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로 회원들은 물론 동네의 인심은 동혁에게로 쏠렸다. 젊은 사람들의 일에 쫓아다니며 훼방까지는 놀지 않아도,

"저 녀석들은 처먹구 헐 짓들이 없어서 밤낮 몰려만 댕기는 게여."

하고 마땅치 않게 여기던 노인네까지도,

"미상불 이번에 동혁이가 어려운 일 했느니."

"아아무렴, 여부지사가 있나. 우리네 수루야 어림두 없지. 언감생심 변리를 한 푼두 아니 물다니."

하고 동혁의 칭송이 놀라웠다. 너무나 고마워서 동혁을 찾아와서 울면서 치사를 하는 부형도 있는데, 그 통에 박첨지는 아들 대신으로 연거푸 사나흘씩이나 끌려다니며 막걸리를 얻어먹고 배탈이 다 났다. 동혁은,

'자아, 빚들은 다 갚었으니까 앓던 이 빠진 것버덤 더 시원허지만, 이젠 어떻게 전답을 떨어지지 않구 지어먹을 도리를 차려야 셈들을 펴구 살어 보지.'

하고 제이단책(第二段策)을 생각하기에 골몰하였다. 그러다가,

'급허다구 우물을 들구 마시나. 처언천히 황소 걸음으루.'

하고 저 자신과 의논을 해가면서 회원들의 생활이 짧은 시일에 윤택해지지는 못하나마, 다시 빚은 얻지 않을 만치 생계를 독립할 수 있는 정도까지는 끌어올리고 말리라 하였다. 농지령(農地令)이라는 것이 발포되었대야 결국은 지주들의 맘대로 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니까, 어떻게 강도사 집뿐 아니라 다른 지주들까지도 한 십 개년 동안만 도지로 논을 내놓게 만들었으면, 힘껏 개량식으로 농사를 지어 그 수입으로 땅 마지기씩이나 장만을 하게 될 텐데…… 하고 꿍꿍이셈을 치고 있는 중이다. 회원들의 돈은 빚을 깨끗이 청산하고도 육십여 원이나 남아서, 그것을 밑천으로 새로이 소비조합을 만들 예산을 세웠다.

그러나 형의 속을 이해하지 못하는 동화는 다른 반대파의 회원들보다도 불평이 많았다. 워낙 저만 공부를 시켜 주지 않았다고 부형의 탓을 하는 터에 제 말따나 형 때문에 장가도 들지 못해서 그런지 계모 손에 자라난 아이 모양으로 자격지심이 여간 대단하지가 않다. 이번 일만 해도,

"성님두 물렁팥죽이지, 그깐 녀석을 요정을 내버리지 못헌단 말요? 겨우 변리 안 받은 게 감지덕지해서 우리 회의 회장이란 명색을 준단 말요? 난 나 혼자래두 나와 버릴 테유. 그 아니꼰 꼴을 안 보면 고만이지."

하고 투덜댄다. 그러면 동혁은,

"네 형은 창피하거나 아니꼬운 줄을 몰라서 죽치구 있는 줄 아니? 호랑이 굴 속엘 들어가야 호랑이 새끼를 얻는 법이란다."

하고 섣불리 혈기를 부리지 말라고 타이르건만, 그래도 아우는,

"흥 어느 때구 두구 보구려. 내 손으루 회관을 부숴 버리구 말 테니……."

하고 입술을 깨물며 벼른다.

"글쎄 얘야, 지금 회관을 쓰구 못 쓰는 게 시급헌 문제가 아니라니깐 그러는구나. 언제든지 우리 손으루 다시 들어오게 허구야 말걸. 왜 그렇게 성미가 급허냐." 하면서도 어느 때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서 형은 마음이 놓이지를 않았다.

조기회는 여전히 하나, 회관은 커다란 자물쇠를 채운 채 쓰지를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쓰지를 않는 게 아니라 그 동안 기천이가 여러 번 열라고 명령을 하였어도 동화와 갑산이가 쇳대를 감추고는 서로 밀고 내놓지를 않아서 쓰지를 못하고 있다.

"얘 동화야, 인제 그만 쇳대를 내놔라. 이렇게 켕기구 있다가는 필경 기천이가 남의 힘을 빌려서까지 강제루 열기가 쉬우니 그때두 너희들이 안 내놓구 배길 테냐. 무슨 회든지 우리끼리 합심만 허면 또다시 만들어질걸."

하고 순순히 타일러도, 동화는,

"아, 어느 놈이 우리가 지은 회관을 강제루 열어요? 흥, 난 그럴 때만 기다리구 있겠수."

하고 끝끝내 형하고도 타협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야학도 새 집에서 못 하고 전처럼 남의 머슴사랑을 빌려 가지고 구석구석이 하게 되었다.

🙝🙟

영신에게서는 하루 걸러큼 편지가 왔다. 침대 위에서 따로따로를 하다가 송엽장(松葉杖)을 짚고 걸음발을 타게까지 되었는데, 인제는 밥을 먹고도 소화가 잘 된다는 것이며, 의사는 좀더 조섭을 하라고 하나, 비용 관계로 더 있을 수가 없어서 불일간 퇴원을 하겠다는 반가운 소식이 뒤를 이어 왔었다. 공책에다가 일기를 쓰듯이 감상을 적은 것을 떼어 보내기도 하고, 이번에 당신이 아니었더면 벌써 황천길을 밟았을 것을 살아났다는 만강의 감사와, 떠나 보낸 뒤의 그립고 아쉬운 정을 애틋이 적어 보낸 것이었다. 이번 편지는 퇴원을 하느라고 부산한 중에 급히 쓴 연필 글씨로,

청석골의 친절한 여러 교인과 학부형들에게 에워싸여서 지금 퇴원을 합니다. 그러나 천만 사람이 있어도 이 영신에게는 새로운 생명을 주신 은인이시고 영원한 사랑이신 우리 동혁 씨와 이 기쁨을 노느지 못하는 것이 무한히 섭섭합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기쁜 소식을 전해 드리는 것은 일전에 서울 연합회에서 백현경 씨가 전위해서 내려왔었는데, 정양도 할 겸 횡빈(橫濱)에 있는 신학교로 가서 몇 해 동안 수학을 하도록 주선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올라갔는데요, 여러 해 벼르고 벼르던 유학을 하게 된 것은 기쁘지만 또다시 당신과 더 멀리 떨어져 있을 생각을 하니 무한히 섭섭해요. 지금버텀 눈물이 납니다. 어수선스러워서 고만 쓰겠어요. 답장은 청석골로―---
××월 ××일 당신의 영신

동혁은 즉시 답장을 썼다. 편지가 올 때마다 간단히 회답은 하였지만, 수술한 경과가 좋아서 안심도 되었고 동네 일로 심정이 쓰라려서 긴 편지는 쓰지 못하고 있었다. 영신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간호를 해주고 있는 동안에 무언중에 정이 더 깊어진 것을 깨달았고, 피차의 성격이나 사랑하는 도수는 가장 어려운 일을 당해 보아야 비로소 알아지고 그 깊이를 측량할 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동혁은(영신도 그렇지만) 영신이가 연애하는 사람이라느니보다도, 이미 자녀까지 낳고 살아오는 아내와 같이 느껴졌다. 그만치나 미덤성스럽고 듬숙한 맛이 있어서, 편지를 쓰는 데도 남들처럼 달콤한 문구는 쓰려야 써지지가 않았다. 무사히 퇴원하신 것을 두 손을 들어 축하합니다. 즉시 뛰어가서 완쾌하신 얼굴을 대하고는 싶지만, 지금 내가 떠나면 동네 일이 또 엉망으로 옭힐 것 같어서 험악한 형세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중이니 섭섭히 아셔도 헐 수 없는 일이외다.

유학을 가시게 된다구요? 내가 반대를 한대도 기어이 고집하고 떠나가실 줄은 알지만, 신학교로 가신다니(지원한 것은 아니라도) 신앙이 학문이 아닌 것은 농학사나 농학박사라야만 농사를 잘 지을 줄 아는 거와 마찬가지가 아닐는지요. 하여간 건강상태로 보아 당분간 자리를 떠나서 정양할 기회를 얻는 것은 나도 찬성한 것이지만…….
우리가 약속한 삼 개년 계획은 벌써 내년이면 마지막 해가 옵니다. 그런데 또 앞으로 몇 해를 은행나무처럼 떨어져 있게 될 모양이니 실로 앞길이 창창하고 아득하외다.
영신 씨! 우리의 청춘은 동아줄로 칭칭 얽어서 어디다가 붙들어 맨 줄 아십니까? 우리의 일이란 관 뚜껑을 덮을 때까지 끝나는 날이 없을 것이니, 사업을 다하고야 결혼을 하려면 백 살 천 살을 살어도 노총각의 서글픈 신세는 면하지 못하겠군요. 조선 안의 그 숱한 색시들 중에 '채영신' 석 자만 쳐다보고 눈을 꿈벅꿈벅하고 기다리는 나 자신이 못나기도 하고 어찌 생각하면 불쌍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결코 동정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나 하루바삐 우리 둘이 생활을 같이 하고 힘을 한데 모아서, 서로 용기를 돋워 가며 일을 하게 되기를 매우 조급히 기다리고 있소이다. 며칠 틈만 얻게 되면 또 한 삼백 리 마라톤을 하지요. 부디부디 몸을 쓰게 되었다고 무리한 일은 하지 마십시오! 그것만이 부탁이외다.
당신의 영원한 보호 병정
🙝🙟

어느덧 해가 바뀌어 음력으로 정월이 되었다. 학원은 구습에 의해서 일주일 동안 방학을 했지만, 명절이라 해도 계집아이들이 울긋불긋한 인조견 저고리 치마를 호사라고 입고 세배를 다닐 뿐. 흰떡 한 모태 해먹는 집이 없어, 떡 치는 소리 대신에 여기저기 오막살이에서 널을 뛰는 소리만 떨컹떨컹 하고 들린다. 한곡리에는 풍물이나 장만한 것이 있어 청년들이 두드리지만, 그만한 오락기관도 없는 청석골은 더한층 쓸쓸하다.

연일 눈이 쏟아지다가 햇발이 퍼져서 땅은 질척거려 세배꾼들의 모처럼 얻어 입은 때때옷 뒤와 버선이 진흙투성이다.

지붕에 쌓인 눈이 고드름과 함께 추녀 끝으로 녹아내려 뚜욱뚜욱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영신은 책상 앞에 턱을 괴고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의식적으로는 센티멘털리즘(哀傷主義)을 송충이와 같이 싫어하면서도, 소복을 잘못해서 건강이 전처럼 회복되지 못한 탓인지 고요한 시간만 있으면 저의 신세가 고단하고 공연히 서글픈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는 겨를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때가 있다.

'동혁 씨 말따나 아까운 청춘을 이대로 늙혀서 옳은가. 인생이란 본시 이다지도 고독한 것인가.'

하고 스스로 묻기도 하고 한숨도 짓는다.

'왜 너에게는 박동혁이가 있지 않으냐. 그 튼튼하고 미덤성스러운 남자가 너의 장래를 맡지 않었느냐?'

'그렇다. 그와 평생의 고락을 같이 할 약속을 하였다. 나는 그이를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사랑한다. 열렬히 사랑한다. 그러나 결혼을 한다고 나 한몸을 그에게 의지하려는 것은 아니다. 밥을 얻어 먹고 옷을 얻어 입고, 자녀를 낳어 주기 위한 결혼을 꿈꾸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두 사람이 육체적으로 결합이 된대도 내가 할 일이 따로 있다. 이 현실에 처한 조선의 인텔리 여성으로서 따로이 해야만 할 사업이 있다. 결혼이 그 사업을 방해한다면 차라리 연애도 결혼도 하지 말어야 한다. 청상과부처럼, 미스 필링스처럼 독신으로 늙어야만 한다.'

'그러나 외로운 것을 어찌하나. 이다지도 지향없이 헤매는 마음을 어디다가 붙들어맨단 말이냐.'

'너에게는 신앙이 있지 않으냐.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불러 왔고, 그의 독생자에게서 희생과 봉사의 정신을 배웠고, 가장 어려울 때와 괴로울 때에 주를 부르며 아침저녁 기도를 올리지 않었느냐.'

'그렇다. 그러나 인제 와서는 무형한 그네들을 믿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다. 사람을 믿고 싶다! 육안으로 보이는 좀더 똑똑한 것, 확실한 것, 즉 과학을 믿고 싶다! 직접으로 실험할 수 있는 것을, 노력하는 정비례로 그 효과를 눈앞에 볼 수 있는 그러한 일을 하고 싶다!'

영신은 마음속의 문답을 제 귀로 들을수록 생각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그는 퇴원을 한 후에 달포나 누웠다 일어나 보니, 학원 일은 청년들만 맡겨 놓아서 뒤죽박죽이다. 그 밖에도 부인들의 모임이나 모든 것으로 보아 그네들의 손으로 자치를 해나가려면 아직도 이삼 년 동안은 열심으로 지도를 해주어야만 될 것 같다. 영신은 더 누웠을 수가 없었다. 몸을 조금만 과히 움직이면 수술한 자리가 당기고 아픈 것을 억지로 참고 하루 몇 차례씩 학원으로 오르내렸다. 이것저것 분별을 하고 돌아다니려면 자연히 운동이 과도하게되고, 따라서 한번 쓰러지면 일어날 수가 없도록 피로하였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어쨌든 내 몸이 튼튼해지고 볼 일이다.'

하면서도 타고난 그의 성격이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게 한다.

'아무튼 이번 기회에 눈 딱 감고 건너가서 공부를 하고 돌아오자. 나만한 지식으로 남을 지도한다는 것부터 대담하였다. 양심에 부끄러운 일이다.'

하고 다시 한번 청석골을 떠날 결심을 하였다.

'동혁 씨는 왜 온다온다 하고 선문만 놓고 아니 올까. 또 동네에 무슨 일이 생겼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 해보다가,

'서울서 노자가 오는 대로 음력 보름께쯤 떠날 예정이니, 그 안에 꼭 와달라'고 편지를 썼다. 다시 한번 만나서 전후 일을 의논하고 싶었던 것이다.

🙝🙟

그 동안 기천이는 장근 두 달째나 누워 있었다. 병을 앓는 것이 아니라, 타동에 나가서 양반 자세를 하다가 임자를 톡톡히 만나서 졸경을 쳤는데, 골통이 깨어지고 가슴에 담이 들어서 꼼짝못하고 누워서 음력 과세를 하였다.

회장이 된 첫번 행세를 하려고 제 동네서는 못 해도 저도 돈 십 원이나 기부를 한 읍내 소방조 출초식(消防組出初式)에 참례를 했다가, 술이 엉망진창으로 취해서 밤중에 자전거를 끌고 오다가 신작롯가에 있는 주막으로 비틀거리며 들어갔다. 계집이라면 회를 치려고 드는 기천은, 그 주막 갈보의 소위 나지미상이었다. 술김에 더욱 안하무인이 된 기천은 제가 맡아 논 계집이라 기침도 아니 하고 방문을 펄썩 열었다. 허술하게 박은 돌쩌귀가 떨어지면서 문은 덜커덕 열렸다. 방 안은 캄캄하다.

"옥화야!"

"……"

대답이 없다. 기천은 구두를 신은 채 방으로 들어서며 성냥불을 확 켰다. 옥화란 계집은 발가벗은 몸을 불에 데인 버러지처럼 옴치러뜨리는데, 커다란 버선발이 이불 밖으로 쑥 비어져 나왔다. 동시에 만경을 한 듯한 기천의 눈에는 질투의 불길이 타올랐다.

"누구냐?"

소리를 바락 지르며 이불을 홱 벗겼다.

"이눔아, 넌 누구냐?"

감때가 사납게 생긴 사내는 벌떡 일어났다. 기천은 그자의 얼굴을 보고,

"이놈, 너 용준이 아니냐? 발칙헌 놈 같으니라구, 너 이놈 양반을 못 알어보구, 내가 댕기는 집인 줄 뻔히 알면서 이 죽일 놈 같으니……."

기천의 구둣발길은 대뜸 용준이라고 불린 사내의 허구리를 걷어찼다. 그 다음 순간 기천의 눈에서는 번갯불이 뻔쩍하였다. 따귀를 한 대 되게 얻어맞고 정신이 아뜩해서 쓰러지는 것을, 그 왁살스러이 생긴 사내는,

"요놈아, 술 파는 계집꺼정 다 네 계집이냐? 타동에 와서두 양반 행세를 해. 너 요놈 의법이 이 어따가 발길질을 허는 거냐?"

하고 호통을 하더니,

"아무튼 잘 만났다. 양반의 몸뚱이엔 매가 튈 줄 아느냐?"

하고 기천의 멱살을 바싹 추켜잡고 컴컴한 마당으로 끌고 나가더니,

"너 요놈의 새끼, 네놈의 집 머슴살이 삼 년에 사경두 다 못 찾아 먹구 네게 얻어맞구서 쫓겨난 내다. 어디 너 좀 견뎌 봐라."

하고 마른 정강이를 장작개비로 패고 발딱 자빠트려 놓고는 발뒤꿈치로 가슴을 사뭇 짓밟았다. 기천은 한마디 못 하고 깩! 깩! 거리며 죽도록 얻어맞는 것을 계집이 버선발로 뛰어내려가서 간신히 뜯어말렸다.

용준이는 삼 대째 강도사네 행랑살이를 하다가 언사가 불공하다고 기천에게 작대기찜질을 당하고 쫓겨나서, 그 원한을 품고 잔득 앙심을 먹고 벼르는 판에 외나무다리에서 호되게 걸려들었던 것이다.

기천은 아주 초죽음이 되었다가 새벽녘에야 간신히 저의 집으로 기어들었다. 머슴놈에게 얻어맞았다기는 창피해서,

"취중에 자전거를 타다가 봉변을 했다."

고 꾸며 대고 산골을 캐어 오너라, 약을 지어 오너라 하고 야단법석을 하였다. 분한 생각을 하면 용준이란 놈의 배를 가르고 간을 날로 씹어도 시원치 않겠지만, 창피한 소문이 날까 보아 단골 버릇인 고소도 못 하고 속으로만 꽁꽁 앓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소문은 온 동네는커녕 읍내까지도 좌악 퍼져서,

"아이고 잘코사니나! 그래두 뼈다귀는 추다렸던가?"

하고 고소해서들 하는 소리를 제 귀로만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면역소의 지휘로, 음력 대보름날을 기회삼아 한곡리 진흥회의 발회식을 열게 되었다. 낮에는 편을 갈라 윷놀이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까지도 갑산이와 동화는 회관의 열쇠를 내놓지 않았다. 발회식만 할 테니 임시로 빌려 달라고 기천이가 사람을 줄달아 보내도,

"천만읫말씀이라구 여쭤라."

하고 끝끝내 버티었다. 기천이가 읍내로 장거리로 돌아다니며 '우리 한곡리 진흥관만은 미상불 다른 동네 부럽지 않게 미리 지어 놓았다'고 제 손으로 짓기나 한 것처럼 생색을 뿌옇게 내는 것이 깨물어 죽이고 싶도록 얄미웠던 것이다.

집에서 형제가 가마니를 치고 있던 동혁은 틈틈이 손을 쉬고 눈을 딱 감고는 대세를 살펴보았다.

'허어, 이러다간 큰일나겠군. 양단간에 귀정을 지어야지.'

하고는,

"얘, 동화야!"

하고 아우를 넌지시 불렀다.

"너 인제 고만 회관 열쇠를 내놔라. 누구헌테든지 저의 주장을 굽혀선 못 쓰지만, 일이란 그때그때 형편을 봐서 임시 변통을 허는 수두 있어야지, 너무 곧이곧대루만 나가면 되레 옭히는 경우가 있느니라."

하고 타일러도, 동화는 머리를 끄덕이지 않는다.

"넌 날더러 물렁팥죽이라구 별명을 짓지만, 형두 생각허는 게 있어서 그러는 거야. 들어 봐라, 입때까지는 우리 청년들 열두 사람만이 단합해서 일을 해오지 않었니? 헌 일두 없다만…… 그런데 이번엔 기회가 좋으니 우리 온 동네 사람이 다 모이는 김에, 우리의 운동허는 범위를 훨씬 넓혀서 한번 큼직하게 활동을 해보자꾸나. 인심이 우리헌테루 쏠릴 건 정헌 이치니까, 결국은 우리들이 주장허는 대루 될 게 아니냐. 진흥회란 무슨 행정기관두 사법기관두 아니구, 그저 일종의 자치기관 비슷헌 게니까, 웬만헌 일은 우리 손으루 다 헐 수가 있단 말이다. 아무튼 강기천이 한 사람을 상대로 끝까지 다투는 동안에 동네 일은 아무것두 안 되구 그 애를 써서 지은 회관두 우리 맘대루 쓰지를 못허니 실상은 우리의 손해지 뭐냐? 그러니 모든 걸 형헌테 맡기구, 문을 열어 놔라. 잘 질 줄을 아는 사람이라야 이길 줄두 안단다."

하고 진심으로 권하였다. 동화는 그제야 마지못해서,

"난 몰루. 성님꺼정 아마 맘이 변했나 보우."

하고 갑산이와 번차례로 차고 다니던 열쇠를 끌러서 기직 바닥에다가 퉁명스러이 던졌다.

저녁때에야 회관문은 열렸다. 연합진흥회장인 면장과 협의원들과 주재소에서 부장이 나오고, 금융조합 이사며 근처의 이른바 유력자들이 상좌에 버티고 앉았다. 한곡리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매호에 한 사람씩 호주가 참석을 하게 되었는데, 상투는 거진 다 잘랐지만 색의를 장려한다고 면서기들이 장거리나 신작로에서 흰 옷 입은 사람만 보면 잉크나 먹물을 끼얹기 때문에 미처 흰 두루마기에 물감을 들여 입지 못한 사람은 핑계 김에 나오지를 않았다. 그래도 대동의 큰 회합이니만치 회관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기천이는 맨 나중에 단장을 짚고 기엄기엄 올라왔다. 그 푼더분하지 못하게 생긴 얼굴은 노랑꽃이 피었는데, 머슴에게 얻어맞은 자리가 몸을 움직이는 대로 결리는지, 몇 발자국 걷다가는 가슴에다 손을 대고 안간힘을 쓰며 낙태한 고양이 상을 한다. 그러면서도 면장과 기타 공직자에게 최경례를 하듯이 허리를 굽히는 것은 물론, 동민들이 인사를 하면 전에 없이 은근하게 답례를 하고, 그 중에도 말마디나 할 만한 사람에게는 얄궂은 추파까지 던진다.

기천이가 맨 앞줄에 가 앉자, 구석에 한덩이로 뭉쳐 앉은 회원들의 눈은 빛났다.

기천의 사촌인 구장이 개회사를 하고, 면장이 일어서서 진흥회의 필요와 역사와 또는 사명을 거진 한 시간 동안이나 늘어놓은 뒤에, 순서를 따라 회장을 선거하는 데 이르렀다. 임시 의장인 구장이 일어나서,

"지금부터 새로 창립된 우리 동네 진흥회를 대표할 회장을 선거하겠소. 물론 연령이라든지 이력이나 재산 같을 것을 보아 회장 될 만한 자격이 충분한 분을 선거할 줄 믿는 바이오."

하고 저의 사촌형을 곁눈으로 흘겨보며,

"자, 그럼 간단하게 호명을 해서 거수로 결정을 하는 것이 어떻겠소?"

하고 동민들에게 형식적으로 묻는다. 그러나 농우회의 회원들밖에는 호명이라든지 거수라든지 하는 말조차 못 알아듣고 어리둥절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좀 시간은 걸리지만 신중히 선거할 필요가 있으니 무기명으로 투표를 헙시다."

하고 동혁이가 일어서며 반대를 하는 동시에 동의를 하였다.

"찬성이오―---"

"찬성이오―---"

소리가 이구석 저구석에서 일어났다.

구장이 기천의 이름을 부르고 찬성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면, 기천의 면전이라 속으로는 마땅치 않으면서도 면에 못 이겨 남의 뒤를 따라 손을 들게 될 것을 상상한 까닭이다.

동혁이 자신은 결코 경쟁자는 아니면서도 정말 민심이 어느 편으로 돌아가나? 그것을 참고로 보려는 것이었다.

또는 기천이가 전례에 없이, 정초라고 동리의 모모한 사람을 불러다가 코들을 골도록 술을 먹였고 이러한 수단까지 쓴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단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섣달 대목에 기천의 집의 이십 원을 주마 해도 아니 판 큰 돼지가 새끼를 낳다가 염불이 빠져서 죽었다. 저의 집에서는 꺼림칙하다고 먹는 사람이 없고 장거리의 육지기를 불러다 팔려니 죽은 고기라고 단돈 오 원도 보려고 들지를 않는다. 기천은 큰 손해를 보아서 입맛은 썼으나 썩어 가는 고기를 처치할 것을 곰곰 생각하던 끝에 묘안을 얻고 무릎을 탁 쳤다.

그날 저녁 동네의 육십 이상 된 노인이 있는 집에는 죽은 지 이틀이나 되어서 검푸르게 빛 변한 돼지고기가 두 근, 혹은 세 근씩이나 세찬이란 명목으로 배달되었다. 북어 한 쾌 못 하고 과세를 하는 그네들에게…….

무기명으로 투표를 하는 데도 대필로 쓴 사람이 많았다. 여러 해 가르쳐서 한곡리 아이들은 남녀를 물론하고 글자를 모르는 아이가 거진 하나도 없게 되었건만 어른들은 반수 이상이 계통문(?通文)에 제 이름을 쓴 것도 알아보지 못하는 까막눈들이다.

매우 긴장된 공기 가운데 개표를 하게 되었다.

투표된 점수를 적어 들고 이름을 부르는 구장의 손과 입은 함께 떨렸다.

"강기천 씨 육십칠 점!"

손톱 여물을 썰고 앉았던 기천의 얼굴에는 남의 눈에 띄지 않을 만한 안심의 미소가 살짝 지나갔다.

"박동혁 씨 삼십팔 점!"

하고 나서,

"이 나머지는 몇 점씩 되지 않으니까 읽지 않겠소."

하고 구장은 목소리를 높여 투표한 사람들을 둘러보며,

"여러분의 추천으로, 당 면의 면협 의원이요 금융조합 감사요 학교 비평의원인 강기천 씨가 절대 다수로 우리 한곡리 진흥회의 회장이 되셨소이다."

라고 선언을 하였다. 내빈들측에서 박수 소리가 일어났다. 동혁은 의미 깊은 미소를 띠고 앉아서 박수하는 광경을 바라다보는데,

"반대요!"

"썩은 돼지고기가 투표를 헌 게요―---"

"암만 투표가 많어두 그건 무효요―--- 협잡이 있소!"

동화와 정득이가 번차례로 일어서며 얼굴이 시뻘개 가지고 고함을 지른다. 회관에 가득 찬 사람들의 시선은 농우회원들이 몰려 앉은 데로 쏠렸다.

기천도 그편을 힐끔 돌려다보는데 동혁은 어느 틈에 아우의 곁으로 갔다. 동화는 눈을 부릅뜨고 더한층 흥분이 되어서,

"아무리 우리 동네에 사람이 귀하기로서니, 고리대금업자가 아니면 회장감이 없단 말이오? 주막거리 갈보년허구 상관을 하다가 머슴놈헌테……."

하고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다가 형에게 입을 틀어막히듯 해서 말끝을 맺지 못하며 주저앉는다. 동혁은 아우의 내두르는 팔을 잡아 누르고 무어라고 귓속말을 하다가 손목을 잡고 밖으로 끌어냈다. 동화는 뻗딩기다 못해 끌려 나가면서도,

"너 이놈, 어디 회장 노릇을 해먹나 두구 보자! 이건 우리 회관이다. 피땀을 흘리며 지은 집이야!"

하고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가 들리는 대로, 머리를 떨어뜨리고 앉은 기천의 얼굴은 노래졌다 하얘졌다 한다. 장내는 수성수성하고 살기가 떠도는데, 구장은,

"여러분 조용허시오. 성치 못한 사람의 말을 탄할 게 없소이다."

하고 내빈들의 긴장된 얼굴을 둘러보며 연방 허리를 굽힌다.

동혁은 갑산이와 정득이를 불러내어,

"이 사람들아, 혈기를 부릴 자리가 아니야. 어서 나가서 동화가 또 못 들어오게 붙들구 있게."

하고 엄중히 명령을 한 뒤에 다시 회관으로 들어갔다.

기천은 여러 사람에게 눈총을 맞아서 얼굴 가죽이 따가운 듯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가 발딱 일어서더니,

"온, 동리에 미친놈이 있어서 창피해 견딜 수가 있어야지."

하고 중얼거리다가,

"몸이 불편해서 먼저 실례합니다."

하고 내빈석을 바라보고, 나를 좀 붙들어 달라는 듯이 허리를 굽히고는 앞에 앉은 사람을 떠다밀며 나간다.

"아, 어딜 가세요?"

"교오상, 왜 이러시오? 어서 이리 와 앉으시지요. 주책없는 젊은 것들의 함부로 지껄이는 말에 개계할 게 있소?"

하고 면장과 구장은 기천의 소매를 끌어들인다. 기천은,

"내가 이까짓 진흥회장을 허구 싶댔소? 불러다 앉혀 놓구 욕을 뵈니 온 그런 발칙한 놈들이……."

하고 한사코 뿌리치는 체하는 것을,

"자, 두말 말우. 지금버텀 교오상이 회장이 됐으니, 역원들이나 선거를 허시오."

하고 면장은 명령하듯 하고 회장석에다 기천을 앉혔다.

기천은 마지못해서 붙들려 들어온 체하면서도, 독을 못 이겨 쌔근쌔근한다. 동혁이도 억지로 흥분을 가라앉히며 기천의 하는 꼴을 바라다보았다.

유력한 편의 지지로 기천은 몇 번 사양하다가 못 이기는 체하고 회장의 자리로 나갔다.

"애헴, 애헴."

하는 밭은 기침 소리는 염소라고 별명을 듣는 저의 아버지의 목소리와 똑같다.

"에에, 본인이 박학천식임을 불고하고 회장의 책임을 맡게 된 것은 전혀 여러 동민이 자별히 애호해 주는 덕택인 줄 아오. 굳이 사퇴하는 것은 도리어 여러분의 호의를 어기는 것 같어서 부득이 이 자리에 나오게 된 것이오. 미력하나마 앞으로는 관청에서 지도하시는 대로 우리 농촌의 진흥을 위해서 전력하겠으니 여러분도 한맘 한뜻으로 나아가 주기를 바라는 바이오."

새로운 회장이 일장의 인사를 베푼 후, 금융조합 이사며 군서기와 기타 내빈들의 '이러니만치' '저리니만큼'식의 형식적인 축사가 끝났다.

역원 선거에 들어가, 동혁은 차점인 관계로 부회장 겸 서기로 지명이 되었다. 그러나 동혁은 나이도 젊고 강씨처럼 재산도 없을 뿐 아니라, 아무 이력도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끝까지 사퇴를 하였다. 서기가 되는 것만 하더라도 이 회관을 같이 지은 농우회의 회원 열두 명을 전부 역원으로 뽑아 주지 아니하면 나 홀로 중요한 책임을 맡을 수가 없다고 끝까지 고집을 해서 기어이 농우회 회원들이 실지로 일을 할 역원의 대다수를 점령하게 되었다. 오직 동화가 역원이 되는 것만은 회장과 구장이 극력으로 반대를 하여서 보류하기로 되었고, 늙은 축에는 교풍부장(矯風部長) 같은 직함을 떼어 맡겼다.

회가 흐지부지 끝이 날 무렵에야 동혁은 서기석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회원들의 박수 소리가 일제히 일어났다.

"대동의 여러분이 한자리에 모이신 계제에, 잠시 몇 마디 여쭈어 두구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우렁찬 목소리와 위풍이 있는 동작에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의 곁에 쪼그리고 앉은 기천의 존재가 납작해질 만치나 동혁의 윤곽은 큼직하였다.

"우리 동네에는 오늘버텀 진흥회라는 것이 생겼고 강기천 씨와 같은 유력하신 분이 회장이 되신 것은 피차에 경축할 만한 일이겠습니다. 저 역시 서기 겸 회계라는 책임을 지게 되어서 두 어깨가 무거운 것을 느끼는 동시에, 여러분께서는 과거에 오랜 역사를 가진 농우회를 사랑하시던 터이니까 앞으로도 더욱 편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여러 사람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그 검붉은 얼굴이 매우 긴장해진다. 내빈들은 물론 기천이도 동혁의 입에서 무슨 말이 떨어질지 몰라서 노랑 수염을 배배 꼬아 올리며 눈만 깜박깜박하고 앉았다.

동혁은 여러 사람의 주목을 한몸에 받으며,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동네에도 진흥회가 생긴 까닭과, 진흥회란 무엇을 하는 기관이라는 것은 면장께서 자세히 설명하신 것을 들으셨으니까 잘 아실 줄 압니다. 그러나 남이 시키는 대로 덮어놓고 복종하는 것보다, 우리들의 일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지 말고 자발적으로 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력갱생입니다!

그러려면 우리 농촌에서 가장 폐단이 많은 습관과 우리의 생활이 이다지도 빈곤하게 된 까닭이 도대체 어디 있나? 하는 것을 냉정허게 생각해 보고, 그것이 그른 줄 깨닫고 그 원인을 밝힌 다음에는, 즉시 악습을 타파하고 나쁜 일을 밑둥부터 뜯어고치기 위해서 용기를 내어야 합니다. 누가 무어라든지 용단성 있게 싸워 나가야만 비로소 우리의 앞길에 광명이 비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농촌이, 줄잡어 말씀하면 우리 한곡리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가난한가! 손톱 발톱을 닳려 가며 죽두룩 일을 해도 우리의 살림살이가 왜 이다지 구차한가? 여러분은 그 까닭이 어디 있는 줄 아십니까?"

하고 대답을 기다리는 듯이 장내를 둘러보더니,

"그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까닭은, 이 자리에서 말씀하기가 거북한 사정이 있어서 저버텀도 가려운 데를 버선등 위로 긁는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마는 가장 직접으로 우리네같이 없는 사람들의 피를 빨어 가는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하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첫째는 고리대금업자입니다!"

하고 언성을 높인다. 여러 사람의 시선은 말끔 새로 난 회장의 얼굴로 쏠렸다.

"옳소―---"

그것은 갑산의 목소리였다. 저녁때가 되니까 창 밖에는 바람이 일어 불김이 없는 회관 안은 냉기가 돌건만, 누구 하나 추워하는 눈치가 보이지 않는다.

동혁은 신중히 말을 이어 고리대금업자의 발호와 간교한 착취수단으로 말미암아 빈민들의 고혈이 얼마나 빨리우고 있나 하는 것을 숫자를 들어 가며 폭로하고, "앞으로 진흥회 회원은 과거에 중변으로 쓴 돈도 금용조합에서 놓는 저리(低利) 이상으로 갚지 말고, 더구나 회의 책임자로는 절대로 돈놀이를 해먹지 못할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하고 또 실행해야 합니다."

라고 부르짖은 다음, 목소리를 떨어트리더니,

"오늘 회장이 되신 강기천 씨는 우리 농우회원들이 진 여러 해 묵은 빚을 변리는 한 푼도 받지 않으시고 깨끗이 탕감해 주셨습니다."

하고 증서를 내보이면서,

"이번 기회에 그 갸륵한 처사를 여러분께서도 칭송하실 줄 아는 동시에, 강기천 씨는 이번에 진흥회장이 되신 기념으로 여러분의 채권까지도 모조리 포기허실 줄 믿고, 조끔도 의심치 않는 바입니다."

하고는 슬쩍 기천을 흘겨본다. 이번에는 산병전(散兵戰)을 하듯이 여기저기 끼여 앉은 회원들이 마루청을 구르며 손뼉을 쳤다.

기천은 여러 사람을 바로 볼 용기가 없는 듯이 실눈을 감고 아랫입술만 자근자근 깨물고 앉았다. 팔짱을 꼈다, 손을 옆구리에 찔렀다 하는 것을 보면 앉은 자리가 바늘방석 같은 모양이나 체면상 퇴석은 하지 못하는 눈치다.

동혁은 말에 점점 열을 띠며 고리대금과 다름이 없는 장릿벼를 놓아 먹는 악습까지 타파하라고 강도사 집과 그 밖에 구장과 같은 볏섬이나 앞세우고 사는 사람들에게, 역시 세밀한 통계를 뽑은 것을 읽으며 경고를 하였다. 그 중에는 행전에다가 대님을 친 것만치나 켕겨서 슬금슬금 꽁무니 빼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동혁은 꾸짖듯이,

"안직 회가 끝나지 않았쇠다. 이것은 우리 같은 없는 사람들의 생사가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문젠데, 무단히 퇴장허는 사람이 누굽니까?"

하고 회관 안이 찌렁찌렁 울리도록 소리를 질렀다. 그 바람에 담배를 태우는 체하다가 다시 들어오는 사람은 모두 양반 행세를 하는 갓쟁이들이다.

기천은 날도 저물고 하니 말을 간단히 하라고 주의를 시키려다가, 동혁에게 우박을 맞을까 보아 내밀었던 고개가 옴씰 하고 들어갔다. 실상인즉 기천이가 진흥회장을 보느라고 갖은 수단을 다 쓴 것은, 그것이 무슨 명정감이나 되는 듯이 명예심이 발동한 까닭도 있거니와, 그보다도 취리와 장리를 놓는 데 편의를 얻고, 진흥회장이라면 무슨 권세가 대단한 벼슬로 여기는 백성들에게 위엄을 부려 재산을 늘리는 간접적 효과를 얻어 보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던 것이 관공리들과 동민들의 눈앞에서 동혁의 입으로 구린 밑천이 드러나고, 여러 사람의 결의에 복종하지 않을 수도 없는 처지를 당하고 보니 참말로 입맛이 소태 같았다. 그 눈치를 모를 리 없는 동혁은,

'헐 말은 다 해버리고 말 테다.'

하고 시꺼먼 눈동자를 굴리더니,

"또 한 가지 중요헌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빚을 갚고 장릿벼를 얻어먹지 않게 된대도, 지금처럼 논 한 마지기도 제 것이 없어 가지고는 도저히 먹구살 도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농사를 개량한대도 지주와 반타작을 해가지고는 암만해도 생계를 세울 수가 없지 않습니까? 농지령이라는 것이 생겨서 함부로 소작권을 이동허지 못허게는 됐지만, 지금 같어서는 지주들이 얼마든지 역용을 헐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 도내(道內)만 해도 농지령이 실시된 뒤에 소작쟁의의 건수가 불과 오 개월 동안에 천여 건이나 되는 것을 보아 짐작헐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지주나 소작인이 함께 살려면 적어도 한 십 년 동안은 소작권을 이동시키지 말고 금년에 받은 석수로 따져서 도지로 내맡길 것 같으면, 누구나 제 수입을 위해서 나농(懶農)을 헐 사람이 없을 겝니다. 이만헌 근본책을 실행치 못하면 '농촌진흥'이니 '자력갱생'이니 허는 것은 모두 헛문서에 지나지 못합니다."

하고 주먹으로 테이블을 탁 치고는,

"이 밖에 우리 남쪽 조선에밖에 없는 양반과 상놈을 구별하는 케케묵은 습관과 관혼상제의 비용을 절약할 것 등 허구 싶은 말씀이 많습니다마는 한꺼번에 실행하기 어려운 문제일 것 같어서 그것은 뒤로 미루겠습니다."

하고 후일을 기약한 후 단에서 내려섰다.

🙝🙟

밤은 자정이 넘은 지도 오래다. 초저녁에는 여기저기 머슴사랑에서,

"의이잇, 모다―---"

"이이키, 걸이다―---"

하고 미친놈이 생침을 맞는 듯한 소리를 지르며 장작윷을 노느라고 떠들썩하더니, 밤이 이슥해지며 한집 두집 불이 꺼지고 지금은 큰 마을 편짝에서 개 짖는 소리만 이따금 컹컹컹 들릴 뿐…….

날은 초저녁보다도 강강한데 싸래기눈이 쌀쌀하게 뿌리기 시작한다. 회관 앞에 심은 전나무 동청나무에 잎사귀는 점점 백발이 되어 간다. 대보름달은 구름 속에 잠겨 언저리만이 흐릿한데, 그 사이로 유난히 붉은빛이 도는 별 서넛은 보초병의 눈초리처럼 날카로이 땅 위에 깊이 든 눈밤을 감시하는 듯.

새로운 간판이 걸린 회관 근처는 인가와 멀리 떨어져서 무섭도록 괴괴한데, 위아래가 시꺼먼 사람이 성큼성큼 올라온다. 장성이 세지 못한 사람이 마주쳤다가는 '에그머니!' 하고 소리를 지를지도 모른다. 시꺼먼 사나이는 눈 위에 기다란 그림자를 이끌고 올라오다가, 우뚝 서서 좌우를 둘러보고 인기척이 없는 것을 살피고서야 달음질을 해서 올라간다.

기다란 그림자는 휘젓한 회관 뒤로 돌아갔다. 조금 있자 난데없는 불이 확 켜지더니 그 불덩어리는 도깨비불처럼 잠시 왔다갔다하다가, 새빨간 불꽃이 뱀의 혀끝처럼 날름거리며 추녀 끝으로 치붙어 오른다.

그때다. 검은 그림자가 올라오던 길로, 조금 더 큰 시커먼 그림자가 쏜살같이 치닫는다. 회관 뒤꼍에서 큰 그림자는 작은 그림자를 꽉 붙잡았다.

"너 이게 무슨 짓이냐?"

형은 아우의 손목을 잡았다. 석유에 담근 솜방망이에 불을 붙여 추녀 끝에다 대고 섰던 동화는 불빛에 머리끝이 쭈뼛하도록 무섭게 부릅뜬 형의 눈을 힐끔 쳐다보았다.

"이까짓 놈의 집 뒀다 뭘 허우?"

그의 입에서는 술 냄새가 훅 끼쳤다.

"이리 내라!"

동혁은 아우의 손을 비틀어 솜방망이를 꿰어 든 작대기를 뺏어 던지더니 눈 바닥에다 짓밟아서 껐다.

그러고는 아우를 꾸짖을 사이도 없이 철봉을 하듯 몸을 솟구어 창 틈을 붙잡고 지붕으로 올라가려다가 추녀 끝이 잡히지 않으니까 다시 쿠웅 하고 뛰어내려서 굴뚝으로 발돋움을 하고 지붕 위로 올라가더니,

"얘, 흙이래두 끼얹어라, 어서 어서!"

동혁은 나직이 호통을 하며 새집막이 속으로 붙어댕긴 불을 사뭇 손으로 몸뚱이로 부벼서 간신히 껐다. 그 동안 동혁의 동작은 비호같이 날래었다. '불야!' 소리를 지르거나 샘으로 물을 푸러 간다든지 해서 소동을 일으킬 것 같으면 아우가 방화범이 되어 잡혀갈 것이 아닌가.

초저녁에는 강도사 집 마당에서 젊은 사람들이 편윷을 놀았었다. 기천이가 새로 선거된 임원들을 불러 저녁을 먹이는데, 동화가 술이 취해 가지고 달려들었다.

"어째서 나 하나만 따돌리느냐? 너희놈들버텀 의리부동헌 놈들이다."

하고는 작대기를 들고 회원들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패고,

"너 이놈, 강기천이 나오너라! 네깐놈이 회장이 되면 난 도지사 노릇을 허겠다. 너 요놈, 땀 한 방울 안 흘리구 우리 회관을 뺏어 들어?"

하고 소리를 벽력같이 지르며 사랑으로 뛰어드는 것을 동혁이와 정득이, 갑산이가 간신히 붙들어다가 집으로 끌고 가서 눕혔었다.

동화가 미친 사람처럼 날뛰는 바람에 윷놀이판은 흐지부지 흩어지고, 겁이 나서 안방으로 피해 들어갔던 기천은 동화가 끌려간 뒤에야 나와서,

"그렇게 양반을 못 알어보구 폭행을 허는 놈은 한 십 년 징역을 시켜야 헌다."

고 이빨을 뽀드득뽀드득 갈며 별렀다.

동혁은 어찌나 속이 상하는지 아우를 퍽퍽 두드려 주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우의 정열과 혈기를 사랑하는 터이라,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와서,

"어서 자거라! 과붓집 수캐 모양으루 돌아댕기며 일만 저지르지 말구…… 넌 술 때문에 큰코를 한번 다치구야 말리라."

하고 곁에 누워서 이생각 저생각을 하던 끝에,

'떠나기 전에 꼭 한 번 만나야겠는데…….'

하고 영신의 생각을 하다가 잠이 어렴풋이 들었었다. 그러다가 자는 체하던 동화가 슬그머니 빠져나간 것을 헛간에서 덜커덕거리는 소리로 알고 깜짝 놀라 뛰어나가서 뒤를 밟았던 것이다.

동혁은 온통 거멍투성이가 되어 씨근거리며,

"얘 누가 알었다간 큰일난다, 큰일나!"

하고 쉬이쉬이하며 아우의 손목을 잡아 끌고 내려오는데, 뜻밖에 등 뒤에서,

"거기서 뭣들을 하셨에유?"

하는 소리가 들렸다. 형제는 머리끝이 쭈뼛해서 문칫하고 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석돌의 목소리인 것이 틀림없었다.

🙝🙟

……영신은 조선을 떠나기 전날까지 동혁을 기다렸다. 눈이 까맣게 기다리다 못해 반신료까지 붙여서 전보를 쳤다. 그래도 아무 회답이 없어서,

'이거 무슨 일이 단단히 생겼나 보다.'

하고 짐은 먼저 철도편으로 부치고 빈몸으로 한곡리를 향하여 떠났다. 동혁을 만나 보지 않고는 떠날 수가 없었고, 또는 두 사람의 장래에 관한 일도 충분히 상의해서 이번에는 아주 아퀴를 짓고 떠나려 함이었다.

영신은 허위단심으로 두 번째 제삼의 고향을 찾아왔으나 동혁의 형제와 건배는 물론 의형제를 맺었던 건배의 아내까지도 없었다. 집에만 없는 것이 아니라 온 동네가 텅 빈 듯 그네들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동혁의 어머니는,

"아이구 이게 누구요?"

하고 영신이의 손을 잡고 과부가 된 며느리를 맞아들이듯 하는데 말보다 눈물이 앞을 선다.

"아아니, 다들 어디 갔습니까?"

영신은 부지중 노인의 소매를 끌어다렸다.

"그 앤 읍내루 잡혀갔다우!"

"잡혀가다뇨?"

영신은 목소리뿐 아니라 몸까지 오들오들 떨렸다.

"그 심술패기 동화란 녀석이 회관집에 불을 지르다가 형헌테 들켜서 그날 밤으루 어디룬지 도망을 갔는데……."

"아, 그래서요?"

"그 다음날 경찰서에서 어떻게 벌써 알았는지 동화를 잡으려구 순사 형사가 쏟아져 나왔구려."

"그럼, 큰자제는요?"

"큰앤 상관두 없는 일인데, 아우 성제가 뭐 공모를 했다나, 그러구 조련질을 허다 못해서 '동화가 도망간 델 넌 알 테니 바른 대루 대라'구 딱딱거리니까, '모르는 건 모른다지 거짓말은 헐 수 없다'고 막 뻗대던 끝에……."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쉴새없이 질금질금 흘러내린다. 그러면서도,

"아무튼 춘데 방으루나 들어갑시다."

하고 영신을 끌어들이고는 한 말을 되하고 되하고 하면서,

"아이구, 인젠 자식이 둘 다 한까분에 없어졌구려. 영감마저 동혁이 밥이나 사들여 보낸다구 읍내루 쫓아가셔서……."

하고는 싸늘한 자리 위에 가 엎으러진다. 그 동안 혼자서 곡기도 끊고 며칠 밤을 울며 밝힌 모양이다.

영신은 아랫입술을 꼭 깨문 채 가엾은 노인을 위로해 줄 말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남을 위로해 줄 마음의 여유가 없다느니보다도, 제가 먼저 방바닥이라도 땅땅 치며 실컷 울고나 싶은 것을 억지로 참느라고 꽁꽁 안간힘을 썼다.

실망과 낙담을 한 끝에, 영신이도 윗목에 가 쓰러졌다. 황혼은 자취 없이 토담집 속까지 스며드는데, 주인을 잃은 도야지가 우릿간에서 꾸울꾸울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얼마 있자 읍내로 동혁의 소식을 알려고 갔던 정득이와 갑산이가 찾아와서, 영신은 그들에게서 그 동안의 자세한 경과를 듣고 궁금증만은 풀 수가 있었다. 그들의 말을 모두어 보면 윷을 놀고 오다가 동화가 회관에 불을 놓는 것을 목도한 석돌이는, 동혁의 단단한 부탁도 듣지 않고 전화통의 본색을 발휘하느라고 그 길로 기천을 찾아가서, 제 눈으로 본 것을 저저이 고해 바쳤다. 기천은 귀가 반짝 뜨여서,

"옳다구나, 인제두 이놈!"

하고 이튿날 훤하게 동이 틀 무렵에 편지를 써서 머슴에게 자전거를 내주어 읍내에 급보를 하였다.

저녁때에 중대 사건이나 난 듯이 자동차를 몰아 온 경관대는, 추녀가 불에 끄슬린 회관을 임검한 뒤에, 동혁과 농우회원들의 집을 엄밀히 뒤졌다. 동시에 눈에 핏줄을 세워 가지고 방화범을 찾다가,

"네가 어디다가 숨겨 뒀거나 도망을 시킨 게 아니냐?"

고 종주먹을 대어도, 동혁은,

"백판 모르는 일을 안다구 헐 수는 없소."

하고 끝끝내 강경히 버티다가 기어이 검거를 당해서 증인인 석돌이와 함께 읍내로 끌려갔는데, 다른 회원들도 날마다 하나둘씩 호출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영신은 저도 함께 겪은 것처럼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가뜩이나 파리한 몸의 피가 졸아붙는 듯한 고민의 하룻밤은 밝았다. 아침 뒤에 영신은 동혁의 어머니를 위로해 주고 읍내를 향하여 떠났다.

하늘은 짙은 잿빛으로 잔뜩 찌푸리고, 비와 눈을 섞은 바람은 신작로 위를 씽씽 불어 숨이 턱턱 막힌다. 퇴원한 뒤로 조섭도 변변히 하지 못한 사람이 사십 리 길을 내처 걷기는 참으로 어려운 노릇이었다. 그러나 영신은 한시바삐 동혁을 만나 보고 싶은 생각에 마음이 죄어서 그런지 의외로 걸음이 빨리 걸렸다. 그러나 돌부리에 무심코 발끝이 채어도 아랫배가 울리고 수술한 자리가 당겨서, 한참씩 움켜쥐고 섰다가 다시 걷기를 몇 번이나 하였다.

경찰서에서는 동혁의 면회를 시켜 주지 않았다. 졸라서 들을 일도 아니지만, 사법계에서는 고등계로 밀고, 고등계에서는 사법계에서 관계한 사건이니까 우리는 모른다고 딱 잡아떼어서, 가슴속에 첩첩이 쌓인 만단설화를 어디다가 호소해야 할지 차디찬 마룻바닥에 몸부림이라도 치고 싶었다.

영신은 하도 망단해서 이방 저방으로 풀이 죽은 걸음걸이로 드나들다가,

'인제는 억지를 쓰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은 후, 다시 고등계실로 쑥 들어갔다. 겉으로는 방화사건이나, 동혁은 고등계에서 취조를 받는 듯한 낌새를 형사들의 눈치를 보아서 짐작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영신은 주임의 책상 앞에 가 버티고 앉아서,

"난 그 박동혁이란 사람허구 약혼을 헌 사람인데요, 이번에 멀리 떠나가게 돼서 단 몇 분 동안이래두 꼭 만나야겠어요."

하고는 사뭇 떼를 썼다. 이마와 양미간이 좁다랗고 몹시 신경질로 생긴 경부보는 안경 너머로 영신을 노려보며,

"한번 안 된다면 고만이지 무슨 여러 말야. 여기가 어딘 줄 아는가?"

하고 소리를 바락 지르며 부하를 시켜 당장 내쫓을 듯한 형세를 보인다. 그래도 영신은,

"여보슈, 당신두 인정이 있거든 남의 일이래두 좀 동정을 해주구려."

하고는 듣든 말든 그 동안에 제가 다 죽게 된 것을 그 사람이 살려 주었다는 것과, 두 사람의 장래의 가장 중요한 일을 의논하지 않고는 떠날 수가 없다는 사정을 좍 쏟아 놓았다.

주임은 깜박깜박하고 듣다가,

"우루사이 온나다나(귀찮은 여자를 다 보겠다)."

하고 상을 찡그리며 일어서더니, 무엇을 생각했는지 '이리 나오라'고 해서 영신을 밖으로 불러 내었다.

'옳지 인제야 면회를 시켜 주려나 보다.'

하고 영신은 우선 가슴이 설레는 것을 진정시키며 주임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영신이가 끌려 들어간 곳은 햇빛도 새어 들어오지 않는 음침한 조그만 방인데, 무시무시한 기구가 놓인 것을 보아 취조실인 것이 틀림없었다.

주임은 묻는 대로 모든 것을 속이지 않고 저저이 대면은 면회를 시켜 주겠다고 달래기도 하고 위협도 해가면서, 동혁이와의 관계며 어떻게 연락을 취해 가지고 무슨 일을 해온 것까지 미주알고주알 캐어묻는다.

배에 휘둘리고 먼 길을 걸어와서 두세 시간이나 뜻밖의 취조를 받기는 실로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그러나 영신은 흥분하는 것이 불리할 줄 알고 될 수 있는 대로 냉정히 대답을 하면서도,

'단순히 방화 범인을 숨겼다는 것이 아니고, 무슨 다른 사건이 있는 줄로 지레짐작을 허구서 이러는 게 아닐까. 이번 기회에 생트집이라도 잡으려는 게 아닐까.'

하니 말대답하기가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았다.

마주앉은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만치나 어둔 뒤에야 취조가 끝이 났다. 주임은 그제야,

"그럼, 면회는 내일 아침에 시켜 주지."

하고 한마디를 던지고 나가 버렸다.

기름이 졸아붙은 남폿불을 돋워 가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겨울 밤은 길기도 길었다. 일부러 경찰서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여관에 들어서, 동혁의 괴로이 내쉬는 입김이 유치장의 철창을 새어 저의 폐 속까지 스며드는 듯. 영신의 솜같이 풀어진 온몸의 세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액체로 스르르 녹아 버리는 듯하다. 천갈래 만갈래로 흐트러지는 심사를 주워 모을 길 없어서 잠이나 억지로 들어 보려고 미지근한 방바닥에 쓰러지면, 마룻바닥에 얄따란 담요 한 자락을 뒤집어쓰고 새우잠을 자는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온돌에 누웠기가 몸이 군시럽도록 미안쩍은 생각이 들어서 영신은 다시 일어나 앉기도 몇 번이나 하였다. 빠듯한 노자에서 사식이라도 차입할 생각을 하다가 새벽녘에야 간신히 눈을 좀 붙이려는데, 주정꾼들이 바로 옆방과 문간방으로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수작하는 것이 군청패나 경찰서 축 같은데, 계집을 하나씩 끼고 와서 추잡한 소리를 하며 떠들어 대어서 간신히 청한 잠을 또다시 놓쳐 버렸다.

……뒤숭숭한 꿈자리에서 눈을 떠보니 어느덧 날이 밝았다. 영신은 잔입으로 출근 시간이 되기를 기다려 경찰서로 갔다.

취조를 해보니 사실 별일은 없는데 언질을 잡힌 터이라 고등계 주임은 마지못해서 면회를 허락하였다.

취조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바작바작 졸이고 섰던 영신의 가슴은 달칵 내려앉았다.

옷고름을 떼어 버린 솜바지 저고리를 비둔하게 입고 떡 들어서는 동혁이! 그 얼굴에는 반가운 웃음이 가득 찼다.

"내 오실 줄 알었지요. 엊저녁 꿈에……."

하고 달려들어 악수를 하려다가 곁에 붙어 선 형사를 흘깃 보고는 주춤 물러섰다. 영신은 너무 반가워서 말문이 꽉 막힌 듯 눈물이 핑 돌아 가지고 입술만 떠는 것을 보고 동혁은,

"영신 씨 같은 여자두 이런 자리에서 눈물을 보이나요?"

하고 너그러이 웃는 입 모습으로 나무라듯 한다. 동혁의 태연자약한 태도와 얼굴빛을 보아 가장 염려했던 일은 당하지 않은 줄 알고 영신은,

"얼마나 고생이 되세요?"

하고 그제야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생이랄 게 있나요. 아무것두 듣구 보질 않으니까 되레 편헌데요. 조용히 생각헐 기회두 얻었구요."

하고는 영신의 아래위를 훑어본다.

"아직두 건강이 전만허려면 멀었는데 또 무리를 허셨군요. 그래 언제 떠나세요?"

"떠나기 전에 뵙구 가려구 왔다가 한곡리서 하룻밤 자구 왔는데, 차마 나 혼자 어떻게……."

"천만에, 내 걱정은 조금두 허지 말구 오늘이래두 떠나세요. 공부는 둘째 문제구 위선 정양을 허실 필요가 있으니까 당분간 청석골을 떠나실밖에 없어요. 그러면 자연 기분전환두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어디서든지 그저 건강에만 힘을 써주세요! 우리의 장래 일은 나간 뒤에 의논헙시다."

"그 일이 급허겠어요? 그저 속히 나오시기만 빌지요. 나 때문엔 너무 염려허지 말어 주세요. 힘 자라는 데꺼정은 조섭을 헐 테니까요. 그렇지만 또 어느 때나 만나게 될지……."

영신은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깨문다.

"사실 아무 일두 없어요. 허지만 동화가 어디루 간 걸 알 때꺼정은 나가지 못헐 것 같으니까, 좀 오래 걸릴 것두 같어요. 아무튼 나가는 대루 곧 전보를 치지요. 그때까지 맘놓구 기다려 주세요."

하면서도 동혁은 여전히 참기 어려운 마음속의 고민을 웃음으로 싸서 보이려고 애를 쓴다.

"그럼, 나오신 뒤엔 어디서 만날까요?"

살아생전 다시는 만나 보지 못할 것처럼 영신의 표정은 전에 없이 애련하다.

"우리의 일터에서 만나지요. 한곡리허구 청석골허구 합병을 해놓구서, 실컷 맘껏 만납시다."

하는데, 동혁은 등을 밀리었다. 형사가 잠깐 돌아선 사이에 동혁은 영신의 손을 덥석 잡았다. 두 사람의 혈관이 마주 얽혀서 떨리는 듯한 악수의 순간! "허어, 손이 이렇게 차서……."

동혁은 입 속으로 부르짖고 다시 한번 가냘퍼진 영신의 손을 으스러지도록 쥐고 흔들다가, 두 번째 등을 밀려서 그 손을 뿌리치며 홱 돌아섰다.

유치장으로 통한 복도의 콘크리트 바닥에 영신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서 돈짝만큼씩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