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삼국사기/권47

해론(奚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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奚論,牟梁人也。其父讚德,有勇志英節,名高一時。建福二十七年庚午乙丑,眞平大王選為椵岑城縣令。明年辛未丙寅冬十月,百濟大發兵,來攻椵岑城一百餘日。眞平王命將,以上州、下州、新州之兵救之,遂往與百濟人戰不克,引還。讚德憤恨之,謂士卒曰:「三州軍帥見敵强不進,城危不救,是無義也。與其無義而生,不若有義而死。」乃激昻奮勵,且戰且守,以至粮盡水竭,而猶食屍飲尿,力戰不怠。至春正月,人旣疲,城將破,勢不可復完,乃仰天大呼曰:「吾王委我以一城,而不能全,為敵所敗,願死為大厲,喫盡百濟人,以復此城。」遂攘臂瞋目,走觸槐樹而死。於是,城陷,軍士皆降。奚論年二十餘歲,以父功,為大奈麻。至建福三十五四十年戊寅,王命奚論,為金山幢主,與漢山州都督邊品,興師襲椵岑城,取之。百濟聞之,擧兵來,奚論等逆之。兵旣相交,奚論謂諸將曰:「昔吾父殞身於此,我今亦與百濟人戰於此,是我死日也。」遂以短兵赴敵,殺數人而死。王聞之,為流涕,贈卹其家甚厚。時人無不哀悼,為作長歌弔之。

(번역용) 해론은 모량인(牟梁人)이다.아비는 찬덕(讚德)이다. 有勇志英節, 名高一時, 建福二十七年乙丑, 眞平大王選爲椵岑城縣令, 明年丙寅冬十月, 百濟大發兵, 來攻椵岑城一百餘日, 眞平王命將, 以上州下州新州之兵救之, 遂往與百濟人戰, 不克引還, 讚德憤恨之, 謂士卒曰, 三州軍帥見敵强不進, 城危不救, 是無義也, 與其無義而生, 不若有義而死, 乃激昻奮勵, 且戰且守, 以至粮盡水竭, 而猶食屍飮尿, 力戰不怠, 至春正月, 人旣疲, 城將破, 勢不可復完, 乃仰天大呼曰, 吾王委我以一城, 而不能全, 爲敵所敗, 願死爲大厲, 喫盡百濟人, 以復此城, 遂攘臂瞋目, 走觸槐樹而死, 於是, 城陷, 軍士皆降, 奚論年二十餘歲, 以父功爲大奈麻, 至建福四十年戊寅, 王命奚論爲金山幢主, 與漢山州都督邊品興師襲椵岑城, 取之, 백제가 이를 듣고, 병사를 일으켜 오자, 해론 등이 이를 맞이했다. 兵旣相交, 奚論謂諸將曰, 昔, 吾父殞身於此, 我今亦與百濟人戰於此, 是我死日也, 遂以短兵赴敵, 殺數人而死, 왕이 이를 듣고 눈물을 흐렸다. 贈卹其家甚厚, 그때 애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爲作長歌吊之

소나(素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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素那,〈或云金川。〉白城郡蛇山人也。其父沈那,〈或云煌川。〉膂力過人,身輕且捷。蛇山境與百濟相錯,故互相寇擊無虛月。沈那每出戰,所向無堅陣。仁平中,白城郡出兵,往抄百濟邊邑,百濟出精兵急擊之,我士卒亂退。沈那獨立拔劒,怒目大叱,斬殺數十餘人,賊懼不敢當,遂引兵而走。百濟人,指沈那曰:「新羅飛將。」因相謂曰:「沈那尚生,莫近白城。」素那雄豪有父風。百濟滅後,漢州都督都儒公請大王遷白王遣素那於阿達城,俾禦北鄙。上元二年乙亥春,阿達城太守級飡漢宣,敎民以某日齊出種麻,不得違令。靺鞨諜者認之,歸告其酋長。至其日,百姓皆出城在田,靺鞨潛師猝入城,剽掠一城,老幼狼狽,不知所為。素那奮刃向賊,大呼曰:「爾等知新羅有沈那之子素那乎?固不畏死以圖生,欲鬪者曷不來耶?」遂憤怒突賊,賊不敢迫,但向射之。素那亦射,飛矢如蜂,自辰至酉,素那身矢如猬,遂倒而死。素那妻,加林郡良家女子。初素那以阿達城隣敵國,獨行,留其妻而在家。郡人聞素那死,弔之,其妻哭而對曰:「吾夫常曰:『丈夫固當兵死,豈可臥牀席,死家人之手乎!』其平昔之言如此,今死如其志也。」大王聞之,涕泣沾襟曰:「父子勇於國事,可謂世濟忠義矣。」贈官迊飡。

(번역용) 소나(素那)[또는 김천(金川)은 백성군 (白城郡)(현재의 안성시 및 천안시 북부) 사산(蛇山)(지금의 천안시 직산읍) 사람이다. 그 아버지는 심나(沈那)[또는 황천(煌川)]인데, 素那【或云金川】, 白城郡蛇山人也, 其父沈那【或云煌川】, 膂力過人, 身輕且捷, 蛇山境與百濟相錯, 故互相寇擊無虛月, 沈那每出戰, 所向無堅陣, 仁平中, 白城郡出兵, 往抄百濟邊邑, 百濟出精兵急擊之, 我士卒亂退, 沈那獨立拔劒, 怒目大叱, 斬殺數十餘人, 賊懼不敢當, 遂引兵而走, 百濟人指沈那曰, 新羅飛將, 因相謂曰, 沈那尙生, 莫近白城, 素那雄豪有父風, 百濟滅後, 漢州都督都儒公請大王, 遷素那於阿達城, 俾禦北鄙, 上元二年乙亥春, 阿達城太守級湌漢宣, 敎民以某日齊出種麻, 不得違令, 靺鞨諜者認之, 歸告其酋長, 至其日, 百姓皆出城在田, 靺鞨潛師猝入城, 剽掠一城, 老幼狼狽, 不知所爲, 素那奮刃向賊, 大呼曰, 爾等知新羅有沈那之子素那乎, 固不畏死以圖生, 欲鬪者曷不來耶, 遂憤怒突賊, 賊不敢迫, 但向射之, 素那亦射, 飛矢如蜂, 自辰至酉, 素那身矢如猬, 遂倒而死, 素那妻, 加林郡良家女子, 初, 素那以阿達城鄰敵國, 獨行, 留其妻而在家, 郡人聞素那死, 弔之, 其妻哭而對曰, 吾夫常曰丈夫固當兵死, 豈可臥牀席死家人之手乎, 其平昔之言如此, 今死如其志也, 대왕이 이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울고 옷깃을 적시며 말하기를, 父子勇於國事, 可謂世濟忠義矣, 贈官迊湌

취도(驟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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驟徒, 沙梁人, 奈麻聚福之子, 史失其姓, 兄弟三人, 長夫果, 仲驟徒, 季逼實, 驟徒嘗出家, 名道玉, 居實際寺, 太宗大王時, 百濟來伐助川城, 大王興師出戰, 未決, 於是, 道玉語其徒曰, 吾聞爲僧者, 上則精術業, 以復性, 次則起道用, 以益他, 我形似桑門而已, 無一善可取, 不如從軍殺身以報國, 脫法衣, 著戎服, 改名曰驟徒, 意謂馳驟而爲徒也, 乃詣兵部, 請屬三千幢, 遂隨軍赴敵場, 及旗鼓相當, 持槍劒突陣力鬪, 殺賊數人而死, 後咸亨二年辛未, 文武大王發兵, 使踐百濟邊地之禾, 遂與百濟人, 戰於熊津之南, 時, 夫果以幢主戰死, 論功第一, 文明元年甲申, 高句麗殘賊據報德城而叛, 神文大王命將討之, 以逼實爲貴幢第監, 臨行, 謂其婦曰, 吾二兄, 旣死於王事, 名垂不朽, 吾雖不肖, 何得畏死而苟存乎, 今日與爾生離, 終是死別也, 好住無傷, 及對陣, 獨出奮擊, 斬殺數十人而死, 大王聞之, 流涕嘆曰, 驟徒知死所, 而激昆弟之心, 夫果逼實亦能勇於義, 不顧其身, 不其壯歟, 皆追贈官沙湌

(번역용) 취도(驟徒)는 사량(沙梁) 사람으로, 나마(奈麻) 취복(聚福)의 아들이다. 史失其姓, 형제는 삼인(三人)으로, 장자는 부과(夫果), 둘째가 취도, 막내가 핍실(逼實)이다. 취도는 일찍이 출가하여 법명을 도옥(道玉)이라 하고, 실제사(實際寺)에 기거하였다. 태종대왕(太宗大王) 때, 백제가 조천성(助川城)를 치러 오자, 大王興師出戰, 未決, 於是, 道玉語其徒曰, 吾聞爲僧者, 上則精術業, 以復性, 次則起道用, 以益他, 我形似桑門而已, 無一善可取, 不如從軍殺身以報國, 脫法衣, 著戎服, 改名曰驟徒, 意謂馳驟而爲徒也, 乃詣兵部, 請屬三千幢, 遂隨軍赴敵場, 及旗鼓相當, 持槍劒突陣力鬪, 殺賊數人而死, 後咸亨二年辛未, 文武大王發兵, 使踐百濟邊地之禾, 遂與百濟人, 戰於熊津之南, 時, 夫果以幢主戰死, 論功第一, 文明元年甲申, 高句麗殘賊據報德城而叛, 신문대왕(神文大王)은 장수에게 명하여 그를 토벌했다. 以逼實爲貴幢第監, 臨行, 謂其婦曰, 吾二兄, 旣死於王事, 名垂不朽, 吾雖不肖, 何得畏死而苟存乎, 今日與爾生離, 終是死別也, 好住無傷, 及對陣, 獨出奮擊, 斬殺數十人而死, 大王聞之, 流涕嘆曰, 驟徒知死所, 而激昆弟之心, 夫果逼實亦能勇於義, 不顧其身, 不其壯歟, 皆追贈官沙湌

눌최(訥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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訥催, 沙梁人, 大奈麻都非之子也, 眞平王建福四十一年己卯冬十月, 百濟大擧來侵, 分兵圍攻速含櫻岑岐岑烽岑旗懸冗柵等六城, 王命上州下州貴幢法幢誓幢五軍, 往救之, 旣到, 見百濟兵陣堂堂, 鋒不可當, 盤桓不進, 或立議曰, 大王以五軍委之諸將, 國之存亡在此一役, 兵家之言曰見可而進, 知難而退, 今强敵在前, 不以好謀而直進, 萬一有不如意, 則悔不可追, 將佐皆以爲然, 而業已受命出師, 不得徒還, 先是, 國家欲築奴珍等六城而未遑, 遂於其地, 築畢而歸, 於是, 百濟侵攻愈急, 速含岐岑冗柵三城, 或滅或降, 訥催以三城固守, 及聞五軍不救而還, 慷慨流涕, 謂士卒曰, 陽春和氣, 草木皆華, 至於歲寒, 獨松栢後彫, 今, 孤城無援, 日益阽危, 此誠志士義夫盡節揚名之秋, 汝等將若之何, 士卒揮淚曰, 不敢惜死, 唯命是從, 及城將隤, 軍士死亡無幾, 人皆殊死戰, 無苟免之心, 訥催有一奴, 强力善射, 或嘗語曰, 小人而有異才, 鮮不爲害, 此奴宜遠之, 訥催不聽, 至是, 城陷賊入, 奴張弓挾矢, 在訥催前, 射不虛發, 賊懼不能前, 有一賊出後, 以斧擊訥催, 乃仆, 奴反與鬪俱死, 王聞之悲慟, 追贈訥催職級湌

  1. 설계두
  2. 김영윤

관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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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흠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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裂起, 史失族姓, 文武王元年, 唐皇帝遣蘇定方討高句麗, 圍平壤城, 含資道摠管劉德敏傳宣國王, 送軍資平壤, 王命大角干金庾信, 輸米四千石租二萬二千二百五十石, 到獐塞, 風雪沍寒, 人馬多凍死, 麗人知兵疲, 欲要擊之, 距唐營三萬餘步而不能前, 欲移書而難其人, 時, 裂起以步騎監輔行, 進而言曰, 某雖駑蹇, 願備行人之數, 遂與軍師仇近等十五人, 持弓劒走馬, 麗人望之, 不能遮閼, 凡兩日致命於蘇將軍, 唐人聞之, 喜慰廻書, 裂起又兩日廻, 庾信嘉其勇, 與級湌位, 及軍還, 庾信告王曰, 裂起仇近, 天下之勇士也, 臣以便宜許位級湌, 而未副功勞, 願加位沙湌, 王曰, 沙湌之秩不亦過乎, 庾信再拜曰, 爵祿公器, 所以酬功, 何謂過乎, 王允之, 後, 庾信之子三光執政, 裂起就求郡守, 不許, 裂起與祗園寺僧順憬曰, 我之功大, 請郡不得, 三光殆以父死而忘我乎, 順憬說三光, 三光授以三年山郡太守, 仇近從元貞公築西原述城, 元貞公聞人言, 謂怠於事, 杖之, 仇近曰, 僕嘗與裂起入不測之地, 不辱大角干之命, 大角干不以僕爲無能, 待以國士, 今以浮言罪之, 平生之辱無大此焉, 元貞聞之, 終身羞悔

(번역 중) 裂起, 史失族姓, 文武王元年, 唐皇帝遣蘇定方討高句麗, 圍平壤城, 含資道摠管劉德敏傳宣國王, 送軍資平壤, 王命大角干金庾信, 輸米四千石租二萬二千二百五十石, 到獐塞, 風雪沍寒, 人馬多凍死, 麗人知兵疲, 欲要擊之, 距唐營三萬餘步而不能前, 欲移書而難其人, 時, 裂起以步騎監輔行, 進而言曰, 某雖駑蹇, 願備行人之數, 遂與軍師仇近等十五人, 持弓劒走馬, 麗人望之, 不能遮閼, 凡兩日致命於蘇將軍, 唐人聞之, 喜慰廻書, 裂起又兩日廻, 庾信嘉其勇, 與級湌位, 及軍還, 庾信告王曰, 裂起仇近, 天下之勇士也, 臣以便宜許位級湌, 而未副功勞, 願加位沙湌, 王曰, 沙湌之秩不亦過乎, 유신이 두번 절하고 말하기를, 爵祿公器, 所以酬功, 何謂過乎, 王允之, 後, 庾信之子三光執政, 裂起就求郡守, 不許, 裂起與祗園寺僧順憬曰, 我之功大, 請郡不得, 三光殆以父死而忘我乎, 順憬說三光, 三光授以三年山郡太守, 仇近從元貞公築西原述城, 元貞公聞人言, 謂怠於事, 杖之, 仇近曰, 僕嘗與裂起入不測之地, 不辱大角干之命, 大角干不以僕爲無能, 待以國士, 今以浮言罪之, 平生之辱無大此焉, 元貞聞之, 終身羞悔

  1. 비녕자
  2. 죽죽
  3. 필부

계백(階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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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은 백제 사람으로 그 벼슬이 달솔(達率)에 이르렀다. 의자왕 20년에 당 고종(高宗)은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대총관(神丘道大摠管)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서 신리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공별하였다. 이때 계백은 장군이 되어 결사용사 5천 명을 뽑아 거느리고 이를 막았는데, 그는 말하기를, "한 나라의 사람으로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을 당하게 되므로 국가의 존망을 알지 못하겠다. 내 처자가 적들에게 잡혀서 노비가 되어 그들에게 욕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쾌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모두 손수 죽였다. 그리고 황산(黃山)의 들에 이르러서 삼영(三營)을 설치하고 신라의 군사들을 만나 싸웠는데 뭇사람들에게 맹세하기를, "옛날에 월나라의 구천(句踐)은 5천 명의 군사로써 오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다. 오늘 모든 장병들은 각각 분발하여 승리를 결단함으로써 국은을 갚도록 하라" 하고 드디어 물 밀듯이 쳐들어가니, 한 사람이 천 명을 당하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신라군은 드디어 퇴각하였다. 이와 같이 서로 진퇴하기를 네번이나 하며 격전하였으나 계백은 힘이 다하여 드디어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