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권50
궁예
편집궁예는 신라인으로 성은 김(金)씨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며, 어머니는 헌안왕의 빈어(嬪御,임금의 첩)이며, 그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또는 경문왕(景文王)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하는데, 5월 5일에 외가에서 출생하였다고도 한다. 그 때(其時) 옥상에 긴 무지개(長虹)와 같은 흰 빛(素光)이 하늘에 까지 닿았다. 일관(日官)이 아뢰말하기를 이 아이가 중오일(重午日)[1]에 태어났고, 태어날때부터 이를 가지고 있으며, 또 광염(光焰)[2]이 이상하였으니, 장래에 국가에 이롭지 못할듯 하옵니다. 마땅히 기르지 말아주옵소서 하였다. 왕이 중사(中使)[3]를 불러 그 집에 가서 (아이를) 죽이도록 하였다. 사자(使者)가 아이를 포대기(襁褓)에서 빼았아 아이를 누(樓, 여기서는 마루) 아래로 던졌는데 유모(乳婢)가 몰래 받았는데, 잘못 손을 찔러 한눈이 멀게 되었다. (아이를) 안고 도망쳐 (유모가) 고생하며 양육했다. 나이가 10여살이 되자 유희(遊戱)하기만 하므로 비자(其婢,유모)가 말하기를, '너는 태어나고서 나라의 버림을 받아 내가 차마 보지 못해 몰래 길러 지금이 이르렀는데 너의 이런 미친 행동으로 다른사람이 반드시 알게될 것이다. 이러면 너와 나는 함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어찌하겠느냐'하였다. 그러자 궁예가 울며 그러면 내가 가서 어머니의 근심이 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세달사(世達寺)로 가니 지금의 흥교사(興敎寺)[4]이다. 머리를 깎고(祝髮)하고 중이 되어 스스로 호를 선종(善宗)이라고 붙였다. 자라서는 승려의 계율(僧律)에 따라 주의하지 않고(拘檢) 담기(膽氣)가 있었다. 재를 올리러 행차(行次)하는데 나가자 까마귀가 무언가를 물어다가 그가 소지(所持)한 바리때에 떨어뜨렸다. 보니 아첨(牙籤)[5]에 왕(王)자가 쓰여 있었다. (궁예가) 이를 숨기고 (남에게) 말하지 않고 자부(自負)했다. 신라가 보기에 쇠퇴한 시기(衰季)에 이르므로, 정치가 어지러워져 백성들이 흩어지고, 왕기(王畿)[6] 밖의 주현(州縣)이 반으로 나뉘어(相半) 상반(叛附)하고[7], 온 동네의 도적의 무리가 개미떼처럼 모여들어 일어났다. 선종(궁예)은 이런 어지러운 틈을 타서 무리를 모으면 뜻을 이룰수 있다고 보아 진성왕(眞聖王) 즉위(卽位) 5년, 대순 (大順) 2년, 신해(辛亥)년 (서기 891년) 죽주(竹州)[8]의 적괴(賊魁) 기훤(箕萱)에게 투항했다. 기훤이 깔보고 거만하여 (궁예에게) 예우하지 않았다. 선종이 답답하고 근심하여 스스로 불안하니, 마음을 가라앉혀 기훤의 부하인 원회(元會), 신훤(申煊)등을 친구로 삼았다. 경복(景福)원년 임자(壬子)년 (892년)에 북원(北原, 현 원주시)의 도적 양길(梁吉)에게 투항하였다. 양길이 예우하여 일을 맡곁다. 드디어 군사를 나누어 주니 동쪽으로 가서 땅을 공략하게 하였다.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에 머물며 주천(酒泉, 예천),내성(奈城,영월),울오(鬱烏, 평창), 어진(御珍, 울진)등의 현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받았다. 건녕(乾寧) 원년(894년) 명주(溟州, 강릉)로 들어갔는데, 무리(有衆)가 3500명[9]이나 되었다. 이 무리를 14대로 나누고 금대검모흔장귀평장일(金大黔毛昕長貴平張一)[10]등을 사상(舍上) [사상(舍上) 은 부장(部長)의 뜻][11]으로 삼고, 사졸(士卒,병사)과 더불어 감고(甘苦)와 노일(勞逸)[12]을 같이 하며 주고 빼앗음도 공공으로 돌리며 사적으로 하지 않으니 사람들의 마음(衆心)이 (그를) 존경하며 사랑(畏愛)하여, 그를 장군으로 추대했다. 이에 저족(猪足)[13],생천(狌川)[14],부약(夫若)[15],금성(金城)[16],철원(鐵圓, 철원군)등의 성을 격파했다. 군사들의 소리가 심하게 우렁차니, 패서(浿西)의 적구(賊寇,도적)중 항복해 오는 자가 많았다. 선종이 생각하길 무리가 많으므로 개국할수 있겠다고 생각해 왕을 칭하고, 내외의 관직(官職)을 갖추었다. 우리 태조[17]가 송악군(松岳郡)에서 투항하자, (궁예가 왕건에게) 철원군 태수의 자리를 주었다. 3년 병진(丙辰)[18]에 승령(僧嶺)[19],임강(臨江)[20]의 두 현을 공격해 빼았았다. 4년 정사(丁巳)년[21]에는, 인물현(仁物縣)[22]이 항복해왔다. 선종(궁예)은 송악군이 한강 이북의 이름난 군으로, 산수가 매우 뛰어나다(奇秀)하여 드디어 도읍으로 정하고, 공암(孔巖) [23]검포(黔浦)[24]혈구(穴口)[25]등의 성을 격파했다. 그때 양길은 그대로 북원(원주)에 머물러 있었다. 양길은 국원(國原, 충주)등 30여개의 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선종(궁예)의 땅이 넓고 백성이 많다는 것을 듣고 대로(大怒)하여 30여성의 경병(勁兵)[26]으로 습격하려 하였으나, 선종(궁예)이 이를 몰래 알아내어 먼저 공격하여 대패하였다. 광화(光化)원년 무오(戊午)년 봄 2월에 송악성(松岳城)을 고치고 우리 태조(왕건)을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楊州)[27]와 견주(見州)[28]를 쳤다. 겨울 11월에는 팔관회(八關會)를 시작하였다. (광화) 3년 경신(庚申)년[29]에는 태조에게 광주(廣州), 충주(忠州), 당성(唐城)[30], 청주(靑州) [또는 청천(靑川)이라고도 함][31] 괴양(槐壤)[32]등을 정벌할 것을 명하여 모두 평정하고, 공으로 태조(왕건)에게 아찬(阿湌)의 직을 주었다. 천복(天復)원년 신유(辛酉)년[33], 선종(궁예)이 왕을 자칭하고 사람들에게 알려말하기를 '지난날 신라가 당에 청병(請兵)하여 고구려가 무너졌기 때문에 옛 서울 평양(平壤)은 궁하여 풀이 무성하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을 것이다' 하였다. 아마도 태어나서 (신라로부터) 버려진것에 원한을 가져서 이 말을 했을 것이다. 일찍이 남쪽으로 가서 흥주(興州)[34]의 부석사(浮石寺)에서[35] 벽에 그려진 신라왕의 초상을 보고 칼을 뽑아 (그림을) 내리 쳤는데, 칼자국이 지금도 남아있다.
천우(天祐)원년 갑자(甲子)년에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摩震)로 하였다. 이때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여, 광치내(匡治奈)[지금 시중(侍中)]·서사(徐事)[지금 시랑(侍郎)]·외서(外書)[지금 원외랑(員外郞)]의 인원을 채우고,[36] 또 병부(兵部)[지금 군부(軍部)]· 대룡부(大龍部)[창부(倉部)를 일컬음]·수춘부(壽春部)[지금 예부(禮部)]·봉빈부(奉賓部)[지금 예빈성(禮賓省)]·의형대(義刑臺)[지금 형부(刑部)]·납화부(納貨部)[지금 대부시(大府寺)]·조위부(調位部)[지금 삼사(三司)]·내봉성(內奉省)[지금 都省(도성)]·금서성(禁書省)[지금 비서성(秘書省)]·남상단(南廂壇)[지금 장작감(將作監)]·수단(水壇)[지금 수부(水部)]·원봉성(元鳳省)[지금 한림원(翰林院)]·비룡성(飛龍省)[지금 태복시(太僕寺)]·물장성(物藏省)[지금 소부감(少府監)]을 설치하였다. 또 사대(史臺)[모든 역어(譯語, 외국어)의 학습을 맡음]·식화부(植貨府)[과수(果樹)의 재식(栽植)을 맡음]·장선부(障繕部)[성황(城隍)의 수리를 맡음]·주도성(珠淘省)[그릇의 제조를 맡음]을 설치하고, 또 정광(正匡), 원보(元輔), 대상(大相), 원윤(元尹) 좌윤(佐尹), 정조(正朝), 보윤(甫尹), 군윤(軍尹), 중윤(中尹)등의 품직을 만들었다.
가을 7월에 청주(靑州, 청주시와 청원군)의 1천가구를 철원군(鐵圓城)으로 옮겨 서울로 삼았다.[37] 상주(尙州)등 30여 주를 정벌해 빼았았다. 공주(公州)의 장군홍기(弘奇)가 항복해 왔다.
천우(天祐) 2년 을축년(乙丑) (905년), 새 서울로 들어와 궁궐과 누대를 매우 호사하게 고쳤다. 무태(武泰)연호를 성책(聖冊) 원년으로 고쳤다. 패서(浿西)에 13진을 나누어 설치하였다. 평양성주장군 검용(黔用), 증성(甑城)의 적의, 황의를 한 도적과 명귀(明貴)등이 항복해왔다. 선종(궁예)이 (나라가) 강성한데 자긍심을 갖고, (후백제와 신라, 특히 신라를) 병탄하려는 의욕을 품었다. 그는 국민들에게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도록하였으며, 신라에서 오는 사람은 모두 베어 죽였다.
주량(朱梁) 건화(乾化) 원년 신미년 (911년)에는 성책(聖冊)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 원년으로 고쳤으며,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고쳤다. 태조(고려 태조)로 하여금 군사를 보내 금성(錦城)등지를 쳐 금성(錦城)을 나주(羅州)로 개칭했다. 이 공을 논하여 태조를 대아찬(大阿湌)장군으로 하였다.
선종(궁예)은 미륵불(彌勒佛)을 자칭하여 머리에 금책(金幘)[38]을 쓰고 몸에 방포(方袍)[39]을 입었으며, 맏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 둘째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하였으며 외출할때는 항상 백마를 타며 그 꼬리와 말갈기를 채색 비단으로 장식하고, 소년소녀들로 하여금 번개(幡蓋)[40]와 향화(香花)[41]를 들고 앞에서 인도하고, 또 비구(比丘) 200여명에게 범패(梵唄)를 부르며 뒤에서 따라오게 하였다.
또 불경 20권을 썼는데, 그 내용이 요망(妖妄)해 모두 불경(不經)스러웠다. (궁예가) 때때로 반듯하게 앉아 강설(講說)을 했는데, 승려 석총(釋聰)이 모두 사설(邪說)[42]이고, 괴상한 이야기라며 (이러한 강설로는) 남을 가르칠 수 없다하였다. 선종(궁예)이 화를 내어 철추(鐵椎)로 때려 죽였다. 3년 계유(癸酉) (913년)에 태조(왕건)을 파진찬(波珍湌) 시중(侍中)으로 하고, 4년 갑술(甲戌) (914년)에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에서 정개(政開)원년으로 하고 태조를 백강장군(百舡將軍)[43]으로 하였다. 정명(貞明)원년(915년)에 부인 강씨가 왕이 법도에 맞지 않는 일을 많이 한다 하여 정색(正色)을 하고 간언하였다. 왕이 미워하여 말하길, 네가 다른사람과 간통하니 어찌된 일이냐 하였다. 강씨가 말하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겠냐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신통력으로 보고있다 하여 쇠방망이를 불로 가열해 음부에 절구질해 죽이고 그의 두 아이를 죽였다. 그후 의심이 많아지고 화를 잘 내니 보좌하는 관리와 장수, 관리들 부터 평민까지들이 무고하게 죽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부양(斧壤)과 철원(鐵圓)사람들이 그 독에 어찌 이길수 없었다.
이보다 전에,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당나라에서 철원 시전(市廛)으로 와서 살았다. 정명(貞明)4년 무인(戊寅)년 (918년)에 시장안에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괴위(魁偉)하였으며 머리털이 모두 희었으며, 옛날 의관(衣冠)을 입은 채 왼손에는 사기로 된 주발, 오른손에는 낡은 거울을 들고 있었다. 그가 창근에게 내거울을 사겠냐고 하니 창근이 곧 쌀과 그것을 바꾸었다. 그 사람이 쌀을 거리의 구걸하는 아이들에게 나누어준 후 어디로 갔는지 알수 없었다. 창근이 그 거울을 벽 위쪽에 걸었는데, 해가 거울면을 비추자 가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읽어보니 옛날 시와 같은 것으로 내용을 간략하게 말하면
上帝降子於辰馬: 상제가 아들을 진마(辰馬)[44]에 내려 보내니
先操鷄後搏鴨: 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때린다
於巳年中二龍見: 뱀띠해에는 두 마리 용이 나타나는데
一則藏身靑木中: 한마리는 푸른 나무에 몸을 숨기고,
一則顯形黑金東: 한마리는 몸 형체를 검은 금 동쪽에 나타낸다.
창근이 처음에는 이런 글이 써진줄을 몰랐으나, 이를 본 후에는 예사롭지 않다고 보아 이를 왕에게 고하였다. 왕이 유사(有司)에게 명해 창근과 함께 그 거울의 주인을 물색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다만 발답사(勃颯寺)불당에 진성(鎭星)[45]소상(塑像)이 있었는데, 모습이 그와 같았다. 왕이 한숨쉬며 이상히 여기다가 문인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등에게 풀이하게 했다. 함홍등이 서로 말하기를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냈다는 것은 진한과 마한을 일컬음이요, 두마리 용이 나타나 한마리는 푸른 나무에 몸을 숨기고, 한마리는 몸을 검은 쇠 동쪽에 나타낸다는 것은 푸른 나무가 소나무를 일컬으니 송악군 출신으로 용이 이름에 들어간 사람의 손자, 즉 지금의 파진찬 시중이요, 검은 금은 철이니 이는 지금의 도읍 철원을 일컫는 바이므로 왕이 여기서 처음 일어났다가 여기서 멸망한다는 말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때린다는 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나중에 압록(鴨綠)에 이른다는 뜻이다 하였다.
송함홍들이 서로 말하기를, 지금 왕이 혹독하게 나라를 다스리니, 우리들이 만약 사실대로 말하면 혼자도 아닌 우리무리가 김치와 젓갈(葅醢)이 될 뿐아니라 파진찬(波珍湌, 왕건)도 나쁜 일을 당할 것이다. 이에 듣기 좋게 꾸며 보고했다. 왕이 흉학(凶虐)한 일을 멋대로 하니 신하들이 떨며 두려워(震懼)하며 어찌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장군 홍술(白玉),삼능산(三能山)복사귀(卜沙貴). 즉, 홍유(洪儒), 배현경(裴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謙)의 청년때 이름이었는데, 이 네명이 비밀스럽게 모의해 태조의 사제(私第)로 가서 말하길, 왕이 부당한 형벌을 내려 부인과 아들을 죽이고 신하들을 모조리 죽여[46] 모든 사람이 도탄에 빠져 편안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혼(混)한 (임금)을 폐하고 명(明)한 (임금)을 세우는 것이[47]천하의 큰 뜻이니. 공이 탕(湯)(왕)과 무(武)(왕)의 일을 행하길 바란다 하였다.
태조(왕건)이 불쾌한 얼굴빛을 드러내며 거절하며, 나는 충순(忠純)[48]한 것으로 자처했으므로 지금 임금이 포악하고 어지럽지만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대체로 보아 신하가 왕으로 바꾸어 앉는 것을 혁명이라 한다. 나는 실로 덕이 적으니 감히 은(殷)과 주(周)의 일[49]을 본받겠느냐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때는 두 번다시 오지 않는 것으로 만나기는 어렵지만 놓치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데 받지 않으면 도리어 큰 허물이 될 것입니다. 지금 정사가 어지럽고 나라가 위험에 처해 백성들이 모두 왕을 원수로 보는데 오늘날 덕망이 공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습니다. 하물며 왕창근이 얻은 거울의 내용이 저러한데, 어찌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독부(獨夫)의 손에 죽임을 당하겠습니까 하였다.
부인 유씨도 장수들의 말을 듣고서 태조에게 말했다. 어진 사람이 어질지 못한 사람을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말을 듣고 첩도 화를 내게 되는데 대장부는 어떻겠습니까? 지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갑자기 변했으니, 하늘의 명령이 돌아온 것입니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받들고 문을 나서며 왕공이 이미 정의의 깃발을 들었다고 앞에서 외치도록 하였다. 이에 앞뒤로 바쁘게 따르는 자의 수가 얼마인지 알 수 없었으며, 또 먼저 궁성 문에 이르어 북을 떠들썩하게 치며 기다리는 자가 모두 1만여명이었다. 왕이 이를 듣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다가 이에 미복(微服)[50]으로 갈아입고 숲으로 들어갔다.
그는 얼마 못가 부양(斧壤)주민에게 해(害)를 입었다.
궁예는 당 대순(大順) 2년(891년)에 일어나 주량(朱梁) 정명(貞明) 4년(918년)까지 이르렀으니 28년만에 망한 것이다.
견훤
편집주석
편집- ↑ 오(午)는 다섯 오(五)와 발음이 같고, 단오의 오자도 午 로서, 양기가 강한 날이라는 뜻이다. 앞의 5월 5일과 같으므로 음력 5월 5일 단오를 뜻한다.
- ↑ 광염은 빛과 불꽃, 또는 왕성한 기세를 뜻한다.
- ↑ 왕의 명령을 전하던 관리
- ↑ 개풍군의 사찰이라는 설과 영월군의 사찰이라는 설이 있다.
- ↑ 상아로 만든 꼬치
- ↑ 왕도 주변의 땅, 여기서는 경주 부근의 지역이다.
- ↑ 배반하여 적에게 붙음
- ↑ 죽주는 안성시 죽산면을 중심으로 현재의 안성시 동부와 용인시 처인구에 걸쳐있던 지역
- ↑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1권 진성왕편에는 600명으로 되어 있다.
- ↑ 어떻게 끊는지 정설이 없다. 이병도는 김대검,모흔,장귀평,장일 의 4명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번역에서는 금대, 검모, 흔장, 귀평, 장일 의 5명으로 비정하였다.
- ↑ 삼국사기에 있는 원주이다.
- ↑ 고통과 즐거움
- ↑ 강원 인제군
- ↑ 강원 화천군
- ↑ 강원 철원군 김화읍, 옛 김화군 영역중 철원군에 편입된 휴전선 이남지역으로 비정.
- ↑ 김화군 금성면
- ↑ 태조 왕건
- ↑ 당나라 연호인 건녕으로, 896년이다
- ↑ 옛 삭녕군
- ↑ 장단군 임강리
- ↑ 같은 연호로, 897년
- ↑ 경기도 개풍군,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번역에 의하면 그중 봉동면
- ↑ 현 서울시 양천구, 강서구. 옛 양천군 지역
- ↑ 이병도는 김포 김포읍(현재 김포시의 동 지역)으로, 한국학 중앙연구원은 검단면(현재 검단동 일대)로 비정하였다.
- ↑ 인천 강화군 강화도
- ↑ 강하고 굳센 병사
- ↑ 현재 서울특별시
- ↑ 현 양주시 동지역,(구 양주읍)
- ↑ 서기 900년
- ↑ 경기도 화성시
- ↑ 청천강과도 한자가 같기는 하지만, 한반도 중부지역이 열거된 점, 청주 인근으로 보이는 점에서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으로 비정한다.
- ↑ 충북 괴산군
- ↑ 901년
- ↑ 옛 순흥부, 영주와 봉화에 분할되었다.
- ↑ 부석사는 2개가 있는데 모두 고찰이라 후삼국시대에도 있었다. 앞에서 순흥은 경상북도의 영주, 봉화 일대이므로,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의 부석사이다.
- ↑ 괄호 안은 삼국사기 편찬 당시의 조직이다.
- ↑ 신라본기 효공왕편에는 905년 7월의 일로 되어 있다.
- ↑ 금으로 만든 모자
- ↑ 승려가 입는 가사
- ↑ 불법의 위덕을 나타내는 깃발과 일산(화려한 양산
- ↑ 꽃과 향 또는 향기나는 꽃
- ↑ 그릇되고 간사함, 또는 올바르지 않은 논설
- ↑ 또는 백선장군
- ↑ 진한+마한, 즉 한반도
- ↑ 태양계 행성 토성
- ↑ 원문에는 주이(誅夷)로 되어 있다. 이는 토벌하여 평정함 이라는 뜻과 모조리 죽임이라는 두개의 뜻이 있는데, 문맥상 후자이다.
- ↑ 원문은 廢昏立明으로, 폐하거나 세울 대상이 임금이라는 것이 직접 드러나 있지는 않다.
- ↑ 충직(忠直)하고 순실(純實)함
- ↑ 은나라 탕왕, 주나라 무왕
- ↑ 높은 신분의 사람이 숨기기 위해 입는 수수한 차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