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소학일본역사보충교재교수참고서/권2/5. 사화 및 붕당

교수요지 편집

본과에서는, 건국 초기 이래 약 100년 동안은 국운이 매우 융성하였지만 그 후 국정이 혼란해지고 왕권이 쇠약해져 사화(士禍)와 붕당(朋黨)의 폐해를 낳아 국력이 차츰 기울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강의요령 편집

사화 편집

태조(太祖)부터 성종(成宗)에 이르기까지 130년간 역대 왕들은 모두 뜻을 정치에 기울였지만, 연산군(燕山君) 【제10대】 에 이르러 음란한 행실이 도가 지나쳐 추호도 국정(國政)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기강이 크게 느슨해졌다. 이렇게 되자 여러 신하들 가운데에는 서로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한편에서 몰래 일을 꾸며 다른 한편을 죄에 빠뜨려 그들을 죽이거나 유배 보내기도 하였다. 또 연산군의 생모(生母)인 윤씨(尹氏)는 성종의 비(妃)였지만 폐위되어 사약을 받았다. 연산군은 이를 크게 슬퍼하여, 즉위한 후에 그것을 보복하려고 일찍이 성종 때 폐비(廢妃)의 사건에 관여한 사람 수십 명을 죽이고, 이미 죽은 사람은 그 관을 열어 시신을 참수하는 등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이리하여 수많은 명사(名士)들이 피해를 입었다. 이 일을 일컬어 사화(士禍)라고 부른다. 이러한 일이 여러 차례 행해진 데다 연산군은 행동이 지나치게 무도하였으므로 마침내 폐위되었다. 이 때문에 이후부터 그를 왕으로 대우하지 않고, 시호도 올리지 않았으며, 단지 연산군이라고만 불렀다. 연산군 다음에는 그의 동생인 중종(中宗) 【제11대】 이 왕위에 올라 전대(前代)의 폐정을 크게 개혁하였지만, 여러 신하들의 서로 다투는 풍조는 그치지 않았다. 중종 때와 그 이후에도 이른바 사화라는 것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그로 인해 명신(名臣)과 학자(學者)들 중 비명에 스러져간 사람들의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참으로 불행의 연속으로 국운의 발전이 가로막힌 것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 유명한 조광조(趙光祖)도 중종 때 사화를 당해 죽었다. 이 무렵부터 왕권은 크게 쇠약해졌고 이러한 사정은 만연하여 붕당(朋黨)의 폐해를 낳기에 이르렀다.

붕당 편집

그런데 이른바 붕당이라는 것은 선조(宣祖) 【제14대】 때 심의겸(沈義謙)·김효원(金孝元) 두 사람이 서로 싫어하여, 서로 당(黨)을 만들어 다툰 데에서 시작되었다. 심의겸은 명종(明宗) 【제13대】 의 외척(外戚)으로 매우 인망(人望)이 있었다. 선배 사람들이 그와 많이 가까웠다. 김효원은 신진(新進) 선비로서 매우 재간이 뛰어났다. 후배 사람들이 그와 많이 함께하였다. 김효원을 편드는 사람들을 동인(東人)이라고 부르고, 심의겸을 편드는 사람들을 서인(西人)이라고 불렀다. 이때 이이(李珥)는 분당(分黨)의 폐해를 크게 염려하여, 그들을 조정하는 데 힘을 쏟았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해가 지남에 따라 붕당의 다툼은 점점 더 심해져, 사건을 꾸며 한 당파는 다른 당파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그것으로 인해 국내는 항상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였고, 또한 자신이 속한 붕당의 이익 때문에 개인적인 원한을 사게 되어, 전후 수백 년간의 국정이나 사회에서도 큰 폐해를 낳았다. 붕당은 처음에는 동인과 서인의 두 파였지만, 후에 동인은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이 되었고, 북인은 또 나뉘어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이 되었으며, 서인은 나뉘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되었다. 그 밖에도 더욱 많은 분파들이 생겼는데 이들 가운데 후세까지 존속한 것은 노론, 소론, 남인, 북인 【소북】 의 네 파로서, 그들을 사색(四色)이라고 불렀고, 한 파에 속한 사람은 다른 파에 속한 사람과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서로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이 습관으로 되어 있다.

비고 편집

폐주 연산군 편집

연산군은 이름은 융(㦕)이고, 성종(成宗)의 장자(長子)이다. 세자(世子)일 때부터 매일 유희(遊戱)를 일삼고, 마음을 공부에 두지 않았는데, 즉위해서는 급기야 정치를 게을리하고 행동은 무도(無道)하였다. 즉위 후 4년에 조정 신하들 사이에서 서로 배격하여 죄에 빠뜨려 이른바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고, 이어서 10년에, 왕은 생모 윤씨(尹氏)의 폐사(廢死)를 슬퍼하여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켰다. 【비고 2 「사화」 참조】 또 윤씨의 폐사는 성종의 귀인(貴人) 엄씨(嚴氏) 및 정씨(鄭氏)의 모함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을 믿고 두 숙의(淑儀)를 내정(內庭)에서 때려서 죽이고, 아울러 정씨가 낳은 안양군(安陽君) 항(㤚)과 봉안군(鳳安君) 봉(㦀)를 살해하였다. 이때 인수대비(仁粹大妃) 【성종의 아버지로 추존(追尊)된 덕종(德宗)의 비, 즉 연산군의 조모(祖母)】 는 병상에 있었는데, 소식을 듣고서 그 난폭함을 나무라자, 연산군은 분노하여 머리로 대비를 들이받았고 대비는 마침내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였으며 얼마 못 가서 숨을 거두었다.

이 해 봄에 여러 도(道)의 각 읍(邑)에 기악(妓樂)을 설치하고, 채홍준사(採紅駿使) 【미녀와 좋은 말을 찾아내는 사람】 와 채청사(採靑使) 【소녀(少女)를 찾아내는 사람】 를 각 도에 파견하여 미녀(美女)와 양마(良馬)를 찾아내게 하였다. 11년에 홍문관(弘文館)을 폐지하고, 사간원(司諫院)을 개혁하였으며, 또한 성균관(成均館)을 연회를 베풀고 즐기는 장소로 삼고, 그 서생들을 내보냈으며, 음사(淫祠)를 그 안에 설치하고, 무격(巫覡)을 불러 모으는 등 그릇된 행실이 나날이 심해졌다. 12년에 전(前) 이조 참판 성희안(成希顔), 지중추부사 박원종(朴元宗), 이조 판서 유순정(柳順汀) 등이 협의하여, 성종의 차자(次子)인 진성대군(晉城大君) 역(懌)을 옹립하고, 자순대비(慈順大妃) 윤씨(尹氏) 【성종의 계비】 의 교지(敎旨)로써 왕을 폐위하고 연산군(燕山君)으로 삼아 교동(喬桐) 【경기도 강화도의 서쪽에 있는 섬】 에 살게 하였다. 역(懌)은 왕위에 올랐으며, 그를 중종(中宗)이라고 한다. 그 해 11월에 연산군이 세상을 떠나자, 왕은 예의를 갖추지 않고 단지 왕자인 군(君)의 예로써 그의 장례를 치렀다. 공조참의(工曹參議) 유숭조(柳崇祖)는 글을 올려, 묘(廟)를 세우고 시호를 올릴 것을 청원하였으므로, 중종은 폭넓게 여러 신하들을 모아 그것을 논의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자, 유숭조의 청원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사재척언(思齋摭言)』·『동각잡기(東閣雜記)』·『조야첨재(朝野僉載)』·『조야집요(朝野輯要)』】

사화 편집

사화(士禍)는 당시 갑자기 발흥한 유학파(儒學派), 즉 김종직(金宗直) 【호는 점필재(佔畢齋), 제4과 비고 「조선시대 초기의 학자」 참조.】 일파의 학도(學徒) 【이른바 사림(士林)】 와 그 주위 사람들의 충돌에서 기인하였으며, 그 발단은 폐주 연산군 4년에 일어났다.

무오사화 편집

처음에 이극돈(李克墩), 유자광(柳子光) 등이 김종직의 일파에게 원한을 품고 몰래 배척하여 죄에 빠뜨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때마침 그 해 4월에 사국(史局)이 열리고 『성종실록(成宗實錄)』이 편찬되는 가운데, 이극돈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사관(史官)이던 김일손(金馹孫)의 사초(史草) 가운데에 김종직이 의제(義帝)를 애도하는 글이 수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은근히 세조(世祖)를 비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중국의 진(秦)나라 말기에,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함께 일어나 모두 초(楚)나라 회왕(懷王)을 받들고, 진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러나 항우는 몰래 야심을 품고 겉으로는 회왕을 존중하여 의제(義帝)라고 부르다가, 스스로 일어나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이 되었으며, 후에 사람을 시켜 의제를 죽이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항우를 세조에, 의제를 단종(端宗)에 비유한 것이다.】 유자광, 노사신(盧思愼) 및 윤필상(尹弼商) 등으로 하여금 사초의 내용을 임금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연산군은 주색(酒色)에 빠져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한 김종직의 무리들을 미워하였으므로, 곧 그 말을 듣고 직접 김일손 등을 국문(鞫問)할 것을 명하였다. 이리하여 유자광은 김종직의 문인(門人)들 및 그들과 관계가 있는 자들을 붙잡아 그들을 모두 형에 처하였으며, 김종직은 이미 사망하였으므로 그의 관을 쪼개어 시신을 꺼내어 참수하였다. 이 사건은 연산군 무오년(戊午年)에 일어났으므로 무오사화(戊午士禍)라고도 부르며, 또한 그 단초가 역사의 편찬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사화(史禍)라고도 부른다.

갑자사화 편집

이로부터 6년이 지나 연산군 10년 【갑자년】 에 이르러 사화가 또 일어났다. 애초에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尹氏) 【성종의 계비】 는 부덕으로 폐위되고 사약을 받았다. 당시 연산군은 아직 어려서 그것을 알지 못하였지만, 즉위한 후 생모의 죽음에 대해 듣고 크게 비통해하여, 10년 4월에 윤씨를 추존하여 왕후(王后)라고 하였으며, 또한 폐사(廢死)의 사건에 관여한 사람들에 대해 죄를 따져 물으려고 하였다. 이때 연산군의 비(妃)인 신씨(愼氏)의 오빠인 신수근(愼守勤)은 정권을 쥐고 있었는데 사림(士林)의 명성이 떠들썩한 것을 싫어하여 그것을 물리치려고 사림들이 국사(國事)를 비방하여 논의한다고 무고하였다. 이리하여 사화가 다시 일어났는데, 이른바 명사(名士)들 중 죄인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사람이 수십 명이었고, 죄인 중 이미 죽은 그의 사람은 관을 쪼개어 시신을 베고, 뼈를 부수어 강물에 버렸다. 이를 갑자사화(甲子士禍)라고 한다. 이렇게 연산군은 비행(非行)이 심하였으므로 폐위되고, 성종의 둘째 아들인 진성대군(晉城大君) 역(懌)이 대신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중종(中宗) 【제11대】 이다. 왕은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고, 분발하여 이상적인 정치를 활발히 펼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명사인 조광조(趙光祖) 【호는 정암(靜庵), 제4과 비고 「조선시대 초기의 학자」 참조.】 를 등용하고 그를 깊이 신임하였다. 조광조는 김굉필(金宏弼) 【김종직의 문인으로 호가 한훤(寒喧)이다.】 의 문하에서 학문 수업을 받았으며, 당시 사림의 우두머리였는데 왕은 그의 말에 따라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비들을 등용하였다. 이리하여 그의 학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잇달아 발탁되고 나이가 어린 의기 있는 선비들은 의기양양하여 점차 주위의 질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왕 또한 싫어하게 되었다.

기묘사화 편집

이때 예조판서(禮曹判書) 남곤(南袞), 도총관(都摠管) 심정(沈貞) 등은 항상 사림들에게 배척받아 일선에서 물러나자 몰래 보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중종 14년 【기묘년】 10월에 조광조는 임금에게 아뢰어 연산군 폐위 때 정국공신(靖國功臣) 중에서 공훈이 남발되어 공신이 된 자들은 그 직위를 박탈할 것을 청원하여 76명을 삭탈하였으므로, 여러 훈신(勳臣)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무리지어 원망하며 분기하였다. 남곤 등은 이 기회를 틈타 임금에게 조광조 등을 탄핵하였다. 왕은 탄핵을 받아들여 조광조와 그 무리들을 체포하고, 조광조를 능주(綾州) 【전라남도】 로 유배시켰지만 후에 사약을 내렸으며, 나머지 무리는 모두 파면하여 귀양 보냈다. 이를 기묘사화(己卯士禍)라고 한다. 그러나 그 후 조정의 선비들 간에 투쟁하고 배척하던 것은 마침내 확대되어 외척들 간의 권력투쟁과 서로 뒤섞여 사태는 점점 더 복잡해졌다.

을사사화 편집

애초에 중종에게는 두 왕자가 있었다. 호(峼) 【인종】 는 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가 낳았으며, 환(峘) 【명종】 은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낳았다. 이리하여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尹任)과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尹元衡) 두 사람은 각각 그들의 조카를 임금으로 즉위시키려고 서로 알력이 심하였다. 【본과 비고 3 「외척(外戚)의 전횡과 왕권의 쇠퇴」 참조】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인종 호 【제12대】 가 즉위하였으며, 마음을 크게 정치에 쏟았지만 재위한 지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동생인 환이 이어서 즉위하였다. 그가 명종(明宗) 【제13대】 인데 이때 그의 나이는 고작 12세였다. 그가 어렸기 때문에 대비(大妃) 【문정왕후】 는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으며, 윤원형 무리들은 세력이 점차 커졌다.

을사사화 편집

이 해 【을사년】 10월에 윤원형은 지중추(知中樞) 정순명(鄭順明), 병조판서 이기(李芑), 호조판서 임백령(林百齡)과 결탁하여 윤임 및 그 무리들인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등을 제거하려고 모의하고, 임금에게 윤임이 다른 뜻을 품고 계림군(桂林君) 유(瑠) 【성종의 둘째 아들 계성군(桂城君) 순(恂)의 계자(繼子)】 를 옹립하려는 낌새가 있다고 고하였다. 이리하여 사화가 다시 일어났으며 윤임, 유관, 유인숙을 비롯하여 명사들 중 주살되거나 귀양 간 사람이 약 백 명이었으며, 계림군 및 봉성군(鳳城君) 완(岏) 【중종의 6남】 도 역시 연루되어 살해되었다. 이를 을사사화(乙巳士禍)라고 한다. 이리하여 정권은 윤원형의 수중으로 돌아가고 사화는 일단락된 것으로 보였지만 여러 사림들이 서로 배척하며 싸우는 기세는 완전히 바뀌어 선조(宣祖) 【제14대】 때에 이르러 붕당(朋黨)의 분쟁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연산군 이래 사화로 주살되거나 귀양에 처해진 명사들 중 주요한 인물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무오사화(戊午士禍) 김종직(金宗直), 【추형(追刑】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갑자사화(甲子士禍) 한명회(韓明澮), 【추형】 정창손(鄭昌孫), 【추형】 어세겸(魚世謙) 【추형】 한치형(韓致亨), 【추형】 윤필상(尹弼商), 이극균(李克均), 성준(成俊), 홍귀달(洪貴達).

 기묘사화(己卯士禍)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김식(金湜), 김구(金絿), 권발(權撥).

 을사사화(乙巳士禍) 윤임(尹任),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이언적(李彦迪), 백인걸(白仁傑), 노수신(盧守愼).

 【『조야첨재(朝野僉載)』·『동각잡기(東閣雜記)』·『용재집(容齋集)』·『정암집(靜庵集)』·『기묘속록(己卯續錄)』·『국조보감(國朝寶鑑)』·『석담일기(石潭日記)』·『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외척의 전횡과 왕권의 쇠퇴 편집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조정 신하들 간의 질시와 배척은 연산군 【제10대】 때부터 심해졌다. 중종 【제11대】 때부터는 그에 더하여 외척(外戚)들 간의 다툼으로 왕권이 쇠약해졌으며, 명종 【제12대】 때에는 더욱 복잡한 사정으로 왕권은 점점 쇠약해졌다.

중종 14년에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이 주살된 후에는 그들을 무너뜨린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은 정치를 마음대로 주물렀으며, 18년에 남곤은 영의정이 되었다. 그 후, 그의 일파는 김안로(金安老)에 의해 제거되고, 김안로의 무리들이 대신 정권을 좌우하였다. 김안로는 29년에 우의정이 되었고 이어서 좌의정이 되었지만, 전횡하여 여러 차례 큰 옥사(獄事)를 불러일으켜, 빈번히 종실과 중신(重臣)들을 주살하거나 귀양을 보냈다. 확실히 그는 그의 아들 희(禧)가 중종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가 낳았으며, 세자 호(峼)의 이모】 과 결혼함으로써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애초 중종이 연산군을 대신하여 왕위에 오르자, 중종의 비(妃)인 신씨(愼氏) 즉 단경왕후(端敬王后)는 연산군의 출위(黜位)와 동시에 폐위되고, 【중종의 비인 단경왕후는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며 신수근의 누이는 연산군의 비이다. 신수근은 연산군이 폐위될 때 죽임을 당하였다. 신수근에 관해서는 비고 2 「사화(士禍)」 항목 참조】 중종은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를 계비(繼妃)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장경왕후는 중종 30년에 세상을 떠나게 되어 중종은 다시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尹氏)를 맞아 계비로 삼았다. 단경왕후는 후사(後嗣)가 없었지만 장경왕후는 세자 【호(峼), 인종】 를 낳았고, 문정왕후는 둘째아들 환(峘) 【명종】 을 낳았다. 김안로가 세력을 얻었을 때는 장경왕후는 이미 세상을 떠나, 형세가 매우 자신에게 불리해지자 【김안로의 아들 희(禧)가 세자 호의 누이와 결혼하였다는 것은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다.】 김안로는 문정왕후를 폐위시킬 계략을 세웠다. 때문에 왕은 그를 미워하여 외척인 윤임(尹任) 【장경왕후의 오빠】 및 윤안인(尹安仁) 【문정왕후 친족의 아들】 등과 논의하여 마침내 김안로를 죽여 없앴다. 이때가 중종 32년이었다. 중종은 연산군의 폐정을 모두 개혁하여 그 초기의 정치는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 많았지만, 기묘사화가 일어나 수많은 현사(賢士)들을 죽이고 귀양을 보냈으며, 그 후에는 남곤, 김안로 등의 간신들이 교대로 권력을 농단하였지만,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 이후 김안로가 제거되었지만, 세자 호(峼)의 외숙인 윤임 【장경왕후의 오빠】 과 둘째 아들 환(峘)의 외숙인 윤원형(尹元衡) 【문정왕후의 동생】 은 각자 자신의 주군을 임금으로 옹립하려고 서로 맞서 배척하면서 두 당(黨)이 물러서지 않았으며,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이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중종 말년의 모습이다.

이처럼 조정 신하들 간의 투쟁은 완전히 변하여 외척 간의 불화로 비화하였다. 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인종(仁宗) 【휘(諱)는 호(峼)】 이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고작 8개월이 지나 역시 세상을 떠났으며, 왕의 아우인 명종(明宗) 【휘는 환(峘)】 이 대신 즉위하자, 윤임 등의 일파는 윤원형 등에게 패배하고, 정권은 완전히 윤원형의 수중에 들어갔다. 윤임 등이 제거된 것은 바로 명종이 즉위한 해, 즉 을사년(乙巳年)으로 【본과 비고 2 「사화(士禍)」 참조】 그 후 50~60년간 윤원형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온갖 죄명을 씌워 모두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으니, 그 수가 약 백 명에 가까웠다. 그리고 윤원형의 복심(腹心)이 되어 그를 도운 사람들은 이기(李芑), 임백령(林百齡) 등이었다. 그런데 명종은 즉위하였을 때 나이가 고작 12세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대비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을 하고 외숙 윤원형이 힘써 받들었으므로, 모후의 외척이 권력을 농단하는 일이 처음으로 일어났다. 이는 뒤에서 설명하는 붕당(朋黨)과 함께 조선 시대 중기 이후의 커다란 폐단이 되었으며, 왕권은 이로 인해 점차 쇠약해졌다. 이처럼 명종의 치세 기간은 모후와 그의 동생 윤원형 두 사람의 전횡이 극에 달해 왕은 있으나 마나 하였으므로, 왕은 그들을 매우 싫어하여 이량(李樑) 【왕비의 아버지인 심강(沈鋼)의 처남】 을 발탁하여 윤원형에 대항하게 하였다. 이에 이량은 임금의 총애를 믿고 방자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이조판서가 되자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림(士林)들을 제거하려고 하여, 하마터면 사화가 일어날 뻔하였는데, 심강의 아들 심의겸의 이를 막아 이량을 제거하여 사림들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윤원형은 명종 20년 4월에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그 세력이 급격히 쇠약해졌으므로, 8월에 탄핵을 받고 관작이 삭탈되었으며 고향으로 돌아와 죽었다. 그러나 왕도 역시 그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상과 같이 조정 신하들과 외척들은 모두 권세를 얻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서로 양보 없이 배격하는 것을 일삼았으며, 그 결과 왕권이 크게 쇠약해짐에 따라 마침내 다음 왕인 선조 때에 이르러 붕당의 분쟁이 해결할 수 없는 세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붕당 편집

원인과 근인 편집

붕당(朋黨)의 분쟁은 폐왕 연산군 이래 조정의 선비들 사이에 누적되었던 다툼과 배격의 분위기와 왕권의 쇠약으로 싹텄다. 이것이 곧 원인(遠因)이다. 그런데 그 발단은 선조 【제14대】 때에 갑자기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이 반목하여 발생하였다. 이것이 곧 근인(近因)이다. 심의겸은 명종(明宗)의 외척으로서, 일찍이 이량(李樑)을 제거하고 사림의 화(禍)를 막아 주었으므로 인망(人望)이 있었다. 【본과 비고 3 「외척(外戚)의 전횡과 왕권의 쇠퇴」 참조】 나이가 많은 무리들은 대부분 그의 편이었고, 김효원은 신진(新進)이면서 재간이 있어 젊은 선비들은 모두 그를 추앙하고 따랐다. 처음에 명종 때 심의겸은 사인(舍人)이 되어 공무로 영의정 윤원형의 집에 갔는데, 그의 서재에 많은 침구(寢具)가 있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물었는데, 그중 하나는 김효원의 침구라고 하였다. 김효원은 이때 글 솜씨로 이름이 나 있었는데, 심의겸은 그가 권문세가에 드나드는 것을 보고 마음으로 그를 수치스럽게 여겼다. 김효원도 역시 심의겸이 외척의 위세에 의지하는 것을 경멸하여 존중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싫어하며 멀어졌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을 편드는 선비들도 역시 이편과 저편으로 나뉘어 서로 협력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당파가 나뉘는 형세를 보이게 되었다. 이때 김효원의 집은 도성 안의 동쪽에 있었고 심의겸의 집은 서쪽에 있었으므로, 전자(前者)에 치우치는 사람들을 동인(東人)이라고 불렀고 후자(後者)에 치우치는 사람들을 서인(西人)이라고 불러, 동당(東黨)과 서당(西黨)이라는 명칭이 시작되었다. 이는 선조 8년의 일이다. 이때 부제학(副提學) 이이(李珥)는 분당(分黨)의 폐해를 크게 염려하여 그들을 조정하려고 시도하였지만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여, 당시 선비들은 동·서 어느 당에든 가입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선조 17년에 이이가 세상을 떠나게 되어 동·서의 조정에 대한 기대는 완전히 끊어졌다. 이와 같이 붕당은 개인적인 감정의 충돌에서 기인한 것으로, 오늘날의 정당처럼 정치적 의견의 차이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 목적은 단순히 권력의 농단에 있었고, 국가를 잘 다스리는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하려는 데 있지 않았다. 국가의 번영은 오히려 당쟁(黨爭)의 희생양이 되는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아래에서 각 당(黨)의 성쇠(盛衰)를 개략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동인과 서인의 다툼 편집

이들 당파 가운데 가장 먼저 세력을 얻은 것은 서인(西人)이었지만, 후에 동인(東人)이 그것을 대체하였으며, 선조 24년에 동인은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의 두 파로 나뉘게 된다. 선조 25년 이래 7년 동안은 완전히 남인의 세상으로 그 당이 정부에 가득하였지만, 31년에 그 당의 우두머리인 유성룡(柳成龍)이 실각(失脚)함에 따라 남인을 갑자기 세력을 잃고 북인이 그들을 대체하였다.

대북, 소북의 다툼 편집

북인은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의 두 파로 나뉘게 되는데 폐주(廢主) 광해군(光海君) 【제15대】 시대는 대체로 북인이 세력을 가졌고, 【광해군이 즉위한 초기에 북인은 미미한 세력이었지만】 대북과 소북이 서로 다투었다. 그러나 광해군이 무도(無道)하여 폐위되고 인조(仁祖) 【제16대】 가 즉위하자, 서인들이 졸지에 두각을 나타내고 북인들은 세력을 잃었다. 이것은 광해군의 폐위가 많은 서인들에 의해 획책되었기 때문이다. 효종(孝宗) 【제17대】 은 특히 서인 가운데 명사(名士)인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을 신임함으로써, 서인은 점점 더 세력을 얻었다.

서인과 남인의 다툼 편집

효종이 세상을 떠나고 현종(顯宗) 【제18대】 과 숙종(肅宗) 【제19대】 이 연달아 즉위하자, 당쟁은 매우 복잡하게 뒤얽혀 두 왕이 재위한 기간에 서인과 남인의 두 파가 1승 1패로 맹렬히 다투었다. 숙종이 즉위한 초기에는 남인이 세력을 얻어, 서인의 영수(領袖)인 송시열은 마침내 관작(官爵)을 삭탈당하고 장기(長鬐) 【경상북도】 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숙종 6년에, 남인이 모반을 기도한 일이 있었으므로, 대대적으로 몰아내는 【이른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을 단행하여, 서인이 다시 잃어버린 세력을 만회하였다. 송시열은 다시 조정으로 돌아왔으며, 대로(大老)라고 불리며 한 시대에 명망이 그에게 쏠렸지만, 이 무렵부터 이미 서인들 가운데 소장파는 선배들에게 복종하지 않고 점차 분리되는 경향이 생겨났다.

노론, 소론의 다툼 편집

숙종 9년에 송시열이 상소를 올려 태조에게 시호를 내리려고 하자, 박세채(朴世采), 윤증(尹拯) 등이 반대하였으며, 그 결과 마침내 서인은 노론(老論) 【송시열을 위주로 하는 사람들】 과 소론(少論) 【박세채와 윤증을 위주로 하는 사람들】 의 두 파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14년 10월에, 왕의 총희(寵姬)인 장소의(張昭儀)는 왕자 균(呁)을 낳고, 이듬해 정월에 왕은 균을 원자(元子)에 봉하였으며, 또한 장소의의 지위를 높여 희빈(禧嬪)으로 하였다.

여러 대신들은 원자 책봉이 아직 이르다고 간(諫)하였으며, 송시열도 역시 상소를 올려 그렇게 주장하였기 때문에 왕의 노여움을 샀다. 남인이 이 틈을 이용하여 북인을 공격하여 송시열은 마침내 관작을 삭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되는 도중에 정읍(井邑) 【전라남도】 에서 사약을 받았다. 이리하여 서인은 모두 축출되고 남인은 다시 등용되었다. 그러나 숙종 20년에 이르러 왕은 지난 과오를 후회하여 모든 남인들을 물리치고, 소론파(少論派)들을 정승에 임명하고 다시 많은 서인들을 기용하였다. 이후 대체로 서인들은 노론과 대립하게 되어 형세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하는 제 과 비고 참조】

 

【『조야첨재(朝野僉載)』·『조야집요(朝野輯要)』·『석담일기(石潭日記)』·『율곡전집(栗谷全集)』·『조야회통(朝野會通)』·『일월록(日月錄)』·『국조보감(國朝寶鑑)』·『청야만집(靑野漫輯)』】

삼포의 난과 여진의 침범 편집

삼포(三浦)의 난(亂)과 여진(女眞)의 침범은 교과서 본문에서 그것을 생략하였지만, 중종(中宗) 무렵의 중요한 사건이므로 다음에서 그 개요를 기술한다.

삼포의 난 편집

세종 때에 쓰시마(對馬) 사람들을 위해 삼포를 개항하여, 무역을 하고 고기를 잡도록 하였으며, 또한 도주(島主)와 조약을 체결하였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서술하였다. 【제2과 비고 「쓰시마와의 관계」 참조】 처음의 규정에는 쓰시마에서 오는 사람들은 무역이나 고기잡이의 일을 마치면 곧장 돌아가야 한다고 정해 놓았지만, 언제부터인가 영주(永住)하는 사람이 생겨나 그 숫자가 차츰 증가하였다. 세종 16년에 왕은 예조(禮曹)로 하여금 쓰시마 도주 소 사다모리(宗貞盛)에게 서한을 보내, 이들을 모두 소환하도록 교섭하게 하고, 단지 그들 중 가장 오래 거주한 60명에게만 특별히 임시로 잔류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그 후 거류민은 다시 증가하여 세조 11년에는 아래와 같이 많은 숫자를 헤아리게 되었다.

 제포(薺浦)   호(戶) 300, 인구 1200여 명

 부산포(釜山浦) 호 110, 인구 330여 명

 염포(鹽浦)   호 36, 인구 120여 명

조선 정부는 혹시 거류민들이 화(禍)를 야기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여러 차례 소 사다모리에게 서신을 보내 그들을 송환할 것을 압박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중종 때에 이르러 호구(戶口)는 점점 늘어났다. 이때 조선의 진장(鎭將) 등은 거류민을 적절히 통제할 능력을 잃었으며, 특히 부산첨사(釜山僉使) 이우회(李友會)는 무모하게 오로지 위력으로 협박하여 따르도록 하려 하였으므로, 거류민들은 모두 그를 원망하여 숨어서 기회가 오기를 노렸다. 마침 쓰시마 도주 소 요시모리(宗義盛)는 조선이 세견선(歲遣船)을 야박하게 대우하고, 접대(接待)를 예(例)와 같이 하지 않는 것에 분노하여, 그의 아들 소 모리히로(宗盛弘)를 보냈는데 그는 병력 3백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거류민들은 이 기회를 틈타 일을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중종 5년 4월 4일에 거류민들은 부산(釜山) 【지금의 부산부(釜山府) 부산진(釜山鎭)】 과 제포(薺浦) 【지금의 창원군(昌原郡) 제포리(薺浦里)】 의 두 진성(鎭城)을 습격하고, 부산첨사 이우회를 살해하였으며 제포첨사(薺浦僉使) 김세균(金世均)을 사로잡고, 더 나아가 웅천(熊川)과 동래(東萊)의 두 성을 공격하였다. 웅천현감(熊川縣監)은 성을 포기하고 달아났으므로 웅천은 마침내 함락되었지만, 동래를 포위한 한 부대는 병력이 적어 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소식이 잇달아 왕도(王都)로 날아들었다. 왕은 크게 놀라 황형(黃衡) 【전(前) 승지(承旨)】 과 유담년(柳聃年) 【병조판서】 을 좌·우도방어사(左右道防禦使)로 삼아 우선 출발시켰으며, 다시 좌의정 유순정(柳順汀)을 도원수(都元帥)로 삼고, 병조판서 안윤덕(安潤德)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그 뒤를 잇도록 하였다. 이때 유순정이 가기를 어려워하며 우의정 성희안(成希顔)을 천거하였는데, 성희안도 역시 사양하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으므로, 왕은 특별히 유순정에게 출정하도록 명을 내렸다. 또 안윤덕은 출정 명령을 듣고는 두려워하여 시간을 끌면서 나가지 않았으며, 먼저 간 군대의 전황(戰況)을 기다리다가 10일이 지나서야 점차 출발하였다. 이로부터 당시 얼마나 사기(士氣)가 떨어져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유순정, 안윤덕 등이 아직 도착하기 전에 황형, 유담년 등이 나아가 싸워 적군을 격퇴하여, 웅천성 및 제포의 진성(鎭城)을 되찾고, 소 모리히로는 전사하였으므로, 거류민들의 대부분은 도망쳐 쓰시마로 돌아가, 겨우 10여 일 만에 사태는 평정될 수 있었다. 【『중종실록(中宗實錄)』·『조야첨재(朝野僉載)』·『음애잡기(陰崖雜記)』·『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종씨가보(宗氏家譜)』·『쓰시마편년략(對馬編年略)』】

임신조약 편집

이리하여 쓰시마와 조선 사이의 교류와 무역은 일시 중단되었지만, 그 때문에 물자(物資)의 부족으로 곤란해진 쓰시마 도주는 그 이듬해에 바쿠후(幕府)에게 아뢰어 조정을 요청하였다. 이로 인해 장군 요시타네(義稙)는 승려 호추(弸中)를 조선에 파견하여 쓰시마와의 교류 회복을 요구하자, 중종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려 하였지만, 성희안, 유순정 등 여러 대신들이 모두 해구(海寇)가 다시 출현할 것을 두려워하여 허락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난번 사건을 일으킨 수괴(首魁)를 처단하는 것을 조건으로 교류를 허락하였으며, 7년 【임신년】 4월에 아래 조약에 따라 다시 교류가 회복되기에 이르렀다.

 (1) 세견선(歲遣船) 50척을 절반으로 줄일 것

 (2) 세사미두(歲賜米豆) 2백 석을 백 석으로 할 것

 (3) 특송선(特送船)을 중단할 것 【만약 사정이 있으면 그것을 세견선에 맡길 것】

 (4) 수도서인(受圖書人)과 수직인(受職人)의 접대를 폐지할 것.

바로 이것이 임신조약(壬申條約)인데 이 조약을 맺은 이후 이어서 삼포의 거류민을 폐지하고 단지 부산에 관(館)을 설치하여 사신을 접대하는 곳으로 삼았다. 【제 과 비고 참조. 『중종실록(中宗實錄)』·『통문관지(通文館志)』·『조선통교대기(朝鮮通交大紀)』】

여진의 침범 편집

삼포의 난을 겪은 지 8년, 중종 13년에 이르러 북쪽 변경이 소란스러워졌다. 이보다 먼저, 함경도 회령부(會寧府) 성 밑의 여진족은 다른 부족과 함께 갑산부(甲山府)를 침범하여 많은 사람과 가축을 약탈하였다. 이 때문에 남도병사(南道兵使)의 은밀한 보고에 따라 군대를 보내 그들을 불시에 공격하려 하였지만, 부제학 조광조(趙光祖)는 그 일이 속임수로서, 바르지 않은 일이라고 주장하여 간하였으므로, 왕은 갑자기 그것을 중지하였다. 이어서 중종 18년에 평안도의 폐지된 군(郡)인 여연(閭延)과 무창(茂昌)의 경계 내에 여진인들이 와서 거주하여 점차 부락을 이루게 되었는데 강계부사(江界府使)는 군대를 보내 그들을 몰아냈지만, 중종 23년 정월에 만포첨사(滿浦僉使) 심사손(沈思遜)이 땔나무를 벌채하기 위해 경계를 넘었다가 여진인들에게 살해되었다. 왕은 노하여 그들을 토벌하려고 하였으며 대부분이 그것을 찬성하였지만, 좌의정 이행(李荇)만이 홀로 불가하다고 하여 토벌 계획은 마침내 중지되었다. 이후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에도 여전히 여진인들이 변경에서 소란을 일으키자, 선조 16년에는 온성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은 여러 장수들을 세 경로로 나누어 두만강을 건너 그들의 부락을 공격하고, 소굴을 불질러 없애고 돌아왔다. 【『정사촬록(政事撮錄)』·『일월록(日月錄)』·『조야첨재(朝野僉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