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훈련
오랫동안 화성의 관찰에 열성스러운 어떤 소인(素人)[1] 천문학자가 탄식하였다 한다 ― 신경도 훈련해야 되겠다고.
그 뜻은 망원경을 사용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화성의 빛이 한 가지로만 보이더니 오래오래 관측을 계속한 결과로 드디어 화성이 육지에서 반사하는 광채와 그 운하라는 수면에서 발하는 빛의 구별을 ― 인식하게 되었으니 망원경이라고 곧 잘 보인다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의 안구의 신경이 상당히 훈련되었어야 비로소 전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빛을 인식할 만한 신경의 훈련이 선행하여야 된다.
현미경도 또한 마찬가지다. 고도의 렌즈 밑에 생물의 세포를 보았거나 니콜경 밑에 광물의 구조를 살펴본 경험을 가진 이는 망원경 보는 이와 꼭같은 탄성을 발하고야 만다. 경하(鏡下)에 세포가 놓였으되 소인이 제 마음대로 들여다볼 때와 현명한 교수의 지시에 따라 ― 자색(紫色)은 무엇, 도색(桃色)[2]은 무엇, 우편엔 핵, 좌편엔 염색체 하면서 세포 내의 신비의 눈이 열린 후에 볼 때는 천양의 차와 같은 차이에 놀란다. 니콜경 밑의 석영 · 장석 등의 구조와 색채의 구별이 역시 그렇다. 물체가 현미경 밑에 놓였다고 놓인 그대로의 진상이 아무에게나 그 있는 진상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능히 보는 눈을 가진’ 자에게만 보인다. 망원경도 현미경도 그 사용하는 이의 신경이 훈련되었을 때에만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세상 어리석은 자에게는 기이한 것이 없으되 현명한 이에게는 낱낱의 사물이 기이하지 않은 것이 없다. 칼라일은 기적을 부인하는 이를 향하여 여인이 해산하는 것을 보라고 외쳤거니와 보는 눈으로써 보면 여인이 새 생명을 산출하는 일보다 더한 기적이 세상에 없다 하되 범용의 안목으로써 한국 고금의 상사(常事)이요, 동서의 관행인 것 뿐이다.
이른 봄에 살구나무를 보고 놀란 것은 선지자 예레미야였고 찬 하늘에 성신(星辰)의 운행을 우러러보면서 가슴 속의 엄연한 도덕률에 놀란 것은 철인 칸트였다. 이처럼 고도로 신경이 훈련된 이들에게는 보이는 것도 많고 놀라운 것도 많다.
불탄 진지 한 공기라도 감사로써 받아서 집사람들까지 위로하는 이 있고, 탄내난다 뿌리치고 온종일 분노로써 주위에 독 주는 사람이 있다. 감사할 자료에 포위되어 있어도 감사를 발견 못해 마르는 생명 있고, 눈물의 사막같은 골짜기에서라도 수시로 도처에 샘과 계류(溪流)와 화초를 발견하는 눈이 있다. 신경이 있다.
천체의 관차로 망원경을 사용하에도 먼저 신경을 훈련하여야 하며 생물의 세포와 광물의 구성을 엿보는 현미경에도 신경 훈련이 선결 조건이다. 하물며 조매(早梅)[3] · 만국(晩菊)[4]과 초로(草露)[5] · 성운을 그때그때에 느낄 대로 느끼는 대시인 같은 지혜를 받고자 함에 어찌 신경을 훈련함이 없이 될 소인가. 감사할 바를 감사하는 생애에 이르러서는 이는 과연 맹훈련이 없이는 능히 성취하기 어려운 경지이다. 감사할 것도 감사를 느끼지 못하는 생애, 이는 가장 하등동물의 생애이며 극히 작은 감사 자료에도 절대한 감사와 찬송을 발견하는 신경, 이는 만물의 영장의 신경이다. 물체가 있다고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신경을 훈련하여야 보이는 것처럼, 남부러워하는 팔자에 태어났다고 해서 감사의 생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신경을 훈련하여야만 매사에 감사하여 향시로 기쁨에 넘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눈은 떴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눈’이라야 보이는 법이요, 귀는 열렸다고 듣는 것이 아니라 ‘듣는 신경’이 훈련되었어야 들리는 법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6]고. 또 가라사대 “귀 있는 자는 들으라”[7]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