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권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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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기세가(陳杞世家)
편집진(陳)
편집호공(胡公)
편집진(陳)나라의 호공(胡公) 만(滿)은 우순(虞舜)의 후손이다. 옛날 순이 평민이었을 때 요(堯)는 두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여 규예(嬀汭)에 살게 했다. 그 후손들이 그곳을 성씨로 삼으니 성을 규씨(嬀氏)라 했다. 순이 세상을 떠나고 천하를 우에게 전했다. 순의 아들 상균(商均)은 봉국을 받았다. 하후(夏后) 때에 이르러 (어떤 이는 봉국을) 잃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잇기도 했다.
주나라 무왕이 은, 주를 이긴 후 바로 순의 후손들을 찾았는데, 규만(嬀滿)을 찾아 진(陳)나라에 봉하여 순 임금의 제사를 받들게 하니 이가 호공이다.
신공(申公)
편집호공이 죽고, 아들 신공(申公) 서후(犀侯)가 즉위했다.
상공(相公)
편집신공이 죽고, 동생 상공(相公) 고양(皐羊)이 즉위했다.
효공(孝公)
편집상공이 죽고, 신공의 아들인 돌(突)이 즉위하니 이가 효공(孝公)이다.
신공(愼公)
편집효공이 죽고, 아들 신공(愼公) 어융(圉戎)이 즉위했다. 신공은 주 여왕(厲王) 때에 해당한다.
유공(幽公)
편집신공이 죽고, 아들 유공(幽公) 녕(寧)이 즉위했다.
유공 12년(기원전 843년)에 주나라 여왕이 체(彘)나라로 도망갔다.
희공(釐公)
편집23년에 유공이 죽고, 아들 희공(釐公) 효(孝)가 즉위했다.
희공 6년에 주나라 선왕(宣王)이 즉위했다.
무공(武公)
편집36년에 희공이 죽고, 아들 무공(武公) 령(靈)이 즉위했다.
이공(夷公)
편집무공이 15년 만에 죽고, 아들 이공(夷公) 열(說)이 즉위했다.
이해에 주나라 유왕(幽王)이 즉위했다.
평공(平公)
편집이공이 재위 3년 만에 죽고, 아우 평공(平公) 섭(燮)이 즉위했다.
평공 7년(기원전 771년)에 주나라 유왕이 견융에게 살해당하자, 주나라는 동쪽으로 (도읍을) 옮겨갔다.
진(秦)나라가 비로소 제후 반열에 올랐다.
문공(文公)
편집23년에 평공이 죽고, 아들 문공(文公) 어(圉)가 즉위했다.
문공은 원년(기원전 754년)에 채후(蔡侯)의 딸을 맞아들여 아들 타(佗)를 낳았다.
환공(桓公)
편집10년에 문공이 죽고, 맏아들 환공(桓公) 포(鮑)가 즉위했다.
환공 23년(기원전 722년)에 노(魯)나라 은공(隱公)이 즉위했다.
26년에 위(衛)나라가 그 국군 주우(州吁)를 시해했다.
33년에 노나라가 그 국군 은공을 시해했다.
38년 정월 갑술일과 기축일 사이에 환공 포가 죽었다.
여공(厲公)
편집환공의 동생 타의 어머니가 채후의 딸이었으므로 채나라 사람들이 타를 위해 오보(五父)와 환공의 태자 문(免)을 죽이고 타를 세우니 이가 여공(厲公)이다. 환공이 병들었는데 난이 일어나 국인이 흩어졌기 때문에 (환공의 죽음을) 다시 알렸다.
여공 2년에 아들 경중(敬仲) 완(完)을 낳았다. 주나라의 태사(太史)가 진(陳)나라를 지나갈 때 진나라 여공이 『주역(周易)』으로 점을 쳐 달라고 해서 ‘비(否)’로 변하는 ‘관(觀)’ 괘를 얻었는데 그 내용은 이랬다.
“이는 나라의 광채를 보는 것이니 군왕의 상객이 되기에 유리한 괘입니다. 그가 장차 진씨를 대신하여 나라를 누릴 것입니다. 여기에 있지 않으면 다른 나라에 있을 것입니다. 그 자신이 있지 않더라도 그 자손이 있게 될 것입니다. 다른 나라라면 강씨(姜氏) 성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강씨 성은 태악(太嶽)의 후손입니다. 만물의 양면이 모두 번성할 수는 없으니 진이 쇠망해야 그가 번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공이 채후(蔡侯)의 딸을 취했는데 채후의 딸은 채나라 사람과 음란한 짓을 일삼았고, 여공도 여러 차례 채나라로 가서 음탕한 행위를 저질렀다.
이공(利公)
편집7년에 여공이 죽인 환공의 태자 면(免)의 세 동생, 즉 큰 동생 약(躍), 가운데 동생 임(林), 막내 동생 저구(杵臼) 세 사람이 채나라 사람을 시켜 미인으로 여공을 유혹하게 했다. 그러고는 채나라 사람과 함께 여공을 죽이고, 약을 옹립하니 이가 이공(利公)이다.
장공(莊公)
편집이공은 환공의 아들로 즉위한 지 5개월 만에 죽고, 동생인 임이 즉위하니 이가 장공(莊公)이다.
선공(宣公)
편집장공이 7년 만에 죽고, 막내 동생 저구가 즉위하니 이가 선공(宣公)이다.
선공 3년에 초나라 무왕(武王)이 죽고, 초나라가 강해지기 시작했다.
17년에 주나라 혜왕(惠王)이 진후(陳侯)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21년에 선공은 훗날 애첩이 아들 관(款)을 낳자, 그를 세우고 싶어 태자 어구(御寇)를 죽였다. 어구는 평소 여공의 아들 완(完)을 좋아했는데, 완은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겁이 나서 제나라로 달아났다. 제나라 환공이 완을 경으로 삼으려 하자, 완은 “객으로 빌붙어 사는 신세인 제가 화를 면한 것은 국군의 은혜 덕분인데 높은 자리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환공은 그에게 공정(工正)으로 삼았다.
제나라의 의중(懿仲)이 진나라 경중에게 딸을 주고 싶어서 점을 쳤더니 “이는 봉황 암수 한 쌍이 함께 힘차게 날고 우는 것이다. 규씨의 후손이 장차 강씨의 나라에서 뻗어나갈 것이다. 5대에 이르면 번창하여 정경(正卿)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고, 8대 이후에는 그와 다툴 자가 없을 것이다.”라는 괘가 나왔다.
37년에 제나라 환공이 채나라를 정벌하여 물리치고, 남으로 초나라를 침략하여 소릉(召陵)에까지 이르렀다가 진(陳)나라를 거쳐 돌아가려고 했다. 진나라의 대부 원도도(轅濤塗)는 그들이 진나라를 거쳐 가는 것이 싫어서 제나라를 속여 동쪽 길로 나가게 했다. 동쪽 길은 험했다. 환공이 노하여 원도도를 잡았다. 그 해에 진(晉)나라 헌공(獻公)이 태자 신생(申生)을 죽였다.
목공(穆公)
편집45년에 선공이 죽고, 아들 관(款)이 즉위하니 이가 목공(穆公)이다.
목공 5년(기원전 643년)에 제나라 환공이 죽었다.
16년에 진(晉)나라 문공(文公)이 성복(城濮)에서 초나라의 군대를 물리쳤다.
공공(共公)
편집이 해에 목공이 죽고 아들 공공(共公) 삭(朔)이 즉위했다.
공공 6년에 초나라 태자 상신(商臣)이 아버지 성왕(成王)을 죽이고 자리를 대신하니 이가 목왕(穆王)이다.
11년(기원전 621년)에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죽었다.
영공(靈公)
편집18년에 공공이 죽고, 아들 영공(靈公) 평국(平國)이 즉위했다.
영공 원년(기원전 613년)에 초나라 장왕(莊王)이 즉위했다.
6년에 초나라가 진(陳)나라를 정벌했다.
10년에 진(陳)나라가 초(楚)나라와 강화했다.
14년에 영공이 그 대부 공녕(孔寧), 의행보(儀行父)와 함께 하희(夏姬)와 간통하고는 그녀의 속옷을 입고 조정에서 희롱을 일삼았다. 설야(泄冶)가 “국군과 신하가 음란한 짓을 하면 인민들이 무엇을 본받겠습니까?”라고 바른말을 했다. 영공이 두 사람에게 이 말을 고하자, 두 사람은 설야를 죽일 테니 공은 말리지 말하며 기어코 설야를 죽였다.
15년에 영공이 두 사람과 함께 하씨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두 사람에게 “징서(徴舒)가 그대들을 닮았구려!”라며 농지거리를 하자 두 사람은 “공을 닮기도 했습니다.”라고 대꾸했다. 징서가 분노했다. 술자리가 끝나고 영공이 나오자, 마구간 문에 쇠뇌를 숨겨놓고 기다리던 징서가 활을 쏘아 영공을 죽였다.
공녕과 의행보는 초나라로 달아났고, 영공의 태자 오(午)는 진(晉)나라로 도망쳤다. 징서가 진나라의 제후로 자립했다. 징서는 원래 진나라의 대부이고, 하희는 어숙(御叔)의 아내이자 징서의 어머니이다.
성공(成公)
편집성공 원년 겨울에 초나라 장왕이 징서의 영공 시해를 명분으로 제후를 거느리고 진나라의 토벌에 나섰다. 그러고는 진나라를 향해 “놀랄 것 없다. 나는 징서만 죽이면 그만이다!”라 했다. 그러나 징서를 죽이고 진나라를 현으로 만들어 차지하니, 신하들이 모두 축하를 올렸다. 신숙시(申叔時)가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왔는데 혼자만 축하를 올리지 않았다.
장왕이 그 까닭을 묻자 “속담에 ‘소를 끌고 가다 남의 밭을 밟았더니, 밭주인이 소를 빼앗더라’는 말이 있습니다. 밭을 밟은 것은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소를 빼앗는 것은 심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왕께서는 징서가 국군을 시해한 난신이라 하여 제후의 군대를 징발하고 정의의 기치로 정벌하셨습니다. 그러면 됐지, 땅까지 탐을 내서 차지한다면 장차 천하를 어찌 호령하시렵니까? 그래서 축하를 올리지 않을 것이지요.”라고 했다. 장왕이 “좋소!”라 하고는 바로 진나라 영공의 태자 오를 진(晉)나라에서 맞이하여 전처럼 진나라의 국군으로 복위시키니 이가 성공(成公)이다.
공자가 역사책을 읽다가 초나라가 진나라를 회복시킨 대목에 이르러 “현명하구나, 초나라 장왕이여! 천 대의 수레를 가진 나라를 가볍게 여기고, 말 한 마디를 무겁게 여겼으니!”라고 했다.
28년(기원전 591년)에 초나라 장왕이 죽었다.
29년에 진(陳)나라가 초나라와의 맹약을 배반했다.
30년에 초나라 공왕(共王)이 진(陳)나라를 정벌했다.
애공(哀公)
편집이해에 성공이 죽고, 아들 애공(哀公) 약(弱)이 즉위했다. 초나라는 진나라가 상을 당했으므로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갔다.
애공 3년에 초나라가 진(陳)나라를 포위했다가, 다시 풀었다.
28년에 초나라 공자 위(圍)가 그 군주 겹오(郟敖)를 죽이고 스스로 서니, 이가 영왕(靈王)이다.
34년에 당초 애공은 정나라에서 아내를 맞이했다. 큰부인이 도(悼) 태자 사(師)를 낳고, 작은부인이 언(偃)을 낳았다. 총애하는 두 첩 중 큰첩이 유(留)를 낳고, 작은첩이 승(勝)을 낳았다. 유가 애공의 사랑을 받았는데, 애공은 자신의 동생 사도(司徒) 초(招)에게 유를 맡겼다.
애공이 병이 났는데, 그 해 3월에 초(招)가 도 태자를 죽이고 유를 태자로 세웠다. 애공이 노하여 초를 죽이려고 하자 초가 군사를 내어 애공을 감금하니 애공이 목을 매어 죽었다.
4월에 진(陳)나라가 초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초나라 영왕은 진나라에 난리가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진나라의 사신을 죽이고, 공자 기질(棄疾)에게 군대를 몰고 가서 진나라를 정벌하게 했다. 진나라의 국군 유는 정나라로 도망쳤다.
9월에 초나라가 진나라를 포위하여 11월에 멸망시키고, 기질을 진의 공으로 삼았다.
혜공(惠公)
편집초(招)가 도(悼) 태자를 살해했을 때 태자의 아들인 오(吳)는 진(晉)나라로 달아났다. 진나라 평공(平公)이 태사 조(趙)에게 “진(陳)나라가 결국은 망할 것 같소?”라고 물었더니 “진나라는 전욱(顓頊)의 후예입니다. 진씨가 제나라에서 정권을 얻겠지만 결국은 망할 것입니다. 막(幕)에서 고수(瞽瞍)에 이르기까지 천명을 거스르지 않았습니다. 순(舜)은 더 높은 덕을 가졌었고, 수(遂)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잘 지켰습니다. 호공(胡公)에 이르러 주 천자가 성씨를 내리고 순의 제사를 받들게 했습니다. 큰 덕을 가진 조상의 후손들이니 100대는 족히 갈 것입니다. 순의 후대가 끊이지 않았으니 제나라에서 일어나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초나라 영왕이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5년에 초나라 공자 기질이 영왕을 시해하고 자리에 오르니 이가 평왕(平王)이다. 평왕이 즉위하여 제후들과 잘 지내고 싶어 옛 진(陳)나라의 도 태자 사의 아들 오를 찾아서 진나라의 제후로 세우니, 이가 혜공(惠公)이다. 혜공이 즉위하여 애공이 죽은 해로 소급하여 원년으로 삼으니 자리가 빈 지 5년이었다.
10년에 진(陳)나라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
15년에 오왕 요(僚)가 공자 광(光)을 보내 진(陳)나라를 정벌하여 호(胡), 침(沈)을 취하고 돌아갔다.
28년(기원전 506년)에 오왕 합려(闔閭)와 오자서(伍子胥)가 초나라를 패배시키고 영(郢)까지 진입했다.
회공(懷公)
편집이해에 혜공이 죽고, 아들 회공(懷公) 유(柳)가 즉위했다.
회공 원년에 오나라가 초나라를 격파하고, 영에서 진후(회공)를 불렀다. 진후가 가려 했으나 대부가 “오나라가 새로 득세하여 초나라 왕이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우리 진나라와는 옛정이 있으니 배반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이에 회공은 병을 핑계로 오나라의 요구를 거절했다.
4년에 오나라가 다시 회공을 소환했다. 회공이 두려워 오나라로 갔다. 오나라는 전에 오지 않은 것에 화가 나서 그를 억류했고, 결국 오나라에서 죽었다.
민공(湣公)
편집진나라가 회공의 아들 월(越)을 세우니, 이가 민공(湣公)이다.
민공 6년(기원전 496년)에 공자가 진(陳)나라에 들렀다. 오나라 왕 부차(夫差)가 진나라를 정벌하여 읍 셋을 빼앗아 갔다.
13년에 오나라가 다시 진나라를 정벌하니, 진나라가 초나라에 급히 알렸다. 초나라 소왕(昭王)이 와서 구원하고 성보(城父)에 군대를 주둔시키자, 오나라의 군대가 물러갔다. 그 해 초나라 소왕이 성보에서 죽었다. 이때 공자는 진나라에 있었다.
15년에 송나라가 조(曹)나라를 멸망시켰다.
16년에 오왕 부차가 제나라를 침공해 애릉(艾陵)에서 제나라를 물리치고, 사신을 보내 진후(민공)를 소환했다. 진후가 두려워 오나라로 갔다. 초나라가 진나라를 정벌했다.
21년에 제나라 전상(田常)이 간공(簡公)을 시해했다.
23년에 초나라의 백공(白公) 승(勝)이 영윤 자서(子西)와 자기(子綦)를 죽이고 혜왕(惠王)을 습격했다. 섭공(葉公)이 백공의 군사를 격파하자 백공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4년에 초날 혜왕이 나라를 되찾고 군대를 일으켜 북벌에 나서, 진나라 민공을 죽이고는 마침내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차지했다. 이해에 공자가 세상을 떠났다.
기(杞)
편집동루공(東樓公)
편집기(杞)나라의 동루공(東樓公)은 하나라 우(禹)의 후예다. 은 시대에 제후에 봉해지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했다. 주 무왕이 은의 주왕을 물리치고 우의 후예인 동루공을 찾아내서 기나라에 봉하여 하후씨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서루공(西樓公)
편집동루공이 서루공(西樓公)을 낳았다.
제공(題公)
편집서루공은 제공(題公)을 낳았다.
모취공(謀娶公)
편집제공은 모취공(謀娶公)을 낳았다. 모취공은 주나라 여왕(厲王) 때에 해당한다.
무공(武公)
편집모취공은 무공(武公)을 낳았다.
정공(靖公)
편집무공이 47년 재위하다 죽고, 아들 정공(靖公)이 즉위했다.
공공(共公)
편집정공이 23년 재위하다 죽고, 아들 공공(共公)이 즉위했다.
덕공(德公)
편집공공이 8년 만에 죽고, 아들 덕공(德公)이 즉위했다.
환공(桓公)
편집덕공이 18년 만에 죽고, 동생인 환공(桓公) 고용(姑容)이 즉위했다.
효공(孝公)
편집환공이 17년 만에 죽고, 아들 효공(孝公) 개(匃)가 즉위했다.
문공(文公)
편집효공이 17년 만에 죽고, 동생인 문공(文公) 익고(益姑)가 즉위했다.
평공(平公)
편집문공이 14년 만에 죽고, 아우인 평공(平公) 울(鬱)이 즉위했다.
도공(悼公)
편집평공이 18년 만에 죽고 아들 도공(悼公) 성(成)이 즉위했다.
은공(隱公)
편집도공이 23년 만에 죽고, 아들 은공(隱公) 기(乞)가 즉위했다.
희공(釐公)
편집7월에 은공의 동생 수(遂)가 은공을 시해하고 스스로 서니, 이가 희공(釐公)이다.
민공(湣公)
편집희공은 15년 만에 죽고, 아들 민공(湣公) 유(維)가 즉위했다.
민공 15년에 초나라 혜왕이 진(陳)나라를 멸망시켰다.
애공(哀公)
편집16년에 민공의 동생 알로(閼路)가 민공을 시해하고 대신 자리에 오르니, 이가 애공(哀公)이다.
출공(出公)
편집애공은 즉위한 지 10년 만에 죽고, 민공의 아들인 칙(勅)이 즉위하니 이가 출공(出公)이다.
간공(簡公)
편집출공은 12년 만에 죽고, 아들 간공(簡公) 춘(春)이 즉위했다.
즉위한 지 겨우 1년 만에 즉 초나라 혜왕 44년(기원전 445년) 기나라를 멸망시켰다.
기나라는 진(陳)나라 보다 34년 늦게 망했다.
기나라는 작고 보잘것없어 이렇다 할 사적이 부족하다.
순과 하나라 때 대신들의 후손
편집순(舜)의 후예를 주나라 무왕이 진(陳)나라에 봉하고 초나라 혜왕이 멸망시키기까지의 기록은「진기세가(陳杞世家)」에 있다.
우(禹)의 후예를 주나라 무왕이 기나라에 봉하고, 초나라 혜왕이 멸망시키기까지의 기록이 「진기세가」에 있다.
설(契)의 후예가 은인데 「은본기(殷本紀)」에 기록을 남겼다. 은이 깨어지고 그 후예를 송나라에 봉하여 제나라 민왕이 멸망시키기까지의 기록이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 있다.
후직(后稷)의 후예가 주인데, 진(秦)나라 소왕(昭王)에게 멸망시켰다. 「주본기(周本紀)」에 기록이 있다.
고요(皐陶)의 후예들 중 일부가 영(英)과 육(六)에 봉해졌고 초나라 목왕에게 망했는데 계보가 없다.
백이(伯夷)의 후예는 주나라 무왕이 다시 제나라에 봉했는데 태공망(太公望)이라 하였다. 진씨(陳氏)가 멸망시켰고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 기록이 있다.
백예(伯翳)의 후예는 주날 평왕 때 봉해져 진(秦)나라이 되었다. 항우(項羽)가 멸망시켰고 「진본기(秦本紀)」에 기록을 남겼다.
수(垂), 익(益), 기(夔), 용(龍)의 후예는 어디에 봉해졌는지 모르고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상 11명은 모두 당(唐), 우(虞) 시대에 공덕으로 이름난 신하들이었다. 그 중 다섯 명의 후예는 훗날 제왕이 되었고, 나머지는 이름난 제후들이었다.
등(滕), 설(薛), 추(騶)는 하, 은, 주에 걸쳐 봉해졌는데, (나라가) 작아서 (다른 제후국들과) 같이 언급하기에는 부족하기에 논의하지 않았다.
주날 무왕 때 제후와 방백이 천 을 넘었다. 유왕과 여왕 이후로 제후들의 힘으로 싸우며 서로를 집어삼키려 했다. 강(江), 황(黃), 호(胡), 침(沈) 같은 나라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기에 일일이 기록하지 않았다.
사마천의 논평
편집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순의 덕은 지극하다고 할 것이다. 하에 자리를 선양했고, 후손들의 제사는 3대(하, 은, 주)를 거쳤다. 초나라가 진나라를 멸망시켰지만 전상이 제에서 정권을 얻어 끝내 나라를 세워 100대 동안 끊이지 않았다. 자손은 번창하고 땅을 가진 자가 적지 않았다. 하우의 후대로서 주나라 시기에 기나라가 있었지만 너무 작아 꼽을 만한 것이 없다. 초나라 혜왕이 기나라를 멸망시켰지만 그 후손인 월왕이 구천이 다시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