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권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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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채세가(管蔡世家)
편집채(蔡)
편집관숙(管叔), 채숙(蔡叔)의 집안 내력과 반란
편집관숙(管叔) 선(鮮)과 채숙(蔡叔) 탁(度)은 주(周)나라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들이다. 무왕과 어머니가 같은 형제는 10명이었다. 어머니 태사(太姒)는 문왕의 정비(正妃)였다. 맏아들이 백읍고(伯邑考)이고, 그 다음이 무왕 발, 그 다음이 관숙 선, 그 다음이 주공 단, 그 다음이 채숙 탁, 다음이 조숙(曹叔) 진탁(振鐸), 다음이 성숙(成叔) 무(武), 다음이 곽숙(霍叔) 처(處), 다음이 강숙(康叔) 봉(封), 다음이 염계(冉季) 재(載)였고, 염계 재가 막내였다.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 10명 가운데 오로지 발(發)과 단(旦) 둘만이 어질고 뛰어나서 문왕을 곁에서 보필하였기에 문왕은 맏아들인 백읍고를 버리고 발을 태자로 삼았다. 문왕이 세상을 떠나고 발이 즉위하니 이가 무왕이다. 그때 당시에 백읍고는 앞서 일찍 죽었다.
무왕이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을 물리치고 천하를 평정한 다음 공신과 동생들을 (제후로) 봉했다. 이에 따라 숙 선을 관(管)에, 숙 탁을 채(蔡)에 봉했다. 두 사람은 주왕의 아들 무경녹보(武庚祿父)를 도우며 은나라의 유민들을 다스렸다. 노(魯)나라 지역에 분봉된 단(旦)은 후에 주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그가 바로 주공(周公)이다. 진탁은 조(曹)나라 지역을, 무는 성(成)나라 지역을, 거는 곽(霍)나라 지역을 각각 봉지로 받았으나, 봉과 재는 어렸던 관계로 봉지를 받지 못했다.
무왕이 세상을 떠난 뒤 성왕이 나이가 어려 주공 단이 왕실을 전담했다. 관숙과 채숙은 주공의 섭정이 성왕에게 이롭지 못하다고 의심하여 무경을 끼고 난을 일으켰다. 주공 단은 성왕의 명령을 받아 토벌에 나서 무경과 관숙을 죽이고, 채숙은 수레 10승과 시종 70명만 주어 내쫓았다. 그리고 은나라의 유민들을 둘로 나누었는데, 미자(微子) 계(啓)를 송(宋)나라에 봉하여 제사를 잇게 하고, 다른 하나는 강숙을 위(衛)나라의 국군에 봉하니 이가 위 강숙이다. 또 염계 재를 염(冉)나라에 봉했는데, 염계와 강숙이 선하게 행동하므로 주공은 강숙과 염계를 주 왕실의 사구(司寇)와 사공(司空)으로 삼아 성왕의 통치를 보좌하게 하니 모두 천하에 영광스러운 명성을 보였다.
채중(蔡仲)
편집채숙 탁이 멀리 쫓겨났다가, 죽었다. 그 아들을 호(胡)라 불렀는데, 호는 행실을 고쳐 덕을 닦으며, 착하게 행동했다. 주공이 그 이야기를 듣고 호를 노(魯)나라의 경사(卿士)로 추천하니 노나라가 잘 다스려졌다. 이에 주공은 성왕에게 아뢰어 호를 다시 채(蔡)에 봉하여 채숙의 제사를 받들게 하니 이가 채중(蔡仲)이다. (무왕의) 나머지 다섯 형제는 모두 봉국으로 가고 천자의 관리가 된 자는 없었다.
채백(蔡伯)
편집채중이 죽고 아들 채백(蔡伯) 황(荒)이 섰다.
궁후(宮侯)
편집채백 황이 죽고, 아들 궁후(宮侯)가 즉위했다.
여후(厲侯)
편집궁후가 죽고, 아들 여후(厲侯)가 즉위했다.
무후(武侯)
편집여후가 죽고, 아들 무후(武侯)가 즉위했다.
무후 때에 주나라 여왕(厲王)이 나라를 잃고 체(彘)나라로 달아났고, 공화정(共和政)이 시행되자 많은 제후가 주나라를 배반했다.
이후(夷侯)
편집무후가 죽고 아들 이후(夷侯)가 즉위했다.
이후 11년(기원전 827년)에 주나라 선왕(宣王)이 즉위했다.
희후(釐侯)
편집28년에 이후가 죽고, 아들 희후(釐侯) 소사(所事)가 즉위했다.
희후 39년(기원전 771년)에 주나라 유왕(幽王)이 견융(犬戎)한테 살해되고, 주나라 왕실은 쇠약해져 동쪽으로 (도읍을) 옮겼다.
진(秦)나라가 비로소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공후(共侯)
편집48년에 희후가 죽고, 아들 공후(共侯) 흥(興)이 즉위했다.
공후가 2년 만에 죽고, 아들 대후(戴侯)가 즉위했다.
선후(宣侯)
편집대후가 10년 만에 죽고, 아들 선후(宣侯) 조보(措父)가 즉위했다.
선후 28년에 노나라 은공(隱公)이 즉위했다.
환후(桓侯)
편집35년에 선후가 죽고, 아들 환후(桓侯) 봉인(封人)이 즉위했다.
환후 3년에 노나라가 그들의 국군 은공을 시해했다.
애후(哀侯)
편집20년에 환후가 죽고, 동생 애후(哀侯) 헌무(獻舞)가 즉위했다.
애후 11년에 당초 애후가 진후(陳侯)의 딸을 취해 아내로 삼고, 식후(息侯)도 진후의 딸을 취했다. 식(息) 부인이 시집을 가는 길에 채나라를 거쳤는데 채후(애후)가 예의 없이 대했다. 식후가 화가 나서 초나라 문왕에게 “우리를 정벌하러 오십시오. 제가 채나라에 구원을 청하면 채나라는 분명 달려올 것입니다. 그때 초나라가 채나라를 공격하면 성공합니다.”라고 했다.
초나라 문왕이 그 말을 따라 채나라 애후를 잡아 돌아갔다. 애후는 9년을 억류되어 있다가 초나라에서 죽었다. 그는 모두 20년 동안 재위하다 죽었다.
목후(繆侯)
편집채나라 사람들이 그 아들 힐(肹)을 세우니 이가 목후(繆侯)이다.
목후는 그 여동생을 제나라 환공(桓公)의 부인으로 보냈다.
18년에 제나라 환공과 채희(蔡姬, 목후의 여동생)가 뱃놀이를 했는데, 부인이 배를 흔들었다. 환공이 그만두라고 했지만 그만두지 않자, 환공이 화가 나서 그녀를 (채나라로) 돌려보내 버렸다. 그러나 (관계를) 끊지는 않았다.
채나라 목후는 성이 나서 여동생을 (다른 곳으로) 시집보냈다. 제나라 환공이 격노하여 채나라를 정벌했다. 채나라는 무너지고 목후는 포로로 잡혔다. (제나라는 다시) 남쪽 초나라의 소릉(邵陵)까지 쳐들어갔다. 얼마 후 제후들이 채나라를 위해 제나라에 사죄하자 환공은 채나라 목후를 돌려보냈다.
장후(莊侯)
편집29년에 목후가 죽고, 아들 장후(莊侯) 갑오(甲午)가 즉위했다.
장후 3년(기원전 643년)에 제나라 환공이 죽었다.
14년(기원전 632년)에 진(晉)나라 문공(文公)이 성복(城濮)에서 초나라를 물리쳤다.
20년에 초나라 태자 상신(商臣)이 그 아버지 성왕(成王)을 시해하고, 자리를 대신했다.
25년에 진(秦)나라의 목공(穆公)이 죽었다.
33년에 초나라 장왕(莊王)이 즉위했다.
문후(文侯)
편집34년에 장후가 죽고, 아들 문후(文侯) 신(申)이 즉위했다.
문후 14년에 초나라 장왕이 진(陳)을 토벌하여 하징서(夏徵舒)를 죽였다.
15년에 초나라가 정(鄭)나라를 포위하자, 정나라는 초나라에 항복했고, 초나라는 포위를 풀었다.
경후(景侯)
편집20년에 문후가 죽고, 아들 경후(景侯) 고(固)가 즉위했다.
경후 원년에 초나라 장왕이 죽었다.
49년에 경후는 태자 반(般)을 위해 초나라에서 부인을 얻어 주었다.
영후(靈侯)
편집경후가 (그 여자, 즉 며느리와) 간통하자 태자가 경후를 시해하고, 스스로 자리에 서니 이가 영후(靈侯)이다.
영후 2년에 초나라 공자 위(圍)가 그의 왕 겹오(郟敖)를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니 이가 영왕(靈王)이다.
9년(기원전 534년)에 진(陳)나라의 사도(司徒) 초(招)가 그의 군주 애공(哀公)을 시해했다. 초가 공자 기질(棄疾)을 보내 진(陳)나라를 멸망시키고 차지했다.
12년에 초나라 영왕은 영후가 그 아버지를 시해한 일로 영후를 신(申)으로 유인했다. 병사들을 숨겨놓고 영후에게 술을 마시게 한 다음 취하게 해서는 죽이고, 병사 70명도 함께 죽였다. 공자 기질에게 채나라를 포위하도록 명령했다. 11월에 채나라를 멸망시키고, 기질을 채공(蔡公)으로 삼았다.
초나라가 채나라를 멸망시킨 지 3년 만에 초나라의 공자 기질이 그 왕 영왕을 시해하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평왕(平王)이다.
평후(平侯)
편집평왕은 채나라 경후의 어린 아들 려(盧)를 찾아내어, 세우니 이가 평후(平侯)이다. 그해 초나라 왕은 또 진(陳)나라를 다시 세웠다. 초나라 평왕이 즉위한 뒤 제후들과 가까이 지내려고 진나라와 채나라의 후손들을 다시 세운 것이다.
도후(悼侯)
편집평후는 재위 9년 만에 죽고, 영후 반의 손자 동국(東國)이 평후의 아들을 몰아내고, 스스로 자리에 서니 이가 도후(悼侯)이다.
도후의 아버지는 은태자(隱太子) 우(友)라 불렸다. 은태자 우는 영후의 태자였는데 평후가 즉위하여 그를 죽였기 때문에 평후가 죽자, 은태자의 아들 동국이 평후의 아들을 공격하고, 그 뒤를 이어 도후가 된 것이다.
소후(昭侯)
편집도후는 3년 만에 죽고 동생 소후(昭侯) 신(申)이 즉위했다.
소후 10년에 초나라 소왕(昭王)에게 조회를 드리러 가면서, 멋진 가죽옷 두 벌을 가지고 가서는 한 벌은 소왕에게 바치고, 한 벌은 자기가 입었다. 초나라의 재상 자상(子常)이 그걸 갖고 싶어 했으나, 주지 않았다. 자상이 소후에 관해 험담을 하자 (소왕은 소후를) 초나라에 3년 동안 억류했다. 소후가 진상을 알고는 바로 가죽옷을 자상에게 바쳤다. 자상은 그 옷을 받고 소후를 돌려보내라고 말했다. 소후가 돌아와 진(晉)나라에 가서 함께 초나라를 정벌하자고 청했다.
13년 봄에 위(衛)나라 영공(靈王)과 소릉에서 회맹했다. 소후는 사사로이 주나라의 장홍(萇弘)에게 위나라보다 상석을 부탁했다. 위나라는 사추(史鰌)에게 강숙의 공을 내세워 결국 상석을 차지했다. 여름에 진(晉)나라를 위해 침(沈)나라를 멸망시키자, 초나라가 화가 나서 채나라를 공격했다. 채나라 소후는 아들을 인질로 오(吳)나라에 보내어 함께 초나라를 치자고 했다. 그해 겨울에 채나라는 오왕 합려(闔閭)와 함께 초나라를 격파하고 도읍인 영(郢)까지 들어갔다. 채나라는 자상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고, 자상은 두려워 정나라로 달아났다.
14년에 오나라가 떠나자 초나라 소왕은 나라를 회복했다.
16년에 초나라 영윤(자서)은 백성을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 채나라 정벌을 꾀했고, 채나라 소후는 두려웠다.
26년(기원전 493년)에 공자(孔子)가 채나라에 갔다. 초나라 소왕이 채나라를 토벌하려 하자, 채나라는 두려워 오나라에 급히 알렸다. 오나라는 채나라가 너무 멀기 때문에 (구하기 어렵다며) 도와주기 쉽게 도읍을 오나라와 가까운 곳으로 옮길 것을 약조하라고 했다. 소후가 사사로이 허락하고, 대부들과 논의하지 않았다. 오나라가 채나라를 구원하러 오자, 그 참에 주래(州來)로 도읍을 옮겨갔다.
28년에 소후가 오나라에 조회를 드리러 가려 하자, 대부들은 다시 도읍을 옮길까 두려워 리(利)라는 도적에게 소후를 죽이게 했다. 그런 다음 도적 리를 죽여 사건을 무마시키고, 소후의 아들 삭(朔)을 세우니 이가 성후(成侯)이다.
성후(成侯)
편집성후 4년(기원전 487년)에 송(宋)나라가 조(曹)나라를 멸망시켰다.
10년에 제(齊)나라의 전상(田常)이 국군 간공(簡公)을 시해했다.
13년에 초나라가 진(陳)나라를 멸망시켰다.
성후(聲侯)
편집19년에 성후가 죽고, 아들 성후(聲侯) 산(産)이 즉위했다.
성후가 재위 15년 만에 죽고, 아들 원후(元侯)가 즉위했다.
원후는 재위 6년 만에 죽고, 아들 채후(蔡侯) 제(齊)가 즉위했다.
제(齊)
편집채후 희제 4년(기원전 447년)에 초나라 혜왕(惠王)이 채나라를 멸망시키니, 채후 희제는 도망갔다. 채나라의 제사가 마침내 끊어졌다. 진(陳)나라 보다 33년 늦게 망했다.
무왕 10형제의 후손들
편집백읍고(伯邑考)의 후손들은 어디에 봉해졌는지 알 수 없다. 무왕 발의 후손들은 주나라의 왕이 되었기에 본기가 말해준다. 관숙 선은 난을 일으켜 죽었기에 후손이 없다. 주공 단의 후손들은 노나라의 제후이기에 세가에 기록되어 있다.
채숙 탁의 후손들은 채나라의 제후였기에 세가에 있다. 조숙 진탁의 후손들은 조나라의 제후들이기에 세가에 기록되어 있다.
성숙(成叔) 무(武)의 후손들은 세상에 알려진 것이 없다. 곽숙(霍叔) 처(處)의 후손들은 진(晉)나라 헌공(獻公) 때 멸망했다. 강숙(康叔) 희봉(封)의 후손들은 위(衛)나라의 제후들이기에 세가에 나온다. 염계 재의 후손들은 세상에 알려진 바가 없다.
사마천의 논평
편집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관숙과 채숙이 난을 일으킨 것은 기록으로 남기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주 무왕이 세상을 떠나고 성왕이 어려서 천하가 의심을 하자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동생 성숙과 염계 등 열 명에게 보필하게 하여 제후들이 끝까지 주를 받들게 했다. 이에 세가에 덧붙여 기록해둔다.”
조(曹)
편집진탁(振鐸)
편집조숙(曹叔) 진탁(振鐸)은 주 무왕의 동생이다.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이기고 숙진탁을 조나라에 봉했다.
태백(太伯)
편집숙진탁이 죽자, 아들 태백(太伯) 비(脾)가 즉위했다.
중군(仲君)
편집태백 비가 죽고, 아들 중군(仲君) 평(平)이 즉위했다.
궁백(宮伯)
편집중군 평이 죽고, 아들 궁백(宮伯) 후(侯)가 즉위했다.
효백(孝伯)
편집궁백 후가 죽고, 아들 효백(孝伯) 운(雲)이 즉위했다.
이백(夷伯)
편집효백 운이 죽고, 아들 이백(夷伯) 희(喜)가 즉위했다.
이백 23년(기원전 842년)에 주나라 여왕(厲王)이 체(彘)나라로 도망갔다.
유백(幽伯)
편집30년 만에 죽고, 동생 유백(幽伯) 강(彊)이 즉위했다.
대백(戴伯)
편집유백 9년에 동생 소(蘇)가 유백을 살해하고, 자신이 뒤를 이으니 이가 대백(戴伯)이다.
대백 원년은 주나라 선왕(宣王)이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던 해이다.
혜백(惠伯)
편집30년에 대백이 죽고, 아들 혜백(惠伯) 시(兕)가 즉위했다.
혜백 25년(기원전 771년)에 주나라 유왕(幽王)이 견융(犬戎)에게 살해되고, 그로 인해 동쪽으로 옮겼는데, 날로 약해져 제후들의 등을 돌렸다.
진(秦)나라가 처음으로 제후 반열에 섰다.
석보(石甫), 무공(繆公)
편집36년에 혜백이 죽고, 아들 석보(石甫)가 즉위했으나, 그 동생 무(武)가 그를 죽이고 자리를 차지하니, 이가 무공(繆公)이다.
환공(桓公)
편집목공은 재위 3년 만에 죽고 아들 환공(桓公) 종생(終生)이 즉위했다.
환공 35년에 노나라의 은공(隱公)이 즉위했다.
45년에 노나라에서는 그의 국군 은공을 시해했다.
46년에 송나라의 화보독(華父督)이 상공(殤公)과 공보(孔父)를 시해했다.
장공(莊公)
편집55년에 환공이 죽고, 아들 장공(莊公) 석고(夕姑)가 즉위했다.
장공 23년에 제나라 환공이 처음으로 패주가 되었다.
희공(釐公)
편집31년에 장공이 죽고, 아들 희공(釐公) 이(夷)가 즉위했다.
소공(昭公)
편집희공이 재위 9년 만에 죽고 아들 소공(昭公) 반(般)이 즉위했다.
소공 6년에 제나라 환공이 채나라를 물리치고 초나라의 소릉까지 쳐들어갔다.
공공(共公)
편집9년에 소공이 죽고, 아들 공공(共公) 양(襄)이 즉위했다.
공공 16년(기원전 653년)에 진(晉)나라 공자 중이(重耳)가 도망가는 길에 한때 조(曹)나라에 들렀는데, 조나라의 국군이 무례하게도 중이의 통갈비뼈를 구경하려고 했다. 희부기가 충고했으나, 듣지 않자, (희부기는) 개인적으로 중이를 잘 대해 주었다.
21년에 진(晉)나라 문공(文公) 중이가 조나라를 토벌하여 공공을 사로잡아 데리고 가면서 군사들에게 희부기의 종족이 사는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명했다. 누군가 진나라 문공에게 “예전에 제나라 환공은 제후들과의 회맹에서 성의 다른 나라들도 회복시켜 주었는데, 지금 국군께서는 조나라의 국군을 감금하여 성이 같은 나라마저 없애 버리려하시니 이래서야 어찌 제후들을 호령하시겠습니까?”라고 했다. 진나라 문공은 곧 공공을 다시 돌려보냈다.
25년에 진(晉)나라 문공이 죽었다.
문공(文公)
편집35년에 공공이 죽고, 아들 문공(文公) 수(壽)가 즉위했다.
선공(宣公)
편집문공이 재위 23년 만에 죽고, 아들 선공(宣公) 강(彊)이 즉위했다.
성공(成公)
편집선공은 재위 17년 만에 죽고, 동생 성공(成公) 부추(負芻)가 즉위했다.
성공 3년에 진(晉)나라 여공(厲公)이 조나라를 정벌하여, 성공을 잡아 데려갔다가 얼마 뒤 풀어 주었다.
5년에 진(晉)나라의 난서(欒書)와 중항언(中行偃)이 정활(程滑)을 시켜서, 그 국군 여공을 시해했다.
무공(武公)
편집23년에는 성공이 죽고, 아들 무공(武公) 승(勝)이 즉위했다.
무공 26년에 초나라 공자 기질(棄疾)이 그의 군주 영왕(靈王)을 시해하고, 자신이 뒤를 이었다.
평공(平公)
편집27년에 무공이 죽고, 아들 평공(平公) 수(須)가 즉위했다.
도공(悼公)
편집평공이 4년 만에 죽고, 아들 도공(悼公) 오(午)가 즉위했다.
그해(기원전 524년)에 송(宋)나라, 위(衛)나라, 진(陳)나라, 정(鄭)나라가 모두 화재(火災)를 당했다.
도공 8년에 송나라 경공(景公)이 즉위했다.
9년에 도공이 송에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송나라에서 그를 가두었다.
성공(聲公)
편집조나라가 그 동생 야(野)를 세우니, 이가 성공(聲公)이다. 도공은 송나라에서 죽었고, (시신은 조나라로) 돌아와 장례를 치렀다.
은공(隱公)
편집성공 5년에 평공의 동생 통(通)이 성공을 시해하고, 대신 자리에 오르니 이가 은공(隱公)이다.
정공(靖公)
편집은공 4년에 성공의 동생인 로(露)가 은공을 시해하고, 자신이 자리에 오르니 이가 정공(靖公)이다.
백양(伯陽)
편집정공이 재위 4년 만에 죽고, 아들 백양(伯陽)이 즉위했다.
백양 3년에 나라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군자들 여럿이 사직 담장에 모여 조나라를 멸망시킬 모의를 하고 있는데 조숙 진탁이 이를 말리면서 공손강(公孫彊)이란 자를 기다리자고 하니,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날이 밝아 조나라에서 (그런 꿈을 꾼) 그 사람을 찾았으나, 그런 사람은 없었다. 꿈을 꾼 사람이 그 아들에게 “내가 죽고 공손강이란 사람이 정권을 잡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조나라를 떠나 조나라가 재앙에 빠지지 않도록 하거라”라고 경고했다.
백양은 즉위한 뒤로 사냥 같은 것을 즐겼다. 6년에 조나라의 야인(野人) 공손강도 사냥을 좋아했는데, 흰 기러기를 잡아서 백양에게 바치며 사냥의 이치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러자 (백양은) 정치에 관해 물었다. 백양은 크게 기뻐하며 공손강을 총애하고 사성(司城) 벼슬을 주어 정치 자문을 구했다. 꿈을 꾼 자의 아들이 바로 조나라를 떠났다.
공손강은 조백(曹伯, 조나라 백양)에게 패주 역할에 관해 말했다. 14년에 조백이 공손강의 말에 따라 진(晉)나라를 배반하고 송나라를 침략했다. 송나라 경공(景公)이 정벌에 나섰지만 진나라는 (조백을) 구원하지 않았다.
15년에 송나라가 조나라를 멸망시키고, 조나라 백양과 공손강을 잡아서는 죽였다. 조나라의 제사가 드디어 끊어졌다.
사마천의 논평
편집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조나라의 공공이 희부기의 말을 듣지 않고, (고위직) 대부를 300명이나 두었던 일 등을 내가 생각해보니, 덕을 제대로 세우지 않은 결과임을 알 수 있었다.
진탁이 꿈에 나타났다는 것은 조나라의 제사를 보전하고 싶어서가 아니었겠는가? 공손강이 그렇게 정치하지 않았다면, 진탁의 제사가 어찌 그렇게 빨리 끊어졌겠는가?”