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때의 유쾌한 나흘때의 고통

 창작할 떄의 기분을 써 달란 부탁이다. 그리 끔찍한 창작가도 아닌 나이어든 그 때의 괴로움과 기쁨을 적는다 하기로니 제삼자의 흥미를 끌 것이랴. 이름도 모르는 촌부(村婦)가 평범한 아이 낳던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위인걸사(偉人傑士)의 어머니도 '어머니'로, 천한비부(賤漢卑夫)의 어머니도 '어머니'라 할진댄 나의 작품 낳는 경로를 말하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 아닐 듯도 싶다.

 잡담 제(除)하고 작품의 아기가 설 때같이 유쾌한 일은 없다. 그 거룩한 맛 기쁜 맛이란 하늘을 주어도 바꾸지 않으리라. 땅덩이를 주어도 바꾸지 않으리라. 밥을 먹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또는 눈을 딱 감고 누웠을 때나 나의 환상에서 뛰어 나오는 가지가지 인물이 각가 다른 성격으로 울며 웃으며 구르며 한숨 지으며 속살거리며 부르짖으며 내 머릿속 무대에서 선무(琁舞)를 출 때며 관현악을 아뢸 때에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그저 취하며 그저 유쾌하다. 더구나 그들이 제멋대로 제 성격에 맞을 경우와 배경을 찾아 가지고 형형색색으로 발전해 나가는 광경―혹은 비장, 혹은 처참, 부슬부슬 뿌리는 봄비처럼 유한(幽閑)하게, 푹푹 까치놀 치는 바다같이 강렬하게 때 있어 백금의 햇발이 번뜩이는 듯, 때 있어 그믐밤에 풍우(風雨)가 몰리는 듯……, 가지가지 장면 정경이 서로 얽히고 설킬 제 이에 더한 감흥이 어데 있으랴. 이른바 법열(法悅)이란 이를 의미함이리라. 만물을 창조하시렬 때의 검님의 거룩한 기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낳을 때의 고통이란! 그야말로 뼈가 깎이는 일이다. 살이 내리는 일이다. 펜을 들고 원고지를 대하기가 무시무시할 지경이다. 한 자를 쓰고 한 줄을 긁적거려 놓으면 벌써 상상할 때의 유쾌와 희열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뜻대로 그려지지 않는 나의 무딘 붓끝으로 말미암아 지긋지긋한 번민과 고뇌가 뒷덜미를 짚어버린다. '피를 뿜는 듯한 느낌'이란 것은 이를 두고 이름인가. 한껏 긴장된 머리와 신경은 말 한마디가 비위에 거슬려도 더럭더럭 부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몇 번이나 쓰던 것을 찢어 버리고 나의 천품이 너무나 보잘것없고 하잘것없는 것을 한탄한지 모르리라. 당(唐)나라 시인 백낙천(白樂天)은 “내생막작여인신(來生莫作女人身)”이라고 하였지만 내야말로 “내생에는 제발 덕분에 글 쓰는 사람이 되지 말아지이다.”하고 기도라도 올리고 싶다. 이렇듯이 괴로운 노릇이요 사람의 할 일이 비단 예술뿐이 아니어든 무슨 맛에 ‘뮤즈’의 재촉을 이처럼 심악하게 받을 것이 무엇이냐 하는 생각도 이따금 없지 않다마는 버리랴 버릴 수 없음을 어찌하랴. 한 달이 못 되어 예술의 충동을 걷잡으랴 걷잡을 수 없음을 어찌하랴. 아기 어머니 아기 낳을 때 고통을 참다 못하여 남편의 신을 돌려놓으라는 속담을 생각하고 스스로 웃는 때도 많았다.

 말이 딴 길로 나갔지만 하여튼 표현을 시작할 때는 이대도록 괴롭다. 그러나 이틀이고 사흘이고 이 고통과 번민을 겪고 나면 그 다음에는 적이 수월해서 하룻밤을 그대로 밝히어도 원고지 단 다섯 장을 못 쓰던 것이 차츰차츰 열 장 스무 장을 쓰게 된다. 고통의 검은 구름장이 터진 틈으로 유쾌한 빗발이 번쩍하고 빛나는 도수가 잦아진다. 이따금 침침한 구름장을 뚫고 나타나는 부신 햇발! 이것조차 없었던들 한 조각 단편조차 이루지 못하리라.

 이러구러 한 편을 만들어 놓고 한 번 읽어 보면 뜻대로 아니 된 구절에 눈썹을 찡기면서도 알 수 없는 만족이 가슴에 자아친다. 어떤 분은 다 지어놓은 작품을 뜯어버리기도 한다지만 나는 한번 완성한 것이면 없앨 생각은 꿈에도 없다. 잘생겼든 못생겼든 귀여운 내 아들이 아니냐. 구구절절이 읽고 또 읽으며 그렇듯이 고심참담하던 자최를 돌아볼 제 감격에 겨운 눈물이 두 뺨을 적실 때도 있었다. 이 눈물맛이야말로 달기도 하온지고! 거룩도 하온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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