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소학일본역사보충교재교수참고서/권2/7. 병자의 난
교수요지
편집본과에서는 청(淸)나라의 흥기(興起)와 더불어 조선이 그들에게 복속되기까지의 사정을 서술하고, 종래의 조선이 지리상으로 항상 북방의 억압을 받았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강의요령
편집만주족의 흥기
편집선조(宣祖)의 다음인 광해군(光海君) 【제15대】 때 남만주(南滿洲)의 한 지방에 있던 여진족(女眞族)이 일어나 명나라에 반기를 들고 국호(國號)를 세워 금(金)이라고 불렀다. 【8년】 처음에 만주의 여진족은 고려 시대에 금국(金國)을 이루었다. 그 후 몽고에게 멸망되었으며 원나라가 망한 후에 명나라에 복속되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그 한 부족이 스스로 일어나 다시 나라를 ‘금(金)’이라고 불렀다. 명나라는 크게 놀라 그들을 정벌하였고, 조선도 역시 명나라의 명에 따라 병력 2만여 명을 보내 명나라 군대를 도왔지만, 명나라는 당시 국력이 이미 크게 쇠퇴하였으므로 그 군대는 이들을 이기지 못하고 패하였으며, 조선의 군대도 역시 격파되어, 그 장수들은 금나라에 항복하기도 하였고 혹은 전사하였다. 【11년】 금나라는 점차 진격하여 요동(遼東)을 함락시키고 도읍을 지금의 봉천(奉天) 【당시에는 심양(瀋陽)이라고 불렀다】 으로 옮겼다. 【인조 3년】
이괄의 난
편집광해군은 무도하여 후사(後嗣)를 다툼으로써 그의 형제들을 죽이고 그들의 어머니인, 전(前) 왕의 비(妃)를 폐위하는 등 인륜을 등진 일을 많이 저질렀다. 같은 당파 사람들은 이 틈에 편승하여 세력을 마음대로 휘둘러 국정이 매우 문란하였다. 이때 몰래 광해군의 폐위를 시도한 사람들이 있었다. 마침내 병력으로써 왕을 압박하여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왕의 동생의 아들 【이름은 종(倧)】 을 옹립하였다. 그를 인조(仁祖) 【제16대】 라고 한다. 광해군의 폐위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이괄(李适)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원래 무인(武人)이었는데 이 일과 관련하여 공이 가장 많았지만 상을 받은 것은 적어 고작 평안도 병사(兵使)에 임명되어 영변(寧邊)으로 갔다. 이괄은 이에 불만을 품고 마침내 반란을 일으키고 부하의 병사들을 이끌고 경성으로 향하였다. 【인조 2년】 따라서 왕은 공주로 난을 피하였다. 이괄은 한때 경성을 점령하고 그곳에 웅거하였지만 경성은 곧 관병(官兵)에게 함락되고 이괄은 체포된 후 주살되었다. 이리하여 난은 평정되고 그 잔당들은 도망쳐 금나라로 들어갔다.
청나라의 침입
편집금나라는 조선이 몰래 명나라를 지원한 것에 분노하여, 조선에서 항복해 온 장수에게 길을 인도하게 하여 대대적으로 조선을 침입하였다. 이때가 인조 5년 【병자년】 이다. 왕은 잠시 강화도로 난을 피하였지만 이어서 화의를 체결되어 형제의 나라가 되었으며, 서로 국경을 준사하여 침략하지 않기로 약속하였다. 그 후 10년 동안 금나라는 그 세력이 점점 강해져 만주 및 몽고의 여러 종족들을 정복하고, 국호를 청(淸)으로 고쳤으며, 금나라 군주는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였다. 이때 금나라의 태조(太祖)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마침 태종(太宗)의 시대였다. 태종은 나아가 명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였는데, 그 전에 먼저 조선을 복속시키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지난번의 화약(和約)을 고쳐 군신(君臣)의 의(義)를 체결하고, 조선으로 하여금 자기의 신하가 되도록 하였지만, 조선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 이에 태종은 친히 만주인, 몽고인 및 한인(漢人)들로 이루어진 약 1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질풍처럼 공격해 와 곧바로 경성을 압박하였다. 이때가 바로 인조 4년 【병자년】 12월이다. 인조는 빈궁(殯宮)과 여러 왕자들을 강화도로 도피시키고 자신은 세자와 더불어 백관들과 함께 남한산성(南漢山城) 【경기도 광주】 으로 들어갔다. 청나라 태종은 이에 나아가 그를 포위하였다.
청나라에 복속되다
편집남한산성이 청나라 군대에 포위된 지 45일 【14년 12월 16일부터 15년 정월 30일까지】 이 되자, 성 안에는 식량이 거의 바닥나고 여러 도(道)의 지원군은 도착하지 않아, 그들이 나아가 싸워서는 패하지 않을 수 없는 형세였다. 따라서 성 안에서는 화전(和戰) 양론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이러는 사이에 강화(江華)는 청나라 군대에 함락되어 빈궁과 여러 왕자들은 모두 붙잡혔으므로, 결국 어쩔 수 없이 국왕과 세자는 성을 나와 청나라 군대에 항복하였다. 태종은 수항단(受降檀)을 삼전도(三田渡)에 설치하고 이곳에서 군신(君臣)의 예로써 인조의 항복을 받았으며, 이튿날 세자 및 그의 동생인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에 효종(孝宗)이 된다.】 등을 인질로 삼았고 빈궁과 여러 왕자들은 모두 북쪽으로 돌려보냈다. 이상 전후(前後) 두 번의 청나라 군대의 침입으로 조선은 심하게 황폐해졌는데, 그중 몽고 병사들이 가장 심하게 폭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이로 인해 조선은 영원히 청나라에 대해 속국의 예를 취하였다. 이때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미츠(德川家光) 쇼군의 시대였다. 【일본 간에이(寬永) 14년, 인조 15년.】
비고
편집금[청]나라의 조상과 그 흥기
편집전설에 따르면 금나라의 선조에 대한 상서로운 조짐이 장백산(長白山) 【함경도와 만주의 경계에 있다.】 에서 일어났다. 하루는 산 위의 호수에 천녀(天女)가 와서 목욕을 하는데, 까치가 가져다준 붉은 과일을 품고서 첫째 아들을 낳았다. 그가 부쿠리옹순(布庫里雍順)이다. 그는 후에 여러 지역을 옮겨 몽고티무르(猛可帖木兒)에 이르렀으며, 조선 왕 태종 【제3대】 때 와무허(幹木河) 【함경북도 회령 땅으로, 명나라에서는 건주좌위(建州左衛)라고 불렀다.】 땅에서 살았지만, 세종 【제4대】 15년에 우디거(兀狄哈) 야인 【흑룡강 부근의 여진족】 의 습격으로 죽자, 자손들은 난을 피해 오늘날의 만주 성경성(盛京省) 회인현(懷仁縣) 지방으로 옮겨갔다. 그 후에 다시 여러 대를 거쳐, 큐차우(叫場) 【경조(景祖)】 라는 사람이 당시 요동에서 위세를 떨치던 호족인 왕고(王杲)의 부장(部將)이 되어, 호도아라성(黑圖阿拉城) 【만주 성경성 흥경(興京) 부근】 에 거주하였다. 큐차우는 도륜성주(圖倫城主) 【만주 소자하(蘇子河)의 부락】 와 불화가 생겨, 그의 아들 타시(塔失) 【현조(顯祖)】 와 함께 싸워 죽었다. 금(金) 【나중의 청나라】 의 태조 누루하치(奴兒哈赤)는 곧 타시의 아들이다. 그는 28세 때 할아버지 및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으므로, 그 이름은 단번에 알려져 원근의 여러 부락들은 솔선하여 그의 깃발 아래 항복해 왔다. 처음에 명나라는 누루하치에게 건주도독첨사(建州都督僉事)의 직책을 수여하고 그를 잘 대우하였지만, 그 후 그는 점차 강대해지자 조선 폐왕 광해군 【제15대】 8년에 자립하여 나라를 세워 즉위하고, 천명(天命)이라고 연호를 정하고 국호를 금(金)이라고 하였다. 【송나라 시대의 금(金)과 구별하기 위해 후금(後金)이라고도 한다.】
이리하여 명나라는 금나라를 토벌하기로 결정하고, 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에 임명하여 오로지 전쟁 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두송(杜松), 유정(劉綎), 이여백(李如栢) 등은 그를 보좌하였다. 이들 여러 장수들의 대부분은 예전에 임진란 때 조선에서 우리 일본군과 싸웠던 사람들이었다. 명나라는 또한 병사들을 징발하여 이 전쟁을 돕도록 하였다. 만력(萬曆) 47년 【금나라 천명(天命) 4년, 조선 광해군 11년】 2월에 명나라 군대는 금나라의 도성인 흥경(興京) 【당시 호도아라성에서 흥경으로 천도하였다.】 을 포위하여 공격하려고, 무순(撫順), 개원(開原), 청하(淸河), 회인(懷仁)의 네 경로로 일제히 병력을 진격시켰다. 조선은 명나라의 명에 따라 약 1만 3천 명의 원군을 보냈다. 참판(參判) 강홍립(姜弘立)을 원수(元帥)로 하고 평안병사(平安兵使) 김경서(金景瑞)는 부원수였다. 강홍립 등은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 장수 유정의 군대와 합류하여 회인 방면으로 향하였다. 네 경로의 병사들을 합쳐 8만 명이 넘었다. 금나라의 태조는 무순 방면에 명나라 군대의 주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정예 병력 6만 명을 이끌고 3월 1일에 사르후(薩爾滸) 【무순의 동쪽】 로 진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명나라 장수 두송 이하 많은 병력을 죽였다. 이튿날인 2일에 태조는 또 개원으로부터 진격하여, 명나라 장수 마림(馬林)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날 명나라와 조선의 연합군은 심하(深河) 【흥경의 동남쪽】 에서 금나라 병사 수백 명과 싸워 승리하고, 곧바로 흥경을 압박하려고 하였다. 아직 명나라 군대가 대패하였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금나라 군대와 부차(富車) 【흥경의 동쪽 6리 지점에 있으며, 다른 말로는 부찰(富察)이라고 한다.】 의 벌판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때 금나라의 병력은 승세를 타고 서쪽으로부터 속속 와서 연합군의 뒤쪽으로 우회하였으므로, 조선군은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원수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는 무리를 이끌고 금나라 군대에게 항복하고, 선천군수(宣川郡守) 김응하(金應河)와 운산군수(雲山郡守) 이계종(李繼宗) 등은 분전하다 사망하였다. 이 전쟁에서 명나라 군대는 약 절반의 병력을 잃었지만, 태조의 병사들은 사상자가 고작 2천 명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전쟁은 실로 태조의 아들 태종이 조선을 침공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으며, 또한 금나라 조정이 크게 융성하는 한 시기의 획을 긋는 것이었다.
폐주 광해군
편집광해군은 이름이 혼(琿)이고, 선조(宣祖)의 둘째 아들이다. 장자(長子)인 임해군(臨海君)은 사납고 패악하여 광해군이 세자가 되었는데 41년에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이어서 즉위하였다. 개략적인 계보는 아래와 같다.
선조(宣祖) — 1남 영창대군(永昌大君) 의(㼁) 【선조의 계비(繼妃)인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가 낳았다. 선조 39년에 태어났으나 일찍 죽었다.】
【이하는 모두 서자이다.】
1남 임해군(臨海君) 진(珒)
2남 광해군(光海君) 혼(琿)
3남 의안군(義安君) 성(珹)
4남 신성군(信城君) 후(珝)
5남 정원군(定遠君) 부(琈) 【추숭하여 원종(元宗)이라 함.】 — 인조(仁祖) 【휘는 종(倧), 처음에는 능양군(綾陽君)에 봉해졌다.】
6남 순화군(順和君) 보()
【선조의 왕자와 왕녀들은 이 밖에도 많이 있었지만 생략한다.】
명나라는 광해군이 그의 형 임해군을 두고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하여 쉽게 책봉(冊封)을 허락하지 않았다. 요동도사(遼東都司)를 파견하여 진(珒)이 병이 나지는 않았는지를 조사하여 밝히려 하였으므로, 조선에서는 갑자기 낭패스러워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덕형(李德馨)과 호조판서(戶曹判書) 황신(黃愼)을 파견하여 황제에게 상주하게 하였으며, 이듬해 3월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왕에 봉한다는 조서를 받아올 수 있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해에 임해군 진은 모반을 기도한 것에 연루되어 교동(喬桐)으로 유배되었는데, 대사헌(大司憲) 정인홍(鄭仁弘), 대제학(大提學) 이이첨(李爾瞻) 등 【북인】 은 그를 죽여야 한다고 청하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좌의정 이항복(李恒福) 등 【남인】 은 반대하였다. 그러나 왕은 정인홍 등의 건의를 듣고 마침내 임해군을 죽였다. 광해군 5년에 박응서(朴應犀)라는 사람이 변고가 있음을 아뢰기를,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 【인목왕후의 아버지】 이 영창대군(永昌大君) 의(㼁)를 옹립하여 왕으로 삼으려고 꾀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의(㼁)는 선조 만년(晩年)에 인목왕후가 낳았으며, 선조는 그를 매우 총애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고작 8세였다. 왕은 이에 김제남을 체포하여 주살하고, 의를 강화도로 추방하였으며 이어서 죽였다. 그런데 대비(大妃) 【인목왕후】 도 역시 이 역모에 부응하였기 때문에 몰래 왕을 저주하였다는 소문을 내서, 왕은 대비를 폐위하려는 생각을 가졌다. 좌의정 정인홍, 예조판서 이이첨 등 【북인】 은 그것을 종용하였지만, 영의정 기자헌(奇自獻), 영부사(領府事) 이항복 등 【남인】 은 그것이 불가하다고 하면서 폐모(廢母)의 잘못을 극단적으로 말하였다. 이리하여 폐모의 가부(可否)에 대한 논의가 떠들썩하게 일어났다. 왕은 종실 및 문무백관들을 모아놓고 폐모에 대해 논의하게 하였는데, 마침내 기자헌, 이항복 등 【남인】 을 귀양 보내고, 10년 2월에 대비라는 존호(尊號)를 폐지하고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당시 붕당(朋黨)은 북인이 가장 강하였으며 서인과 남인은 약간 숨을 죽이고 있는 상태였다. 북인도 역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의 두 파로 나뉘어 서로 경쟁하여 조정은 나날이 혼란하였다. 그러나 왕은 밤낮없이 주색에 빠져 이를 돌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 선비들을 함부로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으며, 또한 풍수설(風水說)을 믿어 쓸데없이 토목을 벌였다. 이리하여 나라의 씀씀이는 궁핍해지고, 공공연히 뇌물이 오가고 은(銀)의 많고 적음으로 관직의 수여를 결정할 정도가 되었다. 이에 앞서 서인들은 세력을 잃고 오랫동안 숨을 죽이고 있었는데 이때가 되어 일어났다. 광해군 15년에 평산부사(平山府使) 이귀(李貴)는 그의 당파인 신경신(申景愼), 심기원(沈器遠), 김자점(金自點) 등 【서인】 과 모의하여, 삼청(三淸) 사람인 김류(金瑬) 【서인】 를 대장으로 삼아 급히 군대를 일으켜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왕은 깜짝 놀라 달아났으며, 조정의 관리들과 위사(衛士)들은 모두 도망쳤으므로, 이귀 등은 곧 왕을 압박하여 옥새를 대비에게 바치게 하고, 마침내 대비의 명으로 왕을 폐위하였으며,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定遠君) 부(琈) 【추숭하여 원종(元宗)이라 함.】 의 아들 능양군(綾陽君) 종(倧)을 왕으로 세웠다. 그가 인조(仁祖)이다. 광해군은 추방되어 강화도에 있었는데 후에 교동(喬桐)에 갇혔으며,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가 인조 19년에 세상을 떠났다. 【『조야첨재(朝野僉載)』·『상촌집(象村集)』·『일월록(日月錄)』·『백사집(白沙集)』·『하담록(荷潭錄)』·『연려실기(燃藜室記)』·『고사촬요(考事撮要)』】
이괄
편집이괄(李适)은 참판 이육(李陸)의 후손이다. 【이육은 호가 청파거사(靑坡居士)이며, 성종(成宗) 때 사람으로 대사헌과 호조·병조 참판을 지냈으며, 저서로는 『청파극담(靑坡劇談)』이 있다.】 무과(武科) 출신이었지만 글에도 능숙하였으며 또한 글씨를 잘 써서 유명하였다. 이귀, 김류 등이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仁祖)를 맞이하려고 할 때, 이괄은 북병사(北兵使) 【함경도】 로서 아직 임지로 가지 않았는데, 이귀 등은 이괄이 재주와 슬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광해군을 폐위하려는 계획을 알리고 비밀리에 계책을 세우게 하였다. 이에 이괄은 곧바로 응하여 계략을 세운 바가 적지 않았고 이귀 등은 공을 세우는 데 이괄의 부서에 의지한 바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인조가 즉위하여 공신들의 훈등(勳等)을 논의하였는데 이괄을 2등에 올렸으므로 이괄은 크게 불만을 가졌다. 이 해 5월에 왕은 장만(張晩)을 도원수(都元帥)로 삼고 이괄을 평안병사(平安兵使) 겸 부원수(副元帥)로 삼았다. 이괄은 더욱 분노하였으며 마침내 다른 뜻을 품게 되었다. 이때 원수는 부(府)를 평양에 개설하였고 부원수는 부를 영변(寧邊)에 개설하였지만, 이괄은 원래 명망이 높았으며, 갑병(甲兵) 수만 명은 그에게 예속된 가장 정예군이라고 일컬어졌다. 인조 2년 정월에 이괄 및 그의 아들 전(旃)과 순변사(巡邊使) 한명련(韓明璉) 등의 모반을 고발한 자가 있었다. 왕은 이에 선전관(宣傳官) 및 도사(都事)를 파견하여 우선 이괄의 아들 전과 한명련을 사로잡았지만, 이괄은 마침내 도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한명련도 역시 그를 따라 일어났다. 이때 도원수 장만은 평양에 있었는데 여러 읍(邑)에 명령을 전해, 병사들을 급히 평양으로 오게 하여 평양을 고수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같은 달 22일에 이괄의 병사들은 영변을 출발하여 지름길을 따라 개천(价川) 【평안남도】 으로 향하여 멀리 적을 공격해 갔다. 장만은 전체 병력 1800여 명으로 평양을 출발하여 이괄의 군대와 황주(黃州) 땅에서 싸웠지만 이길 수 없었다. 2월 6일에 이괄의 군대가 진격하여 저탄(猪灘)에 이르자, 관군은 그들을 막지 못하였고, 관군이 패하였다는 보고가 도성에 도달하자 모든 조정은 깜짝 놀랐다. 8일에 이괄의 군대는 벽제(碧蹄)에 이르렀다는 보고가 있었다. 왕은 황급히 도성을 나와 공주(公州)로 달아났으므로, 10일에 이괄은 성 안으로 들어가 경복궁의 옛터에 진을 치고, 선조(宣祖)의 열째 아들인 흥안군(興安君) 제(瑅)를 왕으로 삼았다. 이때 장만은 파주에 있었는데 왕이 남쪽으로 천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군대를 진격하여 경성을 공격하였다. 이괄은 결국 크게 패하고 11일 밤에 수백 명의 기병을 이끌고 수구문(水口門)으로 도망쳐 이천(利川) 【경기도】 에 이르렀지만, 아들 전(旃)과 함께 한명련 등은 모두 부하 장수인 기익헌(奇益獻), 이수백(李守白) 등에게 살해되었다. 이때가 인조 2년 2월 12일이다. 【『일월록(日月錄)』·『조야첨재(朝野僉載)』·『연려실기(燃藜室記)』】
모문룡
편집모문룡(毛文龍)은 호(號)가 진남(振南)이며, 중국 산동(山東) 사람으로 절강성(浙江省)의 전당(錢塘) 천교(薦橋)에 살았다. 비록 집안이 가난하였지만 매우 영특하여, 명나라 만력(萬曆) 33년【조선 선조 38년】 에 뜻을 세우고 제도(帝都) 【북경】 로 들어가 등용되어 요동도사(遼東都司)가 되었으며, 요양(遼陽)에 머물면서 조선과 소통하였는데, 명나라 천계(天啓) 원년 【조선 광해군 13년】 2월에 요양이 금나라에게 함락되자, 모문룡은 의주로 빠져나와 있다가 7월에 병력 3백여 명을 이끌고 강을 건너가, 밤에 진강성(鎭江城) 【지금의 구련성(九連城)】 을 습격하여 그 장수를 살해하였다. 천계 2년에 군진(軍鎭)을 가도(椵島)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의 남쪽 바다에 있다. 중국에서는 그것을 피도(皮島)라고 불렀다.】 에 설치하고 동강진(東江鎭)이라고 불렀으며, 분진(分鎭)을 철산(鐵山), 사량(蛇梁), 신미도(身彌島) 【혹은 운종도(雲從島)라고도 부른다. 가도의 동쪽에 있다.】 등에 설치하였다. 섬 안에 있는 병력은 본래 중국 하동(河東)의 백성들이었는데 천계 원년 무렵부터 많이 도망쳐서 이 섬으로 왔는데, 모문룡은 그 백성들을 병사로 사용하였다. 명나라 조정은 모문룡에게 총병도독(總兵都督)의 관직을 제수하였으며, 또한 상방(尙方)은 쇠(釗)와 새서(璽書)를 하사하였다. 천계 4년 【조선 인조 원년】 5월에 모문룡은 장수를 파견하여 압록강을 따라 장백산(長白山)을 넘어 금나라의 동편을 침입하고, 이어서 6년 5월에 또 병사들을 파견하여 안산역(鞍山驛) 【남만주에 있다.】 을 습격하였지만, 모두 패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금나라는 모문룡에게 견제당해 훗날의 우환을 끊지 못하고서는 힘을 명나라에 전념할 수 없었으므로, 이듬해 【조선 인조 5년 정묘년】 정월에 병력을 일으켜 조선을 정벌하였는데, 정예 병력을 나누어 별장(別將)에게 명하여 밤에 가도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모문룡은 패하자 몸을 피해 미도(彌島)로 들어갔지만, 이해 2월에 금나라는 조선과 강화(江華)의 맹약을 체결하고 군대를 철수하였으므로, 모문룡의 병력은 다시 나와 부근의 여러 주(州)에 침입하여 벽동(碧潼), 광평(廣坪) 【평안북도】 등의 성들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어린아이와 여자들 및 재물을 약탈하였다. 모문룡은 또한 죽음을 각오한 선비 3천여 명을 모집하여 모두 자기의 성(姓)을 쓰도록 하였으며, 바다 위를 휘젓고 다니면서 관문 밖에 위력을 떨쳤다. 그러나 과장된 보고를 명나라 조정에 보내 과대한 군자금을 요구하고 또한 조선을 위협하여 재물을 강탈하는 것도 적지 않았으므로, 요동경략(遼東經略) 원숭환(袁崇煥)은 그가 발호하는 것을 싫어하여 그를 제거하기로 하였다. 숭정(崇禎) 2년 【조선 인조 7년】 6월에 원숭환은 모문룡을 속여 여순(旅順)의 쌍도(雙島)로 유인하고, 그의 12가지 죄를 하나하나 열거하여 그를 참살하였다. 이때 당시 명나라 조정은 전혀 힘이 없어 오로지 원숭환에게 의지하였으므로 그에게 전권을 허락하고 죄를 조사할 수 없었다. 【『명사(明史)』·『명계북략(明季北略)』·『일월록(日月錄)』·『강한집(江漢集)』】
청나라의 침입
편집금나라는 사르후(薩爾滸) 및 부차(富車)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이래, 점점 서쪽을 공격하려고 하여, 천명(天命) 6년 【광해군 13년, 명나라 천계(天啓) 원년】 에 요동으로 진격해 들어갔으며, 심양 【지금의 봉천】 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이어서 요양(遼陽)을 접수하였다. 【요양은 당시 요동(遼東)의 수부(首府)로서, 명나라는 요동경략(遼東經略)을 이곳에 주재하게 하였다.】
심양 천도
편집태조는 이곳이 명나라 및 조선과 몽고의 영토가 접한 요지로 여겨, 새로운 성 【동경성(東京城】 을 태자하(太子河)의 동쪽에 쌓고 천도한 후, 심양이 가장 지세(地勢)가 뛰어난 곳이라고 느끼고, 그곳을 운영한 다음, 천명 10년 【조선 인조 3년, 명나라 천계 5년】 3월에 다시 도읍을 이곳으로 옮겼다. 성경(盛京)이 곧 이곳이다. 금나라 태조는 조선에 대해서는 항복해 온 장수를 파견하거나 혹은 사신을 파견하여 화의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조선은 그에 보답하긴 하였지만 한편 명나라가 책임을 물을 것을 두려워하여 금나라와 공공연하게 교류하지는 못하고 단지 그 형세의 추이만을 관망할 뿐이었다.
제1차 침입
편집천명 11년 【조선 인조 4년, 명나라 천계 6년】 에 금나라의 태조가 세상을 떠나고 넷째 아들 태종이 즉위하였다. 이보다 앞서, 조선에서는 이괄의 난이 일어나 평정되었지만, 그 무리인 한명련(韓明璉)의 아들 한윤(韓潤)이 달아나 금나라에 항복하고, 항장(降將)인 강홍립(姜弘立) 등과 교류하여, 태종에게 조선을 정벌하도록 권하였다. 이때 명나라의 총병(總兵) 모문룡(毛文龍)은 가도(椵島)에 진을 설치하고 의주(義州), 철산(鐵山), 신미도(身彌島) 【이상은 모두 평안북도】 등에 왕래하여, 항상 조선과 의각(猗角)의 형세를 취하고, 금나라 군대의 활동을 방해한 바가 적지 않았으므로, 태종은 그를 정벌하여 후환을 없애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에 항장(降將)들의 말을 듣고, 천총(天聰) 원년(정묘년) 【조선 인조 5년, 명나라 천계 6년】 에 패륵(貝勒) 【금나라 종실의 존칭】 아민(阿敏) 등을 파견하고, 강홍립, 한윤을 향도(嚮導)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서 곧바로 의주·용천(龍川)을 함락시키고, 따로 장수를 파견하여 가도를 공격하여 모문룡을 신미도로 쫓아냈다. 이 군대는 멀리 행군하여 곽산(郭山)을 접수하고, 정주(定州)를 함락시켰으며, 마침내 청천강(淸川江)을 건너 안주(安州) 【평안남도】 로 들어갔다. 평양에서는 안주성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자, 평안도 감사(監司) 윤훤(尹暄)은 먼저 성을 버리고 도망쳤으며, 금나라 군대는 대동강을 건너 중화(中和) 【평안남도】 에 주둔하고, 편지를 보내 조선의 일곱 가지 죄목을 일일이 들어 꾸짖었다. 이어서 금나라 군대는 황주성(黃州城) 【황해도】 을 함락시키고 나아가 평산(平山) 【황해도】 에 이르렀으므로, 경기(京畿)에서는 깜짝 놀라 왕과 그의 일족과 대신(大臣)들은 급히 난을 피해 강화도로 갔다. 이때 아민은 진격하여 도성으로 들어가 국왕의 궁전 성곽을 보려고 하였지만 그의 패륵들은 따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부장(副將) 유해(劉海)를 강화에 보내 화의를 청하도록 권고하게 하였다. 이때 강화의 수비는 취약하여 도저히 우환을 감당해낼 수 없었으므로, 왕은 종실인 원창령(原昌令) 각(覺)을 왕의 아우라고 일컫고 군(君)에 봉하여, 유해와 함께 평산에 가서 화의를 요청하게 하였다. 아민은 아직 화약(和約)을 맺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패륵들이 좋다고 허락하여, 조선 왕으로 하여금 맹서(盟誓)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므로, 화의는 마침내 이루어졌다. 3월 3일에 강화부(江華府) 문 밖에 단(壇)을 쌓고 양국의 대표자들이 거기에 와서 이후 양국은 형제의 나라가 되어 서로 영토를 지키고 침범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였다. 이때 일본의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미츠(德川家光)는 금나라가 조선을 침범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쓰시마 도주(島主) 소 요시나리(宗義成)에게 명하여 조선을 위해 금나라를 물리치도록 알렸으므로, 왕은 그를 금나라에 몰래 들여보내 공손히 예의를 갖추게 하려 하였지만, 그것이 불가하다고 간언하는 사람이 있어 결국 그만두었다. 【『조야첨재(朝野僉載)』·『일월록(日月錄)』·『청삼조실록(淸三朝實錄)』·『호우쵸로우조선물어(方長老朝鮮物語)』·『도쿠가와실기(德川實記)』·『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제2차 침입
편집이리하여 금나라는 조선에서 징수하여 명나라를 정벌할 병선(兵船)을 갖추기로 하고, 또한 형제의 맹약을 고쳐 군신(君臣)의 의(義)를 맺기로 하는 등, 심한 압박을 가하였으므로, 조선은 그것에 분노하여 반항의 기세가 점차 국내에 퍼져 나갔다. 때마침 금나라에서는 국내외의 여러 왕들과 패륵들이 태종에게 존호(尊號)를 올리게 하자는 건의를 하였으며, 이에 사신을 조선에 파견하여 그것을 알렸는데, 인조는 그 사신을 접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장령(掌令) 홍익한(洪翼漢)은 상소를 올려 사신을 참수할 것을 청하기에 이르자, 사신은 급히 민가(民家)의 말을 빼앗아 타고 도망쳤다.
이때 태종은 관온인성제(寬溫仁聖帝)라는 존호를 받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쳤다. 태종은 먼저 군사력으로 조선을 복속시키려고 숭덕(崇德) 원년(병자년) 【조선 인조 14년, 명나라 숭정(崇禎) 9년】 12월에 만주인, 몽고인 및 한인(漢人)으로 구성된 약 1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친히 조선으로 향하였는데, 심양을 출발하고 나서 고작 10일 만에 선봉의 병력은 이미 경성에 도달하였다. 인조는 크게 놀라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로 하여금 지원병의 계책을 세우도록 하고, 그 틈을 타서 우선 빈궁(嬪宮)과 왕자들을 강화로 옮겨 가게 하였으며 자신도 역시 뒤따라가려고 하였지만, 청나라 군대의 선봉이 이미 압박을 가해 오자 그럴 여가가 없었으므로, 급히 길을 바꾸어 세자와 백관들과 함께 남한산성(南漢山城) 【경기도 광주】 으로 들어갔다. 급히 사신을 명나라에 파견하여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또한 각 도(道)에 격문을 보내 충성을 다할 병사들을 징집하도록 하였다. 12월 16일에 청나라 군대는 진격하여 산성을 포위하였고, 이듬해 【정축년(丁丑年)】 정월에 태종은 친히 전군(全軍)을 거느리고 한강의 북쪽 강변에 주둔하였다. 산성은 포위당한 지 45일이 되자, 성 안에 식량이 바닥나고 장병들은 추위와 배고픔으로 괴로워하였다. 이때 명나라는 유구(流寇)에게 고통을 받고 있어 조선을 구원할 여가가 없었으므로, 각 도의 감사(監司)와 병사(兵使)는 앉아서 쳐다만 볼 뿐 나서지 않았다. 또한 나서는 자는 모두 청나라 군대에게 격파되었다.
이리하여 성 안에서는 화의와 전쟁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은 화의를 주장하였고,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은 그것은 잘못이라고 하여, 여러 신하들의 논쟁은 매우 격렬하였다. 결국 화의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는데 때마침 강화도가 함락되어 빈궁들과 여러 왕자들이 모두 청나라 군대에게 사로잡혔으므로, 왕은 마침내 마음을 정하고 정월 30일에 세자와 함께 성을 나와 청나라 군대에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체결된 조약의 중요한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1) 청나라와 조선 간에는 군신(君臣)의 예를 지킬 것
(2) 조선은 명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명나라와의 왕래 및 교류를 중단할 것
(3) 조선 왕은 장자(長子) 및 차자(次子)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낼 것
(4) 청나라가 명나라를 칠 경우에 조선은 기일을 어기지 않고 출병하여 그를 도울 것
(5) 조선과 일본의 무역을 허락할 것
(6) 성절(聖節), 정삭(正朔), 동지(冬至), 경조(慶弔) 등의 사절은 명나라의 옛 예절에 따를 것
(7) 세폐(歲幣)의 금액에 관한 사항
이때 태종은 수항단(受降檀)을 삼전도(三田渡)에 설치하고 왕의 항례(降禮)를 받고, 이튿날 세자 왕(𪶁) 및 봉림대군(鳳林大君) 호(淏) 【효종】 를 그들의 군대에 남겨두어 인질로 삼았으며, 빈궁들과 여러 왕자들은 모두 북으로 돌려보냈다. 이리하여 그날 왕은 도성으로 돌아갔지만, 시가(市街)는 짓밟혀 인민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시체는 거리에 나뒹굴어 그 참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감게 하였다. 그런데 여러 군대들 가운데 가장 난폭하게 약탈을 자행한 것은 몽고 병사들이었다. 당시 김상헌은 주로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항복한 후에는 파직되어 집에서 칩거하였는데, 17년 겨울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병사들을 조선에서 징발한다는 소문을 듣자, 강개하여 상소를 올려 그것에 응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청나라는 척화를 주장하는 신하들을 찾아내어, 마침내 김상헌, 조한영(曺漢英), 채이항(蔡以恒) 세 사람을 붙잡아 심양으로 데려갔지만, 다시 옮겨 의주로 보냈다가 21년이 되자 모두 돌려보냈다. 이보다 앞서,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세 학사[三學士]도 역시 척화를 주장하여 청나라 군영에 끌려갔으며, 후에 심양으로 보내졌지만 결국 굴하지 않아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가 인조 16년 3월이다. 【『조야집요(朝野輯要)』·『조야첨재(朝野僉載)』·『조야회통(朝野會通)』·『병자록(丙子錄)』·『남한위록(南漢圍錄)』·『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청나라와의 관계
편집조선은 이미 청나라에 복속되어 청나라의 정삭(正朔)을 받들었다. 이에 인조 17년에 청나라의 명령에 따라 청나라 황제의 공덕비(功德碑)를 삼전도의 남쪽인 수항단이 있던 곳에 세웠다. 【이 비석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또 항상 청나라에 대해 사대(事大)의 예를 다하고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무렵 조선에서 청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것은 1년에 4회였으며, 동지(冬至), 정삭(正朔), 성절(聖節), 세폐(歲幣) 【명나라 때는 천추사(千秋使)였지만, 숭덕(崇德) 이후에 세폐사로 하였다.】 가 곧 그것인데, 어느 경우든 표전(表箋)과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세폐로, 그 액수는 실로 막대하였다. 【그 밖에 사은(謝恩), 주청(奏請), 진위(陳慰), 진향(進香), 고부(告訃) 등의 사절은 사안에 따라 파견하였다.】 인조 23년 【청나라 순치(順治) 2년】 에 이르러 삼절(三節) 및 세폐를 합쳐 일행(一行)으로 삼았으며, 그것을 동지사(冬至使)라고 일컬어 1년에 한 번 파견하기로 하였으며, 세폐의 액수도 역시 점차 줄여 나갔다. 조선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바치는 편지에는 조선을 신하라고 일컫는 것은 물론이고, 국왕이 세상을 떠나고 새 임금이 뒤를 이어 즉위할 때에는 청나라로부터 반드시 증시(贈諡)와 책봉(冊封)을 받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제1과 비고 13 「이조의 시법(諡法)과 명(明)·청(淸)의 시호 수여」 참조】
이리하여 조선은 청나라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복종의 예(禮)를 다하였지만, 안으로는 결코 그들에게 흔쾌히 복종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조 21년 【청나라 숭덕 8년】 8월에 청나라 태종이 세상을 떠나고 세조(世祖)가 즉위하였으며, 23년 【청나라 순치 2년】 3월에 세자 왕()과 봉림대군(鳳林大君) 호(淏)를 풀어주어 돌려보냈다. 왕() 【소현세자(昭顯世子)】 은 머지않아 죽고 아우인 호(淏)가 세자가 되었으며, 27년에 인조가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를 효종(孝宗) 【제17대】 이라고 한다. 효종은 심양(瀋陽) 【봉천(奉天)】 에 8년 동안 인질로 가 있었으므로 그 굴욕에 분개하여 치욕을 갚으려는 마음이 있었다. 효종은 즉위하자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 명사들을 등용하여 군정(軍政)을 크게 진흥시켜, 해자(垓字)를 파고 기계를 정비하여 몰래 계획하는 바가 있었지만, 청나라와의 국력의 차이가 너무 커서 쉽게 전쟁을 일으킬 수 없었으며, 결국 그 기회를 얻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현종(顯宗) 【제18대】 이 즉위하고 그 14년 7월에 오삼계(吳三桂) 【명나라의 항신(降臣)】 가 청나라에 반대하여 운남(雲南)에서 난을 일으키자, 조선에서는 사인(士人) 나수좌(羅須佐)라는 사람이 상소를 올렸다. 그는 의병을 일으키고 오삼계와 힘을 합쳐 청나라를 정벌하여 병자년(丙子年)의 치욕을 설욕하도록 청원하였지만 실행되지 못하였다. 숙종(肅宗) 【제19대】 이 즉위한 초기에도 승지(承旨) 윤호(尹鎬)가 북벌(北伐)을 하자는 주장을 하였으나 역시 실행되지 못하였다. 또 숙종 31년에는 대보단(大報壇)을 금원(禁苑) 안에 지어 명나라 신종(神宗)을 제사 지냈고, 영조(英祖) 【제21대】 때에는 명나라의 태조 및 의종(毅宗) 【명나라 최후의 황제】 을 그에 곁들여서 제사지냈으며, 정조(正祖) 【제22대】 는 『존주휘편(尊周彙編)』을 편찬하여 명나라를 숭배하는 뜻을 밝혔다. 이와 같이 조선은 표면적으로는 청나라에 복종하였지만 속으로는 청나라를 심하게 배격하였으므로, 표면적이고 공식적인 일에는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였지만 국내의 사사로운 일은 오로지 명나라의 숭정(崇禎) 【명나라 의종의 연호】 을 사용하였다. 【『조야첨재(朝野僉載)』·『조야집요(朝野輯要)』·『국조보감(國朝寶鑑)』·『병자록(丙子錄)』】
송시열
편집송시열(宋時烈)은 자(字)가 영보(英甫)이며, 호는 우암(尤庵)이다. 충청도 은진(恩津) 사람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가 태어나기 전날 밤에 아버지인 송갑조(宋甲祚)는 공자가 그의 집에 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어릴 때 이이(李珥)의 제자인 김장생(金長生) 【호는 사계(沙溪)】 에게 배워, 마침내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인조 11년에 갑과(甲科)에 등제(登第)하였으며, 1등을 차지하였다. 인조 14년에 청(淸) 【만주】 과의 화의가 파기되고, 청의 침입을 당하자, 살던 곳의 방어에 실패하여 패주하였다. 송시열은 왕을 따라 남한산(南漢山)으로 난을 피해 성문(城門)을 굳게 닫고 성을 지킨 지 약 2개월 만에 강화(講和)가 성립된 후,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지만 응하지 않았다. 인조가 세상을 떠나고 둘째 아들 호(淏)가 뒤를 이었다. 그가 바로 효종(孝宗) 【제17대】 이다. 왕은 타고난 바탕이 총명하고 패기가 넘쳤으며, 특히 인질이 되어 청나라의 수도인 심양 【봉천】 에 있던 8년 동안 온갖 고초를 맛보았으므로, 즉위한 후에 몰래 청나라에 보복하려고 어질고 뛰어난 선비들을 폭넓게 찾았다. 이에 송시열도 역시 효종에게 불려가 장령(掌令)에 임명된 뒤, 김상헌, 송준길, 김집 등과 함께 우선 내치(內治)를 정비한 다음, 기회를 보아 북벌을 단행하려고 하였다. 때마침 영의정 김자점(金自點)은 송준길 등에게 쫓겨난 것에 원한을 품고, 사신을 청나라에 보내 왕의 비밀 계획과 송시열이 장릉(長陵) 【인조의 비(妃)인 인열왕후(仁烈王后)의 능】 의 비문(碑文)에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사실을 몰래 알렸다. 이리하여 청나라의 위압적인 협박이 날로 급박해졌으므로 송시열 등은 서로 솔선하여 직위에서 물러났다. 그 뒤로 여러 해가 지나 다시 관직에 불려나갔으며 특별히 이조판서를 제수하였다. 송시열은 왕의 특별한 대우에 보은하려고 온 마음을 기울여 보좌하였지만, 왕은 재위한 지 고작 10년 만인 41세의 혈기왕성한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현종(顯宗) 【제18대】 이 왕위에 올랐다. 이리하여 그가 여러 해 동안 계책을 세워 온 북벌의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예론(禮論)에 관한 격렬한 당쟁(黨爭)을 야기하기에 이르렀다. 원래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서, 형인 소현세자(昭顯世子) 【이름은 왕()】 가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어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런데 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죽은 아버지의 부인인 자의대비(慈懿大妃)는 아직 살아 있었으므로, 송시열 등은 대비의 상기(喪期)를 1년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남인(南人)인 윤휴(尹鑴)는 평소에 서인(西人)인 송시열 일파가 조정에 있어서 중용되지 못하여 기분이 좋지 않았으므로, 몰래 보복의 기회를 노려 다른 주장을 하였다. 윤휴는 말하기를, “돌아가신 대왕(大王)은 비록 둘째 아들이었지만 첫째 아들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 의미는 첫째아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비는 3년의 상(喪)에 상복을 입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두 파벌의 논쟁은 더욱 치열해졌는데 새 임금인 현종은 결국 1년의 주장을 따랐다. 이리하여 남인의 주장은 패배하고 서인이 승리를 거두자 송시열은 승진하여 좌의정이 되었다. 남인은 한 번 패배하였다고 굴복하지 않고 다시 때를 기다렸다. 현종 15년에 인선대비(仁宣大妃) 【효종의 비 장씨(張氏)】 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다시 한 번 자의대비가 상복을 입어야 할 상기(喪期)에 관해 서인과 남인 두 파는 똑같은 논쟁을 반복하였다. 예조(禮曹)는 처음에 1년이 지당하다고 인정하였지만 갑자기 송시열의 주장에 따라 그것을 9개월로 고쳤다. 남인들은 유생(儒生)들과 서로 어우러져 9개월의 주장을 비방하는 주장을 멈추지 않았다. 왕은 이에 1년의 주장을 따랐다. 송시열은 어쩔 수 없이 수원(水原)으로 물러나 처벌을 기다렸다. 남인인 허목(許穆)이 들어와 조정을 차지하고 점차 자신의 당파를 지원하고 서인을 배척하였다. 현종이 세상을 떠나고 숙종이 그 뒤를 잇자, 왕은 당시 밖에 있던 송시열에게 명하여 현종의 지문(誌文)을 편찬하게 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남인 일파는 이것을 알고는 그것은 불가하다고 극력 주장하고 조정에서는 송시열에 대한 인신공격이 더욱 심해졌으므로, 송시열은 관직을 박탈당하고 장기(長鬐) 【경상북도】 로 유배되었다. 이때는 숙종 원년으로, 송시열의 나이 69세 때이다. 【제5과 비고 4 「붕당(朋黨)」 참조】
이리하여 남인은 서인을 몰아내고 홀로 여러 해 동안 조정의 권력을 농단하였다. 남인들은 경신(庚申)의 대출척(大黜陟) 【숙종 6년】 을 맞이하여 실각하였으며, 서인들은 잃어버린 세력을 다시 만회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보다 앞서, 송시열은 장기에서 거제로 옮겨갔으며, 이때 소환되어 조정에 들어가 그 명성이 한 시대를 기울게 하였는데, 나라 안 사람들은 모두 그를 일컬어 대로(大老)라고 불렀다. 그러나 일찍이 송시열의 문하에서 노닐던 박세채(朴世采), 윤증(尹拯) 등은 사정이 있어 송시열을 원망하며 빈번하게 공격의 화살을 쏘았으므로, 서인들은 송시열을 존숭하는 노론(老論)과 박세채, 윤증 등을 받드는 소론(少論)의 두 파로 분열되었다.
서인들이 당 안에 당을 세워 서로 다투는 것을 보고, 남인들은 뜻밖에 당한 재난을 멈추려고 더욱 그들을 선동하였으므로, 송시열은 다시 관작(官爵)을 삭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후에 정읍(井邑) 【전라남도】 에서 사약을 받았는데 그때 그의 나이 83세였다.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고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식(配食)되고 문묘(文廟)에 종향(從享)되었다. 저서로 『주자대전답의(朱子大全剳疑)』, 『이정전서분류(二程全書分類)』, 『문의통고(問義通考)』, 『심경석의(心經釋疑)』 및 문집 백여 권이 있다. 송시열은 생전에 청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를 숭상하는 뜻을 충실히 하였는데, 그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는 돌아가신 스승의 부탁을 받고 몰래 화양사(華陽祠)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를 세우고, 명나라의 신종(神宗)과 사종(思宗)의 두 황제를 제사 지냈다. 후에 이를 만동묘(萬東廟)라고 고치고 국가 제사의 반열에 편입하였다. 【정조가 즉위한 해, 청나라 건륭(乾隆) 4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