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소학일본역사보충교재교수참고서/권1/1. 상고 시대의 조선반도
교수요지
편집본 과(課)에서 조선반도의 연혁은 북부와 남부가 크게 다르다. 북부는 예로부터 중국에서 온 사람들이 통치했으며, 따라서 중국의 속국(屬國) 또는 영토였다는 사실을, 남부는 곧 조선인의 조상인 한족(韓族)의 거주지로서, 이 지방은 일찍부터 일본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강의요령
편집북부조선
편집기자조선
편집옛날에 반도의 북부를 조선(朝鮮)이라고 불렀다. 지금으로부터 약 3천 년 전, 기자(箕子)라는 사람이 중국에서 와서 조선의 왕이 되었으며, 그 지역을 잘 다스렸다고 한다. 기자는 중국에 있던 은(殷)나라의 왕족이었는데, 그 나라가 망한 후, 조선에 왔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위만조선
편집기자의 후예인 준(準) 때, 연(燕)나라의 위만(衛滿)이라는 사람이 조선반도의 북부에 들어와서, 중국인을 기초로 하나의 나라를 세웠는데, 마침내 준을 몰아내고 그 나라를 빼앗았다. 위만의 손자인 우거(右渠)에 이르러, 그 나라는 한(漢)나라 무제(武帝)에 의해 멸망했다.
한사군
편집한나라는 당시 중국에 있던 대국(大國)이었는데, 무제는 우거가 자기의 명령을 위반했으며, 또한 그 사신을 공격하여 살해했다고 하여, 군대를 보내 위만조선을 쳐서 멸망시키고, 그 땅에 4군(四郡)을 설치했다. 기자 때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나 마찬가지 상태였지만, 이때에 이르러 완전히 중국의 영지(領地)가 되었다. 이때 우리나라[일본]는 가이카(開化) 천황 【제9대】 시대였다. 4군은 후에 2군이 되었으며, 중국의 영토였던 것은 약 420여 년 동안이었다.
남부조선
편집한 종족
편집상고시대 조선반도의 남부에는 한족(韓族)이 살고 있었는데, 이 종족은 세 종족으로 나뉘어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卞韓)을 이루었다. 마한은 오늘날의 전라, 【남북】 충청, 【남북】 경기도 등 다섯 도(道)의 땅을 포괄했으며, 진한은 오늘날의 경상 【남북】 의 두 도에 걸쳐 있었고, 또한 변한은 경상남도의 대부분과 경상북도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마한에는 50여 개 나라들이 있었고, 진한과 변한에는 각각 12개 나라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마한의 땅에서 백제국이 일어나 그 지역의 여러 나라를 통일했고, 진한의 땅에서 신라국이 일어나 그 지역의 여러 나라를 통일했으며, 변한의 땅에서는 가라국(加羅國) 등 여러 나라들이 있었지만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들 나라는 고작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일본과 마주하고 있었으므로, 이른 시대부터 서로 교류하고 있었다.
고대 일한의 교류
편집일본과 조선반도는 옛날부터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따라서 서로 교류했던 사적(事蹟)들이 오늘날에도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 유명한 것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동생인 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鳴尊)는 그 아들과 함께 신라국에 가서 거주하신 적이 있다. 둘째, 스진(崇神) 천황 【제10대】 때에는 가라국이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했다. 셋째, 스이닌(垂仁) 천황 【제11대】 때에는 신라의 왕자인 아메노히보코(天日槍)가 일본으로 이주하여 일본인이 되었으며, 또한 일본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그 자손이 영원히 이어졌다. 【이상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인용했다】 이 밖에 더욱 많은 사례들이 있다.\
주의
편집(1) 본국[內地]과 조선반도의 지리상 관계는 이미 보통학교(普通學校) 『국어독본(國語讀本)』 권3 제19과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 같은 책 권4 제16과 「조선(朝鮮)」 등에서 배웠으므로, 이 과에서의 수업은 이를 기초로 하고, 지도를 사용하여 더욱 잘 설명해 주어야 한다.
(2) 상고시대에 본국과 조선의 교류 흔적에 관해서는, 보통학교 『국어독본』 권4 제14과 「스사노오노미코토(須佐之男命)」, 제22과 「알[卵]에서 태어난 왕」, 제24과 「하쓰히(巴提便)」, 같은 책 권8 제3과 「아메노히보코(天日槍)」에서 배웠으므로, 이 과의 수업에서는 이것들도 참조하여 가르쳐야 한다.
비고
편집기자 전설
편집기자(箕子)는 은나라 주왕(紂王)의 친척이자 그의 태사(太師)였다. 기국(箕國)에 봉해져 자작(子爵)이 되었기 때문에 기자라고 불렀다. 은나라 주왕은 음탕하고 포학하며 무도(無道)했으므로, 기자가 간언을 해도 듣지 않고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하여 기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짓으로 미친 사람 행세를 하였다.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 주왕을 쳐서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명령을 내려 기자를 감옥에서 풀어주었으므로, 기자는 조선으로 달아났으며, 주왕은 따라서 그를 그 땅에 봉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중국의 고서(古書)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볼 수 있는데, 매우 오래된 전설이다.
『사기(史記)』 【사마천(司馬遷) 편찬,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
“무왕(武王)은 이미 은(殷)나라를 이겼다. 기자를 찾아갔다. 기자는 홍범(鴻範)을 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무왕은 기자를 조선(朝鮮)에 봉했다. 신하로서 섬기지 않았다.”
『한서(漢書)』 【반고(班固) 편찬, 지금으로부터 1천 8백여 년 전】
“은나라는 도(道)가 쇠했다.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 그곳 백성들에게 예의(禮義)와 밭농사[田]와 누에치기[蠶]와 베짜기[織作]를 가르쳤다.”
기자는 보통 오늘날의 평양에 도읍을 정했다고들 하지만, 아직 확실치는 않다. 또 그가 다스린 주민들은 어떤 종족이었는지도 명확치 않다. 현재 평양에 있는 기자의 능과 함께 기자의 묘(廟)는 고려 숙종(肅宗) 7년 【지금으로부터 810여 년 전】 에 창건된 것이다. 기자 다음에는 아무도 후(侯)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40여 년이 지나 준(準) 때에 이르러, 스스로 왕이라고 칭했다. 그렇지만 준은 마침내 위만(衛滿)에게 그 나라를 빼앗기고, 좌우 궁인(宮人)들과 함께 달아나 바다를 통해 마한(馬韓)의 영역으로 들어가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고 칭했지만, 후에 백제국에 병합되었다.
단군 전설
편집조선반도에서 나라를 이룬 사람 중 가장 오래 전부터 전해지는 사람은 앞에 기록되어 있는 기자이지만, 그보다 더 이전에 단군(檀君)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따금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 때문에 여기에서 한마디 해야 한다.
본래 단군에 관한 전설을 기록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서적은 『삼국유사(三國遺事)』 【인각사(麟角寺, 경상북도 군위군) 주지 일연선사(一然禪師)가 편찬했으며, 지금으로부터 6백여 년 전, 고려 충렬왕 무렵】이다. 수천 년 전의 중국 고서들에 기록되어 있는 기자 전설과 삼국유사에 단군에 관한 전설을 비교하면, 단군에 따른 전설은 대단히 새로운 전설이라고 할 것이다. 더구나 같은 책 속에 『단군고기(檀君古記)』라는 책을 인용했지만, 이 책은 『삼국유사』와 서로 멀지 않은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설은 일찍이 중국의 서적들에서 보이는 것이 아니므로, 조선에서만 전해지고 있는 전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선화(宣和) 연간에 【고려 인종(仁宗) 원년, 지금으로부터 790여 년 전】 고려에 온 송나라의 사절인 노윤적(路允迪)의 수행원이었던 서긍(徐兢)이 지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당시 고려의 나라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들 중에서, 특히 「건국(建國)」이라는 장(章)을 두었음에도 전혀 단군이라는 말을 기록한 것이 없다. 대략 25년 후에 완성된 『삼국사기(三國史記)』 【김부식(金富軾) 지음, 고려 인종 23년, 지금으로부터 770여 년 전】에도 이러한 내용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단군이 개국(開國)했다는 전설은 고려 중기까지는 조선인들 사이에서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음이 분명하고, 그것이 조금이라도 알려지게 된 것은 『삼국유사』 시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삼국유사』에 기재되어 있는 이 전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에 환인(桓因) 【제석(帝釋)을 가리킨다.】 이 있었다.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천하에 자주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구(貪求)했다. 아버지가 그 뜻을 알고, 삼위대백(三危大伯)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고, 가서 살면서 그곳을 다스리게 했다. 환웅은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 정상 【‘태백’은 지금의 묘향산】 의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고 한다. 환웅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한다.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로 하여금 장차 곡식을 주관하고, 생명을 주관하고, 병(病)을 주관하고, 형벌을 주관하고, 선악(善惡)을 주관하게 했다. 무릇 인간의 360여 일들을 주관하고, 세상에 살면서 교화했다. 때마침 한 마리의 곰과 한 마리의 호랑이가 같은 동굴에서 살고 있었다. 항상 신웅(神雄)에게 기도하면서,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이때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심지와 마늘 20개를 남겨 놓으면서 말하기를, ‘너희가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모습을 얻을 것이다’라고 했다. 곰과 호랑이는 이것을 먹으면서 삼칠일(三七日) 동안 몸을 삼갔다. 곰은 여자의 모습을 얻었고, 호랑이는 금기를 하지 못해 사람의 몸이 되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혼인을 할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매일 단수(壇樹) 밑에서 아이를 잉태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환웅은 이에 잠시 사람이 되어 그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을 단군(檀君)이라고 불렀다. 왕검(王儉), 당고(唐高) 【고(高) 자는 요(堯)의 휘자(諱字이다.】 가 즉위한 지 50년 만인 경인년(庚寅年)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고 불렀다. 또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다. 이곳은 또한 궁홀산(弓忽山)이라고도 하고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했다. 단군은 나라를 1500년 동안 다스렸다. 주(周)나라 호왕(虎王) 【호(虎) 자는 무(武)의 휘자이다.】 이 즉위한 기묘년(己卯年)에 기자를 조선(朝鮮)에 봉했다. 이에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도읍을 옮기고,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은거하여 산신(山神)이 되었다. 이때 나이가 1908세였다.
위의 전설 내용이 불가사의하여, 불교 설화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은 얼핏 보아도 알 수 있으며, 또한 이 전설은 조선의 북부와 관계가 있고, 조선의 남부에 관계가 없으므로, 신라 시대에 단군이라는 존재는 전혀 존숭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확실하다. 이 전설은 이조(李朝) 초기에 이르러 점차 존숭되기에 이르렀으며, 세종(世宗) 【제4대】 11년 【지금으로부터 490년 전】 에 처음으로 단군 사당을 평양에 건립하여, 기자(箕子) 사당과 단군 사당에서 봄·가을로 두 차례씩 단군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렇지만 세종 때 윤회(尹淮) 등에게 명하여 편찬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평안도 평양부(平壤府)」 조목에 ‘영이(靈異)’라고 하여 단군 전설이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 후 단군에 관한 유적(遺跡)도 증가되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성종 12년에 완성되었다.】 이 편찬될 때에는 그 안에 수록된 것이 적지 않았다. 또 『동국여지승람』과 거의 동시에 명을 받고 편찬된 『동국통감(東國通鑑)』 【서거정(徐居正) 등 지음, 성종 15년에 완성되었다】 에는 그 권수(卷首)의 외기(外紀)에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기사가 함께 수록되어 있지만, 단군조선에 관해서는 자못 의문스러운 관점에서, “당분간은 그대로 두고, 후에 고찰하여 보완한다[姑存之 以備後考]”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이 정사(正史)에 기록됨으로써, 단군은 기자보다 앞서는 조선 개국의 시조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이상은 단군 전설이 발전해 온 것을 개략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이조시대의 유명한 학자 중에는 이 전설이 허무맹랑하고 터무니없고 믿을 수 없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라고, 아울러 이 전설이 승려의 손에 의해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근래에 본국에 있는 학자들의 연구도 역시 모두 동일한 결과를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이 전설을 본문 내용에 채택하지 않았으며, 참고로 이 비고 부분에 부기(附記)한다.
위만의 사적
편집위만(衛滿)은 원래 연(燕)나라 사람이다. 연나라는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부터 만주(滿洲)의 남부와 함께 중국 본토의 동북부에 위치했으므로, 조선과의 거리가 멀지 않았다. 후에 진(秦)나라에 병합되었으며, 이어서 한(漢)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한나라의 고조(高祖)가 천하를 안정시키자, 그의 장수인 노관(盧綰)을 연나라 왕에 봉했다. 이때 연나라와 조선은 패수(浿水) 【압록강인지 알 수 없다.】 를 경계로 삼았다. 그 후 노관 사건으로 노관이 흉노로 달아나자 위만은 고조선에 망명했는데, 무리 천여 명을 모아 패수를 건너 반도 땅으로 들어와, 조선의 왕인 준(準)에게 항복하고, 중국의 망명자들을 통할했으며, 서쪽 경계에 거주하여 조선의 국경을 지키는 것을 허락받았다. 확실히 한나라 초기의 대란에 즈음하여, 연(燕), 조(趙), 제(齊)와 마찬가지로 조선에 가까운 중국의 여러 지방들로부터 난을 피해 조선의 영토 안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매우 많았으며, 그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으므로, 위만은 먼저 이들을 통치했으며, 이들을 기반으로 하여 서서히 그 세력을 다져 갔다. 준은 위만을 매우 신뢰하고 총애했지만, 위만은 오히려 왕을 속이고, 그를 공격하여 그 나라를 빼앗고, 자기가 대신 왕이 되었으며, 왕검(王儉) 【지금의 평양】 을 도읍으로 삼았다. 이때 한나라는 국가가 아직 공고해지지 못했으므로, 요동 태수(遼東太守)로 하여금 조선의 왕인 위만과 외신(外臣)이 되기로 약속함으로써, 변방 밖의 만이(蠻夷)를 제압하여 변경을 어지럽히지 않도록 했다. 또한 동시에 만이의 우두머리[君長]가 한나라에 입조(入朝)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이리하여 위만은 군대와 재력을 얻어 주위의 여러 종족들을 침략하여 항복시켰는데, 진번(眞番), 임둔(臨屯)은 모두 그에게 복속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반도의 북반부를 거의 통치하게 되었으며, 전해지기로는 그의 손자인 우거(右渠)에 이르러 유인해내어 한나라의 망명자들이 점차 많아졌으므로, 당시 조선왕의 치하에 한인(漢人)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없다. 우거는 이처럼 많은 한인(漢人)들을 유치(誘致)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그때까지도 한나라에 입조(入朝)하지 않았으며, 또한 주변 국가들이 입조하는 것을 막았다. 한나라 무제(武帝)는 섭하(涉何)라는 사람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우거를 타일렀지만, 우거는 무제의 조서를 받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섭하를 살해했다. 무제는 분노하여 수군과 육군을 보내 조선을 쳐서 멸망시켰으며, 그 땅에 사군(四郡)을 설치했다. 이때가 한나라 원봉(元封) 3년이자, 우리의 가이카(開化) 천황 시대이다.
한사군의 연혁
편집한나라 무제(武帝)는 조선(朝鮮)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 진번(眞番), 현도(玄菟), 낙랑(樂浪), 임둔(臨屯) 등 4군(郡)을 설치했다. 이때가 원봉(元封) 3년 【가이카(開化) 천황 50년】이다. 그 후 27년이 지나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에 폐합하여 낙랑과 현도의 이군(二郡)이 되었으며, 【현도군은 이때부터 압록강의 북쪽으로 나갔으므로 반도 밖의 것이 되었다.】 그로부터 280여 년이 지나고 후한(後漢) 말엽에 이르자, 건안(建安) 연간에 낙랑군의 남부를 분할하여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했으므로 삼군(三郡)이 되었다. 후한이 망한 후, 삼군의 땅은 위(魏)나라의 영토가 되었으며, 이어서 진(晉)나라가 일어나 중국을 통일했으므로 삼군은 또 진나라의 영토가 되었으며, 진나라 말기에 이르러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에 잠식되었다. 한나라 무제 때인 원봉 3년부터 진(晉)나라 말엽까지 420여 년간 존속했다.
한 종족
편집한족(韓族)의 상태는 『위지(魏志)』에 처음으로 상세히 기록되었다. 이 책의 「동이전(東夷傳)」에 따르면, 한(韓)은 대방군의 남쪽에 있었다. 동서(東西)는 바다에 닿아 있고, 남쪽은 왜(倭)와 접하고 있다. 사방이 천(千) 리(里) 정도이다. 세 종족이 있는데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卞韓)이라고 한다. 이들 삼한(三韓)은 각각 수많은 나라들로 나뉘어져 있는데, 마한은 50여 개 나라,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개 나라들로 되어 있다. 합쳐서 70여 개 나라로 되어 있으며, 이 밖에도 또한 여러 작은 읍(邑)들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삼한은 아직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했으면서도, 마한에는 한왕(韓王)이 있고, 진한에는 진왕(辰王)이 있으며, 변한에도 역시 왕이 있어 이들을 다스린다고 하므로, 각 왕들은 이들 여러 나라들의 맹주가 되었다.
삼한 가운데 진한은 토지가 비옥하여 곡식이 자라기에 적합하고, 그곳 사람들은 잠업(蠶業)을 하며 비단을 짜고 우마(牛馬)를 탔다. 결혼 등에 대한 예절이 있었고 아이가 태어나면 돌로 그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하는 기이한 풍습이 있었다. 문신(文身)의 풍습이 지방에 따라 행해졌다. 국내에서 철(鐵)을 생산하고 한(韓), 왜(倭), 예(濊)는 모두 따라서 이를 취했으며, 시장에서 거래할 때 철로 만든 돈을 사용했던 것 같다. 도읍에는 성책(城柵)을 설치했다. 변한은 진한과 섞여 살았으며, 도읍에 성곽이 있었다. 의복과 주거지는 진한과 같았으며, 언어와 법속(法俗)도 비슷했다. 마한은 도읍에 성곽은 없었고, 토지가 비옥하고, 그 백성들은 농경과 잠업을 할 줄 알며, 면포(綿布)를 짰지만, 우마를 탈 줄은 몰랐다. 마한 사람들은 성격이 강하고 용맹했으며, 일반적인 풍속도 거칠고 세련되지 못했다. 남자들이 왕왕 문신을 하는 풍습은 진한과도 유사했지만, 언어는 진한과 달랐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같은 한족들 가운데 진한과 변한은 거의 서로 유사했으며, 마한과 진한 두 나라는 서로 다른 점이 많았다. 진한 사람들은 원래 진(秦)나라의 전쟁을 피해서 들어온 사람들인데 마한은 그 동쪽 경계 지역을 할애해 주어 살게 진한 사람을 했다는 전설이 일찍부터 전해져 오는 것을 보아, 마한과 진한이 서로 다른 점이 많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임나와 가라의 국명
편집임나(任那)라는 국명(國名)은 조선에서도 옛날부터 보인다. 또한 이를 임나가라(任那加羅)라고도 불렀다. 그 예증(例證)을 들자면 다음과 같다.
(1) 고구려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성경성(盛京省) 집안현(輯安縣)에 있다.】
“임나가라 종발성까지 쫓아갔다.”
(2) 신라 정경대사탑비(貞鏡大師塔碑) 【원래 창원군 봉림사지(鳳林寺址)에 있다.】
“대사의 휘는 심희이고, 속성은 신라 김씨이다. 그 선조는 임나의 왕족이었다.”
(3) 『삼국사기』의 강수 열전(强首列傳)
“신은 본래 임나가량 사람이다.”
이 나라는 옛날에 경상도 김해(金海)에 있던 가라국(加羅國)과 동일하며, 일본의 고서에 나오는 의부가라(意富加羅)가 곧 이것이다. 가라(加羅) 즉 임나(任那)는 먼 옛날부터 일본에 조공을 바쳤으며, 일본이 삼한과 교류하는 문호로서, 일본에서는 항상 조선반도의 남부에 있는 가라 등 여러 나라들을 총칭하여 임나라고 부르게 되었다. 따라서 옛날부터 임나에는 광의(廣義)와 협의(狹義)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본서에서는 김해에 있던 나라를 가라(加羅)라고 이르고, 임나는 넓은 의미에서 임나 제국들을 이를 때에 한하여 사용한다. ‘가라’라는 것은 원래 한족(韓族)의 거주지를 일컫는 말이지만, 그 가운데 마한과 진한의 거주지는 백제, 신라의 두 나라가 되었으며, 이 두 나라의 어디에도 통합되지 않은 지방에는 ‘무슨무슨 가라’라는 이름의 작은 나라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김해의 가라국도 그중 하나였다. 일본에서는 이 ‘가라’라는 이름을 후대(後代)에 이르러 더욱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조선과 땅이 닿아 있는 중국도 포함하게 되었다.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사적
편집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鳴尊)께서 한국에 건너가신 사적(事蹟)은 『일본서기』의 「신대(神代)」 권(卷) ‘일서(一書)’에서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서’에서 말하기를,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소행(所行)은 예의가 없었다. 여러 신들이 치카라노오기도(千座置戶)의 벌을 내리고, 마침내 그를 쫓아내셨다. 이때 스사노오노미코토가 그의 아들인 이타케루신(五十猛神)을 데리고 신라국에 내려가서 소시모리(曾尸茂梨)라는 곳에 거주하셨다. 그런데 흥이 나서 말하기를, “이 땅에서는 내가 살고 싶지 않다.”라고 했다. 따라서 흙으로 배를 만들어, 거기에 타고 동쪽 바다를 건너, 이즈모국(出雲國) 히카와(簸川上)에 있는 도리카미노다케(鳥上之峯)에 도착했다.
임나국의 조공
편집임나국이 조공을 한 사실은 『일본서기』에서 볼 수 있다. 다음과 같다.
스진(崇神) 천황 65년 가을 7월에, 임나국이 소나카시치(蘇那曷叱知)를 보내 조공했다. 임나는 쓰쿠시국(筑紫國)과 2천여 리 떨어져 있다.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 계림(雞林)의 서남쪽에 있다.
아메노히보코 전설
편집아메노히보코(天日槍)가 돌아온 것은 『일본서기』의 「스이닌(垂仁) 천황 3년 봄 3월의 항목 주기(註記)에 기록되어 있다. 다음과 같다.
처음에 아메노히보코(天日槍)가 배에 타고 하리마국(播磨國)에 정박했다. 시사하읍(肉粟邑)에 있을 때, 천황 미와노키미(三輪君)가 조(祖)인 오호토모누시(大友主)와 야마토노아타이(倭直)의 조(祖)인 나가나이치(長尾市)를 하리마노에 보내, 아메노히보코에게 “너는 누구이며, 또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었다. 아메노히보코가 대답하기를, “저는 신라국 군주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일본국에 성황(聖皇)이 계신다는 말을 듣고, 곧 제가 나라를 동생인 지고(知古)에게 주고 귀화해 왔습니다.”라고 했다. 【중략】 이때 아메노히보코가 아뢰기를, “만약 천은(天恩)을 내리셔서 신이 진정 원하는 땅을 신(臣)이 살 곳으로 주신다면, 신이 직접 여러 나라들을 돌아보고, 곧 신이 마음에 드는 곳을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그 말을 들어주셨다. 그리하여 아메노히보코는 우지(菟道) 강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북쪽 오미국(近江國)의 아나읍(吾名邑)에 들어가 잠시 살았다. 다시 오미국으로부터 와카사국(若狹國)을 거쳐 서쪽의 다지마국(但馬國)에 도착하여, 곧 살 곳을 정했다. 이리하여 오미국의 경곡도(鏡谷陶)라는 사람은 아메노히보코의 종인(從人)이 되었다. 그 아메노히보코는 다지마국 이즈시(出石) 사람인 후도미미(太耳)의 딸인 마타오(麻多烏)를 아내로 맞아 다지마국의 찌로쓰히(諸助)를 낳았다. 찌로쓰히는 다지마의 히나라키(日楢杵)를 낳았다. 히나라키는 기요히코(淸彦)를 낳았다. 기요히코는 다지마모리(田道間守)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