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4-2 (5차 교육과정)/1. 오랜 역사를 지닌 우리 민족
고장에는 그 고장의 내력이 있고, 나라에는 그 나라의 역사가 있다.
고장의 내력은 우리 나라의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고장의 내력을 통해 우리 나라의 내력을 미루어 생각할 수 있다.
우리 나라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 나라의 역사를 알면, 예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나라가 발전해 온 모습과 조상들의 생활 모습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앞날을 바르게 내다보고 조상들의 훌륭한 슬기를 이어받아 보다 훌륭한 문화를 이룩할 수 있게 된다.
(1) 역사의 고장 강화도
편집강화도에는 오랜 옛날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우리 조상들이 살아 온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과 유물이 많다. 그래서 강화도는 우리 나라 역사를 공부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고장 중의 하나이다.
강화도에 있는 유적과 유물을 살펴보면서 우리 조상들의 생활 모습을 알아보자.
[1] 강화도
편집강화도의 자연과 산업을 살펴보고, 옛날에 이 곳이 중요하게 여겨진 까닭을 알아보자. |
강화도는 한강과 임진강이 황해로 흘러드는 곳에 자리잡은 큰 섬으로, 주변에 있는 여러 개의 작은 섬들과 함께 강화군을 이룬다.
산지가 많은 편이지만 산세는 험하지 않으며, 산지 사이에 있는 평지와 산기슭에 논과 밭이 고루 일구어져 있다. 가까운 바다에서는 새우가 많이 잡힌다.
강화도의 대표적인 특산물은 인삼과 화문석이다. 인삼은 6⋅25때 개성 사람들이 이 곳으로 옮겨 와 살면서 재배 기술이 보급되어 많이 가꾸게 되었다. 대개 가정에서 사람의 손으로 만드는 화문석은 품질이 좋고 무늬가 아름다워 전국적으로 팔려 나간다.
한강 하구에 자리잡고 있는 강화도는 옛적에는 서울을 드나드는 뱃길의 길목이었다. 즉, 황해에서 서울을 오가는 배들은 강화도를 지나 한강의 뱃길을 따라 다녔다. 이 뱃길은 강화도 남쪽의 인천과 북쪽의 해주로도 이어져 멀리 중국으로 나가는 뱃길과 이어져 있었다.
이와 같이 강화도는 교통상 중요한 구실을 하였던 곳이다.
약 80년 전부터 강화도와 육지 사이에 기선이 다녔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 중에는 일본 사람의 배라고 하여 기선을 타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강화도와 김포 사이에 강화 대교가 놓여, 육지와의 교통이 매우 편리해졌다.
강화도는 국방상으로도 중요한 구실을 하던 곳이다. 우리 조상들이 외적의 침입을 받았을 때, 이를 용감하게 물리치고 나라를 지켰던 자취는 지금도 여러 곳에 남아있다.
이처럼 강화도는 육지에서 가깝고, 평지와 산지, 바다로부터 산물을 얻을 수 있는 자연 환경을 갖추고 있어, 사람들이 살기에 비교적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특히, 강화도는 서울로 통하는 한강의 어귀에 자리잡고 있어, 교통과 국방으로도 중요한 구실을 하였던 곳이다.
우리 조상들은 오랜 옛날부터 이 곳에서 살면서 나라를 지켜 왔기 때문에, 강화도에는 조상들의 생활 모습과 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유적과 유물이 많다.
[2] 초지진과 고려 궁터
편집강화도에 있는 유적을 통해서 조상들이 나라를 지켜 온 모습을 알아보자. |
강화도에는 ‘진’이나 ‘보’가 붙은 지명이 흔한데, 진은 군인이 주둔했던 곳이고, 보는 성곽의 일종이다. 우리는 이 진이나 보를 통하여 조상들이 나라를 지켰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초지진은 강화도의 남동쪽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다. 옛날에 강화도 남쪽에서 한강 쪽으로 올라 가려는 배들은 이 초지진을 지나야만 했다. 그래서 당시의 우리 군사들은 서울의 안전을 위하여 이 곳을 지켰으며, 만약 다른 나라의 배가 허락 없이 지나가려고 하면 이를 막았다.
지금으로부터 120여 년 전 프랑스와 미국 군함이 쳐들어왔을 때에 우리 군사들은 바로 여기서 용감하게 싸웠다.
강화 대교를 건너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목에 갑곶진이 있다. 갑곶진은 강화도와 육지를 오고 갈 때에, 배를 타던 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갑곶진은 교통상 중요한 구실을 하였을 뿐 아니라, 외적의 침입을 막는 데도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 밖에 광성보, 덕진진 등도 옛날에는 군사들을 두어 지켰던 곳으로, 옛날의 포대를 다시 손질해 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강화읍 중심부에는 ‘고려 궁터’라는 옛 궁궐터가 남아 있다. 이 곳은 중국의 북쪽에서 나라를 세운 몽고족이 침략하였을 때에, 이에 맞서 싸우던 고려가 수도를 강화도로 잠시 옮기고 궁궐을 지었던 곳이다.
강화도와 육지 사이의 바다는 비록 폭은 좁지만, 물살아 세어 배로 건너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바다에 익숙하지 못한 몽고군은 강화도까지 쳐들어오지 못했고, 고려는 꿋꿋하게 싸워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우리 조상들은 외적과 맞서 싸우는 어려움 속에서도 훌륭한 문화를 꽃피웠다. 우리 민족이 자랑거리로 내세우는 금속 활자와 팔만 대장경판도 몽고군의 침략을 물리치는 어려움 속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연구
사회과 부도 4, 8쪽을 보고 강화도가 서울을 지키는 곳으로서 중요했던 까닭을 살펴보자. |
[3] 참성단과 고인돌
편집강화도에 있는 유적과 유물을 통해서 아주 오랜 옛날 우리 조상들의 생활 모습을 알아보자. |
강화도에는 단군과 관계 깊은 유적이 많다. 섬의 남쪽 마니산 꼭대기에 있는 참성단은, 단군께서 온 겨레를 위해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곳이라고 전해 오고 있다.
해마다 열리는 전국 체육 대회 때에는,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에서 성화를 점화하여 대회장의 성화대로 옮겨 오고 있다. 참성단에서 성화를 옮겨 오는 것은 단군께서 백성을 위하시던 마음을 이어받고자 함이다.
마니산 북동쪽에는 정족 산성이 있다. 이 성은 단군께서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고 전해 오고 있으며, 삼랑성이라고도 불린다. 정족 산성 안에는 오래 전에 세워진 전등사라는 절이 있는데, 나라에서는 이 절에 있는 대웅전과 약사전을 보물로 지정하여 잘 보호하고 있다. 옛날의 성터나 절 등은 이처럼 우리 조상들의 생활 모습을 살펴보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우리는 강화도의 곳곳에서 고인돌을 볼 수 있다. 이 고인돌 밑에서 옛날 사람들이 만들어 쓰던 연모와 무기, 흙으로 만든 그릇 등 여러 가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아주 오랜 옛날에는 글자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 놓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오랜 옛날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알아보려면 조상들이 남긴 유적이나 유물을 통해서 짐작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강화도에 있는 고인돌을 통해서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여러 곳에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고인돌이 마을을 다스리던 지도자의 무덤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또, 고인돌 밑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유물을 통해서 우리는 오랜 옛날의 우리 조상들이 어떤 생활을 하였는지 짐작할 수도 있다.
이처럼 강화도에는 옛날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과 유물이 많다.
연구
고인돌이 지도자의 무덤으로 짐작되는 까닭을 이야기한 자료를 찾아보자. |
학습 정리
편집1. 유적과 유물이 많은 고장의 내력을 살펴보면, 나라의 역사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1) 강화도는 우리 조상들이 남긴 유적과 유물이 많은 고장이다.
(2) 강화도에 있는 유적과 유물은 우리 나라 역사 공부에 많은 도움을 준다.
2. 우리 조상들은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1) 강화도에는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만들었던 건물이나 시설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2) 진, 보, 궁터 등을 보면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모습을 알 수 있다.
3. 우리 조상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 땅에서 살아 왔다.
(1) 강화도에는 오랜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썼던 유적과 유물이 많다.
(2) 유적과 유물을 통해서 오랜 옛날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2) 역사 공부에 필요한 자료
편집역사 공부는 예전에 있었던 일이나 조상의 생활 모습 등을 찾아 그 뜻을 알아보는 일로서, 이를 위해서는 여러 가지 자료가 필요하다.
역사 공부에 필요한 자료들로는 우리가 알아보기 쉽게 만들어 놓은 국사 연대표와 역사 지도를 비롯하여, 옛날 사람들이 생활하던 자취나 남긴 물건, 책, 전해 오는 이야기와 노래, 풍습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역사 공부에 이용되는 자료의 종류와 자료를 이용하는 방법에 대하여 알아보자.
[1] 국사 연대표
편집국사 연대표에 실린 내용과 연대표를 이용하는 방법에 대하여 알아보자. |
우리는 땅의 모양과 도시의 위치를 알고 싶을 때나 도로와 철도가 뻗은 모양 등을 살펴보고 싶을 때에 흔히 지도를 찾아본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이 세운 나라나, 이룩한 일들을 알고 싶을 때에는 국사 연대표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우리가 지난 시간까지 강화도에 대하여 공부한 것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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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서 나라 이름이 나타나 있는 것은 고려 궁터뿐이다. 그 밖의 것은 만들어진 때의 나라 이름도 얼른 알 수 없고, 어느 것이 먼저 생긴 것인지도 쉽게 알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만들어진 때를 조사하여 간단한 표를 만들면 한 눈에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오른쪽의 표에는 단군께서 참성단과 삼랑성을 쌓게 한 때의 나라 이름은 고조선이었고, 전등사를 세운 때의 나라 이름은 고구려였음이 나타나 있다.
있었던 일 | 나라 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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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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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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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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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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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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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
이와 같이, 옛날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어난 일들을 차례로 늘어놓은 표를 만들면 한눈에 알아보기가 쉽다.
그러나 앞의 표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때의 햇수가 적혀 있지 않아 불편하다.
우리가 앞으로 많이 이용할 연대표에는 햇수가 적혀 있다. 이 햇수를 연대라 하며, 연대표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생긴 것이다.
연대표 중에서도 우리 나라 역사 전체를 나타낸 것을 국사 연대표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국사 연대표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실려 있다.
○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 이름
○ 이름을 남긴 왕
○ 우리 역사를 빛낸 훌륭한 인물들
○ 중요한 일들과 그 일들이 일어난 해
더 자세한 국사 연대표에는 다른 나라의 중요한 일들을 함께 나타낸 것도 있다.
연대표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이용하게 된다.
○ 나라 이름이 언제, 어떤 이름으로 바뀌었는가를 알고 싶을 때
○ 각 나라가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 되었는가를 알아보고 싶을 때
○ 중요한 일이 언제 일어났는가를 알고 싶을 때
○ 이름난 사람이 활동한 시기를 알고 싶을 때
○ 전쟁이 일어났던 시기를 알고 싶을 때
연구
우리 고장의 내력을 조사하여, 국사 연대표와 같은 양식의 연대표를 만들어 보자. |
[2] 역사 지도
편집역사 지도는 어떻게 이용하는지 알아보고, 우리 나라가 변해 온 모습을 역사 지도로 살펴보자. |
우리는 앞에서 공부한 국사 연대표로 조상들이 세운 나라나,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국사 연대표만으로는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들이 어디에 있었고, 그 넓이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또, 그 때의 이름난 고장이나 행정 구역의 모습 등도 알 수 없었다. 이러한 것들은 옛날의 나라 모습을 나타낸 역사 지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다음의 역사 지도를 보면, 우리 나라의 국토가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알 수 있다.
[3] 향토지
편집국사 연대표와 역사 지도 외에 옛날의 일들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자. |
고장의 역사 중에는 할아버지나 할머니께 여쭈어 보면 잘 알 수 있는 것들도 많다.
그러나 좀더 오래 된 일을 알고 싶을 때에는, 고장의 이모저모를 엮어 둔 책을 보는 것이 좋다. 이러한 책을 향토지라 한다.
향토지에는 고장의 땅 이름, 문화재, 생활 풍습, 말씨, 관청, 특산물, 이름난 사람들 등에 대한 것이 적혀 있다.
그러므로 각 고장에 있는 향토지를 모아서 조사해 보면, 여러 고장의 사정에 대하여 자세히 알 수 있으며, 우리 나라 전체의 역사를 공부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또, 길가의 비석, 옛날의 그림과 글씨도 역사 공부를 하는 데 필요한 좋은 자료들이다.
옛날 그림을 보며 역사 공부를 할 때에는 그 그림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그려진 내용을 잘 살펴보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그림을 잘 살펴보면, 옛날 사람들과 오늘날 우리들의 생활 모습이 다른 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 만들어진 역사 지도 외에 옛날에 그려진 지도도 역사 공부에 많은 도움을 준다.
이 밖에도 역사 공부의 자료가 될 수 있는 것으로는 집안의 내력을 엮은 족보, 선비들이 쓴 글을 모아 엮은 문집, 조상 대대로 입으로 전해 온 이야기나 노래 등이 있다. 또 우리가 쉽게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는 옛날 사람들이 남긴 건물이나 물건들도 있다.
조상들이 남긴 자료들 중에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그 모습이 조금씩 달라진 것도 있다. 이런 자료들을 오늘날의 것과 비교하여 그 차이점을 살펴보면, 사람들의 생활이 계속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런 자료들을 통해서 우리들의 생활 모습이 달라져 온 내력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 생활이 어떻게 달라져 갈 것인지도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가오는 시대를 슬기롭게 살아가기 위한 준비를 더 잘 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된다.
연구
옛날과 지금의 생활 모습이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는 그림, 사진, 실물을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자. ○ 의생활과 관련된 자료 ○ 식생활과 관련된 자료 ○ 주생활과 관련된 자료 |
학습 정리
편집1. 국사 연대표는 우리 나라의 역사를 손쉽게 살펴볼 수 있는 편리한 자료이다.
(1) 국사 연대표에는 우리 나라 역사의 중요한 일들이 차례대로 나타나 있다.
(2)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연대에 따라 알아보려면 연대표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2. 역사 지도는 옛날의 나라 모습을 지도로 나타낸 자료이다.
(1) 역사 지도에는 옛날의 나라 위치, 영토, 행정 구역 등이 나타나 있다.
(2) 국토가 변해 온 모습이나 이름난 고장 등을 알아볼 때에는 역사 지도를 이용한다.
3. 역사를 알아보는 데 이용되는 자료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1) 향토지는 고장의 내력과 사정을 자세히 기록한 자료이다.
(2) 고장의 유물과 유적, 향토지 등은 역사를 알아보는 데 도움을 주는 자료이다.
(3) 옛 도읍지
편집도읍지라는 말은 나라의 수도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지금의 서울은 조선 시대의 도읍지였다. 조선 시대 바로 전인 고려 시대의 도읍지는 지금의 개성이었고, 그 전인 통일신라 시대의 도읍지는 경주였다. 이처럼 옛날에는 나라가 바뀌면 대개 도읍지도 바뀌었다.
옛날에는 도읍지에 궁궐을 짓고 임금이 나라를 다스렸으므로, 그 나라의 문화도 도읍지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서울을 비롯한 옛 도읍지의 모습과 내력을 살펴보면서 우리 나라가 발달해 온 내력을 자세히 알아보자.
[1] 서울
편집서울의 옛 모습과 오늘날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서울이 발전해 온 내력에 대하여 알아보자. |
서울은 조선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약 600년간 우리 나라의 도읍지며, 일찍이 백제의 도읍지이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서울을 한양 또는 한성이라 불렀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인구가 1000만 명이 넘는 큰 도시로 발전하였지만, 옛날에는 지금처럼 큰 도시는 아니었다.
조선이 처음 이 곳을 도읍지로 정할 때, 나라에서는 궁궐과 관청의 건물을 먼저 짓고 서울을 지키기 위하여 둘레에 성을 쌓았다. 그리고 백성들이 성 안팎을 드나들 수 있도록 성의 네 곳에 큰 성문을 세웠고, 큰 성문 사이마다 작은 문을 세웠다. 그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는 국보로 지정된 남대문과 보물로 지정된 동대문 등이 있다.
서울은 나라를 다스리는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상업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경복궁 앞의 광화문 거리 양쪽에는 중앙 관청이 있었으며, 종로 거리에는 물건을 사고 파는 여러 종류의 가게들이 있었다.
지금도 서울에는 옛날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남산에는 봉수대가 남아 있는데, 전국 각지에서 나라에 알릴 급한 일이 생겼을 때에는 불빛이나 연기로 이 곳까지 알리도록 마련했던 것이다. 그리고 종로에는 시각을 알리던 보신각종이 남아 있다.
보신각 가까이에 있는 파고다 공원은 3⋅1 운동 때,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독립 선언서를 읽고 만세를 불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서울에 서양식 건물이 세워지고 큰 길이 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이었다. 이 때부터 전차가 다니고 전등을 쓰게 되었다. 신식 학교와 병원도 이 때부터 세웠다.
1960년대 이후 나라가 크게 발전하여, 서울 주변에 있는 경기도 일부 지역이 서울에 합쳐짐에 따라 서울은 더욱 큰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연구
서울에 있는 옛날의 궁궐, 성문 등의 사진을 모아 전시해 보자. |
[2] 개성과 평양
편집개성과 평양은 옛날에 어느 나라의 도읍지였으며, 어떤 유적들이 남아 있는지 알아보자. |
개성은 고려의 도읍지였던 곳으로, 옛날에는 개경 또는 송도라 하였다. 고려는 처음에 도읍을 철원에 정하였다가 곧 개성으로 옮겨 왔으며, 이 곳에서 470여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개성에는 고려의 궁궐터인 만월대와 선죽교, 성터, 성문 등의 유적이 있다.
평양은 고구려의 도읍지였다. 만주의 통구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우던 고구려는 나라가 강성해지자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
대동강가에 자리잡고 있는 평양은 물자가 풍부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오랜 옛날부터 도읍지가 되었고, 문화가 발달하였다. 평양 부근에는 옛날의 무덤들이 많아서 이들 무덤의 내부 모습이나 그 안에서 나온 물건 등을 통해서도 우리 조상들의 생활 모습을 많이 알아 낼 수 있다.
연구
개성과 평양에 있는 유적들의 사진을 모아 그 내력을 알아보자. |
[3] 공주와 부여
편집백제의 도읍지는 어느 곳들이었는지 알아보고, 그 곳의 옛 자취를 살펴보자. |
백제는 처음에 한강 남쪽의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뒤에 공주로 옮겼다.
공주에는 옛날의 궁궐터로 짐작이 되는 공산성과 무령왕릉을 비롯한 여러 임금의 무덤이 있다. 무령왕릉은 무늬 벽돌을 쌓아 만든 화려한 무덤으로서, 무덤 안이 장사지냈을 때의 모습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백제의 높은 문화 수준을 잘 보여 준다.
공주는 백제가 멸망된 후에도 이 지방의 중심이 되는 도시로 발전하여 온 도시이다.
백제는 도읍을 공주에서 부여로 다시 옮겼다. 금강 중류에 자리잡은 부여는 교통이 편리할 뿐 아니라, 주변에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 산물이 풍부하고 국방상으로도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 곳에는 궁궐터와 여러 절터가 남아 있다. 특히,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백제 탑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 준다.
공주와 부여에 있는 박물관에서는 백제의 여러 가지 아름다운 예술품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백제의 옛 무덤에서 나온 금관, 은팔찌, 돌이나 구리로 만든 불상 등의 여러 가지 유물을 잘 진열하여, 사람들이 구경할 수 있게 해 놓았다.
[4] 경주
편집경주의 내력과 경주에 있는 유적, 유물들에 대하여 알아보자. |
경주는 약 1000년 동안 신라의 도읍지였다. 신라 시대에는 불교가 발달하여 많은 절이 지어졌으며, 문화도 찬란하게 발달하였다.
특히 통일신라 시대에는 고구려, 백제의 문화를 합치고 당나라와도 문화를 주고받으면서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를 꽃피웠다.
그리하여 불국사의 3층 석탑과 다보탑, 석굴암의 본존불상 등 여러 가지 훌륭한 문화재가 오늘날까지 전하여 오고 있다.
그 중에서 삼국 통일 이전에 만든 것으로는 분황사 석탑과 동양에서 가장 오래 된 천문대로 알려진 첨성대가 유명하다.
경주와 그 부근의 왕릉에서는 금관, 귀걸이, 가락지 등의 장식품이 많이 나왔다.
경주에는 이처럼 유적과 유물이 많아 역사 공부를 하기 좋은 고장이다.
연구
경주에 있는 신라 시대의 문화재 사진을 모아 전시해 보자. |
학습 정리
편집1. 도읍지는 나라를 다스리는 중심이 되는 곳이다.
(1) 옛 도읍지는 임금이 자리를 잡고 나라를 다스리던 곳이다.
(2) 나라가 바뀌면 대개 도읍지도 바뀌었다.
2. 도읍지는 그 나라 문화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1) 한 나라의 문화는 도읍지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2) 옛 도읍지에는 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다.
3. 도읍지의 내력을 살펴보면 그 나라의 역사를 알 수 있다.
(1) 서울의 내력을 살펴보면 조선의 역사를 알 수 있다.
(2) 개성의 내력을 살펴보면 고려의 역사를 알 수 있고, 평양, 공주와 부여, 경주의 내력을 살펴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