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봉사고려도경/서
奉議郞[* 1]充奉使[* 2]高麗國信所提轄人船禮物,賜緋魚袋[* 3],臣徐兢[1]撰
臣聞,天子元正[* 4]大朝會畢,列四海圖籍[* 5]于庭。而王公侯伯萬國輻凑[* 6],此皆有以揆之。故有司[* 7]所藏嚴毖特甚,而使者之職,尤以是爲急。在昔成周[* 8],職方氏[* 9],掌天下之圖,以掌天下之地,辨其邦國[* 10]都鄙[* 11],四夷[* 12]八蠻[* 13]七閩[* 14]九貉[* 15]五戎[* 16]六狄[* 17]之人民,周知其利害。而行人之官[* 18],駱驛道路。若賀慶[* 19]槁檜[* 20]之類,凡五物之故,莫不有治,若康樂[* 21]厄貧[* 22]之類,凡五物之辨,莫不有書。用以復命于王,俾得以周知天下之故。外史[* 23]書之,以爲四方之志,司徒[* 24]集之,以爲土地之圖。誦訓[* 25]道之,以詔觀事,土訓[* 26]道之,以詔地事。此所以一人之尊[* 27],深居高拱[* 28]於九重,而察四方萬里之遠,如指諸掌。當沛公[* 29]初入關[* 30],蕭何[* 31]獨收秦圖書。及天下已定,而漢盡得知其阸塞[* 32]戶口者,繄何之功。隋長孫晟[* 33]之至突厥[* 34],每游獵,輒記其國土委曲,歸表聞於文帝[* 35]。口陳形埶,手畫山川,卒以展異日之效[* 36]。然則,乗輶軒[* 37],而使邦國者,其於圖籍,固所先務。矧惟高麗,在遼東,非若侯甸近服[* 38],可以朝下令而夕來上,故圖籍之作,尤爲難也。皇帝天徳地業,畢朝萬國。乃眷高麗,被遇神考,益加懐徠,遴擇在廷[* 39],將命撫賜[* 40],恩隆禮厚,前未之有。時給事中[* 41]臣允迪[* 42],以通經之才[* 43],超世之文,取甲科,著宿望。中書舎人[* 44]臣墨卿[* 45],學問高明,見於踐履[* 46],恪守[* 47]忠孝,臨事不回。竝命而行,非獨其執節專對[* 48],不減古人之膚使[* 49],而風采聞望,自足以壯朝廷之威靈,聳外夷之觀聽。拜命未行,會聞王俣[* 50]薨,遂以奠慰之禮,兼往。臣愚猥承人乏獲聯,使屬之末。事之大者,固從其長,而區區,得以專達者,又不足以補報朝廷,器使之萬一。退而自訟曰,「周爰咨詢」[* 51],歌於皇華之詩[* 52],則徧問以事,正使者之職。謹因耳目所及,博采衆説,簡去其同於中國者,而取其異焉。凡三百餘條,釐爲四十卷,物圖其形,事爲之説,名曰宣和奉使高麗圖經。臣嘗觀崇寜[* 53]中,王雲所撰雞林志。始疏其説,而未圖其形,比者,使行,取以稽考爲補已多。今臣所著 圖經,手披目覽,而遐陬[* 54]異域,舉萃於前,蓋倣古聚米[* 55]之遺制也。雖然,昔漢張騫[* 56]出使月氏[* 57],十有三年,而後歸,僅能言其所歴之國,地形物産而已。臣愚雖才不逮前人,然在高麗,纔及月餘,授館之後,則守以兵衞,凡出館不過五六。而驅馳車馬之間,獻詶尊俎[* 58]之上,耳目所及,非若十三歲之久,亦粗能得其建國立政之體,風俗事物之宜,使不逃乎繪畫紀次之列。非敢矜博,洽飾浮剽,以塵冕旒[* 59]之聴,蓋摭其事實,以復于朝,庶少逭將命之責也。有詔,上之御府,謹掇其大槩,爲之序云。宣和六年八月 日,奉議郞,充奉使高麗國信,所提轄人船禮物,賜緋魚袋,臣徐兢,謹序。
번역
편집봉의랑 충봉사 고려국신 소제할인선예물 사비어대 신 서긍이 삼가 올립니다.
내가 듣기로 천자[2]께서 정월 초하루에 큰 조회를 여시고 뜰에 사해의 도적을 펼쳐 놓으셨다. 이에 만국에서 모여든 왕, 공, 후, 백[3]이 모두 그것을 살펴보았다. 담당 관리가 특별히 삼가하며 엄격히 관리하기 때문에, 사신으로 온 이들은 더욱 서둘러 그것을 살폈다. 옛날 성주 시기에는 직방씨가 천하의 지도를 관장함으로서 천하의 땅을 관리하고 주변나라의 번성하고 쇠락함을 밝혀, 사이, 팔만, 칠민, 구맥, 오융, 육적[4]의 인민을 구별하여 기록하였기에 주나라는 이것을 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신을 맞는 행인지관이 역참과 도로에 줄지어 있어서 축하할 일이나 위로할 일이 있으면 모두 다섯 가지 예물[5]을 들이는 일을 시행하지 않은 적이 없고, 즐거운 일이나 재난을 만나 곤궁에 처한 때에도 모두 다섯 예물로 이를 헤아려 주어 이를 기록하지 않은 적이 없다. 이렇게 하여 왕의 명령에 따르도록 하니 주나라는 천하의 모든 일을 알 수 있었다.
외사는 사방의 일을 알 수 있도록 이를 기록하였고, 사도는 토지의 지도 작성을 위해 이를 모았다. 송훈이 이로서 일어났던 일을 살펴 고할 수 있었고, 토훈이 이로서 각지의 사정을 고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천자는 구중 궁궐 깊숙한 곳에서 팔짱을 끼고 있어도 사방 만리 밖의 먼 곳을 살피고, 손바닥을 들여다 보듯 할 수 있었다. 한 고조가 처음 함곡관에 들어섰을 때 소하만이 홀로 진나라의 지도를 챙겼다. 천하가 평정 된 뒤 한나라가 구석 구석의 오지에 사는 인구를 모두 알 수 있었던 것은 소하의 공이다. 수나라의 장손성은 돌궐에 가서 사냥을 나갈 때 마다 그 나라의 지형을 기록하였고 돌아와 문제에게 보고하였다. 입으로는 형세를 말하고 손으로는 산천을 그리니 전에 없던 공적을 세울 수 있었다. 따라서 유헌을 타고 방국으로 사신을 가는 자는 그 나라의 도적을 제작하는 것을 가장 우선적인 업무로 여겨야 한다. 하물며 고려는 요동에 있기에 아침에 명령하면 저녁에 답변이 올라올 수 있는 가까운 곳도 아니어서 도적의 제작 또한 어렵다. 황제께서는 하늘 같은 덕과 땅을 덮을 업적으로 모은 나라가 입조하도록 하였다. 고려를 돌아보면 두텁고 신성한 은혜를 배풀어 품어주고 달래주기를 거듭하여 특별히 인재를 가려 뽑아 위무하고 하사하였으니 은혜는 크고 예의는 두텁기가 예전에 없었던 일이다.
이 때 급사중 신 노윤적은 경서에 통달한 인재로서 문장이 뛰어나고 갑과에 합격하여 오랜 바램에 보답하였다. 중서사인 신 부묵경은 학문이 고명하고 아는 것을 실제로 행하며 충효를 정성껏 지키고 맡은 임무를 회피하지 않는다. 둘이 명을 함께 받들어 비록 전대의 자격을 지니지는 않았으나 옛 능숙한 사신에 비해 부족할 것이 없다. 풍채와 명망이 조정의 위세를 나타내기 충분하여 오랑캐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 하였다. 명을 받고 아직 출발하지 못하였는데 왕우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이에 따라 조문을 겸하여 가게 되었다. 나는 어리석어 할 일도 없으면서 일행에 합류하여 사신 행차의 말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큰 일은 정사가 맡았지만 자질구레한 일은 전달 받은 이가 재량껏 처리하였는데 나는 조정에서 내린 임무를 다 해내기 부족하여 만분의 일도 채 하지 못하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스스로 시경의 "주원자순"을 읇었는데 이 황화시가 노래하는 것은 곧 두루 묻고 듣는 것이 사신된 자의 직분이라는 것이다. 눈과 귀가 닿는 대로 대중의 이야기들을 채집하여 중국과 같은 것들은 빼고 다른 것만을 수록하였다. 모두 3백여 항목을 40 권으로 정리하니 물건은 그 모양을 그리고 이야기는 적어서 《선화봉사고려도경》이라고 이름 붙였다. 일전에 숭녕 연간에 지어진 왕운의 《계림지》를 보았다. 내용은 간략하였고 그림이 있지도 않았지만 그 덕에 사행길에 참고가 되는 것이 많았다. 이제 내가 지은 도경을 손으로 펼치고 눈으로 보면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이역이지만 바로 앞에 놓인 듯 볼 수 있으니 옛날 마원이 쌀을 모아 지형을 묘사했다는 고사를 따른 것이다. 하지만 옛날 한나라 장건은 월씨에게 사신으로 가서 13년을 보내고 와서야 그들의 역사와 지형, 산물 등을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어리석고 재주도 없는데 고려에 머문 기간도 한 달 남짓인데다 관사에 머물면서는 군사가 지키므로 관사 밖을 나선 것이 겨우 대여섯 날에 불과하다. 수레를 타고 지나가거나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에 보고 들은 것들이어서 13년을 머문 것과 같을 수는 없지만 건국, 정치, 풍속, 사물 등 알게 된 것을 빠짐 없이 그리고 써서 나열하였다. 감히 박학을 자랑하거나 덧붙여 꾸며서 황제께서 듣기에 어지럽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사실만을 주워 모아 조정에 보고하여 맡은 바 책무를 다하지 못한 책임을 조금이나마 면해보려는 것이다. 조서를 내려 어부에 올리라 하시었으니 삼가 그 사정을 적어 서문으로 삼는다.
선화 6년[6] 8월 일. 봉의랑 충봉사 고려국신 소제할인선예물 사비어대 신 서긍.
낱말 풀이
편집- ↑ 奉議郞: 봉의랑. 종6품의 문관
- ↑ 充奉使: 충봉사. 사신의 일종
- ↑ 賜緋魚袋: 사비어대. 당나라와 송나라 시기 신하에게 내린 은전
- ↑ 元正: 원정. 정월 초하루
- ↑ 圖籍: 도적. 지도와 호구 수를 함께 묶은 책
- ↑ 輻凑: 윤수. 모여들다
- ↑ 有司: 유사. 해당 업무의 담당 관리
- ↑ 成周: 성주. 주나라의 수도 낙읍의 다른 이름
- ↑ 職方氏: 직방씨. 주나라 시기 도서를 관장하던 관리
- ↑ 邦國: 방국. 주변 나라
- ↑ 都鄙: 도비. 원뜻은 도시와 시골, 여기서는 번성하고 쇠락한 정도를 말한다.
- ↑ 四夷: 사이. 동쪽의 네 오랑캐, 고려는 여기에 속했다.
- ↑ 八蠻: 팔만. 인도에서 중국 남부에 이르는 남쪽의 여덟 오랑캐.
- ↑ 七閩: 칠민. 복건, 절강의 일곱 오랑캐.
- ↑ 九貉: 구맥. 북쪽의 아홉 오랑캐
- ↑ 五戎: 오융. 서쪽의 다섯 오랑캐
- ↑ 六狄: 육적. 북쪽의 여섯 오랑캐
- ↑ 行人之官: 행인지관. 주나라 시기 주변 나라 사신을 담당하던 관리
- ↑ 賀慶: 하경. 경사스러운 일에 대하여 축하의 뜻을 표함
- ↑ 槁檜: 고회. 위로하고 애도함
- ↑ 康樂: 건락. 편안하고 즐거운 일
- ↑ 厄貧: 액빈. 재난을 맞아 곤궁에 처함
- ↑ 外史: 외사. 나라 밖의 일을 기록하던 주나라의 관직
- ↑ 司徒: 사도. 인구의 많고 적음을 기록하고 지도를 제작하던 주나라의 관직
- ↑ 誦訓: 송훈. 기록의 관리를 담당하였던 주나라의 관직
- ↑ 土訓: 토훈. 지도의 관리를 담당하던 주나라의 관직
- ↑ 一人之尊: 일인지존. 가장 존귀한 한 명, 즉 천자.
- ↑ 高拱: 고공. 팔짱을 높이 끼다, 즉 손 하나 까딱 않다
- ↑ 沛公: 포공. 한고조
- ↑ 關: 관. 함곡관을 말한다.
- ↑ 蕭何: 소하
- ↑ 阸塞: 애세, 발길이 닿기 힘든 오지
- ↑ 長孫晟: 장송성
- ↑ 突厥: 돌궐
- ↑ 文帝: 수 문제
- ↑ 異日之效: 익일지효. 전에 없던 공적
- ↑ 輶軒: 유헌. 사신이 타던 가마
- ↑ 侯甸近服: 후전근복. 부르면 바로 와서 복종할 수 있는 서울과 가까운 지방
- ↑ 遴擇在廷: 린택재정. 조정에서 인재를 가려 뽑다
- ↑ 撫賜: 무사. 위무(慰撫)와 하사(下賜)
- ↑ 給事中: 중국의 옛 관직. 감찰어사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한편, 고려에서는 중서문하성 낭사에 속한 종4품의 관직이었다.
- ↑ 允迪: 윤적. 고려로 파견된 사신의 정사였던 노윤적(路允迪)
- ↑ 通經之才: 통경지재. 경서에 통달한 인재
- ↑ 中書舎人: 중서사인. 중서성에 속한 관리
- ↑ 墨卿: 고려로 파견된 사신의 부사였던 부묵경(傅墨卿)
- ↑ 踐履: 천리. 실제로 행함
- ↑ 恪守: 각수. 정성껏 지킴
- ↑ 專對: 전대. 사신으로서 외교 문제에 단독으로 답변할 수 있는 자격
- ↑ 膚使: 능숙히 일을 처리하는 사신
- ↑ 王俣: 고려 예종 왕우(王俁)
- ↑ 周爰咨詢: 주원자순. 시경의 한 구절. 載馳載驅, 周爰咨詢 - 말은 달리면서도 두루 묻고 생각한다
- ↑ 皇華之詩: 황화지시. 주원자순 구절이 들어있는 시
- ↑ 崇寜: 숭녕. 송 휘종의 연호
- ↑ 遐陬: 하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 ↑ 聚米: 취미. 후한의 마원이 쌀을 모아 지형을 묘사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
- ↑ 張騫: 장건
- ↑ 月氏:월씨 월지
- ↑ 獻詶尊俎: 헌수존조.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 ↑ 冕旒: 면류. 면류관을 쓴 사람, 즉 황제를 뜻한다.
각주
편집- ↑ 서긍은 송 휘종의 명에 따라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돌아가 송 인종 1년(1123년) 이 책을 지었다.
- ↑ 송 휘종
- ↑ 송나라는 황제국을 표방하였으므로 주변의 나라를 자신의 번국으로 취급하여 왕, 공, 후, 백 등의 작위를 하사하였다. 고려는 대내적으로 황제를 표방하였으나 대외 관계에서는 왕의 작위를 받는 외왕내제의 정책을 취하는 나라였다.
- ↑ 동이, 서융, 남만, 북적, 칠민, 구맥 등은 중국이 주변 민족을 바라보는 전통적인 시각이었다. 모두 중화의 문명에 대비한 야만국이라는 비하가 담겨있다.
- ↑ 주례에서 정한 다섯 가지 의례를 오례(五禮)라 한다. 재사에 관련한 길례(吉禮), 장례와 관련한 흉례(凶禮), 군대의 의례인 군례(軍禮), 사신을 대접하는 빈례(賓禮), 혼례와 책봉에 관련한 가례(嘉禮)가 있다.
- ↑ 11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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