 현이 있으면 그 수령을 엄벌에 처하였기 때문에 각 도(道)에서는 무서워 떨면서 일시에 원사(院祠)의 철폐를 실행하였다. 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만약 서민을 침탈하는 지방 사족(士族)이 자가 있으면, 그를 처벌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였으므로 사족들은 크게 숨을 죽였다. 이리하여 정조(正祖) 때 650개를 헤아리다가 그 후 약간 증가하였던 서원도 이때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고작 47개에 불과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조두록(俎豆錄)』·『동국문헌록(東國文獻錄)』·『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 등】

풍속의 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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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무신(武臣)이 문약(文弱)한 폐해를 바로잡으려고, 무신이 가마에 타는 것을 금지하고 공사(公私)의 출입에 모두 말을 타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안장에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누구나 크게 힘들어하였다. 또 만주에서 말을 구입하여 백성들 중 부유한 자에게는 그 재산에 따라 배당하여 사육하도록 하였으므로, 부유한 백성들은 이를 힘들어하여 뇌물을 바치고 책임을 면제받으려 하였는데, 그 때문에 종종 파산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대원군은 또 풍속을 개량하려고 의복과 탈것의 제도를 정하였는데, 일반적으로 갓을 작게 하고 소매를 좁게 하였으며 백피혜(白皮鞋)나 비단신을 신는 것을 금지하였고, 모두 흑피혜(黑皮鞋)를 신도록 하였다. 조관(朝官)의 주영(珠纓)은 길게 하여 그것을 말아서 왼쪽 뺨에서 묶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그 끈을 짧게 하여 오늘날과 같이 턱 밑에서 묶어 그것을 곧바로 늘어뜨리는 모양이 되었다. 사민(士民)에게는 칠죽(漆竹)이나 나무 열매로 갓끈을 만드는 것을 허락하고, 비단을 이용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요컨대 그 취지는 문약하고 화려한 폐해를 없애려는 데 있었다.

천주교도의 살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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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천주교는 철종(哲宗) 【제25대】 때 비교적 관대하게 다루어졌었으므로 점점 반도 내에 만연되었다. 이 태왕(李太王) 【제26대】 때에 이르러 왕의 유모(乳母)인 박씨(朴氏)와 전 승지(承旨) 남종삼(南鍾三)과 홍봉주(洪鳳周) 등이 천주교를 깊이 신봉하였으며, 홍봉주는 이 종교의 감독(監督)인 프랑스 선교사 베르누 【Berneux, 장경일(張敬一)】 를 그의 집에 머물게 하였다. 때마침 이 태왕 2년 【게이오(慶應) 원년, 서기 1865년】 11월에 러시아 군함 한 척이 원산(元山)에 와서 통상을 요청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이에 더하여 북쪽 변경의 국경에서 조선 인민들과 러시아 인민들의 충돌이 점차 빈번해졌다. 남종삼 등은 이 기회에 편승하여, 프랑스의 지원을 끌어들여 천주교를 쉽게 포교하려고 영국·프랑스와 결합하여 러시아를 방어하는 계책을 세워 대원군을 설득하였다. 대원군은 그것을 받아들여 각지에 숨어 있는 선교사들을 경성으로 불러들이고, 한편으로는 몰래 그 사정을 정탐하였지만, 이 태왕 3년 【게이오 2년, 서기 1866년】 봄에 이르러 대원군의 태도는 갑자기 확 바뀌었다. 즉 좌우 포도청(捕盜廳)에 명하여 교도들을 검거하도록 하고, 정월 5일에 신도인 전장운(全長雲), 최형(崔炯) 등의 체포를 시작으로 남종삼, 홍봉주, 남상교(南尙敎) 【남종삼의 아버지】 까지 체포하였으며, 베르누를 비롯하여 프랑스 선교사 9명도 체포하여 모두 살육하여 효수하였다. 【1월 20일부터 2월 7일까지의 사이에 처형되었다.】 당시 프랑스 선교사로서 반도에 있던 사람은 12명이었는데 겨우 리델 【Ridel, 이덕아(李德兒)】 등 3명만이 도피하여 참화를 면하였다. 5월에 리델은 어선을 타고 지부(芝罘)로 건너갔으며, 거기에서 천진(天津)에 도착하여, 프랑스 해군 제독 로즈 【Roze, 노세(魯勢)】 를 만나 상황을 호소하였다. 같은 해 가을, 다른 두 선교사도 중국 밀항선을 타고 지부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대원군이 천주교도의 소탕에 착수한 후부터 그 교도들을 탐색하는 것을 매우 서둘렀으므로, 양민(良民)을 억지로 속임수에 빠뜨려 성과를 올리려는 사람도 나타났다. 특히 3년 【게이오 2년, 서기 1866년】 및 8년 【메이지(明治) 4년, 서기 1871년】 에 프랑스 군함과 미국 군함이 공격해 온 적이 있었지만 그들을 모두 물리칠 수 있었으므로, 대원군은 구미 제국들을 편들기 쉽다고 하여, 서교도(西敎徒)를 더욱 심하게 박해하여 각지에서 양반과 평민들로서 살육당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다. 그런데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박해는 이 태왕 10년 【메이지 6년, 서기 1873년】 에 대원군이 정권을 잃으면서부터 비로소 그 자취를 감추고, 천주교는 포교의 자유를 얻기에 이르렀다. 【달레(Dallet) 저, 『조선교회사(朝鮮敎會史)』,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그리피스(Griffis) 저, 『조선(朝鮮)』 등】

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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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대동강변 부벽루(浮碧樓)의 서쪽 고지대에 현존하는 정지용척사비(鄭志鎔斥邪碑)는 당시의 기념물로서, 이 비에는 사류(邪類) 【천주교도】 를 체포하여, 그 수괴를 곤장을 쳐 강물에 던지고, 그 책을 불살랐으며, 그 패(牌)를 깨뜨린 일이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 군함이 공격해 온 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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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리델이 천진(天津)에 와서 제독 로즈에게 조선에서 수난을 당한 사정을 알리자, 로즈는 청나라 주재 프랑스 공사(公使) 벨로네 【Bellonet】 와 계책을 세우고, 본국 정부의 허락을 얻을 겨를도 없이 곧바로 원정을 결정하였다. 아마 벨로네는 서기 1860년 【조선 철종 11년】 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북경 침입에 성공한 것을 회상하고, 또 당시 프랑스 황제인 나폴레옹 3세의 강력한 위세를 믿고, 원정의 일을 가볍게 여겼을 것이다. 이때 벨로네는 청나라 정부에 조선의 일을 비난하였으므로, 청나라는 이 태왕 3년 【게이오 2년 병인년, 서기 1866년】 7월 【양력 8월】 에 조선 정부에 서한을 보내 주의를 주었으며, 또한 프랑스 군함이 습격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대원군은 명령을 내려 활발하게 성곽을 수리하게 하고, 특히 강화도의 포루(砲壘)를 증축하도록 하였는데, 과연 8월 11일 【양력 9월 21일】 에 프랑스 군함 2척이 강화해협에서 한강을 거슬러 오르며 산하(山河)의 형세를 정찰하였다. 그런데 9월 【양력 10월】 에 프랑스 군함 7척이 다시 경기(京畿) 연해(沿海)에 다가왔으며, 같은 달 8일 【양력 10월 6일】 에 프랑스군은 갑자기 상륙하여 강화성(江華城)을 공격하였으므로, 유수(留守) 이인기(李寅夔)는 성을 포기하고 도망쳤다. 프랑스인들은 또한 같은 달 18일 【양력 10월 26일】 에 강화도의 건너편 해안인 통진(通津)에 군대를 보내 경성으로 가는 통로를 확보하였다. 프랑스군은 강화를 차지한 지 한 달쯤 되자 청사(廳舍)를 불사르고 사람과 가축들을 해쳤으며, 또한 화물과 전적(典籍) 등을 많이 약탈하였다.

이때 순무사(巡撫使) 이경하(李景夏)는 경성을 엄격히 경계하고,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요충지를 지키게 하였으며, 병사들을 크게 징발하여 방비를 단단히 하였다. 유격장(遊擊將) 양헌수(梁憲洙)는 강화도 남쪽은 아직 적이 차지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고, 산포수(山砲手) 【산과 들에서 사냥을 하는 엽사들로 이루어진 부대】 5백여 명을 이끌고 밤을 틈타 정족산성(鼎足山城)에 웅거하였다. 제독 로즈는 그를 정찰하여 알아내고, 10월 13일 【양력 11월 9일】 에 160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그들을 공격하였지만, 조선군은 잘 싸워 프랑스 병사들은 결국 이기지 못하고 사기가 저하되었다. 이에 제독은 명령을 내려 강화를 불태우고, 전에 출병하여 대치하고 있던 통진산성(通津山城)도 포기하고, 4일 밤에 승선하여 영종도 앞바다의 정박소로 물러났으며, 그 후 며칠이 지나 조선을 떠났다. 프랑스 군대가 패배하여 물러난 것은 대원군으로 하여금 자신의 군대가 서양의 군대를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이로 인해 배외(排外)의 기세는 점점 드세졌으며, 천주교도를 찾아내는 일은 더욱 엄격해져 살육당하는 사람이 무수히 많았다. 그런데 프랑스군이 철수한 후, 조선 정부는 쓰시마의 소(宗)씨를 통해 이 사건의 전말을 도쿠가와(德川) 바쿠후(幕府)에 알렸다. 【『순무천총양헌수승전비(巡撫千摠梁憲洙勝戰碑)』·『일성록(日省錄)』·『예조전말보고서(禮曹顚末報告書)』·그리피스(Griffis) 저, 『조선(朝鮮)』·『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당시 신문(新聞)과 역문(譯文) 등】

오페르트의 분묘 발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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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군함이 공격해 온 일이 있은 지 2년 후, 즉 이 태왕(李太王) 5년 【메이지 원년 무진년(戊辰年), 서기 1868년】 에 갑자기 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을 오페르트 분묘발굴사건이라고 한다.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Oppert)는 유태인 출신의 북부 독일인으로, 선원이 되어 동아시아 여러 항구들 간의 항해에 종사하였으며, 조선의 풍물 및 부원(富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차이나호’라는 680톤 기선(汽船)과 작은 하천을 거슬러 항해할 수 있는, 크레타호라는 소형 기정(汽艇)도 갖추어, 상해(上海)를 출발하여 나가사키(長崎)에 들렀다가 조선의 서해안으로 향하였다. 그 승조원(乘組員)은 유럽인, 말레이시아인, 중국인으로 이루어졌으며, 조선에 상륙한 목적은 옛날 대원군 때문에 천주교가 당하였던 참화에 대한 보복을 하려는 것이었다. 【미국의 상해 영사 세워드의 보고서에 의하면 조선의 왕릉을 파헤쳐 시체를 가져가 인질로 삼으려고 하였다고 한다.】 차이나호는 같은 해 4월 16일 【양력 5월 8일】 에 충청도의 아산만(牙山灣)에 도착하였는데, 다음날 아침 다시 작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 오페르트 이하 승조원들은 모두 무장을 하고 밤을 틈타 상륙하여, 18일 【양력 5월 10일】 에 그곳에서 몇 리(里) 떨어져 있는 덕산(德山) 【지금의 영산군(靈山郡) 덕산면】 에 도달하였다. 덕산은 바로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南延郡) 구(球)의 분묘가 있는 곳이다. 그들은 곧바로 남연군의 묘를 발굴하려고 하였지만, 견고하여 쉽게 관곽(棺槨)에 도달할 수 없었으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날이 곧 밝자 부근 주민들에게 발견되었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빈손으로 배에 올라타고 영종도첨사(永宗島僉使) 등이 격퇴하자 도망쳐 돌아갔다. 이 때문에 조선 정부는 조철증(趙喆增)이라는 자가 서양인과 내통하고 길잡이가 되었다고 하여 그를 체포하였으므로 조철증은 결국 자살하였다. 또 상해에서 한 미국인은 전주(錢主)로서 이 사건에 관계하였다고 하여 그를 구속하였지만 미국 영사관에서 심문한 결과 증거가 불충분하였기 때문에 면소(免訴)하였다. 【『일성록(日省錄)』·그리피스(Griffis) 저, 『조선(朝鮮)』·오페르트 저, 『금쇄국(禁鎖國)』】

미국 군함이 공격해 온 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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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사절 페리가 처음으로 일본에 온 것은, 조선 철종 【제25대】 4년 【카에이(嘉永) 6년 계축년(癸丑年), 서기 1853년】 이고, 이어서 도쿠가와(德川) 바쿠후(幕府)와 통상조약을 체결한 것은 철종 9년 【안세이(安政) 5년 무오년(戊午年), 서기 1858년】 에 해당한다. 조약이 체결된 무렵부터 미국 선박이 극동(極東)에 왕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들이 조선 근해에서 난파된 경우도 여러 차례 있었다. 이 태왕 3년 【게이오 2년 병인년, 서기 1866년】 봄, 천주교도의 소탕을 시작함에 따라 머지않아 미국 선박 서프라이즈 【Surprise】 호가 평안도 철산(鐵山) 앞바다에서 난파되었는데, 【5월 12일, 양력 6월 24일】 조선 관헌(官憲)들의 우호적인 도움으로 그 선원들은 무사히 중국으로 귀환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같은 해에 미국 선박 제너럴셔먼 【General Sherman】 호는 무장을 갖추고, 통상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 반각도(半角島)에 이르렀는데, 배의 밑바닥이 얕은 여울에 박혀 어찌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 승조원들은 지방 관민(官民)들과 충돌하여 모두 죽임을 당하고, 선체도 완전히 불태워졌다. 【7월 25일, 음력 9월 4일】 그 후 미국은 이 배의 흔적을 찾은 지 수년이 지나서 대략 그 진상을 알게 되자, 이 태왕 8년 【메이지 4년, 신미년, 서기 1871년】 4월에 해군 제독 로저스 【Rear Admiral J. Rodgers, 노적(魯籍)】 를 파견하여, 전함 몇 척을 이끌고 조선으로 가도록 하였다. 해군 제독을 파견한 목적은 아마 선박 난파의 경우에 관한 협약 및 만약 가능하다면 통상조약도 체결하려는 데 있었을 것이다. 대원군은 미국 군함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진무중군(鎭撫中軍) 어재연(魚在淵)과 판관(判官) 이창회(李昌會) 등을 파견하여 강화도 연안의 방비를 엄중히 하도록 하였다. 이미 미국 함대는 4월 중순 【양력 5월 하순】 에 강화도 근해에서 경계 태세를 갖추고 측량을 시작하였으며, 때때로 포루(砲壘)의 수비병들과 사격을 주고받았다. 4월 23일 【양력 6월 10일】 에 미군은 마침내 초지(草芝) 【강화도 동남쪽 끝】 해안에서 강화도에 상륙하여 북쪽으로 진격하여, 24일 【양력 6월 11일】 에 광성진(廣城鎭)에서 격전을 벌였으며, 마침내 그곳을 점령하였는데, 조선군은 사상자가 350명에 달하였고 중군(中軍) 어재연도 전사하였다. 미군 가운데에도 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므로, 미군은 당초의 목적이 쉽게 달성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이튿날 광성진의 남쪽 해안에서 승선하여 5월 중순까지 영종도 앞바다에 정박해 있다가 5월 17일 【양력 7월 5일】 에 지부(芝罘)를 향해 출발하였다. 이리하여 대원군은 세계 열강을 별볼일 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쇄국배외(鎖國排外)의 기세를 더욱 강화하였으며, 마침내 ‘척화비(斥和碑)’를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여러 가지 일기(日記), 영자(英字) 신문 기사(記事), 그리피스(Griffis) 저, 『조선(朝鮮)』】

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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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항(項)에서 기재한 바와 같이, 대원군은 이 태왕 8년 【메이지 4년 신미년, 서기1871년】 4월에 미국 군함의 습격을 격퇴함에 따라 사기가 급격히 앙양되었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도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주장하는 것이고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우리의 만대 자손들에게 경계하노라.(戒吾萬年子孫) 병인년에 만들어 신미년에 세우노라.(丙寅作 辛未立)

라는 문구를 돌에 새겨 8도의 주요 교차로에 세우게 하였으며, 또한 묵공(墨工)에게 명하여 묵면(墨面)에 앞에 기록된 12자와 함께 “위정척사(衛正斥邪)”라는 문구를 나타내도록 함으로써, 온 힘을 다해 배외사상을 고무시켰다. 그러나 메이지(明治) 15년 【임오년】 7월에 정변(政變)이 일어나 대원군은 청나라로 들어갔으며, 조선 정부는 일본 정부와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을 체결하고, 이어서 전 세계적 대세(大勢)에 쫓겨 여러 외국들과 교류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그 척화비는 철거되었다. 【임오년 8월】

일본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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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德川) 바쿠후(幕府) 시대에 바쿠후와 조선의 교류는 이미 서술한 바와 같다. 게이죠(慶長) 12년 【선조 40년】 에 조선은 처음으로 사절을 에도(江戶) 바쿠후에 보낸 이후 분카(文化) 8년 【순조 11년】 에 이르기까지 250년간 꾸준히 교류가 이어졌다. 그 사이에 조선에서 사절이 12회나 왔는데 그 후 12대 쇼군(將軍) 때부터 메이지(明治) 연간에 이르기까지 50~60년간은 국내의 소란과 함께 교류도 완전히 정지되었다. 안세이(安政) 5년 【철종 9년】 에 바쿠후가 단호하게 수년 동안의 쇄국주의(鎖國主義)를 포기하고, 독단적으로 미국과 통상(通商) 가조약(假條約)을 체결하였으며, 이어서 다른 여러 외국들과도 똑같은 조약을 체결하자, 당시의 식자(識者)들은 세계의 형세에 비추어,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고 서양 여러 나라들의 침략을 예방하기 위하여 우선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연합하고 화친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하였다. 당장 종래에 일본과 ‘입술[脣]과 이[齒], 광대뼈[輔]와 잇몸[車]’의 관계인 조선과 화친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였다. 이후 8년이 지나 바로 게이오(慶應) 2년 【이 태왕 3년 병인년】 에 프랑스 군함이 조선의 강화도에 와서 교전을 벌이자, 조선의 예조(禮曹)는 서한을 보내 소(宗)씨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바쿠후에 알리고 주의를 촉구하였다. 【같은 해 10월】 그런데 이 사건과 전후(前後)로 같은 해 7월에 미국 기선(汽船)인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 들어갔다가 관민(官民)과 충돌하여 그 승조원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이웃 나라의 의리 때문에 이를 못 본 체할 수 없어, 한편으로는 미국 공사와 교섭하여 미국이 곧바로 조선을 공격하는 것을 중지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절을 조선에 보내 자세하게 세계의 형세를 설명하고 그들의 미몽(迷夢)을 깨우쳐주려고, 히라야마 요시타다(平山敬忠) 및 코가 조(古賀憎) 두 사람을 사절로 임명하였다. 이들 계획은 게이오 3년 【이 태왕 4년 정묘년】 봄부터 여름에 걸쳐 실행되었는데, 같은 해 10월에 이르러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대정(大政)을 봉환(奉還)하고, 왕정(王政)은 유신(維新)되었으므로, 사절을 파견하는 일도 결국 중지되었다.

이리하여 새로운 정부는 메이지 원년 【이 태왕 5년 무진년, 서기 1868년】 1월 15일에 각국 공사들을 효고(兵庫)에 모아, 그들에게 대정(大政) 복고(復古)를 알렸다. 같은 해 3월에 쓰시마(對馬) 도주(島主) 소 요시아키라(宗義達) 【후에 이름을 시게마사(重正)로 바꿈.】 에게 명하여 조선에 대한 외교 업무를 맡게 하고, 같은 해 10월에 소(宗)씨에게 명하여 국서(國書)를 조선에 보내 유신의 일을 알리고, 또한 옛 우호를 맺자는 뜻을 전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소시는 곧장 부하를 부산에 보내 우리 국서(國書)의 사본을 조선의 관리에게 보내 중앙 정부의 의지를 전달하였지만, 조선에서는 우리 국서의 서사(書寫)와 인장(印章) 등이 도쿠가와 바쿠후(幕府) 시대의 옛 관례와 다르다는 것을 이유로 답을 하지 않았다. 이때는 분명히 쇄국배외(鎖國排外)주의를 고수하던 대원군이 프랑스인들과의 전투에서 성공한 때였으므로 일본이 서양 여러 나라들과 교류하고, 그 풍속 등을 바꾸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때문에 소씨는 서면(書面)으로 여러 번 설명하는 노력을 다하였으며, 외무성(外務省)은 특별히 관리를 부산에 파견하여 교섭하도록 하는 등, 여러 해를 보냈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우리나라 조야(朝野)에서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졌다. 그에 반해 대원군은 미국 함선을 격퇴하고 다시 성공을 거두었으므로, 그 의지는 더욱 공고해져 갔다. 메이지 5년에 정부는 도쿠가와 바쿠후 때부터 쓰시마의 소씨에게 위임해 오던, 조선에 관한 외교 사무와 왜관(倭館)의 관할을 거두어들이고, 일체를 외무성이 직접 관할하도록 하고, 외무대승(外務大丞)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외무소기(外務少記)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를 부산에 보내 이 취지를 전달하게 하고, 나중에 수교조약을 체결할 시기에 이르기까지 임시로 편의 조치를 취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소씨와 조선이 오랜 기간 맺은 관계는 완전히 끊어졌으므로 조선 관헌들은 왜관의 관리에 대해 극도로 냉혹해져 종래에 유지해 오던 땔감 등의 물품의 공급도 중지시켰다. 메이지 6년 【이 태왕 10년 계유년, 서기 1873년】 에 동래부사(東萊府使)와 부산첨사(釜山僉使)는 일본인 단속에 관한 전령서(傳令書)를 발령하였는데 그 내용이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조선은 유신(維新) 이래 여러 번 보낸 우리의 사절(使節), 문서(文書)를 거부하고 그에 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 이처럼 무례한 전령서를 게시하여 더욱 우리를 업신여겼으므로, 정한론은 본국에서 더욱 들끓었다. 정부 부처에서는 사이고 타카모리(西鄕隆盛)를 특파대사(特派大使)로 한국 조정에 파견하기로 내정하였는데, 마침 유럽을 시찰하고 돌아온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 등의 반대에 부딪혀 중지되었다. 이것은 바로 메이지 6년 10월의 일인데, 같은 해 11월에 대원군은 나이가 들어 정치에서 물러나 있었고, 조선의 정권은 외척인 민씨(閔氏)의 수중에 들어갔으므로, 이때부터 형세는 돌변하였다. 이상과 같이 대원군 집정 기간에 일본과 조선의 외교는 대단히 곤란하였는데, 이 사이에 조선 측에서 주로 교섭의 임무를 관여한 사람은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과 부산훈도(釜山訓導) 안동준(安東晙) 【호는 준경(俊卿)】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 모두 게이오(慶應) 3년 【정묘년】 부터 부임해 와서, 대원군이 늙어 물러나자 메이지(明治) 7년 【갑술년】 에 그 직위에서 파면되어, 정현덕은 유배에 처해졌다가 후에 사약을 받았으며, 안동준은 효수(梟首)되었다. 【『케무야마씨정한론실상(煙山氏征韓論實相)』·『일선통교사(日鮮通交史)』】

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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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의 위치

왜관(倭館)은 처음에 현재의 부산진(釜山鎭) 성터의 기슭인 노하동(路下洞)에 있었으며, 중종(中宗) 5년에 삼포(三浦)의 난으로 한때 철폐되었지만, 7년에 다시 세웠다. 부로쿠(文祿) 전쟁 【임진란(壬辰亂)】 후에 교류가 한때 중단되었지만, 게이죠(慶長) 11년에 화친을 회복하여, 14년 【광해군 원년 기유년, 서기 1609년】 에 다시 건립하였다. 그 위치는 부산부(釜山府)의 북쪽 1리(里) 정도 되는 곳에 해당하며, 지금도 여전히 옛 관(館)의 이름이 존재한다. 시간이 지나 엔보(延寶) 6년 【숙종 4년 무오년, 서기 1678년】 에 땅이 좁아 정박에 불편하였으므로, 쓰시마 번사(藩士)인 츠노에 효고노스게(津江兵庫助)가 온갖 노력을 함으로써, 초량항(草梁項)으로 옮겼다. 즉 지금의 부산부 시가지 안에 있는 용두산(龍頭山)을 중심으로 하는 왜관 터로서, 메이지 10년 1월까지 일본공사관으로 존재하였다. 이곳도 초량항이라고 일컬어졌으며, 또는 초량관(草梁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