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루
1
편집돈을 잡은 것은 확실히 유쾌한 사실이었으나,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슬픈 사실이었다.
그러나, 슬픈 사실은 줄은 알면서도 노예의 사슬에 얼킨 몸을 구태여 벗어나 자기는 자꾸만 미련이 발목을 붙든다.
그것도 애초에 돈 그 물건을 위하여 돈을 잡자던 계획이었다면 모르되, 생명과 같이할 한낱 사업의 자금으로 많이도 말고 꼭 만 원만 잡자고 체면에도 양심에도 다 눈을 감고 의지까지 희생하여 불면불휴 삼십대의 청춘을 썩임으로 기어이 손안에 넣은 그러한 돈이다.
그런데 그것도 인젠 만 원을 훨씬 넘어 이만 원에까지 가까웠건만 돈이 손안에 들어오므로 돈에 대한 욕망은 그만치 커가고, 욕망이 커 가느니만치 마음속을 먹는 벌레는 차츰 깊이 파고 들어가, 돈에 대한 욕망을 깨끗이 씻어 버리자고 하면 뒤미처 돈에 대한 욕망의 검은 소이 양심을 덮어누른다.
오늘은 기어이 한군에게 회답을 써야 할 텐데 정암은 아직도 그 회답할 문구에 이렇다 마음을 꽉 정할 수 없다.
한군의 뜻을 일러주자면 “그렇다, 돈 만 원이 나를 잡은 것은 사실이다.
군의 말대로 그것을 다 투재하면 잡지 하나는 넉넉히 해 나갈 수가 있을 것이다. 내 처리 되는대로 걷어가지고 나갈 테니 우선 군은 모든 것을 준비하게.” 하여야 할 것이나, 또 그렇게 하자고 했던 것이 자기의 근래의 숙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떻게 잡은 그 돈이라고 손해를 보면서까지 해야 될 것이 빤한 그 사업에 투재는 차마 마음이 허하진 않는다. 겨우 문안만을 서두에 써 놓고 대답할 재료에 적절한 문구를 찾지 못해, 자꾸만 잉크를 찍어올려서는 붓방아를 찌어 말리다 못해, 종시 초안대로 “군은 너무 일찍이 보채는구려. 군이 보채지 않은들 내가 그 잡지야 꿈엔들 잊을 건가. 이만 원 설은 터무니도 없는 허설이오, 돈은 아직 잡았달 것도 없는 게 소문은 그리 굉장하구려. 잡았다는 게 겨우 이삼천 원에 불과한데 그러니 그까짓 것으로야 밥도 못 먹을 걸 잡지가 다 무언가. 삼년만 더 참게. 그러면 내 풍설 부럽지 않게 정말 만 원 하나는 묶어 가지고 나갈 자신이 있으니…….”
이렇게 내용을 삼고 마침내 편지의 끝은 맺었으나 터무니없는 거짓말이 양심에 걸려 당초에 돈을 잡자던 궁리가 틀린 거라고 자책을 하며 생명과 돈과 씨름을 붙여 보다가 돈에 대한 욕망을 종시 잊을 길이 없어. 그것은 벌써 쓸데없는 뉘우침임을 즉석에서 깨닫는다.
그래 애초에 돈을 잡자는 궁리를 아니 하였더라도 돈은 여전히 없을 것이니 종시 그 잡지 사업은 못 하게 될 것으로 청춘이 그대로 썩기야 마찬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냐 하면 아직까지 그 간난이 자신의 개인뿐만이 아니라 집안의 화기를 송두리째 빼앗고 주림에 떨고 있을 것에 비하여 생활의 안정만이라도 얻어 놓은 점은 틀림없는 돈에 대한 공덕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 이러한 논조로 생각을 계속하면 오히려 그 돈 속에 모든 평화와 행복이 깃들어 있는 듯싶게 지난날의 생애엔 추억의 줄기줄기 잇몸이 시다.
본시 선조의 조읍을 물려받는 혜택을 입지 못하고 아직 부모의 노력 밑에서 밥을 받아먹어야 할 열둘이라는 나이에 제 손으로 제 몸을 치지 않아서는 안 되는 운명을 짊어진 채 향학에 솟구쳐 넘는 정열에 고향을 떠나 이역의 손이 되기는 하였으나 뜻을 개운히 이르기까지에는 힘을 다하는 노력도 믿지 않았다. xx이라는 전문의 야간부를 그래도 그럭저럭 마치게 된 것을, 실사회에 나와 보니 자기에겐 그것도 한낱 기적인 듯싶었다. 그만큼 실사회에서는 동정의 여유에 더한층 매몰한 것이었다. 그래도 문화의 역할에 한몫의 고임돌이라도 되어 보고 싶은 양심의 충동을 밥만을 위해서 허덕이지는 못하고 학생 적부터의 소망인 출판 문화에 현념은 잊지 못했다. 그래서 돈 있는 친구들의 교섭에 몇 해의 세월을 허비하였으나 될 듯 될 듯한 것이 알고 보면 모두 각자가 어려운 데서의 방패막임들이었다. 여기 정암은 청춘의 끓는 피가 보람없이 썩어나는 것을 통절히 가슴을 치고 아무 짓을 해서라도 돈 만 원은 붙들어와야 한다! 시골서 근근히 농사를 지어서 지내는 늙은 아버지의 주머니 귀를 털어가지고 이 북만으로 들어온 지가 칠 년째 돈에다 생명을 걸은 이 시절의 생활- 그것은 생활의 마디마디 모골이 소연타.
-처음 오 전 십 전짜리의 봉지를 상대로 아편 밀매를 시작한 것이 육칠 개월에 돈 백 원이 난 수월히 잡을 수 있어 앞길에의 진전을 어느 정도까지 꾀할 수 있는 서슬에 그맛 것도 돈이라고 도적은 들었다.
앞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마주서는데도 돈을 내어놓지 않았음은 어리석은 짓이었을까? 생명을 팔은 돈이라 생명을 걸고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겨눈 총부리 앞을 날쌔게도 달려들어 주먹으로 면판을 받쪼아 거꾸러치고 교묘히 몸을 피해낸 것은 지금 생각하여도 장하거니와 앞 목에 한 놈이 또.
파수를 보고 있는 줄을 뉘 알았으랴! 호각 일성에 붙들린 몸이 되어 돈은 돈대로 빼앗기고도 두 개씩이나 받은 상처가 뒷가슴에 깊다. 쌍줄로 솟아흐르는 피를 막아 볼 여념도 없이 흐르는 대로 길바닥 위에 점점이 붉은 물을 들이며 방향도 없는 길을 허겁지겁 내달아 피한 곳이 마안한 들판의 청초속- 풋수수 시절임이 다행이라 할까 그것으로 끼니를 이며 공포 속에 치를 떨고 배겨 있기 무릇 닷새에 다행히 창흔은 곪는 법 없이 자연히 순조로 치료도 되어 다시 풀밭을 기어나오기는 하였으나, 집에는 불까지 질러 놓고 갔다. 몸 담을 곳이 없었다.
두루 헤매던 끝에 친교를 맺어 오던 왕가라는 중국인의 호의로 임시 처소의 염려는 떨렸으나 앞길의 타개책은 여전히 아득하다. 무슨 짓이야 안 해 보았으랴, 거리의 짐꾼도 되어 보고 곡괭이를 잡아도 보며 수삼 개월의 육체 노동에 약질의 건강은 더 시달릴 길이 없이 곯아 떨어져 자못 그 몸 가질 바 태도에 아득한 판, 이 적지 아니 큰 마을에는 죽음의 계절을 만난 듯이 쥣병이 사람의 생명을 휩쓸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십 명의 송장이 마을 밖으로 끌려나간다. 생사의 공포 속에 잠긴 이마을- 그러나 이것이 정암의 생활 타개에 천재일우의 기회가 될 줄이야……. 문전의 출입도 완전히 엄금된 이 마을이라 시체의 처치가 곤란하다. 시체를 놓은 집들에서는 그 처치의 감당을 동네 사람들에게 원한다. 뒷산 높은 봉 위에서는 으리으리한 호령 소리가 하루에도 몇 때씩 마을을 타고 흐른다. 몇 통 몇 호에 시체가 놓여 있으니 누구든지 내다 묻어 주면 상당한 사례를 드린다고.
그러나 돈이면 돈이지 누가 그 우글거리는 병균의 시체를 짊어져다 묻어 주리오. 응하는 사람이 없는 양 같은 주소엣 시체를 외이는 고함소리가 짬짬이 들리는데 그 보수의 가격만은 들릴 때마다 오른다. 저녁 무렵에는 이 백 원이라는 숫자에까지 끌어올려 부르는 소리가 똑똑히 정암의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정암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후득거림을 느꼈다. 단백 원에 생명을 걸고 총부리와 싸우던 일을 생각하고 이 이백원이란 돈을 생각하니 은근히 군침이 흘렀던 것이다. 처지를 생각하면 죽을 진악을 다 써도 지금 같아서는 청내가야 그맛 돈을 손안에 쥐어 볼 것 같지 못하다.
요행 죽지만 않는다면 게서 더한 땡은 없다. 방금 눈앞에 겨눈 총부리와 싸웠으랴, 그것보다는 오히려 헐한 품이다. 마침내 거사에 용단을 내어 그 즈른히 누운 세 개의 시체를 세 차례씩이나 등짐으로 날라다 묻고, 일금 육백 원을 손안에 들었다.
일을 일단 치르고 나니 그것이 생시 같지는 않았다. 생존욕이 있는 사람으로 정신에 이상이 없는 한 도저히 못 할 일같이 제 자신의 정신이 발랐었던가를 몇 번이나 의심하게 되는 나머지 께름칙한 생각이 온몸을 공포 속에 떨게 하였다. 창자 속에는 호열자 균이 시를 다투어 백 마리 천 마리 자꾸 번식을 하고 있는 것 같아 금시 그것들의 작용은 복통을 일으킬 것 같은 생각에 무릇 며칠 동안은 단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이 뱃증 한 번 하는 일 없이 그 달음에 거리로 뛰어나와 언제나 한번 하여 보리라던 소망대로 명색 요리업을 차려 놓았던 것이, 소경이 문고리를 잡은 격으로 이역에 헤매는 가난한 홀아비들의 주머니 귀를 털어내는 좋은 계기가 되어 마침내 소욕의 돈을 묶어 놓게 된 것이다.
그러니, 누구의 경우가 이래도 그 돈이 허스럽지는 않을 게다. 돈을 쏟히면 다시 그 고생을…… 할 때에 정암은 더 생각을 계속하려고도 아니하고 편지를 봉투 속에 집어넣었다.
2
편집“고반상!”
“고반상!”
“고반도 하루꼬상!”
몇 번이고 불러도 응답이 없다.
“고반산떼바!”
짜증에 가까운 높은 음성이 다시 한 번 관내를 찌르릉 울려내는 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음에 서기는 이층으로 달려올라가는 양 쿵쿵쿵 층대를 밟아 넘는 발자국 소리가 재다.
이년이 기어이 또 무슨 수를 피는 것이 아닌가. 정암은 괘씸한 감정이 불쑥 치받쳐 오른다.
번번히 주릿대를 내리나 듣지 않고 떼를 쓰는 하루꼬다. 어디 한 번만 더, 하고 별러 오던 차다. 어떻게 대답을 하나 보자. 서기의 발소리 끝에 그것들의(색시들) 방문이 열리고 거기서 흘러나올 하루꼬의 대답에 정암은 귀담아 정신을 모았다.
그러나 문소리는 열리자 곧 닫기고 되돌아 나오는 기척을 서기의 보고를 기다리지 않고도 벌써 하루꼬가 이층에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없지?”
“없습니다.”
어디로 달아났다면 큰 탈이다. 하루꼬는 이 요리점의 존재를 말하고 있다. 그것에의 단골이 얼마인지 모른다. 그것이 흥이 없는 때 영업에는 타격이 온다. 다시는 구할래 드문 계집인데…….근심과 같이 찾아온 손님 처리에 생각이 옹색한 판 하루꼬는 변소에 있다는 보고를 받는다. 제 말은 뒤를 보았다고 하나, 시간으로 보아 이십 분씩이나 뒤를 보았다는 건 곧이들리지 않는 말이다. 역시 피난처가 그곳이었을 것임에 틀림없을 게다. 괘씸한 생각은 당장 주릿대를 내리겠으나, 손님이 기다린다. 독을 보아 쥐를 못 치는 격, 손님을 보낸 뒤에 어디보자, 흥분을 누르고 한마디의 훈계도 없이 모르는 체 서기의 지휘대로 내버려두었다.
시간 손님이었다. 손님은 곧 돌아가고 고방은 나온다.
지독히 여윈 얼굴이다. 한참 나이를 자랑할 연지뺨에 청춘의 물이 시들시들 날았다. 그래도 그 고르게 정리된 윤곽이 아직도 사람의 눈을 끌기는 하는 것이나, 그것도 화장의 힘이 아니라면 속이지를 못할 것 같다. 단발에 아이롱질을 한 더벅머리는 오히려 여윈 얼굴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었으나 그래야 손님의 비위에는 맞는다.
불러다 놓고는 아무 말도 없이 정암은 담배만 태운다. 먼저 하루꼬의 사죄를 기다리는 눈치다.
“저를 부르셨에요?”
“왜 불렀는지 몰라?”
첫마디가 장히 대답하기 힘든 일이다.
“절 부르셨에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한 것처럼 되물어 보는 수밖에 없었으나, 그것이 억지임은 하루꼬 저도 안다.
“아, 왜 불렀는지를 모르느냐 말야!”
“모르겠에요”
“생각해 봐도 몰라?”
“잘못했습니다.”
죽어 대령이 봉변을 피하는 수단임을 아는 까닭이다.
“잘못 알기는 아는 모양인데 글쎄 왜 알면서두 그리 생떼를 쓰자는게냐?”
“제가 언제 생떼를 썼에요?”
“아, 이년이 그럼 내가 너를 꾸짖기 위해서 생말을 지어내는 게냐?”
“요전엔 정말 배가 아파서 그랬에요.”
애원에 가까운 음성이요, 그것은 태도에 더하다.
“배쯤 좀 아픈 게 네겐 그렇게 큰 일이드냐?”
“정말이에요. 그적엔 지독히 아팠에요.”
“그래서 그적엔 배가 아팠다 하고, 아까는 무엇이 또 아파서 세 번 네번 불러도 대답두 없이 어데를 갔든 게냐?”
묻는 말이 빤히 아는 눈치니 핑계가 쑥스러움을 순간 깨닫기를 하였으나, 언제나 이러한 경우면 모면이 난처함에 자기의 잘못을 뉘우쳐 왔음이 하필 이번뿐이 아니다. 난치의 숙질이 그러지 않아도 괴로운데, 당탁한 직업에 충실하잠이란 죽기로서 끔찍하다. 오히려 거짓말이 헐한 품, 안 속을 줄 알면 서도 뜨문이 핑계를 대었던 것이 사실이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왜, 대답이 없어?”
“잘못했에요”
할 밖에 더 말이 있을 수 없는 괴로운 마음은 안타까운 흥분 끝에 또 기침 줄기를 터뜨린다. 입을 손으로 싸고 쿨룩거리더니 마침내 뒤미처 시뻘건 선지피를 받아낸다.
정암은 아연하고 실색하는 나머지 하려던 말을 더 계속하지 못하고 하루 꼬의 괴로워하는 표정에 자기를 잊은상 멍하니 앉았을 뿐.
“고반상!”
또 서기의 부르는 소리.
“잘못했에요. 다시는 안 그러겠어요. 저를 또 부르나 봅니다.”
“고반상떼바!”
“하이 하이.”
3
편집“탕!”
총소리.
“탕!”
연달아 또 한 방.
바라보니 사무실 앞에 한군이 편지를 읽으며 섰고, 그 뒤에 하루꼬가 총부리를 겨누었다.
“탕!”
뒤달려오는 총알은 딱 하고 철궤의 열쇠 구멍에 명중되어 두 쪽으로 쫙 갈라진다. 지전 뭉치가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그들의 눈에 뜨일까 두려워 손 빨리 장찬을 하려 하나 발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안타까움에 헤매는 동안 ‘탕 탕!’ 총소리는 난사에 가깝다. 하나만의 짓은 아닌 것을 깨닫고 살피니 총을 든 것은 하루꼬뿐이 아니다. 에미꼬, 가나리아, 쿠로리아, 시라유리, 다리아, 히바리, 스즈랑- 계집이란 계집애는 있는 대로 여덟이 모두 떨쳐나 하루꼬를 선두에 일렬로 서서 총부리를 겨누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겨우 떼어 해어진 돈뭉치를 움켜집으려는 순간, 다시 건너오는 총알은 ‘탕!’ 소리와 같이 손목에 명중된다. 제결에 ‘으앗!’ 소리를 치고 보니 움켜잡은 것은 돈이 아니라 이불귀요, 아무것도 없는 방안에 댕그라니 혼자 누워 있는 자기인 것을 정암을 알았다.
괴악한 꿈이다. 전신이 땀에 떴다.
이게 무슨 징조인고? 꿈은 마음의 상징이라니 이런 노릇은 하면서도 한편 마음의 가책은 늘 받게 되는 양심의 반영이 이러한 꿈을 빚어 보이는 것인가? 만일 꿈이 현실의 상징이라면 하루꼬를 선두로 계집 여덟이 모두 자기에게 총을 겨눈 원수에 틀림없다. 그리고 한군도 하루꼬에 지지 않는 원수로 자기를 대하는 것이 아닌가. 그게 한군에게 차마 하여야 할 짓이었을까.
마음을 같이하고 살아온 벗이 한군이다. 섧을 때나 즐거울 때나 같이 울고 즐기며 팔과 다리같이 서로 의지하여 믿고 붙들어 왔다. 결코 허영에서가 아니라 기어이 우리들의 소망인 잡지는 내 손으로 만들어 놀 테다. 한군은 지금 그것을 믿고 뜻 아닌 월급 푼에 목을 매고 눈알이 뒤솟도록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한군에게 한 편지는 과연 할 짓이었을까. 하루꼬도 그렇다. 밥을 위하여 북만에서 헤매는 존재이었다고는 하나, 그 길을 바르게 지도는 못 해 줄망정 감언이설로 그것을 꼬여들었다. 그리고는 사정에 눈감은 것이 분명 자기였다. 계집애가 여덟이나 있건만 돈을 잡아 준 건을 오직 하루꼬의 운혜라고 해도 지나치는 말은 아닐 게다. 요릿집 추월관(秋月館) 하면 벌서 손님은 하루꼬를 연상하고 하루꼬 하면 그것은 추월관인 줄을 안다. 그만큼 그의 존재는 높아 손님을 끌며 추월관의 이름을 굳혔다.
비로소 깨달은 것이 아니라, 병이 들자부터는 실로 허스럽지 않은 동정이 가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참을 수 없이 몸이 괴로워하는 기색이 보일 대면 피로를 풀 여유를 받게 되고 보니 도리어 그것을 약점으로 자기를 이용하여 보다 더한 여유를 얻고자 떼를 쓴다. 그리하여 그것은 뭇 계집들에게까지 영향은 및게 되는 것이어서 이런 영업에는 도시 눈이 어두워야 될 것이 진리임을 깨닫고 눈을 딱 감아 버렸던 것이다.
며칠 전의 그 밤으로 말해도 그렇게 고단해서 피신까지 한 것을 찾아 내다 시달림을 주고 각혈하는 것을 볼 대 아랫목에 눕혀 놓고 피로한 몸과 마음을 얼마 동안이라도 안정시켜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없지도 않았으나 버릇을 길러 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뒤이어 부르는 고방의 호명에도 눈을 감아 버렸던 것이다. 이것이 하루꼬에게 과연 하여야 할 짓이었을까 생각하니 그러한 꿈은 자기의 꿈속에 반드시 나타나 마땅할 것 같다.
그러면 앞으론 한군과 하루꼬에게 어떠한 태도로 대하여야 할 것인고? 이 노릇을 그만두는 수밖엔 역시 묘한 방책이 없다. 그러나 수만금이 눈앞에 왔다갔다 보이는 이 노릇을 그만두다니 하면 지금까지 쌓아올린 지위와 권리를 일조에 짓밟아 버리는 것이 되는 것밖에 없다. 돈에 따라다니는 그 지위와 권리를 어디서 다시 붙잡을꼬? 자기와는 상대도 안 하던 놈이 지금은 황공히 머리를 숙이는 것이 아닌가. 어차피 살아가자면 머리를 숙이고 살기 보다는 들고 사는 편이 아무리 해도 상쾌한 일 같다. 한 편이 좋으려면 언제나 상대되는 그 한 편은 희생이 되어야 하는 것은 하필 이런 노릇에서뿐이 아니라 세상의 온갖 이치가 그러하다. 돈 앞에 머리를 숙이고 예기가 죽어 살던 지난날을 돌아보면 모욕의 분풀이로라도 머리를 숙이던 놈에게 그 숙어드는 머리를 고개를 돋우들고 발길로 한번 직긋 눌러 보고 싶기까지 하다. 잡지 사업 그것은 인제 취미의 대상이 아니다. 사람은 취미로 산다. 삶에 취미를 잃는 때는 제 목숨을 스스로 끊기도 한다. 하물며 잡지 사업에랴! 삶의 승리는 돈에 있다. 이러한 꿈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힘차게 정복을 해야 한다. 생각을 굳히는 동안 “소곰 소곰” 하고 가나리아의 외치는 소리가 세면대로부터 들려온다. 또 하루꼬의 각혈인 모양이다.
정암은 하루꼬의 각혈이 요즘 와선 차츰 그 번수가 잦아 오는 것을 보고 여생이 앞에 닥친 것을 미루어 이태만 더 살아라 속으로 외며 다시 자리를 바로 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4
편집그러나, 하루꼬는 그 이듬해 봄을 잡으면서부터는 급각도로 살이 깎였다.
뜰 뒤 장독대 언저리엔 한참 봄뜻을 머금은 몇 그루의 낭이꽃이 하얗게 피어나건만 하루꼬의 얼굴은 하얗게 시들어만 갔다.
이렇게 하루꼬의 얼굴에는 완연히 병색이 드러나게 되니 손님이 차츰 줄어든다. 단골 손님까지도 발을 딱 끊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아직 목숨은 붙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영업에 추월관의 존재를 말하는 하루꼬가 이렇게 목숨이 없으니 영업에는 타격이 크다.
정암은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이 이 봄을 접어들면서의 커다란 한 가지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탐색을 해야 하루꼬만한 매력을 가진 계집이 좀처럼 나서지 않는다.
5
편집오늘은 또 산촌으로 계집의 물색을 떠난다. 조선 계집애를 수양딸로 두었던 진가라는 중국인이, 인물은 이쁘나 행실이 부족하여 그것을 팔겠단다는 왕가의 종용으로 떠나는 길이다.
닿은 곳은 마안한 들판을 바라보며 산턱 아래 외로의 떨어져 박힌 한 채의 작지 않은 기와집이었다.
왕가는 색시를 교섭한다고 진가와 같이 나가고 정암은 혼자만이 남아서 피곤한 다리를 쭉 버드러치고 앉아 담재를 피워 물었다.
“텅!”
뒷문이 닫긴다.
그리고, 쇠를 잠그는 소리.
또 곁문이 “텅” 하고 닫긴다. 쇠 잠그는 소리.
사람을 방안에 두고 밖으로 쇠를 문마다 잠그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별안간 정암은 으즈즈한 생각에 오싹하고 머리카락이 있는 대로 올려 뻗친다. 벌떡 일어서 문을 밀어 본다. 당당하게 마췬다.
까닭을 몰라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벽장문이 스르르 열리고 진가가 섬쩍 내려선다.
“너 글 알지?”
진가는 손에 들었던 지, 필, 묵을 내려놓는다. 색시의 계약을 하자는 말인가, 순간 정암은 생각이 옹색하여 바라만 보니,
“글 알어?”
힘있게 곱채는 진가의 눈에는 불빛이 번쩍 하고 빛난다. 조금 전에 대하던 그렇게 사람 좋아 보이던 그러한 진가의 인상이 아니다.
정암은 그 순간 도둑의 굴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바짝 일어났다.
“글 쓸 줄 아는가 하는데?”
꿱 지르는 소리에 흠칠 놀라고 바라보니 어느새 어디서 빼내었는지 날이 새파랗게 번쩍이는 한 자루의 단도가 그의 손에 들려 있다.
순간, 정암은 쓸 줄 안다는 대답을 하고 나서도 황겁중 자기 입에서 나온 말이 무엇이었던지도 몰랐다.
“그러면 여기 내가 부르는 대로 편지를 써라.”
명령과 같이 붓에 먹을 찍어 정암의 앞으로 내어민다.
“자, 이렇게 써라. 왕가와 같이 색시를 사러 와 보니 그 집에 도적이 무서워 옛적부터 땅속에 묻어두었던 은전이 몇 만원어치가 있는데, 이것을 샀으면 수가 날 것인즉, 대지급으로 이만 원만 보내라. 지금 경쟁자가 있으니 돈이 속히 오고 속히 안 오는 데 큰 부자 하나가 왔다갔다할 것인즉 시각을 지체 말고 보내라. 이렇게 써라!”
그리고, 한 걸음 무릎을 바싹 다가 나앉으며 방바닥에 턱 하고 칼을 꽂는다.
정암은 정신이 아찔했다. 이미 듣고 있던 사실을 지금 자기가 봉착하고 있는 것이다. 편지를 쓰라는 대로 쓰지 않으면 그 진가의 칼날에 자기의 목숨은 날아난다. 처음 귀를 베고, 다음에 코를 베고, 그래도 말을 아니 들으면 목을 자른다는 것이 그들의 행동임은 이미 잘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편지를 쓰는 날이면 새빨간 몸뚱이로 권리도 지위도 다 잃고 한지에 나서는 날이다. 어떻게 이 자리에서 감쪽같이 몸을 피해낼 길이 없을까 엉뚱한 생각에 잠겨 보는 동안,
“이놈아! 목숨이 귀하거든 빨리 써!”
진가는 한 걸음 더 바싹 다가앉으며 칼자루로 손이 간다.
그래도 정암은 어떻게 잡은 그 돈이라고 차마 붓이 손에 가지 않아 머뭇거리니.
“그래 못 쓸 테냐? 후회 마라!”
단 한 마디로 잡았던 칼자루를 드는가 하더니 어느새 진가의 한 손은 정암의 바른쪽 귓바퀴를 더듬어 잡는다.
“쓰 쓰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귓바퀴에서는 새빨간 피가 비치었다.
그 쓰겠다는 소리가 한 초 동안만 더 입안에서 지체되어 나왔던들 자기의 한쪽 귀는 완전히 떨어지고 말았을 것임을 생각하니 그것만도 다행한 일 같다.
생명이란 이렇게도 귀한 것일까. 진실로 정암은 생명이 돈보다 귀함을 이 순간에서 절실히 느겼다. 다시 그 칼이 올까 두렵게 벌벌 떨리는 손에 붓대를 더듬에 들었다.
6
편집이튿날 아침에야 정암은 자기의 정신으로 돌아왔다.
편지는 썼으니 아내는 의심 없이 돈을 보낼 것이요, 돈이 오게 되면 자기는 이 굴 속을 벗어는 날 것이니 생명은 건지게 될 것이나, 그 옛날적 운명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이 한없이 슬프다. 왕가 그놈을 친구라고 믿다니! 그놈의 꼬임에 빠지다니! 벗으로서의 왕가의 의리에 정암은 진저리가 나도록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그 순간, 정암은 한군과 자기와를 또 문득 생각하고 다시 한 번 몸서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왕가와 자기, 자기와 한군, 그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戊寅[무인]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