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송(宋)나라 때에 천하 제일의 명공(明公)이 있었으니, 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전(佺)이라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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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집안은 대대로 명문거족(名門巨族)이라, 부친 운수선생(雲水先生)은 도덕이 높은 선비로서, 공명(功名)에 뜻이 없어 산중에 은거하여 세월을 보내었으니, 천자(天子)가 그 소문을 들으시고, 신하를 보내어 이부상서(吏部尙書)의 벼슬을 주며 불렀으나 종시 조정에 나오지 않고 산중에서 일생을 마치니, 집안이 처량하더라.

그의 아들 김 전이 또한 문장이 빼어나서 이태백(李太白)과 두보(杜甫)를 압도하고, 글씨는 왕희지(王羲之)와 조화보를 무색하게 할 정도라, 그에게 배우려는 선비들이 구름 모이듯이 따르더라.

하루는 동학에 사는 친구가 호주부(湖州府)로 벼슬 하여 부임하게 되었으므로 十○리 밖까지 전송하려고 술대접을 하고 반하물[半河水] 강가에 이르렸으니, 때마침 여러 어부들이 큰 거북을 잡아서 불에 구워 먹으려고 법석대었으니, 김 전이 수상히 여기고 자세히 본즉 그 거북의 이마 위에 하늘 천(天)자가 있고, 배 위에도 역시 하늘 천자가 있더라. 김 전은 그 거북이 비상한 영물임을 알고 당부하기를,

“이 거북은 영물이니 물에 놓아 살려주시오.”

그러자 어부들이 말하되,

“우리가 종일 고생 끝에 이 거북 하나를 잡았는데 어찌 놓아 주겠소?”

하고 듣지 않았으니, 이때 거북이 김 전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죽을 목숨을 슬퍼하는 형상을 짓더라. 김 전은 갖고 있던 술과 안주를 어부에게 조고 그 거북을 사다시피 바꾸어 받아서 다시 강물에 넣어 주었더니, 거북이 기쁘게 물 속으로 들어가면서 감사한 형용으로 김 전을 돌아보더라. 김 전이 친구를 전송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 강을 건널 때에 갑자기 심한 풍랑이 일어서 다리가 무너지고 배가 뒤집혀서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고, 김 전도 물에 빠져서 죽을 지경에 이르더라.

이때 김 전의 앞에 홀연히 꺼먼 널빤지 같은 것이 떠 올랐다. 김 전이 그 널빤지 위에 올라타서 겨우 피란을 하였으나 알고 보니 그것은 큰 물짐승이었는데, 네 굽을 허위대며 물 위를 살같이 빠르게 달려서 순식간에 건너편 강 언덕에 다다라서 무사히 육지에 오르게 되더라.

‘아, 이 짐승이 필경 앞서 구해 준 거북이가 저 살려준 은혜를 갚고자 나를 구해 주었구나.’

하는 생각으로, 김 전은 그 거북에게 고마와하자 거북의 거북의 입에서 말 대신으로 안개 같은 것을 토하며 그 광채가 무지개 서듯이 황홀하더니, 이윽고 그 황홀한 기운이 사라지는 동시에 거북도 홀연히 없어지고, 그곳에 새알 만한 진주(眞珠) 구슬 두 개가 놓여 있었으니, 김 전이 더욱 기이하게 여기고 두 손 위에 놓고 자세히 보니 구슬 가운데 오색의 광채가 찬란한데, 한 개에는 목숨 수(壽)자가, 한 개에는 복 복(福)자가 선명히 보이더라.

‘거북을 살려준 인연이라 하지만 기이한 일이로다.’

김 전은 그런 생각을 하며, 그 구슬 두 개를 갖고 집으로 돌아오니라. 이때 김 전의 나이 二○세였으나, 집이 빈한해서 장가를 들지 못한 총각신세이더라.

형초(荊楚) 땅에 사는 장희라는 사람이 공명에 뜻이 없어서 벼슬을 탐내지 않고 있었으나, 본디 지체가 공후(公侯)의 자손이라 집이 부유하며, 슬하에 무남독녀를 두었는데, 낭자의 사람됨이 뛰어나고, 재주와 용모가 어질고 아름다와서 양친이 장중보옥(掌中寶玉)같이 아끼면서 사윗감 고르는데 여간 안목이 높지 않았으니 그러던 장희가 김 전의 인품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청혼하여 왔고, 김 전은 반하물 강가의 거북에서 얻은 진주로 예물을 보내고 약혼을 하였으나, 장모 되는 장희부인은 그 초라한 예물을 탓삼아서 평소의 뜻과 어긋난 불평을 남편에게 말하기를,

“공경대부(公卿大夫)들 집안에서 우리 딸에게 구혼하는 귀공자가 구름같이 모여드는 데도 허하지 않으시더니, 왜 구태여 가난한 김 전에게 허혼하시오. 이제 김 전의 예물을 보니 그 빈한의 정도를 알겠으며 외 딸의 평생이 걱정이외다.”

“혼인은 인륜의 대사이매, 당신이 모를 말이오. 더구나 혼인에서 재물을 취하는 행위는 오랑캐의 풍습이 아니요? 그뿐 아니라 당신이 초라하게 여기는 그 폐물의 진주를 보니 천금과 바꾸지 못랄 보배요.”

하고, 은방에 맡겨서 반지로 만들었더니, 광채가 황홀 찬란하여 눈이 부서서 보지 못할 정도였으니 좋은 날을 택해서 김 전을 사위로 삼으니, 신랑 신부의 품격과 용모가 해와 달을 합한 것같이 황홀하더라.

장인 장희는 김 전의 풍모를 보고 희색만연하여, ‘내 딸의 사위로는 도리어 과만하다’고까지 말하고, 사랑함이 친아들 못지안핬았으니, 김 전은 장씨를 아내로 맞자, 원앙이 푸른 물에 놀고, 비취가 연리지(連理枝)에 깃들인 것같이 금실이 좋고 아름다왔으나, 그들이 결혼한 후 三년 만에 장희 부부가 모두 세상을 떠나매, 딸의 애통이 망극하였는데 김 전은 장인 장모의 장례를 극진히 지낸 뒤에 조석의 제사를 공손히 받들더라.

이러저러 여러 해를 지났으나, 김 전 부부의 슬하에 일점의 혈육이 없어서 서럽게 보내던 중, 어느 해 첫 가을 七월 보름날 밤에, 김 전과 장씨는 부부동반하여 누(樓)에 올라서 달구경을 하고 있었으니 이때 홀연히 공중에서 꽃송이가 장씨 치마 앞에 떨어졌으니, 이상히 여기고 자세히 보니 배꽃도 아니요, 매화꽃도 아닌데 높은 향기가 진동하더니, 문득 회오리바람이 불어서 꽃입이 산산히 흩어져서 어디로 날라가 버리니라. 장씨는 마음에 그 꽃을 아깝게 여기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이날 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달이 떨어져서 황금 산돼지로 변해서 장씨의 품안으로 기어드는 바람에 놀라서 잠을 깨니 기인한 꿈이었기에, 잠든 남편을 깨워서 그 꿈 이야기를 알리기를,

“어젯밤에 계수나무꽃 한 송이가 떨어져 뵈더니, 오늘밤 꿈도 이러하니, 하늘이 우리의 무자(無子)함을 불쌍히 여겨서 귀자(貴子)를 점지해 주실 모양이오.”

남편은 이런 해몽을 하고 기뻐하였더니, 과연 그날부터 아내 몸에 태기가 있더라. 김 전 부부는 크게 기뻐하며 아들 낳기를 기다렸더니, 一○삭이 차매 장씨는 난산으로 고생하므로 김 전은 의약으로 치료하며 순산을 빌었는데, 그러다가 마침 四월 八일에 기이한 향기가 풍기며 오색구름이 집을 둘러싸더니, 밤이 깊은 후에 선녀 한 쌍이 내려와서 말하되,

“집을 정하게 소제하고 있으면 선녀(仙女)가 하강(下降)하실거요.”

하고, 장씨의 산실(産室)로 들어가니라. 김 전이 바삐 나와서 노복(老僕)을 시켜 집 안팎을 소제하고 기다렸더니, 이윽고 오색구름이 집을 두르며 향기가 다시 진동하므로, 김 전은 혹시 아내가 죽는 징조가 아닐까 하고 산실로 달려가 보니, 아내는 순산하고 산파 노릇을 한 두 선녀는 벌써 방문 밖에 나와 있었는데 금새 자취를 감추어 버리니라.

김 전이 놀라서 황급히 방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내 장씨는 기절하고 인사불성이었는데, 김 전은 아내의 수족을 주물러서 한참 후에 정신을 차렸으므로 반색을 하고, 낳은 아이를 보니 옥골선풍(玉骨仙風)이 비범하게 탈속(脫俗)하였으나, 불생히 남자가 아니라 서운함을 금치 못하더라.

이 딸의 이름을 숙향(淑香)이라 하고, 자(字)를 월선궁(月仙宮)이라 하여 사랑하고 귀중히 함이 비길데 없었느니라.

나이 다섯 살이 되매 자태가 더욱 아름다와졌으므로, 달에서 내려온 선녀의 태생임을 나타내었고 믿어졌더라. 보름달이 구름과 안개를 헤치고 창공에 걸린듯 사람의 눈이 부시고ㅡ 목소리가 맑고 고와서 백옥을 산호(珊瑚)채로 두드리는 듯하니, 모든 일에 진선진미(眞善眞美)하매, 김 전은 행여나 단명(短命)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우명한 관상가 왕규를 청해다가 숙향의 사주를 보였더니,

“숙향아가는 세상 사람이 아니라 월궁항아(月宮姮娥)의 정맥이라, 장차 귀하게 되리로소이다. 다만 옥황상제께 죄를 지어서 인간으로 태어났사오매, 초분(初分)은 험하고, 그 후는 길하리이다.”

이 말을 들은 김 전은,

“우리의 집은 다행히 의식이 족한데 어찌 초분이 괴로우리요.”

하니 의아하여 반문하기를,

“미리 정하지 못할 것은 사람의 팔자이옵니다. 아가씨는 五세에 부모를 이별하고 사방으로 우랑하다가, 二○세가 되면 부모를 다시 만나 부귀영화하고, 이자일녀(二子一女)를 두고, 七○세 때 하늘로 올라가리라.”

김 전은 이 관상가의 말을 믿지는 않았으나, 만일의 일을 걱정해서 숙향의 생년월시를 금실로 수놓은 비단 주머니를 만들어서 채워 두니라.

이때 송나라의 국운이 불행해서 금나라가 반(叛)하여 황성(皇城)을 침노하려고, 먼저 형초지방을 침범하였으니, 김 전의 가족은 피란하다가 도중에서 도적을 만나서 재산이 든 행장을 전부 버리고, 김 전은 숙행을 등에 업고 아내를 데리고 도망하기 바빴는데, 도적의 추격이 급해서 점점 가까이 몰려 왔으므로 김 전은 숙향을 업고는 도저히 빨리 도망할 수가 없었으니, 기진맥진한 그는 아내에게 이르기를,

“여보, 도적의 추격이 급하고 우리의 힘이 다해서 빨리 도망칠 수가 없으니 어찌하오. 우리가 요행히 살아나면 자식은 다시 만나 보려니와, 만일에 우리가 도적에게 잡혀서 죽어 버리면 죽은 몸은 누가 거두며, 조상 제사는 누가 받들겠소. 혈욱의 인정으론 야속하지마는 숙향을 여기 두고 우산 급한 화를 피하였다가, 다시 와서 데려가기로 합시다.”

아내는 남편의 이 말을 듣고 망극하여 울며 애원하기를,

“나는 숙향이와 함께 죽을 결심이니, 당신이나 어서 빨리 피신하여 천금귀체를 보존한 뒤에, 우리 모녀의 죽은 몸이나 찾아서 거둬 주시오.”

“당신을 버리고서야, 차마 어찌 나 혼자 피신하겠소. 차라리 함께 죽기로 합시다.”

“그건 안될 말씀이오. 대장부가 어찌 처자 때문에 개죽음을 당한단 말씀이오. 그러지 말고 어서 빨리 상신 먼저 피신하시오.”

아내의 손을 잡고 또다시 주저하는 김 전은,

“내가 당신을 어찌 버리고 가겠소.”

하고 가려고 하지 않자, 장씨가 통곡하면서 단념하고 말하기를,

“당신이 정 그러시다면, 정박한 심정이지만 그럼 숙항을 여기 두고 가십시다.”

“자아, 어서 갑시다.”

김 전이 아내를 재촉하자 장씨는 표주박에 밥을 담아서 숙향에게 주면서 타이르기를,

“숙향아, 내 배고프거든 이 밥을 먹고, 목이 마르거든 냇가의 물을 떠서 마시고 잘 있거라. 우리가 내일 와서 데려가마.”

어린 숙행은 어머니의 매정한 말에 발을 동동거리며 울며 애원하기를,

“어머니, 아버지. 나를 데리고 가요.”

하니, 장씨는 어린 딸의 애원에 가슴이 메어지는 듯하고 정신이 아찔해서 말을 못하다가 우는 소리로 또 달래기를,

“잠깐만 여기서 기다리면 다시 와서 데려가마. 울거나 큰 소리 말고 있어야 한다. 큰 소리를 내면, 도적이 알고 와서 잡아죽인다. 알겠지 응?”

그러나 숙향은 더욱 큰 소리로 울면서 어미니에게 매달리며 가로되,

“어머니는 왜 나를 여기 버리고 나 혼자 도적에게 잡혀 죽으라 해요. 싫어요, 싫어요. 나를 데리고 가요.”

하고 어머니 옷을 쥐고 놓으려 하지 않으니 장씨는 차마 그런 딸을 버리지 못하여 안고 울었는데, 김 전도 마침내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형세가 급한데, 어찌 그애 하나 때문에 세 가족이 다 죽는단 말이오. 당신이 정 가지 않는다면, 나도 안 가고 여기서 함께 잡혀 죽겠소.”

장씨는 천지가 망극하여, 마침내 옥가락지 한 짝을 빼어 숙향의 옷고름에 매어 주고 달래기를,

“숙향아, 울지 말고 여기 있으면 내가 곧 오마.”

결심을 하고 뒤를 돌아보니, 도적은 벌서 저쪽에서 달려오고 있었으니, 김 전이 황망히 장씨를 이끌고 가니 숙향이 통곡하며,

“어머니, 날 버리고 어디로 가요? 나도 데려가요.”

하고 부르는 소리가 멀리 가도록 들리니 김 전 부부의 간장이 녹는 듯이 저리고 아파 어두운 길을 허둥지둥 달아나니, 그 형상이 실로 참혹하더라.

도적이 와서 홀로 우는 숙향을 보고,

“네 아비 어미는 어디로 갔느냐? 간 곳을 알리지 않으면 죽여 버린다.”

숙향은 부모를 찾는데 놀라서 울면서도 정신을 차려서

“나를 버리고 간 부모를 내가 어찌 알겠어요. 알면 내가 찾아 가겠어요.”

하고 애절히 울었으나, 도적은 잔인하게도 죽이려고 얼러댔으나, 도적 중의 한 명이,

“몹쓸 제 아비 어미가 버리고 간 불쌍한 어린 것이 배 고파서 우는데 무슨 죄가 있다고 죽이겠느냐? 여기 이대로 두면 산짐승에게 상할 거다.”

하고, 인정있게 업어다가 마을 앞에 두고 가면서,

“나도 자식이 이만한 것이 있는데, 참으로 가련하다. 네 부모가 너를 버리고 가면서 오죽 마음이 아팠으랴!”

하고 눈물까지 머금었으나, 숙향은 어디로 갈지를 몰라 부모만 부르고 길로 방황하매 그 정상을 보는 사람들이 불쌍히 여겼으며, 날이 이미 저물고 인적도 그쳤으니, 배고프고 갈 바를 몰라서 덤불 밑에 엎드러 우니라.

그때 문득 황새 한 떼가 하늘에서 날아 오더니, 날개로 덮어 주었으므로 춥지는 않았으나 배가 고파서 견디지 못하니, 이윽고 원숭이떼가 아직 살아 있는 물고기를 갖다 주었으므로, 숙향은 반색하여 배가 부르도록 먹으니라.

이튿날 아침에 까치가 날아와서 숙향의 앞에 와서 오락가락하는 꼴이 어디로 인도하려는 기색 같으므로, 숙향이 울면서 그 까치를 따라서 고개 여럿을 넘어 가니 어떤 마을이 있었는데, 숙향이 그 마을로 들어 가니, 마을 사람들이 숙향을 보고서,

“어떤 아인데 혼자 방황하느냐?”

“우리 부모가 내일 와서 데려간다 하시더니, 지금껏 찾아오지 않아요.”

하고 숙향이 울며 대답하였으므로 무두 가엾이 여기더라. 그들도 숙향의 얼굴이 고우므로 데려다가 기르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병란(兵亂)이 급해서 피란할 때인지라 그리하지도 못하고, 다만 밥을 먹여 주면서,

“우리도 피란 길이기 때문에 데려 가지는 못하니, 이 밥을 잘 먹고 어디로든지 안전한 데로 가거라.”

하더라.

각설하고. 일시 피신하였던 김 전은 아내 장시를 깊은 산속에 감추어 두고, 살며시 산에서 내려와 숙향을 찾아 갔으나 종적을 모르매 필경 죽었으려니 하고, 아내 있는 산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더라.

“숙행이가 그 근처에 없으니, 필경 죽은 모양이오.”

울면서 말하는 남편의 말을 들은 장시는 통곡하다가 그만 기절할 지경이더라. 김 전은 놀라서 아내를 위로하며,

“모두 운명이니 너무 서러워 말아요. 아까 내가 죽었으리란 말은 나도 잘못한 낙망 끝의 말이었소. 어린 것이 그 두고 온 장소에서 멀리 가지 못하였을 터이니 죽었어도 시체가 그 근처에 있을 것인데, 그것조차 없었으니 필경 누가 데려간 것이 분명하오. 왜 숙향이가 어렸을 때에 사주를 보인 관상가 왕규가 다섯살 때에 부모와 이별한다고 하지 않았소. 그 말이 맞는 것이니 너무 상심치 마시오.”

“가엾어라 숙향아, 내가 너와 함께 죽지 못한 것이 한이다. 여보 당신은 관상가의 말이나마 믿어서 죽지 않았으리라 하시지만, 그 애는 죽었어요. 요행히 살아 있을지라도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가겠어요.”

하고 혼절하니, 김 전은 위로할 바를 몰랐으니,

“숙향이가 살아 있으면 앞으로 반드시 만나보리니, 당신도 왕규의 말을 믿어요.”

하는 말로 위로하더라.

이 무렵에 숙향은 피란하는 사람들이 다 흩어져 가버린 밤중에 천지가 괴괴히 적막하고 달빛만 처랑한데 배고프고 슬퍼서 홀로 울고 있자니, 푸른 새가 나타나서 앞을 인도하자 숙향이 그 푸른 새를 따라서 한 곳에 이르러 본즉, 큰 전각(殿閣)이 으리으리하고 풍경 소리가 은은히 우니라.

홀연히 청의(靑衣)의 소녀가 그 전각에서 가만히 나와서, 숙향을 안고 들어가서 높은 집의 고운 자리에 놓으니, 숙향이 놀라는 눈으로 본즉, 한 부인이 화관(花冠)을 쓰고 칠보단장으로 황금교의에 앉았다가 숙향을 보고 황망히 자리에서 내려와서 동편에 놓은 백옥교의로 자리를 옮겨 앉았는데, 숙향이 그냥 울고만 있으니 부인이 입을 열어,

“선녀가 인간세계에 내려와서 더러운 물을 많이 먹어서 정신이 상하였으니, 선약 경액(瓊液)을 쓰도록 하라.”

부인의 명을 받은 시녀가 경액을 만호종에 가득 부어서 주니, 숙향이 그것을 받아서 마시며, 흐렸던 정신이 선명해지며, 전생의 월궁(月宮)의 선녀로 천상(天上)에서 놀던 일과, 인간세계에 내려와서 부모를 잃고 고생한 일이 역력히 회상되니, 몸은 비록 아이지만 마음은 어른이라. 머리를 들어서 부인에게 사례하기를,

“제가 하늘에서 죄를 얻어서 인간으로 내려와 고초를 당하던 중, 부인께서 이처럼 데려다가 관대히 대해 주시니 감사하옵니다.”

“선녀는 나를 아십니까?”

“제가 멀리 나와 고생을 한 탓으로 정신이 혼미하여 알아 뵙지 못하오니 황송하옵니다.”

“나는 후토부인이로소이다. 선녀가 인간에 내려와서 고초이단(苦楚異端)이시매, 원숭이와 황새와 파랑새를 보내었더니, 그것들을 보셨나이까?”

“모두 보았삽거니와, 부인의 은혜 백골난망이오라 천상(天上)의 죄를 속(贖)하옵고, 부인 좌하(座下)의 시녀가 되어 은혜를 갚고자 하옵니다.”

“선녀는 월궁소아(月宮小娥)라. 불행하여 지금 인간으로 잠시 귀양살이를 하지만 七○년의 고락을 지내시면 다시 천궁(天宮)의 쾌락을 받으실 것이니, 서러워하지 마소서. 오늘은 날이 저무었고, 오신 길이 머온지라. 오늘은 나와 함께 머무시고 내일 돌아가소서.”

하고 좋은 음식과 풍악을 갖추어 대접하니, 인간세상에 보지 못한 풍류더라. 부인이 경액을 권하니, 숙향의 정신이 상쾌 총명해져서 천상의 일만 기억되고, 인간 세사(世事)는 깨끗이 잊혀졌으니, 숙향이 후토부인에게 묻기를,

“듣자오니, 명사계는 시왕이 계시다 하더니 정녕 그렇습니까?”

“그렇소이다.”

숙향의 물음에 후토보인이 대답하기를,

“인간의 부모를 시왕전에 있으면 만날 수 있겠습니까?”

“선녀의 부모는 인간으로 그저 계시거니와, 옥황상제의 사람이 아니라, 봉래산 선관(仙官)선녀로서 인간으로 귀양내려갔사오니, 기한이 차면 다시 봉래로 가시니 이곳이 계실 리는 없사옵니다.”

“인간 세상으로 나가면 다시 부모를 찾아 볼 수 있겠읍니까?”

“인간으로 태어난 숙향의 말인지라, 후토부인은,

“월궁의 선녀로 계실 때는 상제님게 득죄하여 억울하게 되었더니, 규성(奎星)이란 선녀가 옥황님께 득죄하여 인간으로 내려와서 장승상의 부인이 되었사오니, 선녀도 그 댁으로 가서 전생의 은혜를 갚고, 바야흐로 때를 만나 귀히 되고 부모를 만날 것이니, 앞으로 一五년 이후 되오리다.”

“인간의 고행(苦行)을 생각하면, 일각이 삼추 같사온데 一五년을 어찌 지내리까. 차라리 죽어 말고자 하옵니다.”

“이것은 천명(天命)이라, 천상에서 득죄하여 받는 바이어니와, 다섯 번 죽을 액을 겪고서 생전의 죄를 속한 후에 인간의 영화를 보실 것입니다.”

이윽고 금계(金鷄)가 울고 날이 밝아 오니 부인이 황급히,

“선녀를 모시고 말씀이 무궁하오나, 가실 곳이 머옵고 때가 늦어가니 어서 가소서.”

“때는 늦어가나, 인간의 길을 모르오니 누구의 집으로 의탁해 가오리까?”

“그건 염려 마소서. 선녀가 가실 길은 내가 알리오리다. 장승상 댁으로 먼저 가소서.”

“장승상 댁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이까?”

“三천 三○○리지만 그건 염려 마소서.”

하고 부인은 화분에 심은 나무 한 가지를 꺾어서 흰 사슴의 뿔에 매고서 다시 말하되,

“이 사슴을 타면 순식간에 만리라도 가시리니, 시장하시거든 이 열매를 가지고 가소서.”

숙향이 부인에게 사례하고 사슴의 등에 올라타니, 그 사슴이 한번 굽을 치고 달리자 만리 강산이 번개같이 눈앞을 지나가니라. 가는 새 없이 한 곳이 이르니 사슴이 더 가지 않고 발을 멈추고 서므로 숙향이 사슴의 등에서 내리자 배가 고팠으므로, 부인이 준 열매를 먹으니 배가 부르고 천상의 일이 일시에 잊혀지고, 마음도 다시 인간으로 돌아와서 타고 왔던 사슴이 물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조차 들기 시작하였으며, 그곳은 초목이 무성하여 어디로 갈지 길도 없으므로, 잠시 모란나무에 몸을 기대고 졸더라.

알고 보니 이곳은 흠남군(欽南郡) 땅의 장승상 집의 동산이었으며, 장승상은 한(漢)나라의 장량(張良)의 후손이라 일찍이 벼슬하여 명망이 조정에서 으듬이라. 四○ 전에 승상이 되어 부귀공명이 일국에 제일이더니, 시종조(時宗朝) 때에 간신의 모함을 만나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한가로운 세월을 보내었으니, 슬하에 일점 혈육이 없어 항상 슬퍼하다가 승상이 하루는 꿈을 꾸었더니, 선녀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서 계화(桂花)꽃 한 가지를 주면서,

“전생의 죄가 중해서 무자(無子)하였더니, 이제 이 꽃을 주매 잘 간수하라. 그러면 뒤에 좋은 일이 있을지라.”

노라서 깨보니 꿈이엇는데, 부인을 불러서 꿈이야기를 하고,

“우리 부부 무자하여 쓸쓸하더니, 이제 하늘이 자식을 점지하시는 모양이오. 그러나 우리 나이 五○에 어찌 생산을 바라겠소?”

하고 한탄하였으나 집 위의 하늘에는 오색의 안개가 어리어 있었고 기이한 향기가 집안에 가득하매, 승상이 다시 이상히 여기고,

“이때가 겨울이라. 오색 안개가 어리고 꽃이 피어 향내를 풍길 계절이 아닌데, 꿈처럼 이상도 하오.”

하고 청려장(靑藜杖)을 짚고 뒷동산에 올라서 주위를 살펴보니 모란포기에 새 잎이 피어나고 있는데, 그 밑에서 어린 소녀가 잠을 곤히 자고 있자 승상이 놀라서 부인과 시녀를 부르는 소리에 그 잠자던 소녀가 깨어서 울기 시작하니 장승상이 그 소녀 앞으로 가서,

“너는 어떤 아이인데, 이 동산에서 혼자 자고 있느냐?”

속햐은 반갑기도 하고 겁도 나서 울며 말하되,

“저는 부모를 잃고 거리로 헤매던 중에 어떤 짐승이 업고 가다가 여기에 두고 간 모양입니다.”

“네 나이가 몇 살이냐? 이름은 뭐냐?”

“나이는 다섯 살이요, 이름은 숙향이라 하옵니다. 우리 부모가 나를 바위틈에 숨겨 두고 가시면서, 내일 와서 다려가마 하시더니 오시지 않아서 울고 있습니다.”

장승상이 측은히 여기고 탄식하며,

“허어 부모 잃은 어린애로구나.”

하고 부인을 불러다 보이니, 그 소녀의 모습이 꿈에 본 아이와 똑같았으므로 기뻐하며 말하되,

“이것은 하늘이 우리에게 자식 없음을 가없이 여기시고 주신 아이이니, 집에서 기르고 싶소이다.”

하고, 안고 들어가 음식을 먹이고 옷을 갖추어 귀엽게 기르더라. 어느덧 이태가 지나서 일곱 살이 되니, 숙향의 얼굴은 일월 같고, 배우지 않은 글에 능통하고 수놓기를 잘하매, 승상부부의 사랑이 친딸 이상이더라. 이러구러 열 살이 되니, 점점 기이한 재주를 나타내서 어른이 믿지 못할 일이 많았으니, 부인의 사랑과 신임이 두터워서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맡기매, 숙향이 모든 일의 전후 곡절을 잘 살피고,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하며, 승상부부를 친부모처럼 지성으로 섬기고, 여러 남녀 비복을 인덕으로 부리었는데, 승상부부의 의향은 어진 가문에서 숙향의 배필을 구하여 가문의 후사(後事)를 맡기려고 기회를 기다리더라.

구러나 장승상 집에 오래 있던 사향이라는 계집종이 숙향에게 큰 불평을 품게 되었는데, 그 전에는 사향이가 이 큰 집의 살림을 도맡다시피 모든 일음 감찰하여 재물을 속여 내고 하여 제 집도 부자 부럽지 않게 지냈으나, 숙향이 가사를 맡은 후로는 떨어진 뒤웅박처럼세도도 실속도 없어서 항상 불평을 품고 숙향을 해칠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데 그럴 틈을 얻지 못한 사향은 그윽히 계략을 꾸미더라. 하루는 영춘당(迎春堂)에서 승상부부를 모시고 잔치를 베풀고 있을 때, 홀연 저녁 까치가 날아와 세 번이나 숙향을 향하여 울고는 날아가 버리므로, 놀란 숙향은 마음속으로 불길하게 생각하니라.

‘까치는 계집의 넋이라더니, 집안의 많은 비복 가운데 하필이면 내 앞에서 울고 가니 길조가 아니다.’

장승상도 까치의 방정맞은 짓을 불쾌히 느끼고 괴이하게 생각하였는데, 잔치를 마친 뒤에도 승상은 근심에 잠겨 있으므로 부인도 또한 적이 염려되어 이날 사향이 승상부부를 위하여 영춘당에서 잔치를 베풀고 봄경치를 구경한다는 소식을 듣고, 숙향을 해칠 좋은 기회로 이용하려고 결심하더라. 사향은 부인이 영춘당에 사서 없는 틈을 타서 부인 침소에 들어가서 옆방에 감춘어 둔승상의 장도(粧刀)와 부인의 금비녀를 훔쳐 내다가, 숙향의 방에 숨겨두고 二○여일 후에 부인이 동네 잔치 가려고 금비녀를 찾으니 그것이 감쪽같이 없어졌는데, 여러 곳을 샅샅이 찾았으나 나오지 않고, 그러는 동안에 승상의 장도까지 없어진 사실을 알게 되더라. 부인은 시녀들을 모두 불러놓고 어찌된 일이냐고 힐문하자, 이때 사향이 거짓 모른 척하고,

“마님, 무슨 일로 댁내가 이렇게 소요하옵니까?”

하고 물으니,

“큰 변고가 났다. 조정에서 대감께 내려 주신 장도와 내 혼인 때 빙폐(聘幣)하신 금봉채(金鳳釵) 비녀가 없어 졌으니, 이 두 가지는 가중의 큰 보배인데 이게 원일이냐?”

“저번에 숙향낭자가 마님 침소로 가기로 수상히 여겼삽는데, 혹시 그때 가져갔는지 알아 보옵소서.”

사향이 충복(忠僕)처럼 고자질하니,

“그럴 리가 있겠니, 숙향의 마음이 빙옥(氷玉)과 같거늘 그것을 속이고 가져다가 무얼 하겠느냐. 아예 그런 의심을 말아라.”

부인은 오히려 사향을 나무라니,

“마님 말씀처럼 전에는 숙향낭자가 그렇지 않더니, 요사이 구혼하는 기미도 있삽고 나이도 점점 차가매 자기 실속을 차리려고 그러한지, 저희들도 보기에 미안한 일이 많사오나, 마님이 하도 애지중지하시므로 감히 말씀드리지 못하였을 따름이옵니다. 조우간 숙향낭자의 방을 찾아보소서?”

부인은 설마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숙향의 침소로 가서 조용한 말로 물어보되,

“내 금봉채와 승상님 장도를 잃었으니, 혹시 네 그릇에 있지나 않은가 찾아보아라.”

깜짝 놀란 숙향은 의외의 부인 말을 원망스럽게 여기면서,

“소녀가 가져오지 않은 것이 어찌 제 방의 그릇에 있겠사옵니까?”

하고 모든 세간을 부인 앞에 내놓고 뒤져 보니, 과연 성적함 가운데서 금봉채와 장도가 들어 있었으니, 그때서야 숙향이 크게 놀라서 한 마디의 변명도 하지 못하거늘 부인이 성을 내며,

“네가 안 가져온 것이, 어찌 여기 들어 있느냐?”

책망하고 금봉채와 장도를 가지고 승상 앞으로 가서 사실을 고하기를,

“지금까지 우리는 숙향을 친딸같이 사랑하여 집안일을 모두 맡기고 혼인을 시켜서 후사를 위탁코자 하였더니, 역시 남의 자식은 할 수 없어요. 나를 이렇게 속이니, 어찌 분하지 않습니까?”

“허어 이런 것이 제게 소용도 없을 텐데 왜 가져갔을까?”

부인의 말에도 장승상은 믿으려 하지 않자 옆에 있던 사향이 풀반하여 말하되,

“숙향낭자가 요새 와서는 전과 달라서, 혹은 글을 지어서 남자에게도 주며, 부정한 일도 많사오니 그 변심을 저도 모르겠습니다.”

“에잇 망측스럽구나. 그 애가 과연 나이가 찼으니 외인을 통간(通姦)하는 모양이구나. 이대로 집에 두었다가는 불측한 환이 있을지 모르니, 빨리 내어 보냄이 마땅하다.”

이때 숙향은 자기 방에서 통곡하며 머리를 싸매고 누워 있었으니, 부인이 가서 조용히 타일러 말하되,

“우리 팔자가 기박하여 자식이 없어서 너를 얻은 후로 매사에 기특하여 친자식처럼 고이 길러, 장차 적당한 혼인을 시키고 우리 후사까지 맡길까 하였더니, 네가 상한(常漢)의 자식인지 행실이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도다. 네가 이 집의 후사를 맡으면 황금이 수십만 냥이나 되니 생계에 지장이 없을 테요, 또 장도와 금봉채가 갖고 싶으면 나에게 달라면 아끼지 않고 줄 내가 아니냐. 비녀는 여자의 패물이니까 혹 욕심이 날지도 모르지만, 장도는 너한텐 소용도 없는 물건인데 왜 훔쳐다 두었느냐? 나는 너하고 깊은 정이 들어서 이번 일은 용서하지만, 승상께서 단단히 노하시니 어찌하랴. 노염이 풀리실 때까지 너 입던 옷가지나 가지고 근처 마을집에 가 있거라. 추후로 내 가 승상께 조용히 말씀해서 도로 데려오도록 하마.”

하고, 슬픈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며 부인의 볼에 눈물이 비오듯이 흘렀다. 숙향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공손히 재배하고,

“제 전생의 죄가 중하와 다섯 살 때에 부모를 잃고, 동서로 구걸하여 밤이면 숲속에서 자고, 배곯고 지치옴이 어찌 한두 번이었겠읍니까? 불쌍한 인생이 부모를 찾지 못하고 밤낮으로 울고 지낼 적에, 하늘이 살리시려고 사슴에 태워다가 이 댁 동산에 두고 간 인연으로 승상님 양위의 사랑을 받고 금의옥식으로 기르셨으매 이 숙향이 몸이 죽더라도 그 은혜에 보답하여 제 힘껏 정성껏 섬기려 하였더니, 천만 뜻밖의 누명을 입었사오니 모두 제 팔자이오매 누구를 원망하오리까? 금봉채와 장도는 소녀가 가져온 바 결코 아니요, 귀신의 조화가 아니면 사람의 간교이오니 이제 발명하여 무엇하오리까? 마님 눈앞에서 죽사와 소녀의 백옥같이 청백한 마음을 표하고자 하옵니다.”

억울한 말을 마치자 천지를 부르고 통곡하다가 칼을 들어서 자결코자 하거늘, 부인이 그러는 숙향의 기색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억울한 사연의 말에 진정이 나타나 있음을 깨닫게 되더라. 가만히 생각컨대 어떤 간사스러운 자의 시기로 숙향의 총애가 미워서 한 모함인가 의심하게 되었는데, 부인은 다시 숙향을 달래며 말하되,

“네 말이 당연하니, 내가 승상께 말씀드려서 좋도록 할 것이니 조급하게 죽으려는 생각은 버려라.”

이때에 사향이 매우 조급한 태도로 와서 전갈하되,

“승상님의 명으로 마님께 전갈하옵니다. 숙향의 행실이 불측하기로 내쫓으라 하였는데, 뉘라서 내 명을 거역하고 지금까지 머물러 두었느냐고 어서 빨리 내쫓으라는 분부이옵니다.”

부인도 하는 수 없이 눈물을 흘리고 숙향에게,

“숙향아, 승상의 노기가 풀리실 동안만, 잠간 문밖의 늙은 상노집에 가서 기다려라. 내가 조용히 말씀해서 너를 데려오겠다.”

그러나 숙향이 사양하고,

“부인의 은혜는 백골난망이오니, 죽은 후에도 다 보답하지 못할 것이 원한이옵니다.”

하고 칼을 들어서 또 죽으려고 하거늘 부인이 황급히 숙향의 손을 꼭 잡고 울면서,

“너로 하여금 이렇게 괴롭게 한 것은 내가 경하게 말한 죄다. 내 마음을 살펴서, 죽느니 사느니 하는 것은 그만두어 다오.”

하고 애걸하다시피 무수히 달래었으나, 사향이 또 나서서,

“승상의 분부가 숙향이 사족(士族)의 자식 같으면 그런 행실을 할 리가 없지만, 기생의 자식인 모양이니 일시가 바쁘게 쫓아내라 하시며, 집에 두면 필경은 큰 화를 볼 것이니 일시도 더 집에 두지 말라 하셨습니다.”

부인은 더욱 당황해서 계집종 금향을 명하여 숙향의 의복을 내어 주라 하고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숙향이 울면서 비로소 참았던 말을 하더라.

“요전에 영춘당에서 저녁까치가 제 앞에서 세 번이나 울더니 이런 억울한 일을 다하오니, 이것은 하늘이 소녀을 죽이심이니, 어찌 천의(天意)으 거역하오리까. 다만 부모와 이별하올 적에 옥지환 한 짝을 주었으니, 그것이나 제 부모 본 듯이 가져가겠나이다. 의복은 갖다 무엇하오리까.”

부인은 그 참혹한 모양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승상한테로 가서 말하되,

“내가 이제서야 생각이 나오이다. 금봉채와 장도는 내가 갖다가 숙향의 방에 두었던 것이었는데, 정신이 없어서 그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탓으로 이제 숙향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서 쫓아 내라 하시니, 숙향이 저도 모르는 일이라 변명할 길이 없어서 죽으려 하니, 이런 잔인한 일이 어디 있겠읍니까. 승상은 내 잘못으로 생긴 이 일을 용서하시고 다시 돌려 생각하소서.”

“허허 당신도 노망했소. 당초에 그런 줄 알았으면 가엾은 숙향에게 왜 억울한 누명을 씌워서 내쫓겠소. 사실이 그러하면 더욱 숙향이가 애처러워 어찌할지 모르겠소.”

하고, 잠시 후에는 도리어 부인을 위로해서 조용한 말로,

“내가 지난밤에 꿈을 꾸었는데, 앵무새가 복사꽃 가지에 깃들였는데 한 중이 와서 도끼로 꽃가지를 배어 버리매, 앵무새가 놀라서 달아났소. 이것이 무슨 징조인지 모라서 오늘 종일토록 마음의 보배를 잃은 듯하여 매우 울적하니, 당신은 술상을 갖다 나를 위로해 주시오.”

“그런 꿈을 꾸셨어요?”

하고, 부인은 시녀를 시켜서 주찬을 차려다가 승상의 울적한 마음을 위로하더라.

이리하여 승상과 부인이 숙향을 용서하고 다시 집에 두려는 눈치를 알고, 사향은 곧 숙향의 방으로 달려가서,

“승상께서 너를 그대로 두려는 마님을 대책하시고, 나더러 시급히 너를 내보내라 하시니 어서 나가거라.”

하고, 성화같이 독촉하더라. 숙향이 울면서,

“부인께 하직인사나 여쭈고 가겠다.”

그러자 사향이 큰 소리로 꾸짖되,

“흠, 염치도 좋구나. 좋은 의식에 싸여 있으면서 그런 배은망덕의 몹쓸 짓을 하고도, 지금 또 무슨 면목으로 마님께 하직인사를 드리겠다는 거냐? 마님 역시 승상님 꾸중을 들으시고 너에게 노해 게시니 다시는 너를 보려 하지도 않으실 거다. 어서 빨리 이 댁에서 나가거라.”

하고 숙향의 손목을 잡고 끌어 내었으므로, 숙향은 부인에게 하직인사도 못하고 쫓겨 가는 것이 더욱 망극해서, 사향의 손을 뿌리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손가락을 깨물어서 하직인사의 사연을 혈서로 쓰고 눈물을 흘리며 나오니, 사향의 성화 같은 재촉이 발이 땅에 붙지 못하도록 몰아치매 천지가 망망하여 동서를 분별할 겨를조차 없더라. 어디로 가야 좋을지 방향을 모르고 어리둥절하자 사향이 또 표독스럽게,

“승상께서 네가 이 댁 근처에도 있지 못하게 하라신다. 썩 먼 곳으로 가서 그림자도 다시는 보이지 않도록 해라.”

하고 등을 왈칵 밀어서 대문 밖으로 밀어내고 등뒤에서 대문을 덜커덕 닫아 버렸으니, 숙향의 눈앞이 캄캄해서 다만 부모를 부르며 정처없이 갈 적에 정든 승상의 집을 자주 돌아다 보며 그 마을을 떠나 가니라. 얼마쯤 간 곳에 큰 물이 앞을 막고 있었으므로 숙향은,

‘마침 잘 되었다. 이 강물에 빠져 죽자.’

하고, 강가에 가서 하늘을 향해서 재배하고,

“박명한 이 숙향이는 전생의 죄가 중하와, 五세 때 부모를 잃고 낮이면 거리로 방황하다가 밤이면 숲속에 의지하여 자오니, 외로운 단신이 의탁할 곳 없어서 눈물로 지내다가, 천행으로장승상댁에 의탁하여 태산 같은 은혜를 입삽고 일신이 안전하옵더니, 참혹한 누명을 쓰고 축화(逐禍)을 입사오매, 이 이상 차마 더 살 수 없어서, 부모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한 슬픔을 머금고 물에 이 몸을 던지오니, 천지신명은 이 불행한 숙향이의 누명을 벗겨 주시옵소서.”

하고 슬피 우니, 그 광경을 왕래하는 행인들이 보고, 눈물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숙향은 한 손으로 치마를 추켜잡고, 또 한 손으로 옥지환을 쥐고서 강물에 뛰어들었는데, 수세(水勢)가 급한데다가 풍랑이 일어서 행인이 구하려 하였으나 구하지 못하고, 물에 빠져 부침(浮沈)하며 떠내려 가는 것을 탄식할 뿐이니라.

숙향이 물속에서 허위적거릴 때, 문득 물 가운데서 매판만한 무엇이 나타났으므로 숙향이 그 위에 기어 오르자 편하기가 마치 육지와 같았으니, 이윽고 오색의 그름이 일어나는 곳에서 양의 머리를 가진 소녀들이 옥피리를 불면서 연엽주(蓮葉舟)를 급히 저어 와서 말하기를,

“용녀(龍女)는 어서 그 낭자를 모시고 빨리 배에 오르시오.”

하고 권하니, 매판이 변하여 고운 여자가 되더니 숙향을 안고서 배에 오르매, 소녀들이 숙향에게 절하고,

“낭자께서는 그 귀중한 천금지신을 가볍게 버리려고 하십니까? 우리 항아(姮娥)의 명을 받자와 낭자를 구하라 하옵기로 이리로 오더 도중에서 옥화수(玉和水)의 소녀들이 술레놀이 하자면서 잡고 놓지 않았기 때문에 진작 오지 못하였더이다. 진실로 용녀가 아니었으면 구하지 못하여 항아의 명을 어길 뻔하였습니다.”

하고 또 용녀에게 사례하여 말하기를,

“용녀는 어디서 와서 이렇게 낭자를 구하였는가?”

“네, 그 전에 사해용왕(四海龍王)이 우리 수궁에 와서 잔치할 때에 내가 사랑하는 시녀가 옥그릇을 깨었으나 만일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고하지 못하였더니, 마침내 그것이 발각되어서 부왕(父王)이 매우 놀라셔서 저를 반하물로 내쫓았었는데, 마침 어망에 쌓여서 어부에게 잡혔던 일이 있사옵니다. 천행으로 김상서를 만나서 구함을 얻고 그 은혜를 갚을까 하였으나 수부(水府)와 인간이 다른고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차, 이제 부왕이 옥황상제께 조회(朝會) 하시고, 옥황상제의 말씀을 듣사오니, 월궁소아(月宮小我) 천상(天上)의 죄를 얻고 인간 김상서의 딸이 되어 반야산의 도적에게 죽을 액을 겪고, 화재도 만나고, 이후 낙양 옥중에서 사형을 지낸 다음에야 귀하게 되실 것이매, 그 월궁소아가 죽지 않게 하라고 물신령에게 분분하셨나이다. 그래서 제가 김상서의 은혜를 갚고자 그 따님인 월궁소아를 구하고자 자원해 왔사옵니다. 이제 선녀들과 함께 안전한 배에 계시게 되었으니 저는 안심하고 가옵니다.”

하고 숙향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물 속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아무것도 모르는 숙향은 그 구해주고 가려는 여인에게 묻기를,

“당신은 물 위를 마치 평지같이 다니니 누구신지요?”

“저는 동해용왕의 셋째 딸로서 이 표진강 용왕의 아내이온데, 예전에 당신의 부팅께서 저를 구해 주신 은혜를 갚으려고 왔다가 가옵니다.”

“아, 그렇습니까. 나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어서 의탁할 곳이 없어 남의 집의 시녀가 되었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분해서 이 물에 빠져 죽으려 하였더니, 이렇게 구제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러자 용궁의 여인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당신은 인간의 화식(火食)을 먹어서 우리를 잘 모르시는군요.”

하고, 옆에 찼던 호로병(胡虜甁)을 기울여서 차를 따라서 권하여 주면서 말하기를,

“이 차를 마시게 되면 아시게 되오리다.”

숙향이 그 차를 받아서 마시니, 정신이 상쾌해져서 천상의 옛 기억이 역력해져서, 자기가 분명히 월궁소아로서 옥황상제를 모시고 있다가, 사랑하는 태을진군(太乙眞君)과 글을 지어 창화(唱和)하고, 월영단(月靈丹)을 훔쳐서 태을진군에게 준 죄로 인간세계로 귀양갔던 기억이 역력하더라. 그리고 연엽주를 저어서 자기를 구하려고 달려온 선녀 같은 두 소녀는 월궁에서 자기가 부리던 시녀인 줄도 알게 되매, 서로 붙들고 대성통곡하여 마지않더라. 소녀들은 숙향을 위로하였으나, 숙향은 그 전의 하늘에서 시녀로 부리던 옛날 소녀들을 선녀들을 선녀로 대접하고 공손한 말로,

“우리 부모는 봉래산의 선관 선녀로서 옥황상제께 득죄하고 인간으로 내려와서 딸을 잃고서 간장을 녹이는 고통으로 천상의 죄를 속죄하도록 하심이니, 딸된 나로서 어찌 한이 되지 않으리까. 장승상 집에는 一○년간의 연분이 있으나, 더 있지 못하고 쫓겨 나왔습니다.”

“그 집의 사향이란 계집종은 당신을 모해하여 누명을 씌운 죄로, 항아께서 옥황상제께 고하여 이미 벼락을 쳐서 죽였으므로, 당신의 억울한 누명은 장승상부부도 잘 알게 되었겠지요. 그래서 당신의 뒤를 찾아 강가에까지 와서 찾다가 그냥 돌아갔으니, 이제 당신은 액운을 세 번 지낸 셈입니다. 앞으로도 두 번의 액운이 남아 있으니 조심하소서.”

“아직도 무슨 무슨 액이 있다는 말씀이오?”

숙향은 깜짝 놀라 묻더라.

“노전(盧田)에 가서 화재를 보시고, 낙양옥중에서 부친께서 죽을 액을 겪으시고, 그 뒤에 마침내 태을진군을 만나서 부귀영화를 누리실 것입니다.”

“아아, 나는 이미 지낸 액도 천지망극한데, 앞으로도 두 번이나 액이 있다 하니, 어찌 살기를 바라겠소. 장승상 부인이 나를 다시 생각하시리니 다시 그 댁으로 가서 액을 면할까 하오.”

“액운은 이미 하늘이 정하신 바니, 장승상 집으로 가서도 면하진 못하리다. 태을을 만나지 못하면 승상부인의 힘으로는 부모님 만나기가 아득하외다. 그러나 태을이 계신 곳이 三천여 리나 되는 먼 길이외다.”

“태을은 누구이며, 이승의 인간의 성명은 무어라 하는지요?”

“항아님 말씀을 듣사오니, 태을이 낙양 북촌리의 위공(偉功)이ㅡ 자제가 되어 일생 부귀를 누리게 되었다 하옵니다.”

숙향은 그 말을 듣고 탄식하며,

“월궁에서 서로 같은 죄를 짓고서, 그는 어찌 부귀가 극진하고, 나는 어찌 이토록 고생을 겪어야 하는고. 더구나 그 태을 있는 곳이 여기서 三천 리라 하니, 그를 만나지 못하면 누구를 의지하며 그리운 부모를 언제나 만나뵈올까?”

하고 눈물을 비 오듯 흘리니라. 그러자 선녀가 위로하여 말하되,

“그것은 근심 마시오. 육로로 가면 一년을 가도 못가지만, 이 연엽주를 타시면 순식간에 득달할 것이오니, 또 천태산 마고선녀(麻姑仙女)가 당신을 위해서 인간으로 내려와서 기다린 지 오래매, 의탁할 곳이 자연 있으니 염려 마시오.”

하고, 배를 순풍에 놓으니, 빠르기가 살과 같더라. 이윽고 어떤 곳에 배가 머무르고, 선녀들이 숙향에게,

“뱃길은 다 왔으니, 여기서 내려서 저쪽 길로 가시오. 그러면 자연 구할 사람이 있을 것이옵니다.”

하고, 동정귤(洞庭橘) 같은 과실을 주면서 시장할 때에 먹으면 요기가 된다고 말하며 이별을 슬퍼하니라. 숙향이 배에서 내려 보니, 선녀들은 배와 함께 간 데 온데 없이 홀연히 자쥐를 감추고 없었으니, 숙향은 신기하게 느끼고 공중을 향하여 사례하고, 선녀들이 가리킨 길을 향하여 걷더라. 이윽고 배가 고파서 과실을 먹으니 배는 부르나, 배 위에서 기억되던 천상의 이력은 아득히 잊혀지고, 인간으로서 고생한 일만 회상되니, 숙향은 스스로 생각하되,

‘내 몸이 이만큼 장성한 여자라, 새옷을 입고 큰 길로 가다가는 욕을 볼지 모르겠다.’

하고, 촌가에 들러서 고운 비단옷을 헌옷과 바꾸어 입고, 얼굴에는 재와 흙을 바르고, 한 눈이 멀고 한 다리 저는 병신 거지 시늉으로 길을 걸어가니, 길가에서 그런 숙향의 꼴을 보는 사람마다,

“젊은 여자가 불쌍하게도 병신이구나.”

하며. 희롱하려고 들지는 않더라.

각설하고. 이대 장승상의 취기가 거나하자,

“내 불찰로 숙향에게 애매한 누명을 씌워서 내보냈으니 얼마나 슬퍼하겠소. 어서 불러 오도록 하시오.”

승상의 말에 부인이 크게 기뻐하고 시녀들에게 숙향을 불러 오라고 명하니, 사향이 승상부부의 눈치를 알아채고 황급히 들어오면서 수선을 피우며, 손뼉을 치면서,

“우리는 그런 줄 몰랐더니, 그럴 데가 어디 있어요?”

부인이 깜짝 놀라서 사향에게 묻기를,

“넌 무슨 일로 그렇게 경망스러우냐?”

“저희들은 숙향낭자를 양반집 출생으로 속았으나, 알고 보니 비천한 장사치 딸이었습니다. 아까 마님께서 승상 계신 곳으로 가신 사이에 제 방에 들어가서 무엇인지 싸 가지고 줄달음질로 도마쳐 가기에, 저는 그 가져가는 물건을 알기 위해서 따라 갔더니, 어찌나 빨리 달아나는지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무리 죄진 몸으로 도망치기 바쁘더라도, 은혜 입은 마님께 하직인사라도 여쭈고 가는 것이 도리가 아니냐고 물었더니, 글쎄 그년 보십시오. 함부로 종알거리는 말투가, 마님이 저를 구박해서 내쫓는데 무슨 정이 있어서 하직인사를 하느냐고 발악을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는 어떤 행인 남자를 따라 가면서 온갖 욕과 비방을 하였습니다.”

부인이 사향의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면서, 그 애한데 직접 물어 볼 일이 있으니, 어서 빨리 불러 오도록 하라고 하니, 사향은 하는 수 없이 대답하고 밖으로 찾는 체하고 나갔으나, 마을 집에 가서 앉아 있다가 시간을 보내고 돌아와서 천연스럽게 거짓말로,

“벌써 멀리까지 간 것을 제가 죽자하고 쫓아가서 마님 말씀을 드리고 데려오려고 하였으나, 숙향이가 입을 삐죽이면서, 내얼굴과 재주로 어딜 간들 그만 의식을 못 얻겠느냐고 코웃음을 치면서, 악소년들과 정답게 손을 잡고 잡스러운 희롱을 하면서 가 버렸사옵니다. 저는 비록 천한 몸이오나 아직까지, 그런 행실을 보도 듣도 못하였습니다.”

하고, 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체하니라.

이때 대문 밖에서 누비옷 입은 중이 곧장 내당(內室)으로 들어오니, 얼른 보아도 태도가 비상하여 보통 산승(山僧)이 아니라, 승상이 부인을 옆방으로 보내고 몸을 일으켜서 중을 맞아서 당상으로 오르게 하니라.

“선사(禪師)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소승은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 승상에 옥석(玉石)을 가리려고 왔소이다.”

승상이 아직 대답도 하기 전에, 사향이 쪼르르 달려 나와서,

“숙향은 본디 빌어먹는 걸인이었는데, 승상과 부인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댁에 두고 금의옥식으로 길렀사오나, 행실이 불측스러워서 귀중한 보배를 훔쳐서 감추었다가 드러났으므로, 그뿐 아니라 그런 죄로 댁에서 쫓겨 나갈 때도 이 댁의 은공을 모르고 도리어 원수로 악담을 한 년인데, 임자는 어떤 중놈이기에 숙향이의 부축을 들고 감히 재상댁 내당에 들어와서 숙향을 위하여 무슨 시비를 따지겠다는 거요? 대감님, 이 중놈을 노복에게 잡아 내다가 쳐죽이도록 하십시오.”

중이 허허 웃고 말하되,

“승상 내외분은 속일 수 있으나, 하늘조차 속일소냐! 네가 승상댁 가사 맡아 볼 적에 온갖 것을 도적질해서 네 집 재산을 만들다가, 승상 내외분이 三월 三일에 영춘당에서 잔치하는 사이에, 네가 부인 침소에 들어가서 금봉채와 장도를 훔쳐다가 숙향의 방에 숨겨 두고, 숙향이가 도둑질한 것처럼 꾸미지 않았느냐. 그런 간계로 숙향을 부인께 모함하여 승상 내외분을 속이고 허무한 말로 이간중상하여 마침내 숙향을 내쫓고, 그 후에 부인께서 숙향의 억울함을 동정하여 숙향을 불러 오라 하시니, 너는 그러는 체하고 마을 집에 가서 앉았다가 돌아와서, 또 맹랑한 말로 승상을 속이지 않았느냐. 처음부터 끝까지 네 간악을 감추고 누명을 숙향에게 씌웠으나, 승상과 부인께서는 네 간악을 깨닫지 못하셨거니와 하늘이야 어찌 속이겠느냐?”

하고 소매에서 작고 붉은 물건을 꺼내서 공중으로 던지니 즉시로 뇌성벽력이 진동하며, 갑자기 큰 비가 쏟아지며 천지가 암담하니, 온 집안이 황황망조하여 어쩔 줄을 모르게 되니라. 노승이 뜰에 내려와서 하늘에 무어라고 하매, 이윽고 공중에서 집동 같은 불덩어리가 내려와서 사향을 벼락치니, 이 통에 온 집안 사람들이 기절하였다가 한참 만에 먼저 정신을 차린 부인이 울면서,

“사향이는 제 죄로 천벌을 받았거니와, 숙향은 어디로 가서 누구에게 의지하고 있는가? 불쌍하다. 무죄한 숙향은 필연 길로 방황해 다니면서 나를 생각할 거다. 내가 소홀히 생각하고 또 사향의 간악한 말을 곧이 듣고서 숙향을 내쫓았으니 모두 내 불찰의 탓이다.

하고 울면서 숙향의 방으로 들어가서 본즉, 방안이 고요한데 오직 숙향의 혈서 한 장만 남아 있었는데, 그 글의 사연을 보니,

‘숙향은 五세 때에 부모를 잃고 동서로 유리하다가 장승상 댁에 一○년을 의탁하니 그 은혜 하해(河海) 같도다. 일조에 악명을 얻으니 차마 세상에 있지 못할 터이라. 유유창천이여, 나를 가엾이 여겨서 누명을 벗기소서.’

이렇게 피로 써 있었느니라.

부인은 더욱 탄식하면서, 숙향이는 필경 죽었구나 생각하고, 승상에게 가서 호호하기를,

“숙향이는 사향의 모함으로 꼭 죽었을 것이니, 그런 잔인할 데가 없사옵니다.”

“당신은 어찌 숙향이가 꼭 죽었으리라고 단정하오?”

승상도 뉘우치면서 부인을 위로하려고 하였으니, 부인이 그 증거로서 숙향의 혈서를 내 보이자 승상도 측은히 여겨 마지않았으며, 때마침 승상의 당질 되는 장원이 왔다가 이 말을 듣고서,

“어제 표진강가에서 멀리 보았는데 그 소녀가 숙향이었던 모양입니다.”

하고 말하니, 장승상은 곧 노복을 보내어 찾게 하였으나 숙향의 종적은 묘연하고, 그곳 사람들의 말이 벌써 죽었다고 하므로 그냥 돌아와서 그대고 고하니, 부인이 더욱 슬퍼서 실성통곡하면서 숙향의 그 화월(花月)같은 얼굴과 미옥(美玉) 같은 음성이 이목(耳目)에 선해서 잊지 못하여 음식을 전폐하고 주야로 슬퍼하자 승상이 근심한 나머지, 숙향의 화상을 그려서 위로하고자 유명한 화가를 청해 오라 하니라. 이 말을 들은 장원이,

“숙향이 열 살 때에 저를 업고서 수정(水亭)에 가서 구경할 때, 장사(長沙) 땅에 있는 조적이라는 화가가 숙향의 얼굴을 보고서, 자기가 경국지색(傾國之色)을 많이 보았으나 이 처자(處子) 같은 미인은 보지 못하였다 면서 숙향의 얼굴을 그려 갔사오니, 그 사람에게 그 그림을 구하면 좋을까 하옵니다.”

“그럼 네가 그에게 가서 구해 오라.”

승상이 장원을 조적에게 보냈으나, 그는 벌써 그 화상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고 대답하니라. 장원이 돌아와서 승상에게 그대로 고한즉, 승상은 곧 황금 一○○냥을 주면서 그 화상을 물러 오라고 조적에게 당부하여 물러 오게 하니라. 승상부부는 그 화상을 받고서 숙향을 만난 듯이 반갑고 슬퍼서 눈물을 흘려 마지 않으며 침실에 장식하고 조석으로 밥상을 차려 놓고 혼백을 위로해 주니라.

한편 숙향은 절름발이 걸음으로 걸어서 한 곳에 이르르매, 하늘에 닿을 듯이 높은 갈대가 무성한 끝도 없는 갈대밭이 앞을 막고 있었으니, 마침 날이 저물어서 갈대 숲에 의지하여 자는 둥 마는 둥하고 있다가 어느덧 밤중이 되어서 큰 폭풍이 불면서 난데 없는 불길이 충천하매, 숙향이 어쩔 바를 몰라서 하늘을 우러러 재배하고 기도하니라.

“제 전생의 죄가 중하와 이승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천만 가지 고초를 겪으며 부모의 얼굴이나 다시 한번 만나 보려고 구차한 목숨을 부지하여 하였삽더니,이 땅에까지 와서 화재로 죽게 되었사오니, 명천(明天)은 살피사 부모의 얼굴이나 한번 보고 죽게 하여 주십시오.”

정성껏 기도하자, 홀연히 한 노인이 주장을 짚고 와서,

“너는 어떤 소녀인데 이 밤중에 참화를 만나서 고생하느냐.”

“저는 난중에 부모를 잃고 의탁할 곳이 없어서 동서로 유랑하옵다가, 길을 잘못 들어 이 땅에 와서 재화를 만나 죽게 되었사오니, 노인장께서 저를 구해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아도 너를 구하려고 내가 왔으니, 화세가 급하기로 입은 옷을 다 벗어서 이곳에 놓고 몸만 내 등에 업혀라.”

숙향이 노인의 말대로 입었던 옷을 다 벗어 버리고 노인의 등에 업힐 순간 불길이 벌써 등에 화끈화끈하니라. 그러나 노인이 소매 속에서 부채를 꺼내서 부치니 불길이 가까이 번져 오지 못하니라. 그리하여 화재를 면한 숙향은 노인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사례하려고 묻기를,

“필시 신선이신 노인장께서는 어디 계시오며 존함은 누구라 하시옵니까?”

“내 집은 남천문(南天門) 밖이고, 부르기는 화덕진군(火德眞君)이라 하거니와, 네가 어찌 四천 三○○리나 되는 나 있는 고장을 지나가겠느냐?”

하고 홀연히 간데 온데 없이 사라져 버리니라. 숙향이 공중을 향하여 사례하였으나 젊은 여자로서 발가벗은 알몸으로 길을 갈 수 가 없어서 망연히 울고 있을 수 밖에 없었더니, 그때 홀연히 한 노파가 광주리를 옆에 끼고 지나가다가, 숙향을 보고 옆에 앉아서 묻기를,

“너는 어떤 처녀인데 해괴하게 길가에 앉아 있느냐? 너 어디서 큰 죄를 짓고 이 꼴로 내쫓긴 것이나 아니냐? 남의 재물을 도적질하다가 내쫓겼느냐? 불한당을 맞아 옷을 약탈당하였느냐?”

“저는 본디부터 부모가 없는 고아라, 부모에게도 내쫓긴 일은 없으나 자연 곤궁해서 이 꼴이 되어 오도가도 못하고 앉아 있습니다.”

“본디부터 부모가 없으면 세상 사람이 모두 네 부모로구나. 네 부모가 반야산에서 너를 보리고 갔는데 내쫓긴거나 무엇이 다르랴. 장승상 집에서 계집애 종과 금봉채 연고로 그 집을 나왔으니, 쫓겨난 것과 무엇이 다르나?”

하고, 무수히 조롱하기로 숙향은 자기의 과거사를 자세히 아는 노파에게 놀라서,

“할머니는 어떻게 내 과거를 그리 자세히 알고 있나요?”

“남들이 말하기로 듣고 알았으니, 너는 지금부터 어디로 갈 생각이냐?”

“갈 곳이 없어 방황하고 있습니다.”

“나는 자식 없는 과부니, 나하고 같이 가서 살지 않겠니?”

하고, 노파는 숙향의 마음을 떠 보니, 숙향은 반갑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불안도 해서 울면서 간청하되,

“할머니가 끝까지 저를 버리지 않으시면 따라 가오리다. 그러나 제가 벗은 몸이요, 또 배가 고파 민망하옵니다.”

그러자 노파가 광주리에서 삶은 나물 한 뭉치를 내어 주면서 먹으라 하므로 숙향이 그것을 받아 먹었는데, 이상한 향내가 나고 배가 부르며 정신이 상쾌하더라. 노파가 웃으면서 자기 옷 한 가지를 벗어 입히고 어서 같이 가자고 재촉하니, 숙향이 노파를 따라서 두어 고개를 넘어 가니, 마을이 정결하고 집집마다 부유하게 사는 고장이더라. 노파는 그 마을에서 제일 작은 집으로 들어가면서 본즉, 집은 작으나 매우 정결하고 아담하더라. 숙향이 이 집에 온 지 반달이 되도록 종시 병자인 체하고 있었더니, 하루는 노파가 타이르기를,

“너를 보니 정말로 병든 사람 같지 않으니 나를 속이지 말라.”

숙향은 웃기만 하고 대답을 아니 하니라.

“내 집은 본디 술집이라 마을 사람들이 자주 출입하는데, 네가 그렇게 더럽게 하고 있으면 안되겠으니 얼굴이나 씻고 있어라.”

숙향이 오래 있어보았으나, 이 술집이라는 집에 출입하는 남자는 없고 여자만 출입하고 있었으니, 숙향이 얼굴 단장을 다시 하고 의복을 갈아입고 수를 놓고 있을 때, 외출했던 노파가 돌아와서 아주 고와진 숙향을 보고 퍽 기뻐하며 말하되,

“어여쁜 내 딸아. 전생에 무슨 죄로 광한전을 이별하고 인간에 내려와서 그처럼 고생을 겪느냐?”

“할머니가 나를 친자식처럼 여기시니, 어찌 숨길 수 있습니까. 난중에 부모를 잃고 의탁할 데가 없어서 유리하하옵더니, 사슴이 업어다가 장승상집 뒷동산에 두고 가오매, 그 댁이 무자하여 나를 친딸같이길러 주시더니 종계집 사향이란 애가 나를 모해하여 승상 내외께 참소되어 내쫓기고, 그 누명을 씻지 못하여 표진강 물에 빠져 죽으려 하였삽더니, 그대 연꽃 놀이하던 소녀들의 그함을 받고, 처녀의 단행이 두려워서 거짓 병신꼴을 하고 정처없이 가다가 화재를 만났으나 요행히 화덕진군의 구원을 받았으며, 그 직후에 할머니를 만나서나를 친딸같이 사랑하여 주시니, 나도 친어머니처럼 아옵니다.”

노파가 이 말을 듣고 새삼스럽게 숙향에게 절하고, 낭자의 마음이 진정 그렇가 하고 그 후로 더욱 사랑하니라.

숙향은 본디 총명하여 배우지 않아도 매사에 모를 것이 없으니, 수만 놓아서 팔아도 생계가 족하였으므로, 노파가 더욱 소중히 여기니라. 어느덧 이 집에 온 뒤로 해가 바뀌어서 춘삼월 보름날에 노파는 술 팔러 나가고 숙향이 홀로 집에서 수를 놓고 있을 때 파랑새가 날아와서 매화가지에 앉아 슬피 울고 있었는데, 숙향이 심란하여 혼자 탄식하되,

“새도 나처럼 부모를 잃고 우는가.”

하고, 창에 의지하여 잠이 들었더니, 문득 그 파랑새가 숙향에게 속삭여 말하니라.

“낭자의 부모가 모두 저기 계시니 나를 따라 가시죠.”

반가와서 잠을 깨어 그 파랑새를 따라서 한 곳이 이르르니, 연못가 백사장에 구슬로 대를 쌓고 산호기둥의 집을 지었는데, 호박(琥珀) 주추와 집의 모든 장치가 오색 구름같이 아로 새겨져 광채가 찬란하여 눈이 부셔서 똑바로 보지 못할러라. 숙향이 그 놓은 집을 우러러 본즉 전각(殿閣) 위에 황금의 큰 글자로 요지(瑤池) 보배라 씌어져 있었는데, 하도 집이 엄숙하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문 밖에 서 있을 때, 층층대에서 오색구름이 일어나고 향기가 진동하며, 무수한 선관과 선녀들이 혹은 학을 타고 혹은 봉황을 타고 쌍쌍이 집안으로 들어가는데, 채운(彩雲)이 일어나며 대룡(大龍)이 황금수레를 끌고 가는데 이것은 옥황상제의 연(輦)이라. 그 뒤에는 석가여래가 오신다 하고 오백나한(五百羅漢)이 차례로 시위(侍衛)하여 오는데, 각종 풍악과 향내가 진동하니라. 여러 행차가 지났으나, 숙향을 본 체하는 이가 없더니 이윽고 한 덩이 구름이 일어나며 백옥교자에 한 선녀가 연꽃을 들고 단정히 앉으니라. 이것은 월궁항아의 행차라. 수레 위의 항아가 숙향을 알아보고,

“소아야, 너를 여기서 보니 반갑구나. 인간고생이 어떠하더냐? 어서 나를 따라 들어가서 요지를 구경하고 가거라.”

숙향이 파랑새를 앞세우고 항아를 따라 들어가니, 그 집의 형용이 찬란할 뿐 아니라, 팔진경장과 육각난 곳에 한 보살이 젊은 선관을 뒤에 거느리고 들어와서 옥황상제께 인사를 드리자 상제가 그 선관에게,

“태을아, 어디 가 있었느냐? 반갑다. 그래 인간생활이 재미있더내?”

하고 물으셨다. 그 다음에 항아의 인도로 소아[淑香]를 만나 보신 상제께 항아가 아뢰되,

“이 소아는 이미 죽을 액을 네 번 지냈으니 그만 천상의 죄를 용서하시고, 석가여래에게 수한(壽限)을 점지하시되 七○을 점지하옵소서.”

“칠성(七星)에 명하여 자손을 점지하되 二자 一녀를 점지하라.”

상제가 분부코, 이어서 남두성(南斗星)에 명하여 복록을 점지하였더라. 그러자 남두성이 상제께 여쭈되,

“아들은 정승하고, 딸은 황후가 되게 하나이다.”

다음에 상제는 소아에게 반도(蟠桃) 두 개를 주고 계화(桂花) 한 가지를 주시매, 숙향이 옥쟁반 위의 반도와 계화를 받아들고 내려와서 태을에게 주자 태을 선관이 땅에 엎드려서 두 손으로 받아들고 숙향을 눈주어 보았으므로, 숙향이 당황해서 몸을 두루 가누는 바람에 손에 낀 옥지환에 박은 진주알이 빠져서 떨어지니, 태을이 몸을 굽혀서 그 진주를 주워 손에 쥐었더니, 숙향이 부끄러워서 돌아와서 어쩔 줄 모르는데, 문득 노파가 술을 팔고 집으로 돌아와서,

“숙향낭자, 무스 잠을 이토록 자고 있나요?”

그 소리에 숙향이 꿈을 깨었으나 오지의 풍류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히 남아 있느니라.

“숙향낭자, 꿈에 본 천상의 광경이 어떠하던가요?”

“내가 꾼 천상의 꿈을 어떻게 알았어요?”

숙향이 깜짝 놀라서 물으니,

“파랑새가 낭자를 인도해 갈 적에 나에게 알려 주었기로 이미 알고 있었지요.”

숙향이 이상히 여기면서 꿈이야기를 자세히 아뢰니,

“그런 광경을 보고 그냥 지내면 잊어버리기 쉬우니, 낭자의 재주로 그 찬란한 광경을 수 놓아서 기록해 두시오.”

숙향이 좋은 생각이라고 곧 수 놓아서 보인즉,

“어쩌면 이렇게도 재주가 놀라울까?”

하고 노파가 대단히 칭찬하니라. 그리고 훗날에 장에가서 팔면 큰 돈이 될 거라고 기뻐하였으나 숙향은 의아히 여기고,

“이 경치는 천금으로도 싸고, 이 공력은 백금으로도 싸지만, 이 진가(眞價)를 누가 능히 알아 볼는지요?”

하고, 그 후에 장에 가서 팔려고 하였으나 과연 아무도 사려고 하지 않아서 단념하려던 끝에, 그림을 그리는 조적이 그런 것에 조예가 깊어 진가를 알기 때문에 반기면서 묻기를,

“이 수를 누가 놓았느뇨?”

“우리집 어린 딸이 놓았습니다.”

노파가 숙향을 자기 딸이라고 대답하니라. 조적은 이어서 묻기를,

“할머니는 어디 살며 누구신가요?”

“나는 낙양 동촌리 화정술집의 할미인데, 이 수는 딸이 놓은 진품이라 만금도 쌉니다.”

조적은 흥정 끝에 五○○냥으로 사 가니라. 노파가 그 돈을 답아 가지고 집에 돌아와서 숙향에게 수 판 이야기를 하자,

“인간에도 하늘 경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군요?”

하고 숙향이 감동하여 말하니라.

조적은 큰 돈을 주고 수를 샀으나 제목이 없으므로, 명필에게 제목 글씨를 받아서 천하 보물를 삼으려고 두루 수소문한 끝에, 낙양 동촌리의 이위공의 아들이 글과 글시로 이태백과 왕희지를 무색케 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가니라. 병부상서(兵部尙書) 이위공은 젊어서부터 문무겸전(文武兼全)하여 명망이 사해(四海)에 떨치매, 황제가 칭찬하고 위공을 봉하고 국사를 맡기려 할 적에 그는 후래(後來)의 화가 두려워서 거짓 병들었다 하고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황제는 그의 충성과 재주를 아끼시어 마지않으니라. 위공은 고향으로 돌아와서 농업에 힘써서 가세가 넉넉하나 다만 슬하에 혈육이 없어서 슬퍼하더니, 어느해 七월 보름날 밤에 부인과 더불어 완월루(玩月樓) 달구경을 하니라.

“내 공과 부귀가 조정에 으뜸이로되, 자녀가 없어서 후사를 의탁할 곳이 없으니, 조상의 제사를 누가 이어받들겠소? 타문의 숙녀를 취하여 자식을 볼까하니 당신은 서운히 여기지 마시오.”

이위공은 자기 부인의 양해를 구하니, 부인은 그 말을 듣고 긴 한숨을 쉬며 탄식하니라.

“제사 박복하여 무자하니, 여러 부인을 맞으시더라도 어찌 불평을 하오리까.”

그런 일이 있은 후에 부인은 부친인 왕승상의 친정으로 가서, 그런 사연을 자세히 고하되, 왕승지는 말하기를,

“무자한 죄는 죄 중에서 가장 큰 죄다. 내가 들으니 대성(大聖寺) 부처가 영검이 장하다 하니, 네가 가서 정성껏 빌어 보라.”

왕승상의 말을 기쁘게 들은 왕씨는 길한 날을 택하여 목용재계하고 친히 저에 가서 불전에 정성으로 빌었더니, 그날밤의 꿈에 한 부처가 이르되,

“전생에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살해한고로 이승에서 무자하게 정하여 있었으나 그대의 정성이 지극하매 귀자(貴子)를 점지하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

하였으므로, 왕부인이 집으로 돌아오매 이상서가 의아히 여기고 묻기를,

“며칠 더 친정에 있을 줄 알았더니 왜 벌써 돌아오셨소?”

“위공이 나를 무자라 탓하고 소박하려 하매, 산천기도 하고 돌아왔사옵니다.”

“산천기도 정도로 자식을 얻는다면 세상에 무자할 사람이 어디 있소?”

하고, 상서는 탄식하며 부인의 경솔함을 가엾이 코웃음쳤으나 그날 밤에 취침 중 상서는 한 꿈을 꾸었는데,

‘천상은 태을진군이 옥황상제께 죄를 지었으므로 점지하여 그대에게 귀히 보중하라.’

하고, 그 말을 전갈한 신선이 홀연히 사라졌으니 이상서가 꿈을 깨고서 부인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자식 비는 정성이 지극하여 내가 이런 꿈을 꾸긴 하였지만, 영검은 두고 보아야 알 일이오.”

부인은 기뻐하면서 그제야 자기가 대성사에 아들을 빌어 치성한 사실을 고하고, 그 치성 중에 얻고 돌아온 자기의 꿈이야기도 하니라. 과연 그 달부터 태기가 있어서 이듬해 四월 초파일에 이르러, 상서는 마침 외출하고 부인은 혼자 있을 때, 홀연히 오색구름이 집을 두르고 기이한 향기가 집안에 가득찼으니, 부인이 좋은 징조로 생각하고 시녀들로 하여금 집을 청소하고 기다렸더니 오시부터 부인은 몸이 불편하여 침석에 기대었다. 이윽고 공중에서 학의 소리가 나며, 선녀 한 쌍이 침실로 들어와서 재촉하기를,

“시각이 가까와 왔으니 어서 침석에 누으시오.”

왕부인이 침석에 눕자마자 아무런 고통도 없이 이내 어린애 우는 소리가 들렸으니, 선녀가 옥병의 물을 따르며 어린 아이의 몸을 씼어 눕히고 가려고 하니,

“당신은 어디서 온 누구온데, 이렇게 누추한 집에 와서 수고를 해 주시니 불안하고 고맙소.”

“우리는 천상에서 해산 가늠하는 선녀이오라,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 아기 낳으시는 것을 보러 왔삽고, 배필은 남군 땅에 있기로 그를 바삐 보려고 가는 길입니다.”

“선녀님, 그러면 이 아이의 배필은 어떤 가문에서 나며 성명이 무어라 하옵니까?”

왕부인은 갓난아이의 아내감의 신분을 물으니,

“김상서의 딸로서 이름은 숙향이라 하옵니다.”

하고 선녀들은 홀연히 흔적을 감추었으니, 부인은 필묵을 내어 선녀의 말을 기록해 두니라.

이날 상서가 꿈을 꾸니 하늘에서 선관이 내려와서 부인에게 벼락을 쳤으므로 놀라서 깨었더니, 그 꿈깬 순간에 황제로부터 부르시는 어명이 전갈되니라. 곧 조정으로 들어가서 황제를 뵙고, 간밤의 꿈에 신의 처가 벼락을 맞아 보였으니 궁금해서 돌아가 보겠다고 하니

황제가 상서에게 하문하기를,

“경의 부인이 잉태하고 있소?”

“네, 늦도록 자식이 없삽더니 홀연히 잉태하여 이달이 산월이옵니다.”

“아, 그럴 거야. 짐이 천기를 보고 낙양성에 태을성이 떨어졌으매 기이한 사람이 나리라 하였더니, 과연 경의 집에 경사로구료. 고이 길러서 경의 뒤를 이어 짐을 돕게 하오.”

상서가 황공한 분부를 사례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부인이 과연 아들을 순산하고 있었으니, 상서가 크게 기뻐하여 급히 산실로 들어가 본즉, 어린 아이의 얼굴이 꿈에 본 선관과 똑같아서 더욱 기이하게 놀라니라. 이름은 선(仙)이라 하고, 자를 태을(太乙)이라고 지으니라. 선이 낳은 지 五, 六삭에 벌써 말을 하고, 四, 五세에 글은 모를 거의 없었고 一○세에 이르러서는 문장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쳐서 공경대부들 가문에서 타투어 구혼하였으나 선이 항상 희롱하는 말로,

“나의 배필은 월궁소아가 아니면 혼인하지 않는다.”

하고, 주장하였으므로 병부상서 위공이 자부 간택에 여간 힘들지 않았으니, 선이 부친에게 여쭈되,

“나라에서 과거를 근자에 보인다 하오니, 한번 구경하고자 하옵니다.”

하고 은근히 과거 볼 뜻을 표명하기로,

“네 재주는 과거를 볼 만하지만, 벼슬을 하면 몸이 나라에 매이게 되매, 우리가 너를 그리워서 어찌 쓸쓸하게 지낼 수 있겠느냐?”

과거 볼 뜻을 부친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자, 선은 마음이 울적하여서는 근처의 산수 유람을 일삼았으니, 하루는 우람차 한 곳에 이르니 대성사라는 큰 절이 있었는데, 뜰에 들러서 난간에 의지하였다가 어느덧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부처가 이르되,

“오늘 왕모의 잔치에 선관과 선녀가 많이 모인다 하니 그대 나를 따라 구경하라.”

선이 기쁘게 부처를 따라서 한 곳에 이르니 연꽃이 만발하고 누각이 층층이 높고, 눈에 띄는 모든 것은 장엄하여 이루 형언할 수 없었는데, 부처가 선에게 잔치 장내의 광경을 가리키며,

“저 오색구름이 모인 탑 위에 앉으신 분은 옥황상제이시고, 그 뒤에 삼태성이 모든 것을 거느리고 앉았고 동편의 황금탑 위에는 월궁항아시니, 모든 선녀들이 근신하고 있다. 그리고 서편의 백옥탑 위에 앉으신 분은 석가여래시니 모든 부처를 거느리고 계시다. 내가 먼저 들어갈 터이니 그대는 내 뒤를 따라 들어오라.”

“하도 엄엄하여 동서를 구별치 못할까 겁부터 납니다.”

부처가 웃고서 소매 안에서 대추 같은 붉은 열매를 주자, 선이 그것을 받아 먹으니 금시로 정신이 소연해지는 동시에, 자기는 천상의 태을진군이 인간으로서, 전에는 옥황상제 앞에서 매사를 봉승(奉承)하던 일과, 월궁소아께 애정의 글을 지어 창화(唱和)하던 일과 액도적해서 주던 일이 역력히 회상되었는데, 거기 모인 선관들이 모두 옛날 천상의 벗들이라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니라.

선은 옥황상제에게 사죄하고, 또 전생의 일이 그립게 생각난다고 하면서 모든 선관들에게 인사하자 모두 반겨하니 상제가 선에게 인간의 재미가 어떠냐고도 하문하니라. 선이 땅에 엎드려서 사죄하자 상제가 한 선녀를 명하여 반도 두 개와 계화(桂花) 한 가지를 주라하시매, 선녀가 옥쟁반에 반도를 담고, 계화 한 가지를 들고 나오자 선이 땅에 엎드려서 받은 뒤에, 문득 선녀를 곁눈으로 보았는데 선녀가 부끄러워서 몸을 돌이킬 때에, 속에 낀 옥지환에 박은 진주가 계화가지에 걸려서 떨어지자, 선이 진주를 집어서 손에 쥐고 섰다가, 절의 종소리에 놀라서 깨고 보니 꿈이더라. 요지(瑤池)의 잔치 광경이 눈에서 암암하고, 천상의 풍악 소리가 귀에 쟁쟁히 남아 있고, 손에는 아직도 진주가 쥐어져 있었는데, 선은 그 꿈이 매우 기이해서 글을 지어서 꿈에 본 정경을 그대로 기록하고, 부처께 하직한 뒤에 집으로 돌아오자 그 뒤부터는 소아만 생각하니라.

하루는 동자가 밖에 남성 땅에 사는 사람이 선을 만나자고 청하고 있다고 알리니, 선은 불러들여서 만나자 한즉 그 사람이 절하고 나서,

“소생은 남성 땡에 사는 조적이라 하는 자이온데 한 개의 수놓은 족자를 구해 두었는데, 그 경치에 찬(贊)을 짓고자 하되 뛰어난 문장이 없어서 여의치 못하였나이다. 듣자오니 공자(公子)의 문필이 천하에 제일이라 하옵기에 불원천리하고 찾아 왔사오니, 청컨대 한번 수고를 아끼지 마옵소서.”

하고, 그 수를 놓은 그림 족자를 내놓았는데, 선이 받아서 본즉 자기가 꿈에 본 바로 그 선경이 역력히 그려져 있으므로 놀라서 묻기를,

“이 족자를 어디서 얻엇나요?”

“공자는, 왜 이 그림을 보자마자 놀라십니까?”

하고 속으로 생각하기를, 그 노파가 혹시 이 집의 족자를 훔쳐다가 자기에게 판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워 말하되,

“허허, 참 이상한 일도 있군요. 실은 내가 일전에 본 것이니, 나를 속이지 말고 바른 대로 말하시오.”

“난양 동촌리의 이화정에서 술 파는 노파에게 산 족자입니다.”

“이것은 천상의 요지도(瑤池圖)이니 우리에게는 소용되나 그대에게는 필요 없을 테니, 다른 수족자와 바구어 주거나 중가(重價)를 주겠으니 팔고 가는 것이 어떠하오?”

선의 요구에 응한 조적은 六○○냥에 팔고 갔으므로 선은 자기가 지은 글을 금자로 그림 위에 쓰고 족자로 꾸며서 자기 방에 걸고 주야로 바라보니, 몸은 비록 인간으로 있으나 마음은 전부 요지에 있는 듯하니라. 그리고 오직 소아를 찾고자 하는 소원으로 초조하니, 그리던 중에 하루는 스스로 깨닫고 혼자 중얼거리니라.

“나는 요지에 다녀왔거니와, 이 수를 놓은 사람은 어떻게 인간으로서 천상의 일을 역력히 그렸을까. 필경 비상한 사람이다. 이화정의 노파를 찾아서 수놓은 사람을 알아 보리라.”

하고, 부모에게는 산수유람으로 떠난다고 말하고, 노파를 찾아서 이화정으로 가니, 이때 마침 숙향이 누상에서 수를 놓고 있자니, 홀연히 파랑새가 석류꽃을 입에 물고 숙향의 앞에 와서 앉았다가 북쪽으로 갔으므로 숙향이 이 새가 역시 자기를 그리로 인도하는 것이나 아닐가 하고 발을 쳐들고 새 가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마침 한 소년이 청삼(靑衫)을 입고 노새를 타고 자기집을 향하여 드어오고 있었으니, 숙향이 자세히 보니, 꿈에 요지에서 반도를 받아갈 제 가락지에서 빠진 진주알을 집어가던 신선의 얼굴과 같아 마음에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짐짓 놀라와서 발을 내리고 조용히 앉아서 그 소년의 거동을 보고파서 나가 있었더니, 소년은 바로 그 집으로 와서 주인을 찾는데 가서 보니 북촌의 이위공 댁의 귀공자라. 공손히 맞아 좌정한 후에,

“공자께서 어떻게 이 누추한 곳을 찾아 주셨습니까? 진실로 감격하오이다.”

“유람차 지나다 들렀으니 한잔 술이나 아끼지 마오.”

하고 웃더니 다시 말을 이어서,

“요지 그림을 수놓은 것을 할머니가 팔았다 하는데, 어떤 사람이 수를 놓았소?”

“그것은 소아라는 소녀가 놓았는데, 왜 물으십니까?”

“그 그림을 산 조적이란 사람에게 듣고 찾아왔소.”

“그 소아를 찾아서 무엇하시렵니까?”

노파가 계속 캐어 묻되,

“소아는 본디 전생의 죄가 중해서 병신이 되어서 귀가 먹고 한 다리 한 팔을 못 쓰는 위인이라 쓸모 없는 여아임에, 천생연분으로 구하는 것부터가 망계(妄計)입니다.”

“나는 소아가 아니면 평생 혼인하지 않을 결심이니 어서 만나게 해 주시오.”

하고 선은 노파를 졸랐으나, 노파는 다시 말을 피하여,

“귀공자는 귀공자니까, 왕의 부마(駙馬)가 아니면 공경대부의 신랑이될 것인데 어찌하여 그런 천인을 구하십니까? 그런 허황스러운 말씀은 다시 하지 마시오.”

“만승천자(萬乘天子)의 공주라도 나는 싫으니, 할머니는 소아가 있는 곳을 알리시오.”

“나는 소아를 본 지가 하도 오래 되어서 지금 있는 곳을 모르거니와, 남양 땅의 장승상 댁을 찾아가 보시오. 이승의 인간 이름은 숙향이라 하였습니다.”

선은 노파의 말만 믿고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거짓말로 여행할 것을 청하기를,

“형주 땅에 기이한 문장이 있다 하오니 소재(小才) 찾아가 보고자 합니다.”

부친 위공이 대견히 여기고 허락하니, 선이 절하여 하직하고 황금을 말에 싣고 길을 떠나니, 그는 형주(荊州) 땅에 이르러 남양으로 향하여 여러 날 만에 김 전의 집을 찾았다. 문전에 이르러 김상공이 계시냐고 묻자, 하인이 나와서 계시다고 대답하되,

“낙양 동촌의 이위공의 아들 선이 뵈오려 왔다고 여쭈어라.”

주객의 인사가 필한 뒤에 김 전이 선에게,

“귀한 손님이 누지에 오시니 고마우나, 무슨 일이오.”

“제가 댁을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영녀(令女)의 향명(香名)을 듣고 구혼코자 하옵니다.”

이 말에 주인 김 전이 눈물을 머금고 대답하되,

“내 팔자가 기박하여 남녀간 자식이 없더니, 늙어서야 여아를 낳으매 위인이 남의 아이 못지않더니, 五세 때에 난중에 잃은 채 지금까지 생사를 알지 못하고 있소. 그러던 중 지금 그대의 청을 들으니 마음이 더욱 비장하오.”

선은 하는 수 없이 김 전을 하직하고 남군의 장승상의 집을 찾아가서 명함을 들었으며, 장승상이 청해 들여서 인사를 필한 후에 선이 먼저,

“저는 낙양 동촌의 이위공의 아들입니다. 남양 땅의 김 전이라는 사람의 딸 숙향이라는 여자가 댁에 있다 하오매, 불원천리하고 구혼코자 왔습니다.”

장승상은 그 말에 벌써 눈물을 흘리며 슬픈 사정을 말하되,

“그 숙향이 五세 때에 집승이 물어다가 내 집 동산에 버린 것을, 우리가 무자(無子)하기로 一○년을 길러서 양녀로 삼았으나, 사향이라는 종년이 모함하여 내쫓았으므로, 숙향은 누명을 목숨으로 씻으려고 표진강 물이 빠졌기로 사람을 보내 구하려 하였으나 공적이 없었던 채 지금까지 생사를 몰라 슬퍼하고 있네.”

“제가 분명히 댁에 있음을 알고 왔으니, 그런 핑계로 거절하지 마시고 저의 구혼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선은 장승상이 거짓말로 자기의 청을 피하려는 줄 알고 안타까와하니 장승상이 말하되,

“그게 무슨 말인가? 숙향이가 내 친딸일지라도 자네와 배필함이 과만하거늘 어찌 마다 하여 핑계하겠는가. 이것이 모두 우리의 박복한 탓일세.”

“듣자오니 숙향이 병신이라 하는데, 사향이 비록 구박하더라도 어디로 멀리 갈 수 있겠습니까?”

선은 그래도 장승상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추궁하더라.

“우리 집안에서 숙향을 잃은 뒤에 화상을 그려서 방에 걸었으니, 내 말을 못 믿겠거든 보게나.”

선이 부인의 방으로 인도되어 가서 보니, 한 폭의 화상이 걸려 있었으니, 선의 눈이 반가움에 끌려서 자세히 본즉 어디서 본 듯한 선녀의 자태더라. 그는 반가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숙향이 병신이라더니, 이 화상은 이상이 없으매 괴이하옵니다.”

“숙향은 본디 아무런 병도 없고 불구자도 아니며, 이 화상은 열살 전에 그린 모습일세. 一○세 후에는 자태가 더욱 고왔는데 병신이란 금시초문, 뜻밖의 말일세.”

“승상님, 숙향을 찾아왔다가 그냥 가게 되었으니, 이 화상을 저에게 팔아 주시면 중가(重價)를 드리겠습니다.”

장승상은 선의 정상이 딱하였으나 부인이 그 화상을 잃으면 섭섭해 할 것이 또한 염려되어 말하되,

“자네 정성이 지극하여 주고는 싶으나, 그것마저 없어지면 실인(室人)이 실성할 것이매 그럴 수 없네.”

선은 하는 수 없이 그냥 하직하고, 표진강 물가에 와서 그 근처를 두루 찾아 보았으나 알 길이 없었는데, 그러던 차에 어떤 노인이 그때의 사정을 말해 주기를,

“수년 전에 모양이 아리따운 소녀가 장승상 댁에서 나와 이 물가에서 하늘에 사배(謝拜)하고 빠져 죽었소.”

선은 숙향이 정녕 억울한 물귀신이 되었다니 슬프게 낙망하고, 향촉을 갖추어 제사를 지내자, 물 위에서 피리부는 소리가 세 번 나더니, 한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작은 배를 타고 피리를 불며 오더니 선에게,

“숙향을 보고자 하거든 이 배에 오르시오.”

하고 전하기로, 선이 고맙게 여기고 그 배에 오르니 뱃길이 살같이 빨랐고, 한 곳이 다다르자, 동자가 다시 일러 주기를,

“이 물을 지키는 신령이 숙향을 구해서 동다하로 보냈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리로 가서 찾아보시오.”

선이 사례하고, 동다하로 가는 도중에 한 중이 지나가므로 길을 물으니,

“여기서 조금 가면 감투 쓴 노옹(老翁)이 있을 것이니 그에게 물으면 알려 주리라.”

선이 갈밭 속으로 가다가 보니, 소나무 아래의 바위의에 한 노옹이 감투를 쓰고서 졸고 있었다. 선이 그의 앞으로 절을 하여도 노옹은 본 체도 하지 않기에 선이 민망스러워하면서,

“저는 지나가는 행인이온데, 길을 몰라서 그럽니다.”

그제야 노옹이 졸던 눈을 조용히 뜨고서,

“나에게 무슨 말을 묻는고? 귀 먹은 사람이니 큰 소리로 말하라.”

“저는 이위공의 아들이온데, 숙향이라는 낭자가 있다 하와 불원철리하고 왔으니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애원하니, 노옹이 눈살을 찡그리며,

“숙향이라는 말은 듣도 보도 못하였는데, 너는 아이로서 이 깊은 밤에 함부로 와서 내 잠을 깨우고 수다스럽게 구느냐.”

선은 어이가 없었으나 다시 절하고서,

“표진강의 물신령이 이곳 어른께 가서 물으라기로 왔으니 가르쳐 주십시오.”

“그 전엔 어떤 여자가 표진강에 빠져 죽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표진강 용왕이 너한테 제물을 받아 먹고 어쩔 수 없으니까 내게로 미룬 모양인데, 아마 전일에 여기 갈대밭에서 불타 죽은 그 소녀인 성싶다.”

“정녕 여기까지 와서 불에 타 죽었습니까?”

“저 잿더미에 가 봐라.”

선이 또다시 실망하면서 그곳으로 가서 보니, 불탄 위의 재는 있으나 해골 탄 재는 없었는데, 선은 여전히 졸고 있는 노옹 앞으로 돌아와서,

“어른은 저를 속이지 마시고 바른 대로 알려 주시오.”

“네 열성이 그만하니, 내가 잠들어서 숙향이 어디 있는지 보고 오마. 너는 그동안 두 손으로 내 발바닥을 문지르고 있거라.”

선은 노옹의 말대로, 그날의 해가 저물도록 노옹의 발바닥을 문지르고 있었는데, 이윽고 노옹이 잠을 깨더니,

“너를 위로해 주려고, 내가 마고할미 집에 가 보니 숙향이 누상에서 열심히 수를 놓고 있더라. 내가 그 증거로 불똥을 떨어뜨려서 수놓은 봉황새 날개를 태우고 왔으니, 마고할미 집으로 가서 숙향을 찾고 수놓은 봉의 날개를 보면 내가 분명히 갔던 것을 알 것이다.”

선은 자기가 이미 그 할미집에 가서 물었더니 이리이리 하라고 해서 천리길을 여기까지 해매어 돌아다녔다는 말을 고하자 노옹이 껄걸 웃으며,

“그 마고할미에게 지성으로 빌면 네 뜻을 이룰 수 있을 거다.”

선이 노옹의 말이 신기하므로 감탄하면서 하직하고 돌아서니, 노옹은 벌써 홀연히 흔적이 없었더라, 선은 그 길로 집으로 돌아오자, 걱정하고 기다리던 부모가 반겨 맞으면서 묻기를,

“네 어디를 그리 오래 있다가 왔느냐?”

“도중의 산수에 끌려서 그럭저럭 일자가 늦었소이다.”

하고, 천연스러운 변명을 하니라.

이 무렵에 이화장의 노파는 선을 속여서 돌려보내고 숙향의 방으로 가서,

“아까 우리집에 왔던 소년을 보셨소?”

“못 보았소이다.”

“그 소년이 전생의 태을진군이라는 선관이라 아가씨의 배필이오나, 아갑게도 그 소년은 전생에 중한 죄를 진 벌로 한 눈이 멀고, 한 다리를 절고, 한 팔을 못 쓰는 병신이오.”

“그분의 전생이 진실로 태을진군이라면 병신인들 상관 있습니까? 내 옥지환의 진주르 ㄹ가진 사람이 태을이니 할머니는 금후 자세히 살펴 주사이다.”

하고, 변치 않는 태을에 대한 일편단심으로 부탁하니라.

하루는 숙향이 누상에서 수를 놓고 있을 때, 홀연히 난데없는 불똥이 공중에서 떨어져서 수놓은 봉의 날개를 태워 버리니, 노파가 보고서 놀라며 혹시 화덕진군이 왔었는지 여부는 후일에 알 수 있으리라고 말하니라.

한편 선은 집으로 돌아온 지 三일 만에 목욕재계하고 요지에 가서 얻은 진주와 요지도의 수족자를 가지고 금은 몇 천냥을 말에 싣고서 이화정의 마고할미의 집으로 찾아가자,노파가 선을 반갑게 맞아서 초당에 인도한 뒤에,

“요전에 공자를 만났을 때는 약간의 술을 하고 섭섭히 지냈으나, 오늘은 싫도록 대접하며 나도 먹겠소이다.”

“그날도 술을 받고 사례를 하지 못하였으니, 오늘은 갚겠소. 그대 할머니 말을 곧이 듣고, 남양과 남군과 표진강까지 두루 다니며 숙향을 찾다가 고생만하고 왔소이다.”

선이 농 비슷하게 노파를 원망하자, 노파가 웃으면서,

“호호호, 주시는 술값은 감사하와 사양치 아니하거니와 내 집이 비록 가난하나 술독 아래는 주천(酒泉)이 있고 위에는 주정(酒井)이 있으니 무슨 값을 받으리까? 그런데 공자느 무슨 일로 그런 먼 곳을 다녀오셨습니까?”

선은 큰 한숨을 내쉬며,

“숙향을 찾으려고 갔다고 하지 않았소.”

“공자는 진실로 의리와 정분이 많은 군자입니다. 그런 병신을 위하여 천리를 지척같이 찾아 다니시니 숙향이 알면 오죽 감격하리까?”

“숙향을 만났으면 감격해 주었을지 모르지만, 못 만났으니, 내가 애서 찾아 다니는 줄을 어찌 알겠소?”

노파는 거짓 놀라는 체해 보이며 묻기를,

“그러면 숙향이가 벌써 다른 곳과 혼인했던가요?”

“하하하, 나도 다 알고 있으니, 할머니도 나를 그만 속이시오. 화덕진군의 말을 들으니, 숙향은 지금 이 마고할미 집에서 수를 놓고 있다던데요. 할머니한테 천백 번 절이라도 하고 빌겠으니 나의 마음을 그만 태워 주시오.”

노파는 그래도 정색을 하고 딴청을 쓰기를,

“공자도 거짓말 그만두시오. 화덕진군은 천상(天上)의 남천문 밖에 있는 불을 다스리는 산관인데 어찌 만나보셨다는 말이오? 또 마고할미로 말하자면 천대산에 있는 약을 다스리는 선녀인데 이런 누추한 인간의 집에 내려와서 숙향을 데려갈 리가 있습니까?”

선은 자기가 화덕진군을 만났을 때에 이 집에서 숙향이가 이화정에서 놓고 있는 수에 불똥을 떨어뜨려서 태우고 왔으니 그것을 징험해 보라던 말을 다하였으나 그래도 노파는 딴청을 쓰고,

“정 그렇다면 이화정이라는 곳이 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은 노파의 말을 듣고는 술도 먹으려 하지 않고 탄식하기를,

“아아, 할머니가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면 나도 어찌 할 바를 모르겠소. 삼산(三山) 사해(四海)를 다 찾아다니되 만나지 못하니, 나는 인제 죽을 수밖에 없소.”

하고, 선은 자리에서 수연(愁然)히 일어나니, 노파는 당황한 듯이 선을 바라보며,

“공자는 공후가(公侯家)의 귀공자로서 아름다운 배필을 얻어서 원앙이 녹수(綠水)에 놀고, 추월(秋月) 춘풍(春風)을 지내실 몸인데, 왜 그런 미천한 병신 여자를 생각하십니까?”

“모를 제는 무심하나, 숙향이라는 그 천상연분의 배필이 이 세상에 있는 줄을 안 뒤로는 침식이 불편하고 숙향이가 나를 위하며 많은 고생만 겪으며 병신까지 되었다 하니, 철석간장인들 어찌 녹지 않겠소. 내가 끝내 숙향을 찾지 못하면 인강르ㅗ 살아서 있지 않을 결심이오.”

“공자는 너무 낙망치 마시오. 지성이면 감천이니, 좌우간 두고 봅시다.”

“내가 숙향을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은 오직 할머니한테 달렸으니, 이 일생을 가엾이 여겨 주시오.”

하고, 선은 이화정을 떠나서 집으로 돌아왔으며, 사흘 후에 밖에 나와서 서 있을 때, 마침 이화정의 노파가 나귀를 타고 그 앞을 지나가고 있었으니, 선이 반겨 인사하고 묻기를,

“할머니, 어디를 가시오?”

“공자의 지성에 감동하여 숙향을 찾으러 갔다 옵니다.”

“아 그래요? 그래 거처를 알았습니까?”

“글쎄요. 실은 숙향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를 三명 알아냈으니, 공자는 그 중에서 본인 一명을 알아서 택하시오.”

“그 三명은 어디 있습니까?”

“하나는 큰 부자 질갈의 딸이요, 하나는 빌어먹는 거지 계집애요, 또 하나는 만고절색이나 병신의 몸입니다. 그런데 그 병신의 여자가 자기의 배필의 남자는 내 진주를 가져간 사람이니까, 그 증거품의 진주를 본 뒤에 몸을 허하겠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선이 노파의 말을 듣고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그 진주의 증거품을 말한 여자가 내가 찾는 숙향이요. 내가 요지에 갔을 때, 반도 주던 선녀에게 진주를 얻었으니 할머니도 보시오.”

하고, 선은 집안으로 뛰어가더니 제비알만큼이나 큰 진주를 가지고 나와서 노파에게 주면서,

“할머니 수고스러우나 이 진주를 갖다가 그 병신 소녀에게 보이고, 이것이 자기 진주라 하거든 데려다가 할머니 집에 두시오. 그리고 택일해서 알리면 혼사제구는 모두 내가 담당하리다.”

노파는 그러마 하고 진주를 받아 가지고 와서 집에 있는 숙향에게 보이고 선의 말을 전하였더니, 숙향이 그 진주를 받아서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 진주는 분명히 내 것이니, 모든 일은 할머니 요량대로 하세요.”

노파가 다시 선을 찾아가서 사실대로 알리자, 선은 황금 五○○냥을 주며 혼수에 쓰라고 부탁하더라.

“혼사 지내는 비용은 내가 비록 가난하나 적당히 하겠으니, 이 돈을 두었다가 숙향낭자나 주시오.”

하고, 도로 서에게 맡기고 받지 않더라.

선의 고모는 좌복야(左僕射) 여흥(呂興)의 부인이나 자식이 없어서선을 친자식같이 사랑하였다. 선이 고모집을 찾아가니 고모가 반기면서 말하기를,

“어제 밤중에 백룡(白龍)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서 광한전이라는 대궐로 들어갔더니, 한 선녀가 말하기를, ‘사랑하던 소아를 너에게 주니 며느리로 삼으라.’ 하므로, 내가 너의 아내로 삼으려고 데려다가 다시 본 즉 정말로 아름다운 낭자였다.”

선은 전생이 월궁소아라는 선녀로서 인간의 이름을 숙향이라는 소녀와 혼인하게 된 경위를 자세히 고모에게 알리니, 고모가 크게 반기고 기뻐하며,

“나는 찬성이지만 부모의 성정(性情)이 나와는 다르니 그런 빈천한 소녀를 며느리로 삼을 리 없으니 어찌하랴.”

“저는 부모가 반대하더라도 다른 여자와는 혼인하지 않겠습니다.”

“네가 벼슬하면 두 아내를 둘 것이요, 또 네 부친이 서울에 가시고 없으니 혼사는 내가 주장하고, 둘째 아내는 네 부친의 뜻에 맡기면 좋지 않겠니?”

“고모님의 넓은 아량으로 제 소원을 이루게 해 주십시오.”

선은 신신당부하고 돌아와서 혼인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덧 그날이매 선의 고모 이부인은 숙향의 집에 기구가 없으리라고 염려하고 채단과 기구를 장만해서 도왔다. 그리고 신랑의 위의(威儀) 차린 행차를 모두 고모집에서 마련해서 신부집인 이화정으로 가매 잔치에 모인 여러 선객들이 요지선관(瑤池仙官)처럼 성황을 이루었더라. 전안지례(奠雁之禮)를 맞고 동방화촉에 나가서 교배(交拜)하매 천정(天定)한 배필임을 의심할 사람이 없더라.

이리하여 선이 요조숙녀 숙향을 아내로 맞으매 금실의 정이 원앙새가 푸른 나무숲에 놀고 비취가 연리지(連理枝)에 깃들임과 같아서 무궁하게 즐거워하니, 이튿날 선이 고모에게 문안을 들이자 신부가 병신이라더니 어떠냐고 물었으며, 곧 데려다 보고 싶으나 부친이 서울서 내려오시는대로 권귀차로 기별하고 신부를 데려오겠다고 말하니라.

“데려오기 전에 자부(子婦)의 용모가 궁금하시거든 이 족자의 화상을 보십시오.”

“이것이 꿈에 본 선녀이구나.”

하고, 놀라며 반색하여 마지않았으나 그 전에 이 혼인에 반대한 부인은, 서울의 조정에 있으면서 변방문제로 시골에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 남편 이상서에게 몰래 알렸던 것이며, 일이 전과는 달라진 것을 보고, 시녀들에게 물어서 비밀로 혼인하려는 실정을 알고, 서울 있는 상서에게 몰래 알렸던 것이매, 일이 전과는 달라진 것을 보고, 시녀들에게 물어서 비밀로 혼인하려는 실정을 알고 서울 있는 상서에게 기별하였더니 상서가 대노하니라. 그는 곧 낙양태수(洛陽太守)에게 통첩하여 자기 아들을 유혹하는 그 계집을 잡아다가 죽이라는 엄명을 하였던 것이라.

어느날 저녁, 까치가 숙향의 방 창문 앞의 나무에 와서 놀란 듯이 울어대니 숙향이 무슨 흉한 징조일가 하고 놀라서,

‘장승상 댁의 영춘당에서 사향의 울음과 함께 저녁 까치가 울어서 뜻밖의 봉변을 당하였더니, 오늘 또 저녁까치가 창 앞에 와서 울어대니 무슨 연고가 있을지 두렵다.’

하고, 신혼 직후에 뜻하지 않은 걱정을 하게 되었고, 그날 방이 깊어서 관가의 포리(捕吏)가 몰려와서 불문곡직하고 숙향을 성화같이 잡아가니라. 숙향이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고 잡혀 가서 아문(衙門)에 이르르니, 좌우에 등불을 밝히고 태수가 문초하기를,

“너는 어떤 계집인데, 이상서 댁의 공자를 유혹하여 죽을 죄를 지었느냐? 상서께서 기별하시기를 너를 잡아다 즉시 죽이라 하였으니, 너는 나를 원망치 말고 형벌을 받으라.”

하고, 형틀에 올려 매고 치려고 하거늘 숙향이 울면서 아뢰되,

“저는 다섯 살 때에 부모를 잃고 이화정의 노파를 만나서 의탁하고 있사옵더니, 이생(李生)이 구혼하였으매 상민(常民)의 태생이 양반댁 자제의 배필이 되었다 해서 그것이 제가 유혹한 죄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낸들 어찌 이상서의 분부를 거역하랴. 형리야, 어서 그년을 쳐라!”

부사는 사리의 시비곡절을 가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집장(執杖)과 사령이 매를 둘러 메고 사정없이 치려고 달려 들었으나 형리들이 팔이 금방 무거워지고 움직일 수가 없게 되어서 매를 치지 못하니라.

“음, 무죄한 여자를 치려 하니 그런 성싶으되, 상서의 명을 어기지 못할지니, 너희들의 팔이 움직이지 않아서 칠 수가 없거든 몸을 꽁꽁 동여서 깊은 물에 넣으라.”

하고 태수가 다시 명령하니라.

이때는 밤중이라, 잠자던 태수의 부인이 꿈을 꾸니, 숙향이 울면서 부인 앞에 절하고 엎드려 울면서

‘부친이 저를 죽이려 하시는데, 모친은 왜 구해 주시지 않습니까?’

하고 호소하기로, 장시가 놀라서 잠을 깨고 시녀를 불러서 묻기를,

“영감께선 어디 계시냐?”

“이상서 댁의 기별로, 그 댁의 새 며느리를 쳐 죽이는 형벌로 동헌에 계십니다.”

장씨가 놀라서 남편 태수를 급히 청하여 내실로 오게 하고 울면서 호소하기를,

“우리 딸 숙향을 잃은 지 一○년이로되, 야속할 정도로 한 번도 꿈에 보이지 않더니, 아까 꿈을 꾸니 숙향이가 와서 ‘부친이 나를 죽이려 하시는데 모친은 왜 구해주지 않느냐’고 울면서 애원하였으니, 몽사가 역력하고 이상하니, 그 여자가 어떤 사람입니까?”

“이위공의 아들이 정식으로 취처하기 전에 임의로 작첩하였으므로, 위공이 노해서 잡아다 죽이라는 명령이오.”

“아무리 관권에 관계되는 일이지만, 무자식한 우리가 어찌 또 죄없는 사람에게 적악(積惡)을 하겠어요. 그 계집을 놓아 주도록 하십시다.”

태수 내외가 숙향을 죽여야 할까 살려야 할까 한 끝에 부인의 말대로 그냥 석방은 하지 못하고, 우선 옥에 가두어 형편을 보아 처리하려고 하니라. 낙양 옥중에 갇힌 숙향은 남편 선에게 자기가 죽는 줄이야 알도록 기별하려고 하였으나 소식을 전할 길이 없어서 더욱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울고만 있을 때에 홀연히 옛날에 보던 파랑새가 옥중의 숙향이 앞에 날아와서 앉았으니, 숙향이 기뻐하고 급하게 적삼소매를 뜯어 입으로 깨문 손가락으로 혈서로 급한 사연을 써서, 파랑새의 발목에 매어주고 새에게 푸념하듯이 간청하기를,

“이 숙향이는 옥중에서 죽게 되었으니 죽기는 섧지 않으나 부모와 이랑(李郞)을 보지 못하니 명목(暝目)하지 못하겠다. 또 비명으로 죽으니 원통하지 않으랴. 파랑새야, 너는 신의가 두텁거든 이 소식을 꼭 이위공 댁 아드님께 꼭 전해다오.”

파랑새는 약속한 듯이 세 번 울고서 옥밖으로 날아가니라. 이날 밤 선은 고모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어쩐지 마음이 산란하여 잠을 이루지 모사고 울울불락(鬱鬱不樂) 하더니, 파랑새가 날아와서 누워 있는 선의 팔에 앉으므로, 이상히 여기고 본즉, 새 발목에 혈서의 편지가 매어 있더라. 풀어서 본즉 숙향의 위급하고 애퍼로운 사연이더라. 혼비백산한 선은 그 혈서를 고모에게 보이고, 낙양 감옥으로 달려가서 숙향을 구하려고 하매,

“놀라운 불행이지만 아직 경솔히 굴지 말고 이화정 노파에게 시녀를 보내서 사정을 알아 오도록 하라.”

하고, 한편으로 이상서 댁의 노복을 불러서 사건의 전말을 물어서 자세히 내막을 알게 되자 부인이 대노하니라.

“선이가 비록 상서의 아들이나 내가 양육하였는데, 내가 주혼(主婚)한 일에 대해서 상서가 나를 큰누이 대접한다면 그럴 수가 있나. 동생이 애매한 사람을 죽이려 하니, 내가 직접 서울에 가서 상서 만나서 말하고 그래도 동생이 고집을 부리고 듣지 않으면 황후게 여쭈어서 조처하겠다.”

하고, 행장을 차려서 서울로 급히 올라가니라.

이때 낙양태수는 일찌기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하여 그 자리로 부임하였던 김 전(金佺)이었으며, 이때 공교롭게도 병부상서 이위공의 말을 하자면 사사(私事)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여 마음이 자연 비창하였으나 마지못해서 낭자를 잡아 들였던 것이라. 숙향이 고운 얼굴에 괴로운 눈물을 흘리고 약한 몸에 큰 칼을 쓰고 끌려서 동헌에 나왔을 때 김태수가 신원을 문초하기를,

“네 나이 몇이며 성명은 무엇인고? 고향은 어디요, 누구의 자식이냐? 속이지 말고 바른 대로 대어라.”

숙향은 정신을 겨우 차리고,

“저의 아비는 김상서라고 하고 제 이름은 숙향이며, 나이는 一五세로소이다.”

태수 옆에 나와 있던 부인이 이 말을 듣고 단번에 눈물이 비오듯이 쏟아져 내리더라.

“네 얼굴을 보니 우리 숙향이와 같고 나이가 꼭 맞으며, 김상서의 딸이라 하니 근본을 더 조사하기로 하고 아직 다스리지 마시기 바라오.”

금태수가 부인의 말을 옳게 여기고 다시 하옥시키고 그 사연을 서울 있는 이상서에게 기별하니라. 김태수의 부인이 숙향을 생각하고 울기만 하므로 태수도 부인을 위로할 겸하여 옥리에게 분부하기를,

“그 정상이 참혹하니 큰 칼이나 벗겨주라.”

서울의 이상서가 낙양태수 김 전의 편지를 보고 크게 노해서 계양태수로 좌천시키고 다른 사람으로 낙양태수를 삼아서 기어코 숙향을 죽이려고 생각할 때에, 마침 하인이,

“여(呂)좌복야 댁의 부인께서 오십니다.”

하고 알리매, 상서가 반가와서 하당(下堂)하여 맞아 들이며 문후하자, 부인이 인사도 받지 않고 곧 화를 내고 큰 소리로 상서를 꾸짖어 가로되,

“요사이 세상에선 벼슬 높고 위엄이 커지면, 동기도 업수이 여기고 억제하려는 거냐?”

이상서가 황공해서 영문을 모르고,

“누님, 왜 이렇게 노하십니까?”

“선이를 내 손으로 길러서 친자식같이 알기 때문에 마침 마땅한 혼처를 만났기게, 네게 미처 기별하지 못하고 성혼시켰으며, 또 그렇게 한대도 좋은 꿈의 징조와 부합했기 때문에 쓸쓸한 슬하에 내가 데리고 있으려고 그랬던 것이었으나, 그런데 너는 내게도 알리지 않고 무죄한 여자를 죽이려 하니, 대장부가 그러하고서 천하의 병마(兵馬)를 어찌 부리겠느냐?”

하고 호통을 내리니, 장병을 지휘하는 병부상서도 어쩔줄을 몰라하더라.

“이번 일을 누님게서 주혼하진 줄은 모르고 잘못 하였으니, 실은 여기서도 마침 양왕(襄王)이 구혼해 왔으므로 제가 허락한 차에, 선이가 미천한 계집에게 장가드었다고 시비가 많아서 그리하였던 것입니다. 혼인은 인륜의 대사이오니 인력으로 어찌하겠소? 낙양태수에게 다시 기별하여 죽이지 말고, 낙양 근처에 주지 말도록 하겠습니다.”

여황후(呂皇后)는 여(呂)부인으 시고모였으므로 황후가 조카딸이 상경하였다는 기별을 듣고 궁중으로 청하여 머무르게 되었으매, 여부인은 곧 선에게 편지를 부쳐서 숙향이가 옥에서 석방될 것을 알렸더니라.

그러나 이상서느 자기의 아들이 호탕하여 학업에 지장될 것을 염려하고 서울로 불러 올렸고, 그렇게 함으로써 선이 숙향을 다시 보지 못하고 상경하게 되었으니, 선이 모친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매, 모친이 위로와 꾸지람을 겸한 훈계로,

“내 인물 풍채가 남만 못하지 않으매, 좋은 배필을 구할 곳이 어디 없으랴. 부모를 속이고 천한 계집을 얻어서 지내면 성정(性情)이 타락된다. 그런데 이 기회에 부친이 서울로 불러다 공부를 잘 시키려는데 왜 그리 슬퍼하느냐?”

선이 그때서야 숙향과 혼인하게 된 자초지종의 연분을 자세히 고하고,

“모친은 제 천정(天定)을 생각하고 숙향을 집으로 불러 들여 주소서.”

“아, 그런 줄은 전연 몰랐다. 네 말대로 진실이 그렇다면 천생연분이니 낸들 어찌 구박하랴. 부친도 그런 실정만 아신다면 하락하실 테니 염려 말고 과거나 해서 성공하고 잘 돌아오거라. 벼슬을 한 뒤에는 너 하려는 일을 부모도 말리지 못할 거다. 그런 점에서도 꼭 과거에 성공해라.”

선은 숙향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이화정의 노파나 만나고 가려고 생각하였으나, 역시 부명(父命)을 거역치 못해서 편지로 숙향을 잘 보호하도록 당부하고 서울로 떠나니라. 상경하여 부친을 뵈니, 부모 허락업이 장가든 것을 대책하고 곧 태학(太學) 으로 보냈고, 부친은 이내 황제께 하직하고 고향집으로 돌아오니라.

이때 김 전은 계양태수로 전근해 가고 낙양태수로는 신관(新官)이 부임하여 숙향을 옥에서 석방한 뒤에 낙양 근처에는 있지 못하도록 하였더니, 이화정의 노파는 옥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숙향을 맞아서 끌어 안고 집으로 돌아와보니, 마침 선이 보낸 편지가 와서 기다리고 있더라. 숙향이 임 본 듯이 반갑게 뜯어보니 만단정화(萬端情話)라. 서러운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여 마지못하더라.

“이랑이 이제 서울로 가시고 고을에서는 이 근처에 있지 못하게 하니, 나는 장차 어디로 가서 몸을 의탁하지요?”

“이것이 때의 액운이요, 여기 오래 있으면 또 화를 당할 것이니, 이 지의 세간을 정리하고 나와 같이 이 고장을 떠납시다.”

그리하여 숙향은 노파와 함께 정든 이화정을 버리고 딴 고장으로 가서 살게 되었으며, 그러던 중에 하루는 노파가 숙향에게 서글피 말하기를,

“나는 본디 천태산의 마고할미였는데 낭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세상에 내려와서, 이제는 낭자의 급한 화를 다 구하여 드렸으며, 이와 동시에 연분이 다하여 떠나게 되었으니, 여러 해 동안 같이 살던 정의를 잊을 수 없습니다.”

숙향이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절하고 은혜를 감사하여 말하되,

“미련한 인간의 눈이 지금가지 할머니가 신선이심을 알아 보지 못하고, 이제 인연이 다하여 버리심을 당하게 되오니 망극하옵니다. 그동안 할머니의 은혜를 입어서 일신이 안일하더니 할머니가 선경으로 돌아가시면 누구를 의지하오리까?”

“내가 청삽살개를 두고 갈 테니, 그 놈이 낭자의 어려움을 도우리다.”

“할머니 가시는 길이 얼마나 되며, 어느날 가시렵니까?”

“나 갈 길은 여기서 五만 八천 리요, 지금 곧 떠나려고 합니다.”

숙향이 작별이 급함에 놀라 슬퍼하면서 간청하기를,

“하루만 더 계시다가 가십시오.”

노파가 한숨을 쉬면서,

“내가 간 뒤에 나 입던 옷을 염하여 관 속에 넣고, 저 삽살개가 가서 발로 파는 곳에 묻어 주시고, 만일에 어려운 일이 있거든 그 무덤으로 오면 자연히 구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입었던 적삼을 벗어 주고 이별하니, 두어 걸음 간 뒤에 홀연히 보이지 않아서 간 곳을 알지 못하더라. 숙향이 망극하여 두고 간 적삼을 붙들고 통곡하더라.

숙향이 통곡하다가, 마고할미가 남기고 간 말대로 장례를 지내려고 예복을 갖추고 관에 넣어 가지고 산소터를 찾아서 갈 때에, 따라 오던 청삽살개가 숙향의 치마끝을 물어서 그만 가라고 하매, 조석으로 제사를 극진히 하여 삽살개를 사랑하고 믿으면서 세월을 보내더라.

하루는 달이 밝고 하늘에 한 점의 그름도 없이 맑게 개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숙향이 사창에 의지하여 탄식하는 심정을 글로 지어서 책상 위에 놓고 졸다가 깨어 보니, 글도 없고 개도 없어져 버렸으며, 숙향이 낙망하고 울면서 한탄하기를,

“가련하다 내 팔자여, 할머니도 가고 할머니가 남겨 준 의지할 개마저 잃었으니 밤이 적적하여 잠도 오지 않는구나.”

이때 서울에서는, 선이 태학에 가서 공부한 뒤로는 숙향의 소식을 들을 길이 없어서 주야로 눈물을 짓고 있었더니, 하루는 문득 바라보니 청삽살개 한 마리가 자기를 향하여 왔으므로 살펴본즉, 그 앞에 와서 앉은 개가 입에 물고 온 것을 토해 놓으므로, 선이 기이ㅏ게 여기고 보니 동촌리 이화정에 있던 숙향의 필적이라 급히 그 글을 떼어보니,

‘슬프다. 숙향의 팔자여. 무슨 죄로 五세에 부모를 잃고 동서로 표박하다가, 천우신조하사 이랑을 맞았으나 다시 이별하고 외롭게 의지할 곳도 없는 나의 신세, 다행히 할머니를 의지하였더니, 여액(餘厄)이 미진하여 일조(一朝)에 승천(昇天)하니, 혈혈단신 어디 가서 탄식하리요. 내 생전에 이랑을 보지 못하면 부모를 어이 찾으리요. 슬프다, 나의 신세여 죽고자 하나 죽을 땅이 없고나!’

선이 이 글을 읽고 슬픔을 금하지 못하고, 노파가 죽은 줄 알고 더욱 낙망하더라. 음식을 내다가 개에게 주고 편지를 써서 개 목에 걸어매고서 당부하기를,

“할머니까지 죽으매 낭자는 너만 의지하고 지낼 테니 빨리 돌아가서 이 편지를 전하고 낭자를 잘 보호하여 다오.”

그러자 개가 잘 알았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고 날 듯이 돌아가니라. 이때 숙향은 개를 잃고 종일 흐느껴 울며 기다렸는데, 해가 저물어서 인적이 끊어지고 짐승 소리조차 나지 않는지라 고적하여 견딜 수 없더라. 오직 먼 밤하늘만 바라보며 탄식하고 있을 때, 홀연히 청삽살개가 나는 듯이 와서 숙향이 앞에 엎드렸으매, 어디로 가서 죽지나 않았을까 하던 숙향이가 반색을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하소연하기를,

“네가 아무리 짐승이기로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었느냐? 배를 오죽인 주렸으라!”

하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해 주매, 개가 반겨하고 앞발을 쳐들며 목을 숙여 보이므로, 숙향이 비로소 그 개 목에 편지가 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끌러서 펴보니 다음 같은 선의 사연이더라.

‘숙향낭자에게 부치나니, 낭자의 옥안(玉顔)이 그리워서 밤낮없이 생가하고 있던중, 천만 뜻밖에 청삽살개가 그대의 글을 전하거늘, 못내 감동하여 우리 두 사람의 안부를 전하게 되었도다. 그대의 심한 고생은 모두 이 선(仙)이 죄라. 한 번 이별하여 약수가 가리었고 청조 끊겼으니 서산에 지는 해와 동령에 듣는 달을 대하여 속절없이 가장만 태우다가 삽살개가 소식을 전하니 반가운 마음을 금치 못하오. 그러나 할머니가 죽었다 하니 낭자는 누구를 의지하며, 그 고적한 신세를 생각하는 내 마음이 어떠하리요. 지필을 대하매 마은은 진정치 못하고 눈물이 앞을 기라도다. 쌓인 회포를 다 기록하지 못하나니, 옛 사람이 이르되, ‘흥진비래(興盡悲來)요 고진감래(苦盡甘來)라’ 하니, 설마 언제나 그러리요. 지금 과거 소식이 들리니 이에 응하여 혹 뜻을 이루면, 나의 평생의 원을 풀고, 낭자의 은혜를 갚으리니 옥보망신을 완보하여 내가 돌아갈 날을 기다려서 생사를 같이함을 원하노라.’

숙향이 편지를 다 보고 흐느겨 울면서 탄식하기를,

“황성 서울이 여기서 五천여 리나 길이 요원하고 산이 망망하니, 약한 여자의 발로 찾아 가기 극난하고 또한 도중의 강포지욕(强暴之辱)이 두려워서 좌사우량(左思右量)하나 백계무책이라.”

하루는 그런 걱정과 수심에 잠겨 있을 때, 흉흉한 소문이 들렸다.

때마침 도적이 성행하던 중, 불량배들이 이화정에 노파조차 없음을 알고 재물을 약탈하고 숙향을 겁탈한다는 소문에 숙향은 눈앞이 캄캄하여 곧 동촌리의 아는 아이를 불러다가 자세히 물어보니,

“내가 길가에서 들으니, 이화정 집에 보화가 많으니 오늘밤에 겁탈하여 보화를 나누어 갖고, 낭자를 잡아다가 저희들이 데리고 산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낭자가 그 말을 듣고 모골이 송연하고 마음이 다급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으며, 해가 저물어 황혼이 되자 더욱 초조해서, 궁리 끝에 한 가지 계교를 생각하매, 삽살개를 불러서 타일러 말하되,

“아가 지나가는 아이의 말을 들으니 오늘밤에 도적이 들어와서 재물을 수탈하고 나를 기어코 겁탈한다 하매 만일 그렇게 되기 전에 나는 죽어서 절개를 온전히 지킬 결심이다. 지금 할머니 묘소에 가서 목숨을 끊고 할머니의 해골과 함께 묻히고자 한다. 그러니 너는 할머니 묘소에 가서 영혼에게 묘방을 물어서 나의 욕을 면하게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눈물을 흘리자 청방이 다만 고개를 들어서 멍청하니 듣기만 하고 응하는 기색이 없더라. 숙향은 하는 수 없이 의복 두어 가지를 보에 싸고 개가 할머니 묘소에 인도라기를 바랐으나, 청방은 누운 채 일어나지 않으매 숙향이 더욱 황망하여 개에게 호소하기를,

“네 비록 짐승이지만, 지금 사세가 급한 줄을 알거든 생각해 봐라. 이렇게 하다가 때가 늦으면 도적의 욕을 보고 말 것이 아니냐?”

청방이 그제야 일어나서 보에 싼 것을 입으로 물어당기매, 옷보를 주자 청방이 그것을 제 등에 물어서 얹고 밖으로 나가므로 숙향이 그 뒤를 따라간즉, 얼마쯤 가던 개가 어떤 무덤에 앉고 더 가지 않더라. 숙향이 자세히 살펴보고 그것이 할머니 무덤임을 믿고, 봉분(封墳)에 엎드려 어루만지며 통곡하니라.

이때 선의 모친 상서부인이 완월루에 올라서 달구경을 하고 있을 때, 멀리서 여자의 곡성이 은은히 들려오므로 비복들에게 분부하기를,

“야심한 이때에 어떤 여자가 저리 슬피 우느냐? 누가 가서 알아 보아라.”

마침 거기 시위하고 있던, 선이 어릴 때에 섬기던 유부(乳父)가 명을 받고 울음 소리 나는 고을 찾아가 본즉 소녀 혼자 무덤 앞에서 울고 있으므로 물어 가로되,

“낭자는 누구이신데 심야에 홀로 여기서 울고 계십니까?”

유부가 공손히 절하고 묻기에 숙향이 눈을 들어서 보니 늙은이였으므로 울음을 그치고 대답하기를,

“나는 동촌에 사는 이공자(李公子)의 낭자인데, 도적의 욕이 급하므로 피해 와서, 전에 은혜지 할머니께 죽어 함께 묻히려고 합니다.”

이 말에 깜작 놀란 늙은이가 땅에 엎드리며,

“저는 이공자의 유부입니다. 이공자 모친 마님께서 소저(小姐)이 곡성을 들으시고 사정을 알아 보라 하시기로 왔는데, 소저께서 이곳에서 이러실 줄은 천만 뜻밖이옵니다. 우선 소복(小僕)의 집으로 가시면 앞으로 자연 평안하게 될까 하옵니다.”

“할아범이 이랑(李郞)의 유부라 하니 참으로 반갑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게 되었소. 승상댁 대감께서 나를 죽이라 하셨거늘 이리 하시라는 명도 없이 그댁으로 갔다가 나중에 아시게 되면 반드시 죽을지나, 나 죽기를 섧지 않으나, 할아범에게 누가 미칠 것이니 그냥 돌아 가오. 다만 이랑이 서우에서 돌아오시거든, 내가 이곳에서 죽었다고 알려 올리면 은혜가 태산 같겠소.”

“낭자의 말씀을 듣자오니 그것도 마땅한 듯하나, 제가 마님께 알려 드리고 올 때까지 기다리시고, 천금 귀체를 가볍게 하지 마십시오.”

하고 나는 듯이 되돌아 가니, 청삽살개가 등에 얹었던 옷보를 내려 놓고 숙향에게 그 옷을 입으라고 권하는 시늉을 하더라.

“네가 나로 하여금 죽으라는 뜻이라면 당을 파거라. 그러면 내가 거기 누워 죽을 테니 나를 덮어 두었가, 낭군이 오시거든 가르쳐 드려라.”

하고 숙향이가 옷을 입으니, 개는 땅을 파지 않고 이상서 댁 방향을 앉아 보였으매, 숙향은 속으로 생각해 보기를,

‘상서가 오시면 반드시 나를 죽이실 것이니, 그러면 나중에 상서의 신상에도 시비가 될 테니, 내가 스스로 죽어서 그런 시비를 낭군의 부친께 끼치지 않느니만 같지 못하다.’

하고 수건으로 목을 매려고 하자, 삽살개가 수건을 물어 빼앗아 죽지 못하게 하므로 숙향이 울면서,

“너는 왜 나를 죽지 못하게 하느냐? 구차하게 살았다가 낭군을 만나 볼 수 있거든 할머니 산소를 향해서 절해라. 그러면 네 뜻을 따라서 죽지 않겠다.”

하고, 영물로 믿는 개의 뜻을 점쳐 보려고 하였고, 그러자 개가 할머니 산소를 향하여 절하고 안심하듯이 앉았으니 숙향이 감사한 마음으로 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아직 불안한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한탄하더라.

“네가 나르 죽지 못하게 하니, 살았다가 만일 내가 욕을 볼까 두려워한다.”

이대 유부가 빨리 돌아가서 아내에게 자기 집에 숙향으 데려다 두도록 이르고, 그동안에라도 자결할지 모르니 급히 가서 구하도록 이르고 상서 댁으로 가서 부인에게 보고 온 사실을 보고하자, 부인이 그 참혹함을 동정하여 상서에 고하여,

“그 정상이 가련하오니 데려다가 근본이나 보고, 하는 양을 보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하고, 청하자 그처럼 노하던 상서도 인명을 가긍히 여기고 부인의 뜻을 허하더라. 부이은 곧 하인들에게 교자를 보내고 유모(乳母)에게 데려오도록 분부하니, 유모가 이보다 미리 혼자 숙향의 앞에 이르러서,

“저는 이공자의 유모이온데 요전에 듣자온즉 공자께서 소저와 성혼하셨다 하오나 고모부인께서 조용히 구혼하셨기로 알지 못하였더니, 그후 옥중의 곤경을 당하셔서 슬퍼하던중, 아까 왔던 바깥사람의 말을 듣자오니 공자를 뵈온 듯하와 달려 왔습니다.”

「이랑의 유모라니 나의 정의를 마음놓고 얘기할 수 있소.”

하고, 전후 경과와 사정을 다 말하고자 하였으나, 얘기가 끝나기 전에 유부가 시비들을 거느리고 와서 교자에 오르라 하면서 상서부인의 뜻을 전달하니라.

“부르시는 명이 계시니 어찌 거역하리요마는, 천한 몸으로 교자를 타기가 외람되니 걸어서 가겠소.”

하고, 사양하자 유모가 또한 전하기를,

“마님의 명이시니 교자를 사양치 마십시오.”

숙향이 마지못하여 올라서 승상부인 앞에 이르매, 시비들이 부인의 명으로 몰려 나와서 완월루로 모시더라. 숙향이 교자에서 내리니 향속 든 시비가 좌우에 나열하여 밝기가 낮과 같았으며, 한 시비의 인도로 따라가서 상서부인에게 멀리서 사배(四拜)하니, 상서부인이 옆으로 와서 앉으라 하여 자리를 같이 한즉, 숙향의 탁월한 색태(色態)에 놀라지 않는 눈이 없더라. 며느리를 처음 보느 시어머니인 상서부인도 진심으로 탄식하여,

“이만 인물이니 집 아인들 어찌 무심하였으라. 홍안박명(紅顔薄命)이라 하니 만첩수운(萬疊受運)이나 기질이 이와 같으니, 장강의 색태도 미치지 못할거다.”

하고 다시 숙향에게 묻기를,

“네 고향이 어디이고 성명은 무엇이며 나이는 몇 살이냐?”

“저는 다섯 살 때에 부모를 잃고 정처없이 구걸해 다니다가, 흰 사슴[白鹿]이 업어다가 장승상 댁 동산에 버린 것을, 그 댁에 자녀가 없어서 저를 一○년 동안 딸처럼 귀엽게 길러 주셨는데, 마침내 사고가 있어서 그 댁을 떠났으며 본향과 부모의 성명을 모르나이다.”

이 말을 들은 이상서가 거듭 묻기를,

“장승상 댁에서 무슨 일로 나와서 이화정 할미에게 와 있었느냐?”

“장승상 댁의 시비 사향이 승상의 장도와 부인의 금봉채를 훔쳐다가 제 상자 속에 두고, 제가 훔쳤다고 부인께 참소했으므로, 저는 변명이 무익하여 누명을 죽음으로 씻으려고 표진강에 몸을 던졌삽더니, 마침 채련(採蓮)하는 선녀들이 구해 주며 동리로 가라기에, 아녀자의 행색이라 거짓 병신인 체하고 가다가 기운이 파하여 갈대밭 속에서 자다가 화재를 만나서 죽게 되었더니 다행히 화덕진군이 구해 주셨으나 의복이 없어서 진퇴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더니, 의외의 이화정의 할미를 만나서 그 집에 의탁하여 있었더니, 그러던중 생각지도 않은 공자의 구혼을 받고 성혼하였사옵더니, 낙양 옥중에서 사액(死厄)을 지내옵고, 다시 하령하여 멀리 추방을 받고 북촌에 가서 사옵더니, 오늘밤에 도적에 쫓겨서 할미 무덤에서 죽으려 하였을 때, 뜻밖의 부르심을 입사와 이리 대령하였습니다.”

“남군에서 몇 달 만에 낙양까지 왔었느냐?”

승상이 또 묻더라.

“갈대밭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할미를 만났습니다.”

“남군이 여기서 三천 五○○리라. 한 달에도 오지 못할 텐데 이틀 만에 왔다니 매우 이상하다.”

라고, 상서가 깜짤 놀라서 말하고, 부인이 또 이름과 나이를 묻더라.

“이름은 숙향이요, 나이는 一六세올시다.”

“생일은 언제냐?”

“四월 초파일입니다.”

부인이 오래 생각한 끝에,

“네 모습이 과연 의젓하다. 선이를 낳을 때에 선녀들이 하던 말을 기록해 두었는데, 이제야 깨달았다.”

하고, 시녀에게 그 기록한 것을 가져오라 하여 보니 아들 선의 배필은 ‘김 전의 딸이요, 이름은 숙향’으로 분명히 적혀 있었다.

“부모의 성명을 모르면서 생년월일의 사주는 어떻게 알고 있느냐?”

부인이 또 묻자, 숙향이 말없이 엎드렸다. 부인이 바라본즉 숙향의 이마에 금자(金字)로 ‘이름 숙향․자월궁선․기축 四월 초파일 해시생’이라고 씌어져 있었다. 부인이 그것을 본 뒤에 더욱 기특히 여기고 놀라며,

“네 생년월일의 사주가 우리 선이와 같은데 네가 성를 모른다니 답답하구나.”

“그 전에 꾼 꿈에는 신인(神人)의 말씀이 낙양의 김 전이 제 부친이라 하였읍니다마는 어찌 알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애 얼마나 다행하랴.”

하고, 상서가 그렇기를 바란다는 듯이 말하니라. 부인이 상서에게,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운수선생(雲水先生)의 아들이니 문벌은 더 물을 것이 없소.”

부인이 기뻐하고, 기어코 숙향의 근본을 알아서 아들의 정실(正室)로 삼으려고 하였으며, 그 후로부터는 숙향의 부인의 좌우에 가갑게 두고 그 행동을 주야로 보니, 모든 일이 진선진미(眞善眞美)하여 하나도 그름이 없으므로 부인의 사랑은 갈수록 더하더라.

하루는 숙향이 전에 있던 집의 가장집물을 옮겨 오기를 청하니, 부인이 반신반의로 묻기를,

“도적이무엇을 남겨 두엇겠느냐?”

“중요한 것은 땅을 파고 묻었으니까 도적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럼 네가 가지 않으면 찾아오기 어렵겠구나.”

“제가 아니더라도 저 청삽살개를 데리고 가면 알려 줄 것이옵니다.”

부인은 곧 유부를 불러서,

“저 개를 데리고 소저가 있던 집에 가서 기명과 수품을 가져오게.”

하고 시키면서도, 저런 짐승이 어찌 그런 것을 알 수 있으랴고 심중으로 의아스러워하니라. 유부가 바로 하인들을 거느리고 북촌에 있는 숙향이 살던 집으로 가자, 데리고 간 개가 울 밑의 한 곳을 발로 후벼서 가리킨 곳을 깊이 파고 본즉 과연 귀중한 기명이 많이 나왔으므로 그것을 거두어 가지고 돌아와서 부인에게 고하더라.

“개조차 그렇게 영감한 것을 보매, 우리 신부는 범인이 아닌 게 분명하구나.”

하고, 더욱 사랑함이 비할 데 없더라. 그리고 어느날 숙향에게 묻기를,

“너는 침선방적(針繕紡績)을 잘 살 줄 아느냐?”

“어려서 부모를 잃고 파산하여 길에서 방황하였기 때문에 배운 바는 없사오나, 본이 있으면 무엇이든 그대로 시늉을 낼 수 있습니다.”

부인은 숙향의 재주를 시험해 보기 위하여 비단 한 필을 주면서,

“상서께서 멀지 않아 상경하실 때 입으실 관복이 무색하니 네 이 관복을 보고 지어내라.”

숙향이 명을 받고 자기 침소로 돌아와서 그 비단을 보니 천이 곱지 못하므로 자기가 작고 있던 좋은 비단과 바꾸어서 불과 반 나절 만에 관복 일습을 완성하였으니, 시녀가 부인에게 고하였으나 믿지 않고,

“관복은 예사옥과 다르기 때문에 내가 연소할 때 침재(針才) 남에 못지않았으나 닷새에 지었던 것을 소저 아무리 재주가 능하더라도, 어찌 그렇게 빠를 수가 있겠느냐? 그것은 거짓말이다.”

하고 숙향을 불러서 물은즉,

“관복은 이미 지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어찌 하올지 몰라서 즉시 아뢰지 못하였사옵니다.”

하고 관복을 갖다 부인에게 올리니, 부인이 받아서 본즉 수품제도가 그 전 관복보다 나을 뿐 아니라, 비단이 자기가 준 것이 아니므로 더욱 이상히 여기고 묻자,

“비단이 이것이 나을 듯하옵고 할미집에서 짠 것인데 마침 빛깔이 같기에 바꾸어 지었사옵니다.”

부인이 크게 놀라고 이런 재주가 천하에 어디 있으랴 대찬하고, 즉시 관복을 갖다가 상서에게 보이고 신부의 재주를 알리더라.

“관복을 새로 지었으니 입어 보시오.”

“허어, 근래는 당신이 늙어서 몸에 맞는 옷을 입기 어렵더니, 이 관복은 몸에도 맞고 솜씨도 좋으니 늙어서 굉장한 호사르 하겠구료.”

상서가 옷을 입고 매우 기뻐하므로 부인이 웃으면서,

“나는 소시에도 수품제도가 이렇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이 늙은 솜씨로 어찌 이렇게 짓겠습니까? 이것은 새로 온 자부(子婦)가 제 손으로 짠 비단을 가지고 제 손으로 지은 관복이옵니다.”

“허어! 만일 그렇다면 자부는 실로 무쌍한 재주로군.”

하고, 칭찬을 하고 흉배를 보니, 관대의 흉배가 무색해서 다른 흉배를 사 오라고까지 하니라. 그러자 부인이 상서의 작품에 맞는 흉배를 이곳에서는 창졸히 사기 어려워서 그것을 구색하려면 출발이 늦을까 염려된다고 말하니, 이 말을 들은 숙향이 상서 적품은 어떤 흉배를 다느냐고 공손히 묻더라.

“상서는 일품(一品)이며 쌍학(雙鶴)을 붙이신다.”

고 부인이 알리더라.

“제가 약간 수를 놓을 줄 아오니 해볼까 하옵니다.”

“흉배는 다른 수와 달라서 사람마다 놓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내일 상경하실 테니, 네 재주가 비록 능하더라도 어찌 하룻밤 사이에 될 수 있겠느냐?”

하고, 아예 그런 생각도 말라고 말하니라. 그러나 숙향은 침소로 물러나와서 밤을 새워서 쌍학의 수를 놓아서 이튿날 아침에 갖다 바치자, 상서 부부가 자부는 진실로 신통한 재주를 가졌다고 애중(愛重)하여 마지 않더라.

이상서가 상경하니, 황제가 인견(引見)하시고 정사를 의논하시다가 상서의 관복과 흉배가 매우 훌륭한 것을 보시고 하문하기를,

“경의 관복과 흉배는 어디서 구하였소?”

“신(臣)의 며느리가 지은 수품(手品)이옵니다.”

황제가 의외의 말로 묻되,

“경의 아들이 죽었소.”

“살아 있사옵니다.”

“허어? 그런데 경의 관복을 보니 하늘의 은하수 문채요, 흉배는 바다 가운데서 짝을 잃은 학의 외로운 형상이니, 아들이 살아 있으면 어찌 이러하오?”

상서가 황제 앞에 엎드려서 아들 선이가 며느리 숙향을 만나던 일을 아뢰니,

“허허 그 자부의 경력과 재주가 희한하오. 경의 충성이 지극하매 하늘이 현부(賢婦)를 주사 복을 도우심이 분명하오.”

하시고, 비단 一○○필을 하상(下償)하시매, 상서가 사은(謝恩)하고, 부중(府中)으로 돌아와서 황제의 하교(下敎)를 전하고, 환제의 상사품(償賜品)은 전부 자부 숙향에게 주더라. 숙향은 부중으로 온 뒤에 일신이 안한(安閑)하게 되어서 용모가 더욱 고와져 갔으므로 상서 부부의 애중이 날로 더하더라.

그러나 선(仙)은 서울 태학에서 공부하면서 숙향의 소식을 듣지 못하여심신이 울울하여 회포를 안정치 못하였으나, 마음대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매, 주야를 탄식으로 보내더니, 그러던 차에 하루는 태학의 관원들이 상소하여,

“근간에 길조(吉兆)의 태을성이 장안에 비치었으니, 과거를 보여서 인재를 잃지 마옵소서.”

하고, 황제께 권하므로 황제가 옳다고 윤허하고 곧 택일하여 과거를 시행하였는데, 이때 선이 과장(科場)에 나가서 평생의 재주를 다하여 글을 지어 장원급제로 뽑혔으며, 이 순간에 선의 명성은 천하에 떨쳤으니, 풍채가 당당하고 기질이 현양하여 만인 중에서 뛰어나더라. 황제가 인견하시고 대경기애(大驚奇愛)하사 즉시 한림학사를 제수하니, 학사가 된 선은 사은하고 고향으로 사당에 분향 보고하러 돌아가는 도중에 낙양 이화정에 이르러 곧 숙향의 거처를 찾았으나 사람은 고사하고 꼬리치고 반겨하던 삽살개도 없는 적막한 빈 집이었으며, 집안에는 일용의 기물이 하나도 없으므로, 분명히 도적이 들어서 숙향을 죽이고 간 줄 알고 심회가 통절하여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숙향낭자여, 나로 하여금 천만고초를 겪고 몸이 사망지경에 이르러 유명(幽明)간에 어찌 원혼(怨魂)이 되지 않았으리요. 내 지금 과거에 장원하여 몸이 현달(顯達)하였으나, 그대 없는 이 세상에 무엇이 귀하리요. 내 또한 그대의 뒤를 따라 죽어서 그대를 따르리라. 내 명이 또한 오래지 않으리라.”

하고 슬퍼하다가 날이 서산에 떨어지매, 다시 정신을 진정하고 냉정히 생각하고 다짐하기를,

‘이제 여기서 울어도 부질없으니 부모께 보인 후, 숙향의 분묘를 찾아서 그 죽음을 본 받아서나의 의절을 표하리라.’

하고 눈물을 거두고 고향의 본집으로 돌아오니, 그의 양친이 한림학사가 되어서 온 아들을 보고 기뻐하고, 그 영화를 축하하는 상하의 화성이 낭자하니라. 양친은 귀하게 된 아들의 손을 잡고 애중함을 이기지 못하되, 학사는 숙향의 불행을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수색이 만면할 뿐이더라. 부친 상서가 이상히 여기고 묻기를,

“네가 소년등과(少年登科)하여 부모에게 영효(榮孝)와 일신의 영광이 극하고 가문의 경사 극하거늘 무슨 일로 수색을 만면에 띠고 있느냐?”

“저인들 영친지도(榮親之道)에 어찌 기쁘지 않으리이가? 먼 행로에 일신이 피로하와 자연 그러하옵니다.”

하고, 아무런 다른 이유가 없은 듯이 대답하니, 상서부부는 아들이 자부 숙향이가 죽은 줄 알고 그런다고 짐작하고 모친이 안심시키려고,

“네가 취한 숙향은 우리 집의 현부다. 네 뜻을 알고 데려다가 지금 부중에 두고 있으니 근심하지 말라.”

하고, 알렸으나 학사는 의혹하고 손을 모아 송구스럽게 말하기를,

“장부가 어찌 천부(賤婦) 때문에 미우(眉宇)를 찌푸리겠습니까? 도중의 풍한촉상으로 몸이 불편할 따름이옵니다.”

하고, 겉으로 의젓한 대답을 하는고로 속으로는 숙향이 집에 와 있도록 부모가 허락하였다는 말에 마음이 든드나였으며, 상서 부인이 시녀에게 숙향을 데려오도록 이르니, 이윽고 숙향이 안에서 나와서 서로 상면하게 되자, 반신반의하던 학사가 눈으로 분명히 숙향을 보고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여 손발 둘 곳을 모르고 미칠 듯이 기뻐하더라. 숙향이 먼저 낮은 음성으로,

“일찍 청운의 뜻을 품으시고, 이제 영광이 비할 데 없으니 치하하옵니다.”

“요행히 득의(得意)하니 가문의 경사요, 그대를 위하여 조운모월(朝雲暮月)에 간장을 태우다가 이번에 오는 길에 이화정에 들러 보았는데, 인적은 물론 그 귀엽던 개조차 없어서 비창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였더니, 이제 집에서 서로 만나니 무슨 한이 있겠소?”

“먼 길에 피로하셨으며, 양친께서 편히 쉬라 하시온즉 잠시 침소로 가시면 하옵니다.”

선이 기쁘게 숙향의 옥 같은 손을 잡고 봉루당으로 가서 피차 사모하던 정을 달게 탐하더라. 그리고 마고할미의 문상을 하고 숙향을 위로하자,

“할머니 생각을 비롯하여 지낸 일을 생각하며 슬픈 회포가 첩첩하나, 오늘은 낭군을 모시고 즐기는 날이니 뒤에 두루 말씀드리오리다.”

이윽고 학사가 옷을 고쳐 입고 산부와 함게 정당(正堂)으로 나오자, 상서 부부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칭찬하고 상하가 모두 치하하여 마지않더라. 이튿날 친척과 근처의 사람을 초청하여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으며 다음날에는 여복야부중(呂僕射府中)에서 또 잔치를 하였다. 부인이 기뻐서 여러 문중의 부인들을 청하여 즐기면서 숙향낭자의 모든 기이한 비밀을 좌중에 설파하여 기특히 여기고 또 가엾게 여겼으나, 그것이 모두 축복하는 칭찬의 말이더라.

하루는 학사가 부친 상서에게 문안하자, 아들에게 은근히 중대한 문제를 꺼내기를,

“자부를 슬하에 두고 보니 백사가 영리하여 자못 사랑스러우나, 그 집안의 내력을 모르는 탓으로 남들이 미천한 여자를 취하였다고 시비하는 듯하고, 전자에 양왕이 너에게 구혼하기에 내가 허하였으나, 네가 현부를 택했으므로 중지하였었기로, 너는 이제 입신하였으므로 이실(二室)을 거느려도 좋게 되었으매, 양왕의 구혼을 다시 성취시켜 볼까 하는데 네 생각이 어떠냐?”

“이 문제는 제가 알아서 좋도록 하겠으니 염려 마십시오.”

하고, 이내 행장을 차려서 서울로 향하게 되자, 부모게 하직하여, 나라에 받친 몸이매, 슬하를 떠나지 않을 수 없음을 아뢰고 침소로 가서 이내 숙향에게 이별하여 말하기를,

“그대를 위하여 여러 해 마음을 상하고, 이제 서로 만나서 자리가 덥지도 못해서 또 떠나게 되니 심정이 울울하나 사세가 마지못하여 상경하니, 그대는 부모봉양을 극진히 하여 내가 바라는 바를 저버리지 말아 주오.”

“남아가 입신하면 사군(仕君)의 일은 크고, 사친(仕親)의 일은 작다 하오니, 양친 봉양은 제가 스스로 할 것이매, 학사는 갈충보국(竭忠報國)하여 유방백세(流芳百世)



“선사(仙師)께옵서 저에게 이르시되, ‘네 공부는 이미 이루었으나 장래 태을(전생의 이 선) 의 힘을 얻어야 전도가 막히지 않으리라. 이제 태을이 옥황상제께 득죄하고 인간으로 귀 양가 있다가, 황명(皇命)을 받고 봉래산으로 선약을 구하러 가다가 필경 이수부(水府)를 지 날 테니 편히 봉래산까지 모셔 드리면 후일에 반드시 은혜를 갚음이 있으리라’ 하시기로 왔습니다.”

용왕이 크게 기뻐하고,

“그러면 제 의복을 고쳐서 선관의 모습을 하고 내 공문(公文)을 가지면 도증에서 의심을 받지 않으리라.”

하고, 그를 만반 차비를 해 주었더니, 소년이 초공 이선을 향하여 절하고,

“소생은 수부의 왕자로서 일광로(日光老)의 제자이온데 스승의 명을 받들고 상공(相公)을 모시고 가려고 왔읍니다.”

이 선이 반색을 하고 용왕을 향하여,

“데리고 온 수행원은 어찌 하오리까?”

“그 사람들과 배는 도로 돌려 보내시오.”

하고, 용왕은 수신(水臣)을 불러서 영거(領去)에 보내라고 분부하더라.

초공 이 선이 지금까지 죽을 고생을 함께 한 수행원들을 하직해 보내자 용궁의 왕자가 벌써 가벼운 배 한 척을 대령하고 있기로, 이 선이 그 배에 오르자 순시간에 어디로인지 달려가더라. 번개같이 달리는 배 안에서 왕자가 이 선에게,

“공(公)은 진세속객(塵世俗客)이라 선경(仙鏡)을 임의로 왕래하지 못하시리니 먼 도중에 많 은 물신령이 검문할 때는, 제가 부왕(父王)의 공문을 빙자하겠으니 저 하는 대로 하십시 오.”

하고, 알려 주었고 회회국(回回國)에 이르니 사람들이 바다로 다니지 않고 뭍으로 돌아다녔는데, 그 나라를 지키는 왕의 성명은 정성(井星)으로서 성품이 매우 온순하더라. 왕자가 왕을 찾아가소 보고 부왕의 공문을 드리니, 왕이 즉시 통과허가의 인을 찍어 주고, 나와서 초공을 만나 보고 공경하고 전송하더라.

또 한 나라에 이르니 아 나라의 사람들은 밥을 먹지 않고 꿀만 먹고 살았으며, 왕의 성명은 필성(畢星)으로서 이 선의 선조의 후예였으니, 왕자가 대궐에 들어가서 공문을 드리니, 왕이 즉시 인을 찍어 주고 친절하게 충고하여,

“그대 태을을 인도하여 가거니와 이 앞의 길이 가장 험하니 부디 조심하라. 우리는 하늘의 이십팔수(二十八수?)로서 상제께 죄를 짓고 이 땅 위로 귀양을 와서 살고 있다. 다음의 수 성(水星)을 만나면 가장 통과가 어려울 테니 조심하라.”

용왕의 왕자는 이 호밀국(好密國)의 왕에게 사례하고 떠나서 그 다음의 유리국(유璃國)에 이르니, 이 나라 사람들은 의관과 물색이 주옥 같으나, 누리거나 비린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왕의 성명은 기성(箕星)이라하니라. 왕자가 공문을 보이려 들러가니 대뜸 책망하어 말하되,

“이곳은 선경이라 범인(凡人)이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는데, 어째서 잡인(雜人)이르 데리고 왔느냐?”

하고, 용왕의 왕자를 본 체도 하지 않으매, 초공 이 선을 인도하여 가는 사연을 고하니, 왕이 빙그레 웃으면서,

“이번은 그대 낯을 봐서 통과를 허락하마.”

하고, 공문에 인을 찍어 주니, 왕자는 겁이 나서 곧 떠나서 다음 나라 교지국(交趾國)에 이르니라. 그 나라 사람들은 오곡(五穀)을 먹지 않고 차(茶)만 먹고 살기때문에 모두 짐승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으니, 왕의 이름은 규성(奎星)이라 성질이 사나와서 타국 사람이 국경을 범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시비(是非)를 가리지 않고 잡아죽였으므로, 왕자가 이 선에게 이 나라를 통과하기 어려울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말한 뒤에, 왕에게 청하려고 궁궐로 들어가서 공문을 보이자,

“봉래산 영지(靈地)로 제가 태을을 데리고 가지만, 그는 이미 인간으로 귀양간 자인데, 왜 이곳을 지나려고 하느냐?”

하고, 노해서 왕자와 이 선을 잡아다가 구리성 안에 가두기로, 왕자가 초공에게 안심시키면서,

“규성왕이 본디 성질이 사나와서 아무의 말도 듣지 않으며, 내가 선생께 청하러 갔다 오겠 으니 잠깐 여기서 기다리시오.”

하고, 살며시 구리성에서 도망해 나와서 용궁의 일광로에게 고지국에서 이 선이 잡혀서 갇힌 사정을 일리니,

“그 왕이 본디 거북이라 내가 가지 않으면 안되겠다.”

즉시 구름을 타고 구하러 달려 왔고, 왕자는 먼저 와서 또다시 몰래 구리성에 들어가서 이 선과 함께 갇혀 있었더니, 일광로가 와서 규성왕을 보고 이 선의 사정을 말하고 양해를 구하기를,

“그분은 본디 태을인데 천상에서 옥황상제께 득죄하고 인간으로 내려와서 고초를 겪음으로 써 천상의 죄를 속죄하고, 봉래산으로 약을 구하러 가는데, 만일 태을이 가는 길을 지체시 키면 황태후의 병을 구하지 못할 터이니 지체말고 곧 놓아 드려라.”

“그렇사옵니까?”

하고, 규성왕이 이 선과 용왕의 왕자를 석방하고 공문에 인을 찍어 주므로, 그들이 다시 배를 타고 갈 적에 물 가운데서 홀연 오색구름으로 탑을 쌓았는데, 그 위에 선관 두 명이 앉아서 풍악을 울리고 있더라.

“동편에 앉은 분이 우리 스승이시고 서편에 앉은 이가 규성왕이옵니다.”

하고 왕자가 말하매, 이 선이 부러워하며 앞길이 멀고 험함을 한탄하여 마지않더라.

“우리도 멀지 않아서 그렇게 될 것이니 안심하고 기다리시오.”

왕자의 위로를 받으면서 한 곳에 이르니, 부희국(富喜國)이라는 땅인데, 사람들의 키가 열 자나 되고 사람과 짐승을 잘 잡아 먹는 무서운 풍습이 있었으니, 왕의 이름은 진성(軫星)인데 수성(水星)중의 끝의 동생[末弟”이니라. 왕자가 성중으로 통과 허가를 맡으러 들어가면서,

“제가 성중으로 가면 필연 이 나라 사람들은 공을 침해할 것이니, 급하거든 이 부적(符籍) 의 영험으로 물리치시오.”

하고 성중으로 들어갔으며, 왕은 공문을 보고 곧 인을 찍어 허가하였으나, 이 선이 왕자를 보내고 관역(官驛)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이 나라 사람들이 몰래 와서 이 선을 헤치려고 습격하니, 이 선이 당황해서 왕자가 주고 간 부적을 공중에 던지자 갑자기 풍랑이 일어서 폭한들은 물에 빠져 죽고, 이 선이 탄 배는 어디론지 달려서 걷잡을 수 없게 되더라. 이 선은 폭한들의 박해는 비록 피하였으나 왕자와는 만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크게 낙망하고 어쩔 줄을 몰라 할 때 물 속에서 홀연히 술에 취한 신선이 고래를 타고 나타나서 이 선의 배를 막고 힐난하기를,

“네 모양을 보니, 신선도 아니요 속객도 아니요 용왕도 아닌데, 어디서 용왕의 배를 훔쳐 타고 어디로 가느냐?”

“나는 중국 병부상서 초국공 이 선인데, 황태후 병환이 중하시와, 황제께서 나를 명하여 봉 래산에 가서 약을 구하러 가는 중이니 부디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흥, 가소로운 소리 작작하라. 제가 병부상서라면 옛글도 보지 못하였는냐? 삼신산(三神山) 십주(十州)란 말이 다 허무하다.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려면 진시황(秦始皇)과 한무제(漢武 帝)도 못한 일을 네가 어찌 봉래산에 갈 수 있겠느냐?”

“비록 지극히 어려운 일일지라도 군명(君命)을 받자왔으니 죽을 때까지 얻으러 가겠읍니 다.”

“그런 몽상은 그만두라. 내가 탄 이 고래가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을 순식간에 왕래하되, 아직 봉래산은 보지 못하였으니, 아무튼 나와 함께 찾아 보겠느냐?”

하고, 선관은 이 선이 탄 배를 고래에게 끌리고 정처없이 가면서, 여러 가지로 참지 못할 고통을 당하며 갔으며, 선관 한 명이 파초선(芭蕉船)을 타고 오면서 시선을 부르며 묻기를,

“그 배는 어디로 끌고 가는가?”

“이 손[客”이 나에게 술집을 가리켜 달라고 보채서 끌려간다.”

“허허허, 그거 참 좋구나. 나도 한몫 껴 볼거나.”

선관도 농을 하면서 이 선을 향하여 빈정대니,

“너는 술값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

“농들은 그만두시오. 나는 황제의 명으로 봉래산의 선약을 구하러 가는 사람인데 이 선관 에게 봉변을 당하고 있사옵니다.”

이 선은 은근히 새로 나타난 선관에게 구원을 호소하였더니, 선관이 껄걸 웃고서 묻기를,

“너는 동행하는 선관을 모르느냐? 당현종(唐玄宗)시절에 한림학사 이태백(李太白)이다. 이 기회에 그가 좋아하는 술에 취하도록 함께 먹고 싶으나, 술값이나 넉넉히 가져 왔느냐?”

“몸에 푼전이 없으니 어찌 하겠소.”

이 선이 고소(苦笑)를 하고 난처해 하는 모양을 본 적선(謫仙) 이태백이,

“돈은 없더라도 네가 가진 옥지환이 술값에는 족할거다.”

하고, 어디론지 이 선의 배를 끌고 갈 적에 멀리서 옥퉁소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므로, 이태백이 미소하면서,

“동자야, 우리 저 풍류 소리를 따라 가 보자꾸나.”

하고, 옥퉁소 소리 나는 곳으로 급히 달려가 보니, 한 명의 선관이 칠현금(七絃琴)을 물 위에 띄우고 그 위에 타고 앉아서 옥퉁소를 불고 있다가,

“아, 반갑다, 태을이 아닌가. 재미가 어떤가?”

이 선은 모를 선관이 자기를 알아 보는 것이 의아스러워서,

“진세속객이 어찌 선관을 알겠읍니까? 나는 가는 길이 바쁜데 이 이태백의 넋이라는 선관 이 잡고 놓지 않아서 큰일났읍니다.”

“허허허, 이 손이 제 아내가 준 옥지환을 팔아서 나에게 술을 사 준다고 종일 끌고 다니면 서, 술을 종내 사주지 않아서 화가 터진 판이다.”

하고 이태백이 농을 하자, 동빈 선관도,

“허허허, 너희들이 서로 끌려 다닌다 하니, 마치 까마귀처럼 암놈․숫놈을 모르겠구나.”

하고 웃으니, 이때 홀연히 선녀 一명이 연엽주(蓮葉舟)에 술을 싣고 왔으므로 동빈 선관이 묻기를,

“선녀는 어디서 오시오.”

“두목지(杜牧之) 선생이 친구를 만나려고 옥화주로 가셨으므로 그리 가나이다.”

“그건 정녕 태을을 만나기 위함이 아닐까.”

적선[李太白”이 손을 들어서 달려 오는 배를 가리키며 저 배가 아닌가 하였으므로 일동이 그 쪽을 보니, 한 선관이 소요관(逍遙冠)을 쓰고, 자색 학상의(鶴상依)를 입고 일엽주(一葉舟)를 바삐 저어오면서 초공이 선을 향하여,

“태을아, 반갑다. 그동안 인간의 재미가 어떤고? 우리 술이나 먹자.”

하고 서로 권하여 잔을 들고 있었는데, 문득 공중에서 청의동자(靑衣童子)가 내려와서 고하기를,

“안기선생께서 스승님을 곧 궁중으로 청하옵니다.”

“우리들은 곧 가야겠는데 이 태을은 어찌할까?”

하고 동빈 선관이 묻자, 두목지 선생이,

“장진이 내 학을 빼앗아 타고 봉래산으로 갔으니, 내 궁장(弓匠)을 데려다 두고, 학을 타고 쫓아가리다.”

이 말에 모두 기뻐하면서 초공 이 선에게 이별을 고하더라.

“우리 이제 이별하니 섭섭하지만 멀지않아 다시 만나볼 거다.”

두목지는 초공 이 선을 데리고 갔는데, 이윽고 어느 곳에 이르니, 큰 산이 하늘에 닿도록 높고 그 주위에 상서로운 구름[祥雲]이 서려 있었으니, 두목지는 이 선에게,

“이 산이 봉래산이니 구류선을 찾아서 선약을 구하라.”

하고 홀연히 돌아갔으므로, 이 선이 바라보니 산천이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와서 탄식하여 마지않고,

“이태백의 시에 ‘삼산은 반락 청천의요, 이수는 중분백로주[三山半落靑天外 二水中分白露 洲]라 하였더니, 짐짓 허언(虛言)이 아니로다.”

하고, 산수로 완상(玩賞)하면서 산중으로 수리(數理)를 들어가자, 그곳에서 용왕의 왕자가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이 선이 놀라고 기뻐하니 용왕의 왕자가,

“나는 이상서가 가신 곳을 몰라 이태백을 만나서 물었더니, 두목지가 인도해서 봉래산으로 가셨다기에 여기 와서 기다린 지가 오래됩니다.”

“그 두 선관들이 술을 사라고 진반농반 졸라대서 정말 땀을 빼었다.”

“하하하, 그 신선들이 모두 이상서와 전생의 벗이신고로 반가와서 농을 한 것입니다. 만일 그 신선들을 만나지 못하였으면 어찌 이 봉래산에 도달하였겠읍니까?”

하고 깊은 산중으로 점점 들어 가서, 한곳에 이르니 큰 바위들이 하늘을 찌르고 서 있었으므로 왕자가 이 선을 업고 그 험지를 순식간에 올라가서 내려 놓고,

“나는 배에 돌아가서 기다릴 테니 빨리 약을 구해 가지고 배로 돌아오시오.”

“요행히 약을 얻을지라도 이 높고 험한 산길을 나 혼자 어떻게 내려가겠는가?”

“돌아가실 때는 쉬울 것이니 근심 마시오.”

하고 가니, 이 선이 혼자 더 높은 산으로 올라가니, 한 노인이 검은 소를 타고 오다가 이 선을 보고 묻기를,

“그대는 어떤 사람인고?”

“나는 중국 병부상서 초국공 이 선이온데 구류선을 찾고 있읍니다.”

노인이 그 말을 듣더니,

“그럼 저 침향(沈香) 나무 숲으로 들어가면 높은 바위에서 바둑을 두는 신선이 있을 테니 물어보라.”

이 선이 기뻐하고 그곳으로 가 보니 과연 선관들이 바둑을 두고 있더라. 이 선이 그들 앞으로 가서 절하고 보이니,

“그대는 어떤 사람인데 감히 이곳에 들어오느냐?”

“인간 병부상서 이 선이온데, 구류선을 뵈옵고자 왔읍니다.”

그러자 청의선인(靑衣仙人)이 의아히 여기고 물으니,

“황태후의 병환이 중하셔서 황제의 명을 받들고 약을 구하려고 왔읍니다.”

이번에는 홍의선인(紅衣仙人)이 위를 가리키면서,

“구류선을 보려거든 저 상봉(上峯)으로 올라가 보라.”

“황태후 위중하시와 신자(臣子)로서 군명(君命)을 지체치 못하겠으니 약을 곧 얻어 가게 해 주십시오.”

“우리는 약을 모른다.”

이 선이 인간의 재주로는 올라갈 수 없는 상봉을 쳐다 보고 한탄하고 있을 때, 홀연히 청학(靑鶴)을 탄 신선이 오면서 이 선에게,

“자네를 오래간만에 여기서 만나니 옛 생각이 그립구나. 그래 자네는 인간의 재미가 어떠 하며, 설중매[梅香”를 만나 봤느냐?”

“인간으로서 고생할 뿐인데 전생에 알지 못하던 설중매를 어찌 알겠읍니까?”

“허허허. 자네는 인간으로 귀양가더니 천상(天上) 시절의 일을 다 잊었구먼.”

하고, 동자에게 차를 부어라 하여 이 선에게 전하였고, 이 선이 그 차를 받아 먹으니 즉시 정신이 상쾌해지면서 천상의 태을진군으로서 득죄(得罪)한 일과 봉래산에 올라가 능허선의 딸 설중매와 부부가 되어서 살던 일과, 옛친구라는 이 신선이 자기의 수하(手下)로 지내던 기억이 어제같이 소생하므로, 이 선이 길게 탄식하고,

“나는 그때 갑자기 죄를 짓고 인간으로 귀양가서 고행(苦行)이 자심한데, 자네들을 모두 무 고하니 다행일세. 그런데 설중매는 어디 있는가?”

“능허선 부부는 인간 이부상서 김 전 부부요, 설중매는 양왕의 딸이 되었으니, 장차 자네의 둘째 부인이 될 것일세.”

이 선이 긴 한숨을 쉬면서 묻기를,

“능허선 부부와 설중매는 무슨 죄로 인간으로 갔는가? 또 어찌하여 월궁소아(月宮小娥=淑 香)는 김 전의 딸이 되고, 설중매는 양왕의 딸이 되었는가?”

“능허선 부부는 방장산(方丈山)에 구경갔다가 상제께 꿀진상을 늦게 한 죄로 인간으로 귀 양갔고, 자네 아내 설중매는, 자네가 소아를 흠모하는 줄 알고 항상 소아를 잘투하더니, 전 생의 그런 원수로 후생에 소아와 부부가 되어서 서로 간장을 썩게 한 셈일세. 그리고 설중 매는 상제께 득죄한 일은 없으나, 부모와 자네가 인간으로 내려갔으므로 보려고 양수에 빠 져 죽었으므로 후생에 귀하게 되어 양왕의 공주로 태어났던 것일세.”

“아, 이젠 알겠네. 그 양왕의 딸과의 혼사를 거절하다가, 양왕이 보복으로 나를 죽이려고 봉래산의 선약을 구하도록 나를 보내라고 황제께 명하게 한 것이로군. 나는 죽어도 설중매 와 혼인을 하지 않고 소아[淑香”만 사랑하려고 하였지만, 하늘이 정하신 일이니 피할 수 없 는 운명임을 알게 되었네.”

“아차, 자네가 돌아가 때가 늦었으니 이 약을 갖고 가서, 여기서 내가 주더란 말을 말게.”

하고, 그 신선이 세 가지 선약을 주므로, 이 선이 사례하고 묻기를,

“이 약의 이름이 무엇인가?”

“작은 병에 든 물약은 환혼수(環魂水)요, 금빛약은 개언초(開言草)요, 또 한가지가 우화환 (羽化丸)일세. 지금 자네가 세상으로 돌아가면 황태후가 벌써 승하하였을 것이니, 자네가 가진 그 옥지환을 황태후 시체 위에 얹어 두면 썩은 살이 다시 소생할 것이니, 그 물약을 입에 칠해 드리게. 그래서 혼백이 돌아온 귀에 개언초를 쓰면 말을 하실 것일세.”

“그리고 이 우화선은 어디 쓸 약인가?”

이 선이 남은 한 가지 약의 용도를 물으니,

“자네가 감추어 두었다가 나이 七○이 되거든 七월 보름날에, 소아와 하나씩 나누어 먹게.”

하고, 신선은 또 차 한 잔을 권하므로 이 선이 받아 마시니, 비로소 해변에서 용왕의 왕자가 기다린다는 생각이 문득 깨달아졌으므로, 이 선은 선인에게 사례하고 당황히 왕자 있는 곳으로 간즉, 왕자가 이 선을 등에 업고 순식간에 남해 용궁으로 돌아오매, 용왕이 그를 반갑게 맞고 잔치를 베풀어 여행의 고초를 위로하더라.

“이번에는 용왕님 덕분으로 봉래산을 잘 다녀왔읍니다만, 또 천태산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이 서니 간청하기로, 용왕이 또 왕자를 불러서 천태산으로 인도해 드리라고 명하였으니, 왕자는 곧 이 선을 배에 태우고 출발하여 어느 곳에 이르자,

“이곳이 천태산이니, 약을 구하려면 마고선녀(麻姑仙女)를 만나서 청하면 쉬울 것이옵니다.”

하고, 왕자가 이 선에게 가르쳐 주었고, 봉래산 갈 때보다는 아주 쉽게 온 이 선은, 거기서 홀로 산중으로 찾아들어가니, 도중에서 큰 시내를 만났는데 물 속이 퍽 깊어서 건널 수가 없어 물가를 방황하고 있을 때, 문득 동쪽에서 소년 한 명이 사슴을 타고 오매, 이 선이 반갑게 여기고 길을 물으려고 하였으나, 소년은 사슴을 채찍질해서 나는 듯이 가버렸으므로 물을 수도 없었으며, 하는 수 없이 원망스럽게 바라보고 다시 방황해 가지니, 소나무 밑에 한 노인이 해진 누비옷을 입고 바위에 걸터앉아 있기에, 이 선이 노인 앞으로 가서 절하고,

“저는 중국 병부상서 초국공 이 선이온데, 황명을 받자와 약을 구하러 왔다가, 배가 고프고 갈 길을 모르니 인가를 가르쳐 주면 기갈을 면할까 하오니, 마고 선녀의 집을 가르쳐 주시 면 약을 얻어가겠사옵니다.”

“이 깊은 산골에 인가가 어디 있으랴. 또 내가 여기 있는 지 五만년이 되었으나 마고선녀 라는 이름은 금시초문이다.”

하고, 바위에서 일어나니, 이 선이 다시 물으려는 순간에 노인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고, 이 선이 또다시 방황하고 있을 때, 또 한 명의 노인이 석장(錫杖)을 짚고 저쪽에서 오기에 이 선이 그의 앞으로 가서 절하고 마고선녀의 집을 물으니,

“여기서 물 하나만 건너면 옥포동(玉浦洞)이 있으니 거기 가서 찾아보라.”

“물이 깊어서 건너 갈 수 없사옵니다.”

노인이 짚고 있던 석장을 시내 위에 던지자, 순간에 변해서 다리로 되더라. 그러므로, 이 선이 사례하고 물을 건너서 가보니 노인은 간데 없고, 공중에서 외치는 소리만 들리더라.

“나는 대성사(大聖寺) 부처인데 너에게 길을 가르쳤으니 잘 찾아가거라.”

이 선은 공중을 향하여 사례하고 산속으로 가는 도중에 또 한 노인이 바위 위에 앉아 있으므로, 이 선이 절하고 옥포동 가는 길을 물었으나, 노인은 대답도 하지 않고 긴 목청을 뽑아 노래 부르면서 바위 위에 누워 버렸으며, 이 선이 민망히 여기고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한 선녀가 청학을 타고 손에 천도(天桃)를 들고 와서, 이 선이 선녀에게 절하고 옥포동을 물었더니, 선녀가 황망히 답례하고,

“당신은 누구시며, 옥포동에는 왜 가려고 묻습니까?”

“마고선녀를 만나서 선약을 얻어 가려고 그럽니다.”

“당신은 길을 잘 찾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이 산중에 있은 지 오래로되 천태산 마고 선녀를 보지 못하였읍니다.”

“아아, 그러면 이 산의 이름은 무어라 합니까?”

이 선이 놀라서 크게 탄식하니,

“이 신의 이름은 옥포산이요, 골 이름은 천태동이지만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내 집에 가서 머무르고 내일 찾아보십시오.”

이 선이 고마와하며 노선녀를 따라 간즉, 좌우에 기화요초(琪花瑤草)가 난만하여 향내가 코를 찌르고, 도원경(桃源境) 선간(仙間)의 청삽살개가 한가롭게 짖고 있더라. 이 선이 선녀의 인도로 집안에 들어가니, 아담한 집이 티끌 하나 없이 정결하고, 나와서 맞는 노선녀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가니,

“내 집이 과부집이라, 손님 대접할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대접하니 허물치 마시오.”

노선녀가 황금교의를 동서편으로 갖다 놓고, 이 선에게 동편 좌석에 앉기를 청하기로, 이 선이 그 상좌를 굳이 사양한즉 노선녀가 노하여,

“당신이 내 말을 듣지 않으니 나도 당신 가실 길을 가르쳐 드리지 않겠사옵니다.”

이 선이 민망히 여기고 권하는 대로 동편 교의에 앉았더니, 노선녀는 시녀를 시켜서 팔진미(八珍味)를 권하기로, 이 선이 음식을 먹어보니 이화정의 노파집 음식 맛과 같더라. 이 선이 내심으로 혹시나 하는 생각이 나서,

“천태산이 어디입니까?”

“나도 천태산이란 산 이름이 금시초문이니, 수고롭게 허행을 하지 마시오. 필경 내 말에 따 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들을 만한 까닭이 있으면 듣겠사옵니다.”

“나도 명산(名山)에 있을 뿐 아니라, 명사의 아내가 되어서 가장 영화롭게 지내다가 남편이 득죄하여 이 땅에 왔다가, 남편이 세상을 떠나므로 어린 딸과 함께 돌아갈 길이 없어서 그 냥 살아 왔더니, 그 후에 딸이 장성하였으나 적당한 곳을 정하지 못하여 수심으로 세월을 보냈는데 오늘 천행으로 당신을 만나서 보니 첫눈에 대군자(大君子)라 청하는 바이니, 결코 위험한 길을 가지 말고, 나의 좋은 백년의 손[客]으로서 사위가 되어 주지 않겠소?”

이 선이 공손한 대답으로 사양하고,

“대단히 고마운 말씀이오나, 나는 군명을 받들고 끝까지 다니다가 선약을 구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을지언정 결코 불충지귀는 되지 않겠사옵니다.”

“당신의 말이 매우 정대(正大)하지만, 속이 막힌 옹졸한 말이오, 속담에 죽은 정승이 산 개 만 못하다 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고생만 하다가 비명원사(非命怨死)한단 말이오.내 비록 빈 곤하나 노비(奴婢)가 三천여 명이요, 전답이 수천 결이니 궁핍하지 않게 대접할 수 있사옵 니다.”

그러나 이 선은 굳이 사양하고 민망스러워하더라.

이윽고 산공야정(山空夜靜)하여 천지가 모두 괴괴히 잠들었는데, 선녀가 시녀를 시켜서 옆방을 정하게 소제하고 이 선을 인도하여 편히 쉬라고 권하더라. 이 선이 거기서 그날 밤을 편히 쉬고 다음날 아침에 보니 그 편하게 잔 집은 간데 없고 몸이 시냇가에 누워 있지 않는가? 이 선이 황홀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다가, 한참 후에야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나서 고국을 생각하고 시를 지어 읊었으며, 수십 보를 걸어가니, 한 노파가 광주리를 옆에 끼고 길가에서 산나물을 캐고 있으므로, 이 선이 가서 절하고 찬태산을 물으니,

“여기 이 산이 바로 당신이 넘어온 천태산이라.”

“옥포동은 어디 있읍니까?”

“여기가 바로 옥포동이라.”

이 선이 기뻐하고 다시 묻기를,

“그러면 마고선녀의 집은 어디입니까?”

“내 눈이 어두워서 몰라 보겠는데 당신은 누구십니까? 내가 바로 그 마고선녀이옵니다.”

이 선이 반가와서 두 번 절하고,

“나는 낙양 북촌의 이 선이온데 노선(老仙)을 찾아 약을 구하러 왔는데, 왜 나를 못 알아보 십니까?”

“아, 정말로 그러십니까? 서로 이별한 지 오래고, 또 나이가 많아서 선망후실(先忘後失)하 여 생각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숙향낭자는 무사히 잘 있사옵니까?”

이 선이 숙향의 무사를 알리고, 숙향이가 써 보낸 편지를 전하니,

“하하하, 내가 당신을 떠 보느라고 모른 체 했소이다.”

숙향의 편지를 다 읽은 뒤에 기뻐 마지 않으면서,

“내가 공자를 위하여 기다린 지 오래이옵니다.”

하고 약을 주면서, 구정을 펴고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으나, 요전에 내가 가서 숙향낭자를 만났더니 황태후가 승하하셨다 하니, 빨리 돌아가라고 알려 주니라. 이 선이 그 약을 받아 들고 사례하는 순간에, 마고선녀는 문득 간데 없더라. 이 선이 공중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며 사례하고 길을 찾아 어떤 강가에 이르니, 용왕의 왕자가 배를 대령하고 반갑게 맞아 주더라.

“제가 공(公)을 보내고 서해용궁에 갔더니 숙모의 말씀이, 개안주(開眼珠)로 김상서의 은혜 를 갚으려고, 요전에 정렬부인[淑香”이 표진강에 와서 제사지낼 때 술잔에 담아 바쳤으니 이미 상서 땅에 가 있을 것이니, 어서 댁으로 돌아가십시오.”

하고, 배에 올려 태우고 눈을 감으라고 권하므로, 이 선이 하라는 대로 눈을 감았더니 이윽고 한 곳에 이르러 눈을 떠본즉, 벌써 장안성(長安城) 一○리 밖의 해경하라는 강가이더라. 이 선이 꿈인 듯이 기뻐하면서 용왕의 왕자와 이별하고 입성(入城)하매, 황제가 즉시 알현하여, 이 선이 어전에 엎드려서,

“신이 불명하와 빨리 복명하지 못하온 죄를 청하옵니다.”

“그 방향도 모르는 몇 만리 길을 무사히 왕복하여 선약을 얻어 왔으니, 경의 충성이 놀랍 도다. 그러나 황태후께서 이미 승하하셨으니 과연 회생(回生)의 영험이 있을는지 의심스럽 소.”

하시고 시험하였는데, 먼저 옥지환을 시체 위에 얹으니 상했던 살결이 산 사람의 살 같아졌고, 입에 환혼주를 바르니 가슴에 숨기가 회복되었으나, 말은 하지 못하였으므로 입 안에 개언초를 넣으니 이윽고 말을 하므로, 또 개안주로 감은 눈 위에 세 번 문지르니 눈을 뜨고 만물을 환히 보게 되어서 완전히 소생하시더라. 이런 선약의 신기한 영험을 보고 황제와 백관이 모두 놀라 기뻐하며, 황제가 이 선의 손을 친히 잡으시고,

“경은 이런 선약을 어떻게 구하였소? 그 원로의 고생은 추측하고도 남음이 있소.”

이 선이 전후의 경과를 보고해 올리자, 황제가 칭찬하여 하는 말씀이,

“옛날에 진시황과 한무제의 위엄으로 능히 하지 못한 것을 이번에 경이 이제 선약을 구하여 황태후를 재생케 하시게 하니, 이것은 불세지공(不世之功)이매, 짐이 어찌 그 공을 갚으며, 어찌 한시라도 잊으리요. 처음의 약속대로 마땅히 천하를 반으로 나누어 주겠소.”

이 선이 엎드려 아뢰되,

“욕신(欲臣)은 사(死)라 하였사옵는데, 어찌 그같이 과도(過度)하사, 신으로 하여금 추세에 역명(逆名)을 면치 못하게 하시나이까? 바라옵건대 성상은 소신(小臣)의 미충을 살피소서.”

하고, 머리로 땅을 쳐서 피를 흘리며 사양하니, 황제가 이 선의 사양하는 뜻이 굳음을 보시고 상을 감하여 초왕(楚王)에 봉(封)하시고, 김 전으로 좌승상을 시키시고, 공을 다 갚지 못함을 한탄하시더라. 이 선은 부득이 사은퇴조(謝恩退朝)하여 부중(府中) 자기 집으로 돌아와, 부모와 장승상 부부와 정렬부인 숙향이 죽었던 사람을 다시 만난 듯하여 큰 잔치를 베푸니, 황제가 들으시고 어악(御樂)을 보내어 흥을 돋우어 주시더라.

숙향부인이 초왕으로 봉해진 남편 이 선에게,

“길을 떠나신 후에 북창 앞의 동백나무 가지가 날로 쇠진하므로 돌아오시지 못하실까 주야 로 염려되기로 대신 박명한 목숨을 끊기로 천지신명께 기약하옵더니, 하루는 꿈에 마고할 미가 와서 말하기를 이상서를 보려거든 따라 오라기에 한 산골로 들어가 보니 큰 궁전에서 상공을 보고 왔사옵니다. 상공이 아무리 양왕의 딸과 혼사를 사양하셔도 이미 하늘이 정한 배필이니 아니치 못하리다.”

숙향의 그 말을 듣고 이 선이 천태산 선녀의 집에 갔던 일을 말하고, 양왕의 딸이 알고 보니 전생에 자기의 아내였던 것을 말한즉, 숙향부인이 더욱 혼인을 권하더라.

이때에 양왕이 초왕의 부친 위왕에게 권하였으므로, 마침내 설중매[梅香”를 제 二부인으로 맞아들이기로 설정하였으니, 택일 성례하게 되어서 황제가 그 소문을 들으시고 크게 기뻐하셔서 숙향을 정렬왕비(貞烈王妃)를 봉하시고, 매향을 정숙왕비(貞淑王妃)를 봉하시었다. 그리하여 매향공주는 김승상 부부를 부모같이 섬기고, 숙향부인은 양왕 부부를 친부모같이 대접하였다. 그리하여 삼위(三位)의 부부가 화락하여 숙향부인은 이자 일녀(二子一女)를 두고 매향부인은 삼자 이녀(三子二女)를 두어서, 한결같이 소년등과(少年登科)하여 벼슬이 높고 자손이 번성하니라.

숙향부인의 장자는 태자태부(太子太傅) 겸 병부상서로 있고, 여아는 태자비(太子妃)가 돠었고, 차자는 정서대도독(征西大都督)으로 오원주천이라는 땅에 가서 오랑캐를 정벌하고 있었고, 적병을 무수히 무찌르고 어떤 적장을 죽이려고 할새 창검이 들지 않고 결박한 것이 저절로 풀렸으므로, 활로 쏘았으나 맞지 않고 도망하지도 않기로, 적병은 그러한 기적이 하늘의 도움이라 생각하고 항복하였으므로 종으로 삼아서 데리고 부중으로 돌아와서 부모께 그 사연을 자세히 고하더라. 초왕부부가 두고 친근히 부렸는데 어느 해 정월 보름에 초왕이 모든 노복(奴僕)을 불러서 뜰에서 씨름을 붙이고 유흥하였으매, 그 귀화(歸化)한 오랑캐 종이 가장 힘이 강해서 여러 사람을 이겼으므로, 초왕이 칭찬하여 마지않더라.

이때 숙향부인이 자세히 보니 그놈이 반야산에서 업어다가 마을에 갖다 두고 간 도적 같은 기억이 떠올랐으므로, 그래서 자기가 가진 수족자를 보니 역시 그 때의 도적과 방불하더라. 초왕에게 그 족자를 보이고 오랑캐 출신의 종과 비교하여 보였더니, 그 그림과 종의 얼굴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으니, 초와이 신기하게 여기고 묻기를,

“너는 옛날에 반야산에서 사람을 구한 일이 있느냐?”

“그 난리 때 반야산에서 한 계집아이가 부모를 잃고 바위틈에서 울고 있는 것을 도적이 죽 이려는 것을 제가 그 아이의 상을 보니 매우 비범하여 업어다 유곡촌(有穀村)에 두고 왔읍 니다.”

초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고 그 말을 전하자 왕비 숙향이 반겨서 그 종을 불러서 그때의 은혜를 말하고 성명을 물으니,

“제 성명은 신비해로소이다.”

하고 대답하므로, 숙향부인은 곧 금은으로 후상(厚賞)하고 초왕 이 선도 많은 상을 내렸고, 이 일을 황제에게 아뢰자 황제가 기특히 여겨서 신비해로 하여금 평서장군진서태수(平西將軍鎭西太守)로 삼으시고 모든 도적을 진정하라고 분부하셨으므로 그 후로는 서방이 평정되어 도적이 없어지더라.

어느 해, 장승상 부부 세상을 떠났으므로 예(禮)로서 후장(厚葬)하고, 매향부인의 애통하는 모양은 모든 사람을 감동시켰으며, 그 후에 위왕 부부는 또한 세상을 버리매 선산(先山)에 왕례(王禮)로 안장(安葬)했으며 그후 초왕 이 선이 七○세가 되어서 七월 보름날에 제자제손(諸子諸孫)과 가족을 거느리고 궁중에서 잔치할 때에, 한 선비가 곧장 궁중으로 들어왔으므로 초왕이 보니 그는 여등빈 선관이더라.

“그대는 어디로 해서 이렇게 오는 길이오?”

“옥황상제의 명으로 초왕을 데리러 왔으니 바삐 가십시다.”

“속객이 어찌 천상(天上)에 올라갈 수 있겠소?”

“전에 봉래산에서 그 선녀가 주던 약을 지금 가지고 계시옵니까?”

그제야 초왕 이 선이 깨닫고 즉시 약을 내어 왕비 숙향과 왕비 매향께 一개씩 먹이니, 三부처(三夫妻)의 몸이 공중으로 두둥실 떠 올라가자 초왕의 三녀 五자가 망극하여 공중을 향하고 통곡하면서 왕례(王禮)로 허장(虛葬)을 지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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