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소학일본역사보충교재교수참고서/권1/7. 신라의 통일

교수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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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과에서는 신라가 당나라의 속국으로서 반도를 통일하는 과정, 신라 통일시대의 영토·문화, 일본과의 관계와 함께 신라 쇠망의 모습을 알려 주어야 한다.

강의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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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의 삼한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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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고구려 두 나라는 이어서 당과 신라에게 멸망하고, 그 옛 영토는 일단 모두 당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라는 당나라를 고맙게 여겨 볼모를 바치고 최대한 공손하게 대우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신라 문무왕(文武王) 【제30대】 은 반도에 있는 당나라의 영토를 잠식하여, 백제의 옛 영토 전부와 고구려의 옛 영토의 일부를 함께 소유하고 그것을 통치했는데, 후에 당나라도 이를 공인(公認)했다. 때문에 보통 문무왕 이후를 신라 통일시대라고 부른다. 그래서 당시 신라의 국경은 서쪽으로는 대동강, 동쪽으로는 영흥만(永興灣) 부근에 이르렀다.

일본 및 당나라에 복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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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통일의 시대는 문무왕 8년에 고구려가 멸망한 해부터 신라가 멸망하기까지 268년간이다. 바로 우리의 나라(奈良) 시대 조금 이전부터 헤이안(平安) 시대 초기에 해당한다. 삼국(三國)이 균형을 이루고 있던 무렵은 서로 전쟁이 끊이지 않는 때였지만, 이 시기가 되고부터 태평이 지속되었고 당나라와의 교류가 왕성하여 그 문화를 수입했으므로 문물이 눈에 띄게 발달했다. 일본에서도 수나라 때 수와 교류를 시작하고부터 이전에 조선을 거쳐 건너오던 학문, 기예 등을 직접 중국으로부터 얻게 되었으며,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서는 교류가 더욱 왕성해져 유학생(留學生), 유학승(留學僧)을 보내 당의 문명을 받아들인 것은 신라와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문화는 이로 인해 급속히 발전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신라는 당나라의 속국이 되었지만 또한 항상 일본에도 조공(朝貢)했다.

불교의 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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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법흥왕(法興王) 【제23대】 이후 성행하여 역대 여러 왕들은 모두 독실하게 불교를 존중하여 믿었는데, 사후(死後)에 유해(遺骸)를 태워 그 재를 동해에 뿌리기도 했다. 따라서 불사(佛寺)의 건립이 매우 많았으며 나라(奈良) 시대에 못지않은 성황을 이루었다. 이 때문에 공예가 크게 발달하였다. 현존하는 유물로서 당시의 문화를 알 수 있는 것이 적지 않다. 그렇지만 불교의 융성과 함께 공사(公私)의 재산 낭비가 매우 심했으므로, 마침내 명령을 내려 불사를 새로 짓거나 또는 비단과 금은을 불사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또 농업은 나라의 근본을 배양하는 중요한 것이었으므로, 역대 왕들은 결코 이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거듭해서 장려했다.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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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유학(儒學)은 불교와 함께 성행했는데 학자들로는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등이 배출되었으며 모두 유명했다. 특히 설총은 이두를 창제한 것으로, 최치원은 문장으로 유명했다.

국토의 삼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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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통일로부터 220년이 지나 진성여왕(眞聖女王) 【제51대】 이 즉위했다. 이 왕 시대에 이르러 국정이 크게 혼란하고 도적들이 곳곳에서 봉기했다. 이때 견훤(甄萱)이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켜 완산(完山)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 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후백제(後百濟)라고 하였다. 또한 신라의 왕족인 궁예(弓裔)도 스스로 일어나 왕으로 칭했으며 철원(鐵圓) 【지금의 강원도 철원(鐵原)】 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태봉(泰封)이라고 했다. 이리하여 신라의 영토는 셋으로 나뉘어 서로 다투었으므로 국가의 세력은 갑자기 쇠퇴했다.\

신라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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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는 일단 자립했지만 대단히 흉포하여 부하 장수들이 그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마침 그의 장수들 중에 왕건(王建)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궁예를 위해 여러 방면에서 싸워 공을 세웠으므로 그의 장병들은 모두 왕건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다. 궁예는 도망쳐 나왔는데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왕건은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로 고치고, 이듬해에 도읍을 송악(松岳) 【지금의 경기도 개성】 으로 옮겼는데, 그 세력이 나날이 강해졌다. 이에 반해 신라는 영토가 갈수록 축소되어 겨우 경주 부근만을 차지하는 데 불과하자 도저히 국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으며, 경순왕(敬順王) 【제56대】 은 왕건이 즉위한 지 18년 만에 나라를 바치고 고려에 항복했다. 이듬해에 왕건은 후백제를 정벌하여 크게 격파했으므로, 후백제의 왕 【견훤의 아들인 신검(神劒)】도 역시 항복했다. 왕건은 곧 고려 태조(太祖)로서,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바로 다이고(醍醐) 천황 【제60대】 시대에 해당한다. 신라는 건국한 때부터 56왕 992년, 통일 후 268년 만에 멸망했다.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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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영토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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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文武王) 8년에 고구려가 당나라에 멸망한 후, 보장왕(寶藏王)의 일족이 스스로 일어나 국가를 회복하려고 몰래 신라에 들어가자, 문무왕이 이를 받아들이고 토지 【금마저(金馬渚), 훗날의 금마군(金馬郡)으로 현재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이다.】 를 주고 호의적으로 대우했다. 더구나 왕은 군대를 보내 백제의 옛 땅을 잠식했기 때문에, 당나라 황제(고종)는 크게 노하여 신라를 정벌했다. 이로 인해 당나라와 신라의 교전(交戰)은 문무왕 16년까지 역사에서 보인다. 때문에 이 왕 17년 무렵부터는 신라가 사실상 반도에 있는 당나라의 영토를 점유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당나라가 공공연하게 이를 인정한 것은 그로부터 약 60여 년 후로, 성덕왕(聖德王) 【제33대】 34년, 당나라가 칙령을 내려 신라에 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준 때이다. 이때 신라의 통일 과업은 명실공히 완성될 수 있었다. 확실히 당나라는 나라의 형세가 이미 기울었고, 또한 만주에서 발해국(渤海國)이 건국되었으므로, 남쪽에서 신라가 발해를 제어했기 때문이다.

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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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수나라 때 지금의 흑룡강(黑龍江) 상류인 송화강(松花江) 연안에 속말말갈(粟末靺鞨)이라고 불리는 종족이 있었다. 처음에는 고구려에 속해 있었지만, 고구려가 멸망한 후 그 잔당들을 받아들이고, 그 영토를 사방으로 확장하여 세력이 점차 강해지자, 당나라가 그들을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했다. 그 추장 대조영(大祚榮)을 발해군왕(渤海郡王)에 봉했다. 이때 나라를 발해라고 했다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원년, 신라 성덕왕(제33대) 12년】 이때가 겐메이(元明) 천황 시대, 즉 나라(奈良) 시대 초기에 해당한다. 대조영 이후로 무왕(武王), 문왕(文王)이 차례로 왕위를 이어받았으며, 가장 전성기에는 그 영토가 동쪽으로는 일본해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지금의 흥경(興京), 개원(開原) 지방을 포함했으며, 남쪽으로는 평안남도와 평안북도의 일부와 함경북도와 함께 함경남도의 일부를 포함하는 반도의 동북부를 점유했고, 영흥만(永興灣) 부근의 니하(泥河) 【위치 불명】 를 신라와의 경계로 삼았으며, 북쪽으로는 대체로 송화강 및 흑룡강(黑龍江)을 경계로 삼았다. 지방(地方)은 2천 리(里)였고 가구 수는 10여만 호(戶)였으며 국내에 오경(五京)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인 상경(上京) 즉 홀한성(忽汗城) 【중국 길림성(吉林城) 영고탑(寧古塔) 부근의 동경성(東京城)】을 수도로 삼았으며, 한때 매우 강성했다. 그런데 발해국은 영토가 북쪽에 치우쳐 있고 물자가 풍부하지 못했으므로, 항상 당나라와 신라 등에 사신을 보냈다. 그뿐 아니라 나라 시대부터 헤이안(平安) 시대에 아득히 먼 바다를 건너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했다. 그 후 국력이 쇠퇴함에 따라 거란(契丹)의 태조 아보기(阿保機)가 대군을 이끌고 발해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그곳에 동단부(東丹府)를 설치했다. 이때가 바로 고려 태조 9년으로, 신라가 멸망하기 10년 전이다. 발해가 건국되고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가 213년이다.

신라의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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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통일시대의 영토가 서쪽으로는 패강(浿江)에 이르렀다는 것은 앞의 기록에서 알 수 있었다. 패강은 곧 대동강(大同江)이다. 또 동쪽으로는 발해국과 니하(泥河)를 경계로 삼았다는 사실이 『당서(唐書)』에 나와 있다. 그런데 니하의 위치는 지금 알 수 없다. 어쩌면 함경남도 영흥만에 있는 강일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 신라의 국경은 대체로 대동강부터 영흥만을 관통하는 선상에 있었을 것으로 인정된다. 신라는 패강의 남쪽에 장성(長城)을 쌓고 패강진(浿江鎭)을 설치하여 국경을 지켰다.

신라는 전국을 9주(州)로 나누어 주에 도독(都督)을 두어 다스렸으며, 최고 전성 시기에는 그 밑에 군(郡)·현(縣)이 모두 450개 있었다. 또 수도인 경주 외에 따로 5소경(五小京) 【중원(中原, 충주), 서원(西原, 청주), 북원(北原, 원주), 남원(南原), 김해(金海)】 을 두었다.

신라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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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국가의 난리를 진압하고 수호하는 부처의 가르침으로서, 법흥왕 이후의 여러 왕들이 솔선하여 이를 받들어 믿은 것은 일본의 나라(奈良) 시대와 다를 바 없다. 유명한 문무왕(文武王)은 유언으로 명하기를 자신의 유해를 화장하여 동해에 있는 하나의 큰 바위에 묻어 달라고 했다. 그때 이후로 왕의 유해를 화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불교가 성행함에 따라 공사(公私)의 재물을 낭비하는 경우가 지나치게 많았으므로, 마침내 명령을 내려 새로 불사(佛寺)를 건립하거나 비단을 불사에 사용하거나 금은으로 기구(器具)를 만드는 것을 금지한 것은 애장왕(哀莊王) 【제40대】 7년이다. 불교가 크게 흥성한 결과로 건축과 공예가 현저히 발전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오늘날 잔존하는 많은 절터, 불상, 탑, 종, 기타 고분(古墳) 발굴물 등으로 이를 증명할 수 있다.

신라의 학예와 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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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儒學)의 융성은 불교보다 약간 늦어, 신문왕(神文王) 【제31대】 때 처음으로 국학(國學)을 세웠으며, 원성왕(元聖王) 【제38대】 때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설치하여 경서(經書)의 시험으로 인재를 채용했다. 후세의 과거제(科擧制)는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경덕왕(景德王) 【제35대】 때부터는 문운(文運)이 크게 발전했듯이, 주(州)·군(郡)·현(縣)의 이름을 모두 좋은 이름으로 바꾼 것도 이 왕 때이다. 역(曆), 의(醫), 산(算), 천문(天文), 물시계[漏刻], 율령(律令) 등의 학술이 이 시기에 발달했다는 것은, 이것들에 관한 박사(博士)를 두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현재 선덕왕(善德王) 때 지어진 천문대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리하여 대략 당시의 제도를 알 수 있다. 또 농사에 관한 내용으로, 제방을 쌓고 수리(水利)에 힘쓰며 농경지를 개간하고 농사의 해충을 제거하는 등의 기사가 여러 번 보인다. 또한 흥덕왕(興德王) 【제42대】 때 당나라로부터 차(茶) 종자를 가져와 활발히 재배했다.

설총·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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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통일시대에 배출된 학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설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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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는 총지(聰智)이며, 처음에는 불문(佛門)에 들어섰지만 나중에는 유학(儒學)으로 돌아섰다. 신무왕(神武王) 【제31대】 때 사람으로 박학하기로 평판이 났다. 방언(方言)으로 구경(九經)을 해석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방언이란 신라의 언어를 말하는데, 설총은 한자의 음훈(音訓)을 이용한 특유의 문자로 교묘하게 방언을 표현함으로써, 구경의 뜻을 해석했다. 그것이 학문에 미친 효과는 컸다고 한다. 후세에 항상 이 특유의 문자를 관부(官府)의 공문서 등에 사용했으므로 이두(吏道, 吏讀)라고 했다. 일본에서도 거의 그와 같은 시대인 나라 시대에는, 한자의 음훈을 이용한 만요가나(萬葉假名)가 사용되었고, 그것으로 가사(歌詞) 등을 썼다. 그 방법은 이두(吏道)와 거의 다름이 없었다.

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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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고운(孤雲)이며, 신라 말기 사람이다. 당나라에 유학하여 진사(進士) 시험에 급제했다. 마침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최치원은 당나라 장수 고병(高騈)의 종사(從事)가 되어 토벌에 따라나섰는데, 그가 격문(檄文)을 써서 글을 잘 쓰기로 그곳에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헌강왕(憲康王) 【제49대】 때 동쪽으로 돌아와서 왕의 시독(侍讀)이 되었으며, 재학(才學), 문장(文章)은 남들보다 뛰어났지만 뜻을 펴지 못했다. 마침내 벼슬에 대한 뜻을 포기했으며 후에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다 생을 마쳤다. 그의 저서는 매우 많다. 최치원은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眞)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다.

신라 말기의 나라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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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8년부터 220년이 지나고, 진성여왕(眞聖女王) 【제51대】 이 즉위했다. 왕은 품행이 바르지 못하고 총애하는 신하를 가까이 하여 국정을 맡겼으므로, 뇌물을 공공연히 받고 상벌(賞罰)은 타당성을 잃었으며 기강이 크게 해이해졌다. 이때 도적들이 각지에서 봉기했는데, 왕족 중에 궁예(弓裔)라는 사람이 진성왕 5년에 북원(北原) 【지금의 강원도 원주】 으로 달아나 도적의 우두머리인 양길(梁吉) 휘하에 투항했다. 양길은 그를 잘 대우하여 병력을 나누어 주고 동쪽을 침략하도록 했다. 궁예는 후에 세력을 얻어 양길을 몰아내고 스스로 일어서 왕이라고 칭했으며, 도읍을 철원(鐵圓)에 정하고 나라를 태봉(泰封)이라고 했다. 이때가 효공왕(孝恭王) 【제52대】 5년이다. 이에 앞서, 견훤(甄萱)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서남(西南) 해안의 방비를 맡았지만, 진성왕 6년에 완산(完山)에 웅거하여 나라를 후백제(後百濟)라고 했다.

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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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가 스스로 왕으로 칭한 것보다 9년 전이다. 이때 궁예와 견훤은 서로 공격했지만 궁예는 매우 흉포하여 신료(臣僚)들 모두가 안심할 수 없었다. 때마침 송악군(松岳郡) 사람인 왕건(王建)이라는 자가 일찍이 투항해 와 궁예의 부하가 되었는데, 공을 세워 시중(侍中)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장병들은 모두 왕건에게 복속하고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 궁예는 할 수 없이 변장하고 도망쳐 산속으로 들어갔는데, 부양(斧壤) 【지금의 강원도 평강】 의 백성들에게 발각되어 살해되었다. 그가 왕이라고 칭하고부터 불과 18년 만이었다.

견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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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은 한때 왕건과 화의를 맺고 신라를 공격했는데, 갑자가 그 수도에 침입하여 경애왕(景哀王) 【제55대】 을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했으며, 왕의 아우인 김부(金傅)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 그가 바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 【제56대】 이다. 이 즈음 견훤은 신라를 빼앗을 야심을 품고 있었다. 신라는 극도로 쇠퇴하여 왕건에게 원조를 요구했지만, 견훤의 병력이 강대하여 쉽게 그를 격파할 수 없었다. 그런데 견훤은 처첩(妻妾)들이 많아 아들이 10여 명이나 되었다. 마침내 그의 장남인 신검(神劒)과 불화를 일으켜 몸을 피하여 왕건에게 의탁했다. 왕건은 그를 기쁘게 맞이하고 후하게 대우했으며, 병력을 내주어 신검을 치게 했는데, 이천(利川)에서 일전을 벌여 적을 크게 격파했으며, 신검도 역시 항복했다. 후백제국은 견훤이 왕으로 칭하고부터 45년 만에 멸망했다. 신라 경순왕은 그보다 한 해 앞서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고 항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