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삼국사기/권04

지증 마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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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증 마립간(智證麻立干)이 즉위하였다. 성은 김씨이고 휘는 지대로(智大路), 지도로(智度路 / 智度盧) 또는 지철로(智哲盧)이다. 내물왕(奈勿王)의 증손자이며,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이며, 소지왕[照知王](소지 마립간(炤知麻立干))의 재종(再從: 6촌) 동생이다. 어머니는 김씨 조생부인(鳥生夫人)으로 눌지왕(訥祗王)의 딸이며, 왕비는 박씨(朴氏) 연제부인(延帝夫人)으로 이찬(伊飡) 등흔(登欣)(삼국유사의 등허(登許))의 딸이다. 왕은 체격이 매우 컸고, 담력(膽力)이 남보다 더 셌다. 전왕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으므로 왕위를 이으니, 이때 나이가 64세였다.

논하여 말한다. 신라왕은 거서간(居西干)이라고 하나를 부르고, 차차웅(次次雄)이라고 하나를 부르고, 이사금(尼師今)이라고 열여섯을 부르고, 마립간(麻立干)이라고 넷을 불렀다. 신라 말 명유(名儒) 최치원(崔致遠)이 《제왕연대력》을 지었는데, 모두 아무개 왕[某王]이라고 부르고, 거서간 등을 언급하지 않으니, 아마도 그 말이 부르기에 부족할 만큼 촌스럽다 여겨서이리라. 좌한(左漢 : 좌전(左傳)과 한서(漢書))은 중국 사서인데도 오히려 초(楚)나라 말 곡오도(穀於菟 : 누오도(㝅於菟))와 흉노 말인 탱리고도(撑犂孤塗) 등을 그대로 남겼다. 지금 신라의 일을 기록함에 그 방언(方言 : 신라 말)을 남김이 또한 마땅하다.

3년(5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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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年 春二[1]月 下令禁殉葬 前國王薨 則殉以男女各五人 至是禁焉 親祀神宮 三月 分命州郡主勸農 始用牛耕

4년(5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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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겨울 10월에 여러 신하가 아뢰기를 “시조께서 나라를 창업하신 이래로 국호가 정해지지 않았거나, 혹은 ‘사라’(斯羅)라 일컫고, 혹은 ‘사로’(斯盧)라 일컬었으며, 혹은 ‘신라’(新羅)라고도 하였습니다. 저희는 ‘신’이라는 글자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라’라는 글자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으로 생각해온즉,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 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이들을 보면 모두 ‘제’(帝)나 ‘왕’(王)을 일컬었습니다.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워 지금에 이르기까지 22세 동안 단지 방언으로만 왕호를 일컫고 존귀한 칭호를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이제 여러 신하가 한뜻으로 삼가 ‘신라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리나이다.”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쫓았다.

5년(5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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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年 夏四月 制喪服法頒行 秋九月 徵役夫築波里 彌實 珍德骨火等十二城

6년(5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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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505년)

봄 2월에, 왕이 친히 국내의 주군현(州郡縣)을 정하여 실직주(悉直州 )를 두고 이사부(異斯夫)를 군주(軍主)로 하였다. 군주라는 명칭이 여기서 비롯한다.

冬十一月 始命所司藏氷 又制舟楫之利

10년(5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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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年 春正月 置京都東市

三月 設檻穽 以除猛獸之害

秋七月 隕霜殺菽

13년(5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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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三年 夏六月 于山國歸服 歲以土宜爲貢 于山國在溟州正東海島 或名鬱陵島 地方一百里 恃嶮不服 伊湌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 謂 “于山人愚悍 難以威來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子 分載戰船 抵[2]其國海岸 誑告曰 “汝若不服 則放此猛獸踏殺之” 國人恐懼 則降

15년(5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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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五年 春正月 置小京於阿尸村 秋七月 徙六部及南地人戶 充實之 王薨 諡曰智證 新羅諡法 始於此

법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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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법흥왕

법흥왕(法興王)이 즉위하다. 이름은 원종(原宗)《책부원귀(冊府元龜)》에는 성은 모씨(募氏), 이름은 태(泰)라 하였다.으로, 지증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연제부인(延帝夫人)이고, 왕비는 박씨 보도부인(保刀夫人)이다. 왕은 키가 7척(尺)이고, 성품이 너그럽고 후하며 사람들을 사랑했다.

3년(5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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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年,春正月,親祀神宮。龍見楊山井中。

4년(5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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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517년)

여름 4월에 처음으로 병부(兵部)를 설치하였다.

5년(5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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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五年,春二月,築株山城。

7년(5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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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520년)

봄 정월에 율령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모든 관리의 공복(公服)과 붉은색, 자주색으로 위계(位階)를 정하였다.

8년(5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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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八年,遣使於梁貢方物。

9년(5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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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九年,春三月,加耶國王遣使請婚,王以伊飡比助夫之妹送之。

11년(5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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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一年,秋九月,王出巡南境拓地,加耶國王來會。

12년(5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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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二年,春二月,以大阿飡伊登爲沙伐州軍主。

15년(5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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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528년)

불법(佛法)이 비로소 유행하였다. 처음 눌지왕 때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이르렀는데, 군(일선군) 사람인 모례(毛禮)가 집 안에 움집을 지어 모시었다. 이때 양(梁)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의복과 향(香)을 내려주었다. 왕과 신하가 그 향의 이름과 소용을 알지 못했다. 사람을 보내 향을 가지고 돌아다니며 물으매, 묵호자가 그것을 보고, 그 이름을 일컬어 말한다.

“이것을 불사르면 부드럽고 짙은 향기가 납니다. 그로써 정성이 신성(神聖)에 미치게 됩니다. 이른바 신성이란 삼보(三寶)보다 과히 뒤떨어지지 않는다. 첫째는 불타(佛陁)이고, 둘째는 달마(達磨)이며, 셋째는 승가(僧伽)입니다. 만약 이것을 사르며 소원을 빌면 반드시 영험이 있으리오.”

그때 왕의 딸이 피부병이 있어, 왕이 묵호자에게 향을 불사르고 (왕의) 소원을 말하게 시켰더니, 왕녀의 병이 곧 나았다. 왕이 심히 기뻐하며, 특히 후하게 선물을 주었다. 묵호자는 물러나와 모례를 만나서, 받은 선물을 그에게 주며, 연유를 말하였다.

“내가 지금 돌아가고자 갈 데가 있어 일러둔다(작별코자 한다).”

그러더니 돌아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비처왕(毗處王)소지왕(炤知王)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阿道和尙)또는 아도화상(我道和尙)이라고도 적는다.이 있었는데, 그는 시자(侍子) 세 사람과 함께 역시 모례의 집에 왔다. 행동과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는데, (거기서) 몇 년을 살다가 병도 없이 죽었다. 그 시자 세 사람이 머물러 살면서 경(經)과 율(律)을 강독했는데, 이따금 (불교를) 신봉(信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때가 되어, 왕법흥왕(法興王) 역시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신하들이 믿지 않고 첩첩 (喋喋)하게 불평을 늘어놓았으므로 왕은 난감했다.

근신(近臣) 이차돈(異次頓)혹은 처도(處道)라고도 하였다.이 말하였다.

“바라건대 소신(小臣)의 목을 벰으로써 여러 사람의 논의를 가라앉히십시오.”

왕이 말하였다.

“본래 도(道)를 일으키고자 함인데, 허물 없는 사람을 죽임은 옳지 않다.”

(이차돈이) 대답하여 말한다.

“만약 도(道)의 깨달음이 행해질 수 있다면, 신은 비록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왕이 이에 신하들을 불러서 그것을 물으니 함께 말하였다.

“지금 승려들을 보면, 빡빡 깎은 머리에 이상한 옷을 입고, 말하는 바가 기이하고 속임수가 있으니, 상도(常度)가 아닙니다. 지금 만약 그대로 풀어주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들은 비록 죄가 무겁더라도 감히 (명령을) 받듦을 고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차돈이 홀로 말하였다.

“지금 신하들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무릇 비상(非常)한 사람이 있은 연후에 비상(非常)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불교의 심오(深奧 = 淵奧)함을 들어도, 믿지 않을 수 없어 두려워합니다.”

왕이 말하였다.

“사람들의 말이 견뢰(堅牢)하여 깨뜨릴 수 없다. 너는 홀로 말이 다르니, 양쪽을 다 좇을 수는 없다.”

마침내 하급 관리[下吏]가 막 그(이차돈의 목)를 베려 하니, 이차돈이 죽음에 이르러 말하였다.

“나는 불법(佛法)을 위하여 형벌을 따르니, 부처께서 만약 신력이 있으시면 내가 죽으매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으리라.”

그리고 그 목을 베자, 피가 잘린 곳에서 샘솟듯 나왔는데, 그 색깔이 우유처럼 희었다. 사람들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겼고, 다시는 불사(佛事)를 헐뜯지 않았다.이것은 김대문(金大問)에 《계림잡전(鷄林雜傳)》에 기록된 바에 따른다. 한나마(韓奈麻)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에 기록된 바와 차이가 있다.

16년(5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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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六年,下令禁殺生。

18년(5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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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八年,春三月,命有司修理隄防。夏四月,拜伊飡哲夫爲上大等,摠知國事。上大等官,始於此,如今之宰相。

19년(5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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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九年,金官國主金仇亥,與妃及三子,長曰奴宗,仲曰武德,季曰武力,以國帑寶物來降。王禮待之,授位上等,以本國爲食邑。子武力仕至角干。

21년(5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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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十一年,上大等哲夫卒。

23년(5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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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536년)

처음으로 연호를 칭하는데, 건원(建元) 원년이라 이른다.

25년(5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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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十五年,春正月,敎:許外官携家之任。

27년(5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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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十七年,秋七月,王薨,諡曰法興,葬於哀公寺北峯。

진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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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興王立 諱彡麥宗 或作深麥夫 時年七歲 法興王弟葛文王立宗之子也 母夫人金氏 法興王之女 妃朴氏思道夫人 王幼少 왕태후(王太[3]后)가 섭정하였다.

12년(55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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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年 春正月 改元開國 三月 王巡守次娘城聞于[4]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 特喚之 王駐河臨宮 令奏其樂 二人各製新歌奏之 先是 加耶國嘉悉王 製十二弦琴 以象十二月之律 乃命于勒製其曲 及其國亂 操樂器投我 其樂名加耶琴 王命居柒夫等 侵高句麗 乘勝取十郡


13년(5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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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三年 王命階古·法[5]知·萬德三人 學樂於于勒 于勒量其人之所能敎階古以琴 敎法知以歌 敎萬德以舞 業成 王命奏之曰“與前娘城之音無異” 厚賞焉


14년(5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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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553년)

봄 2월 왕이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지으라고 명했다. 황룡이 그 땅에 나타났음을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찰로 바꾸어 짓고, 이름을 황룡(황룡사)이라 불렀다.

가을 7월 백제의 동북 변방을 취하여 신주(新州 본서 권26 성왕(聖王) 31년 조.)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軍主)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백제왕의 딸이 시집왔다.

15년(5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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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왕 명농백제 성왕이 가량(加良)가야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해 왔다. 군주(軍主)였던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군주(新州軍主) 김무력이 주병(主兵)을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백제왕을 급히 쳐서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佐平) 네 명과 군사 2만 9천6백 명을 목 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23년(5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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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562년)

가을 7월 백제가 변방의 백성을 침략하였으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막아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9월 가야가 배반하였고, 왕이 명하여 이사부(異斯夫)에게 토벌하게 하고, 사다함(斯多含)을 그의 부관으로 삼게 하였다. 사다함이 기병(騎兵) 5천명을 거느리고 먼저 달려 전단문(栴檀門)으로 들어가 흰색 깃발을 세웠다. 성안이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거기에 임하자, 일시에 모두 항복했다. 논공하매, 사다함이 으뜸으로 인정되어, 왕이 좋은 땅과 포로 200명을 상으로 주었으나, 사다함이 세 번 사양했다. 왕이 강권하매 받은 뒤 노비는 풀어주어 양인(良人)으로 삼고, 땅은 나누어서 군인들에게 주었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좋게 여겼다.

25년(56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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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564년)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6년(56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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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565년)

봄 2월에 북제의 무성황제(武成皇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왕을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가을 8월에 아찬(阿飡) 춘부(春賦)에게 명하여 국원(國原)으로 나가서 지키게 하였다.

9월 완산주(完山州)를 폐하고 대야주(大耶州)를 두었다. 진(陳)나라에서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보내 예방하고, 불교 경론(經論) 1천7백여 권을 보내주었다.

27년(56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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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566년)

봄 2월 기원사(祇園寺)와 실제사(實際寺)가 두 절이 이루어졌다. 왕자 동륜(銅輪)을 세워 왕태자로 삼았다. 진(陳)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황룡사를 완공했다.

28년(56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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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567년)

봄 3월에 진(陳)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29년(5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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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년(568년)

대창(大昌)으로 연호를 바꾸고, 여름 6월에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겨울 10월에 북한산주(北漢山州)를 폐하고 남천주(南川州)를 두었다. 또한 비열홀주(比列忽州)를 폐하고 달홀주(達忽州)를 두었다.

31년(5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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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570년)

여름 6월에 진(陳)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32년(5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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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571년)

진(陳)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33년(57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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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572년)

봄 정월에 연호를 홍제(鴻濟)로 바꾸었다.

3월 왕태자(王太子) 동륜(銅輪)이 죽었다.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했다.

겨울 10월 20일 전사한 사졸(士卒)들을 위하여, 바깥의 사찰[外寺]에서 팔관연회(八觀筵會)를 베풀어 개최하여 7일 만에 그쳤다.

37년(5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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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576년)

봄, 始奉源花 初君臣病無以知人 欲使[6]類聚 遊 以觀其行義 然後擧而用之 遂簡美女二人 一曰南毛 一曰俊貞 聚徒三百餘人 二女爭娟相妬 俊貞引南毛於私第 强勸酒 至醉 曳而投河水以殺之 俊貞伏誅 徒人失和罷散 其後 更取美貌男子 粧飾之 名花郞以奉之 徒衆雲集 或相磨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至 因此知其人邪正 擇其善者 薦之於朝 그러므로 김대문[7]의 《화랑세기(花郞世記)》는 말하기를, {賢佐忠臣 從此而秀 좋은 장수와 용맹한 병사는 여기서 생긴다. 崔致遠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 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8]乾太[9]子之化也 唐令狐澄新羅國記曰 擇貴人子弟之美者 傅粉粧飾之 名曰花郞 國人皆尊事之也 安弘法師入隋求法 與胡僧毗摩羅等二僧廻 上稜伽勝 經及佛舍利

秋八月 王薨 諡曰眞興 葬于哀公寺北峯 王幼年卽位 一心奉佛 至末年祝髮被僧衣 自號法雲 以終其身 王妃亦 之爲尼 住永興寺 及其薨也 國人以禮葬之

진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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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왕(眞智王)이 즉위했다.

이름은 사륜(舍輪) 혹은 금륜(金輪)이고, 진흥왕(眞興王)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사도부인(思道夫人)이고, 왕비는 지도부인(知道夫人)이다. 태자(太子)가 일찍 죽어서 진지(眞智)가 즉위했다.

원년(5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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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년(576년)

이찬(伊湌) 거칠부(居柒夫)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삼고, 국정을 맡겼다.

2년(5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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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577년)

봄 2월, 왕이 친히 신궁(神宮)에서 제사하고, 대사(大赦)하였다.

겨울 10월에 백제가 서쪽 변방의 주와 군에 침입하였으므로, 이찬 세종(世宗)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일선(一善) 북쪽에서 쳐서 깨뜨리고 3천7백여 명을 목베었다. 내리서성(內利西城)을 쌓았다.

3년(5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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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578년)

가을 7월 진(陳)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백제에게 알야산성(閼也山城)을 내주었다.

4년(5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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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봄 2월 백제가 웅현성(熊峴城)·송술성(松述城)을 쌓아 산산성(䔉山城)·마지현성(麻知峴城)·내리서성 등의 길을 끊었다.

가을 7월 17일 왕이 훙했다. 시호는 진지(眞智)이며,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묻혔다.

진평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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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眞平王)이 즉위하다. 이름은 백정(白淨)이며, 진흥왕(眞興王)의 태자(太子) 동륜(銅輪)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金氏) 만호부인(萬呼夫人) 또는 만내부인(萬內夫人)으로 입종 갈문왕(立宗葛文王)의 딸이고, 왕비는 김씨 마야부인(摩耶夫人)으로 복승 갈문왕(福勝葛文王)의 딸이다. 왕은 나면서부터 용모가 기이하며, 신체가 장대했고, 품은 뜻이 깊고 굳세며 앎이 밝고 통달했다.

원년(5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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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년(579년)

8월에 이찬(伊飡) 노리부(弩里夫)로써 상대등(上大等)을 삼았다. 왕의 동복동생 백반(伯飯)으로써 진정갈문왕(眞正葛文王), 국반(國飯)으로써 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을 삼아 봉하였다.

2년(5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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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年,春二月,親祀神宮,以伊飡后稷爲兵部令。

 三年,春正月,始置位和府,如今吏部。

 五年,春正月,始置船府署,大監、弟監各一員。

 六年,春二月,改元建福。三月,置調府令一員,掌貢賦,乘府令一員,掌車乘。

 七年,春三月,旱,王避正殿減常饍,御南堂親録囚。秋七月,高僧智明入陳求法。

 八年,春正月,置禮部令二員。夏五月,雷震,星殞如雨。

 九年,秋七月,大世、仇二人適海。大世,奈勿王七世孫,伊飡冬臺之子也。資俊逸,少有方外志,與交遊僧淡水曰:「在此新羅山谷之間,以終一生,則何異池魚籠鳥,不知滄海之浩大,山林之寬閑乎,吾將乘桴泛海,以至呉、越,侵尋追師,訪道於名山。若凡骨可換,神仙可學,則飄然乘風於泬寥之表,此天下之奇遊壯觀也,子能從我乎?」淡水不肯,大世退而求友。適遇仇者,耿介有奇節,遂與之遊南山之寺。忽風雨落葉,泛於庭潦。大世與仇言曰:「吾有與君西遊之志,今各取一葉,爲之舟,以觀其行之先後。」俄而大世之葉在前,大世笑曰:「吾其行乎!」仇勃然曰:「予[15]亦男兒也,豈獨不能乎!」大世知其可與,密言其志。仇柒曰:「此吾願也。」遂相與爲友,自南海乘舟而去,後不知其所往。

 十年,冬十二月,上大等弩里夫卒,以伊飡首乙夫爲上大等。

 十一年,春三月,圓光法師,入陳求法。秋七月,國西大水,漂沒人戸 三萬三百六十,死者二百餘人。王發使賑恤之

13년(5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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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591년)

봄 2월 영객부령(領客府令) 2인을 두었다.

가을 7월 남산성(南山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2,854보(步)이다.

15년(5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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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593년)

가을 7월 명활성(明活城)을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3,000보(步)이며, 서형산성(西兄山城)은 둘레가 2,000보이다.

16년(5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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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594년)

수나라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을 상개부(上開府)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18년(5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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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596년)

봄 3월에 고승(高僧) 담육(曇育)이 수나라에 들어가서 구법(求法)하였다.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겨울 10월 영흥사(永興寺)에 불이 났다. 가옥 350채가 연소하여, 왕이 친림하여 구제했다.

24년(6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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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602년)

사신 대나마 상군(上軍)을 수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8월에 백제가 아막성(阿莫城)을 공격해 왔으므로 왕이 장수와 사졸로 하여금 맞서 싸우게 하여 크게 쳐부수었으나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전사하였다.

가을 9월 고승(高僧) 지명(智明)이 입조사(入朝使) 상군(上軍)을 따라 돌아왔다. 왕은 지명의 계행(戒行)을 존경하여 대덕(大德)으로 삼았다.

25년(6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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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603년)

가을 8월에 고구려가 북한산성에 침입하였으므로 왕이 몸소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그들을 막았다.

26년(6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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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604년)

가을 7월 대나마 만세(萬世)·혜문(惠文) 등을 사신으로 보내 수나라에 조공했다. 남천주(南川州)를 폐하고 돌이켜 북한산주(北漢山州)를 두었다.

27년(6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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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605년)

봄 3월 고승 담육(曇育)이 수나라 입조사 혜문(惠文)과 함께 돌아왔다.

가을 8월에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침략하였다.

30년(6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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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608년)

왕이 고구려가 경계를 자주 침범함을 걱정했다. 고구려를 치려고 수나라에 군사를 청하려 했다. 원광(圓光)에게 명하여 걸사표(乞師表)를 짓게 하였다.

원광이 말하기를 “남을 죽임으로써 자기 존재를 구함은 사문(沙門)의 행동이 아니다. 빈도(貧道)는 대왕의 땅에 살며 대왕의 물과 풀을 먹으매, 감히 명이 옳음을 생각하니 좇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곧 삼가 받들어 지었다.

2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방을 침략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4월에 고구려가 우명산성(牛鳴山城)을 빼앗았다.

33년(6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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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611년)

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表)걸사표를 올려 군사를 청하니, 수양제(煬帝)가 그것을 허락하였다.

겨울 10월에 백제 군사가 가잠성(椵岑城)을 포위하여 100일이나 지속되었다. 현령(縣令) 찬덕(讚德)이 굳게 지켰으나 힘이 다하여 죽고 성은 함락되었다.

38년(6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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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년(616년)

겨울 10월에 백제가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해 왔다.

40년(6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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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618년)

북한산주 군주 변품(邊品)이 가잠성을 되찾으려고 군사를 일으켜 백제와 싸웠는데, 해론(奚論)이 종군하여 적진에 나아가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해론은 찬덕(讚德)의 아들이다.

43년(6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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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621년)

가을 7월에 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당] 고조가 몸소 위문하고, 통직(通直) 산기상시(散騎常侍) 유문소(庾文素)를 보내 예방하고 조서와 그림병풍 및 채색비단 300단(段)을 주었다.

45년(6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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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623년)

봄 정월 병부를 두고 대감을 두 사람으로 정하다.

겨울 10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백제가 늑노현(勒弩縣)을 습격하였다.

46년(6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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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년(624년)

봄 정월에 시위부(侍衛府) 대감(大監) 6인, 상사서(賞賜暑) 대정(大正) 1인, 대도서(大道暑) 대정 1인을 두었다.

3월에 당 고조가 사신을 보내 왕을 주국(柱國)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책봉하였다.

겨울 10월 백제 군사가 와서 우리의 속함성(速含城), 앵잠성(櫻岑城), 기잠성(歧暫城), 봉잠성(烽岑城), 기현성(旗縣城), 혈책성(穴柵城) 등 여섯 성을 에워쌌다. 이에 세 성은 함락되거나 혹은 항복하였다. 급찬 눌최(訥催)는 봉잠성, 앵잠성, 기현성의 세 성 군사와 합하여 굳게 지켰으나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47년(6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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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년(625년)

겨울 11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아울러 고구려가 길을 막고서 조공하지 못하게 하며 또 자주 [신라를] 침입한다고 호소하였다.

48년(6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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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년(626년)

가을 7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당 고조가 주자사(朱子奢)를 보내와, 조칙으로 고구려와 서로 화친하도록 타일렀다.

8월 백제가 주재성(主在城)을 공격하자 성주 동소(東所)가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고허성(高墟城)을 쌓았다.

49년(6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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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년(627년)

봄 3월 큰 바람과 비가 오고 사태가 나며 5일이 지났다.

여름 6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백제 장군 사걸(沙乞)이 서쪽 변방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300여 명을 사로잡아 갔다.

8월 서리가 내리다.

겨울 11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50년(6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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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628년)

봄 2월에 백제가 가잠성을 에워쌌으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쳐서 깨뜨렸다.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 비가 내리기를 빌었다.

겨울에 사람이 굶주려 자녀를 팔았다.

51년(6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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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년(629년)

8월에 왕이 대장군(大將軍)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副將軍)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했다. 고구려인이 성에서 나와 진(陣)을 쳤는데, 군세(軍勢)가 매우 성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이를 바라보고 두려워서 싸울 마음이 사라졌다. 유신이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옷깃을 흔들면 갖옷이 바로잡히고, 벼리를 당겨 끌면 그물이 펼쳐진다.’라고 하였으니, 내가 그 벼리와 옷깃이 되겠다.” 이에 말을 올라타고 검을 빼들고 적진(敵陣)을 향하여 곧바로 나아가 세 번 들어갔다 세 번 나오매, 매번 들어갈 때마다 장수를 베거나 깃발을 뽑았다. 군사들이 승기를 타서 북을 치며 진격하여 5천여 명의 목을 베어 죽이니, 그 성이 이에 항복했다.

9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53년(6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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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631년)

봄 2월 흰 개가 궁궐의 담장에 올라갔다.

여름 5월 이찬(伊湌) 칠숙이 아찬(阿湌) 석품(石品)과 함께 모반하였다. 왕이 그것을 알고 칠숙을 잡아들여 동쪽 저자거리에서 그의 목을 베어 죽이고 또한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아찬 석품이 도망하여 백제 국경까지 이르렀다가, 아내와 자식을 보고 싶은 마음에 낮에 숨고 밤에 걸어 돌아오다 총산(叢山)에 이르렀다. 한 나무꾼을 만나 옷을 벗어 나무꾼의 해진 옷으로 바꿔 입고 땔나무를 짊어지고 몰래 집에까지 왔다가 잡혀서 처형되었다.

가을 7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미녀 두 사람을 바치니, 위징(魏徵)이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간하자 황제가 기뻐하며 말하였다. “저 임읍(林邑)이 바친 앵무새도 오히려 괴로운 추위를 말하며, 제 나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는데, 하물며 두 여자는 친척과 멀리 헤어졌으니 어떻겠는가?” (두 여자를) 사신과 함께 돌려보냈다.

하얀 무지개가 궁궐 내 우물에 들고 토성이 달을 침범했다.

54년(6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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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년(632년)

봄 정월에 왕이 훙했다. 시호(諡號)를 진평(眞平)이라고 하고, 한지(漢只)에 장사지냈다. 당 태종(太宗)이 조서(詔書)를 내려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를 추증(追贈)하고, 부물(賻物) 200단(段)을 주었다.고기(古記)에는 “정관(貞觀) 6년 임진(壬辰) 정월에 죽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신당서》(新唐書)와 《자리통감》(資理通鑑)[10]에는 모두 “정관(貞觀) 5년 신묘(辛卯)에 신라왕 진평(眞平)이 죽었다.”라고 하였으니 어찌하여 잘못된 것일까?

삼국사기, 제4권.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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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原本 「三」. 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鑄字本 「三」. 榮·朝·北·權·烈·燾·浩 「三」.
  2. 原本 [柢].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3. 原本 「大」.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4. 原本 「千」.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5. 本書 卷33 樂志 「注」. 北·燾 「法(注)」.
  6. 原本 誤刻. 鑄字本·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7. 김대문(金大問, ?~?)은 신라의 진골 귀족으로, 문장가이며 관료이자 학자이기도 하다. 《화랑세기》의 저자이며, 본관은 경주이고, 금성 출신이다.
  8. 原本 [笁]. 鑄字本에 의거 수정.
  9. 原本 [大]. 鑄字本에 의거 수정.
  10. 《자리통감》(資理通鑑) = 《자치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