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탑/이성을 보는 눈
알지도 못하는 여인의 뺨을 전차 안에서 갈겼다. 서투른 운전수의 운전에 차체가 모로 쏠리어 비치는 몸을 진정시킨다는 게 그만 어떻게 되었던지 앞에 앉았던 젊은 여인의 뺨에 내 손은 힘차게 부딪치고야 배겨날 수 있었다.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하였으면 태도가 천연하여야 할 것인데, 그렇지를 못하다. 불쾌의 반증일까, 아픔을 못 참아서일까, 그렇지 않으면 사람 많은 데서 맞은 뺨이 부끄러워서일까? 마음이 놓이지를 못하여 다시 한번,
“과(過)히 다쳤습니까?”
그러나 힐끗 쳐다볼 뿐, 말이 없다.
비로소 깨닫게 하는 것이 전차의 동요를 빙자해서 일부러 내 몸에 손을 댄 것이지? 그리고는 다시 수작을 추근추근하게 붙이는 것이지? 하는 눈치라고 아니 볼 수 없게 그 눈은 분명 나를 흘긴다.
되어먹은 내 위인이 이러한 오해를 의심 없이 받아 무방하게 그렇게 불량스럽게 보이는 것인가? 그 순간 나는 내 외모를 마음속으로 가리가리 뜯어보며 지극히 섭섭함을 금치 못했다.
그것이 공교히 뺨이었고, 그리고 부딪침이 좀 세기에 그러지 이러한 일은 전차 안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또 얼마든지 목도해 오는 사실로 고의로서의 행동이 아닌 이상, 피차에 관대한 마음으로 서로 대해 주는 것이 승객의 도덕일 것임은 이 여인도 응당 모를 것이 아니건만 단지 상대자가 동성이 아니고 이성이라는 데서 승객으로서의 도덕적 아량에 그렇게 인색하여야 함으로 나는 단연히 오해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언제인가 한 번은 또 그것이 아마 작년 봄인 듯싶다. 어떤 벗과 같이 광화문통 큰 거리를 추어 오르다가 문득 보니 도청 곁에 만개한 앵화(櫻花)가 저도 모르게 봄의 흥취를 돋우어,
“유녹화홍춘이색(柳綠化紅春二色), 버들 푸르고, 꽃 붉으니 봄은 두 빛이더라.”
하고, 고인의 시 한 절을 입 밖에 내고 새겨 보았더니 우리 앞으로 걸어가던 한 젊은 여인이 힐끗 뒤돌아보고는 걸음을 빨리한다. 그 연인은 필시 그 시구를 자기에게 두고 들으라는 듯이 읊은 줄로 알았던 모양이다.
이러한 경우에 만일 그 여인이 그러면? 하고 돌아서 나더러 어쩌자는 게냐고 대들었던들, 나의 솔직한 변명이 족히 그 여인의 오해를 풀어 주었을 것일까? 백 번 말해도 곧이는 아니 들었으리라 짐작한다.
이성 간에는 묘하게도 오해를 이렇게 사게 된다. 그리하여 오해를 가지는 이론 자기가 잘못 하는 그대로 언제든지 그렇게 그 사람의 존재가 인식에 남아 있을 것이니 오해를 받는 이로선 이렇게도 섭섭할 데가 없다. 어찌하여 이성이 이성을 보는 눈은 그렇게도 정직하지 못한 것인가?
하긴 전차의 만원을 핑계로 모르는 체 창밖을 억지로 내다보게 만드는 괴로운 한 순간을 여자들에게 주는 그러한 불량배도 없지 않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도 가만히 보면 점잖은 사람이 별로 없음을 보게 되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그러리라고 믿어지지 않는 사람도 젊은 여자만 보면 힐끗 한 번 눈을 치떠 보고야 만다. 그 보는 법이 또한 묘하다. 앞뒤에 거리낄 사람이 없이 혼자일 때에는 대담하기 짝이 없다. 그 여자가 부끄러워 외면을 하건 말건 자기 볼 대로는 마음대로 훑어 본다. 그리고 어성버성한 동료 간으로 같이 동반이 되었을 땐, 서로들 여간 점잖은 것이 아니다. 자기 인격을 낮게 보이지 않으려고 옆으로 여자가 지나가기나 하느냐는 듯이 오히려 눈이 마주칠까 두렵게 점잖다. 그러나 허물없이 터놓고 지나는 벗으로 동반이 되었을 땐 피차에 하는 노릇이 되어서 그런지 혼자일 때보다 그것은 좀 더 대담하게 됨을 본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기 멋대로의 해석에 고집을 일률적으로 갖게 된다는 것은 그리하여 멋대로의 고집에서 영원한 오해 속에 산다는 것은 오해를 받는 편보다 하는 편이 좀 더 생활의 가치를 잃으며 살게 되는 것이 된다. 나는 오해를 받으므로 단지 마음이 좀 섭섭할 따름이나 오해를 하는 그 여자들은 확실히 참되게 살아야 빛날 생활의 그 한 부분을 영원히 속은 것이다.
여기에 나는 같은 과실을 범하고도 지극한 감격 속에 생활이 살쪄보는 한 순간을 가져 본 때가 또 있다.
노량진행의 전차를 타고 황금정(黃金町)을 지나다가 이번은 차체의 동요에서도 아니고 표를 사려 호주머니 속에서 돈을 꺼내다가 팔고비로 뒤에 앉았던 여인의 눈을 다쳤다.
“핫!”
하는 소리와 같이 팔고비에 맞히는 감촉이 있기에 돌아다보니 퍼머넌트에 핸드백을 옆에 낀 한 젊은 여자의 손은 왼쪽 눈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아이 머 괜찮아요.”
여자는 눈을 대었던 손을 떼고 미소로 인사를 받는다. 그리고는 천연한 안색을 가지려고 고개를 드나, 눈은 심히 쓰린 모양으로 뜨랴뜨랴 못 뜨고 다시 손이 눈으로 간다. 그러면서도 어디까지든지 낯빛을 화순(和順)이 가지려고 애를 쓰는 빛이 드러나는 것은 분명히 내가 미안하여할 것을 염려하는 어이넓은 마음의 표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눈의 쓰림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은 모양이다. 나를 보고는 손을 떼였다가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대이고 대이고 한다.
“과히 다쳤나 봅니다.”
“아니 과(過)치 않아요. 이제 나을 거예요.”
하고 웃으며 손을 떼는데 보니 눈물에 젖은 눈알이 빨갛게 충혈이 되어 있었다. 예상 외로 심한 듯싶었다.
여자는 세브란스병원 앞 정류장에서 내린다. 내려선 그때에야 핸드백 속에서 수건을 들어내어 눈물을 씻고, 전선주를 지나 또 거울을 들어내 제 눈을 비추어 보며 제 마음대로의 행동을 가진다. 차 안에선 사람이 많은 데 부끄러움을 꺼렸던 것이 아니라, 그 다침이 나로 하여금 헐한 것처럼 보이려고 그러한 행동을 일절 사양했음에 틀림없었다.
그 아름다운 마음씨―그 마음씨는 그 순간 내 마음속에 깊이 무젖어 들며 이제껏 두고두고 생각게 하여 생활의 살이 된다.
나는 그 여자에게 괴로움을 줌으로 생활에의 한 점의 살을 얻었다. 제 자신을 속지 않으려는 그 여자의 진지한 생활의 표현은 이렇게 내 생활에까지 빛이 되는 것이다.
뺨을 맞은 여자와, 눈을 다친 여자, 그 여자들은 꼭같은 나의 과실에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성을 보는 눈은 어이 그리 괴롭지 못하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