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소학일본역사보충교재교수참고서/권2/3. 세조
교수요지
편집본과에서는 세조(世祖)의 행적(行蹟)과 치적(治績)에 관해 가르치며, 또한 이른바 육신(六臣)들의 사적(事蹟)을 가르쳐야 한다.
강의요령
편집세조 즉위의 사정
편집세종(世宗)에 이어 즉위한 문종(文宗) 【제5대】 은 세종의 적장자(嫡長子)였다. 세종은 아들이 많았는데, 적출(嫡出)의 왕자 【적출을 ‘대군(大君)’이라고 부르고, 서출(庶出)을 ‘군(君)’이라고 부른다.】 만 해도 문종 외에 일곱 명이 있었다. 문종은 재위한 지 겨우 2년 만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문종이 임종을 앞두고, 세자가 나이가 어리고, 숙부에 해당하는 대군들이 매우 많아, 훗날 혹시 만에 하나라도 변고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유명(遺命)하여 세자를 보좌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세자가 즉위하였는데 그가 곧 단종(端宗)으로 이때 나이가 12세였다. 단종의 숙부인 일곱 명의 대군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수양대군(首陽大君) 【이름은 유(瑈)】 과 그의 아우인 안평대군(安平大君) 【이름은 용(瑢)】 이었다. 안평대군은 학문을 좋아하고 서화(書畵)에 능하여 그 명성이 높았으며, 또한 시문(詩文)에도 뛰어났으므로 많은 문사(文士)들이 그의 집에 드나들며 그와 사귀었다. 그에 반하여 수양대군은 무(武)를 좋아하고, 한명회(韓明澮)를 위주로 하는 많은 무사(武士)들과 사귀었으므로, 두 대군은 보이지 않게 서로 불화하였다. 이 때문에 수양대군은 한명회 등과 모의하여, 황보인,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을 끌어들여 왕위를 노린다는 핑계로 황보인, 김종서 두 사람과 그 일파를 살해하였다. 안평대군도 역시 이 일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리하여 왕은 수양대군을 영의정에 임명하고 국정을 위임하였다. 이어서 영의정 【수양대군】 과 좌의정 정인지(鄭麟趾)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안평대군을 죽였다. 【원년】 이리하여 수양대군은 사실상 국정을 좌우하였지만, 왕은 재위한 지 고작 3년 만에 수양대군에게 양위하였다. 그가 곧 세조 【제7대】 이다.
육신
편집세조는 왕위를 물려받고 전 왕을 존중하여 태상왕(太上王)이라고 하였다. 세조가 즉위한 다음해에 성삼문(成三問) 등 여섯 명이 주도하여, 몰래 상왕(上王)을 왕위에 복귀시키기 위하여,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에게 향응을 베푸는 날 거사하려 하였다. 그러나 계획이 누설되어 모두 체포되고, 왕이 친히 국문(鞫問)하였다. 성삼문 등은 불에 달군 인두에 몸이 지져지면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았고, 마침내 모두 살해되었다. 이 일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사람이 무척 많았다. 후세에 그들의 의로움을 칭찬하여, 성삼문 등 여섯 사람을 육신(六臣)이라고 불렀다. 상왕도 역시 이 일에 관여하였다고 하여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시켜, 영월(寧越) 【강원도】 로 보내졌다. 그러나 세조의 아우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 는 상왕의 불행을 개탄하여, 무리를 모아 은밀하게 노산군을 왕으로 맞이하는 반란을 모의하려 하였다. 이 일이 탄로나 금성대군도 사약을 받고 죽었다. 노산군은 그 소식을 듣고 목을 매어 죽었다. 이때 그의 나이 17세였다.
세조의 치적
편집세조가 즉위하기 전후에는 위와 같이 분란이 있었다. 이 때문에 왕의 혈육을 죽이기까지 하는 불행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왕은 온통 마음을 정치에 기울였으며, 농사를 권장하고, 무(武)를 장려하였으며, 또한 제도를 크게 정비하였으므로, 태종과 세종의 치세(治世)를 이어 나라의 기초를 공고히 다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왕 시대는 북쪽이 약간 안정되지 못하였는데, 야인(野人) 【여진족】 들이 여러 차례 압록강 상류 지방과 두만강 상류 지방을 유린하였다. 왕은 앞의 왕들과는 달리 크게 불교를 믿어, 경성에 원각사(圓覺寺)를 건립하고, 큰 종(鍾)을 주조하였으며, 13층 탑을 지었는데, 그 구조가 웅장하고 화려하여 사람들의 눈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후에 이 절은 폐기되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 터가 남아 있다.
비고
편집세종의 왕자들
편집세종은 재위 32년에 세상을 떠나고, 세자 향(珦)이 즉위하였다. 그가 문종(文宗) 【제5대】 이다. 문종은 재위 2년에 세상을 떠나고, 세자 홍위(弘暐)가 즉위하였다. 그가 단종(端宗) 【제6대】 으로 그때 나이가 겨우 12세였다. 왕의 숙부 일곱 명은 모두 대군(大君)에 봉해졌으며, 권세와 위력이 대단히 강하였다. 지금 아래에 세종의 여러 아들과 간략한 계보를 게재하고, 그 관계를 밝혀 두고자 한다.
세종(世宗) — 제1남 문종(文宗) 【휘(諱)는 향(珦)】 — 단종(端宗) 【휘는 홍위(弘暐)】
제2남 세조(世祖) 【휘는 유(瑈), 처음에 수양대군(首陽大君)에 봉해졌다.】
제3남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
제4남 임영대군(臨瀛大君) 구(璆)
제5남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
제6남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
제7남 평원대군(평원대군) 림(琳)
제8남 영응대군(永膺大君) 염(琰)
이상은 왕비 심씨(沈氏) 소생이다. 이 외에 딸 네 명, 서자 열 명이 있었다. 대군들은 모두 경쟁하면서 인재를 모으고 손님을 초대하였다. 안평대군 용(瑢)은 학문을 좋아하고, 서화(書畵)에 능하였으며, 또한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므로, 문인(文人) 재자(才子)들은 대부분이 용에게 몰렸다. 수양대군 유(瑈)는 큰 뜻을 품고 있었다. 안동(安東) 【경상북도】 사람인 권람(權擥)은 유에게 청주(淸州) 사람 한명회(韓明澮)를 천거하였다. 한명회는 크게 총애와 신임을 얻었는데, 생각하기를 ‘세상의 도의를 변화시킬 때, 문인은 쓸모가 없다. 마땅히 무인과 사귀어야 한다.’라고 느꼈다. 이에 무인 30여 명을 천거하였다. 이때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는 문종의 고명(顧命)에 따라 어린 임금을 보좌하였고, 이어서 좌찬성(左贊成) 정분(鄭笨)은 남지 대신 좌의정이 되었지만, 김종서의 지략과 용맹이 가장 뛰어나 당시 남들이 보기에는 대호(大虎)라고 일컬어지기에 이르렀다. 유는 이에 한명회 등과 상의하여, 우선 그를 제거하려고 하였는데, 단종 원년 10월 10일에, 친히 한명회 등과 무사들을 이끌고 김종서의 집에 도착하여, 어둠을 틈타 그를 살해하였다. 황보인도 역시 살해되고, 정분은 귀양된 다음 살해되었다. 다음날 왕은 교지를 내려 말하기를, “간신 황보인과 김종서 등은 안평대군 용과 결탁하여, 널리 친한 무리들을 가담시키고, 몰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선비들을 양성하여 모반을 꾀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용(瑢)을 강화로 유배시키고, 이어서 영의정 유(瑈)는 좌의정 정인지(鄭麟趾) 등의 건의에 따라 그에게 사약을 내렸다.
이징옥의 반란
편집함길도(咸吉道) 도절제사(都節制使) 이징옥(李澄玉)은 양산(梁山) 사람으로, 남들보다 월등히 무예가 뛰어나고 용감하여, 북쪽 변경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김종서는 그를 매우 소중히 여겨, 자기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대신 도절제사가 되게 하였지만, 김종서가 죽임을 당하자, 유(瑈)는 이징옥이 김종서의 편이라고 하여, 이징옥을 도절제사에서 물러나게 하고, 박호문(朴好問)을 보내 자리를 대신하도록 하였다. 이징옥은 이 소식을 듣고 안심할 수 없었다. 마침내 박호문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대금황제(大金皇帝)라고 칭하였지만, 종성절제사(鍾城節制使) 정종(鄭種)과 호군(護軍) 이행검(李行儉) 등에게 살해되었다.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단종실록(端宗實錄)』·『부계기문(涪溪記聞)』·『동각잡기(東閣雜記)』】
수양대군 유는 김종서 등을 주살하자, 영의정 겸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에 임명되었으며, 이어서 정인지 등 36명과 국가의 위난(危難)을 평정한 공훈이 인정되어 전쟁과 국사의 중요한 사안은 오로지 그의 손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3년 윤 6월에, 왕은 유를 불러 친히 국새(國璽)를 수여하고, 양위하였다. 유는 고사하였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 결국 왕위를 받아들여 세조(世祖)가 되었다. 즉시 단종을 존중하여 상왕(上王)으로 삼고, 단종을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겨가 살게 하였다. 【『단종실록(端宗實錄)』·『세조실록(世祖實錄)』·『동각잡기(東閣雜記)』】
육신
편집단종은 양위할 때, 성삼문(成三問)을 예방승지(禮房承旨)로 삼았다. 왕의 뜻을 받들어 국새를 바쳤으며, 나아가 경회루(慶會樓) 아래에 이르러 자신도 모르게 옥새를 부둥켜안고 통곡하였다. 마침내 형조참판(刑曹參判) 박팽년(朴彭年), 직제학(直提學) 이개(李塏), 예조참판(禮曹參判) 하위지(河緯地), 사예(司藝) 유성원(柳誠源), 무인(武人) 유응부(兪應孚) 등과 함께, 몰래 상왕의 복위를 모의하였다. 세조 2년 6월에, 명나라의 사신이 오자, 왕은 그를 위해 창덕궁에서 연회를 베풀기로 하였다. 성삼문 등은 곧 이 날 거사를 하기로 하였지만, 기회를 잡지 못하여 완수하지 못하였다. 뜻을 같이한 선비인 김질(金礩)은 거사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알자, 갑자기 생각을 바꿔 대궐로 달려가 모반이 있었음을 고해 바쳤다. 왕은 이에 성삼문 등을 포박하고, 그들을 섬돌 아래 앉혀놓고 친히 국문(鞫問)하였는데, 불에 달군 쇳동이로 몸을 지지는 참형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았다. 결국 모두 살육되고 오직 유성원만은 집에서 자살하였다. 후에 숙종 17년 9월, 육신(六臣)의 관직을 복원해주고, 그 절의(節義)를 표창하였다. 【『국조보감(國朝寶鑑)』·『세조실록(世祖實錄)』·『동각잡기(東閣雜記)』·『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
노산군
편집육신(六臣)들의 기도(企圖)가 실패하자, 상왕도 역시 이 일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寧越) 【강원도】 로 나가 살게 되었다. 이에 앞서 상왕은 창덕궁에서 이사하여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의 집에 있었으므로, 유도 역시 역모에 연루되어 순흥(順興) 【경상북도】 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유는 항상 순흥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서로 마주하며 비분강개하였으며, 마침내 함께 노산군의 복위를 도모하여, 이보흠으로 하여금 격문(檄文)의 초안을 쓰도록 하였다. 어떤 사람이 몰래 그 격문을 훔쳐가, 마침내 사건이 드러났다. 이보흠은 붙잡혀 주살되었고 유(瑜)도 역시 사약을 받고 죽었다. 노산군은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이때가 세조 2년 10월 24일이다. 【『세조실록(世祖實錄)』·『조야첨재(朝野僉載)』】 후에 숙종 때에 이르러 노산군을 복위시키자는 건의가 있어, 숙종 24년 11월에 마침내 노산군을 추복(追復)하여 묘호(廟號)를 단종(端宗)이라고 불렀다. 야사(野史)에 따르면, “노산군은 사약을 받았는데, 끝내는 시중을 드는 신하에게 목이 졸려 죽었다.”라고 한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세조 치세 가운데 중요한 사항들
편집세조는 영민하고 비범하였으며, 나라를 경영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 일찍이 마음을 군사(軍事)에 쏟아, 수양대군이 되었을 때는 이미 병서(兵書)를 편찬하고, 진법(陣法)을 만든 적이 있다. 후에 즉위하자 민정(民政)에 매우 신경을 썼으며, 또한 군정(軍政)의 진흥을 위하여, 개혁하고 혁신한 바가 적지 않았다. 또 거듭하여 농사를 권장하는 교지를 내렸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한다. 백성은 농사를 근본으로 한다. 농사는 지력(地力)을 모두 쓰는 것을 근본으로 한다. 지력을 모두 쓰는 것은 부지런함을 근본으로 한다. 부지런함은 먼 앞날을 헤아려 생각하는 것을 근본으로 한다. 이 다섯 가지 근본은 사람들이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세상은 모두 일시적으로 편안하려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가 행한 사업들 중 중요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수양대군 시대
편집세종 27년. 왕명에 따라 집현전(集賢殿)의 유신(儒臣)들과 함께 역대 병서(兵書)들을 요약하여 편찬하였는데, 그가 총재관(摠裁官)이 되었다. 병서 편찬은 단종 원년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문종 원년. 왕명을 받고 오위진법(五衛陣法)을 만들었다.
즉위 후
편집즉위한 해. 세종 때 설치한 압록강 상류 지방의 4군(郡)을 철폐하였다.
원년. 잠실(蠶室)을 설치하고, 비(妃)와 세자빈(世子嬪)으로 하여금 누에를 치도록 하였다. 또 8도 관찰사(觀察使)들에게 명하여, 홀아비와 과부와 고아 등 농사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요역(徭役)을 편하게 해 주고, 식량을 주어 농사에 종사하게 하였다.
3년. 처음으로 상평창법(常平倉法)을 시행하였다. 또 발병부(發兵符)를 만들어 각 도 관찰사(觀察使) 및 절제사(節制使)들에게 보냈다.
같은 해. 경기도관찰사에게 유지(諭旨)를 내려, 밭갈이와 김매기 및 퇴비를 주는 것에 주의하도록 당부하였다.
4년. 『병정(兵政)』 【진법(陣法)에 관한 책】 을 완성하였다.
같은 해. 『잠서주해(蠶書註解)』를 편찬하였으며, 또한 ‘양잠조건(養蠶條件)’을 반포하였다.
5년. 신정(新定)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호전(戶典)」을 반포하였다. 또 서쪽의 여러 지역을 순시하여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에 대하여 물었다.
같은 해. 함길도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 신숙주(申叔舟)는 파저강(婆豬江) 【통가강(佟佳江)】 의 야인들을 크게 무찔렀다.
6년. 둔전(屯田)을 증설하였다. 또 친히 『병경(兵鏡)』을 지었다.
7년. 양전(量田)을 실시하였다.
같은 해. 각종 책에서 양우법(養牛法)을 발췌하여 기록하였다.
같은 해.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고, 불경(佛經)을 조선문(朝鮮文)으로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9년. 원각사(圓覺寺)를 도성 안에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9년, 3갑(三甲) 전법을 반포하고, 또 명하여 전폐(箭幣) 【화폐의 일종】 를 주조하다.
10년. 친히 『병서대지(兵書大旨)』를 지었다.
같은 해. 교지를 내려 제방 및 보(洑)를 대대적으로 만들게 하였다. 또 함부로 소를 도살하지 못하게 하였다.
11년. 발영(拔英)과 등준(登俊)의 두 시험을 개설하고, 친히 책문하여 재주가 매우 뛰어난 선비들을 발탁하여 등용하였다.
12년. 전(前) 회령부사(會寧府使)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평정되었다. 또 군대를 이동하여 여진족을 토벌하였다.
같은 해. 친히 규형(窺衡) 및 인지의(印地儀)를 제작하여 땅의 원근(遠近)을 측정하였다.
세조는 또한 학문에 관한 일에 힘써, 관(官)에서 편찬한 저서가 적지 않다. 그 중 『국조보감(國朝寶鑑)』·『동국통감(東國通鑑)』은 가장 저명한 것이다. 【『조야회통(朝野會通)』·『조야첨재(朝野僉載)』·『국조보감(國朝寶鑑)』·『문헌비고(文獻備考)』】
4군의 폐지와 재설치
편집세종 때, 압록강 상류 지방에 여연(閭延), 자성(慈城), 무창(茂昌), 우예(虞芮) 등 4군을 설치하였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서술하였다. 【제2과 비고 「여진과의 관계」 참조.】 그러나 건너편 만주의 여진족이 발호하여, 여러 차례 이 지방에 침입하여 큰 피해를 입혔지만, 너무 궁벽한 곳에 치우쳐 있어 그들을 쉽게 방어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세조는 즉위한 해에 여연, 무창, 우예 3군을 철폐하고, 그 백성들을 구성(龜城)과 강계(江界) 【모두 평안북도】 로 이주시켰고, 세조 4년에 자성군을 폐지하여 그 백성들을 강계로 이주시켰다. 이로 인해 그곳을 폐사군(廢四郡)의 땅이라고 불렀다. 이후 2백 수십 년이 지나 숙종(肅宗) 【제19대】 9년에, 다시 이 땅에 무창, 자성의 두 진(鎭)을 설치하도록 명령하였지만 곧 폐지하였다. 후에 백여 년이 지나 정조(正祖) 【제22대】 12년에, 다시 무창진을 설치하였고, 순조(純祖) 【제23대】 13년에 부(府)로 승급시켰으며, 소재지를 후주(厚州)로 옮겨 함경도에 속하게 하였지만, 또다시 폐지하였다. 이 태왕(李太王) 6년 【메이지(明治) 2년】 에 상신(相臣) 김병학(金炳學)의 건의에 따라, 후주와 무창을 합쳐 새로 후창군(厚昌郡)으로 정하였으며, 다시 평안도에 소속시켰고, 같은 해에 다시 자성군(慈城郡)을 설치함으로써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러므로 같은 지방이 확실하게 군치(郡治)에 들어선 것은 매우 최근이라고 할 수 있다.
여진 토벌과 이시애의 난
편집세종 때, 두만강 안쪽의 땅을 거둬들이고, 6진(鎭)을 설치하여 그곳을 진압하였지만【제2과 비고 「여진과의 관계」 참조】 이후 여진의 움직임으로 갈등이 야기되어, 변경은 항상 평화롭지는 못하였다. 세조 때, 종성(鍾城) 부근의 강 건너 여진족과 불화가 생겨 여진족의 추장이 변방의 장수에게 주살되었으며, 그의 아들 아비차(阿比車)는 동족을 연합하여 여러 차례 회령(會寧) 지방에 침입해 왔으므로, 왕은 신숙주(申叔舟)를 함길도도체창사(咸吉道都體察使)로 삼아,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그들을 토벌하였다. 5년 9월에, 신숙주는 먼저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진로를 나누어, 무산(茂山), 【함경북도, 지금의 옛 무산】 운두(雲頭), 【회령의 서쪽】 부령(富寧) 등의 각지로부터 진격하여 여진의 경계로 쳐들어갔으며, 27일 자신은 종성을 출발하여 여진의 본거지로 향하여, 여러 장수들과 함께 그곳을 포위하고, 마침내 소굴을 초토화시키고 돌아왔다. 후에 세조 12년 9월에, 파저강 【앞서 말한 통가강】 의 여진족은 명나라를 배신하고 여러 차례 요동(遼東) 땅을 침입하였으며, 또한 조선의 의주(義州), 창성(昌城) 등의 땅을 침입하였으므로, 명나라는 군대를 일으켜 그들을 토벌하였으며, 다시 조선에 칙령을 내려 그들을 습격하도록 하였다. 왕은 이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강순(康純)을 우두머리 장수로 삼아, 병사 만여 명을 이끌고 그들을 정벌하였다. 같은 달에 강순은 압록강을 건너 파저강의 본거지를 공격하여 여진을 무찌르고, 추장 이만주(李滿住)를 참수하고 돌아왔다. 【『세조실록(世祖實錄)』·『황명실록(皇明實錄)』·『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이 해 5월에, 길주(吉州) 사람 이시애(李施愛)는 반란을 일으켜 주살되었다. 이시애는 일찍이 회령부사(會寧府使)로 있었다. 상(喪)을 당하여 집에 머물고 있었지만, 몰래 다른 뜻을 품었으며, 마침내 동생인 시합(施合)과 모의하여 병사(兵使) 강강문(姜康文), 길주목사(吉州牧使) 허징(許澄) 등을 죽이고, 주(州)를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다. 함흥 이북의 주(州), 군(郡)은 이에 호응하여, 모두 수령을 죽이고 앞다투어 그에게 항복하였다. 관찰사 신면(申㴐)은 항거하여 싸웠지만, 이겨내지 못하고 역시 살해되었다. 왕은 이에 허종(許悰)을 절도사로 삼아, 회령부사 어유소(魚有沼), 절제사(節制使) 강순(康純) 등과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먼저 가서 그들을 토벌하였으며, 이어서 구성군(龜城君) 준(浚)을 함길, 강원, 평안, 황해 4도(道)의 도총사(都摠使)로 삼았는데 구성군은 10만 명의 대병력을 이끌고 나중에 출발하였다. 허종 등은 나아가 홍원(洪原), 북청(北靑) 【이상 함경남도】 등지에서 이시애의 군대와 싸웠으며, 만령(蔓嶺) 【함경남도 이원군(利原郡)】 에 이르러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시애는 달아나 길주로 돌아갔으며, 여진으로 도망치려고 하였지만 도착하기 전에 붙잡혀 진영 앞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떠도는 “한명회, 신숙주 등은 이시애와 내통하였다.”라는 말이 떠돌았다. 이에 왕은 한명회 등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지만 곧 모두 용서하였다. 【『동각잡기(東閣雜記)』·『기재잡기(寄齋雜記)』·『조야첨재(朝野僉載)』】
원각사
편집세조 9년에, 왕의 백부(伯父)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은 회암사(檜巖寺) 【경기도 양주군에 있다.】 에서 법회를 열고 원각경(圓覺經)을 강의하였다. 그때 여래(如來)가 모습을 나타냈으며, 사리분신(舍利分身)의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왕은 이 상서로움을 이상하게 느끼고, 명을 내려 도성 안에 있는 폐기된 흥복사(興福寺)의 옛터를 넓히고, 그곳에 큰 절을 짓도록 하였다. 이듬해 10년에, 공사를 마치고, 원각사(圓覺寺)라고 이름을 붙였으며, 다시 다음해 11년에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큰 불상 하나를 만들어 전각 안에 안치하였으며, 또한 큰 종을 주조하고, 13층 탑을 건설하였다. 규모가 대단히 크고, 울긋불긋한 색이 서로 어우러져 빛났는데, 장대하고 미려한 아름다움이 그에 비할 것이 없었다고 일컬어졌다. 그러나 이 절은 지은 지 겨우 40년 만에, 연산군(燕山君) 【제10대】 은 그것을 철폐하고 기방(妓坊)으로 만들었으며, 다음 왕인 중종(中宗) 【제11대】 7년에, 명을 내려 헐어 버렸다. 현재 경성의 탑동공원(塔洞公園) 【보통 파고다 공원이라고 하는데, 파고다는 외국어로 탑이라는 뜻이다.】 이 그 유적지인데 유명한 13층 탑과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가 있다. 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었으며, 사리(舍利) 및 원각경(圓覺經)이 보관되어 있고, 양식과 조각은 대단히 우수하다. 탑이 완성된 것은 세조 12년 【다이쇼(大正) 10년으로부터 454년 전】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