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학자 촌평

연전은 을미 이후에 알려진 학교이다. 조선인을 중심으로 한 교화기관의 하나로서 미국 선교부의 경영이니 조선교육계에 있어서 사학(私學)으로서는 최고학부이다. 역사가 짧은만큼 조선인에게 기여한 바가 깊지 못하다. 그러나 동교(同校)가 창립당초에 선언한 동기와 정신이 오로지 조선민중의 문화적 향상과 정신적 도야를 그 사명으로 한 데 있는 이상 현재에 있어서나 미래에 있어서 기대하는 바 적지 아니하다. 시외 아능지(阿陵只)에 약 30만평의 기지를 갖고 게다가 즐비한 근대식 건물은 타교의 추수(追隨)를 허치 않는 천연적 풍경 속에 웅대하게 솟아 있다. 82만원의 기본금과 50만원의 교사건물가격(校舍建物價格)으로도 한번 조선학계에서는 뽐내볼 만하려니와 50여명의 다수(多數)한 교직원과 그들을 수용하는 값진 사택(舍宅)을 가지고서도 조선일(朝鮮一)을 자랑할 만할 것이다. 신촌역(新村驛)을 나려서 북편산록을 보라. 울창한 송림 속에 점점이 백힌 문화주택 속에는 그들 중에 행운이 터진 교수들이 살고 있다. 그들의 생활은 유복하다. 보통교수의 봉급이 220원이라 하며 올라가서 과장급이 250원 나려와서 사무원이나 조수급은 80원 내지 150원이라 한다. 조선의 현실에 있어서 이만한 풍족한 재정을 쓰는 기관이 멧치나 되며 이러한 대우를 받는 사람을 멧치나 헤일 것인가. 오즉 이 연전학원을 제해 놓고는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없는 호경기(好景氣)일 것이다.

이처럼 연전의 교수들은 운이 터진 분들이다. 이처럼 연전학원은 부유한 재정을 가졌다.

그러면 이러한 분위기만으로도 타교와의 구별을 가를 수 있으려니와 내처 들어가 교수 조교수 강사들을 소개한다면 얼마나 이 거대한 재단이 조선학계에 중견(中堅)을 일우는 연전의 인테리켄챠를 양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것이다

현재 연전에는 교수와 조교수가 25명 전임강사가 4명 촉탁강사(囑托講師)가 12명 회계사무원 급(及) 조수가 9명 합계 50명의 교직원이 있다.

그 중에 서양인 10명과 일본인 4명과 회계사무원 급 조수 9명을 빼면 조선인 교수 조교수 급 강사는 27명을 산(算)한다. 우리는 이들 27명을 소개권내(紹介圈內)로 하야 연전의 인테리켄챠를 해부하랴 한다.

연전교수단의 총사(總師)는 유억겸(兪億兼)씨이다.

명치 29년생으로 경성산(京城産)이니 조선 개화운동의 거두 유일준(兪日濬)씨의 차남으로 일본 동지사중학(同志社中學)을 거쳐 제삼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경도제대 법학부(京都帝大 法學部)에서 영길리법(英吉利法)을 전공한 후 일본형법의 권위 목야영일 박사(權威 牧野英一博士) 밑에서 일년간 형법을 연구하였다. 연전에 와서 현재 학감지위에 있게 된 것은 서양인 교수 백아덕(白雅悳)씨가 운동한 힘이 많다 하니 그 진부(眞否)는 어데갔든지 간에 점차 조선인 교수에게 실권을 주자는 일부 선교사들의 주창이 씨로 하여금 현직을 갖게 하였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러나 일반 학생들의 평판을 들어보면 유 교수를 『쟈베루』라 한다. 어느 모를 뜯어보고 이러한 별명을 그에게 선사했는지 모르거니와 그의 성격된 품이 온정을 결(缺)하고 X견적(X見的)이어서 이러한 대규모의 교육기관을 운전하여 나아가는 사무적 인물로는 적재일지 모르나 마도레-누와 같은 자비한 승정(僧正)을 갈망하는 제자에게는 차돌같은 감촉을 주는 인물이다. 교수의 연전에 있어서의 지반은 견고한 자이니 그와 대립하야 권력을 다투는 자 대개는 패배을 면치 못한다 한다. 담임 과목은 상과의 민법뿐이다.

다음 문과로 들어서서 과장 백낙준(白樂濬) 교수부터 소개하자. 이분도 명치 29년생으로 평안도 관산산(平安道 郭山産)이니 선천 신성학교(宣川 信聖學校)를 졸업하고 중국에 건너가 천진 신학서원(天津 新學書院)을 수업한 후 다시 미국에 건너와서는 예일과 푸린스톤에서 신학(神學)과 사학(史學)을 연구하였다. 철학박사의 학위를 받어 가지고 귀국하야서는 연전 문과 과장으로 근무 중이다. 중어와 영어에 능하고 희랍어 원서도 본다 한다. 그의 박사논문으로 미국에서 출간된 저서의 『타이틀 페이지』를 떠들어 보면 꽤 용모가 미려하다. 그러나 그를 한번 면접한 분은 그의 지식조차 얽은 것으로 간주한다는 경향을 갖는다. 그가 조선에 나와서는 미국식 사교술로 인기를 얻을랴 꽤 애썼지마는 거기에 반감을 산 졸업생들의 일반평(一般評)은 X능(X能)한 교수란 새로운 직함을 주었다. 1930년도의 XXXX 교수는 건재한지! 담임 과목은 성경과 역사이다.

그 밖에 고참자로 정인보(鄭寅普) 교수와 최현배(崔鉉培) 교수가 있다. 정 교수는 조선한문학(朝鮮漢文學)의 제일인자(第一人者)임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로 연전에 있어서는 연전삼실(延專三室)에 하나드는 재인(才人)이다. 한참 당년(當年)에 중국남방(中國南方)을 순방하는 중에 얻은 습성인지는 모르겠거니와 항상 추접은 것이 그의 일면상(一面相)이다. 교수시간에 가래침을 탁 뱉아서 씹어 생키는 버릇이나 주책없이 웃움을 터트려 놓고 수습을 못하는 꼴은 학생들에게 불쾌한 감정을 준다. 그러나 이러한 성벽(性癖)이 있는 한편에 학생들로 하여금 경탄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있다. 그의 초인적 기억력이다. 어느 때는 책 없이 들어와서 교수하는 적이 있으며 그의 능변을 가지고 도도 수천언(滔滔 數千言)을 벌여 놓을 때에는 그의 두뇌의 명석함을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에게서 면할 수 없는 것은 재승덕(才勝德)이라는 문구이다. 담임 과목은 한문학과 조선문학이다.

최현배 교수는 경남 울산산(慶南 蔚山産)으로 광도사범(廣島師範)과 경도제대 철학과(京都帝大 哲學科)를 거쳐 연전에 와서는 철학 전반에 긍(亘)한 과목과 조선어를 담임하였다. 인품이 근검착실하고 과묵둔중(寡黙鈍重)하야 학생들의 경모(敬慕)하는 적(的)이다. 그가 광도고사(廣島高師)에 재학 중일 때는 학우로부터 조선의 깐듸-라는 별명을 들었었다 한다. 더욱이 그의 사상의 편린을 엿볼랴면 최근에 발간된 『조선민족갱생(朝鮮民族更生)의 도(道)』라는 책자를 일독하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소극적이나 온건적이오 타협적이나마 저력이 강대한 모범교수이다. 연전 문과에 있어서 참으로 인격적으로 감화를 주는 교수가 있다면 위선 씨를 손꼽지 않을 수 없다. 은인자중(隱忍自重)하야 앞날을 기약하는 교수의 걸음걸이만으로도 그의 연전에 있어서의 존재가치는 퍼-센테지 이상이다.

성격상으로 원만한 윤곽을 보여주는 분으로 현제명(玄濟明) 조교수가 있다. 계성중교출신(啓聖中學出身)으로 숭실대학(崇實大學)을 졸업한 후 미주에 건너가 시가길시 시가길음악학교(市加吉市 市加吉音樂學校) 전문과와 동대학 학사원(同大學 學士院)을 마치고 음악학사의 학위를 받었다. 귀국하야는 연전 전교(延專 全校)의 음악을 담임교수하는데 그가 악단에서 인기를 끄으는 것은 미국에 있슬 때 전미주(全美洲) 학생 현상음악대회(懸賞音樂大會)에서 외국인으로 일등을 한 것에도 그 이유가 있으려니와, 공회당(公會堂) 스테지 우에서 전청중(全聽衆)으로 하여금 『꾸빠이』라는 노래로써 심취케 한 것이 그 주요한 이유라 하겠다. 동교(同校)의 음악이 일취월장하야 조선관현악계에 혜성과 같이 출현하게 된 공적은 오로지 씨에게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당년 29세의 소장(少壯) 조교수이다.

현(玄) 조교수가 연전에 오기 전부터 음악부장을 겸임한 백남석(白南奭) 교수가 있다. 요 얼마전 모 사건으로 인하야 음악부장의 한직(閑職)을 사퇴하였다는데 모 사건에 있어서 그의 인격이 들어난 바와 같이 면접한 사람이면 누구나 후한 인상을 잊지 못한다. 계성(開城)서 성장한 분으로 한영서원(韓英書院)을 거쳐 연전서 수업하였다. 대정 8년에 도미하야 에모리대학 문과를 졸업하였으며 동대학원(同大學院)에 입학하야 심리학을 전공하고 대학사(文學士)의 학위를 받은 후에는 다시 콜롬비아대학에서 교육학을 연구하였다. 귀국하야는 계성 호수돈여고(開城 好壽敦女高)에서 교편을 들은 일이 있었고 대정 12년부터 모교에 와서 영문법과 영문학을 교수하야 현금(現今)까지 이르렀다. 아즉 학구적 태도를 보여준 일이 없는 연전 문과(延專 文科)에 있어서의 거북한 존재이다.

이상은 교수급들이다. 강사급으로는 정인서(鄭寅書), 이운용(李沄鎔), 정인섭(鄭寅燮), 이윤재(李允宰) 등 제씨(諸氏)들이 있으니 정인서(鄭寅書) 강사는 이들 중에 제일 오래되었다. 한학(漢學)에 능한 분으로 지나상고사(支那上古史)와 동양제국사(東洋帝國史)를 연구하였으며 일즉이 청주고보(淸州高普)의 촉탁교원으로 근무한 일이 있었고 대정 14년도부터 연전에서 강사로 있게 되었다. 위가 약하야 항상 안색이 좋지 못하며 인력거를 타고 출근하는 일도 한두번이 아니다. 극히 온순하고 침착한 성격을 가저 동양사 강의에 있어서는 학생들의 인기를 혼자 독점하고 있다. 더군다나 현학성(衒學性)이 없는 그의 소박한 학구적 태도에는 누구나 좋은 인상을 갓는다.

다음으로 독일 유학생계통으로 이운용(李沄鎔) 강사가 있다. 이관용(李灌鎔) 박사의 이씨(李氏)로 재기발발(才氣潑潑)한 분이다. 독일어 강의를 전담하였는데 그의 치밀한 교수방법에는 학생들이 꼼짝 못하고 예습과 복습을 하게 된다 한다. 그의 눈꼽이 낀 듯한 눈으로써 열심을 내어 교수하는 것을 보면 독일의 학풍이 씨를 통하야 비로소 조선학생에게 전달되는 듯한 느낌이 생긴다. 경성 공학전문(京城 工學專門)을 졸업하고 서서(瑞西)를 거쳐 백림(伯林)대학에서 국민경제학을 연구하고 일시는 오국 유야납(墺國 維也納)대학에 재학한 일도 있었다.

영문학 담임강사로 정인섭(鄭寅燮)씨가 일주일에 멧번식 학교에 얼골을 나타낸다. 해외문학을 발간(發刊)하든 한참 당년에는 조선의 하몰렛트를 부르짖고 문학청년 티를 잔득 낸 분이다. 조도전(早稻田)대학을 졸업한 수재(秀才)로 소년(年少)한 분이다. 연령 발표까지는 씨의 즐겨하지 않는 바이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연전(年前)에 조선일보지상에 영어교수법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일약 연전 강사에 취임하게 되었다는 것이 씨가 처음 연전에 올 때에 학생간에 퍼진 소문이었다. 씨의 장기는 하믈렛트 강의일 것이다. 배우풍(俳優風)이 있는 데다 그의 천*(穿*)하는 듯한 성격을 가지고 강의할 때에는 누구나 마른 츔을 삼켜가며 공부를 하게 된다. 그러나 너무 자세한 것에도 학생은 멀미를 앓는 것이다. 하교종을 쳤는데도 불구하고 강의를 계속하는 데는 학생들의 눈총도 꽤 맞었다. 씨는 한편으로 정력가이다. 신접삼림을 한 후의 소식은 모르거니와 최근까지도 그의 다단(多端)한 강사생활을 볼 때에는 동정을 일르기게 된다.

끝으로 조선역사를 강의하는 분으로 이윤재(李允宰) 강사가 있다. 작년부터 시무(視務)하기 시작하였는데 원래 씨는 사회적으로 많이 알려진 분으로 현재 동아일보에 관계를 맺고 중후한 인격이 학생들에게 감화를 일으키는 바가 많다. 그러나 교수시간에 그의 강의를 필기하자면 꽤 갑갑증을 느끼게 한다. (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