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소학일본역사보충교재교수참고서/권2/11. 갑신정변과 갑오혁신

교수요지 편집

본과에서는 메이지(明治) 15년 임오정변(壬午政變) 이후, 조선은 청나라의 억압을 심하게 받았으며, 그 결과 안으로는 독립당(獨立黨)과 사대당(事大黨)의 다툼이 극심해졌으며, 마침내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야기하였고, 밖으로는 일본과 청나라 양국의 알력을 초래하여, 결국 메이지 27〜28년의 전쟁이 발발하게 된 내역을 가르친다. 이어서 사대당이 우세하였던 기간은 조금도 국정이 개선될 수 없었지만 일본과 조선의 동맹에 따라 갑오혁신(甲午革新)이 촉진되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강의요령 편집

독립당과 사대당 편집

조선은 청나라에 복속된 후 이미 240여 년이 지났지만, 청나라의 국력은 크게 쇠퇴한 데 반해, 일본은 대정유신(大政維新) 이래 국운(國運)이 날로 강해졌으므로, 임오정변 전후(前後) 조선의 정치가들 중에는 일본의 국정(國情)을 시찰하고 돌아와, 일본의 힘을 빌어 정치를 개혁시키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을 독립당(獨立黨)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종래와 같이 청나라를 섬기려는 사람들을 사대당(事大黨)이라고 불렀다. 이 파의 사람들은 대다수가 보수(保守)를 좋아하고, 개혁(改革)을 좋아하지 않았다. 임오정변 이후는 사대당이 세력을 얻어, 청나라의 후원을 믿고 전횡을 하였으므로, 독립당은 그들을 뒤엎고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려고 하여, 어느 쪽이든 몰래 계략을 써서 암암리에 서로 다투었다.

갑신정변 편집

메이지 17년 【이 태왕 21년, 갑신년】 에 독립당의 우두머리인 김옥균(金玉均), 홍영식(洪英植) 등은 모의하여 급히 사건을 일으켜, 사대당의 우두머리들을 살상(殺傷)하고 순식간에 정권을 장악하였지만, 곧 사대당이 세력을 회복하여 홍영식은 살해되고 김옥균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것을 갑신정변(甲申政變)이라고 한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은 국왕의 요청에 따라 왕궁을 보호하였는데, 청나라 군대는 사대당을 지원하여 궁중으로 난입하자, 일본군대는 그들과 싸웠지만 인원이 적어 대적할 수 없었으며, 이어서 일본 공사관은 청나라 군대 및 폭도들에게 불태워졌다. 이 때문에 이듬해에 일본은 우선 조선 정부에 교섭하여 조선이 국서(國書)로써 일본에 대해 사의(謝意)를 표시하고 또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하였으며, 【메이지 18년 1월의 한성조약(漢城條約)】 이어서 청나라와 조약을 체결하여, 일본과 함께 완전히 군대를 반도에서 철수하기로 하였다. 【메이지 18년 4월의 천진조약(天津條約)】 이 사변 이후 사대당은 청나라의 후원을 믿고 오랫동안 세력을 떨쳤지만 그 사이에 정치는 조금도 개량되지 못하고 더욱 부패하여, 관리들은 오로지 사적(私的) 이익을 도모하고, 인민은 그 가혹한 수탈로 심한 고통을 받았다.

일본과 청나라의 전쟁 편집

메이지 27년 【이 태왕 31년】 에 전라도 고부(古阜)의 인민들이 군수(郡守)의 학정을 견디지 못하여 마침내 난을 일으켰다. 이에 앞서 경주(慶州) 사람 최제우(崔濟愚)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동학(東學)을 주창하였다. 【제25대 철종 때】 동학은 서학(西學) 즉 기독교가 널리 보급되는 것에 대항하여 일어난 것인데, 정부는 사설(邪說)로 간주하여 이를 금지하고, 최제우는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렇지만 이 종교는 언제부터인가 삼남(三南) 지방에 널리 퍼져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매우 많아졌다. 고부에서 폭도들이 일어났을 때 그 지역의 동학당에 전봉준(全琒準)이라는 사람이 있었으며, 미리부터 관리들의 폭압에 분노하는 틈을 타 무리를 모으고 마침내 진격하여 전주를 함락시키고 거기에 웅거하였다. 여러 인민들이 메아리처럼 그에 호응하여 세력이 매우 강력하였다. 정부는 군대를 보내 그들을 토벌하도록 하였지만 쉽게 당해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청나라 정부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청나라는 속국의 난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많은 인원의 군대를 보내 아산(牙山)에 상륙하게 하였다. 일본은 그때까지 정변이 있을 때마다 큰 손해를 입었으므로, 곧장 공사관과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 인천에 상륙시켰다. 이리하여 일본은 청나라와 협력하여 조선의 내란을 진압하고 내정을 개혁시킬 것을 청나라 정부에게 권하였지만, 그들은 이를 거부하고 단지 일본의 철군만을 요구하였으며, 그들의 군함이 7월에 우리 군함을 풍도(豐島) 앞바다에서 포격하여 전쟁의 단서를 열었다. 【7월 25일】 우리 군함은 이에 응전하여 그들을 격파하고 더 나아가 두 나라가 교전하게 되었다.

일본·조선 동맹 편집

일본과 청나라 양국의 관계가 크게 긴박해지자, 원세개(袁世凱)는 몰래 경성을 피해 귀국하였으므로, 그 후 며칠이 지나자 조선 정부의 태도는 급변하여 단호히 청나라와 국교를 단절하고, 일본 공사 【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 에게 위임하여 청나라 군대를 물리치도록 하였으며, 【7월 25일】 이어서 일선공수동맹조약(日鮮攻守同盟)을 체결하였다. 【8월 26일】 일본군은 청나라 군대를 몰아내라는 명령을 받자, 곧바로 진격하여 우선 성환(成歡) 【충청남도】 에 웅거하던 적군을 공격하여 그들을 도망치게 하였으며, 【7월 29일】 이어서 평양을 함락시키고 적의 근거지를 무너뜨렸으므로, 【9월 16일】 청나라 군대는 반도에서 완전히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갑오혁신 편집

이때 국왕은 일본 공사의 권유에 따라 일본의 충언을 받아들여 여러 가지 정치적 개혁을 결정하였다. 이에 새로운 정치의 유서(諭書)를 내려, 【7월 24일】 종래 정권을 장악하였던 사대당 사람들은 모두 파면하고, 개화당 【독립당에 이어서 일어난 개화진보파 사람들을 이른다.】 사람들로 대신하였다. 또한 새로 의정부(議政府) 안에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고, 【7월 26일】 영의정은 그 총재(總裁)를, 기타 중요한 관리들은 그 의원(議員)을 겸임하고 이곳에서 회의를 열어 일체의 중요한 정무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새로운 법령을 활발히 발포하여 옛 제도와 습관 등을 매우 많이 고침으로써 실로 근세에 하나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또 종래에 사용하던 청나라의 연호(年號)의 사용을 중지하고, 연도를 이를 때 태조(太祖)가 즉위한 원년(元年)으로부터 계산하여 개국 몇 년이라고 이르기로 하였다. 【7월 30일】 이 사건은 예로부터 중국의 정삭(正朔)을 받들던 조선에서는 참으로 크게 용기를 낸 지혜로운 조처였다. 보통은 이러한 개혁들을 일컬어 갑오혁신(甲午革新)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메이지 27년 【이 태왕 31년, 개국 503년】 바로 갑오년(甲午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시모노세키조약 편집

일본과 청나라의 개전(開戰) 이래 10개월이 지나자, 청나라 군대는 완전히 패배하고 일본의 대승리로 돌아갔으며, 일본군은 곧 북경으로 공격해 가려고 하였다. 이렇게 되자 청나라는 크게 두려워하여 이홍장(李鴻章)을 일본에 보내 화의를 요청하도록 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에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陸奧宗光)을 전권위원(全權委員)으로 삼아, 그들과 시모노세키(下關)에서 만나게 하였다. 이리하여 양국의 위원들은 상의하여 마침내 강화조약(講和條約)을 체결하였다. 이를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이라고 한다. 이때가 메이지 28년 【개국 504년, 이 태왕 32년】 4월이다. 이 조약에 따라 청나라는 공공연히 조선이 독립국임을 인정하였다. 인조(仁祖) 15년에 조선이 청나라에 복속된 이후부터 실로 259년 만이었다.

그 후의 개혁과 혁신 편집

이리하여 2년 후에 【메이지 29년, 개국 505년】 처음으로 연호를 건양(建陽)이라고 하였으며, 개국 504년 11월 17일 【구력(舊曆)】 을 건양 원년 1월 1일로 정하였다. 동시에 태음력(太陰曆)을 폐지하고 태양력(太陽曆)을 사용하였다. 【연호(年號)에 관해서는 권1 제5과 비고 7 「조선의 연호(年號)」 참조】 또 같은 해에 지방제도를 종래의 8도에서 13도로 고쳐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주의 편집

메이지 27〜28년의 전쟁에 관해서는, 보통학교국어독본(普通學校國語讀本) 권6 제21과와 제22과 「메이지 27〜28년의 전쟁」에서 배웠으므로, 이 과 수업에서는 어린이들의 기억을 환기시켜야 한다. 또 보통학교수신서(普通學校修身書) 권4 제4과 「요시히사(能久) 천황」을 참조해야 한다.

비고 편집

갑신정변 편집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속국(屬國)의 예의를 갖추도록 요구하였지만 내치(內治)와 외교(外交)에 관해서는 거의 간섭하지 않았는데, 일한수호조규(日韓修好條規) 체결 이래 조선에서 일본의 세력이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였다. 또 조선은 일본의 힘으로 점차 개명(開明)해 나아갔으므로, 이처럼 그대로 두었다가는 조선은 마침내 청나라의 속국이 안 될 것을 우려하여, 실력으로 조선에 세력을 다져 일본의 세력을 배척하려고 하였다. 메이지 15년의 변란을 기회로 삼아 청나라는 종래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조선 정부에 중국인 및 외국인을 초빙하여 고용함으로써 그 내치(內治)와 외교(外交)에 간섭하고, 자국의 군대를 경성에 머물게 하여, 한국 조정을 위협하였다. 또한 조선의 군대를 모두 청나라 식으로 훈련시키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이미 앞 과에서 서술한 바와 같다. 그러나 그 전해 【메이지 14년】 에 조선의 신사(紳士)들은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왔으며, 또한 임오변란(壬午變亂) 후 【메이지 15년 10월】 에는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 부사(副使) 김만식(金晩植)과 서광범(徐光範), 민영익(閔泳翊), 김옥균(金玉均) 등이 수행하여 일본에 갔다가 돌아왔다. 이들은 모두 일본을 모방하여 국정을 개혁하고 문명을 수입하려고 하였으므로, 이 무렵부터 조선의 정치가들 가운데에는 자연히 두 파가 생겨났다. 하나를 사대당(事大黨)이라고 하고, 다른 하나를 독립당(獨立黨)이라고 한다. 사대당은 곧 청나라의 후원을 믿고 국정을 장악하려는 사람들로, 주로 보수(保守)에 속하는데, 민씨 일족과 그 외의 사람들이 그에 속하였다. 독립당은 일본의 힘에 의지하여 정치를 개혁하고, 청나라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사람들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이 그 우두머리들이었다. 이들 두 파는 서로 알력이 끊이지 않았는데, 메이지 17년 6월 이래 청나라는 안남(安南) 문제에 관해 프랑스와 갈등을 일으켰으며, 마침내 복주(福州), 대만(臺灣) 등에서 전투를 벌여 동쪽을 돌볼 겨를이 없었으므로, 이 기회에 독립당은 일을 벌이려고 하였다.

이에 앞서, 이 태왕 21년 3월 【메이지 17년 4월】 에 우정국(郵征局)이 신설되어 홍영식(洪英植)이 총판(總辦)에 임명되었다. 이 때문에 10월 17일 【양력 12월 4일】 오후 6시경부터 개국(開局) 연회를 열고, 홍 국장의 명의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와 미국 공사 후트(Foote)와 기타 외국 사신들을 비롯하여 조선의 고관 십 수 명을 초대하였다. 다케조에 공사는 몸이 편찮았기 때문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연회가 한창일 때 주변에 불이 나자, 손님 일동은 놀라 밖으로 나가려고 하였으며, 우영사(右營使) 민영익이 먼저 문을 나서자, 문 밖에서 숨어 있던 흉도에게 상해를 입게 되었다. 독립당은 일거에 반대당을 소탕하다가 기회를 놓쳤다. 그렇지만 사건이 발생하자 김옥균과 박영효 두 사람은 곧장 서둘러 창덕궁으로 가 침전(寢殿)에 들러 국왕에게 소란이 일어나 위기가 닥쳤음을 알리고 왕을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겼으며, 동시에 사신을 일본 공사관에 보내 왕명(王命)으로 급히 대궐을 수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리하여 다케조에 공사는 1개 중대의 병력을 이끌고 들어와 국왕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왕은 다시 계동궁(桂洞宮)으로 옮겨 갔다. 이 사이에 왕명으로 민영목(閔泳穆), 【외아문 독판(外衙門督辨)】 민태호(閔台鎬), 【내아문 독판】 한규직(韓圭稷), 【전영대장(前營大將)】 윤태준(尹泰駿), 【후영대장(後營大將)】 이조연(李祖淵), 【좌영대장(左營大將)】 조영하(趙寧夏) 【이조판서】 등 반대파의 우두머리들을 불러, 그들이 도착한 즉시 그들을 살육하고 이재원(李載元), 【좌의정이 되었다.】 홍영식(洪英植), 【우의정이 되었다.】 김옥균(金玉均) 【호조판서가 되었다.】 등이 주요 국가기관을 장악하였다. 【이상은 모두 17일 밤에 일어난 사건들이다.】 이리하여 새 정부의 조직이 이루어지고, 왕은 이튿날인 18일 【양력 5일】 저녁 무렵에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갔다. 사대당 사람들은 원세개(袁世凱)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므로, 19일 【양력 6일】 에 이르러 청나라 장수 원세개, 오조유(吳兆有)가 군대를 이끌고 왕궁의 동쪽인 선인문(宣人門)으로 들어오자, 문 안에 있던 조선 군대는 그들과 화합하여 함께 탄환을 발사하였다. 왕 쪽에 탄환이 날아들어 위험은 말할 수 없었다. 일본군도 역시 그에 대응하여 총을 발사하였다. 이때 왕궁에 불을 지른 사람이 있었는데 그 혼란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방어에 힘을 쏟았지만, 왕궁 내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이 이롭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공사는 국왕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일단 교동(校洞)에 있는 일본 공사관으로 돌아왔다. 이때 왕의 신변을 보호하던 박영교(朴泳敎) 【박영효의 형】 와 홍영식은 중국 군대에 살해되었고, 원세개는 국왕을 하도감(下都監)의 중국 병영으로 옮겼으며, 이튿날 【양력 7일】 중국 병영에서 교지(敎旨)를 발표하여 심순택(沈舜澤), 【영의정】 김굉집(金宏集), 【좌의정】 김병시(金炳始) 【우의정】 등으로 이루어진 정부를 조직하였다. 이리하여 정권은 다시 사대당에게 넘어가고 독립당 정부는 성립된 지 겨우 이틀 만에 전복되었다.

일본 공사관은 잇따라 중국 군대와 폭민(暴民)들의 습격을 받았으며, 거류민들도 그들에게 살상(殺傷)당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다케조에 공사는 마침내 마음을 정하여, 20일 【양력 7일】 오후에 공사관원과 거류민 【양쪽 합쳐 약 백여 명】 을 이끌고, 우리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인천으로 피난하였으며, 잠시 그곳에 머물면서 일본에서 전권대사(全權大使)가 오기를 기다렸다. 박영효, 김옥균 등 독립당의 우두머리들은 의탁할 곳이 없어 모두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이 난으로 경성에 거류하는 일본인 중 살상된 사람은 50여 명이며 대위 이소바야시 신조(磯林眞三)도 역시 난민(亂民)들에게 살해되었으며, 신축된 공사관은 중국 군대와 폭민들이 불태웠다. 변란의 보고가 일본에 도달하자, 조야(朝野)에서 모두 중국 군대가 먼저 싸움을 시작한 것에 분노하였으며, 정부는 외무경(外務卿)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를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경성에 파견하고, 청나라는 오대징(吳大徵)을 파견하여 일을 처리하도록 하였다.

한성조약 편집

이노우에 대사 일행은 11월 【양력 12월】 에 일본을 출발하여 한성에 들어가, 【양력 이듬해 1월】 조선의 전권(全權) 김굉집과 회합하여, 23일 【양력 1월 8일】 에 의견을 조정하고 24일 【양력 9일】 에 강화조약에 조인하였다. 그것을 한성조약(漢城條約)이라고 한다. 이 조약은 5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데 (1) 조선은 국서(國書)로써 일본에 대해 사의(謝意)를 표시할 것 (2) 피해자에 대해 배상금을 지불할 것 (3) 이소바야시 대위를 살해한 흉도를 처벌할 것 (4) 공사관 터와 공사비를 제공할 것 등을 요건으로 하였다. 이 조약이 체결된 후 조선 정부는 예조판서(禮曹判書) 서상우(徐相雨)를 정사(正使)로 삼고, 외무협판(外務協辨) 멜렌도르프를 부사(副使)로 삼아 일본에 파견하여 사의를 표시하였으며, 또 한편으로 김옥균 등의 잔당들을 체포하여 그들을 처형하였다.

갑신정변은 한성조약으로 결말을 고하였다. 그러나 그 변란의 진상을 탐색할 때는 일본과 청나라의 충돌을 빼놓을 수 없다. 따라서 곧바로 청나라와 협의하여 미리 그 충돌을 방지할 필요가 있었다.

천진조약 편집

이리하여 일본국 정부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전권대사로, 사이고 츠구미치(西鄕從道)를 부사로 임명하여 중국에 파견하고, 천진(天津)에서 그 나라 전권 이홍장(李鴻章)과 만나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천진조약(天津條約)이다. 이 조약은 (1) 청나라는 조선에 주둔하는 군대를 철수할 것, 일본은 조선에 있는 공사관 호위병을 철수할 것 (2) 조선 국왕에게 권고하여 병사를 훈련시킴으로써 스스로 치안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할 것 (3) 장래 조선이 만약 변란이나 중대한 사건이 있어 양국 혹은 한 나라가 군대를 파견할 필요가 있으면 서로 통지해야 하고 사건이 정리되면 철수할 것 등 3개 조항으로 이루어졌다. 【『한성주잔몽(漢城遒殘夢)』·『특종조약휘찬(特種條約彙纂)』·『한반도(韓半島)』】

김옥균 편집

김옥균(金玉均)은 자(字)가 백온(伯溫)이고, 호가 고우(古愚) 또는 고균(古筠)이다. 본관(本貫)은 안동(安東) 【경상북도】 으로, 철종 2년 【카에이(嘉永) 4년】 에 경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병태(金炳台)이다. 자라서 집을 나와 일가인 김병기(金炳基)의 집에 계자로 들어갔다. 22세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이 태왕 19년 【메이지 15년】 에 박영효가 임오변란(壬午變亂) 후의 수신대사(修身大使)로 일본에 파견되자, 김옥균도 역시 일행 가운데 참가하였다. 이것은 그가 처음으로 일본에 간 것이다. 이듬해 21년 【메이지 16년】 에 포경사(捕鯨使)에 임명되었으며, 오래지 않아 외아문(外衙門)의 참의(參議)로 진급하였다. 이해에 그는 육군호산학교(陸軍戶山學校) 입학생 17명을 인솔하여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야(朝野)의 명사(名士)들과 교유하여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우시바 타쿠죠(牛場卓三)와 다카하시 세이신(高橋正信) 등 여러 명의 고문(顧問)들을 고용하였다. 때마침 조선 주재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가 경성에 부임해 왔다. 함께 메이지마루(明治丸)에 탑승하여 세모(歲暮) 【메이지 16년 1월 7일】 에 귀국하였다.

김옥균은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서재필(徐載弼) 등 세계의 대세(大勢)에 밝은 소장(少壯) 기예(氣銳)들과 의기투합하여, 몰래 독립당(獨立黨)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항상 청나라의 간섭을 물리치고, 고루한 사대당(事大黨)을 박멸함으로써, 국정의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하려고 꾀하였다. 21년 10월 17일 【메이지 17년 12월 4일】 에 독립당원들은 우정국(郵征局) 개설 축하일에 거사하여, 민영목(閔泳穆), 민태호(閔台鎬) 이하 6명의 반대당 우두머리들을 살해하고, 곧바로 독립당 정부를 조직하여, 김옥균은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가 사대당을 지원하여 습격해오자, 국왕은 청나라 군대에게 투항하였으므로, 독립당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김옥균은 박영효와 함께 일단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하였으며, 후에 인천에서 일본 우선(郵船)인 센넨마루(千年丸)에 타고 나가사키항(長崎港)에 상륙하였다.

조선 내에 있던 독립당의 나머지 사람들은 거의 박멸되었지만, 일본으로 망명한 우두머리 박영효와 김옥균에 대한 사대당의 증오는 놀랄 만큼 심하였다. 사대당은 첩자를 보내 그들의 동정을 정찰하거나 자객을 보내 암살을 시도하는 등 모든 수단을 다하였다.

이 태왕 22년 【메이지 18년】 에 오이 겐타로(大井憲太郞) 【호(號)를 하죠(馬城)라고 한다.】 가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과 공모하여 조선의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음모가 발각되자, 일본 정부는 곧바로 관계자 약 30명을 체포하여, 재앙을 미리 방지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당국자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더욱 김옥균을 제거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 후 일본 정부는 국제적인 관계 및 국내의 공안(公安) 유지 차원에서, 메이지 19년 6월 11일에 김옥균에게 도쿄(東京)를 떠날 것을 명하고, 오가사와라 섬(小笠原島) 【도쿄부(東京府) 아래】 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건강이 매우 손상되었으므로, 정부의 허가를 얻어 홋카이도(北海島)로 옮겨 갔는데, 메이지 24년에 풀려나 다시 도쿄로 돌아왔다.

조선의 정객(政客) 홍종우(洪鍾宇)라는 사람이 언젠가 도쿄에 와서, 교묘하게 김옥균에게 접근하여, 시국이 날로 잘못되어 가는 것을 개탄하고, 청나라와 결탁하여 국세(國勢)를 만회할 것을 역설한 적이 있었다. 김옥균은 생각건대 우리 일본에서 떠돌면서 생활한 지 10년인데, 뜻을 아직 이루지 못하였으니, 차라리 중국으로 건너가 크게 일을 도모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여겼다. 마침내 메이지 27년 3월 11일에 청나라 공사관의 통역관인 오보인(吳葆仁), 홍종우 및 시종인 기다하라 엔지(北原延次) 등 세 사람과 함께 도쿄를 떠나, 도중에 오사카(大阪)에 들렀다가, 같은 달 27일에 중국 상해(上海)에 안착하여, 일본 여관인 동화양행(東和洋行)에 투숙하였다. 이리하여 홍종우는 이튿날인 28일에 시종이 없는 틈을 엿보았다가 권총으로 김옥균을 격살(擊殺)하였다. 이때가 이 태왕(이 태왕) 31년 2월 22일이다. 김옥균이 사망하였을 때 나이는 44세였다.

홍종우는 일단 몸을 피해 상해 부근의 민가(民家)에 숨었는데, 그날 밤 청나라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청나라 관헌은 그에게 죄를 묻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보호하는 태도로 보였는데, 김옥균의 사체를 군함인 위원호(威遠號)에게 싣고 홍종우를 함께 태워 인천항으로 보냈다. 이리하여 조선 정부는 김옥균에게 부과한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명으로, 그의 시신을 양화진(楊花鎭) 【한강 연안】 에서 능지처참(陵遲處斬)의 극형에 처하고, 머리와 사지(四肢)를 잘라내어 그것을 매달아 놓았다. 【3월 9일】 이 상세한 보고가 일본에 전해지자, 청나라의 조치를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점차 일본과 청나라 양국민의 감정을 자극하였다. 【『만세계보(萬世系譜)』·『대동기년(大東紀年)』·『김옥균전(金玉均傳)』 등】

홍영식 편집

홍영식(洪英植)은 남양(南陽) 【경기도】 의 이름난 홍씨(洪氏) 가문에서 태어났다.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의 둘째 아들이며 홍만식(洪萬植)의 동생이다. 철종 6년 【안세이(安政) 2년】 에 경성(京城)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중육(仲育)이며, 호는 없다. 어려서 뛰어난 총명함과 빼어난 재능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18세 때 문과에 등제하였다. 이 태왕 18년 【메이지 14년】 4월에, 정부는 조병직(趙秉稷) 이하 십 수 명을 시찰위원(視察委員)으로 일본에 파견하여, 정치, 병제(兵制), 교육, 산업 등 전반에 걸쳐 조사를 수행하게 하였다. 홍영식도 역시 선발되어 일행에 참가하였으며, 일을 완료하고 귀국하였다. 이듬해 19년 임오년(壬午年) 【메이지 15년】 의 정변(政變) 후에 박영효(朴泳孝)가 수신사(修信使)로서 일본에 갈 때, 홍영식은 수행원 중 한 사람으로서 다시 일본에 건너갔다. 이듬해 6월에 또 박영효를 수행하여 미국에 사절로 가서, 제도·문물을 자세하게 시찰하고, 21년 봄에 무사히 귀국하였다.

이렇게 홍영식은 여러 차례 해외에 파견되어, 일본과 미국 등 선진국의 문물을 접촉하고, 그 국운(國運)의 융성함을 보고 선망의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반대로 당시의 조선을 돌아보면, 청나라는 음으로 양으로 그 내치(內治)와 외교(外交)에 간섭하였고, 또 청나라를 섬기려는 이른바 사대당(事大黨)의 대다수는 보수(保守)를 좋아하고 개혁을 좋아하지 않았다. 홍영식은 이에 박영효, 김옥균 등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당(獨立黨)을 조직하였다. 홍영식은 또 별입시(別入侍)로서 궁중에 출입하였으므로, 국왕과 친근한 기회를 얻어 개혁을 종용하였다. 마침내 우편제도(郵便制度)의 채용을 진언하여, 자신이 창설한 국(局)을 맡았으며, 일본 정부로부터 두세 명의 고문을 초빙하고, 필수 요원들은 도쿄인쇄국(東京印刷局)에서 보내기로 하였다. 이윽고 우편의 새로운 관제(官制)가 갖추어지고, 우정국(郵征局)을 경성 북부 전동(典洞)에 설치하였으며, 홍영식은 그 총판(總辨)에 임명되었다.

갑신정변 때 잠시 독립당 정부가 성립되자, 이 당의 우두머리로서 홍영식은 우의정에, 김옥균은 호조판서에 임명되었고, 박영효는 전후(前後) 양쪽 영(營)의 대장(大將)과 한성판윤(漢城判尹)을 겸직하였다. 그러나 중국 군대가 왕궁에 갑자기 들어와 일본 군대와 싸우게 되어 형세가 매우 불리하였으므로, 박영효, 김옥균 등은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일본으로 피하였다. 홍영식은 끝까지 왕을 호종(扈從)하여 궁중을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십 수 명과 함께 왕을 받들고 북악(北岳)의 관우묘(關羽廟) 안으로 숨었지만, 중국 병사들에게 발견되었으며, 결국 반란군 군중에서 처형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30세였다. 그의 아버지인 홍순목 및 처자(妻子)들은 이 변고를 듣고 모두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였다. 【『만세계보(萬世系譜)』·『대동기년(大東紀年)』·『한반도(韓半島)』 등】

거문도 사건 편집

러시아는 1868년에 트루키스탄의 남쪽 변방을 침범하여, 아프가니스탄과 경계를 접하게 되었으므로, 음으로 양으로 그 내정에 간섭함으로써, 훗날 영국령 인도로 나아가는 전략적 근거지[策源地]로 삼으려 하였다. 영국은 결코 그것을 묵과할 수 없어 여러 차례 러시아와 아프가니스탄 두 나라에 항의하였는데, 1885년 【메이지 18년, 이 태왕 22년】 4월에 영국과 러시아의 국교가 위기에 처하자, 영국의 동양함대(東洋艦隊)는 갑자기 본국 정부의 명령에 따라 조선의 거문도(巨文島)를 점령하였다. 【같은 달 14일】 이 섬은 전라도에 속하며, 제주도의 동북쪽에 해당하는데, 여러 개의 작은 섬들이 둘러싸고 있어 하나의 좋은 항구를 이루었다. 영국의 동양함대가 이렇게 형세가 좋은 땅을 점령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러시아의 세력을 쓰시마(對馬) 해협에서 저지하려는 계획 때문이었다.

영국 함대의 사령장관(司令長官)인 해밀톤은 즉 아가멤논 이하 4척과 운송선(運送船) 2척을 이끌고 4월 15일에 이 섬에 와서 산 위에 신호소(信號所)를 설치하고, 바다의 항구에는 수뢰(水雷)를 부설하였으며, 또한 멀리 중국 상해(上海)에서 해저 전선(電線)을 설치하여 본국과의 통신을 편리하게 하였다. 영국은 이처럼 이 섬에 영구적인 설비를 갖춤과 동시에, 항구 이름을 해밀톤이라고 불렀다. 러시아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조선에 항의하여 영국 함대가 이 섬에서 철수하도록 압박하게 하였으며, 또 청나라에 대해 영국의 이 섬 점령을 승인한 것은 불법이라고 비난하였으며,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러시아도 반도의 일부를 점령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조선은 직접 열강과 절충할 실력이 없었으므로 사건의 교섭을 청나라에 위임하였다. 때문에 청나라는 영국과 담판하였는데, 때마침 영국 동양함대 사령장관으로부터 거문도의 점령은 득실이 서로 비슷하다는 보고가 도달하였다. 게다가 아프가니스탄 문제도 이미 위기를 벗어났으므로, 영국은 러시아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조선의 일부를 점령하는 일이 없다면, 거문도를 포기하겠다고 청나라를 통해 알렸다. 그리고 러시아로부터 그에 대한 보증을 받고, 1887년 【메이지 20년, 이 태왕 24년】 2월 27일에 이 섬에서 철수하였다. 이것을 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이라고 한다.

방곡령 사건 편집

원산(元山) 개항 이래, 이곳에 머물며 무역에 종사하는 일본 상인들은 나날이 많아졌으며, 그 결과 조선인들은 대두(大豆)가 거래에 매우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갑자기 그것을 왕성하게 재배하였다. 따라서 대두는 무역품들 가운데 주요한 것이 되었다. 메이지 20년 무렵에는, 우리 상인들 중 북한(北韓)의 외딴 곳을 출입하면서, 판로를 개척하는 사람들이 이어졌다.

메이지 22년 가을은 대두가 보기 드물게 풍작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함경감사(咸鏡監司) 조병식(趙秉式)은 그해 9월부터 곡물의 수출을 금지하는 방침을 취하고, 일본 상인들의 대두에 대한 매수(買收)와 운반에 대해 방해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11월에 일본 대리공사(代理公使) 곤도 신스케(近藤眞鋤)는 대두의 매수나 운반을 막는 것은 수호조약에 위배된다고 하여, 조선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외아문(外衙門】 에 항의하였는데, 아직 그에 대해 회답을 받지 못하였다.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민종묵(閔種黙)은 조병식의 요청을 받아들여, 같은 해 11월 【음력 10월】 부터 향후 1년간 곡물의 수출을 금지한다는 뜻을 원산감리(元山監理)가 원산 주재 일본 영사대리(領事代理)에게 공공연하게 통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일본 공사의 항의가 강경하면서도 일리가 있었으므로 곧바로 이 금지령을 철회하였다. 그러나 감사 조병식은 부유하고 권세를 지녀, 외무독판(外務督辨)의 명령을 멸시하고, 관리와 백성들을 채근하여 방곡령을 권장하였다. 그 때문에 농민들은 헛되이 곡물을 쌓아놓아 금융의 경색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일본 상인들은 적지 않은 손해를 입었는데, 그 액수가 7만 천 원에 달하였다.

일본 공사는 방곡령 철폐가 유명무실하다는 것을 알고, 일본 정부의 훈령에 기초하여 국왕을 알현하고 사건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23년 1월】 조선 당국은 일본의 교섭이 엄중하자 국교(國交)가 위험해질 것을 두려워하여, 조병식에게 3등 월봉(越俸)의 전(典) 【감봉】 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원래부터 일시적인 미봉책으로, 조병식은 여전히 감사(監司)의 직책을 유지하였으며, 방곡령 철폐는 오로지 빈말에 지나지 않았고, 조금도 실행의 흔적이 없었다. 공사는 조선이 국교를 엄연히 돌려놓도록 책망하고, 감사의 파면을 요구하였으며, 더구나 영의정 심순택(沈舜澤) 등에게도 방곡령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설득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비로소 진상을 이해한 듯, 방곡령의 철폐를 실행하는 데 노력하였고 메이지 23년 4월에 감사 조병식을 충청도 감사로 전근시켜, 일본과 조선의 국교에 드리워졌던 암운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우리 상인들은 8개월에 걸친 방곡령 때문에 입었던 손해의 배상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원산의 상인들은 손해 조사에 착수하여, 위원을 선출하고 손해요구서를 원산 영사대리에게 제출하였다. 일본 정부는 그것을 조선 정부에 보내기에 앞서, 외무성 관리를 북한에 특파하여 상세한 조사를 진행하고 누락되는 것이 없도록 하였으며, 24년 12월에 14만 7천여 원의 손해요구서와 함께 민종묵 외무독판에게 보냈다. 그 후 거듭 교섭을 진행하였지만, 조선 당국의 배후에는 청나라 주재관(駐在官)인 원세개(袁世凱)와 외교 고용원인 미국인 리젠도어 【Legendore, 이선득(李善得)】 가 있어 쉽게 결정되지 못하였다. 메이지 26년 1월에 이르러, 오이시 마사미(大石正巳)가 공사로 경성에 부임해 와 단호한 결심으로 엄중히 담판한 결과, 5월 18일에 외교는 거의 위기에 닥쳤는데, 이튿날 조선 정부는 일본의 요구에 응하여, 방곡령과 기타 손해배상을 위해 11만 원을 지출하기로 약속하여, 22년 9월 이래의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었다. 【『외부존고(外部存稿)』·『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원산발전사(元山發展史)』】

갑신정변 후의 청나라와의 관계 편집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일청전쟁(日淸戰爭)이 시작되기까지 약 10년간은 일본과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는 아무런 큰 정치적 문제도 없었으며, 일본은 서서히 조선에서 통상(通商)의 증진을 도모하였다. 그 사이에 저 방곡령 때문에 우리나라[일본] 상인들이 손해를 입은 사건이 있었다. 【본과 비고 5 「방곡령 사건(防穀令事件)」 참조】 이에 반해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점점 복잡해져 갔다. 왜냐하면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 일종의 새로운 관계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친러파 편집

러시아는 동방(東方)에 관심을 가졌는데, 메이지 17년 6월 【이 태왕 21년 5월】 에 청나라에 있던 외교관 칼 베베르 【Karl Waber】 를 경성에 파견하였다. 베베르는 경성에 와서 교묘하게 궁중의 사람들과 교류하였으며, 또한 그의 부인은 왕비에게 접근하여 그당시 조선 왕실은 청나라의 간섭과 압박을 적지 않게 싫어한다는 것을 이용하여, 왕궁 안팎에 친러파를 만들었으며, 결국 같은 해 7월에 한러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러한육로통상조약(露韓陸路通商條約)이라는 것을 체결하여, 점점 큰 이익을 차지하려고 하였다. 이들 조약의 성립에 대해 몰래 러시아를 위해 알선한 사람은 예전에 이홍장(李鴻章)이 조선 정부에 추천하였던 멜렌도르프였다.

이홍장은 이처럼 민씨 일파의 조선 정부가 러시아로 기우는 것을 보고, 조선의 번속(藩屬) 관계를 고수하는 데 불리해지자, 이에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냈다. 즉 청나라 황실은 조선 국왕의 요청을 허락하여, 지금까지 보정부(保定府)에 유거(幽居)하고 있던 대원군을 고국으로 돌려보내도록 하는 조서를 발령하고, 이홍장은 이 조서에 기초하여 메이지 18년 10월 5일 【이 태왕 29년 12월 8일】 에 대원군을 무사히 경성으로 돌려보냈으며, 그를 이용해 한국 조정을 억제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청나라 군대의 장관(將官)인 원세개를 상무총판(商務總辨) 진수당(陳樹棠)의 후임으로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에 임명하고 조선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였다. 【같은 해 11월 중순, 음력 10월】 또한 멜렌도르프가 왕왕 청나라의 이익에 반대되는 일을 하자 그를 천진(天津)으로 소환하고, 【같은 해 12월, 음력 11월】 대신 미국인 데니 【O. N. Denny】 를 한국 조정의 내정(內政) 및 외교의 고문으로 삼았다. 이때가 메이지 19년 5월 【이 태왕 23년 4월】 이다. 이에 더해 메이지 18년 10월에, 청나라 총세무사(總稅務司)인 하트(Robert Hart)는 그의 부하인 메릴 【H. N. Merrill, 묵현리(墨賢理)】 을 추천하여 조선의 총세무사로 삼았으며, 메릴 세무사는 많은 관리들을 청나라에서 초빙하였으므로, 반도의 해관(海關)은 완전히 청나라가 좌우하게 되었다. 이상의 것들 외에 청나라는 조선의 내치와 외교에 간섭이 매우 심하였는데, 저 미국인 데니 같은 사람은 이홍장의 부하로서 부임해 왔지만, 그가 한국 조정에 들어왔을 때 원세개의 난폭한 모습이 심한 것을 보고 그를 매우 좋아하지 않았다. 메이지 21년 7월 무렵에 미국인 데니는 청나라 정부에 채용된 기간이 만료되어 다시 조선 정부에 채용되었을 때, 그는 청한론(淸韓論)이라는 한 편의 글을 발표하여, 청나라의 정략(政略)과 청나라 관리들의 행위를 공격하였으며, 또한 러한육로통상조약의 체결에 도움을 주었다. 【허버트, 『조선사(朝鮮史)』·『한반도(韓半島)』·『일성록(日省錄)』·『이문충공전서(李文忠公全書)』】

동학당 편집

메이지 27〜28년의 전쟁의 도화선이 된 동학(東學)은, 처음에 경주(慶州) 현곡면(見谷面) 용담리(龍潭里) 사람인 최제우(崔濟愚) 【제1대의 호는 수운(水雲)】 가 주창하였다. 최제우는 처음의 이름이 복술(福述)이었는데, 어려서부터 경주와 울산 지방을 돌아다니며 목면(木棉)의 매매를 업으로 삼았다. 그는 어느 날 정성을 다해 하늘에 제사를 올린 결과, 하늘에서 한 권의 책을 받았다고 하는데, 책의 내용을 사람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재앙을 면하게 해 주었다. 그가 가르치는 내용은 쉽고 간명하여 일반인들의 귀에 쉽게 들어왔으며, 또한 그때 인심의 변화가 매우 심한 시기였으므로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교도들은 그 가르침을 동학도(東學道)라고 하며, 스스로를 도인(道人)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통상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동학당(東學黨)이라고 불렀다. 당시 조선의 상태를 깊이 살펴보면, 불교는 황폐가 극에 달하였으며, 유교는 일반적으로 행해졌지만 단지 허례(虛禮)와 형식(形式)에 얽매여 그 정신을 망각하였다. 한편으로 정조(正祖) 무렵부터 반도의 상하 계층에 침투한 천주교(天主敎)는 철종(哲宗) 때 탄압이 느슨해진 틈을 타 국내에 만연되어, 민심은 그 귀추를 알 수 없는 양상이었다. 【제9과 비고 8 「천주교도의 살육」 참조.】 이때에 즈음하여, 최제우는 반도에서 옛날부터 전해오던 유(儒)·불(佛)·도(道) 3교(敎)의 장점들을 취하여 하나의 교법(敎法)을 만들고, 또한 교묘하게 기독교를 안배하여, 우주의 주재자(主宰者)인 천주(天主) 【또는 상제(上帝)라고도 부른다.】 의 실재(實在)를 인정하고, 인간의 화복(禍福)을 담당하는 존재라고 하였다. 그가 이 종교를 주창한 것은 바로 우리의 옛 풍속과 관습을 파괴하는 천주교 즉 서학(西學)을 막아내기 위한 것이므로 서학에 대해 스스로 동학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혹은 중국학에 대한 동쪽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서학에 반대되는 이름이 아니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 종교는 주자학(朱子學)만을 정학(正學)이라고 받들고 존경하던 당국의 심기를 건드렸으며, 세상을 속이고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종교로 간주되어, 이단사학(異端邪學)으로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따라서 유생(儒生)들이 크게 박해를 받았다. 최제우는 결국 체포되어 【이 태왕이 즉위한 해, 분큐(文久) 3년 12월】 이 태왕 원년 【겐지(元治) 원년】 3월에 대구의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최제우의 뜻을 계승하여 그 무리들을 통할하여 관리한 사람은 최시형(崔時亨) 【제2대, 호는 해월(海月)】 이었다. 그도 역시 경주 사람으로, 확고부동한 정신으로 교세(敎勢)의 확장에 힘써, 메이지 13년 【이 태왕 17년】 에 이 종교의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간행하는 등, 도(道)를 이어받아 지켜나가는 데에 힘썼다. 이 무렵 조선의 정치는 기강이 해이해져 있었으므로 지방의 관헌(官憲)들은 백성들을 매우 힘들게 하였다. 특히 동학당을 박멸시킨다는 명분으로, 교도(敎徒)들에게 박해를 가한 것은 물론이고, 폭력을 사용하여 양민을 학대하고, 재화를 빼앗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리하여 동학의 교도들은 결속하여 관헌들을 공격하려 하고, 교조(敎祖)인 수운(水雲)에 대한 신원(伸寃)과 탐관오리들의 박해에 대해 상소를 올려 탄원하는 등 갖가지 운동을 벌이고, 곳곳에서 소요를 일으켰다. 이것이 메이지 25〜26년 무렵의 형세였다. 이처럼 동학당은 혹독한 관리들에 반항할 뿐만 아니라, 외세의 배격을 천명하고, 수 년 전부터 적대시해 오던 예수교도들에 대한 배격도 표명하였으므로, 거류하는 외국인들은 모두 불안한 생각에 휩싸였다. 당국은 그들을 진압하려고 하였지만, 강력한 군비(軍備)를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외국의 군대를 빌리려는 논의가 이루어질 정도였다. 원래 동학당은 조선이 점차 쇠약해지고 정치가 문란해진 것에 편승하여 일어난 것으로, 삼남(三南) 지방에서 그 세력이 가장 활발하였다. 이에 정부는 전라감사(全羅監司) 김문현(金文鉉), 경상감사(慶尙監司) 이용직(李用直)에게 명하여 모여 있는 무리들을 타일러 해산시키도록 하였으며, 특히 충청도 보은군(報恩郡)에 웅거하고 있던 무리들이 창궐하였으므로 특별히 어윤중(魚允中)을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로 삼아 그들을 회유하여 해산시키도록 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지방관들이 포학하였기 때문에 함경도와 황해도 지방과 개성 등에서 인민들이 폭동을 일으킨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다. 메이지 27년 3월 하순 【이 태왕 31년 갑오년 2월 하순】 전라도 고부(古阜)의 군민(郡民)들이 군수(郡守)인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을 견디지 못하고 난을 일으키자, 같은 지역의 부유한 농민으로 동학당의 우두머리였던 전봉준(全琫準)은 ‘제폭구민(除暴救民)’을 표방하고 궐기에 가담하여 그 세력이 강렬해졌다. 정부는 장흥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覈使)로 임명하여 난을 일으킨 백성들을 위무하고 타일러 진압하도록 하였지만, 이용태는 주저하면서 출발하지 않았다. 도리어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하였으므로 소란은 더욱 확대되어, 호남과 호서 지방을 휩쓸었다. 도적들은 나아가 전주(全州)의 감영(監營)을 압박하자 감사 김문현은 성을 포기하고 도피하였다. 이리하여 정부는 5월에 예전에 전라병사(全羅兵使)였던 홍계훈(洪啓薰)을 양호토포사(兩湖討捕使) 【후에 초토사(招討使)라고 불렀다.】 로 삼아 병사 8백 명을 이끌고 군산(群山)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이때 폭도들은 각지에서 빈번하게 봉기하였는데, 경상도 김해부사(金海府使) 조준구(趙駿九)도 결국 난을 일으킨 백성들이 추방하여, 삼남에 정령(政令)이 미치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도적들의 세력이 창궐하여 관군(官軍)들이 여러 곳에서 패배를 거듭하여, 급한 보고가 빈번히 전해지고, 외국에서 군대를 빌려오는 논의가 다시 정부 부처 내에서 일었다. 5월 하순에 도적들은 마침내 전주를 함락하고, 다시 여산(礪山) 등의 관병들을 격파하였으므로, 초토사 홍계훈은 열세를 회복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외국에서 군대를 빌리자는 건의를 글로 올렸다. 이 때문에 6월 3일 청나라에 원병(援兵)을 요청하였으므로, 청나라 장수 섭지초(葉志超), 부장(副將) 섭사성(聶士成)이 3영(營)의 병사들을 이끌고 위해위(威海衛)를 출발하여, 그 선봉은 6월 6일에 이미 아산(牙山)에 도착하였다. 이때 일본도 역시 공사관 및 거류민 보호를 위해 출병하기로 결정하고, 육군 소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는 1개 여단을 이끌고 조선으로 향하여 같은 달 12일에 인천에 도착하였다.

조선 정부는 한편으로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함과 함께 이원회(李元會)를 순변사(巡邊使)로 삼아 증원군(增援軍) 약 9백 명을 이끌고 경성을 출발하게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청나라 군대가 아산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동학당은 세력이 갑자기 약해졌으며, 6월 7일에 홍계훈과 이원회는 군대를 합쳐 도적들을 토벌하여 전주를 수복하였고 도적의 무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승리 소식이 경성에 전해지자 사대문에 방(榜)을 붙였으며, 곧 초토사는 도적 무리의 잔당들을 평정하고, 6월 19일에 군대를 이끌고 경성으로 돌아왔다. 이어서 일본과 청나라 양국의 국교는 파괴되고, 조선은 일본에게 청나라 군대를 격퇴해 줄 것을 의뢰하였으며, 【7월 25일】 청나라 군대는 성환(成歡) 및 평양(平壤)의 전투에서 대패하고 완전히 반도에서 소탕되었다. 이 사이에 동학군은 다시 세력을 키워 삼남 지방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이에 조선 군대 2개 대대, 일본 군대 1개 대대가 파견되어 그들을 토벌하였으며, 메이지 28년 1월에 도적들의 수괴 전봉준(全琫準)도 전라도에서 체포되어 소요는 잠시 진정되었다. 【전봉준은 1월 5일에 체포되어, 4월 25일에 경성에서 교살되었다.】 그러나 이후에 정부는 온 힘을 다해 동학당을 추격하는 데 노력하여 우두머리인 최시형도 강원도 원주에서 체포되었고 메이지 31년 【광무(光武) 2년】 7월에 경성에서 처형되었다. 손병희(孫秉熙) 【제3대, 호는 의암(義庵)】 는 그 뒤를 이어 교주가 되었으며, 메이지 38년 【광무 9년】 에 동학이라는 이름을 천도교(天道敎)라고 고쳤다. 【아래 제14과 비고 11 「일진회(一進會)와 대한협회(大韓協會)」 참조】

메이지 27〜28년의 전쟁 편집

메이지 17년의 사변 【갑신정변】 으로 청나라 군대는 사대당(事大黨)을 도와 왕궁에 난입하였으며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고 혹은 양민을 학살하는 등 난폭함은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웃 나라와의 우의를 중시하여 함부로 외국의 재난에 끌려들어가는 것을 피하여, 청나라와의 사이에 천진조약(天津條約)을 체결하고, 【메이지 18년 4월】 서로 함께 조선에서 철군하여 일을 매듭지었다. 그 후 청나라는 항상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였으며, 또한 조선의 정권을 장악한 사대당은 청나라의 후원을 믿고 일본에게는 달갑지 않은 행동을 많이 하였다. 그중에서도 메이지 22년은 보기 드문 풍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방곡령(防穀令)을 발령하여 일본으로의 곡물 수출을 엄격히 금지한 것이라든지, 혹은 메이지 27년에 오랫동안 일본에 망명해 있던 독립당(獨立黨)의 우두머리 김옥균을 암살하게 하고 그 시신을 잔혹하게 처형한 것 같은 것은 우리의 국론(國論)을 크게 들끓게 한 행동이다. 청나라의 잔혹하고 비도(非道)한 태도에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조선은 기강이 매우 무너져 국력이 쇠약해졌으며, 일반 인민들은 학정(虐政)과 무거운 세금으로 고통을 받았고 원망과 탄식의 소리가 이르는 곳마다 가득하였다. 때마침 메이지 27년 【이 태왕 31년】 에 동학당의 난이 일어나자 그 세력이 점차 창궐하여 극에 달하였다. 조선 정부는 도저히 자국의 병력으로 난민(亂民)들을 진압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마침내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청나라는 그에 응하여 속국의 재난을 돕는다면서 많은 군대를 조선에 보냄과 동시에 6월 6일에 도쿄 주재 청나라 공사 왕봉조(汪鳳藻)로 하여금 천진조약에 따라 군대를 조선에 보낸다고 우리 정부에 통첩해왔다. 우리나라는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또한 거류하고 있는 관민(官民)을 보호하기 위해 조선에 군대를 보낸다는 것을 청나라에 통지하였다. 이때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는 휴가를 받아 본국으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는데, 급히 군함 야에야마(八重山)에 탑승하여 요코스카(橫須賀)를 출발하여 해군(海軍) 육전대(陸戰隊) 4백 명의 호위를 받아 경성으로 귀임(歸任)하였다. 【6월 10일】 이어서 육군 소장(少將)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가 인솔하는 제5사단의 혼성(混成) 여단(旅團) 약 3천 명도 역시 인천에 상륙하였다. 【같은 달 12일】

이에 앞서, 총병(總兵) 섭사성(聶士成)이 이끄는 청나라 병력 약 천 명에 포(砲) 4문(門)과 직예제독 섭지초(葉志超)의 휘하에 속하는 병력 약 1500명에 포 4문은 이미 아산에 도착하여, 【6월 6일 이래】 이 부근에 함께 아영을 두고, 전주 방면으로 진격하여 동학당의 소탕에 착수하였다. 한편 동학당은 당초에 그 세력이 우세한 것 같지 않았으며 그 후 세력이 급격히 쇠약해졌으므로,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薰), 순변사(巡邊使) 이원회(李元會) 등은 6월 7일에 전주를 회복하고, 도적 4백 명을 참획(斬獲)하였으며 수괴(首魁) 2명을 죽였다. 이리하여 도적 무리들은 그들의 통솔자를 잃었으므로 스스로 사방으로 흩어져 자취를 감추었으며, 조선 정부는 점차 찡그린 얼굴을 펼 수 있었다.

그러나 도적 무리들의 평정은 오직 표면적인 사실일 뿐이었다. 불만을 가진 무리들은 도처에 가득하여 봉기의 불씨는 언제라도 다시 타오를 수 있었다. 일본 정부는 조선의 정세를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6월 17일에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陸奧宗光)로 하여금 청나라 공사 왕봉조(汪鳳藻)를 만나, 조선 사건에 대하여 일본과 청나라 양국이 협력하여 신속히 난민들을 진압하고 소란이 진정된 다음에는 양국이 위원(委員)을 파견하여 내정(內政)을 개혁하도록 할 것을 제안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21일이 되자 청나라 정부는 우리의 제안에 답하기를, "난민들은 이미 진정되었으므로 양국은 회동하여 토벌할 필요는 없어졌으니, 내정의 개혁은 조선 스스로 행하도록 해야 한다. 더구나 천진조약에 따라 귀국(貴國)이 군대를 철수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실정에 맞게 폐해를 고침 편집

이리하여 우리나라[일본]는 청나라가 조선의 안녕과 질서를 원치 않고, 시폐(時弊)의 개혁에 성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독자적 힘으로 이에 나서기로 결정하였다. 7월 3일에 오토리(大鳥) 공사에게 명하여 혁폐시의(革弊時宜) 5조(條)를 조선 정부에 제출하고 그들의 반성을 요구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제도를 개혁하고 인재를 선발할 것.

(2) 재정(財政)을 정리하고 부과(賦課)의 균등을 기할 것.

(3) 재판을 공정하게 하여 사법(司法)의 위엄을 지킬 것.

(4) 국방과 경찰을 충실히 하여 국내의 안녕을 유지할 것.

(5) 학제(學制)를 완비(完備)하여 인재의 양성에 힘쓸 것.

국왕은 이에 조서를 발표하여, 폐정(廢政)의 개혁을 알렸으며, 또한 이혁국(釐革局)을 설치하고, 내무부(內務府) 독판(督辨) 신정희(申正熙), 협판(協辨) 김종한(金宗漢)·조인승(曹寅承) 등 세 사람을 위원으로 임명하여, 혁폐시의(革弊時宜) 5조(條)의 조사를 명하였다. 위원은 15일에 오토리 공사와 경성(京城)의 노인정(老人亭)에서 회합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청나라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아직 확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때 오랫동안 조선에 위세를 떨치던 청나라 주재관 원세개(袁世凱)는 시국이 날로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고, 19일에 몰래 인천으로 가서 청나라 군함 양위호(揚威號)를 타고 귀국하였다. 이는 청나라 정부의 소환 전보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토리 공사는 다시 20일에 청나라와 조선의 현행 조약 가운데 조선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을 파기하고, 또 속국 보호라는 명분하에 파견되었던 청나라 군대를 몰아내어, 독립국의 체면을 유지해야 한다고 권고하였다. 조선 국왕은 나라의 운명이 매우 어렵고 안팎으로 많은 일들이 있는 것을 보면서 깊이 우려하였으며, 개화당 사람들은 이 기회에 편승하여 오랫동안 정권을 농단하던 사대당을 제거하고, 대대적인 국정 개혁을 단행하였다. 23일에 오토리 공사는 개화당의 요청에 따라 병력 2개 대대를 이끌고 들어가 왕궁의 안팎을 보호하였으며, 우리 군대는 사대당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엄중히 그들을 보호하여 해를 입지 않게 하였다. 대원군은 왕명에 따라 궁궐에 들어가 개화당 사람들과 국사를 논의하였다. 때문에 왕은 오토리 공사에게 폐정 개혁을 부탁한다는 교서(敎書)를 발표하여, 25일부로 청나라와의 각종 조약들을 파기한다고 선언하였으며, 또한 청나라 군대의 철퇴(撤退)를 오토리 공사에게 위임하였다.

풍도 앞바다의 해전 편집

일본과 청나라의 국제 관계가 점차 위급해질 때 청나라는 오로지 전쟁 준비에 급급하였다. 특히 위해위(威海衛)는 발해만(渤海灣) 어귀를 제압하는 군항이었으므로 경계를 가장 엄중히 하고, 북양함대(北洋艦隊)를 이곳에 집중하여 출동 준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청나라 정부는 또 청나라 장수 섭사성이 보낸 전보 요청을 받아들여, 원병(援兵)으로 병사 약 4천 명을 8척의 운송선에 나누어 태우고 태고(太沽), 여순구(旅順口), 위해위 등 여러 항구에서부터 해로(海路)로 아산(牙山)을 향해 출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정보가 천진에서 일본에 전해지자 이에 우리의 제1유격함대 사령장관(司令長官) 해군 소장 츠보이 코죠(坪井航三)는 조선 근해를 경비하라는 명령을 받고, 요시노(吉野), 나니와(浪速), 아키츠시마(秋津洲) 등 세 척의 함선을 이끌고 7월 23일에 사세보(佐世保) 군항(軍港)을 출항하여 전라도의 해각(海角)을 우회하여, 25일 새벽에 풍도(豐島) 부근에 도착하였다. 【충청남도 아산 앞바다】

때마침 청나라 군함인 제원(濟遠), 광을(廣乙) 등 두 척과 마주치자 제원호는 갑자기 포문을 열고 우리의 요시노호를 공격하였으므로, 우리는 응전하여 그를 격파하자 제원호는 먼저 달아나고 광을호는 좌초하여 승무원들이 스스로 불을 질러 군함을 버렸다. 이때 청나라 군함 조강호(操江號)는 그들의 육군 병사 약 천 명을 태운 영국 운송선 고승호(高陞號)와 함께 왔는데 이러한 상황을 보고 돌아서 도망쳤다. 아키츠시마호는 조강호에 다가가 그들을 항복시키고, 나니와호는 고승호에게 따라오도록 명령을 내렸는데, 배 안에 타고 있던 청나라 병사들은 영국인 선장의 명령을 듣지 못하여 우리에게 반항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이에 나니와호의 함장인 해군 대좌(大佐)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는 지체 없이 결국 고승호를 격침시켰다. 이는 실로 27〜28년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성환역의 전투 편집

7월 25일에 조선 정부는 청나라 군대의 철퇴에 대한 일체의 일을 경성 주재 일본 공사에게 위탁하였다. 오시마(大島) 혼성여단장(混成旅團長)은 이에 휘하의 3천여 명과 산포(山砲) 8문(門)을 이끌고 남쪽으로 진격하는 길에 올랐다. 이때 청나라 군대는 아산의 전방 약 7리(里) 되는 성환(成歡) 【충청남도】 으로 진출하여, 섭사성의 지휘 하에 견고한 보루(堡壘)를 구축하고 우리를 기다렸다. 우리 군대는 찌는 듯한 더위를 무릅쓰고 과천(果川), 【경기도】 수원(水原), 【위와 같음】 진위(振威), 【위와 같음】 칠원(七原), 【위와 같음】 등에서 야영을 하면서 성환의 북쪽 약 1리 반 정도 되는 소사장(素砂場) 【위와 같음】 에 도착하였다. 오시마 여단장은 이곳에서 척후병의 상세한 보고를 받고 곧장 군대를 좌우 두 부대로 나누어, 타케다(武田) 중좌 【히데노부(秀山)】 로 하여금 오른쪽 날개를 통솔하게 하고 자신은 왼쪽 날개의 장수로서 아산(牙山)으로 진군하였다. 성환의 전면은 1리(里) 남짓 되는 논으로 이루어져 있고, 한 줄기 냇물이 그 가운데를 관통하여 서쪽의 아산만으로 흘러간다. 이 냇물과 공주(公州) 가도(街道)의 교차점은 바로 유명한 안성(安城) 나루이다. 우리의 모든 군대는 29일 오전 0시에 행동을 개시하였다. 타케다의 부대의 전위(前衛)인 마츠자키(松崎) 대위 【나오미(直臣)】 는 안성 나루로 진격하였는데, 적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명예롭게 전사하였다. 이어서 타케다 부대는 냇물을 건너 곧바로 성환으로 다가갔다. 한편 오시마 여단장은 타케다 부대와 함께 적의 오른쪽 날개를 공격하여 온 힘을 다해 싸웠으며, 우리 군대는 득의양양하게 함성을 지르며 적진에 돌입하였으므로, 적의 진지는 모두 함락되었다. 이때가 오전 7시 30분이다. 전투는 최초의 전투로부터 고작 2시간 반 후에 이루어졌다. 우리 군대는 여전히 북쪽으로 추격하여 아산으로 진격하였다. 생각건대 적군은 성환에서는 이미 패하였지만 아산은 본영(本營)이 있는 곳이었으므로 사력을 다해 방어할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우리 군대가 아산에 들어섰을 때, 적은 그림자도 없고 군량(軍糧)과 군수품을 산에 쌓아놓은 채 이미 홍주(洪州) 【충청남도】 방면으로 퇴각한 상태였다. 이 전투에서 우리 군대의 사상자는 장교 이하 고작 82명이었으며, 청나라 군대의 사상자는 5백 명을 밑돌지 않았다. 이리하여 일본과 청나라의 최초의 육전(陸戰)은 우리 군대의 승리로 돌아갔으며 8월 5일에 모든 군대가 경성으로 개선하였다.

일본과 조선의 맹약 편집

8월 1일에 천황 폐하는 청나라에 대해 선전(宣戰)의 조칙(詔勅)을 발표하였으며, 청나라도 역시 같은 날을 기해 우리에게 전쟁을 선언하였다. 이로부터 우리 국민은 적개심이 점점 더해지고 봉공(奉公)의 마음은 더욱 타올랐다. 양국은 이미 정식으로 교전 상태에 들어섰으므로, 동맹을 체결한 각 나라들은 점차 국외 중립(局外中立)을 선언하였다. 이달 26일에 우리 전권대사인 오토리 공사는 조선 정부의 대표자인 외무대신 김윤식(金允植)과 하나의 맹약(盟約)을 협의하여 결정하였다. 그 조문(條文)은 다음과 같다.

  【대일본(大日本) 대조선(大朝鮮)】 양국 맹약(兩國盟約)

【대일본과 대조선】 양국 정부는 【일본 메이지(明治) 27년 7월 25일, 조선력(朝鮮曆) 개국(開國) 503년 6월 23일】 조선국 정부는 청나라 군대의 철퇴(撤退)에 대한 모든 것을 조선국 경성 주재 일본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에게 위탁하여 대신 처리하게 한다. 이후 양국 정부는 청나라에 대해 이미 공수(攻守)를 서로 돕는 지위에 섰으므로, 그 사실을 분명히 하고, 아울러 양국은 일을 함께 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아래에 기명(記名)한 양국 대신(大臣)은 각 전권(全權)이 위임을 받들어 지켜야할 조항들을 아래에 밝혀 둔다.

 제1조 이 맹약은 청나라 군대를 조선국의 국경 밖으로 철퇴시키고, 조선국의 독립과 자주(自主)를 공고히 하여, 일본과 조선 양국의 이익을 증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일본국은 청나라에 대한 공수(攻守)의 전쟁에 임하여, 조선국은 일본 군대의 진퇴 및 그 양식의 준비를 위해 필요한 편의를 제공한다.

 제3조 이 맹약은 청나라에 대한 평화조약의 성립 후에 폐기하며, 이를 위해 양국 전권대신(全權大臣)은 기명(記名) 조인(調印)하여 증거로 삼는다.

  대일본국 메이지 27년 8월 26일 특명전권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대조선국 개국 503년 7월 26일 외무대신 김윤식(金允植)

이후 일본과 조선 양국의 관계는 한층 친밀한 정도를 더하게 되었다.

평양의 전투 편집

청나라와 전쟁이 시작되자, 우리 정부는 제5사단의 나머지 및 제3사단 제18연대에 동원령을 내리고, 제5사단장 육군 중장 노즈 미치츠라(野津道貫)의 지휘 하에 급히 우지나(宇品)에서 출항하도록 하였다. 이때 청나라 군대는 바다와 육지 양 방면에서 점차 평양으로 집결하였으며, 성환의 패잔병들도 역시 그에 가담하여 기회를 보아 남하하려는 기세였다. 평양은 조선 서부의 요충지로서, 전면에 대동강을 두고 있고 구릉이 기복을 이루며 사방은 견고한 성벽이 둘러져 있다. 더구나 그 수비병들은 청나라 군대 제일의 정예부대인 봉천(奉天)의 의자군(毅字軍), 이홍장(李鴻章) 휘하의 성자군(盛字軍) 등으로, 위여귀(衛汝貴), 좌보귀(左寶貴), 마옥곤(馬玉崑) 등이 그 장수들이었다. 전체 병력은 대략 1만 5천 명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므로 노즈 중장은 평양 공략에 즈음하여 가장 주도면밀한 작전계획을 세우고, 8월 24일부터 세 방면으로 동시에 진격하게 하였다. 즉 제9여단장 육군 소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는 개성(開城) 【경기도】 에서 중화(中和) 【평안남도】 를 거쳐 적의 정면으로 향하였고, 제10여단장 육군 소장 타츠미 나오후미(立見尙文)는 삭령(朔寧) 【경기도】 에서 서북쪽으로 진격하여 동쪽에서 적의 측면을 압박하였으며, 제18연대장 육군 보병 대좌 사토 타다시(佐藤正)는 원산항에서 진군하여 적의 배후를 공격하였다. 세 방면의 행군은 미리 정해 놓은 대로 진척시켜 평양을 포위하는 형세가 대략 이루어졌으므로, 노즈 중장은 9월 15일 새벽을 기해 일제히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마옥곤 등은 대동강 남쪽의 진지에 숨어 오시마 부대를 맞이하여 잘 싸우며 방어하였다. 타츠미, 사토의 양쪽 부대가 서로 연락하여 북쪽의 요충지인 모란대(牡丹臺)를 함락시키고 나아가 현무문(玄武門)을 격파하여 본성(本城)으로 돌격하였으므로 적군은 백기(白旗)를 게양하였고 다음날인 16일에 마침내 성은 함락되었다. 이 전투에서 아군의 사망자는 325명, 부상자는 864명이었는데, 적군은 총병(總兵) 좌보귀 이하 전사자가 약 2천 명, 부상자는 적어도 그 두 배에 달하였을 것이다. 이리하여 반도에는 다시 청나라 군대의 그림자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8월 30일에 육군 대장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제1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9월 8일을 기해 연합 함대의 호위 하에 우지나를 출항하여 원정의 길에 올랐다. 이리하여 전쟁은 점차 이어졌으므로, 같은 달 15일에 대원수(大元帥) 폐하는 다이혼에이(大本營)를 히로시마(廣島)로 옮겨 주었다.

황해의 해전 편집

우리 해군은 개전(開戰) 후 곧장 장직로(長直路) 【전라남도 서남쪽 모서리의 군도(群島)인 완도군(莞島郡)】 를 근거지로 삼아 조선 연안의 경비를 맡거나, 혹은 육군 운송선의 호위를 담당하거나, 혹은 멀리 위해위(威海衛)를 포격하여 적 군함을 유인해 내려고 하였다. 9월 16일에 연합함대 사령장관 해군 중장 이토 쓰게유키(伊東祐亨)는 요시노(吉野), 나니와(浪速), 다카치호(高千穗), 아키츠시마(秋津洲), 【이상은 제1유격 함대】 마츠시마(松島), 하시다테(橋立), 이츠쿠시마(巖島), 치요다쿠(千代田)·후소(扶桑), 히에이(比叡), 【이상은 본대(本隊)】 아카기(赤城) 및 무장상선(武裝商船) 사이큐마루(西京丸) 등 12척으로 단종진(單縱陣) 형태를 이루어 이튿날인 17일에 해양도(海洋島) 부근 【서쪽 조선만(朝鮮灣)의 한 섬】 을 정찰하고, 다시 대고산(大孤山) 【요동반도의 동남쪽 해안】 앞바다로 향하였다. 오전 11시에 저 멀리 동북쪽 해상에서 여러 줄기의 연기가 올라오는 것을 알았다. 청나라 북양해군(北洋海軍) 제독(提督) 정여창(丁汝昌)이 지휘하는 정원(定遠), 【기함(旗艦)】 진원(鎭遠), 내원(來遠), 정원(靖遠), 경원(經遠), 치원(致遠), 양위(揚威), 초용(超勇), 제원(濟遠), 평원(平遠), 광병(廣丙), 광갑(廣甲) 등 12척 외에 수뢰정(水雷艇) 4척이 대동구(大東溝) 【압록강 하류의 우측 연안】 에서 육군 상륙의 엄호를 마치고 귀항하는 중이었다. 이토 중장은 기함(旗艦)인 마츠시마에 탑승하여 전 함대에 명령을 내려, 작은 함선인 아카기, 사이큐마루 등 2척은 열외에 빠지도록 하였다. 적 함대는 정원과 진원 두 강철함(鋼鐵艦)을 중심으로 하여, 단횡진(單橫陣)을 이루어 우리를 향하였으며, 오후 0시 50분에 약 6천 미터 거리에서 포격을 시작하였다. 우리 함대는 자중하면서 4천 미터까지 접근한 뒤 비로소 응전하였다. 잠시 격전을 벌였는데 양위와 초용 두 척은 맹렬한 불길에 휩싸여 초용은 침몰하였으며 양위는 좌초되었다. 이어서 치원 및 경원도 격침되고 광갑은 좌초하여 파괴되었다. 또한 경원, 내원, 평원도 역시 화재가 나 전장을 떠나자 적의 진형(陣形)은 점차 혼란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정원과 진원 두 척은 여전히 남아서 싸웠는데 일몰에 이르자 우리는 야전(夜戰)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전투를 중지하였으며, 적도 역시 패잔의 함선들을 수습하여 여순(旅順)으로 갔다. 이 해전에서 아카기, 히에이, 사이큐마루 등 세 척은 위험한 상태에 빠져 가장 고전(苦戰)하였으며, 마츠시마도 역시 큰 화재가 나 큰 손해를 입었지만 다행히 한 척도 잃지 않았다. 이후 황해(黃海)의 제해권(制海權)을 확실히 장악할 수 있었다.

우리의 제1군(軍)은 10월 25일에 압록강을 건넜고, 더 나아가 적의 영토를 침입하여 구연성(九連城), 봉황성(鳳凰城), 수암(岫巖), 석목성(析木城) 등을 공격하였다. 12월 18일에는 부와새(缶瓦塞)를 지키던 적의 용맹한 장수인 송경(宋慶)의 대군을 격파하였다. 이에 앞서 육군대장 오야마 이와오(大山巖)는 제2군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10월 24일에 화원구(花園口)에 상륙하여 금주성(金州城), 대련만(大連灣) 【황해 해전 당시 우리[일본] 해군은 근거지를 대동강 하류인 황해도 어은동(漁隱洞)으로 옮겼는데, 이때 이후로 대련만을 근거지로 바꾸었다.】 을 침략하였으며, 11월 21일에는 발해만(渤海灣) 어귀의 요충지인 여순구(旅順口)를 함락시켰다. 산동성(山東省) 영성만(榮城灣)에 상륙한 제2군의 별동대는 2월 2일에 위해위(威海衛) 뒷면의 포대를 모두 점령하였으므로, 해군 제독 정여창은 12일에 북양함대의 잔여 부분을 이끌고 우리 군에 항복하였다. 야마가타(山縣) 대장을 대신한 제1군사령장관인 노즈(野津) 대장은 진격하여 우장(牛莊)과 영구(營口)를 점령하였고, 3월 9일에는 적의 본거지인 전장대(田庄臺)를 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러는 사이에 혼성지대장(混成支隊長)인 육군 대좌 히시지 마요시데루(比志島義輝)는 우리 함대의 엄호 하에 갑자기 팽호도(澎湖島)에 나타나, 3월 25일에 섬 전체를 평정함으로써 대만(臺灣) 본도(本島)를 공략할 근거지를 만들었다. 【구련성(九連城)에서부터 팽호도 점령에 이르기까지의 상세한 기사(記事)는 국정교과서 『교사용 일본 역사』를 참조할 것.】

일·청강화 편집

청나라는 그들의 육·해군이 연전연패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강화(講和)하기로 결정하고, 천진(天津)의 세무사(稅務司)인 미국인 데트링 【德璀淋, Gustav von Detring】 을 사절(使節)로 하여 27년 11월 26일에 고베(神戶)에 왔다. 우리 정부는 그가 정당한 수속을 마친 사절이 아니었으므로 만나지 않았다. 28년 1월 30일에 흠차전권대신(欽差全權大臣) 장음환(張蔭桓) 등이 고문으로 전(前) 미국 국무대신인 허스터를 데리고 우지나(宇品)에 상륙하였다.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은 일행과 히로시마(廣島)에서 회견하였지만, 위임장에 불비(不備)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담판을 거절하고 귀국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청나라는 이홍장(李鴻章), 이경방(李慶芳)을 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수행원 백여 명을 데리고 방문하였다. 우리는 전권위원은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와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陸奧宗光) 두 사람을 전권위원으로 삼아 3월 20일부터 시모노세키(下關) 슌반로(春帆樓)에서 담판을 시작하였다. 때마침 한 흉한(兇漢)이 24일에 이홍장을 저격하여 부상을 입혔다. 천황 폐하는 깊이 걱정을 하셔서 특별히 시의(侍醫)를 보내었으며, 또한 봉천(奉天), 직예(直隷), 산동(山東) 등 3성(省) 지방에 3주 동안 휴전을 허락하였다. 4월 1일 이후 양국 전권대사는 여러 차례 만났지만, 이홍장은 우리의 제안이 과중하다고 하면서 번번이 청나라의 어려운 상황을 호소하여 탄원하였다. 논의가 쉽게 진행되지 않자 육군 대장 코마츠노미야 아키히토(小松宮彰仁) 친왕(親王) 전하(殿下)는 새로 청나라 정벌 대총독(大總督)의 중책을 맡아, 근위사단(近衛師團)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4월 13일에 우지나를 출발하였다. 청나라 위원들은 크게 놀라 마침내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여 17일에 강화조약의 조인을 마쳤다. 조약문(條約文)의 요점(要點)은 다음과 같다.

1. 청나라는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것을 확인하였으므로 독립을 손상시키는, 청나라에 대한 조선국의 공헌(貢獻)이나 전례(典禮)를 완전히 폐지한다.

1. 압록강 어귀부터 요하(遼河) 어귀에 이르는 일직선을 획으로 하는 이남(以南)의 요동반도(遼東半島)와 대만(臺灣) 전체 및 팽호열도(澎湖列島)를 영원히 일본국에 할양한다.

1. 청나라는 군비(軍費) 배상금(賠償金)으로 고평은(庫平銀) 2억 냥(兩)을 일본국에 지불한다.

1. 청나라가 현재 여러 외국들과 개방한 시장 외에 호북성(湖北省) 형주부(荊州府) 사시(沙市), 사천성(四川省) 중경부(重慶府), 강소성(江蘇省) 소주부(蘇州府), 절강성(浙江省) 항주부(抗州府)를 개방한다.

이 조약에 따라 청나라는 점차 조선을 독립된 국가로 인정하고, 이후 경성에 공사를 주재시켜 대등한 교류를 하기에 이르렀다.

3국의 간섭 편집

일본과 청나라 양국의 강화조약 조인 후, 1주일이 지난 4월 23일에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 3개국 정부는 우리나라[일본]가 요동반도를 점유하는 것은 동양의 영원한 평화에 해를 끼치므로 점유를 포기하도록 권고하였다. 우리나라[일본]는 영예로운 전승(戰勝)을 거두어 이미 교전(交戰)의 큰 목적을 달성하였으므로, 여러 나라들의 제의를 받아들여 5월 5일에 반도를 돌려줄 것을 승낙한다는 취지로 회답하였다. 11월 8일에 청나라는 반도의 대가(代價)로 고평은 3천만 냥을 우리나라에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체결하였다.

내각(內閣) 서기관장(書記官長) 이토 미요지(伊東己代治)는 강화조약의 비준 교환을 위해 전권변리대신(全權辨理大臣)으로 특명을 받고 5월 2일에 우지나를 출항하여, 청나라의 지부(芝罘)에서 그 나라의 전권대신인 오정방(伍廷芳)과 만나 무사히 임무를 마쳤으며, 약 10개월에 걸친 전쟁도 이에 종말을 고하였다.

갑오혁신 편집

사대당과 개화당 편집

메이지(明治) 27〜28년경 조선의 정계(政界)에는 사대당·개화당과 친로(親露)·친미(親美) 등의 당파들이 있었다. 사대당은 청나라에 의지하여 종래대로 국정을 수행하는 사람들이고, 개화당은 독립당(獨立黨)에 이어 일어나 일본을 신뢰하여 국정을 개혁하려고 한 사람들이다. 동학당(東學黨)의 난 후에 일본과 청나라의 국교가 위태로워져 곧 파열되려는 정세를 보이자, 개화당 사람들은 이 기회에 편승하여 뜻을 이루려고, 한편으로는 일본 공사(公使)에게 원조를 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원군(大院君)을 자기 당으로 끌어들였다. 메이지 27년 7월 23일 【음력 6월 21일】 에 일본 공사 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는 국왕의 위촉에 따라 병력 2개 대대를 이끌고 들어가 왕성(王城)을 지켰다. 같은 날 대원군은 왕의 부름에 응하여 운현궁(雲峴宮)을 나와 입궐하자 곧바로 개혁에 착수하였다. 이때가 일·청 양국 함대가 풍도(豐島) 앞바다에서 전투를 치르기 2일 전이다. 이후 1년여 동안 개화당이 내각에서 실각(失脚)할 때까지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제반 개혁들이 이루어졌다.

군국기무처 편집

대원군은 이미 왕명을 받들고 입궐하여 국정을 장악하자, 그날로 김굉집(金宏集) 등 10여 명을 불러 국사를 논의하였으며, 이튿날인 7월 24일에 국왕은 새로운 정치의 교서(敎書)를 발표하고, 민씨(閔氏) 일족(一族)을 처벌하는 명령을 내렸다. 전(前) 대신(大臣)들을 모두 파면하고, 새로 영의정 김굉집 이하 개화당 사람들 수십 명을 임용하였으며, 26일부로 단호히 청나라와의 조약을 파기하고, 새로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였다. 26일에 이 군국기무처에서 의결하여 2부(二府) 【궁내부(宮內府)·의정부(議政府】 8아문(衙門)의 관제(官制)를 발표하였는데, 김굉집을 총리대신으로 이재면(李載冕) 【대원군의 적자(嫡子)】 을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으로 삼고, 각 아문의 대신 이하 관직을 임명하여 새로운 정치의 조직을 완료하였다.

군국기무처는 갑오혁신(甲午革新)의 중심이 된 기관으로, 그 조직은 총재(總裁) 1인과 부총재(副總裁) 1인이 모두 의원(議員)들 중에서 겸하였다. 의원은 18인 이상 20인 이하로 서기관(書記官)은 2인 혹은 3인으로 이루어지며, 회의에 따라 새로운 정부의 정령(政令) 일체를 심의 결정하였다. 그러므로 그 총재에는 영의정 김굉집을, 그 의원에는 내무독판(內務督辨) 박정양(朴定陽)을 비롯하여 정부 요로의 사람들을 임명하였다. 이 기관은 원래 의정부(議政府)의 한 부서로 설치되었던 것인데, 메이지 27년 7월 26일에 설치되고부터 같은 해 12월 17일에 폐지될 때까지, 약 반 년 동안 존속한 데 불과하지만, 조선에서 실로 일찍이 없었던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여기에서 심의한 사항들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대단히 많았는데, 최초 3개월간에 의결하여 제정한 법규는 208건이나 되었다고 하므로, 그 당시 얼마나 개혁에 바빴는지를 알 수 있다. 또 거기에서 심의 결정한 사항은 반드시 모두 실행되지는 않았고, 완전히 사문(死文)이 된 것들도 있었지만, 번거로움을 피하지 않았다. 아래에 그중 중요한 것들을 열거하여, 개혁자들의 딴마음[異圖]과 당시의 정세를 아는 데 참고하도록 한다.

(1) 지금부터 공(公)·사(私) 문서의 일자(日字)에 청나라 역법을 사용하지 말고, 개국(開國) 기년(紀年)을 사용해야 한다.

(2) 청나라와의 조약을 개정하고 공사(公使)를 여러 나라에 파견해야 한다.

(3) 모든 관제(官制)를 개정해야 한다.

(4) 종래의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에 대한 존비(尊卑)의 차별을 폐지하고 완전히 동등하게 대우한다.

(5) 관리의 복장을 정하고 폭이 넓은 소매를 좁게 줄이도록 한다.

(6) 양반 및 평민은 법률적으로 완전히 동등하게 대하고, 귀천(貴賤)과 문벌(門閥)에 구애되지 말고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

(7) 공(公)·사(私) 노비의 전적(田籍)을 폐지하고 인신(人身)의 매매를 금지한다.

(8) 조혼(早婚)을 금지하고 남자는 20세 이상, 여자는 16세 이상 되어야 비로소 결혼을 허락한다.

(9) 종래 처첩(妻妾) 모두에게 아들이 없는 경우에 비로소 양자(養子)를 허락하던 제도를 지금부터 한층 더 힘써 실행한다.

(10) 귀천의 구별 없이 과부(寡婦)의 재가(再嫁)를 허락한다.

(11) 범죄자 가족의 연좌(緣坐)에 대한 법률을 폐지한다.

(12) 평민이라도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들을 편리하게 하는 내용의 건의서를 군국기무처에 제출하는 것을 허락하며, 그 사항을 회의에 부친다. 그 의견이 탁월한 사람은 관리로 채용한다.

(13) 필요한 국비(國費)를 지출하기 위해 재정을 정리한다.

(14) 각 계급의 관리들은 종래의 의식에 구애되지 말고 자유롭게 거리를 통행하며, 말을 타거나 걷는 것은 임의로 하고 평교자(平轎子) 【대신들이 타는 가마】와 초헌(軺軒) 【종2품 이상의 관리들이 타는 가마】 은 영원히 폐지한다.

(15) 대신(大臣)들이 통행할 때 평민이 일어서거나 말에서 내리는 관습을 폐지한다. 단 고등관(高等官)에게는 길을 양보해야 한다.

(16) 관리가 부정하게 타인의 금품을 점유하였을 때에는 그를 처벌하고 그가 점유한 물건은 몰수한다.

(17) 사법(司法) 또는 경찰(警察)의 관리(官吏)가 아닌 자는 어느 부(府)·아문(衙門)·군문(軍門)이라 할지라도 인민을 포박하거나 또는 형벌을 가할 수 없다.

(18) 관리의 품급(品級)을 고쳐, 1품과 2품에는 종래의 정(正)·종(從)의 구별을 두더라도 3품 이하 9품까지는 정·종의 구별을 두지 않는다.

(19) 역인(驛人), 배우(俳優), 피공(皮工) 등의 천민(賤民)을 면제한다.

(20) 관리로서 직(職)을 사임한 사람은, 상업을 운영하고 기타 생산업에 종사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21) 종래의 과거(科擧)를 폐지하고 새로 관리 등용의 법을 설립해야 한다.

(22) 사법관(司法官)의 재판이 확정된 후(後)가 아니면 어떠한 죄인에게도 형벌을 가할 수 없다.

(23) 새로운 형법(刑法)이 편찬될 때까지는 『대전회통(大典會通)』의 「형전(刑典)」을 시행하지만, 고형(拷刑)을 가할 수는 없다.

(24) 조세에서 종래에 곡물(穀物), 직물(織物), 기타 물품으로 납입하던 것을 모두 금납(金納)으로 고치도록 한다.

(25) 각 지방에서 곡물 매매에 제한을 가할 수 없다. 그리하여 홍수나 가뭄 등의 급한 수요에 따라 편리하게 유통되도록 해야 한다.

(26) 금년 10월 1일부터 개정된 도량형(度量衡)을 실시한다.

(27) 신식 화폐발행장정(貨幣發行章程)을 정한다.

(28) 7월 20일부로 한성부(漢城府) 내의 각 호(戶)에 목패(木牌)를 걸도록 한다.

(29) 의금부(義禁府)를 의금사(義禁司)로 고치고 법무아문(法務衙門)에 소속시켜, 관리들의 공적인 범죄를 적발하여 다스리게 한다.

(30) 관리들은 조세의 징수 및 미납에 대해 책임을 진다.

(31) 각 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군(郡)·현(縣)의 수령이 각 면(面)에서 한 사람씩을 선출하여 향회(鄕會)를 조직하게 하고, 그 의결을 거쳐 정령(政令)을 시행하게 한다.

(32) 품행이 방정(方正)하고 예민(銳敏)한 소년을 선발하여 해외에 유학을 시키도록 한다.

(33) 재신(宰臣) 가운데 공명정대한 자를 선택하여 황해, 평안, 강원, 함경 등 4도(道) 【조선의 남부는 당시 소란한 상태였다.】 에 파견하여, 민의(民意)를 살피고 도의 신하들의 선악(善惡)을 감찰하게 한다.

(34) 마땅히 민영준(閔泳駿) 【민씨 최후의 세도(勢道)로서, 반대파의 원한의 중심인물이었다.】 과 민형식(閔炯植) 【임오변란 때 왕비가 한때 피난하여 그의 집에 묵었으므로 후에 크게 등용되었다.】 및 요녀(妖女) 김창렬(金昌烈)의 어머니 【왕비에게 총애를 받은 무녀(巫女)로, 진령군(眞靈君)으로 존칭되었는데 그녀의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를 처벌하여 신인(神人)들의 분노를 삭여야 한다. 【후에 김창렬의 어머니는 쫓겨났으며 민영준과 민형식은 유배되었다.】

(35) 각 아문에 외국 고문관(顧問官)을 초빙하여 채용하도록 한다.

(36) 관내부(官內府)의 대소 관리들은 각 부(府)와 각 아문(衙門)의 관리들과 서로 겸임할 수 없다.

(37) 학무아문(學務衙門)은 소학교(小學校) 교과서를 편찬해야 한다. 【소학교령(小學校令)은 이듬해 7월에 제정되었다.】

(38) 현재 본국과 일본의 관계는 가장 중대하고 친밀하므로 마땅히 성망(聲望)이 뛰어난 사람을 선택하여 보빙대신(報聘大臣)으로 파견해야 한다. 또 도쿄에는 특별히 전권공사(全權公使)를 주차(駐箚)시켜야 한다. 【9월에 의화군(義和君) 강(堈)을 보빙대사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39) 종래에는 아편의 사용을 금지하였는데 지금부터 한층 더 엄격히 금지해야 한다.

(40) 각 주(州)와 현(縣)은 편의에 따라 사창(社倉)을 설치하여 흉년에 대비하여 저축을 해야 한다.

(41) 신속히 친위영(親衛營)을 설치해야 한다.

(42) 종전의 궁내부(宮內府)와 각 사(司)에서 여러 도(道)에 강제로 물품을 요구하던 폐습을 일절 금지한다. 궁내부는 별도로 진공회사(進供會社)를 두고 궁중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공급받아야 한다.

(43) 군국기무처장정(軍國機務處章程)을 개정하여, 기무처를 의정부로부터 독립시킴으로써, 의사부(議事部)와 행정부(行政部)를 대립하게 해야 한다.

  이상.

홍범14조 편집

조선은 새로운 정부가 단단히 마음먹고 개혁을 서두르고 있는 사이에, 우리 일본군은 청나라 군대를 반도에서 격퇴하였으며, 또한 조선 관병(官兵)과 힘을 합쳐 삼남(三南) 지방에서 다시 봉기한 동학당의 소탕에 진력하고 있었다. 이보다 먼저 대원군은 반란의 마음을 품고 밀사(密使)를 평양에 보내 그 뜻을 청나라 군대의 제독(提督)인 섭지초(葉志超)에게 알렸다. 또한 별도로 삼남 지방에 사람을 보내 동학당을 사주(使嗾)하게 하고, 서로 호응하여 일본군을 격퇴하려고 하였다. 평양이 함락되고 우리 군대는 그 증거를 얻었다. 대원군은 이에 직책을 사임하고 은퇴하였다. 【11월 23일】 이 무렵 오토리(大鳥) 공사 대신 경성에 주재하던 일본 공사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는 국왕과 왕비를 알현하고, 조선 정치의 근본적인 개혁에 관한 사항 21개 조항을 열심히 설명하였다. 국왕은 크게 느낀 바가 있어, 마침내 그의 말대로 단호히 청나라의 굴레를 벗어나, 국정의 개혁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듬해 메이지 28년 1월 7일 【음력 갑오년 12월 12일】 에 국왕은 세자와 함께 대묘(大廟)를 참배하고, 홍범(洪範) 14조의 실행을 조종(祖宗)의 영령들에게 고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청나라에 의지하려는 생각을 단절하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확실히 다진다.

1. 왕실 전범(王室典範)을 제정하여 왕위의 계승 및 종척(宗戚)의 분수에 맞는 도리를 분명히 한다.

1. 대군주(大君主)는 정전(正殿)에서 일을 보고, 국내의 정무(政務)는 친히 각 대신들에게 물어 결정한다. 후빈(后嬪)과 종척은 간여할 수 없다.

1. 왕실의 사무는 국정의 사무와 반드시 분리하여 서로 혼합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1. 의정부 및 각 아문(衙門)의 직무 권한은 분명하게 제정하여 시행한다.

1. 인민이 내는 세금은 모두 법령에 따라 비율을 정하고, 쓸데없는 명목을 더하여 함부로 징수해서는 안 된다.

1. 조세의 과징(課徵) 및 경비의 지출은 모두 도지아문(度支衙門)의 관할에 따른다.

1. 왕실의 비용은 솔선하여 절감하여, 각 아문 및 지방관의 모범이 된다.

1. 왕실의 비용 및 각 아문의 비용은 미리 1년의 액수를 산정하여 확실히 재정의 기초를 정한다.

1. 지방 관제(官制)를 신속히 개정하여 지방 관리들의 직권(職權)을 한정한다.

1. 국내의 총명하고 빼어난 자제들을 폭넓게 파견하여 외국의 학술과 기예를 익힌다.

1. 장관(將官)을 교육하고 징병의 법을 이용하여 군제(軍制)의 기초를 확정한다.

1. 민법과 형법은 엄격하고 명확하게 제정하여 함부로 인민을 감금하거나 징벌을 해서는 안 되며, 인민의 생명 및 재산을 보전한다.

1. 인재를 채용할 때는 채용하는 지역에 구애되지 말고, 선비를 구할 때는 널리 조야(朝野)에서 구하여, 인재 등용을 넓힌다.

왕실의 존칭 편집

총리대신 김굉집(金宏集)이 상주(上奏)하여 왕실의 존칭을 다음과 같이 개정하였다.

왕(王) 전하(殿下)를 대군주(大君主) 폐하(陛下)로.

왕대비(王大妃) 전하를 왕태후(王太后) 폐하로.

왕비(王妃) 전하를 왕후(王后) 폐하로.

왕세자(王世子) 저하(邸下)를 왕태자(王太子) 전하로.

왕세자빈(王世子嬪) 저하를 왕태자비(王太子妃) 전하로. 【『개국오백삼년관보(開國五百三年官報)』·『한국지(韓國誌)』·『법규류찬(法規類纂)』 등】

관제의 개정 편집

중앙 관제 편집

예전에 비변사(備邊司)를 폐지 【이 태왕 2년】 하여 의정부의 실권을 회복시켰지만, 후에 30년이 지나 개국 503년 【메이지 27년, 이 태왕 31년】 갑오혁신 때에 그 조직을 고쳤다. 영의정을 총리대신(總理大臣)으로 고치고, 좌·우의정을 폐지하였으며, 좌·우찬성(左·右贊成), 도헌(都憲), 참의(參議), 주사(主事) 등의 관직을 두어, 전국의 정무를 총괄하였으며, 그 밑에 내무(內務), 외무(外務), 도지(度支), 법무(法務), 학무(學務), 공무(公務), 군무(軍務), 농무(農務) 등 8아문(衙門)을 두고, 각 아문의 장(長)을 대신(大臣)이라고 불렀다. 【내무대신, 외무대신 등이라고 불렀다.】 차장(次長)을 협판(協辨)이라 하고 참의와 주사의 관직을 두었으며, 의정부 및 각 아문 내에 약간의 국(局)을 두었다. 【6월 28일】 같은 해 12월 【16일】 에 의정부(議政府)를 고쳐 내각(內閣)이라고 불렀으며, 이듬해 개국 504년 3월에 일본의 제도를 본받아 내각의 관제(官制)를 발포(發布)하고, 내각을 총리대신 외에 8국무대신이 합의하는 곳으로 삼았다. 그러나 친로당(親露黨) 내각을 조직하여, 개국 505년 9월에 조서를 발표하고, 이전의 내각 관제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복구하였다. 그 후 약간의 개정이 있었다.

지방 제도 편집

제4과 비고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조선의 지방 제도로 태종 13년에 처음으로 8도(道)의 제도를 공포하였다. 이후 480여 년이 지나 이 태왕 32년 【메이지 28년, 개국 504년】 에 이르러 8도의 제도를 폐지하고, 새로 전국을 23부(府), 336군(郡)으로 나누었으며, 각 부에 관찰사(觀察使)를 두고 각 군에 군수(郡守)를 두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 이듬해 【메이지 29년, 개국 505년】 가 되자 다시 지방 제도를 개정하여 전국을 13도(道), 7부(府), 331군(郡)으로 나누고, 그 도의 이름들은 처음으로 현재와 같은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도에 관찰사를 두었다. 그 밑에 부윤(府尹), 목사(牧使), 군수(郡守)를 둔 것은 옛 제도와 변함이 없었지만, 경성(京城)은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의 관할에서 독립시켜 별도로 한성부(漢城府)를 두고, 그 장(長)을 판윤(判尹)이라고 불렀으며, 관찰사와 동일한 자격으로 대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 표와 같다.

관찰도 소재지 부(府) 목(牧) 군(郡) 비고(備考)
한성부 메이지 43년 10월 경성부로 고치고 경기도가 관할했다.
경기 수원(水原) 광주·개성·강화·인천 4 34 메이지 43년 10월에 도청을 수원에서 경성으로 옮겼다.
충청북도 충주(忠州) 17 융희(隆熙) 2년(메이지 11년)에 관찰도를 충주에서 청주로 옮겼다.
충청남도 공주(公州) 37
전라북도 전주(全州) 26
전라남도 광주(光州) 제주(濟州) 1 32
경상북도 대구(大邱) 41
경상남도 진주(晉州) 동래(東萊) 1 29
황해도 해주(海州) 23
평안남도 평양(平壤) 23
평안북도 정주(定州) 21 개국 506년(메이지 30년)에 관찰도를 정주에서 영변(寧邊)으로 옮겼고, 융희 2년에 다시 의주(義州)로 옮겼다.
강원도 춘천(春川) 26
함경남도 함흥(咸興) 13
함경북도 경성(鏡城) 경흥(慶興) 1 9
계(計) 13 7 1 331

부기 편집

경기(京畿)는 도(道)였지만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라고 불렀고, 다른 도는 ‘무슨 도관찰사’라고 불렀다.

개국 기년 편집

조선 시대에 개국기년(開國紀年) 【태조 원년부터 계산하여 개국 몇 년이라고 부른다.】 을 공문서(公文書)에 사용한 것은, 아마도 메이지 9년 2월 26일 우리나라[일본]와 체결한 일한수호조규(日韓修好條規)가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생각건대 이 조약은 조선이 자립한 나라로서 외국과 처음 체결한 것이다. 그 후 서양 여러 나라들과의 조약에서도 마찬가지로 개국기년을 사용하였지만, ‘개국 몇 백 몇 십 몇 년, 즉 중국 광서(光緖) 몇 년’이라는 형식을 취하여 조선이 아직 청나라의 속국이라는 뜻을 나타냈다. 메이지 27년 즉 조선 개국 503년 갑오혁신 때,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는 우선 청나라와의 관계를 끊는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공(公)·사(私) 문서에 개국기년을 사용할 것을 결의하고, 곧 같은 해 7월 28일 【양력 7월 30일】 이래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개국기년을 사용하게 되었다.

태양력과 연호 편집

조선은 일본을 본받아 개국 504년 【메이지 29년】 9월 9일에 국왕은 조칙(詔勅)으로 종래의 태음력(太陰曆)을 폐지하고 태양력(太陽曆)을 사용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17일을 개국 505년 1월 1일 【양력】 로 정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은 일본과 맹약(盟約)한 결과, 이미 일청전쟁(日淸戰爭) 중에 청나라에 의지한다는 생각을 끊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모노세키조약(馬關條約)에 따라 청나라는 분명히 조선의 독립을 인정함으로써, 11월 15일에 조서로써 새로 연호를 건양(建陽)이라고 정하였으며, 동시에 1대(代)에 하나의 연호를 갖는 제도를 정하였다. 이 때문에 같은 해 11월 17일은 바로 건양 원년 【메이지 29년】 1월 1일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이듬해 친일당(親日黨) 내각(內閣)이 무너지고, 친로(親露)·친미(親美)파 내각이 정권을 잡자, 건양 2년 【메이지 30년】 8월 12일에 조서로써, 일찍이 내린 개국 504년 11월 15일의 조칙을 취소하였다. 그리하여 건양이라는 연호를 폐지하고 다시 광무(光武)라고 연호를 정하였으므로[建元] 【연호를 고친 것[改元]이 아니다.】 건양은 연호로 인정되지 않았다. 단 광무라는 연호는 개국 506년 【메이지 30년】 8월 17일부터 사용되었다.

신교의 전래와 포교 편집

서양에서 기독교 신교(新敎) 즉 프로테스탄트의 흥기(興起)는 근세의 일에 속하며, 천주교(天主敎)가 동아시아에 전해진 것은 주로 신교의 발흥에서 기인하였다. 따라서 신교가 조선에 들어온 것도 매우 최근의 일에 속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서기 1832년 【순조 32년】 에 프로이센 사람 기츠라프 【Giitglaff】 는 조선에 와서 처음으로 신교의 포교를 시도하려고 하였다. 그는 네덜란드 전도협회(傳道協會)의 후원 하에 영국의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의 배에 타고 동양으로 왔다. 그해 7월에 전라도 해안에 도착하여 책과 약품 등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국왕에게는 관리를 통해 성서(聖書), 유리(琉璃), 면포(綿布)를 증정하였지만, 이 증정품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 정부가 기독교를 매우 엄격하게 금지하였으므로, 기츠라프는 해안에 머문 지 약 1개월 후에 덧없이 돌아갔다. 그 후 반도에는 천주교가 만연하여 여러 차례 정부의 박해를 받아 그 성쇠(盛衰)는 무상하였다. 그러나 이 태왕 10년 【메이지 6년, 서기 1873년】 에 이르러 대원군이 은퇴하고 민씨가 정권을 좌우하게 되자, 외교 정책이 변경되어 기독교도에 대한 압박도 완화되었다. 천주교의 선교는 점차 성황을 이루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교의 선교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태왕 21년 【메이지 17년, 서기 1884년】 9월에 신교 선교사 박사(博士) 호레스 N. 알렌 【H. N. Allen】 은 미국 공사관 부속 의사로서 조선에 들어왔으며, 동시에 포교(布敎)에 착수하였다. 이것이 신교 선교의 효시로, 그 종파(宗派)는 북미(北美) 프레스비테리언 【북장로파(北長老派)】 에 속하였다. 이듬해인 23년 【메이지 19년, 서기 1886년】 에 같은 파의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와 포교에 종사하였으며, 같은 해에 북미 메소티스트 【북감리파(北監理派)】 의 대표자도 역시 왔고, 그 후 각종 종파들이 미국에서 왔으며, 영국협회파(英國協會派)와 러시아정교 등도 점차 수입되었다. 원래 기독교는 여러 가지 문화사업을 수반하여 들어오는 것이 보통인데, 신교가 조선에 들어왔을 때, 이런 경향이 뚜렷하였다. 이 태왕 23년 【메이지 19년, 서기 1886년】 에는 이미 많은 학교들이 각 파의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같은 왕 22년 【메이지 18년, 서기 1885년】 에 북감리파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해 설립된 배재학당(培材學堂)과 같은 경우는 국왕이 그 명칭을 하사하였다. 그 밖에 자선사업으로서 병원과 고아원도 운영되었다.

이러한 사업들은 신교의 보급에 커다란 힘이 되었다. 이 태왕 23년 【메이지 19년, 서기 1886년】 에는 조선인으로서 신교에 가입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있었다. 25년 【메이지 21년, 서기 1888년】 에 성서를 조선어로 번역하기 위해 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12년이 지난 37년 【메이지 33년, 서기 1900년】 에 처음으로 『신약전서(新約全書)』가 완역되기에 이르렀고, 점차 발전하여 그 활동을 오늘날과 같이 왕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